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예지는 더 이상 고수경의 날 선 말에 흔들리지 않고 담담한 표정으로 쓴웃음을 지었다.“내 인생을 다시 살 수 있다면 절대 이렇게 바보 같은 선택은 하지 않을 거야.”고수경이 비웃듯 코웃음을 치며 뭔가 더 말하려던 그 순간, 복도 끝에서 길고 날렵한 실루엣이 천천히 다가오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오빠!”소예지는 본능적으로 발걸음을 멈췄지만 끝내 뒤돌아보지 않았다.고이한이 조용히 다가왔다. 그의 시선은 소예지의 등 뒤에 잠시 머물다, 이내 동생인 고수경에게로 옮겨졌다.“여긴 왜 온 거야?”“그냥, 저 여자한테 따지러 왔어. 도대체 무슨 자격으로 그 많은 재산을 가져간 건지!”고이한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그건 나와 소예지 사이의 일이야. 네가 끼어들 문제는 아니야.”뜻밖의 반응에 고수경은 입을 다물지 못한 채 얼어붙었다.“하지만 오빠, 그건...”“돌아가.”짧고 단호한 한마디에 고수경은 끝내 말을 잇지 못한 채, 분한 듯 소예지를 짧게 노려보다가 이를 악물고 발걸음을 돌렸다.복도엔 다시 정적만이 감돌았다.소예지는 천천히 몸을 돌려 그를 마주했다.“고 대표님, 부탁인데요. 앞으로 당신 가족들이 내 인생에 더 이상 끼어들지 않게 해주세요.”일부러 거리를 둔 듯한 호칭에 고이한의 눈빛이 짙게 어두워졌다.그는 눈앞의 여자를 바라보았다. 한때 따스하고 다정하던 눈동자 속엔 이제 낯선 사람을 대하듯 차가운 빛만이 감돌고 있었다.잠시 침묵이 흘렀고 그 침묵을 깬 건 고이한이었다.“내 동생 말은 신경 쓰지 마.”“그 애 말이 틀린 것도 아니죠. 난 당신한테 내 인생의 6년을 허비했어요.”“꼭 그렇게까지 말해야겠어?”고이한의 목소리에 냉기가 서려 있었지만 소예지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말했다.“전 사실만 말했을 뿐이에요. 듣기 싫으면 안 들으면 되죠, 고 대표님.”그 순간, 옆에서 지켜보던 강준석이 조심스럽게 나섰다.“고 대표님, 저희 곧 회의가 시작됩니다. 더 이상 중요한 일이 없으시다면 저희는 먼저 들어가겠습니다.”그 말
엘리베이터 안, 고수경은 어머니의 팔짱을 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엄마, 뭔가 알고 계시는 거죠?”그러나 진가영은 말 대신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앞으로 이 일은 다시는 소예지 앞에서 꺼내지 마. 이미 결정된 일이야. 우리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어.”그녀는 단호하게 말을 마치고 로비에 도착하자마자 대기 중이던 차로 곧장 걸어가 문을 열고 타버렸다. 고수경은 멀어지는 차량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입꼬리에 싸늘한 냉소를 띠었다.“소예지... 우리 고씨 가문은 그렇게 만만한 사람들이 아니야.”시계를 확인한 고수경은 곧장 소예지의 위치를 파악할 방법을 떠올렸다. 다행히도 그녀에겐 확실한 카드가 하나 있었다. 바로 소예지의 동료, 안채린.과거 윤하준의 비서로 일할 때 우연히 안채린의 연락처를 받아두었던 것이다.고수경이 메시지를 보내자 얼마 지나지 않아 답장이 도착했다.“소예지 지금 MD 회사에 있어요. 가보면 만날 수 있을 거예요.”MD사 회의실.소예지는 회의를 진지하게 이끌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회의실 문이 벌컥 열렸다.고수경이 굳은 얼굴로 성큼 들어서며 외쳤다.“소예지, 나와. 지금 당장!”분노를 억누른 채 고개를 든 소예지는 조용히 옆에 있던 주현우를 바라봤다.“죄송해요, 주 대표님. 잠시만 다녀올게요.”그녀가 회의실을 나서자, 강준석 역시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뒤따랐다.복도 한가운데, 고수경은 씩씩거리며 다가오더니 소예지를 향해 독기 어린 눈빛을 내던졌다.“도대체 우리 오빠를 얼마나 닦달한 거야? 어떻게 회사 여덟 개나 너한테 넘기게 만든 거냐고!”소예지는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이혼 재산 분할에 불만이 있다면 변호사를 통해 얘기해줘요.”결혼한 순간부터 고수경은 한 번도 자신을 가족으로 존중한 적이 없었다. 그러니 지금처럼 몰아붙이는 방식도 전혀 놀랍지 않았다.고수경은 비웃음을 지으며 콧방귀를 뀌었다.“변호사? 우리도 변호사 수두룩해. 너 하나 엿 먹이는 건 일도 아
“엄마, 무슨 일이에요?”“너 오빠 회사에 같이 좀 가자.”진가영은 분노를 꾹 누른 채 낮고 단호하게 말했다.“무슨 일인데요? 저 아직 근무 중이에요!”고수경이 당황한 얼굴로 되물었다.“가보면 알게 돼.”진가영은 이를 악물었다.‘16조라니, 소예지가 대체 이한이한테 뭘 한 거야.’그녀는 아들이 소예지에게 어느 정도 자산을 넘길 거라는 사실은 어렴풋이 예상하고 있었다.하지만 16조 원이라는 규모는 상상조차 못 한 일이었다.‘안 돼. 이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어.’결국 고수경은 급히 휴가를 내고 어머니와 함께 오빠의 회사로 향했다.30분 후, 고신 그룹 본사 로비.먼저 도착한 고수경은 분노로 가득 찬 어머니의 얼굴을 보자 다급히 다가갔다.“엄마, 대체 무슨 일이에요?”엘리베이터에 올라탄 뒤에야 진가영은 입을 열었다.고수경은 순간, 눈앞이 캄캄해졌고 화가 나서 정신이 아득해질 지경이었다.“뭐라고요? 소예지가 오빠 재산 16조 원을 가져갔다고요? 도대체 무슨 깡으로 그런 걸 요구한 거예요?”고수경은 분노에 휩싸여 주먹을 불끈 쥐었다.“분명 소예지가 무슨 수를 써서 오빠를 속인 거야. 이건 절대 그냥 넘어갈 수 없어!”그 시각, 고이한의 사무실.비서가 다급히 들어와 보고했다.“대표님, 어머님과 동생분이 오셨습니다.”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진가영이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묵묵히 책상에 앉아 있는 아들을 보는 순간, 그녀의 인내심은 한계에 다다랐다.“말해 봐. 너 정말 소예지한테 회사 8개를 넘겼어? 규모가 16조라며!”고이한은 조용히 어머니의 시선을 받아들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네, 맞아요.”그 대답에 고수경도 더는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오빠, 제정신이야? 그 여잔 이제 남이잖아! 아무리 우리가 돈이 많다지만 이건 너무했어!”“나중에 재산은 하슬이에게 넘기면 되잖아. 지금 소예지한테 준다고 해도, 그 여자가 재혼이라도 하면 그 돈은 전부 남 좋은 일 시키는 거라고!”진가영의 목소리는 떨렸고 눈빛에는 분노와
소예지는 첫 번째 지분 계약서를 집어 들어 조항들과 지분 구조도를 꼼꼼히 살폈다.“걱정 마. 계약서엔 아무 문제 없어.”고이한이 여유롭게 눈썹을 치켜올리며 말했다.그녀는 말없이 펜을 들어 사인을 시작했다.총 여덟 부나 되는 계약서에 차례로 서명하다 보니, 손끝이 저릿하게 아려올 정도였다.그 모습을 지켜보던 김경환은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이 서류들에 사인만 하면 단숨에 자산 16조짜리 여성 재벌이 되는 건데... 사모님은 그걸 알고나 있는 걸까?’고이한은 혹시라도 그녀가 빠뜨릴까 싶어, 조용히 그녀의 손끝을 날카롭게 지켜보고 있었다.그리고 마침내 소예지가 모든 서류에 마지막 서명을 마치자, 고이한이 입을 열었다.“잠시 후에 주주총회가 있어. 당신은 우리 회사의 2대 주주 자격으로 참석해야 해.”“뭐라고?”소예지는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우리 회사랑 당신 쪽 회사 간엔 얽힌 사업이 꽤 많아. 오늘 회의에 당신은, 당신 명의로 된 회사를 대표해서 출석해야 해.”소예지는 뭔가 속은 듯한 기분이 들었지만 지금 당장은 뭘 속은 건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오전 10시, 고신 그룹의 주주총회가 정각에 시작됐다.중년 임원들 틈에 앉은 소예지의 존재는 단연 눈에 띄었다.게다가 젊고 고운 외모에 몇몇 이사들은 눈길을 떼지 못하고 그녀를 힐끔힐끔 훔쳐보았다.하지만 그런 시선도 오래가지 못했다.회의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 김경환이 깜짝 놀랄 발표를 했다.“이 자리에 계신 소예지 씨는 고신 그룹 산하 8개 회사의 지분을 보유한 2대 주주입니다. 현재 이 자리에 계신 분들 중 고 대표님 다음으로 가장 많은 지분을 가지고 계시죠.”회의장은 일순 술렁이기 시작했다.‘저렇게 젊은데 자산이 16조라고?’‘평소에 얼굴도 안 비추던 사모님, 역시 보통 인물이 아니었군.’정작 당사자인 소예지는 회의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듯,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조용히 앉아 있었다.그녀를 바라보는 고이한의 눈엔 묘한 기색이 스쳤고 둘 사이에는 의미를
회의실 안의 분위기는 묘하게 긴장되어 있었다. 모두가 눈치챌 수 있을 정도로, 안채린은 소예지의 이론에 대해 딴죽을 걸듯 태클을 거는 말투였다.하지만 그 누구도 나서서 반박하지 않았고 양정화조차도 그저 웃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회의가 끝난 뒤, 소예지가 사무실로 돌아오자 이서연이 과일 바구니 하나를 들고 찾아왔다.“예지야, 오늘 아침에 산 건데, 맛 좀 볼래?”소예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포도 한 송이를 집어 들었다.“고마워.”“별말을. 우리 동료 사이잖아.”이서연은 해맑은 웃음을 지었지만 그 속엔 어딘가 미묘한 쓴웃음이 섞여 있었다.처음 소예지를 마주했을 땐, 그녀의 정체도 모르고 무심코 막말을 내뱉었다.이젠 어쩌겠는가. 이미 물은 엎질러졌고 결국 이렇게 얼굴 두껍게 굴며 그녀에게 잘 보이려 애쓰는 수밖에.이제 와서 얼굴 두껍게라도 굴며 환심을 사야 했다.소예지는 재벌 중의 재벌인 남편을 둔 사람이었고 이 실험실의 최대 투자자의 아내였다.그녀가 마음만 먹는다면 실험실 전체의 주도권도 가져갈 수 있는 인물이었고 그런 그녀에게 밉보이지 않는 것만으로도, 이서연에게는 충분한 이유가 됐다.주말 동안, 소예지는 딸과 함께 평화롭고 따스한 시간을 보냈다.그리고 어느덧 월요일 아침이 밝았다.가정법원 대기실.소예지는 약속 시간보다 조금 이른 9시 30분에 도착해 조용히 번호표를 뽑고 자리에 앉아 있었다.9시 50분, 고이한이 모습을 드러냈다.먼저 와 있는 그녀를 보자 그는 시계를 확인하며 다가왔다.“오래 기다렸어?”그의 물음에 소예지는 담담히 대답했다.“방금 도착했어.”고이한은 옆에 따라 앉았고 시선은 그녀의 얼굴에 머물렀다.“서류는 다 챙겼지?”바로 그때, 번호가 불렸다.소예지는 손에 든 번호표를 확인한 뒤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우리 차례야.”직원은 몇 가지 신원 확인 절차를 마친 후, 곧 이혼 신청 절차를 시작했다.하지만 이혼은 그렇게 단박에 끝나는 일이 아니었다.법적으로는 3개월의 ‘숙려 기간’을
회의가 시작되자 각 지역의 지사 대표들이 차례로 단상에 올라 성과를 보고했다.그중 가장 중심이 되는 앞줄 한가운데 자리한 고이한은 진지한 표정으로 발표를 경청하고 있었다.이내 주현우의 차례가 되었다.그가 발표한 AI와 의학의 융합 성과는 실로 눈부셨고 참석자 모두의 이목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했다. 미래 핵심 산업으로서의 가능성이 명확히 드러나는 내용이었다.발표가 끝나자 회의장은 뜨거운 박수로 가득 찼다.자리로 돌아온 주현우는 소예지를 향해 몸을 살짝 숙이며 정중히 말했다.“오늘의 성과는 전적으로 소예지 선생님 덕분입니다.”소예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모두가 함께한 결과예요.”회의 중 잠시 화장실에 다녀오던 소예지는 복도에서 고이한과 마주쳤다.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다음 주 월요일 시간 괜찮아?”소예지는 모른 척 지나치려 했지만 그의 다음 말이 그녀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이혼하러 가자.”그 말에 소예지는 무의식적으로 바로 대답했다.“시간 있어.”그의 말에 망설임 없이 반응한 건 처음이었다.혹시나 고이한이 말을 번복할까 봐 재빠르게 대답하고 만 것이다.“몇 시에?”“열 시. 늦지 마.”그는 짧게 말한 뒤 남자 화장실로 들어갔다.그리고 그 장면을 복도 모퉁이에서 심유빈과 고수경이 엿듣고 있었다.“드디어 이혼하나 봐.”“이제 완전히 끝나는 거네.”두 사람은 흥분을 감추지 못한 채 눈빛을 주고받았다.고수경은 웃으며 농담처럼 말했다.“우리 오빠, 또 늦을까 봐 시간까지 챙겨주네. 무뚝뚝한 거 좀 봐.”심유빈 역시 안도한 듯 가볍게 미소 지었다.이혼이 마무리되면 고이한은 다시 완전한 싱글이 된다.회의가 끝난 뒤, 점심시간이 다가오자 주현우는 근처 고급 식당을 예약하고 자신의 팀원들과 함께 소예지, 그리고 강준석을 초대했다.식사 도중 소예지는 전화가 걸려 와 잠시 자리를 비웠고 그 순간 그녀의 시선 너머 거대한 통유리창 밖으로 고이한, 고수경, 그리고 심유빈이 함께 점심을 먹고 있는 장면이 눈에 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