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위에 올라탄 유봉진은 여전히 정신이 아득하였다.유봉진의 뇌리에 맴도는 것은 멀리서 과녁을 꿰뚫던 유상무의 한 발이었다.유상무는 그 거리에서 한 발에 과녁의 정중앙을 꿰뚫었다.그건 거의 아무도 성공할 수 없는 거리와 각도였으며 지금껏 그 누구도 감히 시도하지 못한 자리였다.만약 예전처럼 과녁 정면에서 쏘아 한 발에 꿰뚫는다고 하더라도 방금 유상무의 시연에 비하면 초라해질 수밖에 없었다.허나 같은 자리에서는... 유봉진은 잔뜩 굳은 얼굴로 고뇌했다.그곳은 본디 인간이 넘볼 곳이 아니었고 유봉진은 시도한 적조차 없었기에 성공을 확신할 수도 없었다.“대군 나리.”뒤에서 선우명월이 나직이 시작해야 한다고 일깨워 주었다.허나 유봉진은 여전히 말 위에서 미동도 하지 않았다.사람들은 웅성이기 시작했으나 무슨 까닭인지 알지 못했고 멀리 황제와 서비조차 미간을 찌푸렸다.“대군 나리!”선우명월이 재차 부르자 유봉진은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말의 배를 찼다.말은 번개처럼 달렸으며 단 한 순간의 머뭇거림으로 인해 그새 말은 과녁 정면을 지나쳐 버렸다.유봉진도 유상무처럼 과녁 바로 앞에서 활을 쏘지 않았다.사람들은 긴장하기 시작했고 어떤 이는 자리에서 일어나기까지 했다. 다들 동릉 전투의 신이 어떤 활약을 보여줄지 기대하고 있었다.유상무가 북강의 왕이라면 유봉진은 전투의 신이다. 유봉진은 오랜 세월 단 한 번의 패전만 있었을 뿐 오늘에 이르기까지 누구도 유봉진의 공적을 능가하지 못하였다.허나 방금 유봉진은 최적의 기회를 놓쳤다.뒤늦게 활을 당겨 보았으나 이미 과녁의 정면을 훌쩍 벗어난 뒤였다.지금 위치는 정면을 벗어났으나 유상무가 활을 쏜 위치와는 아직 거리가 멀다. 만약 지금 여기서 쏜다면 과녁을 맞힌다고 해도 유상무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허나 끝까지 끌고 가다가는 과녁을 맞히리라는 자신이 없었다.그사이 말은 어느덧 장내 끝자락에 이르렀고 그 자리는 바로 유상무가 아까 화살을 날린 자리였다.유봉진은 이를 악물고 활시위를 놓았다.“휙!”
유상무의 대오는 다른 대오와는 사뭇 달랐다.앞장선 이는 검은 예복을 휘날리며 말을 탄 사내로 반쪽 가면을 쓴 유상무 본인이었다.유상무의 태도는 왠지 모르게 산만하고 느긋해 보였다.유상무가 활을 집어 들고 말의 배를 살짝 차니 말은 바람처럼 내달렸다.허나 유상무는 활을 천천히 들어 올릴 뿐 움직이지 않았으며 말은 이미 과녁을 지나쳐 한참을 달려 나갔다.사람들은 실망을 금치 못했다.‘이것이 정녕 북강의 왕의 실력이란 말인가?’말이 과녁을 훌쩍 지나쳤는데도 유상무는 여전히 느긋하게 화살을 시위에 걸고만 있었다.과연 장내를 한 바퀴 돌아서 다시 쏘려는 것일까?그렇다면 애초에 화살을 쏘지도 못했으니 이번 한 바퀴는 빗나간 셈일 터.황제도 실망한 듯 안세권이 올린 찻잔을 받아 들고 차를 음미하기 시작했다.추소하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손바닥에 힘을 주며 극도로 긴장하였다.추월녀 또한 처음에는 영문을 알 수 없었으나 갑자기 눈앞이 번뜩이며 무심결에 탄성이 흘러나왔다.“무왕은 가장 까다롭고 험난한 각도를 기다려 그곳에서 한 발을 쏘려는 것입니다!”그 말이 끝나기 바쁘게 화살이 유상무의 손에서 벗어나 번개처럼 날아갔다.까다로운 위치에서 사격하는 유상무의 모습에 사람들은 숨을 죽였다.그곳은 장내에서 가장 외지고 먼 모퉁이로 말이 조금 더 달리면 곧 되돌아설 자리였다.그런 각도와 거리에서는 화살이 과녁에 닿는 것조차 불가능했다.허나 곧 숨죽이고 있던 사람들이 곧장 장내를 뒤흔드는 환호를 쏟아냈다.유상무의 화살이 과녁 정중앙을 꿰뚫은 것이다!갑자기 사격장은 뜨겁게 들끓었으며 잠시 넋을 잃었던 추소하도 곧 크게 환호했다.“무왕! 무왕!”추소하는 금세라도 유상무의 가장 열렬한 추종자가 될 기세였다.만약 추월녀가 붙들지 않았다면 추소하는 당장 달려가 우상을 껴안을 기세였다.추월녀는 욱신거리는 관자놀이를 누르면서 대마왕은 실로 두려운 존재라고 생각했다.유상무가 대단할수록 훗날 추월녀에게 들이닥칠 재앙은 더 크게 된다.무왕의 뒤를 잇는 자들도
“큰 오라버니, 청하 언니는 국공부와 멀지 않은 곳에 머물고 계십니다. 벌서 그곳에 지내신 지도 여섯 해가 다 되어갑니다.”추월녀의 말에 추소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으며 크게 놀랐다.“청하 낭자...”그 순간 추소하는 문득 뭔가 깨달은 듯 가슴이 시려왔다.“청하 낭자, 무엇 하러 이토록 자신을 괴롭히는 겁니까? 사람은 죽으면 다시 돌아오지 못하거늘. 셋째 숙부님은 이미 전장에서 떠나셨습니다. 낭자도 새 삶을 열 수 있었을 터인데 어찌 이리도 집착하는 겁니까?”“폐하께서 곧 도착하십니다.”추일이 귀띔하자 다들 감정을 추스르고 자세를 바로잡았다.문채이는 추월녀를 바라보며 빙그레 웃었다.“나 또한 청하 낭자의 결정을 기다리느라 이리 늦게 오게 된 것입니다.”“그럼 이제는 진정 마음을 정하셨습니까, 청하 언니?”추월녀는 구청하를 마주 보며 물었다.“비록 이미 언니의 결심을 느끼고 있지만 오늘이 지나면 다시는 혼인을 생각할 수 없을 겁니다.”“이번 생에 낭군님 외에는 누구에게도 시집가지 않을 겁니다.”구청하는 눈가가 살짝 붉어졌으나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추월녀는 구청하의 손을 이끌어 국공부의 깃발 앞에 섰다.그때 황제가 마침내 도착하였고 황후 또한 후궁의 여인들을 거느리고 황제 뒤를 따랐다.함께 온 이들 중에는 동주의 삼황자 선우혁이 이끄는 대열도 있었다.사람들이 예를 올린 뒤 안세권이 웃으며 말했다.“삼황자께서 우리 동릉의 해마다 열리는 추계 사냥대회에 크나큰 흥미를 보이셨습니다. 이번에는 삼황자께서도 직접 사냥대를 거느리고 나서셨으니 제군들은 모두 마음을 다잡아야 할 것입니다.”삼황자의 사냥대는 오직 네 명뿐으로 동릉의 다섯 명인 대열과는 달랐다.만약 선우혁이 우승한다면 이는 곧 동릉의 체면이 산산이 부서지는 것이나 다름없었다.모두가 정신을 바짝 차렸고 특히 올해는 두 황자가 새로 사냥대를 이끌고 나섰으니 더 분발해야 했다.여덟째 황자 유자능과 아홉째 황자 유운천은 아직 공적이 없어 왕의 칭호를 얻지 못하여 아직 황
그렇게 기다림이 이어지기를 또 반 시진이나 지났다.추일이 급히 달려와 낮게 보고하였다.“폐하와 황후마마의 대오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곧 도착하실 것입니다!”황제가 온다는 말에 사람들은 모두 정신을 곤두세웠고 추소하는 진땀을 흘리며 다급히 물었다.“월녀야, 폐하께서 곧 도착하신다. 우리가 아직 기다리는 이는 정녕 누구란 말이냐?”추소하는 추월녀가 분명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음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허나 황제가 도착하였는데도 그 비밀 인물이 도착하지 않는다면 그 뒤에 도착한다 하더라도 불경이 될 터였다. 그러면 사냥터에 들어갈 자격조차 잃을 수도 있었다.그때 바깥에서 갑작스레 빠른 발소리가 들려왔고 추월녀는 표정이 밝아지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큰 오라버니, 그분들이 도착했습니다!”“그분들이라니? 네가 기다리던 이가 대체 누구란 말이냐?”숲 어귀에서 두 사람이 말을 타고 다가왔는데 뜻밖에도 모두 여인이었다.앞선 여인은 서른 남짓 되어 보이는 이미 혼인한 부인의 차림이었고 얼굴은 다소 강직하였다.뒤의 여인은 갓 스무를 넘긴 듯한 아가씨의 차림이었으나 화장은 전혀 없고 눈빛 또한 담담했다. 다만 어딘가 어색하고 불편한 기색이 엿보였다.그러나 두 여인은 기마술만큼은 능숙하여 무리 속에서도 전혀 기세가 꿀리지 않았다.이들이 국공부의 사람들이란 말인가?두 여인은 말을 타고 곧장 추소하와 추월녀 앞으로 번개처럼 달려왔다.사람들은 모두 놀랐고 심지어 추소하마저도 급히 나서서 추월녀를 감싸안았다. 허나 말 두 필은 날카롭게 울며 땅을 박차더니 순식간에 그 자리에 멈추었다.빠르기가 번개와 같은 그 기마술 결코 얕보아서는 아니 되었다.“둘째 숙모님?”추소하는 앞장선 여인을 곧 알아보았다. 그 여인은 바로 둘째 숙부의 아내 문채이였다.둘째 숙부는 육 년 전 전장에서 전사하였고 그 뒤 문채이는 뒤뜰에 홀로 지내며 늘 집에만 머물렀다. 문채이도 영아란과 마찬가지로 세속을 멀리한 삶을 살고 있었다.문채이 또한 예전에는 둘째 숙부와 함께 전장에 나간
무왕이 국공부의 추월녀를 마음에 두고 있다니.유상무의 목소리는 크지도 작지도 않았으나 주위의 모든 이들이 똑똑히 들을 수 있는 정도였다.멀찍이 있던 유봉진조차 한마디도 놓치지 않고 귀에 전부 담고는 준수한 얼굴에 먹구름이 짙게 드리웠다.추소하 역시 얼이 빠져 있었으나 곧 정신을 차리더니 얼굴빛이 굳고 목소리 또한 엄숙해졌다.“대군 나리, 예로부터 혼사는 부모님의 명과 중매인의 말에 따르는 법입니다. 월녀는 아직 출가하지 않은 규수이니 부디 월녀를 두고 장난삼아 말씀하지 말아 주십시오!”추월녀는 마치 겁에 질린 듯 살짝 추소하의 뒤로 몸을 숨겼다.그 자태와 천지를 흔드는 듯 아름다운 얼굴이 겹치니 곁에서 지켜보던 사내들은 전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무왕이라 불리는 사내가 차가운 가면 반쪽을 걸친 채 그 앞에 서 있으니 그 모습은 마치 사납고도 굶주린 늑대와 다름없었다.허나 유상무는 추소하를 보며 입가의 가벼운 웃음을 거두었다.“추 장군의 대열을 혹여 무왕부에서 도와줄 필요는 없겠습니까?”유상무의 목소리는 크지 않아 오직 추소하 일행만이 들을 수 있었다.추소하는 한참을 멍하니 서서 그 의중을 헤아리려고 했으나 도무지 가늠할 수가 없어 결국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필요 없습니다. 대군 나리의 은혜만으로도 족합니다.”“큰형님, 저는 진심입니다.”유상무는 그 한마디를 남기고 몸을 돌려 걸어갔지만 추소하는 그 자리에서 멍하니 얼어붙었다.방금 무왕은 분명 추소하를 큰 형님이라고 불렀다!이 세상에서 추소하를 그렇게 부를 수 있는 사람은 두 사람뿐이다.한 명은 여동생인 추월녀고 또 다른 한 명은 장차 추월녀의 배필이 될 사내다.“큰 오라버니, 숙모님께서 도착하셨습니다.”추월녀가 추소하의 소매를 살짝 당겼다.추소하는 뒤를 돌아 영아란을 보았으나 여전히 정신이 혼미하였다.“월녀야, 너 무왕 대군 나리와 혹시...”“아무런 사이도 아닙니다.”추월녀는 추소하의 팔을 몰래 꼬집어 정신을 차리게 하였다.그제야 완전히 정신이 돌아온 추소하는 말
선우명월은 멀리서 다가오는 사내의 모습에 심장이 세차게 요동쳤다.그 사내는 바로 북강의 왕 유상무였다!햇살이 유상무의 몸 위로 쏟아져 내려 마치 후광을 드리운 듯 찬란하였다. 허나 그 빛은 눈 부신 동시에 헤아릴 수 없는 깊이를 감추고 있었다.선우명월은 숨결이 잠시 흐트러졌다. 이윽고 곁에 있던 몇몇 무장의 풍모를 지닌 대신들이 서둘러 앞으로 나아가 유상무에게 주먹을 모아 예를 올렸다.유봉진은 미간이 깊이 찌푸려졌다.저 장수들은 본래 유봉진과 가까이 지내기를 좋아하던 자들이었다. 이번에 유봉진이 왔을 때는 그저 의례적인 인사만 건네고는 다른 말이 없었다.허나 유상무를 향한 그들의 열정은 눈에 불길이 일 듯 뚜렷하였다!“대군 나리께서 전일 석산 전투에서 크게 패하셨고 또 어떤 여인이 나서서 요란하게 구했다고 들었습니다. 저들은 무장들이니 자연스레 장수의 체면을 잃었다고 여기는 것입니다.”선우명월이 옆에서 차갑게 말을 한마디 했다.“허나 노하지 마십시오. 저런 자들은 제가 잘 아는데 다만 강한 자를 좇는 것일 뿐입니다. 대군 나리께서 이번 추계 사냥대회에서 승리하신다면 저들은 분명 다시 달라붙을 것입니다.”크게 분노하고 있던 유봉진은 선우명월의 정 없는 말에 오히려 마음이 진정되는 듯하였다.결국은 권세에 빌붙는 하찮은 무리일 뿐이니 굳이 상종할 이유도 없었다.“본왕은 분노하지 않았다.”유봉진은 콧소리를 내며 더는 무왕부 쪽을 신경 쓰지 않고 진무 등과 함께 오늘 사냥대회의 일정을 상의하였다.허나 선우명월의 시선은 본능적으로 자꾸만 옆으로 흘렀다.말에서 내릴 때 유상무의 두 다리는 가히 천지를 흔들 듯 길고 당당하였다!무엇보다도 두꺼운 바지를 사이에 두고서도 알 수 있을 만큼 다리의 근육은 단단하고 강인하였다.곧 선우명월의 표정이 달라졌다.유상무가 말에서 내린 후 사람들과 인사할 여유도 없이 곧장 한쪽 구석으로 걸음을 옮겼기 때문이다.그곳은 국공부의 대열이 있는 곳이었다!막 자리에 앉은 추월녀는 고개를 들기도 전에 이미 싸늘한 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