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전하, 이번엔 제가 버리겠습니다: Chapter 1 - Chapter 10

34 Chapters

1화. 은비녀는 깨끗했다

새벽안개가 채 걷히지 않은 세답방 뒤뜰, 우물가에 거적 한 장이 덮여 있었다.그 밖으로 비어져 나온 손은 푸르게 굳은 채, 손톱 밑마다 검붉은 피를 물고 있었다."병사요. 밤새 고뿔을 앓다가 숨이 넘어간 게지."하품을 삼키며 시신의 입에서 은비녀를 뽑아 든 것은 내의원 박 의관이었다.새벽빛 아래, 비녀는 티끌 하나 없이 하얗게 빛났다."보시오, 깨끗하지 않소. 독이었다면 시커멓게 죽었을 것이오."둘러선 의녀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이는 가운데, 무릎을 꿇고 시신의 손가락을 하나씩 펴 보던 말단 검시 의녀만이 고개를 들지 않았다."서의, 거기서 뭘 하느냐. 나리께서 병사라 하셨으면 병사다."수의녀가 눈꼬리를 치켜세워도 그 손은 멈추지 않았다.3달 전 남쪽 고을에서 올라온 이 검시 의녀를 반기는 사람은 의녀청에 아무도 없었다.불에 덴 흉 탓이기도 했고, 시체 앞에서 지나치게 침착한 탓이기도 했다.그 의녀가 폐위되어 불길 속에 죽었다고 적힌 이 나라의 중전이었다는 것은, 궐 안 누구도 알지 못했다."독살입니다."크지 않은 목소리였는데도 우물가가 일순 얼어붙었고, 박 의관의 눈썹이 꿈틀했다."방금 뭐라 했느냐.""이 궁녀는 독에 죽었다고 아뢰었습니다, 나리.""은비녀가 이리 깨끗한데 무슨 독이란 말이냐!"그제야 들린 얼굴 위로, 왼쪽 뺨 아래에서 귀밑을 지나 목덜미까지 번진 오래된 화상 자국이 새벽빛에 드러났다."은비녀는 비상만 압니다. 비상이 아닌 독 앞에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지요."등 뒤로 수군거림이 번졌다."말단 주제에…….""검시 의녀가 언제부터 의관 판정에 토를 달았대?""저러다 경을 치지, 쯧."들은 척도 하지 않고 시신의 입술을 손끝으로 누르자, 이상하리만치 뻣뻣한 입가 너머로 하얗게 부르튼 혀끝이 보였다.손톱 밑의 피는 고통에 몸부림치다 바닥을 긁은 흔적이었다.고뿔로 죽은 사람은 이렇게 죽지 않는다.입부터 저려 오다 속을 다 게워 내고, 마지막엔 숨길이 막혀 버둥대다 가는 독이 있었다.'부자다.'"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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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언니의 자리

부채 끝이 턱을 받친 채 멈춰 있었지만, 서의는 눈을 내리깔지 않았다.지금 피하면, 끝이었다."송구하오나 소인은 남쪽 산골에서 올라온 의녀이옵니다. 마마의 언니 되시는 분을 뵌 적이 없사옵니다.""남쪽 어디?""해령 고을이옵니다.""해령이라."고개를 갸웃하는 정화의 버릇은 어릴 적 그대로였다.원하는 걸 손에 넣기 직전이면, 이 아이는 늘 그렇게 고개를 기울였다."그 흉은?""고을에 큰불이 났을 때 얻은 것이옵니다."'해령엔 그해 불이 없었어.'숨긴 것은 하나였다.그 하나가 들키는 날, 그녀는 두 번 죽을 것이었다."하긴, 우리 언니가 이렇게 흉하게 생기진 않았지."부채 끝이 뺨 아래 일그러진 살결을 따라 목덜미까지 쓸어내리자, 뒤에 선 상궁들이 킥킥거렸다.정화는 들으라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너희도 알지? 우리 언니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제 배로 낳은 원자를 독살하려 한 독부였단다. 그러니 하늘이 불을 내려 데려간 게지."서의는 어금니를 악물었다.7살 적 돌계단에서 굴러 이마가 찢어진 날, 밤새 곁을 지키며 상처를 꿰매 준 사람이 누구였는지 이 아이는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어쩌면 일부러 지워 버렸는지도 몰랐다."그래서, 무슨 소란이라고?""이 의녀가 고뿔로 죽은 궁녀를 두고 독살이라 우기옵니다, 마마."이마를 땅에 붙인 채로도, 박 의관은 곁눈으로 중전의 기색을 살폈다."독살?"정화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무슨 독인데?"물음이 지나치게 빨랐다.스스로도 그걸 느꼈는지, 정화는 곧바로 부채를 펼쳐 입가를 가렸다.세답방 궁녀 하나가 죽었다는데, 중전이 가장 먼저 궁금해한 것은 독의 이름이었다.누가 죽었는지, 어쩌다 죽었는지보다도 먼저.정화의 뒤에서 김 상궁이 슬그머니 고개를 숙이자, 짙은 쪽빛 치맛자락이 그 발치에서 흔들렸다.세답방 궁녀가 끝내 입에 올리지 못한 그 색을, 서의는 알 것 같았다."세답방 궁녀 하나 죽은 걸로 이 새벽부터 시끄럽기도 하구나."부채가 접혔다.탁-"병사로 처리하거라. 중궁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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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어전 전속

"주, 주상 전하!"치마를 걷어쥐고 가장 먼저 엎드린 것은 정화였고, 우물가의 머리들이 물결처럼 낮아졌다.그 물결 속에 몸을 낮추자, 흙바닥을 짚은 손바닥 아래로 제 맥이 쿵쿵 울렸다.'고개 들지 마.''목소리도 바꿔.''2년이야. 그새 몰골도 상했어. 알아볼 리 없어.'바람을 타고 침향 냄새가 흘러왔다.세자 시절부터 그가 쓰던 향이었다.밤새 서책을 읽다 그녀의 무릎을 베고 잠들던 날에도, 그 밤 깨진 찻잔 앞에서 그녀를 내려다보던 날에도, 이 남자에게서는 같은 냄새가 났다.검은 목화 한 켤레가 눈앞에서 멈췄다."짐이 이름을 물었다.""……서의라 하옵니다."목을 긁어 낸 듯 갈라진 소리 위로, 짧은 침묵이 내려앉았다."서의."이현이 그 이름을 입안에서 굴려 보았다."고개를 들라."들지 않으면 불경이고, 들면 끝일지도 몰랐다.서의는 흉이 진 왼쪽 뺨부터 내보이며 고개를 들었다.다시 마주한 왕은 조금 야위어 있었다.짙어진 눈 밑 그늘 아래로, 광대가 움푹 꺼져 있었다.그 눈이 그녀의 얼굴 위에 멈췄다.한 호흡, 두 호흡.이현의 표정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모르는구나.'굳어 있던 어깨가 풀리는데, 어쩐지 명치 끝이 서늘했다.알아보지 못할 만큼, 이 사람에게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던 걸까.그래서 그녀는 보지 못했다.용포 소매 안에서, 왕의 주먹이 하얗게 쥐어지는 것을."무엇을 보고 독살이라 하였느냐.""입가의 경직과 혀의 부르틈, 손톱 밑의 혈흔은 부자 중독의 증상이옵니다. 수챗구멍에서 탕약 찌꺼기를 찾았고, 그 안에 부자 뿌리가 있었사옵니다.""은비녀는?""은비녀는 비상만 압니다, 전하."이현의 눈꺼풀이 느리게 내려앉았다가 올라왔다.서의가 제 손끝으로 눈길을 떨군 사이, 그 눈이 그녀의 쪽 진 머리로 올라갔다.나무 비녀 하나만 꽂힌 자리에서 숨 한 모금 머물렀다가, 다시 내려왔다."그 뿌리, 이리 다오."흙 묻은 손을 펴자, 이현이 몸을 굽혀 직접 부자 조각을 집어 들었다.손바닥을 스치고 간 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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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오동나무 상자

의녀청에 소문이 도는 데는 반나절도 걸리지 않았다."그 산골 의녀가 어전 전속이 됐대.""중전마마 앞에서 대들었는데도?""전하께서 직접 이름을 물으셨다잖아.""목덜미에 그 흉한 걸 달고 무슨 수로?"수군거림 사이에서 서의는 묵묵히 검안서를 써 내려갔다.복례, 세답방 궁녀, 21세, 사인은 부자 중독.붓끝이 멈춘 자리에 복례라는 이름이 걸렸다.어디선가 들어 본 이름이었다.기억을 더듬으려는 순간, 누군가 서의의 어깨를 툭 치고 지나갔다.벼루가 엎어지며 쏟아진 먹물이, 반나절 공들여 적은 검안서의 글자들을 단숨에 삼켰다."어머, 팔꿈치가 닿았네."의녀 하나가 입을 가리고 웃자, 방 안 여기저기서 킥킥대는 소리가 따라 터졌다.먹물에 젖은 종이를 한참 내려다보던 서의가, 말없이 새 종이를 꺼냈다.먹을 새로 갈아 첫 줄부터 다시 붓을 대자, 시신의 키와 손톱 밑 혈흔의 모양부터 수챗구멍에서 뿌리를 건진 자리와 그때 곁에 섰던 사람들의 이름까지 막힘없이 적혀 나갔다.웃음소리가 하나둘 잦아들었다.먹물을 엎은 의녀가 슬그머니 자리를 피하고, 대신 수의녀가 다가와 두 손을 소매 속에 모은 채 섰다."어전 전속이 됐다고 의녀청 일을 빼먹을 생각은 마라. 내일부터 들어오는 시신은 네가 다 씻긴다.""예."붓은 멈추지도 않은 채, 고개만 끄덕여 보였다."……예?"소매 속에 모았던 수의녀의 손이 저도 모르게 풀렸다."씻기겠습니다. 시신은 제가 먼저 보는 편이 낫습니다."입만 달싹이던 수의녀가, 괜히 헛기침을 하며 돌아섰다."스승님!"탁-벌컥 열린 문틈으로 동그란 얼굴 하나가 불쑥 들어왔다.16살쯤 됐을까, 볼이 발그레한 견습 의녀가 양손에 찐 감자를 든 채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저, 연이라고 해요! 오늘부터 스승님 밑에서 배우래요!""……누가 그러더냐.""수의녀님이요! 아무도 스승님 밑에 안 가겠다고 해서, 제가 냉큼 하겠다고 했어요!"연이가 해맑게 감자 하나를 내밀었다."아까 우물가에서 다 봤어요. 그 뿌리 씹으시는 거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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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나머지 한 짝

뜬눈으로 밤을 새운 서의의 처소 문을, 어스름이 가시기도 전에 늙은 내관 하나가 두드렸다."어전 전속 검시 의녀는 편전으로 들라는 전하의 분부일세."새벽같이 찐 감자를 싸 들고 와 툇마루에 앉아 있던 연이가 벌떡 일어섰다."스승님! 첫 어전 입시예요!""네가 왜 들떴느냐.""몰라요, 그냥 제 가슴이 막 뛰어요!"소매 깊숙이 은비녀를 밀어 넣는 사이에도, 이 비녀를 보낸 사람이 누구든 오늘 그 얼굴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편전까지 앞장선 늙은 내관은 조금 굽은 등으로 걸음마다 혀를 차더니, 기어이 한마디를 보탰다."이보게, 전하 앞에서는 묻는 말에만 답하게. 눈은 바닥에, 입은 무겁게. 알겠는가?""예, 나리.""그리고 전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든 놀라지 말고.""……무슨 말씀을 하시기에 그러십니까?"내관은 대답 대신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나도 모르겠네. 어제부터 전하께서 통 딴사람 같으시니."내관의 긴 숨은 회랑을 두어 번 꺾어 도는 내내 이어졌고, 그 끝에서 편전 문이 열렸다.물을 끼얹은 듯 고요한 안에서, 상소 더미 너머의 이현은 서의가 엎드린 지 한참이 지나도록 붓만 놀릴 뿐 고개 한 번 들지 않았다.어느새 왕의 곁에 가 선 늙은 내관이 헛기침을 했다."전하, 검시 의녀가 들었사옵니다.""그래."붓이 멈추고 들린 그 눈을, 서의는 똑바로 마주했다.어젯밤 상자를 보낸 사람이 이 남자라면, 지금 무언가 드러날 것이다."다시 보아도, 짐이 아는 얼굴은 아니로구나."굳어 있던 어깨에서 스르르 힘이 빠졌다.'……아니구나.'"검안서는?""여기 있사옵니다."이현은 검안서를 받아 읽어 내려갔는데, 한 장을 넘기는 손이 유난히 더뎠다."부자는 약재고 장부와 맞춰 보았느냐.""박 의관 나리께서 맞춰 보신다 하였사오나, 아직 기별이 없사옵니다.""그럴 테지."이현이 검안서를 서안 한쪽에 내려놓고, 고개도 들지 않은 채 다시 붓을 집었다."해령 고을이라 했지.""……예, 전하.""해령에 불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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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보약을 달이던 손

편전에서 물러 나온 그 아침, 수의녀는 약속대로 복례의 시신을 서의에게 넘겼다."씻기겠다고 했으니 씻겨라. 입관은 오후다."서의는 소매 속 은비녀를 품으로 옮겨 넣고 소매를 걷어 올렸다.편전에서 흘린 식은땀이 아직 등에 축축했지만, 시신 앞에 서면 머릿속이 맑아지는 건 예나 지금이나 같았다.볕이 들지 않아 한기가 도는 방 문간에서, 연이가 코를 싸쥔 채 발을 동동 굴렀다."스승님, 저 정말 들어가야 해요?""들어오지 않아도 된다. 대신 내가 부르는 걸 받아 적거라.""그건 할 수 있어요!"미지근한 물에 무명천을 적셔 시신 곁에 무릎을 꿇자, 입술만 겨우 달싹일 만큼 작은 소리가 흘러나왔다."복례. 하던 말을 마저 해 보거라. 내가 대신 적을 테니."검시 앞에서 늘 하는 버릇이었다.어제 본 굳은 입가와 부르튼 혀끝을 다시 짚고 손톱 밑 혈흔을 살피며 내려가던 손이, 오른 손바닥에서 멈췄다.엄지 아래에 두툼한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세답방 궁녀라면 방망이질로 생긴 굳은살이 손바닥 한가운데에 넓게 퍼져 있어야 했다.그런데 이 굳은살은 한 점에 옹이처럼 단단히 뭉쳐 있었다.긴 주걱을 쥐고 한 방향으로 수천 번, 수만 번 무언가를 저어 온 손.약탕관 앞에 쪼그려 앉아 밤새 불을 지키며, 약이 눋지 않도록 젓고 또 저은 손이었다."연이야.""네!""세답방에 가서, 복례가 언제부터 그곳에 있었는지 알아 오너라."쏜살같이 뛰어나가는 연이를 뒤로하고 그 손바닥을 내려다보는 사이, 머리보다 손끝이 먼저 기억해 냈다.매일 아침 김이 오르는 약사발을 받쳐 들고 중궁전 문턱을 넘던, 작고 붉게 튼 손.마마, 오늘은 조금 덜 쓰게 달였사옵니다.수줍게 웃으며 고개를 숙이던 어린 궁녀의 얼굴이 떠올랐다.우물가에서 거적을 걷었을 때 알아보지 못한 것은, 독에 부어오른 얼굴이 검푸르게 죽어 있었던 탓이었다.검안서에 적은 나이는 21세였다.2년 전이면 19살, 그 아이의 나이와 꼭 맞았다.복례.어디서 들은 이름인지 이제야 알았다.그녀가 중궁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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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이미 폐비였다

교지가 하루 먼저 왔는지 확인할 길은 하나뿐이었다.승정원 출납부.교지는 초안이 승정원에 들어온 날부터 어보가 찍혀 내려간 날까지, 한 줄도 빠짐없이 그 장부에 적힌다.중전으로 있던 시절, 그녀는 그 출납부를 직접 펼쳐 본 적이 있었다.역병 때 내려간 구휼 교지가 왜 3일이나 늦었는지 따지기 위해서였다.그때 승정원 서리가 쩔쩔매며 안내하던 서가의 자리를, 그녀는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문제는 말단 의녀가 승정원 문서고에 들어갈 길이 없다는 것이었다.낮에는 서리들이 지키고, 밤에는 순라군이 돈다."연이야."의녀청 뒤뜰에서 저녁 설거지를 하던 연이가 고개를 들었다.순덕에게 말을 전하고 막 돌아온 참이라, 콧등이 찬 바람에 발갛게 얼어 있었다."오늘 밤, 나와 함께 담을 하나 넘어 주겠느냐."연이의 손에서 바가지가 툭 떨어졌다."……스승님, 지금 도둑질하자는 거예요?""도둑질은 무슨. 복례가 남긴 말이 참인지 확인하려는 게다."연이는 한참 서의를 올려다보다가 입술을 오므렸다."위험한 거죠?""그래.""들키면 경 치는 거고요?""아마도.""……좋아요."뜻밖의 대답에 눈을 깜빡이는 서의 앞에서, 연이가 바가지를 주워 들고 물기를 탈탈 털더니 씩 웃었다."스승님은 시체 말을 믿으시잖아요. 그러니까 저는 스승님 말을 믿을래요."서의는 대꾸 대신, 물에 불어 쭈글쭈글해진 연이의 손등을 제 소매로 한 번 훔쳐 주었다.***처소를 나서기 전, 서의는 품에서 꺼낸 은비녀를 한동안 손바닥에 올려 두었다가 쪽 찐 머리에 밀어 넣었다.폐위되던 밤 이후 처음으로, 머리에 다시 꽂아 보는 비녀였다.누가 보냈든, 오늘 밤만큼은 이 비녀가 그녀를 중전이었던 사람으로 서 있게 해 줄 것 같았다.자시가 가까운 밤, 승정원 문서고 담장 아래에 쪼그려 앉은 연이가 서의의 소매 끝을 붙들고 놓지 않았다."누가 오면 부엉이 소리를 내거라.""저 부엉이 소리 못 내는데요. 부, 부엉……. 이거 부엉이 같아요?""……병아리 같구나.""병아리도 새잖아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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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아버지의 글씨

얼마나 그렇게 앉아 있었는지 모를 무렵, 서의는 손등으로 눈가를 문질러 닦고, 출납부를 제자리에 꽂은 뒤 몸을 일으켰다.울 시간은 나중에도 있었다.지금 알아야 할 것은 하나였다.누가 그 교지를 하루 먼저 썼는가.교지는 왕의 이름으로 내려가지만, 초안을 쓰는 손은 따로 있다.승정원은 올라온 교지 초안을 해마다 따로 묶어 서고 안쪽 궤에 넣어 두었다.출납부가 꽂힌 서가를 지나 그 궤 앞에 서 보니, 자물쇠는 녹이 슬어 제구실을 못 했고 다행히 걸쇠만 걸려 있었다.끼익-뚜껑을 들어 올리자 묵은 종이 냄새가 훅 끼쳐 왔다.초본 다발 가운데 그해 그달의 것을 찾아내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맨 위에 놓인 한 장이었다.폐서인 정씨.제 이름이 박힌 첫 줄에서, 서의의 눈길이 한동안 떨어지지 않았다.원자를 해하려 한 죄, 투기하여 궁을 어지럽힌 죄, 국모의 자리를 더럽힌 죄.종이 위에 늘어선 죄목들은 낯설 만큼 매끄러웠다.마치 오래전부터 다듬어 둔 문장처럼.그러나 그녀를 얼어붙게 만든 것은 내용이 아니었다.글씨였다.획을 끝까지 눌러 쓰고, 마지막 삐침을 위로 튕겨 올리는 버릇.세상에 이렇게 쓰는 사람은 단 둘뿐이었다.하나는 그녀 자신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 버릇을 그녀에게 가르쳐 준 사람이었다.7살 무렵, 사랑채 서안 앞이었다.작은 손에 붓을 쥐여 주고, 그 위를 커다란 손으로 감싸 쥐던 사람이 있었다."획을 끝까지 눌러라. 끝을 흐리는 사람은 말끝도 흐리는 법이다."먹 냄새와 함께 등 뒤에서 들려오던 낮은 웃음소리."그래, 그렇지. 우리 큰딸은 글씨가 나를 꼭 닮았구나."서의의 손끝이 초본 위의 글씨를 따라 미끄러졌다.폐, 서, 인.한 획 한 획이 그날 사랑채에서 배운 그대로였다.아버지였다.좌의정 정 대감.그녀를 가장 먼저 안아 올리고, 가장 먼저 글을 가르치고, 손님만 오면 큰딸 글씨를 꺼내 자랑하던 사람.세자빈 간택 날, 대문 앞에서 끝내 눈시울을 붉히던 사람.원자가 태어났을 때는 떨리는 글씨로 서찰을 보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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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그 손

서가 그림자 속에서 숨을 죽인 서의 쪽으로, 등롱 불빛이 서가 사이를 한 칸씩 밝히며 다가오고 있었다.숨을 곳은 많지 않았다.웅크린 채 들키면 도둑이 되고, 먼저 나서면 길 잃은 의녀쯤으로 넘어갈 수도 있었다.어느 쪽이든 매는 맞겠지만, 의금부로 끌려가느냐 마느냐는 그 한 걸음에 달려 있었다.서의는 치맛자락을 털고 그림자 밖으로 걸어 나갔다."……여기 있사옵니다, 대감."얼굴 정면으로 쏟아진 등롱 불빛에 눈이 시었지만, 서의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여기서 고개를 돌리면, 숨기는 것이 있는 사람이 된다."……의녀?"정 대감이 미간을 좁혔다.2년 사이 아버지는 부쩍 늙어 있었다.귀밑머리가 하얗게 세고 눈가 주름이 깊게 패었지만, 사람을 내려다보는 눈빛만은 예전 그대로였다.이 야심한 시각에 좌의정이 몸소 열쇠를 들고 문서고를 찾을 까닭은 많지 않았다.오늘 아침 박 의관이 약재고 장부를 들고 편전에 들었고, 부자 반 근이 빈 것이 왕의 귀에 들어갔다.그리고 오늘 밤, 아버지가 이곳에 왔다.무언가를 확인하러, 혹은 치우러."어전 전속 검시 의녀이옵니다, 대감.""아, 네가 그 산골 의녀로구나."정 대감의 입꼬리가 비스듬히 비틀렸다.딸의 목소리를 알아보는 기색은 터럭만큼도 없었다.등롱이 흔들릴 때마다, 아버지의 관복 가슴께에서 매화 향이 희미하게 풍겼다.중궁전에 들렀다 오는 길인 모양이었다.이 밤중에 중전을 만나고, 곧장 문서고로.2년이었다.뺨 아래부터 목덜미까지 불에 덴 살이 엉겨 붙었고, 목소리는 일부러 긁어 낮췄다.그래도 서의는 어딘가 기대하고 있었다.아비라면, 걸음걸이든 눈매든 무언가 하나쯤은 알아보지 않을까 하고."의녀가 이 시각에 승정원 문서고에는 무슨 일이냐.""검안서를 승정원에 올리러 왔다가 길을 잃었사옵니다.""길을 잃어? 담을 넘어서?"정 대감이 등롱을 내려 그녀의 손을 비췄다."산골 출신치고는 손이 곱구나."거두지 않은 손등을 타고 올라간 불빛이 손목의 오그라든 살갗에 닿자, 정 대감이 코끝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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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비어 가는 연고

"저, 전하……!"정 대감이 손목을 빼내며 황급히 엎드렸다.그 뒤로 하리들도 줄줄이 무릎을 꿇었고, 바닥에 떨어진 등롱이 데굴데굴 굴러 서가 다리에 걸렸다.이현은 엎드린 정 대감의 정수리를 내려다보았다."이 야심한 시각에, 좌상께서 문서고에는 무슨 일이시오.""승, 승정원 일을 살피러…….""좌의정이 몸소 열쇠를 들고?""……요즘 하리들이 게을러, 신이 몸소…….""부지런하시구려."이현의 목소리는 물 흐르듯 담담했다.그 담담함에, 엎드린 하리들의 등이 하나같이 움츠러들었다."짐도 마침 잠이 오지 않아 궐을 걷던 참이오. 문서고 담장 밑에서 병든 닭이 울기에 와 보았더니, 좌상이 짐의 의녀를 치고 있더군."담장 밖 어딘가에서 연이가 딸꾹질하듯 헙, 하는 소리가 난 것 같았다.정 대감이 이마를 바닥에 붙였다."신이 이 의녀를 도둑으로 오인하여…….""오인했으면 물러가시오. 아, 그리고."물러나려던 정 대감의 등이 굳었다."내일 아침, 내의원 약재고에서 사라진 부자 반 근 일로 내의원 제조와 함께 편전에 드시오. 좌상께서 이리 부지런하시니, 짐이 믿고 맡길 만하겠소."정 대감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예, 전하."바닥에 나뒹군 등롱도 줍지 못한 채 물러가는 정 대감은, 서의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다만 곁을 스치는 순간, 빳빳한 관복 소매가 그녀의 손등을 긁듯이 훑고 지나갔다.얼음장 같은 비단이었다.하리들까지 모두 물러간 문간으로 복내관이 숨을 몰아쉬며 뛰어 들어왔다."전, 전하……! 헉, 헉…… 잠이 안 와 궐을 걸으신다더니, 걷는 분이 어찌 그리 뛰십니까……!""복내관.""……예, 전하.""조용히."복내관이 입을 꾹 다물고는, 서의를 힐끔 보더니 슬그머니 문밖으로 물러났다.둘만 남은 문서고에서, 서의는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봤을까.'궤를 열었던 것을.아니, 처음부터 어디까지 보고 있었던 걸까."다친 데는.""……없사옵니다.""뺨이 부었구나.""괘념치 마시옵소서. 말단 의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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