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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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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vels by 미미안

이사님에게 팔린 6개월

이사님에게 팔린 6개월

12년 동안 어떤 여자에게도 반응하지 않던 에이치건설 후계자 서하강. 그의 죽은 몸을 깨운 건 회식 자리에서 우연히 닿은 여자, 진세이였다. 하강은 그녀를 사랑하는 대신 자신의 비서로 강제 발령한다. 그러나 세이에게는 지켜야 할 커리어가 있었다. 그리고 매달 천만 원씩 들어가는 어머니의 항암 치료비도. 벼랑 끝에 선 그녀에게 하강이 계약서를 내민다. “6개월. 필요한 돈은 내가 대지.” 그는 그녀의 절박함을 샀고, 그녀는 그의 결함에 값을 매겼다. **사랑은 계약서에 없었다. 파멸은 처음부터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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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6화. 업무라는 이름의 감금-2
오후 8시 15분.H건설 신사업팀.세이 앞에 나타난 서하강은 한 손에 휴대폰을 들고 있었다. 퇴근하려던 길인지 재킷 단추는 풀려 있었고, 넥타이도 조금 느슨해져 있었다.세이는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아, 이사님. 아직 퇴근 안 하셨습니까?”“이제 가려고요.”“네. 조심히 들어가십시오.”세이는 허리를 숙이고 다시 자리에 앉으려 했다.그러나 하강은 돌아가지 않았다.모니터를 내려다봤다.“오늘 현장 검토자료 아닙니까?”“아닙니다. 기존에 담당하던 공사비 산출 자료입니다.”“아직 안 끝났어요?”“네. 조금만 더 하면 됩니다.”하강이 손목시계를 확인했다.“여덟 시 넘었는데.”“네.”“내일 하셔도 되잖습니까.”세이는 잠시 말을 멈췄다.그가 너무도 쉽게 내뱉은 말 때문이었다.“내일 오전에 관련 부서로 넘겨야 해서요.”“그럼 오 팀장에게 일정 조정하라고 하죠.”“아닙니다, 이사님. 제가 마무리하면 됩니다.”“그렇게까지 할 필요 있습니까?”세이는 모니터에서 시선을 떼었다.오늘 하루 종일 눌러 두었던 피로가 목 끝까지 차올랐다.“……이사님.”“네.”“제가 오늘 오전에 이 업무를 끝냈어야 했습니다.”하강이 그녀를 바라봤다.“그런데 하루 종일 이사님 일정에 동행하느라 제 업무를 하나도 못 했습니다.”세이는 말을 멈췄다.너무 많이 말했나 싶었다.그러나 이미 입 밖으로 나온 말이었다.“죄송합니다. 이사님 지시가 불필요했다는 뜻은 아닙니다.”그녀가 자세를 바로 했다.“다만 제게는 오늘 끝내야 하는 일이 따로 있었습니다. 이사님께서는 하루 일정을 마치셨지만, 저는 이제 제 업무를 시작한 셈이라서요.”하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세이는 그의 침묵에 뒤늦게 긴장했다.“앞으로도 외근이 필요하시면 언제든 동행하겠습니다. 대신 가능하면 일정만 조금 미리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마지막 말은 다시 공손해졌다.하강은 그녀를 한동안 바라봤다.화를 낼 줄 알았다.자신에게 감히 업무 지시를 따지느냐고.그런데 입 밖으로 나온
Last Updated: 2026-11-04
Chapter: 5화. 업무라는 이름의 감금
다음 날 오전 8시 30분.H건설 신사업팀.진세이는 출근하자마자 노트북을 켰다. 어젯밤 병원에서 늦게 돌아온 탓에 눈꺼풀이 무거웠지만, 오전 중으로 끝내야 할 공사비 검토 자료가 남아 있었다.진한 커피를 한 모금 삼키고 도면을 확대하던 순간, 내선전화가 울렸다.“신사업팀 진세이 대리입니다.”“이사실 구본입니다.”세이의 손이 멈췄다.“아, 네. 실장님.”“오늘 오전 H-스테이 코어 후속 사업지 현장 실사에 동행하시라는 지시가 내려왔습니다. 9시까지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오십시오.”“네? 제가요?”“서 이사님께서 직접 지명하셨습니다.”세이는 모니터 오른쪽 아래의 시계를 확인했다.8시 32분.“실장님, 죄송하지만 제가 오늘 오전까지 마무리해야 할 자료가 있어서요. 현장 실사는 사업개발파트에서 진행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이사님께서 진 대리의 실무 의견을 직접 듣고 싶어 하십니다.”“아…….”“일정 조정이 어려우십니까?”어젯밤 검은 세단 안에서 자신을 바라보던 남자의 얼굴이 떠올랐다.“아닙니다. 팀장님께 말씀드리고 내려가겠습니다.”전화를 끊은 세이는 한숨을 내쉬었다.업무 지시였다. 명분도 충분했다. 다만 왜 하필 자신이어야 하는지는 설명되지 않았다.*“뭐? 이사님이 너를 직접 불렀다고?”오현수 팀장이 커피잔을 내려놓았다.“네에. 후속 사업지 현장 실사라고 하십니다.”“이상하네. 그거 사업개발 쪽에서 담당자 정해졌을 텐데.”“저도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뭐, 황태자님이 친히 찾으시는데 어쩌겠냐. 다녀와.”“팀장님, 오전에 공사비 검토 자료 넘겨야 하는데요. 오후엔 인허가 일정도 있고요.”“그럼 내가 일단 일정 좀 조정해 볼게.”세이는 더 말하지 않았다.회사에서 일정을 조정한다는 말은 대개 일이 줄어든다는 뜻이 아니었다. 마감 시간만 뒤로 밀린다는 뜻이었다.“알겠습니다. 다녀오겠습니다.”세이는 노트북과 도면 파일을 챙겼다.*오전 9시.지하 주차장에는 검은 세단이 대기하고 있었다.뒷문이 열리자 익숙
Last Updated: 2026-11-04
Chapter: 4화. 원인불명의 불능
그때 식당 문이 열리고, 가방을 챙겨 나온 세이가 검은 세단 쪽으로 걸어왔다. 아직 얼굴에는 술기운이 남아있었다. 수치심도 함께.하강은 뒷좌석 창문을 내렸다.“타세요.”“네.”세이는 짧게 대답하고 앞좌석 문을 열려 했다.하강의 시선이 그 손끝에 멈췄다.“이쪽으로 타시죠.”그가 제 옆자리를 가리켰다.세이의 얼굴이 다시 붉어졌다. 그러나 거절하지는 못하고 조심스럽게 뒷좌석 안으로 발을 들였다.몸을 최대한 문 쪽에 붙인 채 움츠리는 자세가 하강의 시선에 걸렸다.차 안은 조용했다.김 기사는 룸미러 한 번 보지 않고 앞만 보고 있었다. 세이는 무릎 위에 두 손을 모아 쥔 채 숨소리까지 줄였다.하강은 그녀를 보지 않는 척했다. 하지만 보지 않을 수 없었다.고개를 숙인 옆얼굴. 술기운에 달아오른 뺨. 팔뚝에 남아 있을 자신의 손자국. 방금 자신이 붙잡아 세운 자리.하강은 그 모든 것을 관찰했다.감정이 아니었다.확인에 가까웠다.“집 주소 말해요.”세이가 잠시 망설였다.“아…… 북창의료원 앞으로 가주세요.”하강의 미간이 아주 미세하게 좁아졌다.집이 아니라 병원.묻고 싶은 말이 생겼지만, 그는 삼켰다. 지금 필요한 것은 그녀의 사정이 아니었다. 원인이었다.하강은 감정을 지운 목소리로 앞쪽에 지시했다.“김 기사님, 들었죠.”“네, 이사님.”검은 세단은 조용히 도로로 빠져나갔다.늦은 밤의 도로는 한산했다. 창밖의 가로등 불빛이 일정한 간격으로 차 안을 스쳤다. 빛이 세이의 얼굴을 훑고 지나갈 때마다, 그녀는 더 작아 보였다.하강이 먼저 침묵을 깼다.“진 대리.”“네.”“신사업팀 몇 년 차죠.”“4년 차입니다.”“처음부터 신사업팀이었습니까.”“네. 전공이 건축공학이라, 신규 사업지 검토 쪽 일을 맡았습니다.”“도면도 봅니까.”“기본 계획안이랑 공사비 자료는 같이 봅니다.”세이의 대답은 생각보다 또렷했다.취했지만 흐트러지지는 않았다. 민망한 일을 겪었고, 불편한 남자의 옆자리에 앉아 있었지만 업무 질문에는 바로
Last Updated: 2026-11-04
Chapter: 3화. 불능을 깨운 여자 진세이
한 달 전. ‘살살 녹는 투뿔한우’ 식당H건설 신사업팀 회식 자리였다.대형 룸 한가운데서 오현수 팀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에는 소주병과 숟가락이 들려 있었다.댕, 댕, 댕, 댕.술기운 오른 박자가 룸 안을 울렸다.“자, 이번 H-스테이 코어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이끌어주신 서하강 이사님. 한 말씀 해주시죠!”박수와 웃음이 동시에 터졌다.서하강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H그룹이 세상에 내놓은 유일한 후계자이자, 회장의 양아들인 H건설 이사.그 이름 앞에 붙은 직함들은 모두 비쌌다.190센티미터의 거대한 체구에 박제하듯 맞춘 네이비 수트, 반듯하게 넘긴 머리와 얇은 은색테 안경. 손목 위에서 소리 없이 움직이는 시계까지. 서하강이라는 존재 자체가 대한민국에서 가장 정교하게 가공된 최고급 권력의 결정판이었다.서울대와 하버드를 거쳐 뉴욕에서 건물을 짓는 법보다 도시의 가격을 정하는 법을 먼저 배운 남자. 사람들은 그를 완벽하다고 불렀고, 하강은 그 단어가 얼마나 얇은 포장지인지 알고 있었다.국내 재계 서열 8위,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은 집을 지은 회사를 발판 삼아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려는 남자가 지금, 이 룸 안에 서 있었다.그가 잔을 들었다.차가운 인상과 달리 입가에는 부드러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회식자리에서 필요한 만큼만 친절한 얼굴이었다.“H-스테이 코어 프로젝트는 이번 그룹에서 중요한 사업입니다. 핵심 인재인 여러분과 좋은 결과를 내게 되어 기쁩니다.”말은 반듯했고, 온도는 낮았다.하강은 안주머니에서 블랙카드를 꺼내 들었다.검은 카드 한 장이 룸 안의 공기를 바꿨다.“오늘 결제는 이 카드가 합니다. 한도 걱정은 하지 마시고 즐기십시오.”말이 끝나자 박수소리가 도미노처럼 번졌다. 오현수 팀장이 가장 먼저 박수를 쳤고, 팀원들이 그 뒤를 따랐다.돈은 늘 가장 빠르게 사람의 호감을 샀고, 서하강은 그 권력을 다루는 법을 아주 잘 알았다.여직원들의 목소리가 불판의 열기 사이로 매달렸다.“어머, 이사님 진짜 멋지시다.
Last Updated: 2026-11-03
Chapter: 2화. 세 번째 불능의 밤-2
세이는 그 떨림을 들었다.자신만 두려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위로가 되지는 않았다. 다만 이 남자에게도 결코 드러내고 싶지 않은 균열이 있다는 것을, 세이는 조금씩 알아가고 있었다.침대 위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방 안에 남아 있던 물기는 서서히 말라 갔다.하지만 두 사람 사이의 열기는 쉽게 식지 않았다.소파에 앉혀졌을 때도 하강은 좀처럼 그녀를 놓지 못했다.넓은 거실의 통유리 너머로 서울의 밤이 펼쳐져 있었다. 수천 개의 불빛이 건물 사이에서 반짝이고 있었지만, 그 화려한 풍경은 유리 한 장을 사이에 둔 채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 세이는 하강의 어깨에 손을 짚었다.이미 두 번이나 긴 밤을 견딘 뒤였다. 손끝에는 힘이 남아 있지 않았고, 어깨를 바로 세우기도 어려웠다. 조금만 움직여도 숨이 흐트러졌다.“……아, 잠깐만…….”“아직 못 끝내.”낮은 대답이 돌아왔다.세이는 그를 바라보았다.그의 얼굴에는 좀처럼 지워지지 않는 절박함이 남아 있었다. 자신이 무엇을 되찾았는지 믿을 수 없어서, 눈앞에 있는 것을 계속 붙잡으려는 사람 같았다.열두 해였다.그토록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몸이 진세이 앞에서만 깨어났다.세이는 그의 어깨를 붙잡은 손에 힘을 주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손끝이 자꾸 미끄러졌고, 고르지 못한 숨 때문에 눈앞의 불빛마저 흐릿하게 번졌다.하강의 움직임이 멎었다.그가 세이의 얼굴을 살폈다.“……괜찮아?”물음은 짧았다.세이는 대답하지 못한 채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손끝에 힘은 없었지만, 쉽게 놓지도 못했다.하강은 그 손을 내려다보았다.이윽고 세이의 등을 받쳐 조금 더 편하게 기대게 했다. 그의 팔 안으로 몸의 무게가 옮겨지자 세이는 잠시 눈을 감고 숨을 골랐다.그 배려는 오래가지 않았다.“말해. 못 버티겠으면.”세이는 숨만 삼켰다.그리고 그의 목덜미에 손을 올렸다.손끝 아래로 빠른 맥박이 느껴졌다.그렇게 차갑고 완벽해 보이던 남자의 심장이 믿기 어려울 만큼 거칠게 뛰고 있었다.세이는 그 박동을 한동안
Last Updated: 2026-11-03
Chapter: 1화. 세 번째 불능의 밤
한남동 펜트하우스 A동 501호.욕실 문이 열리며 따뜻한 수증기가 먼저 흘러나왔다. 천장에 매립된 조명 아래로 희뿌연 물안개가 번지고, 그 사이에서 서하강이 모습을 드러냈다.하반신에는 흰 수건 한 장만 걸쳐져 있었다. 젖은 머리칼 끝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단단한 가슴선을 따라 천천히 흘러내렸다. 복근 사이를 타고 내려온 물줄기가 수건의 경계에서 멈췄다.그 아래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그러나 수건 하나가 감추고 있는 것은 살이 아니라, 이 남자의 유일한 결함이었다.세이는 현관 옆에 서서 그를 바라보았다.정확히 7시.계약서에 적힌 시간이었다.아직 코트 단추도 풀지 못한 채였다. 구두는 벗었지만 슬리퍼는 신지 않았다. 맨발에 닿는 대리석의 서늘함이 발목을 타고 올라왔다. 고급 호텔처럼 넓고 정돈된 집이었지만, 세이가 마음 놓고 발을 디딜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이 집에서 편해지는 것은 계약 조항 어디에도 없었다.하강이 다가왔다.젖은 발이 대리석을 밟을 때마다 작은 소리가 났다. 넓은 거실을 채우고 있던 적막이 그의 발걸음에 조금씩 밀려났다. 세이는 다가오는 남자를 바라보며 자신도 모르게 코트 자락을 움켜쥐었다.몇 걸음 되지 않는 거리였다.그런데 그 짧은 순간에도 숨을 쉬기가 어려웠다.하강의 손등이 세이의 오른쪽 뺨에 닿았다.바깥바람에 식었던 피부 위로 따뜻한 손길이 스며들었다. 엄지가 턱선을 따라 느리게 움직였고, 세이는 그가 고개를 숙일 때마다 젖은 머리칼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을 볼 수 있었다.이상한 남자였다.회의실에서는 수백억 원의 공사비를 앞에 두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 집에서만큼은 세이의 사소한 움직임 하나에도 지나치게 집중했다.그의 손이 목덜미에 닿았다.“이사…….”끝까지 부르지 못한 직함이 입술 사이에서 흩어졌다.하강이 입을 맞췄다.처음부터 기다렸다는 듯한 입맞춤이었다. 세이는 놀라 그의 어깨를 밀었지만, 하강은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서로의 숨이 뒤섞이고 젖은 머리칼이 뺨을 스칠 때마다
Last Updated: 2026-11-03
전무님과 미친결혼

전무님과 미친결혼

첫사랑이자 사실혼 남편이 다른 여자와 결혼하던 날, 하여울은 그 남자의 아이를 잃었다. 5년 뒤 재벌가의 사위가 되어 돌아온 석진은 말한다. “여울아, 내가 너한테 헤어지자고 했던 적이 있던가?” 여울이 태강그룹 후계자 강건의 직속 비서가 되자, 석진은 그녀를 ‘재벌가 후계자를 꼬신 꽃뱀’으로 만들어버린다. 모든 것을 잃은 여울에게 강건이 내민 것은 1년짜리 혼인계약서. 그렇게 여울은 전무님의 아내가 되고, 첫사랑은 자신의 시매부가 된다. 복수를 위해 시작한 결혼은 점점 진짜가 되어가고, 여울을 되찾으려는 첫사랑의 집착은 더 잔인해진다. 나를 버린 첫사랑에게 복수하기 위해, 나는 그의 처남과 결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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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20화. 우리 여울이
“니가 좀 바빠져야겠다.”강태환이 책상 위의 서류를 석진 쪽으로 밀었다.석진은 곧바로 손을 뻗지 않았다.“회장님, 무슨 일 있으십니까?”“검찰 놈들이 움직인다카데.”그제야 석진의 눈빛이 달라졌다.“어느 쪽입니까.”“반부패.”석진이 서류를 집어 들었다.정식 보고서도, 공문도 아니었다. 몇 개의 법인명과 계좌번호, 담당 검사 이름이 간략하게 정리된 메모에 가까웠다.태강홀딩스.태강증권.태강문화재단.석진의 시선이 차례로 이름들을 훑었다.“내사 단계입니까?”“그건 아이다.”강태환이 의자에 등을 묻었다.“국세청 개놈들도 냄새 맡은 것 같드라.”석진이 서류에서 눈을 들었다.“어디까지 알고 있답니까.”강태환이 피식 웃었다.“그걸 알았으면 내가 니를 왜 불렀겠노.”“…….”“검찰 쪽에서 귀띔만 해준 기다. 요 며칠 움직임이 심상찮다고.”석진은 다시 서류를 내려다봤다.강태환에게 이런 이야기를 흘려주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다. 검찰도, 정계도, 정부 부처도. 태강을 반세기 가까이 끌고 온 남자가 가진 건 돈과 회사만이 아니었다.사람이었다.“압수수색까지 예상하십니까.”“뭐라도 뜯어먹을라꼬 그 시커먼 놈들이 안 들이닥치겄나?”강태환의 대답은 태연했다.“들이닥치고 나서 준비할라꼬?”석진이 입을 다물었다.강태환이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어 번 두드렸다.“장부든 계약서든 돈이든, 어디서 뭘 들고 가도 앞뒤는 맞아야 된다.”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굳이 더 물을 필요가 없었다.석진이 서류를 내려놓았다.“걱정 마십시오, 회장님. 별도 프로젝트팀 꾸리겠습니다.”“단디해.”“재무전략본부를 중심으로 법무, 회계, 전략 쪽 인력을 차출하겠습니다. 최근 5년 주요 계약과 자금 집행부터 전부 다시 보겠습니다.”“티 안 나구로.”“전략 리스크관리 프로젝트로 올리겠습니다.”강태환이 고개를 끄덕였다.“그거 좋네.”석진은 잠시 망설이다 들고 온 다른 파일을 꺼냈다.“그리고 하나 더 보셔야 할 게 있습니다.”강태환의
Last Updated: 2026-11-04
Chapter: 19화. 제 장인어른 입니다.
강건의 손에서 힘이 빠졌다. 그는 곧바로 하상만의 팔을 놓았고, 하상만은 손목을 움켜쥔 채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아이고, 사람 손목을 아주 부러뜨릴 작정이었네.”강건은 잠깐 당황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다 흐트러진 자세를 바로 했다.“죄송합니다. 몰랐습니다.”조금 전과는 목소리부터 달라져 있었다.하상만은 손목을 문지르며 투덜거리다가 그제야 강건의 얼굴을 제대로 올려다봤다. 키부터 압도적이었다. 몸에 맞춘 검은 정장과 반듯한 셔츠, 잘 닦인 구두까지, 텔레비전에서나 볼 법한 사람이 음식물 냄새가 나는 골목 한복판에 서 있었다.하상만의 시선이 위에서 아래로 천천히 움직였다.“잠깐만.”여울을 한번 보고 다시 강건을 봤다.“혹시…….”강건이 먼저 고개를 숙였다.“강건입니다. 인사가 늦었습니다.”하상만의 눈이 커졌다. 입이 조금 벌어지더니 다시 한번 강건을 위아래로 훑었다.“아…… 진짜 사위네.”여울이 미간을 짚었다.“아빠.”하상만은 들리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난생처음 눈앞에서 재벌을 본 사람처럼 강건의 얼굴부터 옷, 시계까지 연신 훑더니 감탄을 흘렸다.“이야…… 재벌은 확실히 다르긴 다르구만.”강건은 그 말을 못 들은 척 다시 고개를 숙였다.“제가 먼저 찾아뵙고 인사드렸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어제 일이 너무 갑작스러웠습니다.”여울이 그를 돌아봤다.조금 전까지 하상만의 팔을 꺾고 있던 남자가 정말 사위가 된 사람처럼 깍듯했다.“아니, 뭐…… 젊은 사람들이 결혼하는데 그럴 수도 있지.”하상만도 급히 낡은 점퍼 앞섶을 쓸어내렸다. 조금 전까지 강건에게 욕을 퍼붓던 기세는 온데간데없었고, 태도마저 눈에 띄게 달라져 있었다.여울은 그게 더 불안했다.“아빠, 이제 가.”“잠깐 있어 봐.”“뭘 또.”하상만은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강건을 몇 번 힐끗거리던 시선에 아쉬움이 묻어났다.“사위가 재벌인데 좀 섭하네.”여울의 눈썹이 꿈틀했다.“아빠.”“장인 처음 봤으면 용돈이라도 좀 쥐여줄 줄 알았더니.”여울의 얼굴이 굳었다.
Last Updated: 2026-11-04
Chapter: 18화. 이런 로또를 다 맞네.
주변의 고개가 하나둘 더 돌아왔다.여울의 얼굴이 굳었다.“아빠.”“야, 사위는 어디 있어? 강 전무가 진짜 내 사위 맞….”여울이 하상만의 팔을 낚아챘다.“나와.”“야, 야. 왜 이래.”“나오라고.”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로비를 빠져나가 건물 옆길을 돌고, 다시 좁은 골목 안으로 들어갔다.태강 본사의 반듯한 외벽이 사라지자 풍경이 단숨에 바뀌었다.식당 뒤편으로 검은 음식물쓰레기통이 줄지어 놓여 있었고, 젖은 종이박스와 빈 술 상자가 벽을 따라 높게 쌓여 있었다. 환풍구에서는 뜨거운 연기가 쉬지 않고 흘러나왔으며, 오래된 기름 냄새와 오물 냄새가 축축한 골목 안에 뒤섞여 있었다.여울은 사람 없는 곳까지 거의 숨도 쉬지 않고 걸었다.그제야 하상만의 팔을 놓았다.“여긴 왜 왔어.”“뭐?”“회사에 왜 왔냐고.”하상만이 오히려 황당하다는 얼굴을 했다.“너 결혼한 걸 아빠한테 왜 말 안 했어?”“그건 또 어디서 들었어?”“내가 어디서 나오는 길인 줄 알아?”여울의 표정이 멈췄다.“……어디서.”하상만이 괜히 어깨를 한번 폈다.“니네 회장 만나고 오는 길이야.”여울의 입술이 벌어졌다.“뭐?”“어제 연락 왔더라. 아침 일찍 보자고.”“하…….”여울이 이마를 짚었다가 곧바로 손을 내렸다.“아빠 미쳤어?”“뭐가.”“거길 어디라고 가! 나한테 먼저 말을 했어야지.”“말할 새가 없었다니까? 어제 연락 왔는데 뭘 어떻게 해.”여울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아무튼.”억지로 목소리를 낮췄다.“무슨 얘기했는데?”하상만은 기다렸다는 듯 소매를 걷었다.“이거 주더라.”여울의 시선이 손목에 꽂혔다.처음 보는 시계였다.“……그게 뭐야.”“뭐긴, 시계지.”“누가 줬냐고.”“니 시아버지.”여울의 얼굴이 굳었다.“그걸 왜 받아?”“준다는데 왜 안 받아.”하상만은 손목을 이리저리 돌려보며 흐뭇하게 웃었다.“이거 천만 원도 넘는다더라.”“…….”“야, 내가 로또도 이런 로또를 맞네.”여울의 눈빛이 확 변했
Last Updated: 2026-11-04
Chapter: 17화. 며느리 선물
다음 날 아침.검은 세단이 태강홀딩스 정문 앞에 멈췄다.여울은 안전벨트를 풀다가 창밖을 한번 내다봤다. 출근 시간이 한창이라 정문을 오가는 직원들이 많았다.“여기서 먼저 내릴게요.”강건이 시선을 돌렸다.“왜요.”“같이 들어가면 또 말 나오잖아요.”“어제 결혼했습니다.”“알아요.”“회사 사람들도 곧 알게 될 거고.”여울이 가방을 챙기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그러니까 더 싫은 거예요.”강건은 잠깐 그녀를 바라보다 입꼬리를 아주 조금 움직였다.“이미 늦은 것 같은데.”“전무님은 남의 일이라고 참 편하시네요.”“내 결혼인데 왜 남의 일입니까.”여울이 그를 쳐다봤다.강건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먼저 차에서 내렸다.결국 여울도 따라 내렸다.두 사람이 나란히 로비에 들어서는 순간, 공기가 달라졌다.어제와 같은 로비였고, 같은 출근 시간이었다. 그런데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만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어제는 노골적이었다.전무에게 붙어 올라간 여자.꽃뱀.사진 몇 장으로 5년을 설명할 수 있는 여자.오늘도 시선은 따라붙었다. 수군거림도 있었다. 다만 여울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먼저 고개가 숙여졌다.“안녕하십니까, 전무님.”강건에게 향한 인사였지만 여울에게도 함께 허리가 굽혀졌다.어제 엘리베이터 안에서 자신을 위아래로 훑었던 직원도 있었다. 오늘은 눈조차 제대로 들지 못했다.여울은 말없이 걸었다.어제와 오늘 사이 자신이 달라진 건 없었다.밤사이 능력이 생긴 것도 아니고, 잘못이 사라진 것도 아니었다.다만 이름 뒤에 하나가 붙었다.강건의 아내.그것만으로 사람들의 태도가 바뀌었다.씁쓸했다.“왜 그렇게 봅니까.”강건이 옆에서 물었다.“아무것도 아니에요.”“거짓말 같은데.”여울은 대답하지 않았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이번에는 아무도 먼저 타지 않았다.강건이 들어간 뒤 여울이 뒤따르자 그제야 사람들이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왔다.여울은 숫자가 올라가는 것만 바라봤다.어제는 자신을 피하지 않던 눈들이 오늘
Last Updated: 2026-11-04
Chapter: 16화. 꽃뱀 스캔들
사흘 뒤.아침 일곱 시 사십 분.출근 준비를 끝낸 여울이 현관에서 구두를 신으려던 순간 휴대전화가 울렸다.강건이었다.“네, 전무님.”- 기사 봤습니까?구두 뒤축을 당기던 손이 멈췄다.“……무슨 기사요?”수화기 너머로 짧은 침묵이 흘렀고, 곧 메시지 알림이 울렸다.강건이 보낸 링크였다.여울은 현관에 선 채 화면을 눌렀다.[태강 황태자 전무 꼬신 H대리, 초고속 발탁 뒤엔 심야 밀회?]제목 아래로 사진 세 장이 붙어 있었다.강건과 단둘이 식당을 나오는 모습과 그의 차 조수석에 올라타는 모습. 마지막은 늦은 밤 자신의 집 앞에서 강건의 차 창가로 몸을 숙이고 있는 사진이었다.각도 하나로 평범했던 장면이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되어 있었다.식사는 데이트가 됐고, 차를 얻어 탄 것은 밀회가 됐다.전략기획실에서 전무 직속으로 옮긴 인사까지 그 뒤에 붙으면서 이야기는 완성됐다.여울은 말없이 화면을 내렸다.- 오늘은 출근하지 마세요.강건의 목소리가 낮게 들렸다.여울은 잠시 현관문을 바라보다 발을 구두 안으로 끝까지 밀어 넣었다.“왜요.”- 회사가 지금 난리입니다.“그러니까 가야죠.”이번에는 강건이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하 대리.“제가 안 나가면 제가 진짜 숨어야 할 일을 한 것 같잖아요.”여울은 가방을 들었다.“잘못한 것도 없고요.”잠시 후 강건이 짧게 숨을 내쉬었다.-흠... 알겠습니다. 오면 연락해요.“네.”통화가 끊겼다.여울은 다시 기사 화면을 한번 내려다봤다가 휴대전화를 가방 안에 넣었다.사진 몇 장이었다.사실이 아닌 이야기였고, 자신이 한 일도 없었다.회사에 가서 평소처럼 일하면 됐다.그때까지만 해도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 태강홀딩스 로비에 발을 들이는 순간, 생각보다 훨씬 큰 일이 터졌다는 걸 알았다.출입카드를 찍었다.삑.매일 듣던 소리였다.그런데 게이트가 열리는 순간 주변의 공기가 아주 조금 달라졌다.로비 한쪽 카페 앞에서 이야기하던 여자 둘이 동시에 말을 멈췄고, 엘리베이터를
Last Updated: 2026-11-04
Chapter: 15화. 오지마세요.
저녁 여덟 시가 조금 넘었을 무렵이었다.검은 세단 한 대가 좁은 골목 안으로 천천히 들어왔다.대로에서 불과 몇 블록 떨어졌을 뿐인데 풍경은 완전히 달랐다. 오래된 원룸과 다세대주택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고, 건물 사이를 가로지른 전선 아래로 낡은 간판들이 줄지어 매달려 있었다. 반쯤 셔터를 내린 세탁소와 골목 입구 편의점의 푸른 불빛만 늦은 저녁을 밝히고 있었다.석진은 여울의 집이 정면으로 보이는 곳에 차를 세웠다.시동을 끄자 차 안이 순식간에 고요해졌다.낡은 붉은 벽돌 외벽, 창문마다 제멋대로 붙은 실외기, 사람이 드나들 때마다 희끄무레하게 켜졌다 꺼지는 공동현관 센서등.석진은 한동안 건물을 올려다봤다.휴대전화 화면에는 몇 시간 전 자신이 보낸 문자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집에서 기다려. 나 일 보고 갈게.]그리고 바로 아래.[오지 마세요.]석진은 그 짧은 문장을 내려다보다 화면을 껐다.그러고도 돌아가지 않았다.시트에 몸을 기대고 다시 건물을 바라봤다.이런 집.낯설지 않았다.오래전 여울과 살았던 옥탑방이 문득 떠올랐다.태강 최종면접을 보고 돌아온 날이었다.아직 결과도 나오지 않았는데 석진은 치킨 두 마리와 맥주를 사 왔다. 축하는 미리 하는 거라면서.옥탑방 앞 좁은 평상에 둘이 나란히 앉아 종이 상자를 가운데 두고 치킨을 뜯어 먹었다. 여름밤이라 옥상 바닥에는 낮 동안 달궈진 열기가 아직 남아 있었고, 멀리 보이는 아파트 창문들이 하나둘 불을 밝히고 있었다.여울이 맥주 캔을 들고 물었다.“나 떨어지면 어떡하려고 벌써 축하해?”“안 떨어져.”“뭘 그렇게 확신해.”“내가 보는 눈은 있거든.”여울이 피식 웃으며 치킨 한 조각을 석진의 입에 밀어 넣었다.“그럼 붙으면 오빠 덕이다?”“당연하지.”“웃기고 있네.”바람이 불자 여울의 머리카락이 얼굴 앞으로 흩어졌다.편한 티셔츠에 화장기 하나 없는 얼굴. 맥주 한 모금에도 눈을 접어가며 웃던 스물넷의 여울.석진은 이상하게 그 얼굴을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했다.돈도 없
Last Updated: 2026-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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