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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작가: 이야기보따리
다음 날 아침, 소예지는 화장을 하고 고하슬이 가장 좋아하는 원피스를 들고 깨기를 기다렸다.

눈을 뜨자마자 엄마의 다정한 얼굴을 마주한 고하슬은 어색한 듯 새끼 고양이처럼 몸을 웅크렸다.

“하슬아, 예쁜 원피스 입을래?”

소예지가 웃으며 물었다.

고하슬이 몸을 뒤집더니 예쁜 핑크색 공주 원피스를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입을래요.”

소예지는 예쁘게 꾸민 딸을 안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고이한이 이미 거실 소파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는데 매일 아침 딸을 유치원에 데려다주고 회사에 나갔다.

“아빠, 나 예뻐요?”

신이 난 고하슬이 고이한 앞에서 빙글 돌았다.

고이한은 애정 어린 눈빛으로 아이를 보면서 망설임 없이 칭찬했다.

“응. 엄청 예뻐.”

고이한이 딸을 안았고 소예지는 양희순이 건네주는 가방을 받아 들고 함께 집을 나섰다.

유치원은 집에서 매우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빌라 단지 바로 밖에 있었는데 A시에서 가장 비싼 사립 유치원이었다.

고하슬이 차에서 내리자 소예지는 딸을 유치원 문 앞까지 데려다주고 가방을 메어준 다음 물었다.

“오후에 엄마가 일찍 데리러 올게. 우리 같이 케이크 만들까?”

고하슬은 신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원장과 선생님에게 인사한 다음 유치원 안으로 들어갔다.

소예지는 다정한 눈빛으로 딸의 뒷모습을 지켜보다가 차 안에 있는 남자를 돌아보았다. 빛과 그림자가 뒤섞인 그의 모습은 여전히 차분하고 매력적이었지만 눈빛은 늘 한겨울의 밤처럼 차갑고 냉랭했다.

“난 집에 걸어갈 테니까 이한 씨는 이만 회사 가봐.”

소예지가 운전석 옆으로 다가가 말했다.

그녀의 말에 고이한은 아무 말 없이 입술을 적셨다.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우아하게 핸들을 돌리자 검은색 롤스로이스가 차들을 제치고 떠나갔다.

소예지는 고이한의 차가 사라질 때까지 계속 보았다. 그와 결혼한 지 수년이나 되었지만 여전히 그를 잘 알지 못했다.

그동안 그녀에 대한 그의 마음이 사랑이 아니라 은혜를 갚기 위해서라는 걸 알면서도 소예지는 어리석게 기다렸다. 그가 사랑해주기를.

그런데 그렇게 기다린 세월이 벌써 6년이었다.

소예지는 이젠 누구도 원망하지 않았고 그저 사람을 잘못 고른 그녀의 탓이라고 생각하며 이 결과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걸어서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양희순이 다가와 물었다.

“사모님, 아침에 뭐 드시겠어요?”

“계란 두 개랑 옥수수 반 개만 삶아줘요.”

소예지가 답했다.

양희순은 뜻밖이라는 듯 잠시 멈칫하더니 주방으로 향했다.

‘오늘 사모님의 눈빛이 평소와 달라 보여. 평소보다 더 차가워진 것 같기도 하고. 어젯밤에 사모님이랑 대표님이 싸우셨나? 아무 소리도 못 들었는데?’

평소 고이한이 몇 주 동안 집에 들어오지 않을 때면 소예지의 안색이 몹시 좋지 않았다. 이번에는 딸이 입원해서 폐 세척까지 했는데도 말 한마디 꺼내지 않았다.

소예지는 3층 서재에 앉아 깊은 생각에 잠겼다. 한 달 전 그녀는 최우수 졸업생으로 M국 의학 포럼에 서서 연설했는데 수많은 최고 제약 회사들의 러브콜을 받았다. 그녀가 고개만 끄덕이면 바로 연구소에 들어가 수천억의 투자를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화려한 모습을 소예지는 단 한 번도 입 밖에 꺼내지 않았다. 이 집에서,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눈에 비친 그녀는 그저 금으로 된 새장 속에 갇힌 쓸모없는 가정주부일 뿐이었다.

그녀의 남편 고이한은 18살에 M국 금융 중심지인 화얼스트리트의 최고 컨설턴트가 되었고 23살에는 회사를 물려받아 투자 업계의 냉혈 신화가 되었다. 불과 4년 만에 국내 재산 순위 1위에 올랐다.

그때 소예지의 변호사 친구 박시온에게서 문자가 왔다.

[예지야, 오늘 점심에 내가 거래처 만나다가 누굴 봤는지 알아?]

이어서 사진 세 장이 도착했다.

사진 속에서 고이한이 룸에 앉아 외국 손님들을 접대하고 있었고 그의 옆에 심유빈이 요염한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심유빈은 몸에 딱 붙는 원피스를 입고 우아하고 매혹적인 자태를 뽐냈다. 세 번째 사진에서는 무슨 농담이라도 했는지 눈웃음을 짓고 있었다. 고이한이 시선을 늘어뜨리고 그녀를 보고 있었는데 그야말로 선남선녀가 따로 없었다.

[예지야, 좋게 생각해. 충격받지 말고.]

박시온이 위로를 건넸다.

[괜찮아.]

소예지가 답장했다.

고이한에게 있어서 소예지는 사람들 앞에 내세우기 창피한 아내였지만 심유빈은 달랐다.

세계적인 유명 피아니스트이자 패션계에서 각광받는 사람이고 또 주얼리 홍보모델로도 활동할 뿐만 아니라 얼굴까지 예뻤다. 어느 것 하나 고이한의 체면을 살려주지 않는 게 없었다.

오후 3시 30분, 소예지는 서둘러 차를 몰고 딸의 유치원으로 향했다. 가장 먼저 유치원으로 들어가 딸을 데려오고 싶었다.

4시쯤 빨간색 페라리 한 대가 그녀의 맞은편에 멈춰 섰다. 소예지는 저도 모르게 핸들을 꽉 잡았다. 왜냐하면 심유빈도 온 것이었다.

심유빈이 차 안에서 화장을 고치고 있었다. 고이한이 딸을 데리러 오는 걸 알고 일부러 미리 와서 기다린 게 분명했다.

고이한의 마음을 사로잡은 제삼자라면 수단과 방법이 뛰어난 여자일 것이다.

지난 2년 동안 소예지는 대놓고 심유빈과 맞서지 않았다. 아무리 소란을 피워도 어느 정도 선을 지키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하면 고이한이 가정으로 돌아올 거라고 생각했지만 현실은 더욱 심하게 굴면 굴었지 덜하진 않았다.

이번에는 소예지도 더는 가만히 있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차 문을 열고 먼저 내려 심유빈의 차량을 차갑게 노려보았다. 소예지를 본 심유빈이 화들짝 놀랐다.

‘오늘 이한 오빠가 하슬이를 데리러 안 온 건가?’

소예지가 그녀의 차를 뚫어지게 쳐다보자 심유빈은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차 문을 열고 매혹적인 자태로 차에서 내려 소예지에게 다가갔다.

소예지는 주먹을 꽉 쥐고 혐오스러운 눈빛으로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심유빈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

“안녕하세요, 예지 씨. 내가 누군지 알죠? 정식으로 자기소개할게요. 난 심유빈이고 이한 오빠의... 친한 동생이에요.”

“그쪽이 누구든 상관없으니 내 딸한테서 떨어져요.”

소예지는 경고하듯 날카로운 시선을 보냈다.

그녀를 쳐다보던 심유빈이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예지 씨, 혹시 내가 예지 씨 남편을 좋아해서 나쁜 여자라고 생각하는 건가요?”

소예지는 그녀와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심유빈이 콧방귀를 뀌며 계속 말했다.

“그럼 내가 좋아하는 남자를 예지 씨가 빼앗아간 거라면 예지 씨도 괘씸한 사람이 아닐까요?”

“그쪽처럼 이렇게 뻔뻔하기 짝이 없는 사람은 처음 봐요.”

소예지가 거침없이 평가했다.

심유빈이 손가락으로 목에 한 목걸이를 어루만지자 소예지의 시선이 그곳으로 향했다. 가느다란 목에 파란색 사파이어 목걸이를 하고 있었다.

그녀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고이한이 선물한 것이라는 걸 소예지는 알고 있었다. 어쨌거나 지난 2주 동안 두 사람이 함께 있었으니까.

소예지는 유치원 문이 열린 걸 보고 문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심유빈은 소예지의 뒷모습을 보면서 씩 웃더니 두 눈에 가소롭다는 빛이 스쳐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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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처분이 의학계를 휩쓸고 다니십니다   제1676화

    “불...”소예지의 입술 사이로 낮은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그녀는 분명 고이한을 거부하지 않았다. 다만 이런 순간에는 밝은 곳보다 어둠 속이 더 편했고 그것은 오래전부터 이어져 온 소예지의 습관이었다.고이한 역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늘 그래 왔으니까.그는 당장이라도 불을 꺼 주고 싶었지만 한편으로는 망설여졌다. 불이 꺼지는 순간 소예지가 다시 마음을 닫고 자기 방으로 피해 버릴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들었기 때문이다.결국 고이한은 낮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내 방으로 가자.”그는 품 안의 소예지를 가볍게 안아 올렸다.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는 살짝 갈라져 있었고 옆방으로 들어가자마자 문이 닫히면서 바깥의 빛도 함께 차단되었다.멀리서 스며드는 희미한 가로등 불빛만이 남아 어둠 속 남자의 모습을 어렴풋이 비추고 있었다.고이한은 문 앞에서부터 다시 그녀에게 입을 맞췄다. 오랫동안 참아 왔던 마음을 한꺼번에 쏟아내듯 다급하고 간절한 입맞춤이었다.그렇게 한참이 지나 소예지는 부드럽게 침대 위에 눕혀졌다.어둠 속에서 고이한의 셔츠는 어느새 세 번째 단추까지 풀려 있었고 호흡마저 흐트러져 있었다. 평소의 단정하고 이성적인 모습과는 전혀 다른, 위험할 정도로 매력적인 분위기가 느껴졌다.어둠이 내려앉자 오히려 모든 감각은 더욱 선명해졌고 소예지의 머릿속은 어느새 새하얗게 비어 버렸다.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그저 고이한의 이끌림을 따라 두 사람이 과거에 익숙했던 감정을 조금씩 되찾아 갈 뿐이었다.그의 입맞춤은 뜨거웠고 손길에는 더 이상 망설임이 없었다. 몇 년 동안 감정을 억눌러 온 고이한은 마치 마침내 잃어버렸던 것을 되찾은 사람처럼 그녀를 놓지 못했다.“잠깐...”소예지는 손을 뻗어 그를 밀며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나 지금 안전한 기간 아니야.”고이한은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낮고 쉰 목소리로 그녀를 달랬다.“준비했어.”그 말에 소예지는 순간 머릿속이 멍해졌다. 아직 그 의미를 완전히 받아들이기도 전에 남자의 숨결

  • 전처분이 의학계를 휩쓸고 다니십니다   제1675화

    소예지는 오랜만에 이렇게 느긋하게 바깥 풍경을 바라보는 것 같았다.한동안 창밖을 바라보던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아름다운 풍경에 넋을 잃었다.고이한은 소예지의 캐리어를 안방에 가져다 놓고 자신의 캐리어는 작은방 문 앞에 두었다.그 모습을 본 소예지는 아무 말 없이 안방 문을 열고 들어갔다.혼자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조금 필요했다.하지만 막상 정리할 것도 별로 없었다.포럼이 끝나고 고이한이 호텔을 예약했을 뿐인데 어쩌다 보니 자연스럽게 여기까지 흘러왔다.소예지는 그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다.어쩌면 그 자체가 고이한에게는 무언의 승낙이나 다름없었을지도 몰랐다.소예지는 캐리어를 열어 세안 용품을 꺼낸 뒤 욕실로 들어가 샤워를 했다.잠시 후 문밖에서 고이한이 누군가와 통화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잠깐 귀를 기울이던 소예지는 그가 고하슬과 통화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아마 딸아이는 오늘 밤 부모님이 돌아올 거라 생각하고 전화를 건 모양이었다.희미하게 들려오는 목소리로 보아 고이한은 딸을 달래고 있는 듯했다.크림을 바르던 소예지의 손이 잠시 멈췄다. 왠지 모르게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샤워를 마친 소예지는 원피스로 갈아입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고이한은 이미 통화를 끝낸 뒤였다. 그는 소예지를 돌아보며 눈가에 옅은 웃음을 띠었다.“방금 하슬이한테 전화 왔었어. 우리 이틀쯤 늦게 들어갈 수도 있다고 말해 놨어.”딸을 잘 달랜 모양이었다.소예지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고이한의 눈에 어린 웃음이 한층 짙어졌다.그 대답에 담긴 뜻을 그도 모를 리 없었다.고이한은 손목시계를 한번 확인했다.“저녁 준비해 뒀어.”저녁으로는 정갈한 요리가 한 상 가득 차려져 있었다.종이 등갓을 통과한 은은한 불빛이 두 사람을 부드럽게 감쌌다.고이한이 물었다.“오늘 많이 힘들었어?”“괜찮았어.”“오늘 우리 쪽 직원들이 당신 칭찬을 많이 하던데.”고이한이 웃으며 말했다.소예지는 잠시 멈칫하다 고개를 숙여 국물을 한 모금 마셨다.“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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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예지는 찻잔을 들던 손을 잠시 멈추고 맞은편의 남자를 바라봤다.“그런 거 아니야. 그냥 오래돼서 기억이 안 나는 거야. 나 원래 음식도 가리는 편 아니잖아.”고이한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소예지는 편식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동시에 자기 관리가 철저하고 절제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그런 점은 일할 때 보여 주는 모습과도 무척 닮아 있었다.고이한은 소예지의 입맛에 맞춰 요리 네 가지와 국 하나를 주문한 뒤 디저트도 따로 하나 추가했다.잠시 후 디저트가 먼저 나오자 소예지는 숟가락으로 한입 떠서 맛을 봤다. 단맛이 지나치지 않고 딱 적당했다.고이한은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말없이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창밖에서 스며든 노을빛이 테이블 위로 길게 드리워진 가운데 두 사람 사이에는 편안한 침묵이 흘렀다.굳이 말을 나누지 않아도 어색하지 않았다.그렇게 여유롭게 저녁 식사를 마친 뒤 두 사람은 근처의 오래된 거리를 천천히 산책했다. 나란히 거리를 걷다 다시 호텔로 돌아왔을 때는 어느덧 밤 아홉 시가 넘어 있었다.소예지는 객실 카드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간 뒤 뒤따라온 고이한을 돌아봤다.“잘 자.”고이한은 문 앞에 선 채 좀처럼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그러다 무의식적으로 객실 안으로 따라 들어오려 했다.소예지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리 없었다.그녀는 손을 뻗어 그의 가슴을 가볍게 밀었다.“됐어. 돌아가서 푹 쉬어.”고이한은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잘 자 뽀뽀해 줘.”이제는 소예지에게도 제법 익숙해진 일이었다.그런데도 그가 대놓고 요구하자 괜히 얼굴이 조금 뜨거워졌다.고이한이 자연스럽게 몸을 숙이자 소예지는 그의 얼굴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하지만 입술이 떨어지려는 순간 고이한은 그녀를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이어 몸을 숙여 입술에 다시 한번 입을 맞췄다.짧은 입맞춤이 끝난 뒤에야 고이한은 아쉬운 듯 그녀를 놓아주었다.“잘 자.”그는 천천히 뒤로 물러나 복도로 나갔다.소예지는 문을 닫고도

  • 전처분이 의학계를 휩쓸고 다니십니다   제1673화

    맞은편에 앉아 있던 고이한은 소예지의 작은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그의 입꼬리에도 자연스럽게 미소가 번졌다.기분 좋은 하루의 시작이었다.아침 식사를 마친 뒤 두 사람은 함께 메인 행사장으로 향했다.포럼 개막식에서는 과학기술부 관계자와 두 명의 원사가 차례로 축사를 했다.무대 아래에는 각 분야에서 활약하는 젊은 인재들이 자리하고 있었고 현장에는 활기찬 분위기가 가득했다.소예지와 고이한의 좌석은 서로 떨어져 있었다.고이한은 특별 초청을 받은 투자 업계 대표이자 청년 기업가 리더 자격으로 앞쪽 좌석에 앉았고 소예지는 생명의학 분야 대표로 다른 쪽에 자리했다.오전 일정이 잠시 중단되고 휴식 시간이 되자 행사장 곳곳에서 참석자들이 서로 의견을 나누는 목소리가 들려왔다.소예지도 한 여성 연구자와 조금 전 발표된 내용을 두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그때 곁에서 익숙한 기척이 느껴졌다.소예지가 고개를 들자 어느새 고이한이 옆에 서 있었다. 그의 손에는 따뜻한 차 한 잔이 들려 있었다.그는 주변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던 중 소예지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은 것을 보고 직접 차를 가져온 참이었다.고이한은 말없이 찻잔을 내밀었다.소예지는 자연스럽게 받아 들었다.“고마워.”따뜻한 온기가 손바닥으로 스며들었다.고이한은 옅게 웃은 뒤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자리로 돌아간 고이한의 곁에도 곧 몇몇 참석자들이 모여들었다.오전 일정이 모두 끝난 뒤 두 사람은 함께 행사장 식당으로 가서 점심을 먹었다.오후에는 소예지가 전문 주제 토론에 참석하면서 두 사람은 다시 각자의 일정으로 돌아갔다.그렇게 시간이 흘러 오후 네 시 반쯤 첫날 포럼 일정이 모두 마무리되었다.소예지는 다른 참석자들과 함께 행사장을 빠져나온 뒤 한쪽에 서서 휴대폰 메시지를 확인하고 있었다.그때 어깨 위로 무언가 묵직하게 내려앉았다.따뜻한 온기가 남아 있는 정장 재킷이었다.소예지가 고개를 들자 언제 다가왔는지 고이한이 바로 옆에 서 있었다.“날씨가 좀 쌀쌀해졌어. 걸치고 있어.”경주는

  • 전처분이 의학계를 휩쓸고 다니십니다   제1672화

    다음 날 아침.소예지는 고이한과 조식당에서 만나기로 했다.이날 소예지는 회색 정장을 입었다. 깔끔하게 떨어지는 재킷과 바지가 잘 어우러져 단정하면서도 당당한 분위기를 풍겼다.머리는 뒤로 깔끔하게 묶어 올려 아름답고 또렷한 얼굴선이 그대로 드러났다.오늘 호텔에 머무는 사람들 대부분은 청년 과학기술 포럼에 참석하기 위해 모인 각 분야의 인재들이었다.소예지가 조식당에 들어서자마자 한 남자가 그녀를 알아보고 불러 세웠다.“혹시 소예지 박사님 맞으신가요?”신사적인 인상의 남자였다. 소예지를 알아본 것이 반가운지 목소리에는 살짝 들뜬 기색이 묻어 있었다.“네, 맞습니다. 실례지만 누구신가요?”소예지는 예의 바르게 웃으며 물었다.“저는 봉석진이라고 합니다. 국가과학기술원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소 박사님 논문을 평소에 정말 인상 깊게 읽었습니다.”봉석진은 손을 내밀며 진심 어린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최근 발표하신 신경퇴행성 질환 관련 논문도 정말 인상적이었습니다. 특히 접근 방식이 독창적이어서 몇 번이나 정독했어요.”소예지는 그의 이름을 듣고 반갑게 손을 맞잡았다.“봉 박사님이셨군요. 과찬이세요.”“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연락처를 교환해도 될까요? 앞으로 기회가 되면 서로 의견을 나눌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물론이죠.”소예지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두 사람이 막 연락처를 교환했을 때 소예지의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좋은 아침입니다, 소 박사님.”소예지는 굳이 뒤돌아보지 않아도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봉석진 역시 다가오는 남자를 한눈에 알아봤다.“고 대표님,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봉 박사님, 반갑습니다.”고이한은 손을 내밀어 그와 악수했다.훤칠한 체격에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남다른 분위기를 지닌 남자였다. 특히 그의 상징처럼 자리 잡은 회백색 머리카락은 멀리서도 단번에 고이한임을 알아볼 수 있게 했다.고이한은 자연스럽게 소예지의 옆에 섰다.봉석진은 경주에 있는 연구실에서 오랫동안 연구에만 몰두해

  • 전처분이 의학계를 휩쓸고 다니십니다   제1671화

    “다음 주에 경주 가면 회의 말고 특별히 가고 싶은 데 있어? 아니면 먹고 싶은 음식이라도?”고이한이 물었다.소예지는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반나절 정도 시간 내서 구경하면 좋을 것 같아. 먹고 싶은 건 딱히 없고 그때그때 상황 봐서 먹으면 될 것 같아.”“알겠어. 내가 준비할게.”고이한은 그렇게 말한 뒤 다시 덧붙였다.“들어보니까 운월산 단풍이 정말 아름답대. 우리 한번 보러 가자.”소예지의 눈빛이 살짝 밝아졌다.예전부터 운월산의 가을 풍경이 아름답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직접 볼 수 있다면 이번 방문도 충분히 의미 있을 것 같았다.“좋아.”소예지는 고개를 끄덕인 뒤 그를 올려다봤다.고이한의 눈에 비친 그녀는 섬세한 이목구비와 희고 깨끗한 피부가 어우러져 마치 고요한 유화 속 한 장면처럼 아름다웠다.소예지는 자신을 바라보는 고이한의 뜨거운 시선과 마주쳤다.두 사람의 시선이 맞닿는 순간 공기 사이로 작은 전류가 흐르는 듯 묘한 긴장감이 번졌다.“뭘 봐?”소예지가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당신.”고이한은 조금도 숨기지 않고 대답했다.“예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예뻐.”말을 마친 그는 몸을 숙여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나 하슬이 보러 갈게.”저녁 식사를 마친 뒤 두 사람은 딸과 함께 밖으로 나가 잠시 공을 차며 시간을 보냈다.저녁 여덟 시 반쯤 씻고 머리까지 감은 고하슬은 고이한의 손을 잡아끌고 침대로 가 그림책을 읽어 달라고 졸랐다.예전에는 고이한이 소예지의 안방에 들어오는 것조차 그녀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 하지만 지금은 더 이상 따로 허락을 구하지 않아도 될 만큼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가까워져 있었다.소예지는 옆에 앉아 아이패드로 생물학 논문을 읽으며 부녀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그렇게 한참이 지나 고하슬이 잠들 시간이 되자 고이한은 그림책을 덮었다.“내일 아빠가 다시 읽어 줄까?”“네! 내일도 읽어 주세요.”고하슬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고이한은 딸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잘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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