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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당신이 품은 여인의 과거가…

Author: 데이지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8-11 19:05:17

세자전의 아침은 유난히 맑고 고요했다.

그 고요는 마치 폭풍 전의 바다처럼 불안한 평온이었다.

그리고 그 평온을 깨는 이는 은은한 향수를 뿌린,

붉은 연지보다도 진한 눈빛의 여인이었다.

“소희 아씨를… 들이시옵니까?”

내관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이현은 문득 손에 들고 있던 붓을 멈췄다.

잠시의 침묵. 그리고 이내, 짧은 대답.

“들이라 하라.”

소희는 금사로 수놓인 연분홍 치마를 입고 세자전으로 들어섰다.

그 발걸음은 도도했고, 눈빛은 매끄러운 유약 위로 선 뾰족한 칼날 같았다.

“저하, 오랜만에 뵙사옵니다.”

“무슨 일이오.”

이현의 태도는 냉담했다.

그러나 민소희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가서며 말했다.

“어릴 적부터 저하께선 저를 ‘소희야’라고 부르셨지요. 그 시절이 그립습니다.”

“지금은… 세자와 사대부 규수로 만난 것이니, 그 이름을 다시 부를 이유는 없소.”

그녀는 웃지 않았다.

대신 손에 감싸쥔 붉은 봉투 하나를 꺼내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이건… 정채향이라는 여인의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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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저하, 오늘은 어떤 맛을 원하시옵니까?   81. 빈궁의 자격, 국으로 짓는 이름

    그녀는 찬합을 열었다.그 속엔 흔한 듯 흔하지 않은 들깻잎 어묵탕이 담겨 있었다.맑은 국물 위로 얇게 부친 어묵과 들깻잎이 겹겹이 떠 있었고,그 사이엔 무조차 얇게 썰어 조용한 단맛을 더하고 있었다.그녀는 한 그릇을 떠 가장 앞에 앉은 노령의 대신 앞에 내밀었다.“말로는 설득하지 못할 마음이 있사옵니다.”“…그러나 이 국은 마음을 설득하려는 것이 아니라”“…그저 그 마음이 쓰리고 아플 때 덜 쓰리게 하려는 마음을 담은 것이옵니다.”노 대신은 그 말을 듣고도 한참 동안 국을 바라보기만 했다.그러다, 조심스레 숟가락을 들어 한 모금 머금었다.그리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이 국은…”“…내가 처음 벼슬에 올랐을 때, 어머니가 새벽마다 끓여주시던 그 맛과 비슷하구나.”그의 눈가엔 오래된 회한이 맺혔다.“그때 나는 나라를 위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몰랐었지.”“…하지만 지금은 그때보다 이 국이 더 깊게 스며든다.”그 순간, 조정의 기류가 달라졌다.운령은 서찰을 쥔 채, 손끝을 조용히 떨고 있었다.그녀는 알고 있었다.말보다 빠른 온기. 그것이 가장 먼저 사람의 입에 닿는다는 것을.그녀의 손끝이 봉투를 뜯으려던 그 순간, 또 다른 대신이 국을 입에 댔다.“…나는 이 국을 먹고도 그 서찰을 열 수는 없겠소이다.”“…내 입엔 이미, 이 나라의 온기가 들어왔으니.”봉투는 결국, 열리지 못한 채 상소함 위에서 조용히 식어갔다.이현은 채향을 바라보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그대의 국은 서찰보다 먼저 진실을 보여주었소.”“…이 조선은 이제, 글씨가 아닌 국으로 움직이기 시작했소이다.”해가 뉘엿뉘엿 지고, 采香堂엔 고요한 저녁 연기가 퍼지고 있었다.들깻잎의 향이 은은하게 퍼지는 가운데, 채향은 묵묵히 손질한 재료들을 다듬고 있었다.그녀의 손끝엔 주저함이 없었지만, 마음속으론 분명 작은 떨림이 있었다.바로 그때, 내관 하나가 황급히 문을 두드렸다.“빈궁마마, 운령 대비마마께서…조정 대신들 앞에서 마마의 출신을 문제삼으셨사옵니다.”채향

  • 저하, 오늘은 어떤 맛을 원하시옵니까?   80. 말보다 먼저 입을 적시는 국

    조정의 공기는 눈에 보이지 않았지만, 한낮의 바람보다 더 빠르게 방향을 틀고 있었다.사람들은 말을 아꼈다.하지만 눈빛은 이현을 향했고,빈궁 정채향의 손끝에서 나오는 국이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 사실은 더 이상 숨겨질 수 없는 진실이었다.고운령은 그 사실을 누구보다 빨리 감지했다.그녀는 방 안 깊숙한 찬장 속, 오래도록 봉인되어 있던 작은 서찰 상자를 꺼냈다.그 상자 안에는, 삼십여 년 전의 붉은 인장이 찍힌 한 장의 봉투가 들어 있었다.그 봉투는 ‘열지 말 것’이라 적혀 있었고, 누군가의 피와 함께 묻혀 있었다.“…이제야, 그 마지막 맛을 꺼내야 할 때로구나.”그녀는 서찰을 천천히 꺼냈다.그 속에는, 한 명의 이름과, 왕실의 피줄을 의심케 하는 출생 기록이 붓글씨로 또렷이 남겨져 있었다.고운령은 손끝을 떨며 그 서찰을 덮었다.“이 글씨 하나면, 이현도, 채향도, 모두 다시 땅바닥으로 떨어뜨릴 수 있어.”“…사람의 국이 아무리 따뜻하다 해도”“…피로 쓰인 글씨 앞에선 차가울 수밖에 없지.”그녀는 사가의 안마당을 걷기 시작했다.그 걸음은 조용했고, 그 얼굴에는 오랜 세월 감추어온분노와 애증이 섞인 독기가 서려 있었다.한편, 궁 안의 采香堂. 채향은 다시 국을 끓이고 있었다.오늘의 국은 미역과 두부,그리고 소금 한 줌으로만 맛을 낸 속을 달래는 국이었다.“사람은 기쁠 때보다, 슬플 때 국을 찾는다 했사옵니다.”“…오늘은 왠지, 그 말이 떠오르옵니다.”그녀의 옆에서 이현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나도 같은 생각이오.”그는 찬합 뚜껑을 닫으며 말을 이었다.“고운령이 움직였소.”“…이번엔, 피를 쥐고.”채향은 눈을 들었다.“피…라 하시면…”“왕실의 오래된 기록을 손에 넣었소.”“…그 기록이 열리면, 누군가의 존재 자체가 무너질 수도 있어.”그 말에 채향의 손끝이 잠시 멈췄다.그녀는 오래 생각하듯 말없이 솥을 저었다.그리고 국을 작은 그릇에 담아, 이현 앞에 조용히 내밀었다.“속이 쓰릴 때는, 기

  • 저하, 오늘은 어떤 맛을 원하시옵니까?   79. 采香堂의 창문 사이로 해가 부드럽게 스며들었다.

    그 빛은 불처럼 타오르지 않고, 솥 안의 온기처럼 천천히 고였으며,창호지를 타고 두 사람의 어깨에 나란히 내려앉았다.채향은 눈을 떴다. 곁엔 이현이 있었다.그는 의자에 기대어 잠든 채였고, 그 손엔 아직도 채향이 밤새 덮어준 홑이불 끝자락이 쥐어 있었다.그 모습은 마치 한밤중 내내 자신의 자리를 놓치지 않겠다는 조용한 맹세 같았다.채향은 그의 손끝을 조심스레 쓸었다.“…이현.”그 이름은 처음으로, 아무런 망설임 없이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이현은 눈을 떴다.“벌써 새벽이오?”“아니옵니다. 이제 아침이 옵니다.”“…하지만 이 아침은 처음으로 그대 곁에서 맞이한 아침이옵니다.”이현은 조용히 웃었다.그리고 손을 뻗어, 그녀의 손등을 덮었다.“이제는 내 아침이 그대의 국으로 시작되기를 바라오.”그 짧은 대화는 어떤 서약보다 고요하고 강했다.그러나 그 순간, 采香堂 문 앞에 급한 발걸음 소리가 닿았다.소윤 상궁이 다급히 안으로 들어섰다.“세자저하… 아닙니다, 폐하. 궁 밖 외궁에서 사가의 정계와 일부 대신들이‘책봉 무효’를 주장하는 상소를 준비 중이라 하옵니다.”이현의 미간이 살짝 구겨졌다.“외궁… 고운령이 드디어 마지막 칼을 빼들었군.”채향은 문득 멈칫했다.“…폐하의 자리를, 다시 뒤흔들려는 것이옵니까?”“그렇소.”“…이번엔 그대가 아닌, 나를 무너뜨려 궁의 기반 자체를 흔들 생각이겠지.”이현은 조용히 일어섰다.“하지만, 이번엔 국도 정무도, 그대와 함께 감당하겠소.”그날 오후, 운령의 사가와 관련된 외궁 대신들의 모임이 비밀리에 열린다는 소식이 입수됐다.이현은 채향에게 조용히 말했다.“采香堂에서 국을 차리시오.”“…허나 이번엔, 궁 안이 아닌 밖에서 먹일 국이오.”채향은 눈을 크게 떴다.“밖이라니… 사가의 문을 열고 나간다는 말씀이시옵니까?”“조선의 국이, 조선 궁 안에만 머물 수는 없소.”“…그대의 국이 사람을 살린다면, 이번엔—조선을 살릴 수 있지 않겠소?”채향은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그리하겠

  • 저하, 오늘은 어떤 맛을 원하시옵니까?   78. 너라는 맛, 그 하나면 족하오

    기름지지 않은데 고소하고, 향이 없는 듯 깊은 이 국이 어디선가 본인도 모르게 입 안 가득 퍼져 있었다.그는 찬합을 내려다보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입이 거절하지 않았소.”“…그것은 이국의 음식이 아니라, 몸이 기억한 맛이었소.”채향은 고개를 숙였다.“이 국은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고”“…누구의 몸에든 스미기를 바란 국이옵니다.”그 순간, 연회의 공기는 달라졌다.사신은 찬합을 비우고 난 후, 정중히 이현에게 고개를 숙였다.“이 빈궁은 조선의 입만이 아니라, 사람의 몸을 이해하는 솥을 가졌소이다.”그 말은 연회장을 채운 모든 대신에게 하나의 외교적 선언과도 같았다.이현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사람의 국은 국경을 넘을 수 있소.”그날 오후, 운령은 자신이 준비한 상소를 찢었다.그 속엔 ‘빈궁의 무능’이라는 글귀가 사라지지 않는 붓으로 씌어 있었지만이제는 아무도 그것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采香堂엔 저녁 볕이 들었다.채향은 다시 찬방 앞에 앉아 천천히 들깨를 볶았다.그 고소한 향은 오늘만큼은, 조선을 넘어 사람의 마음 속까지 퍼지고 있었다.采香堂엔 깊은 밤이 깃들고 있었다.궁 전체가 조용히 숨을 죽이고,이제는 어느 곳에서도 북만국의 사신 이야기가 들려오지 않았다.찬방 앞, 채향은 망설이다가 남은 들깻국을 다시 데우고 있었다.그 국은 더 이상 조정을 움직일 일도 없고, 누군가의 검증을 받을 필요도 없었다.다만, 오늘 하루 자신이 살아 있음에 작은 위안을 삼기 위한 국일 뿐.그때, 문이 열렸다. 이현이었다.하지만 오늘의 이현은 세자의 품계도, 왕세자전의 위엄도 없었다.그는 연회 때 입었던 흰 옷 그대로,손에는 아무것도 들지 않은 채 조용히 그녀를 향해 걸어왔다.“오늘은… 무엇을 데우고 계시오?”채향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다 조용히 대답했다.“식은 국이옵니다.”“…하지만 식었어도, 속을 데울 수 있는 밤이 있사오니”“…그 밤을 위하여, 다시 데우고 있었사옵니다.”이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 곁에

  • 저하, 오늘은 어떤 맛을 원하시옵니까?   77. 낯선 입에 머문 국, 조선을 살리다

    연회가 끝난 다음 날 아침, 采香堂의 마루 끝엔 낯선 기척이 있었다.채향은 고개를 들었고, 그 문 앞에는 뜻밖에도 이현이 서 있었다.그는 군복도 아니고, 의관도 아니며, 그저 백의(白衣) 차림의 사내였다.“…오늘은 궁의 주인이 아닌 사내로 왔소.”채향은 무릎을 꿇고 인사했지만, 그는 조용히 손을 뻗어 그녀를 일으켰다.“나는… 그 연회를 봤소이다.”“…그 상에 올라온 국, 그 국을 앞에 두고 울던 궁녀…”그의 목소리는 낮고 조심스러웠다.“그 국 하나로, 사람이 제 이름을 찾고, 제 손을 쓸 수 있다는 걸…”“…내 생애 처음 본 일이었소.”그 말에, 채향은 잠시 고개를 숙였다.“허나… 죄송하옵니다.”“…그 상은 높은 이께 올리기엔 너무 작고 초라한 국이었사옵니다.”이현은 고개를 저었다.“그대가 빈궁에서 지은 국은 조선 어느 국보다 크고 깊었소이다.”“…내 비록 국정을 논하고, 전장을 살피는 사내라 하나”“…입 하나에 담긴 그리움의 무게를 감히 넘보진 못하겠소.”그 말은 처음이었다.이현이 스스로 빈궁의 국 앞에 자신을 낮춘 순간이었다.그날의 대화는 길지 않았지만, 그 속엔 이전과는 다른 숨결이 흐르고 있었다.그러나, 그 저녁의 평온은 오래가지 않았다.정무각에 고운령이 직접 올린 비밀 상소가 도착한 것이다.‘세자빈 정채향은 내명부를 어지럽힐 뿐 아니라,그 아비 정윤백이 지난날 외척의 죄로 유배되었음을 숨기고 왕실의 혈통에 흠을 남기려 하였사옵니다.’그 상소는 명확했다.채향의 아비는 조선 선왕 시절, 금군의 식량을 착복했다는 죄로 유배된 자였고, 그 죄는 한 번도 공적으로 용서받은 적 없는 죄목이었다.조정은 흔들렸고, 내명부는 술렁였으며, 민심도 조용히 돌아서기 시작했다.采香堂에 도착한 이 소식을 들은 순간, 채향은 더는 피하지 않았다.그녀는 조용히 찬방으로 걸어 들어갔다.그곳에서 쌀과 된장, 무, 그리고 묵은지를 꺼냈다.“오늘은 ‘속풀이국’을 지을 것이옵니다.”“…속을 앓는 자들이 많사오니, 이 국이 그들을

  • 저하, 오늘은 어떤 맛을 원하시옵니까?   76. 국은 죄를 덮지 않사오나, 마음은 덮을 수 있사옵니다

    그녀는 이름도 자리를 묻지 않았고, 그저 손을 덜덜 떨며 음식을 입에 넣었다.채향은 웃지 않았다.다만 깊이,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았다.그때, 그 상 옆자리에 앉은 또 다른 궁녀, 단이는 미묘하게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그녀는 고운령 측에서 密命을 받은 자였다.“빈궁에서 무슨 음식이 오르며, 누구를 곁에 들이는지 그 모든 걸 말하라.”단이는 처음엔 두려웠고, 그 후엔 혼란스러웠고, 지금은… 마음이 흔들렸다.그녀가 이곳에서 본 것은 권력이 아니라, 손으로 국을 짓는 여인의 뒷모습이었기 때문이었다.그날 밤, 연회가 끝나고 모두 물러간 뒤,단이는 조심스레 채향의 방 앞에 섰다. 그 손엔 운령이 건넨 봉투가 쥐어져 있었고, 심장은 뚝뚝 떨리고 있었다.그때, 문이 열렸다.채향은 등불 하나만 켜둔 채 조용히 앉아 있었다.그녀는 단이를 보자 말없이 찻잔을 내밀었다.“오늘, 다들 입을 통해 마음을 나누었으니…”“…그대도 그 잔으로 자신의 마음을 덜어내보시옵소서.”단이는 봉투를 내려두었다.“…마마. 저… 폐하께서 아시면 안 되는…”그녀는 더 말하지 못했다.그저 울었고, 채향은 다가가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사람은 죄를 짓기도, 마음을 돌리기도 하옵니다.”“…헌데 국이란, 죄의 입에도 따뜻할 수 있어야 하옵니다.”그 말에, 단이는 봉투를 찢었다.그리고, 조용히 무릎을 꿇었다.“이 국의 곁에서 살고 싶사옵니다.”채향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그날 밤부터 단이의 손엔 국자 하나가 들려 있었다.그녀는 이제, 채향의 곁에서 하루에 한 그릇씩 국을 배워가기 시작했다.背叛이 아니라, 국으로 맺은 충심의 시작이었다.연회가 끝난 다음 날 아침, 采香堂의 마루 끝엔 낯선 기척이 있었다.채향은 고개를 들었고, 그 문 앞에는 뜻밖에도 이현이 서 있었다.그는 군복도 아니고, 의관도 아니며, 그저 백의(白衣) 차림의 사내였다.“…오늘은, 궁의 주인이 아닌 사내로 왔소.”채향은 무릎을 꿇고 인사했지만, 그는 조용히 손을 뻗어 그녀를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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