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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Author: 이야기보따리
소예지는 가슴이 쿡 쑤시는 듯했다. 이미 마음을 비웠다고는 하지만 화는 여전히 났다.

이번에는 그들이 고하슬을 데리고 출국하게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고 심유빈이 고하슬에게 접근하여 세뇌할 기회도 주지 않을 것이다.

저녁, 고이한이 집에서 저녁을 먹었다. 딸이 고이한에게 매달릴 때 소예지는 그다지 가까이 가고 싶지 않았다. 저녁 식사를 마친 후 소예지는 8시 30분에 샤워하러 들어갔다. 샤워하고 나와보니 고하슬이 고이한의 방에 있었다.

소예지가 문을 열고 들어가려던 찰나 고하슬의 신난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빈 이모, 벌써 출국했어요?”

“응. 오늘 막 도착했어. 하슬이도 함께 왔으면 좋았을 텐데.”

“곧 만날 수 있을 거예요. 아빠가 며칠 후에 나 데리고 이모 만나러 외국에 간다고 했어요.”

“그래. 그럼 이모가 미리 선물도 사놓고 예쁜 크리스마스 원피스도 사놓고 기다릴게.”

“공주 원피스랑 예쁜 왕관도 많이 갖고 싶어요.”

“알았어. 이모가 미리 다 준비해 놓을게. 그리고 하슬이가 제일 좋아하는 크림 케이크도 주문해놨어.”

심유빈의 다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예지는 문 뒤에서 고하슬과 심유빈이 통화를 마칠 때까지 기다렸다.

“먼저 끊을게.”

고이한이 말했다.

“알았어. 기다리고 있을게.”

“하슬아, 안녕. 사랑해.”

심유빈이 D국 언어로 말했다.

“나도 사랑해요.”

고하슬도 앳된 목소리로 D국 언어로 또박또박 말했다.

두 사람의 다정한 모습에 소예지는 가슴이 쿡쿡 쑤셔 숨조차 쉬기 힘들었다. 하지만 문을 열고 들어갈 땐 웃는 얼굴로 바꿨다.

“하슬아.”

“엄마, 나 아빠랑 외국에 놀러 갈 건데 엄마도 같이 갈래요?”

고하슬이 올려다보며 진지하게 물었다.

아이는 자신에게 잘해주고 사랑해주는 모든 사람과 함께 놀기를 바랐다.

“하슬아, 엄마가 아빠랑 할 얘기가 있어서 그러는데 먼저 놀이방에 가서 놀고 있을래?”

소예지가 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묻자 고하슬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았어요.”

그러고는 밖으로 뛰어나갔다. 밖에서 양희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슬아, 과일 깎아 놨는데 와서 먹어.”

소예지는 방 문을 닫고 샹들리에 아래에서 넥타이를 풀며 소파에 앉아 있는 고이한을 쳐다보았다. 세 번째 단추까지 풀어헤친 셔츠에 고하슬이 밥 먹기 전에 묻힌 딸기잼이 그대로 묻어 있었다.

“얘기 좀 해.”

소예지가 먼저 입을 열었다.

고이한도 그녀가 말을 꺼내기를 기다린 듯 빤히 쳐다보았다.

“이번에 하슬이를 데리고 해외에 가지 마. 어머님이랑 할머니랑 같이 크리스마스를 보내고 싶으면 혼자 가. 하슬이는 내가 여기서 데리고 있을 거야.”

소예지가 말했다.

“할머니랑 어머니가 하슬이를 못 본 지 꽤 오래됐어. 왔다 갔다 길어봤자 열흘이야.”

고이한이 덤덤하게 반박했다.

소예지가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쳐다보자 고이한이 실눈을 뜨고 말했다.

“너도 같이 가도 돼.”

그녀는 주먹을 꽉 쥐고 따져 물었다.

“그래도 되긴 하지만 일단 심유빈 씨가 내 딸한테서 멀리 떨어지게 할 수 있어?”

고이한이 이미 느슨해진 넥타이를 잡아당겼다. 이 행동만 봐도 그가 짜증이 났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유빈이는 하슬이한테 나쁜 마음이 없어. 이렇게까지 경계하지 않아도 돼.”

고이한이 미간을 찌푸리며 일어났다.

소예지는 화를 참느라 저도 모르게 몸이 떨렸다.

“알았어. 그럼 나도 같이 갈게. 이한 씨랑 유빈 씨가 무슨 관계든 상관없으니까 유빈 씨가 내 딸한테 접근하지 못하게 해.”

시어머니와 고이한의 할머니는 오랫동안 외국에 정착해 살고 있었다. 고이한이 마지막으로 찾아간 게 8월이었다. 하여 어른들을 보러 가는 건 막을 수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함께 가기로 했다.

소예지는 분노를 억누른 채 방으로 돌아왔다.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해외 번호인 걸 보고는 깜짝 놀랐다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휴대폰 너머에서 매력적인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예지야, 생각해봤어? 계획에 참여할 거야?”

소예지는 전화를 건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채고 미안한 말투로 말했다.

“미안해, 준석 선배. 지금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생겼어.”

“네 결혼에 대해 알아봤는데 네 남편 지금 바람을 피우고 있어. 너랑 네 딸의 사이도 그다지 가깝지 않더라? 사실 가정을 포기하고 과학 연구에 전념해도 되잖아. 너의 천부적인 재능이라면 무조건 큰 성과를 거둘 수 있을 텐데.”

소예지가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선배의 마음은 고맙지만 나만의 계획이 있어.”

“남편의 마음을 되돌리고 싶어?”

전화기 너머에서 가벼운 탄식이 흘러나왔다.

“아니. 그냥 내 딸을 보살피고 싶을 뿐이야.”

“알았어. 우리가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고 믿어.”

“꼭 만날 거야.”

소예지가 웃으며 대답했다.

강준석은 예전에 아버지와 함께 일한 적이 있었다. 지난 몇 년 동안 그녀를 각별히 챙겨주었고 그녀에게는 친오빠와 같은 존재였다.

이제 소예지는 모든 것을 걸고 딸과의 관계를 회복하기로 결심했다. 딸이 심유빈이라는 새엄마와 함께 살게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저녁에 소예지는 고하슬에게 함께 해외에 가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고하슬이 크게 기뻐하며 그녀의 목을 끌어안고 전에 해외에서 겪었던 재미있는 일들을 얘기했다. 소예지는 예전에 자세를 낮춰 결혼 생활을 회복하려는 데만 애쓴 나머지 딸에게 소홀했다는 걸 깨달았다. 실패한 결혼 생활은 그녀를 원망만 늘어놓는 여자로 만들어버렸다.

‘나도 하슬이한테 너무 소홀했어.’

“하슬아, 사랑해.”

“나도 사랑해요, 엄마.”

귓가에 딸의 부드럽고 애교 넘치는 목소리가 들려오더니 귀여운 입술로 소예지에게 입맞춤했다.

“엄마는 영원히 나의 좋은 엄마예요. 엄마를 떠나지 않을 거예요. 영원히.”

고하슬이 소예지의 얼굴을 감싸 쥐고 어두운 조명 아래에서 진심을 표현했다.

소예지는 딸을 꽉 껴안고 머리에 입을 맞췄다.

“엄마도 우리 하슬이를 영원히 사랑해.”

월요일, 한 식구가 나란히 공항으로 향했다.

18시간 후 그들은 D국에 도착했다. 고이한의 비서 김경환이 캐리어를 밀었고 소예지는 가방을 들었다. 비행기 안에서 잠만 자던 고하슬은 고이한의 따뜻한 품에서 외투에 꽁꽁 싸인 채 잠들어 있었다.

그들은 공항에서 나오자마자 따뜻한 승용차에 올라탔다. 고이한은 아이를 안은 자세를 고쳐 잡고 딸의 얼굴을 다정하게 바라보면서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미간에 엉킨 머리카락을 정리했다.

차 세 대가 비바람이 몰아치는 밤거리를 가르며 달려갔다. 창밖 풍경을 보던 소예지는 이따가 시어머니와 시누이 고수경을 만날 생각을 하니 보이지 않는 돌덩이가 마음을 짓누르는 듯했다.

8년 전, 20살이었던 고이한은 교통사고로 혼수상태에 빠져 아버지의 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았다. 소예지는 그 소식을 듣자마자 바로 휴학을 신청하고 병원으로 와서 그를 간호했다. 당시 시어머니는 슬픔에 잠겨 간호하겠다는 소예지를 거절하지 못했다.

소예지는 밤낮없이 지극정성으로 간호했고 간호사들이 할 일까지 모두 도맡아 했다. 1년 만에 고이한이 깨어난 후 소예지는 오랫동안 품었던 마음을 그에게 고백하며 결혼하고 싶다고 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녀가 고백하는 걸 시어머니가 듣게 되었다. 시어머니는 그녀를 찾아와 2백억 원을 줄 테니 아들의 곁에서 떠나 달라고 했다.

힘들어하던 소예지가 짐을 싸서 학교로 돌아갈 준비를 하던 그때 고이한이 문 앞에 나타나더니 그녀와 결혼하고 싶다고 말했다.

소예지는 지금도 그날의 기억이 생생했다. 고이한의 표정은 덤덤했지만 눈빛은 맑고 굳건했다.

“우리 결혼하자.”

결혼식 날, 소영욱의 비서는 그녀가 1년 동안 고이한의 곁을 지킨 영상을 고이한에게 전달한 사람이 소영욱이라고 알려줬다. 결혼 후에야 소예지는 고이한이 그녀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은혜를 갚기 위해 결혼했다는 걸 깨달았다.

당시 그녀는 그를 사랑하기만 하면 언젠가 그의 마음을 얻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결국에는 19살의 그녀가 너무 어리석고 순진했다는 것만 증명하고 말았다.

1시간 가까이 달리자 차가 D국의 부유층 지역에 진입했고 마침내 불빛으로 환하게 밝혀진 별장 앞에 멈춰 섰다.

도우미들은 이미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소예지는 가방을 들고 먼저 차에서 내려 딸을 안고 내리는 고이한을 돌아보았다. 그때 고하슬도 마침내 잠에서 깨어났다.

아이는 작은 손으로 고이한의 넓은 어깨를 붙잡았다. 머리가 헝클어져 있었고 두 볼이 사과처럼 빨갛게 달아오른 채 아빠의 품에서 하품하는 모습이 정말 사랑스럽기 그지없었다.

“아빠, 우리 할머니 집에 도착했어요?”

고하슬이 물었다.

그때 2층 계단에서 화려하고 우아한 모습의 누군가가 내려오면서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손녀 왔구나. 할머니 여기 있어.”

진가영이 감격에 겨운 눈빛으로 손녀를 쳐다보았다. 그런데 가방을 들고 거실에 서 있는 소예지를 본 순간 불쾌한 기색이 역력해졌다.

소예지가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오랜만이에요, 어머님.”

“아이고. 우리 하슬이 왔구나. 키도 많이 컸네. 할머니가 안아 보자.”

진가영은 손녀를 안고 기뻐하면서 아이의 통통한 몸을 어루만졌다.

“아빠가 잘 키웠나 보네. 살도 좀 붙었어.”

고이한이 손을 뻗어 다시 딸을 안아왔다. 진가영은 아들이 그녀의 몸을 걱정해서 그러는 걸 알고 도우미에게 말했다.

“예지가 쓸 방 하나 정리해놓도록 해.”

“알겠습니다, 사모님.”

도우미가 대답했다.

소예지는 마음이 언짢아졌다. 그 말은 소예지가 들으라고 한 말이었는데 그녀가 오기를 바라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제야 방을 정리하라고 하진 않았을 것이다.

“할머니, 배고파요. 뭐 좀 먹을래요. 그런데 고모는 어디 있어요?”

고하슬은 이곳이 익숙했던 터라 낯선 느낌이 전혀 없었다.

“알았어. 할머니가 아주머니한테 맛있는 거 만들어달라고 할게. 네 고모는 친구들이랑 다른 나라로 스키 타러 갔어. 설날에나 볼 수 있을 거야.”

소예지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시누이도 시어머니처럼 그녀를 탐탁지 않아 하기에 안 보는 것이 나았다.

그때 고이한의 휴대폰이 울렸다. 소예지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는데 고이한은 화면을 힐끗 보고는 전화를 받으러 밖으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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