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제5화

Author: 이야기보따리
소예지는 가슴이 쿡 쑤시는 듯했다. 이미 마음을 비웠다고는 하지만 화는 여전히 났다.

이번에는 그들이 고하슬을 데리고 출국하게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고 심유빈이 고하슬에게 접근하여 세뇌할 기회도 주지 않을 것이다.

저녁, 고이한이 집에서 저녁을 먹었다. 딸이 고이한에게 매달릴 때 소예지는 그다지 가까이 가고 싶지 않았다. 저녁 식사를 마친 후 소예지는 8시 30분에 샤워하러 들어갔다. 샤워하고 나와보니 고하슬이 고이한의 방에 있었다.

소예지가 문을 열고 들어가려던 찰나 고하슬의 신난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빈 이모, 벌써 출국했어요?”

“응. 오늘 막 도착했어. 하슬이도 함께 왔으면 좋았을 텐데.”

“곧 만날 수 있을 거예요. 아빠가 며칠 후에 나 데리고 이모 만나러 외국에 간다고 했어요.”

“그래. 그럼 이모가 미리 선물도 사놓고 예쁜 크리스마스 원피스도 사놓고 기다릴게.”

“공주 원피스랑 예쁜 왕관도 많이 갖고 싶어요.”

“알았어. 이모가 미리 다 준비해 놓을게. 그리고 하슬이가 제일 좋아하는 크림 케이크도 주문해놨어.”

심유빈의 다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예지는 문 뒤에서 고하슬과 심유빈이 통화를 마칠 때까지 기다렸다.

“먼저 끊을게.”

고이한이 말했다.

“알았어. 기다리고 있을게.”

“하슬아, 안녕. 사랑해.”

심유빈이 D국 언어로 말했다.

“나도 사랑해요.”

고하슬도 앳된 목소리로 D국 언어로 또박또박 말했다.

두 사람의 다정한 모습에 소예지는 가슴이 쿡쿡 쑤셔 숨조차 쉬기 힘들었다. 하지만 문을 열고 들어갈 땐 웃는 얼굴로 바꿨다.

“하슬아.”

“엄마, 나 아빠랑 외국에 놀러 갈 건데 엄마도 같이 갈래요?”

고하슬이 올려다보며 진지하게 물었다.

아이는 자신에게 잘해주고 사랑해주는 모든 사람과 함께 놀기를 바랐다.

“하슬아, 엄마가 아빠랑 할 얘기가 있어서 그러는데 먼저 놀이방에 가서 놀고 있을래?”

소예지가 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묻자 고하슬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았어요.”

그러고는 밖으로 뛰어나갔다. 밖에서 양희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슬아, 과일 깎아 놨는데 와서 먹어.”

소예지는 방 문을 닫고 샹들리에 아래에서 넥타이를 풀며 소파에 앉아 있는 고이한을 쳐다보았다. 세 번째 단추까지 풀어헤친 셔츠에 고하슬이 밥 먹기 전에 묻힌 딸기잼이 그대로 묻어 있었다.

“얘기 좀 해.”

소예지가 먼저 입을 열었다.

고이한도 그녀가 말을 꺼내기를 기다린 듯 빤히 쳐다보았다.

“이번에 하슬이를 데리고 해외에 가지 마. 어머님이랑 할머니랑 같이 크리스마스를 보내고 싶으면 혼자 가. 하슬이는 내가 여기서 데리고 있을 거야.”

소예지가 말했다.

“할머니랑 어머니가 하슬이를 못 본 지 꽤 오래됐어. 왔다 갔다 길어봤자 열흘이야.”

고이한이 덤덤하게 반박했다.

소예지가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쳐다보자 고이한이 실눈을 뜨고 말했다.

“너도 같이 가도 돼.”

그녀는 주먹을 꽉 쥐고 따져 물었다.

“그래도 되긴 하지만 일단 심유빈 씨가 내 딸한테서 멀리 떨어지게 할 수 있어?”

고이한이 이미 느슨해진 넥타이를 잡아당겼다. 이 행동만 봐도 그가 짜증이 났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유빈이는 하슬이한테 나쁜 마음이 없어. 이렇게까지 경계하지 않아도 돼.”

고이한이 미간을 찌푸리며 일어났다.

소예지는 화를 참느라 저도 모르게 몸이 떨렸다.

“알았어. 그럼 나도 같이 갈게. 이한 씨랑 유빈 씨가 무슨 관계든 상관없으니까 유빈 씨가 내 딸한테 접근하지 못하게 해.”

시어머니와 고이한의 할머니는 오랫동안 외국에 정착해 살고 있었다. 고이한이 마지막으로 찾아간 게 8월이었다. 하여 어른들을 보러 가는 건 막을 수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함께 가기로 했다.

소예지는 분노를 억누른 채 방으로 돌아왔다.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해외 번호인 걸 보고는 깜짝 놀랐다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휴대폰 너머에서 매력적인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예지야, 생각해봤어? 계획에 참여할 거야?”

소예지는 전화를 건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채고 미안한 말투로 말했다.

“미안해, 준석 선배. 지금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생겼어.”

“네 결혼에 대해 알아봤는데 네 남편 지금 바람을 피우고 있어. 너랑 네 딸의 사이도 그다지 가깝지 않더라? 사실 가정을 포기하고 과학 연구에 전념해도 되잖아. 너의 천부적인 재능이라면 무조건 큰 성과를 거둘 수 있을 텐데.”

소예지가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선배의 마음은 고맙지만 나만의 계획이 있어.”

“남편의 마음을 되돌리고 싶어?”

전화기 너머에서 가벼운 탄식이 흘러나왔다.

“아니. 그냥 내 딸을 보살피고 싶을 뿐이야.”

“알았어. 우리가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고 믿어.”

“꼭 만날 거야.”

소예지가 웃으며 대답했다.

강준석은 예전에 아버지와 함께 일한 적이 있었다. 지난 몇 년 동안 그녀를 각별히 챙겨주었고 그녀에게는 친오빠와 같은 존재였다.

이제 소예지는 모든 것을 걸고 딸과의 관계를 회복하기로 결심했다. 딸이 심유빈이라는 새엄마와 함께 살게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저녁에 소예지는 고하슬에게 함께 해외에 가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고하슬이 크게 기뻐하며 그녀의 목을 끌어안고 전에 해외에서 겪었던 재미있는 일들을 얘기했다. 소예지는 예전에 자세를 낮춰 결혼 생활을 회복하려는 데만 애쓴 나머지 딸에게 소홀했다는 걸 깨달았다. 실패한 결혼 생활은 그녀를 원망만 늘어놓는 여자로 만들어버렸다.

‘나도 하슬이한테 너무 소홀했어.’

“하슬아, 사랑해.”

“나도 사랑해요, 엄마.”

귓가에 딸의 부드럽고 애교 넘치는 목소리가 들려오더니 귀여운 입술로 소예지에게 입맞춤했다.

“엄마는 영원히 나의 좋은 엄마예요. 엄마를 떠나지 않을 거예요. 영원히.”

고하슬이 소예지의 얼굴을 감싸 쥐고 어두운 조명 아래에서 진심을 표현했다.

소예지는 딸을 꽉 껴안고 머리에 입을 맞췄다.

“엄마도 우리 하슬이를 영원히 사랑해.”

월요일, 한 식구가 나란히 공항으로 향했다.

18시간 후 그들은 D국에 도착했다. 고이한의 비서 김경환이 캐리어를 밀었고 소예지는 가방을 들었다. 비행기 안에서 잠만 자던 고하슬은 고이한의 따뜻한 품에서 외투에 꽁꽁 싸인 채 잠들어 있었다.

그들은 공항에서 나오자마자 따뜻한 승용차에 올라탔다. 고이한은 아이를 안은 자세를 고쳐 잡고 딸의 얼굴을 다정하게 바라보면서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미간에 엉킨 머리카락을 정리했다.

차 세 대가 비바람이 몰아치는 밤거리를 가르며 달려갔다. 창밖 풍경을 보던 소예지는 이따가 시어머니와 시누이 고수경을 만날 생각을 하니 보이지 않는 돌덩이가 마음을 짓누르는 듯했다.

8년 전, 20살이었던 고이한은 교통사고로 혼수상태에 빠져 아버지의 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았다. 소예지는 그 소식을 듣자마자 바로 휴학을 신청하고 병원으로 와서 그를 간호했다. 당시 시어머니는 슬픔에 잠겨 간호하겠다는 소예지를 거절하지 못했다.

소예지는 밤낮없이 지극정성으로 간호했고 간호사들이 할 일까지 모두 도맡아 했다. 1년 만에 고이한이 깨어난 후 소예지는 오랫동안 품었던 마음을 그에게 고백하며 결혼하고 싶다고 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녀가 고백하는 걸 시어머니가 듣게 되었다. 시어머니는 그녀를 찾아와 2백억 원을 줄 테니 아들의 곁에서 떠나 달라고 했다.

힘들어하던 소예지가 짐을 싸서 학교로 돌아갈 준비를 하던 그때 고이한이 문 앞에 나타나더니 그녀와 결혼하고 싶다고 말했다.

소예지는 지금도 그날의 기억이 생생했다. 고이한의 표정은 덤덤했지만 눈빛은 맑고 굳건했다.

“우리 결혼하자.”

결혼식 날, 소영욱의 비서는 그녀가 1년 동안 고이한의 곁을 지킨 영상을 고이한에게 전달한 사람이 소영욱이라고 알려줬다. 결혼 후에야 소예지는 고이한이 그녀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은혜를 갚기 위해 결혼했다는 걸 깨달았다.

당시 그녀는 그를 사랑하기만 하면 언젠가 그의 마음을 얻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결국에는 19살의 그녀가 너무 어리석고 순진했다는 것만 증명하고 말았다.

1시간 가까이 달리자 차가 D국의 부유층 지역에 진입했고 마침내 불빛으로 환하게 밝혀진 별장 앞에 멈춰 섰다.

도우미들은 이미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소예지는 가방을 들고 먼저 차에서 내려 딸을 안고 내리는 고이한을 돌아보았다. 그때 고하슬도 마침내 잠에서 깨어났다.

아이는 작은 손으로 고이한의 넓은 어깨를 붙잡았다. 머리가 헝클어져 있었고 두 볼이 사과처럼 빨갛게 달아오른 채 아빠의 품에서 하품하는 모습이 정말 사랑스럽기 그지없었다.

“아빠, 우리 할머니 집에 도착했어요?”

고하슬이 물었다.

그때 2층 계단에서 화려하고 우아한 모습의 누군가가 내려오면서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손녀 왔구나. 할머니 여기 있어.”

진가영이 감격에 겨운 눈빛으로 손녀를 쳐다보았다. 그런데 가방을 들고 거실에 서 있는 소예지를 본 순간 불쾌한 기색이 역력해졌다.

소예지가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오랜만이에요, 어머님.”

“아이고. 우리 하슬이 왔구나. 키도 많이 컸네. 할머니가 안아 보자.”

진가영은 손녀를 안고 기뻐하면서 아이의 통통한 몸을 어루만졌다.

“아빠가 잘 키웠나 보네. 살도 좀 붙었어.”

고이한이 손을 뻗어 다시 딸을 안아왔다. 진가영은 아들이 그녀의 몸을 걱정해서 그러는 걸 알고 도우미에게 말했다.

“예지가 쓸 방 하나 정리해놓도록 해.”

“알겠습니다, 사모님.”

도우미가 대답했다.

소예지는 마음이 언짢아졌다. 그 말은 소예지가 들으라고 한 말이었는데 그녀가 오기를 바라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제야 방을 정리하라고 하진 않았을 것이다.

“할머니, 배고파요. 뭐 좀 먹을래요. 그런데 고모는 어디 있어요?”

고하슬은 이곳이 익숙했던 터라 낯선 느낌이 전혀 없었다.

“알았어. 할머니가 아주머니한테 맛있는 거 만들어달라고 할게. 네 고모는 친구들이랑 다른 나라로 스키 타러 갔어. 설날에나 볼 수 있을 거야.”

소예지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시누이도 시어머니처럼 그녀를 탐탁지 않아 하기에 안 보는 것이 나았다.

그때 고이한의 휴대폰이 울렸다. 소예지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는데 고이한은 화면을 힐끗 보고는 전화를 받으러 밖으로 나갔다.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Latest chapter

  • 전처분이 의학계를 휩쓸고 다니십니다   제130화

    “오늘 예지 씨한테서 전화가 왔는데 집에 돌아오는 길에 검은색 SUV가 몇 번이나 위협 운전을 했다더군요. 들어 보니 상황이 굉장히 위험한 것 같아서요...”“강 박사님께서 제 아내를 꽤 신경 쓰시나 보군요.”고이한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그러자 강준석은 단호하게 반박했다.“전 단순히 예지 씨의 동료로서 걱정하는 겁니다. 오해하지 마세요.”“강 박사님께서 선을 잘 알고 계신다면 됐습니다.”강준석은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고 대표님, 이건 그저 우연이 아닙니다. 누군가가 일부러 예지 씨를 겨냥한 겁니다. 그러니 제대로 보호해 주세요.”고이한은 가만히 듣고 있었고 강준석은 이어서 상황을 설명했다.최근에 소예지가 화학공장의 불법 폐수 배출을 폭로했고 명확한 증거를 찾아내 그 공장이 영업정지와 정비 명령을 받은 일, 그리고 그로 인해 원한을 샀을 가능성까지.“사실 2주 전에도 그쪽에서 예지 씨한테 직접 협박 전화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엔 아예 노골적으로 위협까지 했어요. 그들의 표적은 분명히 예지 씨입니다. 고 대표님이라면 가족을 지킬 방법이 있으시잖습니까?”“다 말씀하셨나요?”고이한이 무미건조하게 물었다.“네.”“듣고 보니 제 아내의 사정을 저보다 박사님이 더 잘 아시는 것 같군요.”강준석은 난감해졌다.“지금 중요한 건 아내분의 안전...”“제 아내 일은 제가 알아서 합니다. 박사님께서 신경 쓰실 필요 없어요.”그 말과 함께 전화가 뚝 끊겼다.그러자 강준석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고이한은 정말 소예지에게 이렇게 냉담한 걸까? 아내가 위험에 처했는데도 저렇게 모른 척할 수 있다니.저녁 여덟 시 반.소예지는 거실에서 고하슬과 함께 젤리와 놀아주고 있었다. 그때 고이한이 집에 들어왔다.“아빠!”고하슬이 반갑게 달려가 안겼고 젤리도 꼬리를 흔들며 그의 발치에 매달렸다. 고이한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고 젤리를 한번 쓰윽 만지더니 말했다.“하슬아, 젤리 데리고 2층 놀이방에 가서 놀아. 아빠가 엄마랑 잠깐 얘기 좀 해야겠어.”

  • 전처분이 의학계를 휩쓸고 다니십니다   제129화

    심유빈은 미소만 지었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오빠도 알아?”고수경이 물었다.“알지.”“하, 제 분수도 모르고 자기가 무슨 천재라도 되는 줄 아나 보네. 괜히 우리 오빠한테 말썽 부리고 난리야.”고수경은 소예지를 욕했다....다음 날 아침.소예지는 집에서 평가 시험을 치르고 오전 열 시 전에 시험지를 윤혁에게 보냈다. 윤혁은 곧장 그것을 의대 교수들에게 넘겨 그녀가 졸업 시험에 응시할 자격이 있는지 심사받게 했다.소예지는 곧장 박시온의 변호사 선배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심 변호사님, 귀국하셨나요?][죄송합니다. 제가 돌아가려면 이틀은 더 걸릴 것 같네요.][알겠습니다. 오시면 꼭 연락 주세요. 뵙고 싶습니다.][네, 소예지 씨.]소예지는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 책을 집어 들었다.그때 강준석에게서 메시지가 왔다.[매곡마을 사건 승소했어. 화학공장은 영업정지 처분을 받았고 마을 주민들도 보상금을 받아냈어. 네가 이번 사건의 일등 공신이야.]소예지는 기분이 좋아서 입꼬리가 올라갔다.[고생 많았어, 선배.][이따 다시 얘기하자.][응, 운전 조심해.]그 후 윤혁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오후 두 시까지 의대에 직접 와서 시험 전 서류를 작성해야 한다는 연락이었다.소예지는 바로 차를 몰아 의대로 향했고 삼십 분쯤 지나 도착해 주차장에 차를 대고 교무처로 가서 서류를 작성했다. 그곳에 윤혁도 있어 둘은 잠시 잡담을 나눴다.시계를 보니 어느새 오후 세 시가 되었고 이제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소예지는 차선을 지키며 평소처럼 규칙적으로 주행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검은색 SUV 한 대가 그녀의 차 앞으로 확 끼어들었다. 소예지는 깜짝 놀라 반사적으로 핸들을 틀어 피했지만 SUV는 포기하지 않고 세 번이나 연달아 위협 운전을 했다. 다행히 뒤에서 경찰차가 나타나자 SUV는 속도를 내며 달아났다.가슴이 철렁한 소예지는 가까스로 마음을 가다듬었다.집으로 돌아온 뒤, 그녀는 윤하준에게 메시지를 보내 고하슬을 대신 데려다 달라고 부탁했다. 윤

  • 전처분이 의학계를 휩쓸고 다니십니다   제128화

    소예지가 그를 흘끗 쳐다보고는 담담하게 말했다.“그래서?”“너무 무리하지 마. 몸이 더 중요하니까.”고이한은 그녀가 해낼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조기 졸업 시험 같은 건 애초에 불가능했다.하지만 소예지는 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쌓여 있는 책 더미에 파묻힌 소예지의 가녀린 어깨는 마치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운 듯 위태롭게 보였다. 그러나 고이한은 정작 그녀가 더 야윈 사실은 알아차리지 못했다.그는 가슴 앞으로 팔짱을 낀 채 문틀에 기대서서 무심하게 말했다.“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 없어. 네가 원하는 거, 내가 다 들어줄 수 있는데.”“이한 씨가 줄 수 있는 건 내가 원하는 게 아니야. 내가 원하는 건 당신이 절대 줄 수 없어.”소예지는 고개조차 들지 않고 단호하게 받아쳤다.고이한은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다가 시계를 흘끗 보고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자정은 넘기지 마.”저게 걱정하는 걸까? 아니, 그저 고이한 특유의 지배적인 태도일 뿐이었다.소예지는 그를 무시한 채 책장을 넘겼다.한편, 집으로 돌아온 심유빈은 가정부에게 약을 발라달라고 했다. 그때 그녀의 휴대폰이 진동했다. 고수경이 보낸 메시지였다.[유빈 언니, 자? 나 언니한테 할 말이 있어.][아직 안 잤어. 무슨 일이야?]곧 영상 통화 요청이 들어왔고 심유빈은 가정부를 내보낸 뒤 통화를 수락했다.“어, 수경아.”“언니, 나 하준 오빠 차에 있던 그 머리끈이 누구 건지 알아냈어.”“그게 누구 건데?”심유빈이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물었다.“새언니 거야.”고수경은 이를 악물고 말했다.그 말에 심유빈은 놀랐다.“그게 어떻게 예지 씨 거야?”“맞다니까! 저번에 새언니를 축하해 주던 날에 봤는데 새언니가 그거랑 똑같은 머리끈을 하고 있었어.”고수경은 확신에 차 있었다.심유빈은 지난번에 윤하준이 소예지를 몰래 도와줬던 일이 떠올라 애써 고수경을 달래 주었다.“수경아, 그게 진짜 예지 씨 거라고 해도 별거 아닐 거야. 혹시 하슬이가 실수로 차에 두고 간 걸

  • 전처분이 의학계를 휩쓸고 다니십니다   제127화

    심유빈은 턱을 괴고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응, 알았어.”그러더니 무심하게 말했다.“아까 내 동생한테서 들었는데 예지 씨가 이번에 조기졸업 시험을 본다면서? 학부를 빨리 끝내고 싶다던데, 오빠도 알았어?”고이한은 눈썹을 살짝 치켜세웠다.“그래?”“그리고 양 박사님이 이번에 팀을 새로 꾸리면서 예지 씨의 이름을 명단에서 뺐대. 오빠, 혹시 예지 씨를 다시 넣어줄 생각 없어? 그래도 오빠 아내잖아.”고이한은 단호하게 대답했다.“내가 양 박사님께 넣지 말라고 부탁했어.”심유빈은 그 말을 듣고 멈칫했다.“그럼 예지 씨가 화내지 않아?”“이번 연구에 예지 어머니의 샘플을 사용해서 날 많이 원망하고 있어.”심유빈은 미소를 지은 채 의미심장하게 말했다.“그럴 만도 하지. 아무래도 그건...”“무슨 얘기 하고 있어?”이때 하종호가 다가오며 말을 끊었다.고이한은 그와 간단히 인사했고 하종호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심유빈을 바라봤다.“괜찮아요? 아까 뉴스를 봤는데 진짜 아찔하더라고요.”“괜찮아요. 저도 팬이 그렇게까지 과격할 줄은 몰랐어요. 그냥 손목이 좀 부은 정도예요.”심유빈은 말하며 손을 살짝 들어 보였다.하종호는 진심으로 그녀를 걱정했다.“다음부턴 조심해요. 외출할 땐 경호원을 꼭 데리고 다니고요.”잠시 후, 윤하준도 도착했다.“이안이 오늘은 떼 안 썼어?”하종호가 농담하듯 묻자 윤하준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새 장난감 하나 사주겠다고 약속했지, 뭐.”심유빈은 곁눈질하며 말했다.“하준 씨도 이제 슬슬 여자 친구 만들어야겠어요. 그래야 이안이를 돌봐줄 사람이 생기죠.”하종호는 윤하준의 어깨를 두드리며 농담을 보탰다.“그런데 너, 너희 외숙모의 자선 사업에 투자한다면서? 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조용히 의학 쪽까지 손을 뻗은 거야?”윤하준은 담담히 웃으며 대답했다.“앞으로는 이쪽이 큰 흐름일 거야.”그 말에 잔을 들고 있던 고이한은 멈칫했고 심유빈도 눈빛이 흔들렸다.윤하준이 정말 단순히 사업적 이유로 의학계에 투자한

  • 전처분이 의학계를 휩쓸고 다니십니다   제126화

    고이한은 고하슬에게 다가가지 않고 곧장 돌아서 버렸다. 이제 그의 마음속에서 연인이 딸보다 더 큰 자리를 차지한 게 아닐까 싶었다.몇 분 뒤, 윤하준이 허겁지겁 도착했다.“미안해요. 길이 너무 막혀서 늦었네요.”그가 난처해하며 말하자 소예지는 가볍게 웃으며 손을 저었다.“괜찮아요. 아이들은 재밌게 잘 놀았어요.”“이한이는 안 왔어요?”“일이 있어서 먼저 갔어요.”소예지가 담담하게 말했다.그녀를 바라보는 윤하준의 눈빛에 안쓰러움이 번졌다.오후 다섯 시 반, 소예지는 딸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때 고하슬이 해맑게 물었다.“엄마, 아빠는 어디 갔어요?”소예지는 고하슬의 작은 손을 꼭 잡으며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하슬아, 엄마가 너한테 뭐 하나 물어봐도 될까?”그녀의 진지한 표정에 고하슬은 고개를 끄덕이며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네, 물어보세요.”소예지는 잠시 망설이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만약에 언젠가 엄마랑 아빠가 따로 살게 된다면 너는 아빠랑 같이 살고 싶어, 아니면 엄마랑 같이 살고 싶어?”딸에게 상처 주고 싶지 않아 최대한 부드럽게 물어 본 소예지는 마음속으로 고하슬이 자신을 선택해 주기를 간절히 바랐다.고하슬은 순간 멈칫했지만 거의 고민하지도 않고 바로 대답했다.“저는 엄마랑 같이 살 거예요!”그러곤 눈알을 또르르 굴리며 되레 물었다.“그런데 아빠는 왜 우리랑 같이 안 살아요?”소예지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결국 이 문제에서 아이가 가질 수 있는 선택지는 둘 중 하나뿐이라는 걸 알기에 그녀는 더욱 마음이 아팠다.“아빠랑 엄마는 각자 해야 할 일이 있어서 같이 못 살아.”소예지는 애써 웃으며 설명했다.고하슬은 다 이해한 건 아니었지만 엄마의 목을 껴안으며 말했다.“전 엄마가 좋아요. 세상에서 엄마가 제일 좋아요. 앞으로도 절대 엄마랑 떨어지기 싫어요.”소예지는 고하슬을 꼭 끌어안으며 비로소 안도에 찬 미소를 지었다.몇 분 뒤, 박시온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심유빈이 남자 팬에게 집착에 가까운 추

  • 전처분이 의학계를 휩쓸고 다니십니다   제125화

    소예지가 막 복도를 돌았을 때 이서연의 들뜬 목소리가 들려왔다.“채린아, 정말 부럽다. 네가 양 박사님의 제자가 될 줄 누가 알았겠어? 이제 앞길이 창창하겠네.”“교수님이 나한테 거는 기대가 커. 하지만 교수님이 잘 이끌어주시면 내가 훨씬 빨리 성장할 수 있을 거야.”안채린의 목소리는 자신감으로 가득했다.이서연이 맞장구치듯 말했다.“이번에 양 박사님이 직접 나서셨으니, 소예지는 더 이상 끼어들 방법이 없을 거야. 보나 마나 바로 탈락이야.”“능력 없는 사람은 살아남을 수 없어. 이 바닥에 약자는 필요 없거든.”안채린의 조롱 섞인 말소리가 복도에 울렸다.그들이 멀리 사라지고 나서야 소예지는 걸음을 내디뎠다. 그녀는 마음이 쓰렸지만 티내지 않고 곧장 사무실로 들어가 책상을 정리했다.그때 강준석이 찾아왔는데 그는 벌써 해외 인맥을 총동원해 전 세계의 유전자 은행에서 기증자 샘플을 찾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매칭되는 게 나오면 소예지에게 가장 먼저 알려주겠다고 했다.“선배, 고마워.”소예지의 목소리에 진심이 묻어났다.“고맙긴. 네 실력이 어떤지 우리 다 알아. 이번 일로 기죽을 필요 없어.”강준석은 담담하게 그녀를 위로했다.그러자 소예지는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알아. 나도 끝까지 해볼 거야.”그 사이 윤혁은 그녀의 조기졸업 시험 절차를 진행하고 있었고 잠시 후 평가용 시험지를 보내왔다.“예지야, 시험을 신청하기 전에 먼저 평가를 봐야 해. 결과가 좋아야 학교에서 정식으로 조기졸업 시험을 신청해 줄 수 있어.”“네, 선배. 최대한 빨리 해서 내일 아침까지 보내 드릴게요.”“급하지 않으니까 꼼꼼히 풀어. 완성도 높게.”그런데 마침 이서연이 윤혁에게 자료를 전해주러 왔다가 프린터에서 뽑히는 신청서를 보고 물었다.“선배, 저건 뭐예요?”“아, 예지가 조기졸업 시험을 신청하려고 해서 평가 서류를 출력해 주려고.”“뭐라고요? 예지는 아직 대학교 2학년인데요?”이서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윤혁은 가볍게 웃으며 설명했다.“일

More Chapters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