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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Author: 이야기보따리
“이한아, 이리 와. 소개해줄 사람 있어.”

하종호가 고이한에게 말했다.

고이한은 하종호를 따라 소예지와 강준석에게로 다가갔다. 두 사람이 함께 있는 모습에 하종호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

“예지 씨, 아는 분이세요?”

소예지가 웃으며 답했다.

“네, 알아요.”

하종호가 껄껄 웃었다.

“이한아, 내가 소개하려던 분이 바로 강준석 씨야. 클리번 교수의 가장 뛰어난 제자이자 미래 의학 분야의 인재셔.”

고이한이 존경과 감탄이 섞인 눈빛으로 쳐다보면서 친분을 맺으려는 듯 손을 내밀었다.

“안녕하세요, 강준석 씨. 고이한입니다.”

“만나서 반가워요.”

강준석은 그를 힐끗 보고는 짧게 악수했다.

“예지 씨, 만나서 반가웠어요.”

그는 일부러 존댓말 하며 웃으면서 옆으로 물러났다.

고이한은 강준석의 뒷모습을 잠깐 쳐다보다가 소예지에게 시선을 돌렸다. 소예지가 주스 한 잔 더 가지러 가려던 그때 고이한이 그녀의 팔을 꽉 잡았다.

“네가 누군지 잊지 마.”

고이한의 차분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 낮고 묵직한 목소리에 경고와 강압적인 분위기가 담겨 있었다.

소예지가 입꼬리를 씩 올리며 비웃었다. 고이한은 공공연하게 애인을 데리고 사교 모임에 다니면서 그녀가 강준석과 잠깐 얘기를 나눴을 뿐인데 경고를 받고 말았다.

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말이 아주 딱 들어맞는 상황이었다.

소예지가 손을 뿌리치자 고이한도 그녀를 놓아주었다. 그녀는 주스 한 잔을 더 가지러 갔다.

그 시각 심유빈이 한 사모님과 옆에서 D국 언어로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저 여자는 누구예요? 처음 보는 얼굴인데.”

그러자 심유빈이 웃으며 답했다.

“고이한의 와이프예요.”

사모님의 얼굴에 놀란 기색이 역력해졌다.

“유빈 씨 오늘 저녁에 조심해야겠어요. 이한 씨랑은 거리를 두도록 해요. 아내분이 화라도 내면 어떡해요.”

심유빈이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신경 안 쓸 거예요. 두 사람 지금 이혼 절차를 밟고 있거든요.”

“딱 봐도 세상 물정을 잘 모르는 것 같은데. 이한 씨랑은 확실히 어울리지 않네요.”

사모님은 소예지를 보면서 평가했다.

그들은 소예지가 D국 언어를 알아듣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소예지는 지난 6년 동안 4개 국어를 마스터했다.

심유빈은 그들의 모임에서 두 사람이 이혼할 거라는 소문을 퍼뜨리고 있었다. 고이한이 이 사실을 알면서도 묵인하고 있는 걸까?

고이한은 술잔을 들고 두 남자와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강준석은 홀로 서 있는 소예지를 보고는 잔을 들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예지야, D국에는 언제 왔어? 무슨 일 있어?”

“남편이랑 딸이랑 크리스마스 보내러 왔어.”

소예지가 갑자기 E국 언어로 대답했다. 그러자 강준석도 웃으면서 E국 언어로 대화를 이어갔다.

“내가 가르친 걸 아직 기억하고 있구나.”

강준석은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가 심유빈 쪽을 힐끗 보았다.

“나가고 싶다면 내가 데리고 나갈 수 있어.”

그는 소예지 남편의 내연녀가 심유빈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소예지가 덤덤하게 웃어 보였다.

“고마워. 도움이 필요하면 그때 말할게.”

고이한의 차가운 시선이 그들에게로 향했다. 미소를 띠고 있던 얼굴이 순식간에 차가워졌고 입가에 가져간 술잔도 공중에서 몇 초간 멈췄다.

“다 같이 게임 하나 해볼까요? 게임 이름은 시간 저장고로 정했어요. 사실은 와인을 감별하는 게임인데 간단해요.”

하종호가 웃으며 말했다.

자리에 있는 사람들 모두 기뻐하며 참여 의사를 밝혔다. 심유빈은 윤하준의 옆에 서서 의미심장하게 소예지를 쳐다보더니 좋은 구경거리를 기대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모두 흥미진진한 얼굴이었고 소예지는 그저 구경만 하기로 했다. 그리고 그들이 즐겁게 놀고 빨리 끝나기를 바랐다.

웨이터는 술 세 병을 천으로 덮었고 쟁반 위에 술 석 잔이 놓여 있었다. 술을 마신 사람은 주된 풍미만 말하면 되었다.

고이한이 첫 번째로 나섰다. 와인 한 잔을 들고 흔든 다음 맛을 보더니 덤덤하게 말했다.

“블랙커런트.”

“맞았습니다. 다음 분.”

곧 심유빈의 차례가 되었다. 그녀는 우아하게 와인 잔을 들어 흔들고는 붉은 입술을 깨물었다.

“혹시 오크통 풍미인가요?”

하종호가 검은 천을 걷고 웃으며 말했다.

“유빈 씨가 웬일로 틀렸죠?”

심유빈이 간절한 표정으로 말했다.

“약한 벌을 내려줘요, 종호 씨.”

“그럼 이 잔을 다 마시세요.”

하종호가 크게 웃었다.

심유빈은 와인 잔을 보며 난감한 듯 눈썹을 찡그리더니 입을 가리고 기침했다.

“내가 대신 마실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어서 고이한이 심유빈의 앞에 놓인 잔을 들고 단숨에 마셔버렸다.

소예지는 그 모습을 싸늘하게 지켜보았다. 심유빈은 고이한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방법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조명 아래 심유빈의 하얀 얼굴에 약간의 홍조가 돌았다. 심유빈이 고이한에게 말했다.

“고마워.”

어느덧 강준석의 차례가 되었다. 강준석은 술잔을 들고 맛을 보았다.

“찍어야겠네요. 흑연 풍미인 것 같은데 맞나요?”

“찍었는데도 맞히시다니. 정말 대단합니다.”

그때 소예지의 차례가 되었다. 하종호는 소예지도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화들짝 놀랐다.

심유빈과 친한 사모님이 말했다.

“소예지 씨 차례예요.”

“이 사람은 참여하지 않습니다.”

고이한이 나서자 사모님이 웃으며 말했다.

“고이한 씨, 아내분이 참여하면 더 재미있을 텐데요.”

그 순간 모든 이의 시선이 다시 소예지에게로 쏠렸다. 소예지가 웃으며 말했다.

“그럼 저도 한번 찍어볼게요. 틀려도 웃지 마세요.”

소예지는 가늘고 하얀 손가락으로 크리스털 와인 잔을 잡았다. 먼저 잔을 흔들어본 다음 냄새를 맡았다. 차분한 얼굴에 신비함과 고전적인 분위기가 묻어 있었다.

심유빈이 씩 웃으며 생각했다.

‘소예지가 틀리면 이한이가 대신 마셔줄까?’

소예지는 한 모금 마시고 음미했다.

“부끄럽지만 제가 짐작하기로는 블랙커런트 풍미의 와인이에요. 맞혔는지는 모르겠어요.”

그때 하종호가 검은 천으로 덮어 놓았던 술병을 열더니 놀라움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와인 감별 능력이 뛰어나시네요, 예지 씨. 맞혔습니다.”

심유빈의 눈에 어두운 빛이 스쳐 지나갔다. 고이한의 집에 많은 종류의 와인이 있다는 걸 깜빡하고 말았다. 이 게임은 소예지에게 그리 어려운 게임이 아니었다.

“예지 씨 정말 대단하네요. 와인을 잘 아는 걸 보면 예술 방면에도 조예가 깊겠죠? 저기 피아노가 있는데 한 곡 연주해보시겠어요?”

심유빈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녀의 두 눈에 조롱의 빛이 담겨 있었다. 소예지가 이 자리에서 망신을 당하길 바라는 게 틀림없었다.

“유빈아.”

고이한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심유빈은 입술을 깨물면서 오만하게 웃었다.

“됐어요. 없던 일로 하죠.”

분위기가 갑자기 조용해졌다. 하종호와 윤하준이 서로 눈빛을 주고받으며 이 어색한 분위기를 수습하려던 그때 소예지가 웃으며 말했다.

“그럼 부족하지만 한 곡 연주하도록 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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