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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오동나무 상자

Author: 6jay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1-01 22:13:49

의녀청에 소문이 도는 데는 반나절도 걸리지 않았다.

"그 산골 의녀가 어전 전속이 됐대."

"중전마마 앞에서 대들었는데도?"

"전하께서 직접 이름을 물으셨다잖아."

"목덜미에 그 흉한 걸 달고 무슨 수로?"

수군거림 사이에서 서의는 묵묵히 검안서를 써 내려갔다.

복례, 세답방 궁녀, 21세, 사인은 부자 중독.

붓끝이 멈춘 자리에 복례라는 이름이 걸렸다.

어디선가 들어 본 이름이었다.

기억을 더듬으려는 순간, 누군가 서의의 어깨를 툭 치고 지나갔다.

벼루가 엎어지며 쏟아진 먹물이, 반나절 공들여 적은 검안서의 글자들을 단숨에 삼켰다.

"어머, 팔꿈치가 닿았네."

의녀 하나가 입을 가리고 웃자, 방 안 여기저기서 킥킥대는 소리가 따라 터졌다.

먹물에 젖은 종이를 한참 내려다보던 서의가, 말없이 새 종이를 꺼냈다.

먹을 새로 갈아 첫 줄부터 다시 붓을 대자, 시신의 키와 손톱 밑 혈흔의 모양부터 수챗구멍에서 뿌리를 건진 자리와 그때 곁에 섰던 사람들의 이름까지 막힘없이 적혀 나갔다.

웃음소리가 하나둘 잦아들었다.

먹물을 엎은 의녀가 슬그머니 자리를 피하고, 대신 수의녀가 다가와 두 손을 소매 속에 모은 채 섰다.

"어전 전속이 됐다고 의녀청 일을 빼먹을 생각은 마라. 내일부터 들어오는 시신은 네가 다 씻긴다."

"예."

붓은 멈추지도 않은 채, 고개만 끄덕여 보였다.

"……예?"

소매 속에 모았던 수의녀의 손이 저도 모르게 풀렸다.

"씻기겠습니다. 시신은 제가 먼저 보는 편이 낫습니다."

입만 달싹이던 수의녀가, 괜히 헛기침을 하며 돌아섰다.

"스승님!"

탁-

벌컥 열린 문틈으로 동그란 얼굴 하나가 불쑥 들어왔다.

16살쯤 됐을까, 볼이 발그레한 견습 의녀가 양손에 찐 감자를 든 채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저, 연이라고 해요! 오늘부터 스승님 밑에서 배우래요!"

"……누가 그러더냐."

"수의녀님이요! 아무도 스승님 밑에 안 가겠다고 해서, 제가 냉큼 하겠다고 했어요!"

연이가 해맑게 감자 하나를 내밀었다.

"아까 우물가에서 다 봤어요. 그 뿌리 씹으시는 거요! 참말로 대단하셨어요!"

"씹은 게 아니라 혀에 댄 거다."

"그게 더 대단해요!"

하마터면 터질 뻔한 웃음을 누르는데, 엉겁결에 받아 쥔 감자가 손바닥에 따뜻했다.

궐에 들어온 뒤 처음이었다, 누군가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말을 걸어 온 건.

연이의 재잘거림은 해가 질 때까지 이어졌다.

먹을 갈아 주면서도, 감자 껍질을 벗기면서도 입은 한시도 쉬지 않았다.

전하께서 얼마나 무서운 분인지부터, 폐비 사건 이후로 전하께서 웃는 걸 본 사람이 없다는 것까지.

"그리고 전하는 중궁전에 거의 안 가신대요. 쉿, 이건 비밀이에요."

"비밀을 왜 나한테 말하느냐."

"스승님은 입이 무거워 보여서요!"

"그런 비밀이 또 있느냐."

"많죠! 박 의관 나리가 술만 드시면 우는 거, 그리고 대비전 연못 잉어가 자꾸 배를 뒤집고 죽는 거!"

먹을 찍던 서의의 손이 벼루 위에서 멎었다.

"……잉어가?"

"네! 벌써 몇 마리째래요. 다들 연못 물이 썩었다고 하던데요?"

대수롭지 않게 감자를 한 입 베어 무는 연이 곁에서, 서의는 대비전이라는 이름을 마음 한구석에 접어 넣었다.

그러다 연이가 목소리를 낮췄다.

"폐비 마마 얘기는 궐에선 금기예요. 원자 아기씨를 독살하려다 쫓겨나셨다잖아요. 그러고는 불에 타서……."

붓끝에서 먹이 뚝 떨어져 종이 위로 번졌다.

"어? 스승님, 손 떠셔요."

"추워서 그렇다. 이만 가 보거라."

***

밤이 깊어, 의녀청에서 처소로 돌아가는 길에는 담장 그늘이 길게 드리워 있었다.

몇 걸음 뒤에서 발소리가 따라오는 것 같아 돌아보았지만, 어둠 속에는 아무도 없었다.

말단 의녀 혼자 쓰라고 내준 처소는 비좁고 외풍이 셌다.

그 문고리로 가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아침에 나서며 문고리와 문설주 사이에 끼워 둔 머리카락 한 올이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어린 정화가 제 방을 몰래 드나들며 노리개며 분첩을 하나씩 집어 가던 무렵부터 생긴 버릇이었다.

숨을 죽이고 연 문 안은, 나설 때 그대로였다.

개켜 둔 이불 모서리도, 약초 바구니가 놓인 자리도 흐트러진 데가 없었다.

머리맡에 놓인 낯선 오동나무 상자 하나만 빼면.

누군가 들어왔다 간 것이다.

손바닥 두 개만 한 상자에는 아무런 표식도 없었다.

'함정일까.'

뚜껑에 독을 묻혀 두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가까이 댄 코끝에는 갓 대패질한 오동나무 냄새만 감돌았다.

소매에서 꺼낸 천으로 손을 감싸고, 숨을 참은 채 상자 뚜껑을 밀었다.

드르륵-

비단 위에 은비녀 하나가 누워 있었다.

끝에 작은 매화가 새겨진, 한 짝뿐인 은비녀였다.

목 끝에 숨이 걸렸다.

이 비녀를 모를 리 없었다.

가례를 올리던 날 밤, 갓 20살이던 세자가 비단 주머니에서 한 쌍의 은비녀를 꺼내 보이며 웃었다.

"하나는 빈궁이, 하나는 내가 갖겠소. 빈궁의 그릇에 독이 들거든, 내가 먼저 알아야 하니까."

2년 전 그 밤, 원자의 찻잔에 담갔다가 시커멓게 변해 버린 바로 그 비녀가 지금 그녀의 눈앞에 있었다.

떨리는 손으로 집어 든 비녀를 등잔불에 비추자, 매화 꽃잎 하나가 살짝 이지러져 있는 것이 보였다.

이가 나기 시작한 원자가 품에 안겨 칭얼대다가, 그녀의 머리에서 비녀를 빼 앙 깨물었던 자국이었다.

아야! 우리 아기, 어미 비녀가 그리 맛있느냐.

그 작은 잇자국이 2년이 지나도록 그대로 남아 있었다.

틀림없는 그녀의 비녀였다.

그런데 비녀는 처음 받던 날처럼 하얗게 닦여 있었다.

검게 죽은 은은 저절로 돌아오지 않는다.

누군가 몇 날 며칠을, 어쩌면 2년을 들여 이것을 닦아 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오늘 밤, 그 비녀를 그녀의 머리맡에 두고 갔다.

상자 바닥까지 더듬는 손끝에는 쪽지 한 장 걸리지 않았다.

보낸 이는 이름 대신, 이 비녀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만 알아볼 수 있는 방식을 골랐다.

반가움인지, 경고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비녀를 쥔 손을 가슴께로 끌어당기는 사이, 등잔불이 흔들릴 때마다 벽에 비친 그림자도 따라 일렁였다.

손끝이 차갑게 식어 갔다.

'누구야.'

'이 궐 어딘가에, 나를 아는 사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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