ログイン제2장
5년이란 세월은 세상이 뒤바뀌기에 충분한 시간이었지만, 이미 썩어버린 상처를 치유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었다.
카산드라 퀸은 뒷골목의 붉은 네온사인 불빛 아래에서 얇은 코트 옷깃을 여몄다. 수도에서 가장 번화한 구역에 위치한 이 고급 클럽은 그녀 같은 여자에게 그리 친절한 공간이 아니었다. 하지만 거대 기업들이 지배하는 이 도시에서, VVIP 클럽은 거액의 현금을 가장 빠르게 손에 쥘 수 있는 최선의 장소였다.
"오늘 밤엔 두둑한 보너스를 받게 될 거다, 카시."
구두쇠로 소문난 바 지배인이 그녀에게 작은 메모를 건네며 말했다.
카시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고는 미간을 찌푸린 채 종이를 바라보았다.
"왜 저인가요, 지배인님? 저는 일반 구역 바텐더일 뿐이에요. 중요한 손님들을 모시는 VVIP 바텐더가 아닌데요."
지배인은 코방귀를 뀌며 복도 끝, 붉은 벨벳 카펫이 깔린 프라이빗 통로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불평 말고 들어가. 안에 몰렌스 킹스턴 그룹의 귀한 손님들이 와 계신다. 아주 비싼 와인을 주문하셨어. 네 2년 치 월급을 꼬박 모아도 와인 한 병 못 사. 멍청하게 굴지 말고 이 기회를 잡아. 이번 달에 모아야 할 돈도 많다면서?"
몰렌스 킹스턴 corporate의 이름을 듣는 순간, 카시의 심장이 가쁘게 뛰기 시작했다.
설마 그 안에 있는 사람 중 한 명이 전남편인 걸까?
5년 전의 기억들이 순식간에 머릿속을 집어삼켰다.
당시 겨우 두 살이었던 어린 딸 칠리는 담도 폐쇄증 진단을 받았고, 수십만 달러에 달하는 간 이식 수술이 시급했다. 그 시절 데바트라는 한 푼도 벌어다 주지 못하는 사랑을 위해 승계권마저 포기한, 한낱 클럽 바텐더에 불과했다.
그때 데바트라의 부모인 요반 몰렌스와 나이마 몰렌스가 나타나 악마의 계약을 내밀었다.
'데바트라의 삶에서 사라져라. 그가 너를 뼈저리게 미워하게 만들어서, 다시 돌아서서 몰렌스 가문을 이끌도록 해. 데바트라가 제자리로 돌아간다면 네 딸의 회복은 완벽히 보장해주마. 만약 그의 곁에 남겠다면, 네 손으로 딸을 죽게 만드는 셈이다.'
딸의 목숨을 위해 카시는 현실에 굴복하기로 결심했다.
친권 포기 양육권 법적 합의서에 서명하고, 칠리가 몰렌스 가문의 최고 의료진과 자원 속에서 치료받을 수 있도록 넘겨주었다.
하지만 카시는 딸을 영원히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지난 5년 동안 그녀는 이 고급 클럽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해왔다.
정직원 일자리로 기본 생활비를 충당할 수는 있었지만, 몰렌스 가문이 매수할 수 없는 최고 수준의 독립 변호사를 고용하려면 이곳을 찾는 재벌들이 뿌리는 거액의 팁이 필요했다. 오직 깨끗한 법적 절차를 통해서만 칠리의 양육권을 되찾아올 수 있었다.
"알겠습니다, 지배인님. 제가 서빙할게요."
카시는 모든 감정을 평정심이라는 가면 뒤로 숨기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고가의 와인 병을 은쟁반 위에 올렸다.
'VVIP 1'이라는 글자가刻印된 떡갈나무 문에 가까워질수록, 그녀는 마음을 더욱 독하게 먹었다.
문이 열렸다.
지극히 의연한 태도를 유지하려 애쓰며 그녀가 입을 열었다.
"실례합니다, 손님. 주문하신 음료 나왔습니다."
그녀는 최대한 프로페셔널하게 보이도록 노력했다.
한 걸음.
두 걸음.
그리고 순간, 그녀의 다리가 그대로 굳어버렸다.
룸 깊숙한 곳, 고급스러운 검은 가죽 소파 위에 거만하게 앉아 긴 다리를 꼬고 있는 한 남자가 있었다. 최고의 테일러가 맞춘 완벽한 쓰리피스 슈트를 입은 모습. 한때 땀 냄새가 진동하던 싸구려 바텐더 유니폼의 흔적은 온데간데없었다.
데바트라 몰렌스 킹스턴이었다.
"이거 참, 아주 흥미로운 깜짝 선물이군."
차가운 목소리가 숨 막히는 침묵을 단숨에 깨뜨렸다.
데바트라는 빈 유리잔을 천천히 돌리며, 서리 가득한 눈빛으로 카시를 쏘아보았다.
"오늘 밤 VVIP 바텐더가 알고 보니... 억만장자의 전처라니 말이야."
카시는 침을 꼴깍 삼켰다.
당황한 기색을 숨기기 위해 은쟁반을 더욱 세게 움켜쥐었다.
'맙소사... 무슨 이런 운명이 다 있지? 왜 하필 이렇게 빨리 그와 다시 만나야 하는 거지?'
"안녕하십니까, 손님. 주문하신 와인입니다."
카시의 목소리는 담담하고 단단했다.
그녀는 애써 허리를 곧게 펴고 섰다.
자신을 쓰레기 보듯 바라보는 남자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술이나 따라, 바텐더. 몰렌스 대표님을 기다리시게 하지 말고."
데바트라의 비즈니스 파트너 중 한 명이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개입했다.
"몰렌스 대표님을 모시고 나면, 우리 모두를 위해 특별한 서비스라도 제공해 줄 수 있는 거 아닌가?"
여기저기서 낮은 야유와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데바트라는 침묵을を守った 채, 사람들이 자신의 앞에서 카시의 존엄을 짓밟으려는 모습을 비웃음 섞인 미소로 즐기고 있었다.
카시는 단호한 걸음걸이로 다가갔다.
수천 달러를 호가하는 와인 병을 들고 잔을 하나씩 채워 나갔다.
마지막 잔에 다다를 때까지.
바로 데바트라의 잔이었다.
5년간의 증오가 꾹꾹 눌러 담긴 남자의 어두운 눈빛이 그녀의 눈과 정면으로 부딪혔다.
그 강렬한 위압감에 카시의 심장이 요동쳤고, 순간 흔들린 감정 탓에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피처럼 붉고 어두운 붉은 와인이 데바트라의 티 한 점 없던 흰 셔츠와 고가의 슈트 위로 쏟아졌다.
" 이런 제길!"
파트너 중 한 명이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카시는 서둘러 와인 병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상황을 수습하려 애쓰며 그녀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죄송합니다, 몰렌스 대표님... 정말 일부러 그런 게 아닙니다."
데바트라는 두 손으로 테이블을 내려치며 섬뜩한 속도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시가 물러설 틈도 없이, 남자의 강인한 손가락이 그녀의 턱을 낚아채 벽면 장식재 쪽으로 거칠게 밀어붙였다.
"윽!"
데바트라의 엄지손가락이 목을 압박해 오자 카시의 숨이 턱 막혔다.
"일부러 그랬나, 카산드라?"
그가 그녀의 얼굴 가까이 다가와 나지막이 읊조렸다.
" 그거 알아? 이 슈트 한 벌 값이 5년 전 네가 시어러 CEO에게 팔아넘긴 그 잘난 자존심보다 더 비싸. 네 1년 치 바텐더 월급을 몽땅 털어도 내 손해를 메우진 못할 거다."
카시는 울지 않았다.
그녀는 담대하게 두 손으로 데바트라의 손목을 잡고, 두려움의 기색이라곤 전혀 없이 그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용서해 주십시오, 대표님..."
그녀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그 더러운 입에서 나오는 사과 따위 필요 없어!"
데바트라는 고함을 지르며 그녀를 거칠게 밀쳐냈다.
카시는 뒤로 밀려났지만 간신히 균형을 잡았다.
붉게 부어오른 목을 감싸 안은 채, 그녀는 턱을 당당하게 든 상태로 바르게 서 있었다.
데바트라가 그녀 앞에 위압적으로 서서 말을 이었다.
"이 슈트에 대한 배상금은 10만 달러다, 카산드라. 지금 당장 지불해."
카시는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지금 당장 그런 거액의 현금은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몰렌스 대표님."
"우습지도 않군."
데바트라는 짧게 실소를 터뜨렸다.
그는 한 걸음 다가가 그녀의 턱을 잡아 강제로 자신을 바라보게 만들었다.
"호화로운 삶을 살고 싶다고 절박하게 울부짖던 그 여자는 어디로 갔지? 앨런에게서 받아낸 그 수백만 달러는 다 어디 두고, 왜 지금은 술 한 잔 제대로 못 따르는 비참한 바텐더 따위로 전락해 있는 거냐?"
카시는 입을 다물고 그의 모욕을 그대로 흘려보냈다.
도발에 넘어갈 수는 없었다.
5년 동안 데바트라의 가슴속에 쌓여 있던 모든 증오는 한순간에 폭발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옆에 있던 은쟁반을 발로 차버렸고, 쟁반은 굉음을 내며 공중으로 날아갔다.
카시는 모든 자존심을 눌러 담았다.
증오에 눈이 먼 데바트라에게 진실을 설명해 봤자, 동정을 구걸하는 절박한 핑계로밖에 들리지 않을 터였다.
그리고 그녀에게는 마지막 자존심이 있었다.
구걸할 생각 따위는 없었다.
"동정이라도 바라는 건가?"
데바트라의 얼굴에 잔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와인이 반쯤 남아 있는 유리잔을 집아 들었다.
" 자. 이거 단숨에 비워라."
카시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붉은 액체를 바라보았다.
이처럼 위험한 장소에서, 그녀가 스스로의 안전을 위해 절대로 어기지 않는 철칙이 하나 있었다.
'단 한 방울의 알코올도 입에 대선 안 돼.' 그녀는 스스로에게 단호하게 되뇌었다.
'만약 이 클럽에서 술에 취해 정신을 잃는다면, 탐욕스럽고 몰염치한 이 사업가들이 나를 마음대로 유린하고 내 존엄을 짓밟을 테니까.'
카시는 턱을 높이 들고 주저 없이 데바트라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죄송합니다, 몰렌스 대표님. 저는 근무 중에 술을 마시지 않습니다."
데바트라는 몇 초 동안 침묵을 지키며 그녀를 관찰했다.
자신의 위압감에도 전혀 굴하지 않는 카시의 단호함은 그의 분노를 더욱 부채질할 뿐이었다.
마침내 그는 잔을 테이블 위에 쾅 소리가 나게 내려놓았다.
"좋아. 그럼 훨씬 더 흥미로운 제안을 하지."
그의 얼굴에 느릿하고 위험한 미소가 번졌다.
그는 탐욕스러운 눈빛으로 자신들을 지켜보고 있던 남자들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옷을 벗어. 여기서. 지금 당장. 나와 내 파트너들 앞에서. 완전 알몸이 된다면, 슈트 값 채무를 탕감해 주는 것은 물론이고, 너에게 100만 달러를 주지."
그토록 굴욕적인 모욕에 카시의 심장이 크게 흔들렸다.
과거 그녀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온 힘을 다했던 남자가, 이제는 까마득한 타인들 앞에서 자신을 한없이 낮추라고 요구하고 있었다.
제35장알란의 따스한 품 덕분에 캐시의 가슴을 짓누르던 묵직한 무게감이 조금씩 줄어들었다. 그녀의 울음소리가 점차 가라앉았고, 목구멍에 갇혀 있던 몇 번의 삼켜진 흐느낌만이 나지막이 남았다. 그녀는 천천히 몸을 떨어뜨리고는 창백한 뺨을 여전히 적시고 있던 마지막 눈물을 닦아냈다."이제 마음이 좀 좀 풀렸어, 캐스?" 알란이 밤바람에 흐트러진 머리칼을 다정하게 쓸어 넘겨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캐시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미안해, 알란. 아까는 감정을 전혀 제어하지 못했어. 그냥… 막다른 길에 다다른 기분이라서.""이해해," 알란이 그녀를 아껴주는 기색이 가득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대답했다. 그는 차갑게 식어 있던 캐시의 손을 자신의 손으로 감싸 잡았다. "잘 들어, 캐스. 내가 아무 이유 없이 이 도시에 돌아온 게 아니야. 해외에서 내 금융회사가 번창했고, 이제 5년 전보다 훨씬 단단한 입지를 구축했어."캐시는 의아한 표정으로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그를 바라보았다."그 말은 즉, 이제 데바트라한테서 칠리의 양육권을 되찾아올 수 있는 법적 자원과 경제적 능력을 내가 갖추게 되었다는 뜻이야." 알란이 확신을 주려는 듯 한 마디 한 마디에 힘을 실어 말을 이었다. "더 이상 이딴 클럽에서 웨이터 일이나 하며 자신을 낮출 필요 없어, 캐스. 모든 건 나한테 맡겨."그 관대한 제안을 들은 캐시는 알란의 따스한 손길에서 자신의 손을 천천히 거두었다. 표정에는 씁쓸함이 역력했지만, 그녀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안 돼, 알란. 너한테 더 이상 짐을 지우고 싶지 않아. 지난 5년 동안 넌 이미 나 때문에 너무 많은 걸 희생했잖아. 칠리 일은… 엄마로서 내가 마땅히 치러내야 할 싸움이야.""짐이라니?" 알란이 가볍게 웃음을 터뜨리며 동의할 수 없다는 강렬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캐시, 난 단 한 번도 네가 짐이라고 생각한 적 없어. 처음부터 널 지키는 건 내가 스스로 선택한 길이었으니까. 그러니 부탁인데, 이번만큼
제34장클럽에서 멀어지는 캐시의 걸음걸이는 비틀거리고 위태로웠다. 밤의 차가운 공기가 살갗을 파고들었지만, 그 추위도 그녀의 마음을 지키던 성벽이 무너져 내린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창백한 얼굴을 눈물로 적시며 소리 없이 오열했다. 데바트라와의 충돌이 남긴 고통과 수치심, 그리고 정신적인 피로감이 혈관을 타고 흐르는 독약처럼 온몸으로 퍼져나갔다.희미한 가로등 불빛 아래, 캐시는 가쁜 숨을 가다듬기 위해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세상이 너무나 야속하게 느껴졌다. 온 힘을 다해 지켜왔던 칠리에 대한 진실이,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남자에게는 아무런 가치도 없는 쓰레기 취급을 당했으니 말이다.그때, 어두운 색의 세단 한 대가 그녀가 서 있던 인도 가장자리에 급히 멈춰 섰다. 문이 열리고 고급 수트를 차려입은 한 남자가 서둘러 내렸다."카산드라?"캐시는 깜짝 놀랐다. 고개를 들자 눈물로 퉁퉁 부은 눈에 너무나 익숙한 얼굴이 들어왔다."알란?"알란 쉬러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과 거대한 기쁨이 뒤섞인 얼굴로 잠시 얼어붙어 있었다."세상에… 정말 너였구나. 이렇게 빨리 너를 찾게 될 줄은 몰랐어."알란은 두번 생각할 것도 없이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가 팔을 벌렸다.모든 일에 완전히 지쳐버린 데다 안식처를 절박하게 찾고 있던 캐시는 자존심도 이성도 모두 내려놓았다. 그녀는 그를 향해 달려가 품에 안겼고,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서럽게 울음을 터뜨렸다. 마치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다 한가운데에서 그가 유일한 구명뼛줄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를 꼭 끌어안았다."알란… 모든 게 다 무너졌어…" 알란의 셔츠에 묻힌 캐시의 목소리가 먹먹하게 울려 퍼졌다.알란은 그녀의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그의 눈빛에는 안타까움과 그녀를 지켜주고 싶다는 깊은 열망이 서려 있었다."괜찮아, 캐스. 내가 있잖아. 다시는 그 누구도 너한테 상처 주지 못하게 할게."하지만 클럽 주차장 구석의 어둠 속에서, 매처럼 날카로운 눈동자 한 쌍이 그 광경을 소름 끼칠
제33장방 안을 감싸던 정적은 어느덧 시계의 째깍거리는 소리만이 나지막이 울릴 정도로 아득해졌고, 두 사람의 여전히 가쁜 숨소리와 뒤섞여 갔다.캐시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피가 눌러붙기 시작한 데바트라의 손목을 여전히 꼭 쥔 채였지만, 창백한 뺨을 적시던 눈물을 훔쳐냈다."데바트라…" 가슴을 죄어오는 답답함에 떨리는 거친 목소리로 그녀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강렬하게 빛나는 그의 매 같은 눈을 직시하며 말을 이었다. "네가 아주 조금이라도 눈을 열어볼 마음이 있다면… 내가 절대로 내 의지로 떠난 게 아니라는 걸, 하물며 우리 딸을 버린 건 더더욱 아니라는 걸 알게 될 텐데."데바트라는 대답하지 않았다.하지만 갈수록 차갑고 어둡게 가라앉는 눈빛 속에서, 그의 턱 근육이 다시금 팽팽하게 경직되었다."5년 전… 칠리가 어떤 상태였는지 너 스스로도 잘 알고 있잖아. 병원에서 사경을 헤매며 위독한 상태였어, 기억 안 나?" 캐시는 눈에 다시 차오르는 눈물을 참아내며 힘겹게 침을 꼴깍 삼켰다. "네 부모님이 날 협박했어, 데브. 네가 없는 사이에 날 찾아왔다고. 내가 네 곁에 계속 남아있다면, 칠리의 목숨을 살릴 그 비싼 치료비를 절대로 대주지 않겠다고 했어."캐시의 손가락이 5년 전 느꼈던 어마어마한 공포를 전달하려는 듯 데바트라의 손을 더욱 세게 감싸 쥐었다."칠리의 목숨을 위해서… 우리 딸이 살아서 네 가문의 힘으로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의술을 받게 하려고… 난 연기를 해야만 했어. 그 더러운 불륜 누명을 억지로 뒤집어쓰고 너희 곁을 떠나야만 그분들이 우리 딸을 살려주겠다고 했으니까. 오직 아이를 살리기 위해서 그 모든 걸 견뎌낸 거란 말이야, 데브!"공기가 몇 초간 그대로 얼어붙었다.캐시는 남자의 눈에서 단 한 조각의 뉘우침이라도 찾기를 바라며 희망을 담아 그를 바라보았다."하… 하… 하…"낮은 웃음소리가 정적을 깨뜨렸다.데바트라가 고개를 들며 폭소를 터뜨렸다. 비꼬는 기색과 경멸로 가득 찬 쓰라린 웃음소리가 너무나도 섬뜩하여 캐시의 피
제32장캐시의 손가락이 티크나무 문의 차가운 손잡이에 막 닿았을 때, 뒤에서 거세게 잡아채는 힘이 또다시 그녀의 자유를 빼앗아 갔다. 데바트라는 번개처럼 빠르게 움직여 강인한 팔로 그녀의 가녀린 허리를 감싸 안았다."이거 놓아! 데바트라, 이거 놓으라고!" 전남편의 미친 짓에 계속해서 치솟는 스트레스와 답답함에 짓눌린 캐시가 가쁘게 숨을 내쉬며 소리쳤다.그녀의 몸부림도, 자신의 팔을 향해 내려치는 약한 매질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데바트라는 그녀를 단번에 안아 올렸다. 단 한 번의 동작으로 그녀를 마치 죄수처럼 한쪽 어깨에 둘러메고는,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VIP 룸의 우아한 파티션 뒤에 숨겨진 프라이빗 휴게실 안으로 들어섰다."나 내려놓아, 데바트라! 너 진짜 완전히 미친 거 아니야?!" 캐시가 여전히 손에 쥐고 있던 은쟁반으로 남자의 넓은 등을 내려치며 소리쳤고, 요란한 금속음이 울려 퍼졌다.데바트라는 방 안쪽 나무 문에 그녀를 바짝 밀쳐 세웠고, 문은 이내 둔탁한 소리를 내며 닫혔다.그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지난 5년 동안 자신의 마음속 모든 구석을 차지하고 있던 여인에게 또다시 거절당하는 것만큼은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그는 캐시의 머리 양옆으로 두 손을 짚어 그녀를 문과 자신 사이에 가두어 버렸고, 단 한 뼘의 도망칠 공간조차 주지 않았다." 그래, 나 미쳤어! 그리고 날 이렇게 만든 건 바로 너야, 카산드라!" 분노와 상처받은 자존심으로 붉게 충혈된 눈을 한 그가 이를 악물고 쏘아붙였다.캐시가 채 대답하기도 전에, 데바트라는 고개를 숙여 격렬하고 절박하며 소유욕에 사로잡힌 키스로 그녀의 입술을 막아버렸다. 그는 이성의 통제를 완전히 잃고 말았다. 수년 동안 자신을 갉아먹었던 모든 절망을 입술 위에 쏟아내려는 듯, 살짝 부어오른 그녀의 입술을 거의 야성적인 격정으로 탐해 들어갔다.하지만 이번에는 아무런 저항도 없었다.어제처럼 깨물지도 않았다.포기한 듯한 응답도, 한때 존재했던 사랑의 흔적조차도 없었다.캐시는 그저 완벽하게
제31장밤이 깊어 갈수록 캐시가 일하는 클럽의 분위기는 한층 더 광란으로 치달았다. 쿵쿵 울리는 베이스 음악 소리가 벽면을 진동시켰고, 이미 술기운에 취해 비틀거리기 시작한 바람둥이 남자들의 요란한 웃음소리가 뒤섞여 어지러웠다.노출은 적지만 몸매가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웨이터 유니폼을 입은 캐시는 바 테이블 위에 흘려진 술 자국을 빠른 손길로 닦아냈다. 지친 손으로 걸레를 꽉 움켜쥔 그녀는 온종일 지한의 부티크에서 스케치를 그리며 쌓인 피로를 쫓아내려 애쓰고 있었다."거기 웨이터! 이 위스키 3번 VVIP 룸으로 가져가." 바 카운터 뒤에서 매니저가 엄한 목소리로 명령하며, 고급 위스키 한 병과 두 개의 크리스털 잔이 올려진 은쟁반을 내밀었다."네, 알겠습니다." 캐시가 순종적으로 대답했다.그녀는 두 손으로 쟁반을 단단히 받아 들고, 스테이지를 가득 메운 인파 사이를 조심스럽게 헤쳐 나갔다. 전날 당한 일 때문에 절뚝거리는 다리에 여전히 통증이 남아있었지만, 일을 완벽하게 해내기 위해 그 통증조차 참아내야만 했다.캐시는 일반 구역보다 훨씬 정적만이 감도는 VVIP 룸 전용 복도로 향하는 계단을 올랐다.똑, 똑.3번이라고 적힌 오크나무 문을 부드럽게 두드린 캐시는 팔꿈치로 문을 밀어 열었다."실례합니다, 주문하신 위스…"말이 목구멍에서 막혀버렸다.그녀의 온몸이 문턱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어스름한 방 안에는 그녀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압도적인 체구의 남자가 앉아 있었다.데바트라 몰렌스.그는 검은 가죽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앉아 있었다. 단추 두 개를 가볍게 풀어 헤친 흰 셔츠 차림은 위협적이면서도 위험할 정도로 치명적인 매력을 풍겼다.그의 날카로운 매의 눈이 문을 열고 들어온 캐시를 향해 즉시 꽂혔다.그는 혼자가 아니었다.그의 곁에는 웃으며 대화를 나누고 있는 두 명의 외국인 바이어가 함께 있었다."거기 둬." 데바트라가 차갑고 절대적인 위엄이 실린 묵직한 중저음으로 명령했다.캐시는 침을 꼴깍 삼켰다.그녀는
제30장'J-패션'의 유리문 위에 달린 종이 다시 한번 은은한 소리를 내며 부티크의 평화로운 정적을 깨뜨렸다.마네킹 옆에서 브로케이드 레이스 샘플 여러 개를 정돈하고 있던 캐시는, 상류층 고객을 맞이하기 위해 이미 몸에 밴 전문적인 태도로 즉시 몸을 돌렸다."어서 오세요, J-패션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말문이 그녀의 목구멍에서 턱 막혀버렸다.무시할 수 없는 오만함으로 방금 막 걸어 들어온 여인을 알아보자, 그녀의 갈색 눈동자가 크게 떠졌다.조야 이본이었다.얼굴의 반을 가리는 커다란 선글라스를 끼고, 시선을 끌기 위해 명품 브랜드 가방을 일부러 팔에 걸친 채, 그녀는 턱을 높이 들고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다음 주에 있을 몰렌스 가문의 대형 비즈니스 자선 만찬에 참석하기 위해, 가릴 수 없이 화려한 드레스를 맞춤 제작하고자 이 부티크를 찾아온 참이었다.하지만 우아한 동작으로 선글라스를 벗자마자, 그녀의 얼굴을 장식하고 있던 가짜 미소가 완벽하게 사라졌다."너-너?!"조야의 두 눈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크게 떠졌다. 그 충격을 숨기지 못한 채 그녀는 본능적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너 같은 천박한 여자가 이렇게 고상한 곳에서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야?!"캐시는 거의 즉각적으로 침착함을 되찾았다.그녀는 손에 쥐고 있던 브로케이드 원단을 바짝 움켜쥐고, 턱에 들어간 힘을 억지로 풀며 격식 있고 차가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여기서 일합니다, 몰렌스 사모님. 드레스 디자인과 관련해 어떤 걸 도와드릴까요?"그 말은 조야의 과도한 자존심을 완벽하게 짓밟아 버렸다.어제 아침 데바트라와의 충돌로 여전히 남아 있던 질투심과 트라우마가 거세게 피어오르며, 캐시를 먼지처럼 짓밟아버리고 싶다는 억누를 수 없는 욕망이 분출했다."여기서 일한다고? 디자이너로?"조야가 경멸이 가득 찬 시선으로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 내리며 날카로운 실소를 터뜨렸다."웃기지도 않는군! J-패션 수준의 부티크가 가난뱅이 하녀에, 전과자에, 이제는 최소한의 자존심조차 남아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