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제4화

Author: 이야기보따리
소예지는 가장 먼저 교실에 도착했다. 정성껏 꾸민 덕에 고하슬도 으쓱해 하면서 가방을 들고나와 친구들에게 말했다.

“이 사람은 우리 엄마야.”

소예지는 손을 뻗어 딸을 번쩍 안았다.

“하슬이 오늘 정말 잘했어.”

집으로 돌아온 후 양희순에게 케이크와 쿠키 재료를 준비해달라고 했다.

고하슬은 신난 얼굴로 소예지를 졸졸 따라다니며 케이크를 어떻게 만드는지 지켜보았다. 소예지는 미리 만들어둔 쿠키 반죽을 오븐에 넣었다. 아몬드의 달콤한 향기가 거실에 퍼지자 저도 모르게 군침이 돌았다.

고하슬이 손뼉을 치며 기뻐했다.

“쿠키 먹고 싶어요.”

“금방 되니까 조금만 기다려.”

소예지는 일부러 밀가루를 찍어 자기 얼굴에 발랐다.

고하슬은 바로 알아챘지만 엄마에게 말하지 않고 몰래 휴지를 가지러 갔다. 휴지를 가져와서야 엄마의 옷소매를 잡아당기며 말했다.

“엄마, 얼굴에 밀가루 묻었어요. 내가 닦아줄게요.”

소예지가 놀란 척했다.

“어머. 정말?”

그러고는 몸을 숙여 고하슬이 진지하게 얼굴을 닦아주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녀의 눈시울이 갑자기 붉어졌다. 딸 때문에 가끔 속상하긴 해도 착한 아이였다.

고하슬은 얼굴을 꼼꼼하게 닦아준 후 의기양양하게 물었다.

“엄마, 나 잘했죠?”

“정말 잘했어.”

소예지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녀는 가장 좋은 재료로 딸에게 케이크를 만들어주었다. 동시에 설탕의 양도 조절했기에 밖에서 파는 것보다 더 깨끗하고 영양가가 있었다.

드디어 예쁜 작은 케이크가 완성되었다. 시간이 어느덧 저녁 6시 30분을 가리켰다. 고하슬은 곧 어두워지는 밖을 내다보면서 입을 삐죽거렸다.

“아빠는 왜 아직도 안 와요?”

소예지는 고이한이 집에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걸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다. 오늘 유치원에서 심유빈에게 정식으로 선전포고를 했기 때문에 지금쯤 고이한은 심유빈의 옆에 있을 것이다.

그때 전화벨이 울리자 양희순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알겠습니다. 사모님께 말씀드릴게요.”

양희순이 전화를 끊고 소예지에게 말했다.

“사모님, 대표님께서 저녁 약속 있으시다고 밖에서 식사하고 오신대요.”

소예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오늘 저녁은 우리 셋이 먹어요.”

지금부터 소예지는 그 누구도 그녀와 딸의 기분을 망치게 하지 않을 것이다.

저녁 식사를 마친 후 소예지는 딸과 함께 잔디밭에서 공놀이를 했다. 일부러 넘어지는 척하자 고하슬이 곧바로 달려와 걱정했다. 소예지는 다리를 저는 척했다. 딸의 두 눈에 걱정과 안타까움이 가득했다.

소예지는 벅찬 감동이 밀려왔다.

어느덧 잘 시간이 되어 고하슬을 씻겼다. 노느라 지쳤던 고하슬은 9시 30분에 스스로 잠자리에 들었다. 소예지는 조용히 방 문을 닫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곧장 서재로 가서 실험 계획서를 작성했다. 이건 그녀가 연구하는 과제였는데 줄곧 포기하지 않은 걸 다행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동안 좋은 아내가 되기 위해, 그리고 고이한이 싫어할까 봐 많은 것을 숨겨왔다.

조명 아래 소예지의 모습은 자신감으로 가득 찼다. 이제부터는 숨기지 않고 자기의 삶을 살아가기로 결심했다.

소예지의 아버지 소영욱은 국내 최고의 의학 박사였고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수많은 엘리트 인재들을 길러냈다. 소예지는 실험실을 설립하여 아버지가 완성하지 못한 의학 성과를 세상에 내놓기로 했다. 이 또한 아버지의 소원이었다.

컴퓨터를 덮고 미간을 주무르면서 딸과 함께 자려고 방으로 돌아가려 했다.

자정이 조금 넘은 시간, 아직 잠들지 않은 소예지는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었다. 고이한이 집에 들어온 것이었다.

평소 고이한이 늦게 들어올 때마다 소예지는 밖으로 나가 챙겨주었다. 그가 술을 마셨다면 해장국을 끓여주었고 단순히 피곤하다고 하면 따뜻한 우유를 데워 잠들도록 도와주었다.

결혼은 그녀를 가사노동자로 만들었다. 빨래, 요리, 눈치 보는 것... 그러다가 결국에는 힘들기만 하고 보람은 없는 도우미로 훈련되었다.

발소리가 방문 앞에 멈추자 소예지는 재빨리 눈을 감았다.

문이 열리고 훤칠한 그림자가 소예지의 침대 앞으로 다가왔다. 공기 중에 술 냄새와 여자의 향수 냄새가 은은하게 섞여 있었다. 심유빈이 즐겨 쓰는 향수였다.

고이한은 몸을 숙여 딸의 이불을 여며준 다음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소예지가 자는 척한 바람에 그의 입맞춤을 피하지 못했다.

따뜻한 입맞춤이 이마에 닿았다.

그 순간 소예지는 온몸이 굳어지는 듯했다. 고이한이 떠나자마자 재빨리 물티슈를 꺼내 입술이 닿았던 곳을 닦았다.

방금 다른 여자와 함께 시간을 보낸 남자라 더럽게 느껴졌다.

그 후 3일 동안 소예지와 고하슬의 관계가 많이 회복되었다. 어릴 때부터 품에 안고 키운 딸이라 관계를 개선하는 게 그리 어렵지 않았다.

딸의 사랑을 단지 다른 사람에게 빼앗긴 것일 뿐 사라진 건 아니었다. 소예지가 인내심 있게 기다린다면 딸이 그녀에게 의지하던 모습을 되살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금요일 점심, 소예지는 서재에서 오전 내내 계획서를 작성하다가 목이 말라 아래층으로 내려가던 중 계단을 올라오는 고이한을 보았다.

소예지는 3층 서재에서 내려갔고 결국 두 사람은 마주치고 말았다. 하지만 소예지는 그를 그냥 지나쳐 아래층으로 내려가 차를 마셨다.

“아직도 화났어?”

고이한의 목소리에 불쾌감이 섞여 있었다.

소예지는 잠깐 멈칫했다가 돌아섰다.

“내가 왜 화를 내?”

“아니면 됐어.”

고이한은 더는 말하고 싶지 않은 듯 위층으로 올라갔다.

그녀는 미간을 찌푸린 채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최근 두 사람 사이의 많은 일들을 잊어버린 건 사실이었다.

몇 분 후 마침내 기억이 났다. 보름 전 소예지는 고이한과 심유빈의 해외 데이트를 막으려고 충동적으로 고이한의 여권을 찢어버렸다.

그 일로 고이한과 소예지는 일주일 동안 냉전을 펼쳤다. 결국 소예지가 고하슬이 잠든 틈을 타 그의 침실로 들어가 먼저 스킨십하면서 부부 관계를 가지고 나서야 화해했다.

조금 전 고이한이 말한 일이 바로 이 일이었다.

소예지는 그녀가 아무리 막아도 고이한은 결국 심유빈과 함께 해외에서 크리스마스를 보내려고 고하슬을 데리고 갈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멍하니 있던 그때 소예지의 휴대폰이 울려 웃으면서 전화를 받았다.

“윤혁 선배.”

“예지야, 네 논문 전부 다 읽어봤는데 정말 대단하더라. 너랑 빨리 만나서 얘기하고 싶어.”

전화기 너머로 흥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좋게 봐줘서 고마워요, 선배.”

“요 며칠 시간 돼? 우리 만나서 얘기하자. 내가 거기 갈게.”

“나중에 내가 시간 정하면 안 될까요?”

“그래, 그럼. 시간 될 때 만나자.”

소예지는 찻잔을 들고 위층으로 올라가면서 손목시계를 보았다. 고하슬의 하원 시간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고이한은 어젯밤에도 새벽이 지나서야 집에 들어왔기에 지금쯤 방에서 곤히 자고 있을 것이다. 소예지도 그를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고이한은 자지 않고 2층 거실에서 계속 통화하고 있었다.

“다음 주 월요일 비행기야. 응, 하슬이도 데려갈 거야. 갖고 싶은 선물 있으면 뭐든지 말해.”

소예지는 몸을 돌려 현관에 숨었다. 고이한이 방으로 들어가면서 이렇게 말했다.

“다 들어줄게.”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Latest chapter

  • 전처분이 의학계를 휩쓸고 다니십니다   제100화

    소예지는 몸을 돌려 뒤에 서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팔짱을 낀 그녀의 입술에는 조롱이 서린 미소가 희미하게 번지고 있었다. 한참을 말없이 그를 응시하던 소예지는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계단을 올라가 버렸다.씁쓸한 고이한의 눈빛도 갈피를 잡지 못한 복잡한 감정으로 심하게 흔들렸다.소예지는 방으로 들어가 딸을 재웠고 고이한 역시 샤워를 마치고 곧이어 딸의 방으로 들어왔다. 어린 딸아이가 앳된 목소리로 재잘거리자 그는 몇 번이나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우리 공주님, 아빠의 귀염둥이.”고이한은 젖내가 아직 가시지 않은 딸을 조심스럽게 품에 안아 한 번 입을 맞춘 뒤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이내 몸을 숙여 소예지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소예지는 순간 온몸이 굳어졌지만 딸 앞이라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필사적으로 감정을 억누르며 그가 방을 나서자 소매로 서둘러 이마를 문질렀다.새벽녘이었다.고이한은 침대 위에 팔을 베고 누운 채 휴대폰으로 한 동영상을 틀었다. 영상 속 장면은 8년 전의 모습이었다.병상에 의식 없이 누워있는 그 곁에서 한 소녀가 손을 꼭 잡은 채 부드럽게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어때? 새로 배운 노래야. 자장가처럼 불러줄 테니까 어서 일어나서 좋다고 말해줘야 해.”소녀의 목소리는 맑고 고왔으며 생기로 가득 차 있었다.“이번엔 새로운 동화책 읽어줄 거야. 듣기 싫으면 빨리 일어나서 말해줘. 그렇지 않으면 싫다고 할 때까지 계속 읽어줄 거니까.”중환자실 안에서 소녀는 침대 가장자리에 기대어 앉아 생동감 넘치는 표정으로 동화책을 읽어 내려갔다.고이한은 휴대폰을 내려놓고 팔을 베고 누운 채 천천히 눈을 감았다. 지난 반년 동안 소예지가 자신에게 보인 차가운 태도가 그의 가슴을 서늘하게 할 때마다, 그 기억은 더욱 선명해졌다.그는 잘 알고 있었다. 세상 그 누구도 소예지보다 자신을 더 사랑하는 사람은 없다는 사실을.다음 날 아침, 소예지는 딸을 데리고 아침 식사를 한 뒤 양희순과 함께 놀이공원으로 향했다. 고하슬은 여러

  • 전처분이 의학계를 휩쓸고 다니십니다   제99화

    “알겠어요, 제가 데리고 갈게요.”“정말 화가 나서 못 살겠다니까! 예지 걔는 나이가 들수록 고집만 더 세지니 원. 너희 둘 결혼한 지 벌써 6년이나 됐는데도 어린애처럼 철이 없으니 말이다!”진가영은 결국 참지 못하고 아들에게 불만을 쏟아냈다.“어머니, 제가 잘 타이르겠습니다.”고이한이 차분한 목소리로 어머니를 달랬다.“내가 그때 왜 그렇게 결혼을 반대했는지 이제는 너도 알겠지? 결국 이런 문제가 터지잖니. 사리 분별은커녕 어른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조차 없잖아!”진가영은 오늘만큼은 꼭 참아온 말을 다 해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그 순간 등 뒤에서 헛기침 소리가 들리자 그녀는 흠칫 놀라 고개를 돌렸다. 시어머니 최현숙이 서 있었다. 진가영은 급히 휴대폰에 대고 낮게 속삭였다.“이만 끊자.”최현숙은 이미 그녀가 하는 말을 다 들은 모양이었다.“넌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며느리랑 티격태격하니?”“어머니, 방금 걔가 얼마나 고집을 부리는지 못 보셔서 그래요. 내 딸이었으면 진작에 혼냈죠. 며느리니까 참고 있는 거죠.”진가영이 억울하다는 듯 하소연하자 최현숙이 그녀를 힐끗 바라보며 말했다.“요즘 애들 사이가 좀 냉랭해진 거 모르니? 젊은 사람들 일에 너무 끼어들지 마라.”진가영도 물론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아들이 오히려 안쓰럽고 마음 아팠다.“우리 이한이가 한 달 생활비만 몇억씩 꼬박꼬박 챙겨주는데, 도대체 얼마나 더 잘해줘야 하나요? 그런데도 매번 그렇게 싸늘하게 구니...”최현숙은 손자가 최근 너무 바빠 손자며느리를 외롭게 만든 탓이라 생각했다.‘앞으로 이 늙은이가 잘 다독여서 둘 사이를 더 돈독하게 만들어야겠어.’고이한의 별장.“엄마, 이것 봐요! 내가 그린 그림이에요. 엄마, 아빠, 나랑 젤리까지 다 있어요!”딸 고하슬이 자신이 그린 그림을 들고 달려왔다.소예지는 딸의 귀여운 볼을 살짝 비비며 칭찬했다.“우리 하슬이 정말 잘 그렸네! 내일 쉬는 날인데 어디 가고 싶어?”아이는 엄마의 목을 끌어안으며 환하게 웃었다.“놀

  • 전처분이 의학계를 휩쓸고 다니십니다   제98화

    “나 안 가려고.”소예지가 단호히 거절했다.“왜 안 가? 야근도 없잖아.”소예지는 더 이상의 설명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실험실로 향했다. 이서연이 답답하다는 듯 그녀의 뒷모습을 향해 소리쳤다.“이 티켓, 40만 원이나 하는 거라고!”잠시 후 이서연은 안채린에게 다가가 불만을 털어놓았다.“소예지 걔 도대체 뭐야? 네가 좋은 마음으로 준 티켓인데 고마워하긴커녕 받지도 않아.”안채린이 가볍게 콧방귀를 뀌었다.“안 받을 줄 알았어.”“설마 아직도 인터뷰 뺏긴 일 때문에 너한테 앙심 품고 있는 거 아니야?”“겉으론 괜찮은 척하지만 속으론 분명 화났겠지.”안채린의 목소리엔 확신이 담겨 있었다.“걔가 안 가면 우리끼리 가지 뭐. 네가 준 스무 장 티켓 다 나눠줬어. 다들 벌써 엄청 기대하고 있다고!”“강 선배도 티켓 받았대?”안채린이 물었다.“조수한테 줬어. 강 선배가 사무실에 없더라고.”안채린은 강준석이 오기를 은근히 기대했다. 그가 온다면 둘만의 아름다운 저녁을 보낼 수 있을 것이었다.한편, 강준석과 소예지는 구내식당에서 함께 점심을 먹었다.화제는 심유빈의 연주회로 흘러갔고 강준석 역시 갈 생각이 없었다.오후 내내 연달아 회의를 끝낸 강준석은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매곡 마을 주민들이 화학공장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으며 그쪽에서 증거 자료가 필요하다는 연락이었다.강준석은 곧 법원에서 증인으로 출석하라는 요청이 있을 것으로 예상하며 소예지에게는 참석하지 말라고 당부했다.“강 선배도 조심해. 지난번 경고 전화는 화학공장 측에서도 대응에 나섰다는 뜻일 테니까.”실험실로 돌아온 소예지는 박시온과 영상통화를 했다.“오늘 심유빈 단독 연주회 날이잖아.”박시온이 아이패드를 들고 몇 번 화면을 넘기다가 심유빈의 홍보 영상을 틀었다. 영상 속 체육관의 대형 LED 광고판엔 온통 심유빈의 포스터가 가득했다.“정말 팬이 많긴 많네.”박시온이 씁쓸하게 중얼거렸다.심유빈의 회사는 그녀를 완벽하게 포장했다. 그녀의 이름 앞엔 언제나 글로벌 스타

  • 전처분이 의학계를 휩쓸고 다니십니다   제97화

    심유빈의 눈가엔 미묘한 도발이 깃든 미소가 감돌았다.“소예지 씨, 그 목걸이 말이에요. 내가 양보할게요. 그러니 너무 서운해하지 말아요.”“내가 관심 없는 물건이라면 얼마든지 가져가도 돼요.”소예지는 담담한 어조로 대답했지만 그녀의 말끝이 슬쩍 심유빈 옆에 서 있던 남자에게 기울었다. 뜻을 곱씹게 만드는 묘한 말이었다.그 의미를 알아차린 듯 고이한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그는 호기심과 탐색의 시선으로 소예지를 빤히 응시했고 심유빈 역시 소예지를 천천히 훑었다. 어딘가 이상했다. 그녀는 문득 눈앞에 있는 소예지가 반년 전 자신이 알던 사람과 전혀 다른 인물처럼 느껴졌다.과거의 소예지는 마음속을 쉽게 읽을 수 있었지만 지금은 아무리 살펴봐도 도무지 짐작할 수 없는 상대가 되어 있었다.그때 강준석과 윤혁이 다가왔다. 윤혁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고이한에게 물었다.“고 대표님, 얘기는 잘 끝나셨나요?”고이한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뒤 심유빈을 향해 말했다.“우리 먼저 내려가지.”잠시 후 윤혁 일행은 안내를 받아 귀빈실로 들어갔다. 그 순간 고이한의 휴대폰이 진동했다. 그는 화면을 확인하고 조용한 발코니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여보세요.”“이한아, 과학기술원에서 6월에 의학 시상식을 열 예정인데 자네를 시상자로 초청하고 싶다고 하네. 시간 괜찮겠지?”“영광입니다. 꼭 참석하겠습니다.”“좋아, 그럼 만나서 다시 얘기하지.”통화를 마친 고이한은 다시 심유빈에게 다가가 말했다.“지 대표님 쪽에서 연구실 지원을 약속했어.”심유빈이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미소 지었다.“역시 오빠라면 날 실망시키지 않을 줄 알았어.”“그리고 과학기술원에서 연락이 왔는데, 6월에 있을 시상식에 나를 시상자로 초대한다고 해.”심유빈이 환하게 웃으며 물었다.“그럼 나도 따라가도 될까?”그러더니 마치 문득 떠올린 듯 덧붙였다.“내 동생이 주인공이 될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고이한 역시 이번 시상식에서 특효약 개발자가 수상하게 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 전처분이 의학계를 휩쓸고 다니십니다   제96화

    십여 점의 경매품은 순식간에 모두 주인을 찾았고 그중에서도 가장 값비싼 물품은 심유빈의 차지가 되었다.곧이어 본격적인 만찬이 시작됐다.잔잔한 음악이 부드럽게 흘러나오고 고급 와인의 은은한 향기가 연회장 안을 가득 메웠다. 참석자들은 여전히 방금 전까지 진행된 경매에 대해 흥미로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소예지가 윤혁에게 물었다.“선배, 곧 9시인데 지 여사님은 언제쯤 만날 수 있을까요?”“아마 곧 만날 수 있을 거야.”마침 그때 조명이 바뀌었다. 아늑하던 실내가 은은한 댄스홀 분위기로 변했고 음악도 우아한 춤곡으로 바뀌었다. 사람들은 자연스레 짝을 지어 춤을 추기 시작했다.도윤재는 용기를 내어 안채린에게 춤을 신청했으나 그녀는 춤을 출 줄 모른다며 단호하게 거절했다. 민망해진 도윤재를 외면한 채 안채린은 기대를 담은 눈빛으로 강준석을 바라보며 그가 자신을 초대해 주기를 기다렸다.바로 그 순간 윤혁의 휴대폰 화면이 환히 빛났다. 그는 급히 메시지를 확인하고는 강준석과 소예지에게 말했다.“지금 나랑 같이 가자.”세 사람은 윤혁을 따라 연회장 2층으로 올라갔다.안채린은 질투 어린 눈길로 소예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오늘 밤 내내 강준석의 시선은 오직 소예지에게만 향해 있었다.한편, 2층의 호화로운 휴게실 앞에서는 심유빈이 고이한의 넥타이를 부드럽게 고쳐주고 있었다.뒤에서 들려오는 발소리에 고이한이 고개를 돌렸고 그의 시선이 소예지와 마주쳤다. 화려한 조명 아래 선 소예지와 강준석은 마치 서로에게 완벽하게 어울리는 연인 같았다.고이한은 심유빈에게 짧게 말했다.“나 먼저 들어갈게.”“그래.”심유빈이 사랑스러운 미소로 화답했다.고이한이 문 안으로 들어가자 심유빈은 우아한 걸음으로 소예지 일행에게 다가왔다.“강 선생님, 또 뵙네요.”윤혁은 순간 혼란스러웠다. 고이한은 분명 소예지의 남편인데 방금 본 심유빈의 행동은 어딘지 모르게 부적절해 보였다. 그러나 소예지는 아무렇지 않은 듯 담담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소예지 씨, 잠깐 기다

  • 전처분이 의학계를 휩쓸고 다니십니다   제95화

    소예지는 조용히 자리를 골라 앉았고 마침 맞은편에 고급스럽고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두 미녀가 우아한 모습으로 자리를 잡았다. 그녀들은 소예지가 단숨에 알아볼 정도로 유명한 여배우들이었다.“공익광고 모델, 원래 이수정 아니었어? 갑자기 피아니스트 심유빈으로 왜 바뀐 거야?”“고신 그룹하고 지온 재단이 원래 협력 관계였잖아. 모델 정도는 저쪽에서 한마디만 하면 바로 바뀌지 뭐.”“부럽다, 그런 운은 아무한테나 오는 게 아니지. 듣기로는 심유빈이 고이한 곁에 있은 지 벌써 몇 년이나 됐다던데. 고이한이 다른 여자한테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처음부터 지금까지 심유빈만 총애한다고 하더라.”“정말이야?”“나도 들은 얘기지만, 원래 임은우 회사가 먼저 경기장 사용 계약을 마쳤대. 그런데 임은우 콘서트 일정이 8월로 미뤄지고 심유빈이 먼저 독주회 장소로 쓰게 됐다고 하더라고.”“임은우 콘서트가 미뤄졌다고?”소예지 역시 그 이야기에 잠시 놀랐다. 임은우는 지난 10년간 최고의 인기를 누려온 스타였다.잠시 후 매니저들이 나타나 여배우들을 연회장으로 안내했고 소예지 역시 자리에서 일어나 연회장으로 향했다.연회장에 들어서자 화려한 차림의 한 중년 여성이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참석자들의 존경 어린 시선만 봐도 그녀가 오늘 행사를 주최한 지온 자선재단의 지유선 대표임을 알 수 있었다.지유선은 10년 넘게 자선활동에 헌신한 인물로 정·재계 인사들이 그녀의 체면을 세워주기 위해 오늘 밤 모두 이 자리에 참석한 듯 보였다.그때 사회자가 무대에 올라 말했다.“지금부터 한 시간 동안 자선 경매가 진행됩니다. 먼저 지유선 대표님의 축사가 있겠습니다.”지유선이 무대에 올라 진심 어린 눈빛으로 참석자들에게 감사를 전한 후, 간략히 경매 물품을 소개하고 본격적으로 경매가 시작되었다.사람들은 준비된 자리에 자유롭게 앉기 시작했다. 소예지 일행은 뒷줄에 자리를 잡았고 고이한과 심유빈은 가장 앞줄의 특별석에 앉았다.윤혁이 소예지에게 조용히 속삭였다.“너도 가서 고 대표 옆

More Chapters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