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주, 주상 전하!"
치마를 걷어쥐고 가장 먼저 엎드린 것은 정화였고, 우물가의 머리들이 물결처럼 낮아졌다.
그 물결 속에 몸을 낮추자, 흙바닥을 짚은 손바닥 아래로 제 맥이 쿵쿵 울렸다.
'고개 들지 마.'
'목소리도 바꿔.'
'2년이야. 그새 몰골도 상했어. 알아볼 리 없어.'
바람을 타고 침향 냄새가 흘러왔다.
세자 시절부터 그가 쓰던 향이었다.
밤새 서책을 읽다 그녀의 무릎을 베고 잠들던 날에도, 그 밤 깨진 찻잔 앞에서 그녀를 내려다보던 날에도, 이 남자에게서는 같은 냄새가 났다.
검은 목화 한 켤레가 눈앞에서 멈췄다.
"짐이 이름을 물었다."
"……서의라 하옵니다."
목을 긁어 낸 듯 갈라진 소리 위로, 짧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서의."
이현이 그 이름을 입안에서 굴려 보았다.
"고개를 들라."
들지 않으면 불경이고, 들면 끝일지도 몰랐다.
서의는 흉이 진 왼쪽 뺨부터 내보이며 고개를 들었다.
다시 마주한 왕은 조금 야위어 있었다.
짙어진 눈 밑 그늘 아래로, 광대가 움푹 꺼져 있었다.
그 눈이 그녀의 얼굴 위에 멈췄다.
한 호흡, 두 호흡.
이현의 표정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모르는구나.'
굳어 있던 어깨가 풀리는데, 어쩐지 명치 끝이 서늘했다.
알아보지 못할 만큼, 이 사람에게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던 걸까.
그래서 그녀는 보지 못했다.
용포 소매 안에서, 왕의 주먹이 하얗게 쥐어지는 것을.
"무엇을 보고 독살이라 하였느냐."
"입가의 경직과 혀의 부르틈, 손톱 밑의 혈흔은 부자 중독의 증상이옵니다. 수챗구멍에서 탕약 찌꺼기를 찾았고, 그 안에 부자 뿌리가 있었사옵니다."
"은비녀는?"
"은비녀는 비상만 압니다, 전하."
이현의 눈꺼풀이 느리게 내려앉았다가 올라왔다.
서의가 제 손끝으로 눈길을 떨군 사이, 그 눈이 그녀의 쪽 진 머리로 올라갔다.
나무 비녀 하나만 꽂힌 자리에서 숨 한 모금 머물렀다가, 다시 내려왔다.
"그 뿌리, 이리 다오."
흙 묻은 손을 펴자, 이현이 몸을 굽혀 직접 부자 조각을 집어 들었다.
손바닥을 스치고 간 손끝이 얼음을 쥐었다 놓은 것처럼 찼다.
거두어 가는 그 오른 손등을, 번들번들 엉겨 붙은 화상 흉터가 덮고 있었다.
'……저건.'
2년 전에는 없던 흉이었다.
활을 쏠 때마다 그녀가 손수 연고를 발라 주던 손등에, 불에 덴 자국이 손목 안쪽까지 번져 있었다.
왕의 손이 불에 델 일이 무엇이 있단 말인가.
아무렇지 않게 소매를 내려 손등을 덮은 이현이, 뿌리 조각을 햇빛에 비춰 보았다.
"단면이 희구나."
"……예. 말린 지 오래되지 않은 부자는 속이 반투명하옵니다. 시중에서 구하기 어려운, 내의원 약재고의 상품이옵니다."
"내의원의 독이 궁녀의 탕약에 들었다라."
나직한 목소리에 어깨를 움찔한 박 의관이, 엎드린 이마를 더 낮게 조아렸다.
"전하, 소신이 30년을 내의원에 몸담았사오나 말단 의녀가 시신 앞에서 약재를 혀에 대는 꼴은 처음 보았사옵니다. 저런 막돼먹은 검시를 어찌 믿을 수 있겠사옵니까."
"30년 동안 은비녀만 믿은 의관의 검시는 믿을 수 있고?"
벌어진 채 굳은 박 의관의 입가로, 이마에 맺힌 땀이 콧등을 타고 흘러 흙바닥에 떨어졌다.
몸을 일으킨 정화가 왕의 소매 끝을 붙잡았다.
"전하, 소첩이 이미 병사로 처리하라 일렀사옵니다. 저 의녀는 산골에서 올라온 천것이라 궁의 법도를 모르고, 감히 소첩 앞에서도……."
이현이 소매를 거두었다.
거칠지는 않았지만, 망설임도 없는 손길이었다.
"중전이 의원이었소?"
"……예?"
"짐이 묻고 있는 것은 저 의녀요, 중전."
정화의 입이 그대로 닫혔다.
"중전마마께 저리……."
"말조심해, 목 달아나고 싶어?"
귓불은 붉게 달아올랐는데, 부채 자루를 쥔 손끝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중전 자리에 앉은 뒤로, 이 많은 눈앞에서 망신을 당해 본 적은 한 번도 없는 얼굴이었다.
곁눈으로 그 얼굴을 보는 서의에게, 통쾌함보다 먼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좌의정인 아버지가 공들여 밀어 올린 중전을, 왕은 어째서 이토록 차갑게 대하는 걸까.
정화 쪽으로는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이현이 박 의관을 내려다보았다.
"박 의관."
"예, 예, 전하!"
"이 뿌리가 어느 약재고에서 나왔는지, 해 지기 전까지 장부와 대조하여 올리라."
"화, 황공하옵니다!"
"그리고."
이현의 시선이 다시 서의에게 돌아왔다.
"이 시신의 검안서는 저 의녀가 쓴다."
"말단 의녀가 검안서를……?"
"중전마마 앞에서 저리 대놓고……."
수군거림이 번지는 사이, 이현이 몸을 돌렸다.
다들 그대로 행차가 떠나리라 여겼을 때, 걸음을 멈춘 그가 등을 보인 채 입을 열었다.
"서의."
"……예, 전하."
"오늘부터 너는 어전 전속 검시 의녀다. 짐이 부르면 언제든 오라."
우물가가 발칵 뒤집혔다.
새파랗게 질린 정화가 휘청이자, 김 상궁이 황급히 그 몸을 부축했다.
왕의 행차가 멀어지자, 정화는 서의 곁을 지나치며 걸음을 늦췄다.
비단 치맛자락이 손등을 스치고, 허리를 숙인 숨결이 귓바퀴에 닿았다.
"전하 눈에 좀 들었다고 우쭐하지 말거라."
꿀을 바른 듯 단 목소리였다.
"이 궁에서 내 눈 밖에 난 것들은, 다 죽었거든."
매화 향이 멀어지도록, 서의는 엎드린 채 움직이지 못했다.
귓가에 남은 정화의 속삭임보다, 바람결에 묻어 온 침향 냄새가 코끝에 더 오래 걸려 있었다.
왜.
2년 전 그 밤, 그는 끝내 그녀의 눈을 보지 않았다.
목이 쉬도록 매달리는 그녀를 내버려 둔 채 전각을 나섰고, 다음 날 아침 폐위 교지에 어보가 찍혔다.
그런 사람이 오늘은 처음 보는 말단 의녀를 위해 중전의 말을 끊었다.
말이 좋아 전속이지, 곁에 두고 감시하겠다는 뜻일 수도 있었다.
혹은 정말로, 시체를 읽는 의녀가 필요한 것일 수도.
어느 쪽이든 이제 이 남자의 얼굴을 매일 봐야 했다.
자신을 폐한 남자의 얼굴을.
고개를 들었을 때, 왕의 행차는 아직 세답방 담 모퉁이를 다 돌지 못하고 있었다.
엎드린 궁인들 누구도 숨소리조차 내지 않는 가운데, 바람은 그쪽에서 이쪽으로 불었다.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 하나가 그 바람을 타고 흘러왔다.
"복내관, 저 의녀의 처소가 어디인지 알아 두어라."
칼끝이 살갗에 닿기 직전, 누군가 그녀의 손목을 낚아챘다.몸이 홱 돌아가며 단단한 가슴팍에 부딪혔다.코끝으로 침향이 밀려들었다.찌익-비단 찢기는 소리가 귓가에서 났다.그녀를 감싼 팔이 크게 떨렸고, 머리 위에서 낮은 숨이 끊어지듯 새어 나왔다.고개를 들자, 흰 도포에 흑립을 눌러쓴 사내가 보였다.갓 그늘 아래, 이를 악문 턱선이 어스름 속에서도 또렷했다."……전하."대답 대신 이현이 그녀를 담벼락 쪽으로 밀어 넣었다.등 뒤에 그녀를 감추고 돌아선 그의 손에, 도포 안에서 뽑아 든 환도가 들려 있었다.자객의 칼이 다시 내리꽂혔다.챙-쇳소리가 좁은 골목 벽에 부딪혀 날카롭게 튀었다.동궁 시절 활터에서 해가 지도록 시위를 당기던 손목은 칼을 받아 내면서도 흔들리지 않았다.다만 막아 낼 때마다, 왼쪽 옆구리께 도포 자락이 검게 젖어 들었다.다음 칼이 들어오는 순간 반걸음 파고든 이현의 환도가, 자객의 칼 밑을 미끄러져 들어갔다.억눌린 신음과 함께 자객의 무릎이 꺾였고, 검은 천으로 싼 얼굴이 흙바닥에 처박혔다."뒤에!"서의의 외침에 이현이 몸을 틀었다.골목 어귀를 막고 섰던 다른 하나가 어느새 그의 등 뒤까지 들이닥쳐 있었다.옆구리를 감싼 채 도는 걸음이, 반 박자 늦었다.생각보다 손이 먼저 나갔다.서의는 품에서 은비녀
서의는 그 한 줄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꼭' 자의 마지막 획 끝에 먹이 동그랗게 뭉쳐 있었다.받아 적던 붓이 거기서 한참을 머뭇거린 자리였다.등잔 가까이 종이를 들자, 약재 냄새 아래로 다른 냄새가 묻어났다.향이었다.법당 기둥에 오래 배었다가, 종이를 펼칠 때마다 조금씩 풀려나오는 냄새.종이 결도 궐에서 쓰는 것과 달랐다.닥 껍질을 덜 걸러 거뭇한 티가 군데군데 박힌, 두껍고 거친 종이였다.산중 절에서 스님들이 손수 떠 쓰는 종이가 꼭 이랬다.금란의 보따리에서 나온 약재 꾸러미 하나를 집어 들어 싸 맨 종이를 풀자, 접힌 귀퉁이 안쪽에 엄지손톱만 한 붉은 인이 찍혀 있었다.인수당.10여 개의 꾸러미가 하나같이 같은 인을 품고 있었다.구리개는 혜민서 앞으로 약재상이 줄지어 늘어선 거리였다.보름이 멀다 하고 산길을 오르던 사람이, 그 길목에서 약을 짓고 갔다.위험한 곳에 혼자 가지 마라.처소 담벼락 앞에서 그가 어명이라며 붙인 조건이 귓가에 걸렸다.꾸러미를 도로 싸는 사이, 편전 서안 위 엎어진 팽이를 덮고 있던 손이 떠올랐다.이 종이를 들고 가면, 이것도 그 손바닥 아래로 들어갈 것이다.원자는 죽었다.그 한마디를 하던 얼굴에는 흔들림이 없었다.흔들림 없는 얼굴로 그녀를 등지고 전각을 나선 적이 있는 사람이었다.연이는 짚방석 위에서 여전히 잠들어 있었다.덮어 준 겉옷 아래로 동그랗게 웅크린 어깨가 숨결 따라 오르내렸다.
찻물이 식어 가는 소리마저 들릴 것 같았다.서의는 그 말을 끝까지 들었다.그 밤 "네가 했느냐"고 묻던 목소리보다도 차분하게, 한 글자도 떨리지 않았다."……그러하옵니까."서의는 다관을 들어 식은 찻잔을 비우고, 새 차를 따랐다.손이 떨리지 않았다.떨리지 않는 손을 내려다보며, 그녀는 제가 이 사람을 닮아 가고 있다고 생각했다."그 팽이는 증좌이옵니다. 검시실로 도로 가져가겠사옵니다.""이것은 짐이 둔다.""전하께서 판정에 손대지 않으시겠다 하셨사옵니다.""판정에는 손대지 않는다. 팽이에 손대는 것이다."서안 위 손을 거두지 않는 이현에게 더 청하지 않고, 서의는 다반을 거두어 일어섰다.문턱을 넘어 돌아서 문을 닫는 사이, 문틈으로 그가 보였다.팽이를 덮고 있던 손이, 그제야 조금 들려 있었다.엎어진 팽이 바닥을 내려다보는 그 등이 한껏 굽어 있었다.문이 닫혔다.밤이 깊어서도 의녀청 검시실에는 등잔불이 꺼지지 않았다.연이는 구석 짚방석 위에 새우처럼 웅크린 채,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먼저 가라고 3번을 일렀는데, 시신 곁에 스승님 혼자 두고는 못 간다며 기어이 버틴 끝이었다."의녀."문간에 선 허진은 의금부 복색 소매에 먹물이 튄 채, 옆구리에 두툼한 장부 한 권을 끼고 있었다."약재고 출납부를 빌려 왔소. 비상 1냥이 나간 줄, 출납 서명 칸이 또 칼로 긁혀 있더이다."장부를 받아 등잔 아래 펼치자, 이름이 있어야 할 자리가 하얗게 일어나 있었다.손톱으로 눌러 보아도 보풀은 눕지 않았다.눈을 감자, 승정원 문서고에서 달빛 아래 펼쳐 두었던 출납부가 되살아났다.폐위 교지 초안을 올린 자의 이름 칸에서 손가락에 걸리던 보풀이, 그 결 그대로 떠올랐다."칼끝이 왼편에서 들어가, 획 끝에서 위로 들리며 빠졌사옵니다. 그래서 오른편 끝에만 종이가 뜯겨 말려 올라가 있사옵니다."허진이 등잔 곁으로 몸을 숙였다."……정말 그렇군. 그런데 그걸 어찌 그리 단번에 보오?""전에 같은 결을 본 적이 있사옵니다. 어디서인지
"스승님, 뭐라고 쓰여 있어요?"고개를 들이미는 연이 앞에서, 서의는 팽이를 손바닥 안에 접어 쥐었다."……아무것도. 흠집이다."팽이를 무명에 다시 싸 소매 깊숙이 넣었다.손이 떨리지 않도록, 손목에 힘을 주었다.'아직이야.'꺾이려는 무릎을 버티며, 서의는 금란의 굳은 손을 붙잡았다.죽은 이의 손이, 산 사람의 손보다 단단했다.'아직은 무너지면 안 돼.'"시신을 의녀청 검시실로 옮기거라. 표주박과 보따리도 함께. 내 눈앞에서 하나도 흘리지 말고."군사들이 들것을 펴는 동안, 서의는 협문 앞 흙바닥을 살폈다.금란이 쓰러진 자리에서 협문까지는 이슬 젖은 흙바닥 위로 10걸음 남짓이었다.몇 걸음만 더 갔으면, 금란은 궐 밖 길 위에서 쓰러졌을 것이다.궐 밖에서 죽은 나인은 궐의 검험을 거치지 않는다.길에서 객사한 나인으로 적히고, 보따리는 길바닥 누군가의 손에 들어갔을 터였다.독을 탄 손이 셈한 것보다, 비상이 조금 빨리 돌았다."연이야.""네, 스승님.""오늘 본 팽이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 금란이 조카에게 주려던 것이다. 그리 알거라."눈을 끔뻑이는 연이의 얼굴에 무언가 더 묻고 싶은 기색이 어렸지만, 서의의 얼굴을 보더니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들것이 검시실 문턱을 넘기도 전에, 낯익은 짤랑거림이 회랑 끝에서 다가왔다."비상 중독이라지. 약재고 비상이 빈 일과 엮인 시신이니, 내의원이 거두어 가겠네."남궁도가 하리 2명을 앞세우고 웃으며 섰다.서의는 들것 앞으로 나서서, 소매에서 상아 패를 꺼내 들었다."검안 차비이옵니다, 나리. 이 시신의 검안이 끝나기 전에는 누구도 손대지 못하옵니다."남궁도의 눈이 패 뒷면의 어압에 닿았다.웃음은 그대로였는데, 열쇠 꾸러미를 쥔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솟았다."……전하께서 귀한 것을 내리셨구먼."하리들에게 턱짓하고 돌아서기 직전, 남궁도의 눈이 들것 끝에 얹힌 금란의 보따리에 한 번 닿았다가 떨어졌다.검시실에서 서의는 검안서를 써 내려갔다.침방 나인 금란,
먼저 움직인 것은 서의였다.다반 위의 손을 거두어 무릎에 내려놓고, 문지방까지 들리도록 고개를 숙였다."……의녀는 누구의 잔이든 먼저 살피옵니다. 전하께서 2년 전 일을 떠올리실 만큼 흔한 버릇이옵니다.""그러하냐.""은비녀가 희다고 다 깨끗한 것도 아니옵니다."서의는 왕 앞의 잔을 도로 끌어와, 새끼손가락 끝을 적셔 혀에 댔다.마른 국화와 대추, 꿀 조금.혀끝이 저리지도, 목이 조이지도 않았다."독은 없사옵니다.""그래도 물리라."윤 상궁이 무릎걸음으로 다가와 다관을 거두었다.허리를 펴는 사이, 그 눈이 서의의 품께에 한 번 머물렀다.비녀를 넣은 바로 그 자리였다.윤 상궁이 물러가자, 이현이 복내관에게 눈짓했다.복내관이 소리 없이 그 뒤를 밟아 나갔다가, 한 식경이 지나서야 돌아왔다."소주방에도 다방에도 들르지 않고, 곧장 중궁전 안채로 들었사옵니다. 다관은 그대로 손에 든 채로."이현은 대답하지 않았다.서의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그날 미시의 찻상은, 빈 잔 하나를 사이에 두고 끝까지 조용했다.그날 밤 서의는 처소 문고리에 머리카락을 끼우며, 처음으로 손끝이 떨렸다.흔한 버릇이라는 말이 윤 상궁의 귀에 얼마나 남았을지 알 수 없었다.'버릇은 여전하구나'는, 훨씬 오래 남았을 터였다.이튿날 동이 트기 전이었다."스승님! 스승님!"다급하게 처소 문을 두드리던 연이가, 문이 열리자 숨이 턱에 닿은 얼굴로 서쪽을 가리켰다."서쪽 협문 앞에 침방 언니가 쓰러져 있대요! 그 언니요, 순덕 언니 대신 약재 심부름 다니던!"서의는 신을 꿰며 품을 더듬었다.은비녀와, 상아 패.수문장과 군사 몇이 둘러선 서쪽 협문 앞, 그 가운데 나인 하나가 모로 누워 있었다.등에 멘 보따리 끈이 어깨를 파고든 채였다."물러서라. 내의원에 기별을 넣었으니-"앞을 막아서는 수문장에게, 서의는 소매에서 패를 꺼내 내밀었다."검안 차비이옵니다."수문장의 눈이 상아 패의 어압에 닿자마자 허리가 접혔다.연이가 서의의 등 뒤에서 입을 떡 벌
"……차, 말이옵니까."서의는 제 귀를 의심했다.혼자 다니지 말라는 어명보다도 더 엉뚱한 조건이었다."기미상궁이 있사옵니다.""기미상궁의 차는 쓰다.""찻잎을 오래 우리지 말라 이르시면 될 일이옵니다.""이르면 그날만 덜 쓰고, 이튿날 또 쓰다."이현이 태연하게 소매를 털었다."매일 미시, 편전으로 차를 들이라. 증거든 검안서든, 그 찻상에 얹어 오면 된다. 의녀가 날마다 편전을 드나들 핑계로 그만한 것이 없지."듣고 보니 그럴듯했다.그럴듯해서, 더 얄미웠다."……둘째 조건은 무엇이옵니까.""차 맛을 보고 정하마."이튿날 미시, 다반을 받쳐 들고 편전에 드는 서의의 뒤를 연이가 화로와 탕관을 끌어안고 바짝 따랐다."제가 들어 드릴게요! 탕관이 얼마나 무거운데요!""편전 안에는 못 든다.""문간까지만요! 문간에서 얌전히 있을게요!"정말로 문간에 얌전히 무릎을 꿇은 연이는, 서의가 찻잎을 덜기도 전에 벌써 손가락 하나를 접고 있었다.첫날, 이현은 찻잔을 입술에 대자마자 내려놓았다."싱겁구나."이튿날은 한 모금을 넘기고 미간을 좁혔다."쓰다."서의는 다반 아래에서 주먹을 쥐었다 폈다.세자빈 시절에도 이 사람은 꼭 이랬다.새 찻잎을 들이면 하루는 싱겁다, 하루는 쓰다 트집을 잡다가, 3일째에야 아무 말 없이 잔을 비우고 빈 잔을 그녀 쪽으로 밀어 놓곤 했다.그때도 그녀는 그 트집이 찻잎 탓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동궁전 다방에서 차를 내오는 나인을 두고, 굳이 빈궁을 불러 앉히려는 핑계였다.3일째 되는 날, 이현은 아무 말이 없었다.한 잔을 비우고, 빈 잔을 밀었다.또 비우고, 또 밀었다.곁에 선 복내관이 품에서 꺼낸 일지 위를, 붓끝이 사각사각 긁었다.'전하, 차 3잔 비우심. 쓰다는 말씀 없음. 평소엔 반 잔.'"복내관.""……예, 전하.""무얼 적느냐.""날씨이옵니다. 오늘 볕이 참 좋사옵니다."창밖에는 아침부터 잔뜩 흐린 하늘이 낮게 깔려 있었다.이현은 대꾸하지 않고 빈 잔을 또 한 번 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