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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Author: 이야기보따리
소예지는 가장 먼저 교실에 도착했다. 정성껏 꾸민 덕에 고하슬도 으쓱해 하면서 가방을 들고나와 친구들에게 말했다.

“이 사람은 우리 엄마야.”

소예지는 손을 뻗어 딸을 번쩍 안았다.

“하슬이 오늘 정말 잘했어.”

집으로 돌아온 후 양희순에게 케이크와 쿠키 재료를 준비해달라고 했다.

고하슬은 신난 얼굴로 소예지를 졸졸 따라다니며 케이크를 어떻게 만드는지 지켜보았다. 소예지는 미리 만들어둔 쿠키 반죽을 오븐에 넣었다. 아몬드의 달콤한 향기가 거실에 퍼지자 저도 모르게 군침이 돌았다.

고하슬이 손뼉을 치며 기뻐했다.

“쿠키 먹고 싶어요.”

“금방 되니까 조금만 기다려.”

소예지는 일부러 밀가루를 찍어 자기 얼굴에 발랐다.

고하슬은 바로 알아챘지만 엄마에게 말하지 않고 몰래 휴지를 가지러 갔다. 휴지를 가져와서야 엄마의 옷소매를 잡아당기며 말했다.

“엄마, 얼굴에 밀가루 묻었어요. 내가 닦아줄게요.”

소예지가 놀란 척했다.

“어머. 정말?”

그러고는 몸을 숙여 고하슬이 진지하게 얼굴을 닦아주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녀의 눈시울이 갑자기 붉어졌다. 딸 때문에 가끔 속상하긴 해도 착한 아이였다.

고하슬은 얼굴을 꼼꼼하게 닦아준 후 의기양양하게 물었다.

“엄마, 나 잘했죠?”

“정말 잘했어.”

소예지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녀는 가장 좋은 재료로 딸에게 케이크를 만들어주었다. 동시에 설탕의 양도 조절했기에 밖에서 파는 것보다 더 깨끗하고 영양가가 있었다.

드디어 예쁜 작은 케이크가 완성되었다. 시간이 어느덧 저녁 6시 30분을 가리켰다. 고하슬은 곧 어두워지는 밖을 내다보면서 입을 삐죽거렸다.

“아빠는 왜 아직도 안 와요?”

소예지는 고이한이 집에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걸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다. 오늘 유치원에서 심유빈에게 정식으로 선전포고를 했기 때문에 지금쯤 고이한은 심유빈의 옆에 있을 것이다.

그때 전화벨이 울리자 양희순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알겠습니다. 사모님께 말씀드릴게요.”

양희순이 전화를 끊고 소예지에게 말했다.

“사모님, 대표님께서 저녁 약속 있으시다고 밖에서 식사하고 오신대요.”

소예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오늘 저녁은 우리 셋이 먹어요.”

지금부터 소예지는 그 누구도 그녀와 딸의 기분을 망치게 하지 않을 것이다.

저녁 식사를 마친 후 소예지는 딸과 함께 잔디밭에서 공놀이를 했다. 일부러 넘어지는 척하자 고하슬이 곧바로 달려와 걱정했다. 소예지는 다리를 저는 척했다. 딸의 두 눈에 걱정과 안타까움이 가득했다.

소예지는 벅찬 감동이 밀려왔다.

어느덧 잘 시간이 되어 고하슬을 씻겼다. 노느라 지쳤던 고하슬은 9시 30분에 스스로 잠자리에 들었다. 소예지는 조용히 방 문을 닫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곧장 서재로 가서 실험 계획서를 작성했다. 이건 그녀가 연구하는 과제였는데 줄곧 포기하지 않은 걸 다행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동안 좋은 아내가 되기 위해, 그리고 고이한이 싫어할까 봐 많은 것을 숨겨왔다.

조명 아래 소예지의 모습은 자신감으로 가득 찼다. 이제부터는 숨기지 않고 자기의 삶을 살아가기로 결심했다.

소예지의 아버지 소영욱은 국내 최고의 의학 박사였고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수많은 엘리트 인재들을 길러냈다. 소예지는 실험실을 설립하여 아버지가 완성하지 못한 의학 성과를 세상에 내놓기로 했다. 이 또한 아버지의 소원이었다.

컴퓨터를 덮고 미간을 주무르면서 딸과 함께 자려고 방으로 돌아가려 했다.

자정이 조금 넘은 시간, 아직 잠들지 않은 소예지는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었다. 고이한이 집에 들어온 것이었다.

평소 고이한이 늦게 들어올 때마다 소예지는 밖으로 나가 챙겨주었다. 그가 술을 마셨다면 해장국을 끓여주었고 단순히 피곤하다고 하면 따뜻한 우유를 데워 잠들도록 도와주었다.

결혼은 그녀를 가사노동자로 만들었다. 빨래, 요리, 눈치 보는 것... 그러다가 결국에는 힘들기만 하고 보람은 없는 도우미로 훈련되었다.

발소리가 방문 앞에 멈추자 소예지는 재빨리 눈을 감았다.

문이 열리고 훤칠한 그림자가 소예지의 침대 앞으로 다가왔다. 공기 중에 술 냄새와 여자의 향수 냄새가 은은하게 섞여 있었다. 심유빈이 즐겨 쓰는 향수였다.

고이한은 몸을 숙여 딸의 이불을 여며준 다음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소예지가 자는 척한 바람에 그의 입맞춤을 피하지 못했다.

따뜻한 입맞춤이 이마에 닿았다.

그 순간 소예지는 온몸이 굳어지는 듯했다. 고이한이 떠나자마자 재빨리 물티슈를 꺼내 입술이 닿았던 곳을 닦았다.

방금 다른 여자와 함께 시간을 보낸 남자라 더럽게 느껴졌다.

그 후 3일 동안 소예지와 고하슬의 관계가 많이 회복되었다. 어릴 때부터 품에 안고 키운 딸이라 관계를 개선하는 게 그리 어렵지 않았다.

딸의 사랑을 단지 다른 사람에게 빼앗긴 것일 뿐 사라진 건 아니었다. 소예지가 인내심 있게 기다린다면 딸이 그녀에게 의지하던 모습을 되살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금요일 점심, 소예지는 서재에서 오전 내내 계획서를 작성하다가 목이 말라 아래층으로 내려가던 중 계단을 올라오는 고이한을 보았다.

소예지는 3층 서재에서 내려갔고 결국 두 사람은 마주치고 말았다. 하지만 소예지는 그를 그냥 지나쳐 아래층으로 내려가 차를 마셨다.

“아직도 화났어?”

고이한의 목소리에 불쾌감이 섞여 있었다.

소예지는 잠깐 멈칫했다가 돌아섰다.

“내가 왜 화를 내?”

“아니면 됐어.”

고이한은 더는 말하고 싶지 않은 듯 위층으로 올라갔다.

그녀는 미간을 찌푸린 채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최근 두 사람 사이의 많은 일들을 잊어버린 건 사실이었다.

몇 분 후 마침내 기억이 났다. 보름 전 소예지는 고이한과 심유빈의 해외 데이트를 막으려고 충동적으로 고이한의 여권을 찢어버렸다.

그 일로 고이한과 소예지는 일주일 동안 냉전을 펼쳤다. 결국 소예지가 고하슬이 잠든 틈을 타 그의 침실로 들어가 먼저 스킨십하면서 부부 관계를 가지고 나서야 화해했다.

조금 전 고이한이 말한 일이 바로 이 일이었다.

소예지는 그녀가 아무리 막아도 고이한은 결국 심유빈과 함께 해외에서 크리스마스를 보내려고 고하슬을 데리고 갈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멍하니 있던 그때 소예지의 휴대폰이 울려 웃으면서 전화를 받았다.

“윤혁 선배.”

“예지야, 네 논문 전부 다 읽어봤는데 정말 대단하더라. 너랑 빨리 만나서 얘기하고 싶어.”

전화기 너머로 흥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좋게 봐줘서 고마워요, 선배.”

“요 며칠 시간 돼? 우리 만나서 얘기하자. 내가 거기 갈게.”

“나중에 내가 시간 정하면 안 될까요?”

“그래, 그럼. 시간 될 때 만나자.”

소예지는 찻잔을 들고 위층으로 올라가면서 손목시계를 보았다. 고하슬의 하원 시간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고이한은 어젯밤에도 새벽이 지나서야 집에 들어왔기에 지금쯤 방에서 곤히 자고 있을 것이다. 소예지도 그를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고이한은 자지 않고 2층 거실에서 계속 통화하고 있었다.

“다음 주 월요일 비행기야. 응, 하슬이도 데려갈 거야. 갖고 싶은 선물 있으면 뭐든지 말해.”

소예지는 몸을 돌려 현관에 숨었다. 고이한이 방으로 들어가면서 이렇게 말했다.

“다 들어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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