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소예지의 기분은 무척 좋았다.소예지의 웃음은 나뭇잎 사이로 스며드는 겨울 햇살처럼 따뜻했고 그 분위기는 자연스럽게 윤하준에게도 번져 갔다.그는 최대한 그녀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 애쓰며 이 여유롭고 평화로운 분위기를 조심스럽게 유지하고 있었다.아이들의 사진을 찍을 때도 그는 종종 의도적으로 소예지를 함께 프레임에 담았다.카메라 속 그녀의 미소는 부드럽고 따뜻했으며 마치 한겨울의 햇살처럼 보는 이의 마음을 천천히 녹이고 있었다.카페에 앉아 아이들과 함께 개성 있는 장난감을 고르던 소예지는 자연스럽게 아이들 곁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윤하준은 말없이 그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사진 속에서 이안과 고하슬은 앞서 걷고 있었고 소예지는 그 뒤를 따라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렌즈를 의식한 그녀는 잠시 고개를 들어 그를 향해 환하게 웃었다.그 미소는 분명 ‘자연스러운 거리감’ 안에 있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마치 그녀가 두 아이를 돌보는 그의 아내처럼 느껴졌다.윤하준은 휴대폰을 내려다보다가 오래도록 사용하지 않았던 SNS 앱을 열었다.그리고 방금 찍은 사진들 가운데 아이들과 햇살 그리고 풍경이 담긴 몇 장을 골라 올렸다.그는 짧게 한 줄을 적었다.[조용하고 아름다운 시간]업로드 버튼을 누르는 순간, 가슴이 묘하게 두근거렸다.어쩌면 그것은 그가 세상에 처음으로 소예지에 대한 마음을 드러낸 순간이었을지도 몰랐다.공식적인 고백도 아니었고 누구도 그 의미를 정확히 알아차리지 못할 문장이었지만 그는 정말로 전 세계가 그녀를 알아주길 바랐다.호텔로 돌아온 윤하준은 소파에 앉아 잠시 숨을 돌렸다.문득 휴대폰을 확인해 보니 그가 올린 게시물에는 벌써 ‘좋아요’와 댓글이 빠르게 쌓이고 있었다.[윤 대표님, 여긴 어디예요? 풍경이 정말 예쁘네요!][아이들 너무 귀여워요! 옆에 계신 분도 미인이시네요.][대표님, 소개 좀 해주세요!]모두 그를 잘 아는 사람들이었고 진심이 느껴지는 반응들이었다.윤하준은 조용히 웃었다.하지만 그 웃음 속에는 설명할 수
김경환이 자리를 비운 뒤, 윤하준이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예지 씨?”윤하준의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그녀의 생각을 현실로 끌어당겼다.“괜찮아요?”소예지는 고개를 끄덕였다.“네, 괜찮아요.”“엄마, 아빠 언제 돌아와요?”고하슬이 빵을 입에 문 채 물었다.소예지는 미소를 지으며 딸의 작은 머리를 쓰다듬었다.“아빠는 일이 좀 있으셔서... 아마 우리가 먼저 한국에 돌아가야 볼 수 있을 거야.”다행히도 고하슬은 이안과 함께 놀고 있었기에 전처럼 아빠에게 집착하지는 않았다.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빵을 한 입 더 베어 물었다.윤하준은 식사 주문을 위해 메뉴판을 살펴보고 있었고 그 사이 소예지는 잠시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아침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확인하지 않았던 메시지를 열어보자 새벽 시간에 도착한 고이한의 문자 한 통이 눈에 들어왔다.[미안해. 급한 일이 생겨 먼저 귀국했어. 김 비서가 남아 후속 일정 도와줄 거야.]시각을 확인하니 자정이 막 지난 뒤에 보내진 메시지였다.“예지 씨, 계속 여기서 스키 탈래요? 아니면 다른 데로 가볼까요?”윤하준이 자연스럽게 물었다.소예지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되물었다.“어디 생각해 둔 데 있어요?”“동화 마을 어때요? 아이들이 정말 좋아할 것 같은데.”소예지는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스키는 자신에게 익숙한 운동도 아니었고 고이한이 자리를 비운 이상 딸과 제대로 놀아줄 사람도 없었다.차라리 장소를 바꿔 여행을 마무리하는 편이 더 나을 것 같았다.게다가 그녀는 이안이 스키에 흥미가 없다는 사실을 윤하준이 이미 눈치챘다는 것도 느낄 수 있었다.윤하준의 눈동자에 미세한 설렘이 스쳤다.“좋아요. 그럼 제가 차량 준비할게요. 점심 먹고 출발하죠.”소예지는 더 이상 김경환에게 부탁할 생각이 없었다.그저 조용히 자기만의 방식으로 남은 여행을 마무리하고 싶었다.점심을 마친 뒤, 두 사람은 아이들과 함께 숙소로 돌아가 짐을 정리했다.오전 열 시 반, 검은색 SUV 세 대가 숙소 앞으로 도착했고 윤하
고이한의 표정이 단숨에 어두워졌다.“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전화기 너머에서 고수경의 목소리가 다급하게 떨렸다.“잘 모르겠어. 언니가 씻고 나오다가 갑자기 쓰러졌어. 내가 만져봤을 땐 온몸이 펄펄 끓고 있었고 계속 오빠 이름만 부르더라고...”휴대폰을 쥔 고이한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지금은 누가 돌보고 있어?”“언니 부모님이 와 계시긴 한데... 내가 보기엔 언니가 가장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은 오빠야. 그러니까 빨리 돌아와!”그 순간, 고이한의 관자놀이에 핏줄이 불쑥 솟아올랐다.그는 무의식중에 주먹을 불끈 쥐며, 쉰 목소리로 낮게 말했다.“지금 당장 귀국할 거라고 전해.”“진짜야? 그럼 빨리 와! 분명 언니가 오빠랑 소예지랑 같이 스키 타러 간 거 알고 화나서 병 난 거야!”“그걸 말했어?”고이한의 목소리에는 한기마저 서려 있었다.전화기 너머에서 고수경이 움찔하더니 얼버무리듯 대답했다.“그게... 언니가 물어봤거든. 나도 모르게 대답해 버렸어.”잠시 뒤, 그녀는 급하게 말을 이었다.“미안해, 오빠. 일부러 그런 거 아니야. 앞으로는 언니한테 오빠랑 소예지 얘기 절대 안 할게. 약속할게.”고이한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그리고 곧장 몸을 돌려 김경환에게 전화를 걸었다.“지금 당장 귀국할 수 있는 제일 빠른 항공편으로 예약해 줘.”“대표님, 귀국하시는 건가요?”김경환이 놀란 기색으로 물었다.“너랑 이문혁은 남아. 난 혼자 돌아갈 거야.”고이한의 말투는 단호했다.“국내에 무슨 일 있으신 건가요?”김경환이 조심스럽게 물었지만,“별일 아니야.”고이한은 건조하게 잘라 말했다.“네, 알겠습니다. 가장 빠른 항공편으로 바로 예약하겠습니다.”김경환은 더 묻지 않고 통화를 마쳤다.깊은 새벽, 스키장에서 도시 외곽 공항으로 향하는 검은 SUV 한 대가 눈길을 가르며 속도를 높였다.다음 날 아침, 김경환은 소예지와 고하슬을 데리러 왔다.고하슬이 고개를 들고 물었다.“삼촌, 우리 아빠는요?”“어젯밤에 급한
고이한은 딸에게 스키를 가르치고 있었다.고하슬은 제법 안정적으로 스키를 타고 있었고 기본적인 기술도 나쁘지 않았다.반면 이안은 다소 겁이 많은 편이라 한 걸음 한 걸음 조심스럽게 눈 위를 옮기고 있었다.그 모습을 지켜보던 소예지는 이미 세 번이나 넘어지고 난 뒤였고 결국 그제야 고하슬이 답답한 듯 아버지를 떠밀었다.“아빠, 얼른 가서 엄마 좀 가르쳐줘요!”딸이 지친 기색을 보이자 고이한은 곧바로 상황을 알아차리고 부드럽게 말했다.“여기서 잠깐 쉬고 있어. 금방 다녀올게.”그는 말을 마치고 고개를 돌려 옆에 있던 김경환을 향해 짧게 당부했다.“하슬이 좀 봐줘.”“네, 대표님.”김경환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고이한은 조심스럽게 소예지 쪽으로 다가갔다.그녀는 마침 눈밭에 누운 채 숨을 고르고 있었다.그는 허리를 굽혀 손을 내밀며 말했다.“도움이 필요하십니까, 소 박사님?”소예지는 시선을 피한 채 짧게 대꾸했다.“혼자 할 수 있어.”그녀는 곧바로 스키 폴을 짚고 일어나려 했지만 하필 그 지점은 약간 경사가 있는 내리막이었다.몸을 제대로 가누기도 전에 앞으로 미끄러져 버렸고 고이한은 반사적으로 그녀를 따라붙었다.“비켜!”소예지가 숨 가쁘게 외쳤다.하지만 고이한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결국 소예지는 중심을 잃고 그대로 그의 품에 안긴 채 눈밭 위로 나뒹굴었다.남자의 단단한 팔이 그녀를 정확히 받쳐냈고 두 사람은 마치 그림처럼 그녀가 위에 올라탄 자세로 나란히 쓰러졌다.잠깐의 정적이 흘렀다.“놔.”소예지는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 몸부림쳤다.손바닥이 그의 단단한 가슴에 닿아 있었지만 고이한은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오히려 그녀를 더 단단히 끌어안았다.그의 눈은 마치 밤하늘을 비추는 흑요석처럼 깊고도 매혹적이었다.“당신이 먼저 달려든 거야.”낮고 거친 그의 목소리에 소예지는 순간 평소의 냉정을 잃고 당황해했다.그를 밀쳐내려 했지만 두꺼운 스키복 탓에 움직임은 둔했고 힘도 제대로 실리지 않았다.조금 떨어진 곳에서
“4년 전이네.”윤하준이 천천히 와인잔을 돌리며 입을 열었다.“아직 몸이 완전히 굳진 않았을 거야.”“나, 아빠 스키 타는 거 보고 싶어요!”고하슬이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나도요! 나도 외삼촌 스키 타는 거 보고 싶어요!”이안도 금세 말을 보탰다.아이들의 말에 윤하준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내일은 하루 종일 너희랑 같이 놀아줄게. 우리도 초급 코스에서만 탈 거니까 걱정 말고.”“이안아, 너 스키 타본 적 있어?”고하슬이 묻자, 이안은 고개를 저었다.“아직 한 번도...”“난 타봤어!”고하슬이 뿌듯한 얼굴로 말하는 순간이었다.“켁!”갑자기 고이한이 마시던 와인에 기침을 했다.그는 입을 손으로 가린 채 조용히 기침을 삼켰고 그 소리에 고하슬의 관심이 곧장 아버지에게로 옮겨갔다.“아빠, 괜찮아요?”“괜찮아.”고이한은 딸을 안심시키듯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내일 아빠가 제대로 알려줄게.”그때 치즈 고구마 그라탱이 식탁 위에 올려졌다.고하슬이 군침을 삼키며 눈을 반짝이자 고이한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천천히 먹어야 해. 뜨거우니까 조심하고.”소예지는 말없이 아이들의 접시에 그라탱을 조심스레 덜어주었다.대화에서는 한 걸음 물러나 있었지만 아이들을 먼저 챙기는 그녀의 손길은 여전히 섬세했다.그 모습을 바라보던 윤하준이 부드럽게 말했다.“오늘은 아마 이안이 외국에 와서 제일 신난 하루일 거예요.”소예지는 그 말에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며칠 전 밤, 울먹이며 전화를 걸어왔던 이안의 떨리는 목소리와 힘없이 흔들리던 눈빛이 아직도 기억 속에 또렷이 남아 있었다.한 아이를 키우는 엄마로서 소예지는 자연스럽게 이안에게도 마음이 갔다.오늘만큼은 그 아이가 마음껏 웃을 수 있기를 바랐다.식사를 마치고 레스토랑을 나설 무렵, 고이한은 자연스럽게 셔틀버스에 올라 소예지와 고하슬을 별장까지 데려다주었다.8번 별장 앞에 도착해 차에서 내린 고하슬은 두 사람의 손을 양쪽으로 꼭 붙잡은 채 눈밭 위를 깡충깡충
고이한의 주먹이 옆구리에서 조용히 쥐어졌다가 다시 천천히 풀어졌다.그가 곧바로 몸을 돌려 돌아서자 그 뒷모습을 김경환이 한 번 더 흘끗 돌아보았다.그의 시선 너머에는 소예지와 윤하준이 마치 오래된 연인처럼 눈송이 아래 나란히 서 있었고 그 곁에서 두 아이는 까르르 웃으며 눈밭 위를 뒹굴고 있었다.그 장면은 너무도 조화롭고 아름다웠다.윤하준 역시 고이한의 뒷모습이 사라지는 것을 눈치챘다.그는 순간적으로 소예지의 어깨에 올려두었던 손을 조용히 내렸다.“미안해요.”윤하준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아까는... 감정이 조금 앞섰어요.”소예지는 고개를 저으며 조심스럽게 그가 건넸던 머플러를 풀어 그의 손에 들려주었다.“날이 추우니까 하준 씨가 하고 계세요. 전 안에 가서 제 걸 가져올게요.”윤하준은 잠시 멈칫하다가 머플러를 다시 받아 들었고 소예지는 더 말없이 실내로 발걸음을 옮겼다.그녀는 전혀 몰랐다.방금 전 고이한이 이곳에 다녀갔다는 것도 윤하준이 일부러 고이한에게 오해를 남겼다는 것도.그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오직 윤하준뿐이었다.그는 고이한이 다시 소예지를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고 동시에 소예지가 그에 대해 얼마나 철저하게 선을 긋고 있는지도 깨달았다.그래서 그는 그녀가 모르는 사이에, 그리고 혹시라도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기회가 주어진다면 소예지와 고이한 사이에서 방패가 되기로 스스로 마음먹었다.윤하준은 본래 자신이 그렇게 고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사랑을 얻는 방식은 사람마다 달랐고 누군가는 정면으로 다가가며 또 누군가는 조용히 스며든다. 그는 후자였으며 그리고 지금 이 순간만큼은 무엇보다 그녀의 곁에 머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여겼다.소예지는 방에서 자신의 머플러를 가져와 목에 둘렀다.다시 밖으로 나가 보니 두 아이는 여전히 눈밭에서 깔깔거리며 놀고 있었다.역시 아이에게 가장 좋은 친구는 또래 친구였다.오후 다섯 시 반, 윤하준의 휴대폰이 울렸다.“하준아, 저녁 식사하러 오지? 아이들이랑 소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