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ICIAR SESIÓN사흘 뒤.
아침 일곱 시 사십 분.
출근 준비를 끝낸 여울이 현관에서 구두를 신으려던 순간 휴대전화가 울렸다.
강건이었다.
“네, 전무님.”
- 기사 봤습니까?
구두 뒤축을 당기던 손이 멈췄다.
“……무슨 기사요?”
수화기 너머로 짧은 침묵이 흘렀고, 곧 메시지 알림이 울렸다.
강건이 보낸 링크였다.
여울은 현관에 선 채 화면을 눌렀다.
[태강 황태자 전무 꼬신 H대리, 초고속 발탁 뒤엔 심야 밀회?]
제목 아래로 사진 세 장이 붙어 있었다.
강건과 단둘이 식당을 나오는 모습과 그의 차 조수석에 올라타는 모습. 마지막은 늦은 밤 자신의 집 앞에서 강건의 차 창가로 몸을 숙이고 있는 사진이었다.
각도 하나로 평범했던 장면이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되어 있었다.
식사는 데이트가 됐고, 차를 얻어 탄 것은 밀회가 됐다.
전략기획실에서 전무 직속으로 옮긴 인사까지 그 뒤에 붙으면서 이야기는 완성됐다.
여울은 말없이 화면을 내렸다.
- 오늘은 출근하지 마세요.
강건의 목소리가 낮게 들렸다.
여울은 잠시 현관문을 바라보다 발을 구두 안으로 끝까지 밀어 넣었다.
“왜요.”
- 회사가 지금 난리입니다.
“그러니까 가야죠.”
이번에는 강건이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 하 대리.
“제가 안 나가면 제가 진짜 숨어야 할 일을 한 것 같잖아요.”
여울은 가방을 들었다.
“잘못한 것도 없고요.”
잠시 후 강건이 짧게 숨을 내쉬었다.
-흠... 알겠습니다. 오면 연락해요.
“네.”
통화가 끊겼다.
여울은 다시 기사 화면을 한번 내려다봤다가 휴대전화를 가방 안에 넣었다.
사진 몇 장이었다.
사실이 아닌 이야기였고, 자신이 한 일도 없었다. 회사에 가서 평소처럼 일하면 됐다. 그때까지만 해도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
태강홀딩스 로비에 발을 들이는 순간, 생각보다 훨씬 큰 일이 터졌다는 걸 알았다.출입카드를 찍었다.
삑.
매일 듣던 소리였다.
그런데 게이트가 열리는 순간 주변의 공기가 아주 조금 달라졌다.로비 한쪽 카페 앞에서 이야기하던 여자 둘이 동시에 말을 멈췄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던 남자는 휴대전화를 내리다가 여울과 눈이 마주치자 다시 화면으로 시선을 떨궜다.
여울은 아무렇지 않게 걸었다.
뒤에서 아주 작은 목소리가 따라왔다.
“……저 사람 아니야?”
곧바로 다른 사람이 낮게 말했다.
“야, 조용히 해.”
그 한마디가 더 선명하게 꽂혔다.
조용히 하라는 건, 이미 둘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지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여울은 그대로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매일 같은 시간에 마주치던 직원들이 있었다. 이름은 몰라도 얼굴 정도는 익숙한 사람들이었고, 몇 번은 먼저 인사를 건넨 사람도 있었다.오늘은 아무도 인사하지 않았다.
띵.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올라탔다.
여울도 그 사이에 섞였다. 문이 닫힌 뒤부터는 안내음만 일정하게 이어졌다. 누구도 자신을 대놓고 쳐다보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래서 더 숨이 막혔다. 모두가 보지 않는 척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으니까. 여울은 층수만 바라봤다.3층.
5층. 7층.등 뒤에서 휴대전화가 한 번 진동하고, 조금 뒤 다른 곳에서도 같은 소리가 났다.
기사는 더 이상 화면 안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지금 자신과 같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고 있었다.10층에서 문이 열렸다.
직원 두 사람이 타려다가 여울을 발견했다. 순간 두 사람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한 사람은 곧바로 모르는 척했지만, 다른 한 사람의 시선은 여울의 얼굴에서 구두 끝까지 천천히 한번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왔다.기사 속 여자가 실제로 어떤 사람인지 확인하듯.
여울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손에 쥔 가방끈만 조금 더 단단해졌다.15층.
문이 열리자 여울은 가장 먼저 내렸다. 비서실까지 이어진 짧은 복도가 오늘은 이상하게 길었다.지나치는 사람마다 시선이 달라붙었다 떨어졌고, 누군가는 멀리서 여울을 발견하자 들고 있던 휴대전화를 뒤집었다.
그제야 알았다.
아침에 기사 제목을 봤을 때 자신이 생각했던 모욕과, 실제 사람들 사이를 걸어가는 모욕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기사에는 얼굴이 가려져 있었다.
회사에서는 아니었다. 문을 열고 비서실로 들어가자 김현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하 대리님.”
여울이 가방을 내려놓았다.
“왜 그래요.”
현실은 대답하지 못한 채 입술만 달싹였다.
그 얼굴을 보고 여울이 먼저 말했다.“괜찮으세요?”
“오늘…… 안 나오시는 줄 알았어요.”
“왜요.”
현실이 입을 다물었다.
여울의 목소리는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제가 뭘 잘못했는데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자리에 앉는 순간 그 문장이 조금 우스워졌다.
모니터 옆에 종이 한 장이 놓여 있었다.
출력된 기사였다. 굵은 제목 아래 자신의 사진이 박혀 있었다.[태강 황태자 전무 꼬신 H대리.]
누가 가져다 놓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여울은 종이를 집었다. 휴대전화 화면으로 봤을 때는 견딜 만했다. 그런데 자신의 책상 위에 놓인 사진은 이상할 만큼 더러웠다.전략기획실에서 버틴 5년.
새벽까지 숫자를 맞추고, 남의 실수를 대신 잡아내고, 주말에도 혼자 출근했던 시간.다음 달이면 과장이었다.
그런데 그 모든 게 사진 몇 장 아래에서 너무 쉽게 사라져 있었다.남은 것은 하나뿐이었다.
전무에게 붙어서 올라간 여자. 여울은 한동안 종이를 내려다봤다. 손끝이 조금씩 차가워졌다.그때 휴대전화가 울렸다.
지이잉―.
부재중 전화가 몇 통이나 쌓여 있었다.
곧 메시지가 들어왔다.[여울아. 전화 받아.]
이어 하나가 더 떴다.
[내가 말했잖아. 강건 옆에 있으면 안 된다고.]
여울의 눈동자가 그대로 멈췄다.
잠시 뒤 마지막 메시지가 도착했다.[지금이라도 내가 원래 자리로 돌려놓을게.]
원래 자리.
여울은 그 네 글자를 한참 바라봤다.
마치 자신의 인생에 돌아갈 자리가 따로 있고, 그 자리를 정해주는 사람도 따로 있다는 말처럼 들렸다. 손끝이 떨리기 시작했다. 화를 내야 할지, 울어야 할지조차 알 수 없었다. 주변에서는 키보드 소리가 계속 들렸다.타닥.
타닥타닥.
“니가 좀 바빠져야겠다.”강태환이 책상 위의 서류를 석진 쪽으로 밀었다.석진은 곧바로 손을 뻗지 않았다.“회장님, 무슨 일 있으십니까?”“검찰 놈들이 움직인다카데.”그제야 석진의 눈빛이 달라졌다.“어느 쪽입니까.”“반부패.”석진이 서류를 집어 들었다.정식 보고서도, 공문도 아니었다. 몇 개의 법인명과 계좌번호, 담당 검사 이름이 간략하게 정리된 메모에 가까웠다.태강홀딩스.태강증권.태강문화재단.석진의 시선이 차례로 이름들을 훑었다.“내사 단계입니까?”“그건 아이다.”강태환이 의자에 등을 묻었다.“국세청 개놈들도 냄새 맡은 것 같드라.”석진이 서류에서 눈을 들었다.“어디까지 알고 있답니까.”강태환이 피식 웃었다.“그걸 알았으면 내가 니를 왜 불렀겠노.”“…….”“검찰 쪽에서 귀띔만 해준 기다. 요 며칠 움직임이 심상찮다고.”석진은 다시 서류를 내려다봤다.강태환에게 이런 이야기를 흘려주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다. 검찰도, 정계도, 정부 부처도. 태강을 반세기 가까이 끌고 온 남자가 가진 건 돈과 회사만이 아니었다.사람이었다.“압수수색까지 예상하십니까.”“뭐라도 뜯어먹을라꼬 그 시커먼 놈들이 안 들이닥치겄나?”강태환의 대답은 태연했다.“들이닥치고 나서 준비할라꼬?”석진이 입을 다물었다.강태환이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어 번 두드렸다.“장부든 계약서든 돈이든, 어디서 뭘 들고 가도 앞뒤는 맞아야 된다.”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굳이 더 물을 필요가 없었다.석진이 서류를 내려놓았다.“걱정 마십시오, 회장님. 별도 프로젝트팀 꾸리겠습니다.”“단디해.”“재무전략본부를 중심으로 법무, 회계, 전략 쪽 인력을 차출하겠습니다. 최근 5년 주요 계약과 자금 집행부터 전부 다시 보겠습니다.”“티 안 나구로.”“전략 리스크관리 프로젝트로 올리겠습니다.”강태환이 고개를 끄덕였다.“그거 좋네.”석진은 잠시 망설이다 들고 온 다른 파일을 꺼냈다.“그리고 하나 더 보셔야 할 게 있습니다.”강태환의
강건의 손에서 힘이 빠졌다. 그는 곧바로 하상만의 팔을 놓았고, 하상만은 손목을 움켜쥔 채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아이고, 사람 손목을 아주 부러뜨릴 작정이었네.”강건은 잠깐 당황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다 흐트러진 자세를 바로 했다.“죄송합니다. 몰랐습니다.”조금 전과는 목소리부터 달라져 있었다.하상만은 손목을 문지르며 투덜거리다가 그제야 강건의 얼굴을 제대로 올려다봤다. 키부터 압도적이었다. 몸에 맞춘 검은 정장과 반듯한 셔츠, 잘 닦인 구두까지, 텔레비전에서나 볼 법한 사람이 음식물 냄새가 나는 골목 한복판에 서 있었다.하상만의 시선이 위에서 아래로 천천히 움직였다.“잠깐만.”여울을 한번 보고 다시 강건을 봤다.“혹시…….”강건이 먼저 고개를 숙였다.“강건입니다. 인사가 늦었습니다.”하상만의 눈이 커졌다. 입이 조금 벌어지더니 다시 한번 강건을 위아래로 훑었다.“아…… 진짜 사위네.”여울이 미간을 짚었다.“아빠.”하상만은 들리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난생처음 눈앞에서 재벌을 본 사람처럼 강건의 얼굴부터 옷, 시계까지 연신 훑더니 감탄을 흘렸다.“이야…… 재벌은 확실히 다르긴 다르구만.”강건은 그 말을 못 들은 척 다시 고개를 숙였다.“제가 먼저 찾아뵙고 인사드렸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어제 일이 너무 갑작스러웠습니다.”여울이 그를 돌아봤다.조금 전까지 하상만의 팔을 꺾고 있던 남자가 정말 사위가 된 사람처럼 깍듯했다.“아니, 뭐…… 젊은 사람들이 결혼하는데 그럴 수도 있지.”하상만도 급히 낡은 점퍼 앞섶을 쓸어내렸다. 조금 전까지 강건에게 욕을 퍼붓던 기세는 온데간데없었고, 태도마저 눈에 띄게 달라져 있었다.여울은 그게 더 불안했다.“아빠, 이제 가.”“잠깐 있어 봐.”“뭘 또.”하상만은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강건을 몇 번 힐끗거리던 시선에 아쉬움이 묻어났다.“사위가 재벌인데 좀 섭하네.”여울의 눈썹이 꿈틀했다.“아빠.”“장인 처음 봤으면 용돈이라도 좀 쥐여줄 줄 알았더니.”여울의 얼굴이 굳었다.
주변의 고개가 하나둘 더 돌아왔다.여울의 얼굴이 굳었다.“아빠.”“야, 사위는 어디 있어? 강 전무가 진짜 내 사위 맞….”여울이 하상만의 팔을 낚아챘다.“나와.”“야, 야. 왜 이래.”“나오라고.”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로비를 빠져나가 건물 옆길을 돌고, 다시 좁은 골목 안으로 들어갔다.태강 본사의 반듯한 외벽이 사라지자 풍경이 단숨에 바뀌었다.식당 뒤편으로 검은 음식물쓰레기통이 줄지어 놓여 있었고, 젖은 종이박스와 빈 술 상자가 벽을 따라 높게 쌓여 있었다. 환풍구에서는 뜨거운 연기가 쉬지 않고 흘러나왔으며, 오래된 기름 냄새와 오물 냄새가 축축한 골목 안에 뒤섞여 있었다.여울은 사람 없는 곳까지 거의 숨도 쉬지 않고 걸었다.그제야 하상만의 팔을 놓았다.“여긴 왜 왔어.”“뭐?”“회사에 왜 왔냐고.”하상만이 오히려 황당하다는 얼굴을 했다.“너 결혼한 걸 아빠한테 왜 말 안 했어?”“그건 또 어디서 들었어?”“내가 어디서 나오는 길인 줄 알아?”여울의 표정이 멈췄다.“……어디서.”하상만이 괜히 어깨를 한번 폈다.“니네 회장 만나고 오는 길이야.”여울의 입술이 벌어졌다.“뭐?”“어제 연락 왔더라. 아침 일찍 보자고.”“하…….”여울이 이마를 짚었다가 곧바로 손을 내렸다.“아빠 미쳤어?”“뭐가.”“거길 어디라고 가! 나한테 먼저 말을 했어야지.”“말할 새가 없었다니까? 어제 연락 왔는데 뭘 어떻게 해.”여울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아무튼.”억지로 목소리를 낮췄다.“무슨 얘기했는데?”하상만은 기다렸다는 듯 소매를 걷었다.“이거 주더라.”여울의 시선이 손목에 꽂혔다.처음 보는 시계였다.“……그게 뭐야.”“뭐긴, 시계지.”“누가 줬냐고.”“니 시아버지.”여울의 얼굴이 굳었다.“그걸 왜 받아?”“준다는데 왜 안 받아.”하상만은 손목을 이리저리 돌려보며 흐뭇하게 웃었다.“이거 천만 원도 넘는다더라.”“…….”“야, 내가 로또도 이런 로또를 맞네.”여울의 눈빛이 확 변했
다음 날 아침.검은 세단이 태강홀딩스 정문 앞에 멈췄다.여울은 안전벨트를 풀다가 창밖을 한번 내다봤다. 출근 시간이 한창이라 정문을 오가는 직원들이 많았다.“여기서 먼저 내릴게요.”강건이 시선을 돌렸다.“왜요.”“같이 들어가면 또 말 나오잖아요.”“어제 결혼했습니다.”“알아요.”“회사 사람들도 곧 알게 될 거고.”여울이 가방을 챙기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그러니까 더 싫은 거예요.”강건은 잠깐 그녀를 바라보다 입꼬리를 아주 조금 움직였다.“이미 늦은 것 같은데.”“전무님은 남의 일이라고 참 편하시네요.”“내 결혼인데 왜 남의 일입니까.”여울이 그를 쳐다봤다.강건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먼저 차에서 내렸다.결국 여울도 따라 내렸다.두 사람이 나란히 로비에 들어서는 순간, 공기가 달라졌다.어제와 같은 로비였고, 같은 출근 시간이었다. 그런데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만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어제는 노골적이었다.전무에게 붙어 올라간 여자.꽃뱀.사진 몇 장으로 5년을 설명할 수 있는 여자.오늘도 시선은 따라붙었다. 수군거림도 있었다. 다만 여울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먼저 고개가 숙여졌다.“안녕하십니까, 전무님.”강건에게 향한 인사였지만 여울에게도 함께 허리가 굽혀졌다.어제 엘리베이터 안에서 자신을 위아래로 훑었던 직원도 있었다. 오늘은 눈조차 제대로 들지 못했다.여울은 말없이 걸었다.어제와 오늘 사이 자신이 달라진 건 없었다.밤사이 능력이 생긴 것도 아니고, 잘못이 사라진 것도 아니었다.다만 이름 뒤에 하나가 붙었다.강건의 아내.그것만으로 사람들의 태도가 바뀌었다.씁쓸했다.“왜 그렇게 봅니까.”강건이 옆에서 물었다.“아무것도 아니에요.”“거짓말 같은데.”여울은 대답하지 않았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이번에는 아무도 먼저 타지 않았다.강건이 들어간 뒤 여울이 뒤따르자 그제야 사람들이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왔다.여울은 숫자가 올라가는 것만 바라봤다.어제는 자신을 피하지 않던 눈들이 오늘
사흘 뒤.아침 일곱 시 사십 분.출근 준비를 끝낸 여울이 현관에서 구두를 신으려던 순간 휴대전화가 울렸다.강건이었다.“네, 전무님.”- 기사 봤습니까?구두 뒤축을 당기던 손이 멈췄다.“……무슨 기사요?”수화기 너머로 짧은 침묵이 흘렀고, 곧 메시지 알림이 울렸다.강건이 보낸 링크였다.여울은 현관에 선 채 화면을 눌렀다.[태강 황태자 전무 꼬신 H대리, 초고속 발탁 뒤엔 심야 밀회?]제목 아래로 사진 세 장이 붙어 있었다.강건과 단둘이 식당을 나오는 모습과 그의 차 조수석에 올라타는 모습. 마지막은 늦은 밤 자신의 집 앞에서 강건의 차 창가로 몸을 숙이고 있는 사진이었다.각도 하나로 평범했던 장면이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되어 있었다.식사는 데이트가 됐고, 차를 얻어 탄 것은 밀회가 됐다.전략기획실에서 전무 직속으로 옮긴 인사까지 그 뒤에 붙으면서 이야기는 완성됐다.여울은 말없이 화면을 내렸다.- 오늘은 출근하지 마세요.강건의 목소리가 낮게 들렸다.여울은 잠시 현관문을 바라보다 발을 구두 안으로 끝까지 밀어 넣었다.“왜요.”- 회사가 지금 난리입니다.“그러니까 가야죠.”이번에는 강건이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하 대리.“제가 안 나가면 제가 진짜 숨어야 할 일을 한 것 같잖아요.”여울은 가방을 들었다.“잘못한 것도 없고요.”잠시 후 강건이 짧게 숨을 내쉬었다.-흠... 알겠습니다. 오면 연락해요.“네.”통화가 끊겼다.여울은 다시 기사 화면을 한번 내려다봤다가 휴대전화를 가방 안에 넣었다.사진 몇 장이었다.사실이 아닌 이야기였고, 자신이 한 일도 없었다.회사에 가서 평소처럼 일하면 됐다.그때까지만 해도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 태강홀딩스 로비에 발을 들이는 순간, 생각보다 훨씬 큰 일이 터졌다는 걸 알았다.출입카드를 찍었다.삑.매일 듣던 소리였다.그런데 게이트가 열리는 순간 주변의 공기가 아주 조금 달라졌다.로비 한쪽 카페 앞에서 이야기하던 여자 둘이 동시에 말을 멈췄고, 엘리베이터를
저녁 여덟 시가 조금 넘었을 무렵이었다.검은 세단 한 대가 좁은 골목 안으로 천천히 들어왔다.대로에서 불과 몇 블록 떨어졌을 뿐인데 풍경은 완전히 달랐다. 오래된 원룸과 다세대주택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고, 건물 사이를 가로지른 전선 아래로 낡은 간판들이 줄지어 매달려 있었다. 반쯤 셔터를 내린 세탁소와 골목 입구 편의점의 푸른 불빛만 늦은 저녁을 밝히고 있었다.석진은 여울의 집이 정면으로 보이는 곳에 차를 세웠다.시동을 끄자 차 안이 순식간에 고요해졌다.낡은 붉은 벽돌 외벽, 창문마다 제멋대로 붙은 실외기, 사람이 드나들 때마다 희끄무레하게 켜졌다 꺼지는 공동현관 센서등.석진은 한동안 건물을 올려다봤다.휴대전화 화면에는 몇 시간 전 자신이 보낸 문자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집에서 기다려. 나 일 보고 갈게.]그리고 바로 아래.[오지 마세요.]석진은 그 짧은 문장을 내려다보다 화면을 껐다.그러고도 돌아가지 않았다.시트에 몸을 기대고 다시 건물을 바라봤다.이런 집.낯설지 않았다.오래전 여울과 살았던 옥탑방이 문득 떠올랐다.태강 최종면접을 보고 돌아온 날이었다.아직 결과도 나오지 않았는데 석진은 치킨 두 마리와 맥주를 사 왔다. 축하는 미리 하는 거라면서.옥탑방 앞 좁은 평상에 둘이 나란히 앉아 종이 상자를 가운데 두고 치킨을 뜯어 먹었다. 여름밤이라 옥상 바닥에는 낮 동안 달궈진 열기가 아직 남아 있었고, 멀리 보이는 아파트 창문들이 하나둘 불을 밝히고 있었다.여울이 맥주 캔을 들고 물었다.“나 떨어지면 어떡하려고 벌써 축하해?”“안 떨어져.”“뭘 그렇게 확신해.”“내가 보는 눈은 있거든.”여울이 피식 웃으며 치킨 한 조각을 석진의 입에 밀어 넣었다.“그럼 붙으면 오빠 덕이다?”“당연하지.”“웃기고 있네.”바람이 불자 여울의 머리카락이 얼굴 앞으로 흩어졌다.편한 티셔츠에 화장기 하나 없는 얼굴. 맥주 한 모금에도 눈을 접어가며 웃던 스물넷의 여울.석진은 이상하게 그 얼굴을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했다.돈도 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