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부채 끝이 턱을 받친 채 멈춰 있었지만, 서의는 눈을 내리깔지 않았다.
지금 피하면, 끝이었다.
"송구하오나 소인은 남쪽 산골에서 올라온 의녀이옵니다. 마마의 언니 되시는 분을 뵌 적이 없사옵니다."
"남쪽 어디?"
"해령 고을이옵니다."
"해령이라."
고개를 갸웃하는 정화의 버릇은 어릴 적 그대로였다.
원하는 걸 손에 넣기 직전이면, 이 아이는 늘 그렇게 고개를 기울였다.
"그 흉은?"
"고을에 큰불이 났을 때 얻은 것이옵니다."
'해령엔 그해 불이 없었어.'
숨긴 것은 하나였다.
그 하나가 들키는 날, 그녀는 두 번 죽을 것이었다.
"하긴, 우리 언니가 이렇게 흉하게 생기진 않았지."
부채 끝이 뺨 아래 일그러진 살결을 따라 목덜미까지 쓸어내리자, 뒤에 선 상궁들이 킥킥거렸다.
정화는 들으라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너희도 알지? 우리 언니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제 배로 낳은 원자를 독살하려 한 독부였단다. 그러니 하늘이 불을 내려 데려간 게지."
서의는 어금니를 악물었다.
7살 적 돌계단에서 굴러 이마가 찢어진 날, 밤새 곁을 지키며 상처를 꿰매 준 사람이 누구였는지 이 아이는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어쩌면 일부러 지워 버렸는지도 몰랐다.
"그래서, 무슨 소란이라고?"
"이 의녀가 고뿔로 죽은 궁녀를 두고 독살이라 우기옵니다, 마마."
이마를 땅에 붙인 채로도, 박 의관은 곁눈으로 중전의 기색을 살폈다.
"독살?"
정화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무슨 독인데?"
물음이 지나치게 빨랐다.
스스로도 그걸 느꼈는지, 정화는 곧바로 부채를 펼쳐 입가를 가렸다.
세답방 궁녀 하나가 죽었다는데, 중전이 가장 먼저 궁금해한 것은 독의 이름이었다.
누가 죽었는지, 어쩌다 죽었는지보다도 먼저.
정화의 뒤에서 김 상궁이 슬그머니 고개를 숙이자, 짙은 쪽빛 치맛자락이 그 발치에서 흔들렸다.
세답방 궁녀가 끝내 입에 올리지 못한 그 색을, 서의는 알 것 같았다.
"세답방 궁녀 하나 죽은 걸로 이 새벽부터 시끄럽기도 하구나."
부채가 접혔다.
탁-
"병사로 처리하거라. 중궁전 가까이에서 곡소리 나는 것도 불길하니."
"마마, 이 궁녀는 부자에 중독되어-"
- "누가 너더러 입을 열라 했느냐?"
날카롭게 꺾인 목소리와 함께 치켜든 손바닥이, 서의의 뺨 위 허공에서 멈췄다.
사방의 궁녀들이 이쪽을 보고 있었다.
새 중전이 말단 의녀의 뺨을 쳤다는 말이 좋게 퍼질 리 없었다.
손을 거두며 생긋 웃는 반달 눈매 안에서, 눈동자만은 조금도 웃고 있지 않았다.
"김 상궁, 이 의녀를 의녀청에 돌려보내고 다시는 검시에 붙이지 말라 이르거라."
"예, 마마."
"아, 그리고."
돌아서다 말고, 정화가 부채 끝으로 서의를 가리켰다.
"중궁전 코앞을 시체 냄새로 더럽혔으니, 무릎 꿇고 사죄부터 하게 하거라."
이미 꿇고 있던 그녀의 뒷머리를 김 상궁이 짓눌러, 이마를 흙바닥에 처박았다.
젖은 흙냄새가 콧속으로 밀려들고, 흙 알갱이가 입술 사이로 비집고 들어왔다.
어린 정화가 어머니의 노리개를 몰래 차고 나왔다 들켰을 때, 대신 매를 맞아 준 것도 이 언니였다.
그때 정화는 코를 훌쩍이며 언니의 치맛자락에 매달렸다.
언니, 나 언니처럼 되고 싶어서 그랬어.
그 동생이 이제 언니의 자리에 앉아, 언니의 머리를 흙바닥에 누르게 하고 있었다.
"됐다, 끌어내거라."
팔을 거칠게 잡아채는 손에 끌려가지 않으려, 서의는 발끝에 힘을 주었다.
여기서 물러나면 이 궁녀는 고뿔로 죽은 것이 된다.
2년 전, 아무도 끝까지 들여다보지 않았던 원자의 찻잔처럼.
"마마, 한 가지만 헤아려 주십시오."
"뭐라?"
"이 궁녀는 어젯밤 누군가 보낸 탕약을 마시고 죽었사옵니다. 탕약을 보낸 이를 찾지 않으면, 다음엔 마마의 궁녀가 죽을 수도 있사옵니다."
정화의 눈썹이 꿈틀하는 틈을 타, 서의는 박 의관의 손에서 부자 조각을 낚아채 높이 들어 올렸다.
"내의원 약재고의 부자는 낱낱이 장부에 적혀 있사옵니다. 이 뿌리가 어느 약재고에서 나왔는지만 대조하면, 탕약을 보낸 이도 드러날 것이옵니다."
"내의원 장부를? 네까짓 게 무슨 수로?"
"그래서 마마께 청하는 것이옵니다. 마마의 명이시라면 내의원도 장부를 내놓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정화의 얼굴이 굳었다.
명하지 않으면 이 자리의 모두가 그 까닭을 궁금해할 것이고, 명하면 장부가 열린다.
부채 자루가 손안에서 삐걱 소리를 냈다.
그 짧은 침묵이, 서의에게는 어떤 대답보다 또렷했다.
"……네가 감히 중전을 시험하는구나."
"소인은 시신을 위해 청할 뿐이옵니다. 이 궁녀는 어젯밤까지 마마의 궁 가까이에서 빨래를 하던 사람이옵니다."
"그래서?"
정화가 코웃음을 쳤다.
"빨래하던 것 하나 죽었다고 중전이 내의원 장부를 뒤져야 하느냐? 우리 언니였으면 그랬을지도 모르지. 그 잘난 척하는 성정에."
뒤에 선 상궁들이 다시 킥킥거렸다.
"감히 중전마마 앞에서……!"
"저 계집이 실성했나 봐."
"끌어내, 어서!"
김 상궁이 손목을 사정없이 비틀자 감아 둔 천이 풀리며, 엉겨 붙은 살갗이 팔꿈치 쪽까지 그대로 드러났다.
"어머, 더러워라."
혀를 차는 정화의 소매가 코끝을 가렸다.
"당장 치우거라. 저 뿌리도 버리고."
뿌리를 빼앗으려 뻗어 오는 손 앞에서, 서의는 주먹을 쥐었다.
움켜쥔 손가락 사이로 흙물이 배어 나와도 놓을 생각은 없었다.
김 상궁이 그 손가락을 하나씩 억지로 비틀어 펴기 시작했다.
엄지, 검지.
뒤로 젖혀진 마디가 하얗게 질리고, 뼈가 꺾이는 소리가 나기 직전이었다.
이것마저 놓치면, 거적 밖으로 비어져 나온 그 손톱의 피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될 터였다.
그때였다.
"그 의녀."
낮은 목소리 하나가 우물가의 소란을 단번에 갈랐다.
정화의 낯빛이 하얗게 바래는 동시에, 김 상궁의 손이 서의의 손목에서 툭 떨어졌다.
서의는 그 목소리를 알았다.
2년 전 그 밤, 단 한마디로 그녀의 모든 것을 끝냈던 목소리였다.
"네가 했느냐."
그 목소리가 지금, 그녀의 등 뒤에서 다시 묻고 있었다.
"이름이 무엇이냐."
칼끝이 살갗에 닿기 직전, 누군가 그녀의 손목을 낚아챘다.몸이 홱 돌아가며 단단한 가슴팍에 부딪혔다.코끝으로 침향이 밀려들었다.찌익-비단 찢기는 소리가 귓가에서 났다.그녀를 감싼 팔이 크게 떨렸고, 머리 위에서 낮은 숨이 끊어지듯 새어 나왔다.고개를 들자, 흰 도포에 흑립을 눌러쓴 사내가 보였다.갓 그늘 아래, 이를 악문 턱선이 어스름 속에서도 또렷했다."……전하."대답 대신 이현이 그녀를 담벼락 쪽으로 밀어 넣었다.등 뒤에 그녀를 감추고 돌아선 그의 손에, 도포 안에서 뽑아 든 환도가 들려 있었다.자객의 칼이 다시 내리꽂혔다.챙-쇳소리가 좁은 골목 벽에 부딪혀 날카롭게 튀었다.동궁 시절 활터에서 해가 지도록 시위를 당기던 손목은 칼을 받아 내면서도 흔들리지 않았다.다만 막아 낼 때마다, 왼쪽 옆구리께 도포 자락이 검게 젖어 들었다.다음 칼이 들어오는 순간 반걸음 파고든 이현의 환도가, 자객의 칼 밑을 미끄러져 들어갔다.억눌린 신음과 함께 자객의 무릎이 꺾였고, 검은 천으로 싼 얼굴이 흙바닥에 처박혔다."뒤에!"서의의 외침에 이현이 몸을 틀었다.골목 어귀를 막고 섰던 다른 하나가 어느새 그의 등 뒤까지 들이닥쳐 있었다.옆구리를 감싼 채 도는 걸음이, 반 박자 늦었다.생각보다 손이 먼저 나갔다.서의는 품에서 은비녀
서의는 그 한 줄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꼭' 자의 마지막 획 끝에 먹이 동그랗게 뭉쳐 있었다.받아 적던 붓이 거기서 한참을 머뭇거린 자리였다.등잔 가까이 종이를 들자, 약재 냄새 아래로 다른 냄새가 묻어났다.향이었다.법당 기둥에 오래 배었다가, 종이를 펼칠 때마다 조금씩 풀려나오는 냄새.종이 결도 궐에서 쓰는 것과 달랐다.닥 껍질을 덜 걸러 거뭇한 티가 군데군데 박힌, 두껍고 거친 종이였다.산중 절에서 스님들이 손수 떠 쓰는 종이가 꼭 이랬다.금란의 보따리에서 나온 약재 꾸러미 하나를 집어 들어 싸 맨 종이를 풀자, 접힌 귀퉁이 안쪽에 엄지손톱만 한 붉은 인이 찍혀 있었다.인수당.10여 개의 꾸러미가 하나같이 같은 인을 품고 있었다.구리개는 혜민서 앞으로 약재상이 줄지어 늘어선 거리였다.보름이 멀다 하고 산길을 오르던 사람이, 그 길목에서 약을 짓고 갔다.위험한 곳에 혼자 가지 마라.처소 담벼락 앞에서 그가 어명이라며 붙인 조건이 귓가에 걸렸다.꾸러미를 도로 싸는 사이, 편전 서안 위 엎어진 팽이를 덮고 있던 손이 떠올랐다.이 종이를 들고 가면, 이것도 그 손바닥 아래로 들어갈 것이다.원자는 죽었다.그 한마디를 하던 얼굴에는 흔들림이 없었다.흔들림 없는 얼굴로 그녀를 등지고 전각을 나선 적이 있는 사람이었다.연이는 짚방석 위에서 여전히 잠들어 있었다.덮어 준 겉옷 아래로 동그랗게 웅크린 어깨가 숨결 따라 오르내렸다.
찻물이 식어 가는 소리마저 들릴 것 같았다.서의는 그 말을 끝까지 들었다.그 밤 "네가 했느냐"고 묻던 목소리보다도 차분하게, 한 글자도 떨리지 않았다."……그러하옵니까."서의는 다관을 들어 식은 찻잔을 비우고, 새 차를 따랐다.손이 떨리지 않았다.떨리지 않는 손을 내려다보며, 그녀는 제가 이 사람을 닮아 가고 있다고 생각했다."그 팽이는 증좌이옵니다. 검시실로 도로 가져가겠사옵니다.""이것은 짐이 둔다.""전하께서 판정에 손대지 않으시겠다 하셨사옵니다.""판정에는 손대지 않는다. 팽이에 손대는 것이다."서안 위 손을 거두지 않는 이현에게 더 청하지 않고, 서의는 다반을 거두어 일어섰다.문턱을 넘어 돌아서 문을 닫는 사이, 문틈으로 그가 보였다.팽이를 덮고 있던 손이, 그제야 조금 들려 있었다.엎어진 팽이 바닥을 내려다보는 그 등이 한껏 굽어 있었다.문이 닫혔다.밤이 깊어서도 의녀청 검시실에는 등잔불이 꺼지지 않았다.연이는 구석 짚방석 위에 새우처럼 웅크린 채,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먼저 가라고 3번을 일렀는데, 시신 곁에 스승님 혼자 두고는 못 간다며 기어이 버틴 끝이었다."의녀."문간에 선 허진은 의금부 복색 소매에 먹물이 튄 채, 옆구리에 두툼한 장부 한 권을 끼고 있었다."약재고 출납부를 빌려 왔소. 비상 1냥이 나간 줄, 출납 서명 칸이 또 칼로 긁혀 있더이다."장부를 받아 등잔 아래 펼치자, 이름이 있어야 할 자리가 하얗게 일어나 있었다.손톱으로 눌러 보아도 보풀은 눕지 않았다.눈을 감자, 승정원 문서고에서 달빛 아래 펼쳐 두었던 출납부가 되살아났다.폐위 교지 초안을 올린 자의 이름 칸에서 손가락에 걸리던 보풀이, 그 결 그대로 떠올랐다."칼끝이 왼편에서 들어가, 획 끝에서 위로 들리며 빠졌사옵니다. 그래서 오른편 끝에만 종이가 뜯겨 말려 올라가 있사옵니다."허진이 등잔 곁으로 몸을 숙였다."……정말 그렇군. 그런데 그걸 어찌 그리 단번에 보오?""전에 같은 결을 본 적이 있사옵니다. 어디서인지
"스승님, 뭐라고 쓰여 있어요?"고개를 들이미는 연이 앞에서, 서의는 팽이를 손바닥 안에 접어 쥐었다."……아무것도. 흠집이다."팽이를 무명에 다시 싸 소매 깊숙이 넣었다.손이 떨리지 않도록, 손목에 힘을 주었다.'아직이야.'꺾이려는 무릎을 버티며, 서의는 금란의 굳은 손을 붙잡았다.죽은 이의 손이, 산 사람의 손보다 단단했다.'아직은 무너지면 안 돼.'"시신을 의녀청 검시실로 옮기거라. 표주박과 보따리도 함께. 내 눈앞에서 하나도 흘리지 말고."군사들이 들것을 펴는 동안, 서의는 협문 앞 흙바닥을 살폈다.금란이 쓰러진 자리에서 협문까지는 이슬 젖은 흙바닥 위로 10걸음 남짓이었다.몇 걸음만 더 갔으면, 금란은 궐 밖 길 위에서 쓰러졌을 것이다.궐 밖에서 죽은 나인은 궐의 검험을 거치지 않는다.길에서 객사한 나인으로 적히고, 보따리는 길바닥 누군가의 손에 들어갔을 터였다.독을 탄 손이 셈한 것보다, 비상이 조금 빨리 돌았다."연이야.""네, 스승님.""오늘 본 팽이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 금란이 조카에게 주려던 것이다. 그리 알거라."눈을 끔뻑이는 연이의 얼굴에 무언가 더 묻고 싶은 기색이 어렸지만, 서의의 얼굴을 보더니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들것이 검시실 문턱을 넘기도 전에, 낯익은 짤랑거림이 회랑 끝에서 다가왔다."비상 중독이라지. 약재고 비상이 빈 일과 엮인 시신이니, 내의원이 거두어 가겠네."남궁도가 하리 2명을 앞세우고 웃으며 섰다.서의는 들것 앞으로 나서서, 소매에서 상아 패를 꺼내 들었다."검안 차비이옵니다, 나리. 이 시신의 검안이 끝나기 전에는 누구도 손대지 못하옵니다."남궁도의 눈이 패 뒷면의 어압에 닿았다.웃음은 그대로였는데, 열쇠 꾸러미를 쥔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솟았다."……전하께서 귀한 것을 내리셨구먼."하리들에게 턱짓하고 돌아서기 직전, 남궁도의 눈이 들것 끝에 얹힌 금란의 보따리에 한 번 닿았다가 떨어졌다.검시실에서 서의는 검안서를 써 내려갔다.침방 나인 금란,
먼저 움직인 것은 서의였다.다반 위의 손을 거두어 무릎에 내려놓고, 문지방까지 들리도록 고개를 숙였다."……의녀는 누구의 잔이든 먼저 살피옵니다. 전하께서 2년 전 일을 떠올리실 만큼 흔한 버릇이옵니다.""그러하냐.""은비녀가 희다고 다 깨끗한 것도 아니옵니다."서의는 왕 앞의 잔을 도로 끌어와, 새끼손가락 끝을 적셔 혀에 댔다.마른 국화와 대추, 꿀 조금.혀끝이 저리지도, 목이 조이지도 않았다."독은 없사옵니다.""그래도 물리라."윤 상궁이 무릎걸음으로 다가와 다관을 거두었다.허리를 펴는 사이, 그 눈이 서의의 품께에 한 번 머물렀다.비녀를 넣은 바로 그 자리였다.윤 상궁이 물러가자, 이현이 복내관에게 눈짓했다.복내관이 소리 없이 그 뒤를 밟아 나갔다가, 한 식경이 지나서야 돌아왔다."소주방에도 다방에도 들르지 않고, 곧장 중궁전 안채로 들었사옵니다. 다관은 그대로 손에 든 채로."이현은 대답하지 않았다.서의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그날 미시의 찻상은, 빈 잔 하나를 사이에 두고 끝까지 조용했다.그날 밤 서의는 처소 문고리에 머리카락을 끼우며, 처음으로 손끝이 떨렸다.흔한 버릇이라는 말이 윤 상궁의 귀에 얼마나 남았을지 알 수 없었다.'버릇은 여전하구나'는, 훨씬 오래 남았을 터였다.이튿날 동이 트기 전이었다."스승님! 스승님!"다급하게 처소 문을 두드리던 연이가, 문이 열리자 숨이 턱에 닿은 얼굴로 서쪽을 가리켰다."서쪽 협문 앞에 침방 언니가 쓰러져 있대요! 그 언니요, 순덕 언니 대신 약재 심부름 다니던!"서의는 신을 꿰며 품을 더듬었다.은비녀와, 상아 패.수문장과 군사 몇이 둘러선 서쪽 협문 앞, 그 가운데 나인 하나가 모로 누워 있었다.등에 멘 보따리 끈이 어깨를 파고든 채였다."물러서라. 내의원에 기별을 넣었으니-"앞을 막아서는 수문장에게, 서의는 소매에서 패를 꺼내 내밀었다."검안 차비이옵니다."수문장의 눈이 상아 패의 어압에 닿자마자 허리가 접혔다.연이가 서의의 등 뒤에서 입을 떡 벌
"……차, 말이옵니까."서의는 제 귀를 의심했다.혼자 다니지 말라는 어명보다도 더 엉뚱한 조건이었다."기미상궁이 있사옵니다.""기미상궁의 차는 쓰다.""찻잎을 오래 우리지 말라 이르시면 될 일이옵니다.""이르면 그날만 덜 쓰고, 이튿날 또 쓰다."이현이 태연하게 소매를 털었다."매일 미시, 편전으로 차를 들이라. 증거든 검안서든, 그 찻상에 얹어 오면 된다. 의녀가 날마다 편전을 드나들 핑계로 그만한 것이 없지."듣고 보니 그럴듯했다.그럴듯해서, 더 얄미웠다."……둘째 조건은 무엇이옵니까.""차 맛을 보고 정하마."이튿날 미시, 다반을 받쳐 들고 편전에 드는 서의의 뒤를 연이가 화로와 탕관을 끌어안고 바짝 따랐다."제가 들어 드릴게요! 탕관이 얼마나 무거운데요!""편전 안에는 못 든다.""문간까지만요! 문간에서 얌전히 있을게요!"정말로 문간에 얌전히 무릎을 꿇은 연이는, 서의가 찻잎을 덜기도 전에 벌써 손가락 하나를 접고 있었다.첫날, 이현은 찻잔을 입술에 대자마자 내려놓았다."싱겁구나."이튿날은 한 모금을 넘기고 미간을 좁혔다."쓰다."서의는 다반 아래에서 주먹을 쥐었다 폈다.세자빈 시절에도 이 사람은 꼭 이랬다.새 찻잎을 들이면 하루는 싱겁다, 하루는 쓰다 트집을 잡다가, 3일째에야 아무 말 없이 잔을 비우고 빈 잔을 그녀 쪽으로 밀어 놓곤 했다.그때도 그녀는 그 트집이 찻잎 탓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동궁전 다방에서 차를 내오는 나인을 두고, 굳이 빈궁을 불러 앉히려는 핑계였다.3일째 되는 날, 이현은 아무 말이 없었다.한 잔을 비우고, 빈 잔을 밀었다.또 비우고, 또 밀었다.곁에 선 복내관이 품에서 꺼낸 일지 위를, 붓끝이 사각사각 긁었다.'전하, 차 3잔 비우심. 쓰다는 말씀 없음. 평소엔 반 잔.'"복내관.""……예, 전하.""무얼 적느냐.""날씨이옵니다. 오늘 볕이 참 좋사옵니다."창밖에는 아침부터 잔뜩 흐린 하늘이 낮게 깔려 있었다.이현은 대꾸하지 않고 빈 잔을 또 한 번 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