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 나는 폐비다. 나는 불에 타 죽은 여자다. 그리고 지금은, 시체를 읽는 의녀다. 2년 전 친아들을 독살하려 했다는 누명을 쓰고 쫓겨난 중전 정소운. 남의 이름으로 돌아온 궐에는 이복동생이 내 자리에 앉아 있고, 아버지는 그 동생의 편이다. 궁녀들이 하나씩 죽어 나가는 밤, 나를 폐한 왕만이 나를 알아보고도 모른 척 곁을 맴돈다. "전하, 이번엔 제가 버리겠습니다."
View More새벽안개가 채 걷히지 않은 세답방 뒤뜰, 우물가에 거적 한 장이 덮여 있었다.
그 밖으로 비어져 나온 손은 푸르게 굳은 채, 손톱 밑마다 검붉은 피를 물고 있었다.
"병사요. 밤새 고뿔을 앓다가 숨이 넘어간 게지."
하품을 삼키며 시신의 입에서 은비녀를 뽑아 든 것은 내의원 박 의관이었다.
새벽빛 아래, 비녀는 티끌 하나 없이 하얗게 빛났다.
"보시오, 깨끗하지 않소. 독이었다면 시커멓게 죽었을 것이오."
둘러선 의녀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이는 가운데, 무릎을 꿇고 시신의 손가락을 하나씩 펴 보던 말단 검시 의녀만이 고개를 들지 않았다.
"서의, 거기서 뭘 하느냐. 나리께서 병사라 하셨으면 병사다."
수의녀가 눈꼬리를 치켜세워도 그 손은 멈추지 않았다.
3달 전 남쪽 고을에서 올라온 이 검시 의녀를 반기는 사람은 의녀청에 아무도 없었다.
불에 덴 흉 탓이기도 했고, 시체 앞에서 지나치게 침착한 탓이기도 했다.
그 의녀가 폐위되어 불길 속에 죽었다고 적힌 이 나라의 중전이었다는 것은, 궐 안 누구도 알지 못했다.
"독살입니다."
크지 않은 목소리였는데도 우물가가 일순 얼어붙었고, 박 의관의 눈썹이 꿈틀했다.
"방금 뭐라 했느냐."
"이 궁녀는 독에 죽었다고 아뢰었습니다, 나리."
"은비녀가 이리 깨끗한데 무슨 독이란 말이냐!"
그제야 들린 얼굴 위로, 왼쪽 뺨 아래에서 귀밑을 지나 목덜미까지 번진 오래된 화상 자국이 새벽빛에 드러났다.
"은비녀는 비상만 압니다. 비상이 아닌 독 앞에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지요."
등 뒤로 수군거림이 번졌다.
"말단 주제에……."
"검시 의녀가 언제부터 의관 판정에 토를 달았대?"
"저러다 경을 치지, 쯧."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시신의 입술을 손끝으로 누르자, 이상하리만치 뻣뻣한 입가 너머로 하얗게 부르튼 혀끝이 보였다.
손톱 밑의 피는 고통에 몸부림치다 바닥을 긁은 흔적이었다.
고뿔로 죽은 사람은 이렇게 죽지 않는다.
입부터 저려 오다 속을 다 게워 내고, 마지막엔 숨길이 막혀 버둥대다 가는 독이 있었다.
'부자다.'
"이 궁녀가 마지막으로 먹은 게 무엇입니까."
세답방 궁녀 하나가 어깨를 움츠렸다.
"어, 어젯밤에 탕약을 한 사발 마셨어요. 기침이 심하다고 누가 보내 줬다던데……."
"누가 보냈습니까."
궁녀들은 서로 눈치만 살필 뿐, 입을 여는 이가 없었다.
서의는 치마폭을 걷어쥐고 우물가 수챗구멍 앞에 쪼그려 앉았다.
밤새 버린 개숫물 사이에 엉긴 검은 찌꺼기를 맨손으로 건져 올리자, 손가락 한 마디만 한 뿌리 조각 하나가 걸려 나왔다.
그것을 엄지와 검지 사이에 끼우고 지그시 힘을 주었다.
뚝-
반투명한 흰 속살이 드러난 단면을, 그녀는 망설임 없이 혀끝에 댔다가 곧바로 뱉어 냈다.
"이, 이년이 미쳤나!"
박 의관이 기겁해 뒷걸음질하는 사이, 혀끝은 벌써 바늘에 찔린 듯 저려 오고 있었다.
"부자입니다. 탕약에 섞였으니 은비녀로는 잡히지 않았겠지요."
"부자라니……."
"내의원 약재를 누가 빼돌렸단 말이야?"
"목소리 낮춰, 누가 들을라."
박 의관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달아올랐다.
"어, 어디서 주워 온 뿌리인 줄 알고! 그따위가 증좌가 될 성싶으냐!"
"그래서 검안서에 적어 두려 합니다. 수챗구멍 어느 자리에서, 누가 보는 앞에서 건졌는지까지 빠짐없이."
뿌리 조각이 박 의관의 손바닥 위에 가만히 내려앉았다.
"병사로 적으시려거든, 나리께서 직접 맛보시고 적으십시오."
뜨거운 숯이라도 받은 듯 손을 움찔하면서도, 박 의관은 그것을 차마 떨쳐 내지 못했다.
서의는 아까 말을 꺼낸 세답방 궁녀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탕약을 담았던 그릇은 어디 있습니까."
"그, 그게…… 새벽에 누가 거둬 갔어요. 얼굴은 못 봤고, 치맛자락만……."
"무슨 색이었습니까."
입술만 달싹이던 궁녀가, 겁에 질린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모, 모르겠어요. 정말이에요."
모른다는 얼굴이 아니었다.
말하면 안 되는 걸 아는 얼굴이었다.
젖은 손을 치마에 닦으며 내려다본 시신 위로, 2년 전의 밤이 겹쳐 들었다.
그때도 이 궐 어딘가에서 은비녀 하나가 검게 변했고, 작은 손에서 찻잔이 떨어졌다.
그 소리는 아직도 귓가를 떠나지 않았다.
쨍그랑-
"어마마마……."
"이 독은 비상이 아니옵니다!"
비녀 빛깔만 보면 비상이 맞았다.
그러나 비상에 당했다면 피를 쏟았어야 할 아이는, 입술이 파랗게 질려 가는 동안 작은 손끝만 바들바들 떨었다.
목이 찢어져라 외친 그 말에, 그 밤 귀 기울인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 밤의 일은 무엇 하나 제대로 적히지 않았다.
독의 이름도, 찻잔을 건넨 손도 기록에는 없었고, 하필 그날이어야 했던 까닭을 묻는 이도 없었다.
'죽은 이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다만 말하지 못할 뿐이니.'
'내가 대신 적는다.'
"중전마마 납시오-!"
우물가의 모든 이가 일제히 엎드리는 사이, 서의도 이마를 땅에 댔다.
새 중전이 누구인지는 진작 알고 있었다.
좌의정 정 대감의 둘째 딸.
폐비가 쫓겨난 지 꼭 한 달 만에 가례를 올린, 폐비의 이복동생.
알면서도 2년 동안 그 얼굴만은 떠올리지 않으려 애써 온 터였다.
비단 치맛자락이 사르륵 끌리는 소리보다 향내가 먼저 닿았다.
어린 정화가 언니 방에서 몰래 훔쳐 바르던, 바로 그 매화 향이었다.
언니, 나도 이거 줘.
언니 거 다 예뻐.
분이며 노리개며 비단신이며, 언니 것이라면 무엇이든 달라고 조르던 어린 목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무슨 소란이냐."
흙을 짚은 손가락 끝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마마, 이 천한 의녀가 의관의 판정을 뒤집으려 하기에……."
박 의관이 냉큼 무릎걸음으로 기어 나갔다.
"그래?"
수놓은 당혜 한 켤레가 눈앞에 멈춰 서더니, 접힌 부채 끝이 그녀의 턱 아래로 파고들었다.
"고개 들어 보거라."
숨을 고르고 든 얼굴 위로, 봉황 무늬 당의 차림의 정화가 그림자를 드리웠다.
언니의 노리개를 탐내던 동생은, 결국 언니의 자리까지 가졌다.
화상 자국에서 잠깐 멈췄던 정화의 눈이 눈매에서 오래 머무는가 싶더니, 붉은 입술 끝이 말려 올라갔다.
"어머."
"죽은 우리 언니랑, 어쩜 이리 닮았을까."
칼끝이 살갗에 닿기 직전, 누군가 그녀의 손목을 낚아챘다.몸이 홱 돌아가며 단단한 가슴팍에 부딪혔다.코끝으로 침향이 밀려들었다.찌익-비단 찢기는 소리가 귓가에서 났다.그녀를 감싼 팔이 크게 떨렸고, 머리 위에서 낮은 숨이 끊어지듯 새어 나왔다.고개를 들자, 흰 도포에 흑립을 눌러쓴 사내가 보였다.갓 그늘 아래, 이를 악문 턱선이 어스름 속에서도 또렷했다."……전하."대답 대신 이현이 그녀를 담벼락 쪽으로 밀어 넣었다.등 뒤에 그녀를 감추고 돌아선 그의 손에, 도포 안에서 뽑아 든 환도가 들려 있었다.자객의 칼이 다시 내리꽂혔다.챙-쇳소리가 좁은 골목 벽에 부딪혀 날카롭게 튀었다.동궁 시절 활터에서 해가 지도록 시위를 당기던 손목은 칼을 받아 내면서도 흔들리지 않았다.다만 막아 낼 때마다, 왼쪽 옆구리께 도포 자락이 검게 젖어 들었다.다음 칼이 들어오는 순간 반걸음 파고든 이현의 환도가, 자객의 칼 밑을 미끄러져 들어갔다.억눌린 신음과 함께 자객의 무릎이 꺾였고, 검은 천으로 싼 얼굴이 흙바닥에 처박혔다."뒤에!"서의의 외침에 이현이 몸을 틀었다.골목 어귀를 막고 섰던 다른 하나가 어느새 그의 등 뒤까지 들이닥쳐 있었다.옆구리를 감싼 채 도는 걸음이, 반 박자 늦었다.생각보다 손이 먼저 나갔다.서의는 품에서 은비녀
서의는 그 한 줄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꼭' 자의 마지막 획 끝에 먹이 동그랗게 뭉쳐 있었다.받아 적던 붓이 거기서 한참을 머뭇거린 자리였다.등잔 가까이 종이를 들자, 약재 냄새 아래로 다른 냄새가 묻어났다.향이었다.법당 기둥에 오래 배었다가, 종이를 펼칠 때마다 조금씩 풀려나오는 냄새.종이 결도 궐에서 쓰는 것과 달랐다.닥 껍질을 덜 걸러 거뭇한 티가 군데군데 박힌, 두껍고 거친 종이였다.산중 절에서 스님들이 손수 떠 쓰는 종이가 꼭 이랬다.금란의 보따리에서 나온 약재 꾸러미 하나를 집어 들어 싸 맨 종이를 풀자, 접힌 귀퉁이 안쪽에 엄지손톱만 한 붉은 인이 찍혀 있었다.인수당.10여 개의 꾸러미가 하나같이 같은 인을 품고 있었다.구리개는 혜민서 앞으로 약재상이 줄지어 늘어선 거리였다.보름이 멀다 하고 산길을 오르던 사람이, 그 길목에서 약을 짓고 갔다.위험한 곳에 혼자 가지 마라.처소 담벼락 앞에서 그가 어명이라며 붙인 조건이 귓가에 걸렸다.꾸러미를 도로 싸는 사이, 편전 서안 위 엎어진 팽이를 덮고 있던 손이 떠올랐다.이 종이를 들고 가면, 이것도 그 손바닥 아래로 들어갈 것이다.원자는 죽었다.그 한마디를 하던 얼굴에는 흔들림이 없었다.흔들림 없는 얼굴로 그녀를 등지고 전각을 나선 적이 있는 사람이었다.연이는 짚방석 위에서 여전히 잠들어 있었다.덮어 준 겉옷 아래로 동그랗게 웅크린 어깨가 숨결 따라 오르내렸다.
찻물이 식어 가는 소리마저 들릴 것 같았다.서의는 그 말을 끝까지 들었다.그 밤 "네가 했느냐"고 묻던 목소리보다도 차분하게, 한 글자도 떨리지 않았다."……그러하옵니까."서의는 다관을 들어 식은 찻잔을 비우고, 새 차를 따랐다.손이 떨리지 않았다.떨리지 않는 손을 내려다보며, 그녀는 제가 이 사람을 닮아 가고 있다고 생각했다."그 팽이는 증좌이옵니다. 검시실로 도로 가져가겠사옵니다.""이것은 짐이 둔다.""전하께서 판정에 손대지 않으시겠다 하셨사옵니다.""판정에는 손대지 않는다. 팽이에 손대는 것이다."서안 위 손을 거두지 않는 이현에게 더 청하지 않고, 서의는 다반을 거두어 일어섰다.문턱을 넘어 돌아서 문을 닫는 사이, 문틈으로 그가 보였다.팽이를 덮고 있던 손이, 그제야 조금 들려 있었다.엎어진 팽이 바닥을 내려다보는 그 등이 한껏 굽어 있었다.문이 닫혔다.밤이 깊어서도 의녀청 검시실에는 등잔불이 꺼지지 않았다.연이는 구석 짚방석 위에 새우처럼 웅크린 채,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먼저 가라고 3번을 일렀는데, 시신 곁에 스승님 혼자 두고는 못 간다며 기어이 버틴 끝이었다."의녀."문간에 선 허진은 의금부 복색 소매에 먹물이 튄 채, 옆구리에 두툼한 장부 한 권을 끼고 있었다."약재고 출납부를 빌려 왔소. 비상 1냥이 나간 줄, 출납 서명 칸이 또 칼로 긁혀 있더이다."장부를 받아 등잔 아래 펼치자, 이름이 있어야 할 자리가 하얗게 일어나 있었다.손톱으로 눌러 보아도 보풀은 눕지 않았다.눈을 감자, 승정원 문서고에서 달빛 아래 펼쳐 두었던 출납부가 되살아났다.폐위 교지 초안을 올린 자의 이름 칸에서 손가락에 걸리던 보풀이, 그 결 그대로 떠올랐다."칼끝이 왼편에서 들어가, 획 끝에서 위로 들리며 빠졌사옵니다. 그래서 오른편 끝에만 종이가 뜯겨 말려 올라가 있사옵니다."허진이 등잔 곁으로 몸을 숙였다."……정말 그렇군. 그런데 그걸 어찌 그리 단번에 보오?""전에 같은 결을 본 적이 있사옵니다. 어디서인지
"스승님, 뭐라고 쓰여 있어요?"고개를 들이미는 연이 앞에서, 서의는 팽이를 손바닥 안에 접어 쥐었다."……아무것도. 흠집이다."팽이를 무명에 다시 싸 소매 깊숙이 넣었다.손이 떨리지 않도록, 손목에 힘을 주었다.'아직이야.'꺾이려는 무릎을 버티며, 서의는 금란의 굳은 손을 붙잡았다.죽은 이의 손이, 산 사람의 손보다 단단했다.'아직은 무너지면 안 돼.'"시신을 의녀청 검시실로 옮기거라. 표주박과 보따리도 함께. 내 눈앞에서 하나도 흘리지 말고."군사들이 들것을 펴는 동안, 서의는 협문 앞 흙바닥을 살폈다.금란이 쓰러진 자리에서 협문까지는 이슬 젖은 흙바닥 위로 10걸음 남짓이었다.몇 걸음만 더 갔으면, 금란은 궐 밖 길 위에서 쓰러졌을 것이다.궐 밖에서 죽은 나인은 궐의 검험을 거치지 않는다.길에서 객사한 나인으로 적히고, 보따리는 길바닥 누군가의 손에 들어갔을 터였다.독을 탄 손이 셈한 것보다, 비상이 조금 빨리 돌았다."연이야.""네, 스승님.""오늘 본 팽이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 금란이 조카에게 주려던 것이다. 그리 알거라."눈을 끔뻑이는 연이의 얼굴에 무언가 더 묻고 싶은 기색이 어렸지만, 서의의 얼굴을 보더니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들것이 검시실 문턱을 넘기도 전에, 낯익은 짤랑거림이 회랑 끝에서 다가왔다."비상 중독이라지. 약재고 비상이 빈 일과 엮인 시신이니, 내의원이 거두어 가겠네."남궁도가 하리 2명을 앞세우고 웃으며 섰다.서의는 들것 앞으로 나서서, 소매에서 상아 패를 꺼내 들었다."검안 차비이옵니다, 나리. 이 시신의 검안이 끝나기 전에는 누구도 손대지 못하옵니다."남궁도의 눈이 패 뒷면의 어압에 닿았다.웃음은 그대로였는데, 열쇠 꾸러미를 쥔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솟았다."……전하께서 귀한 것을 내리셨구먼."하리들에게 턱짓하고 돌아서기 직전, 남궁도의 눈이 들것 끝에 얹힌 금란의 보따리에 한 번 닿았다가 떨어졌다.검시실에서 서의는 검안서를 써 내려갔다.침방 나인 금란,
굿노벨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굿노벨에 등록하시면 우수한 웹소설을 찾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완벽한 세상을 모색하는 작가도 될 수 있습니다. 또한, 로맨스, 도시와 현실, 판타지, 현판 등을 비롯한 다양한 장르의 소설을 읽거나 창작할 수 있습니다. 독자로서 질이 좋은 작품을 볼 수 있고 작가로서 색다른 장르의 작품에서 영감을 얻을 수 있어 더 나은 작품을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작성한 작품들은 굿노벨에서 더욱 많은 관심과 칭찬을 받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