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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나머지 한 짝

Author: 6jay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1-01 22:13:51

뜬눈으로 밤을 새운 서의의 처소 문을, 어스름이 가시기도 전에 늙은 내관 하나가 두드렸다.

"어전 전속 검시 의녀는 편전으로 들라는 전하의 분부일세."

새벽같이 찐 감자를 싸 들고 와 툇마루에 앉아 있던 연이가 벌떡 일어섰다.

"스승님! 첫 어전 입시예요!"

"네가 왜 들떴느냐."

"몰라요, 그냥 제 가슴이 막 뛰어요!"

소매 깊숙이 은비녀를 밀어 넣는 사이에도, 이 비녀를 보낸 사람이 누구든 오늘 그 얼굴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편전까지 앞장선 늙은 내관은 조금 굽은 등으로 걸음마다 혀를 차더니, 기어이 한마디를 보탰다.

"이보게, 전하 앞에서는 묻는 말에만 답하게. 눈은 바닥에, 입은 무겁게. 알겠는가?"

"예, 나리."

"그리고 전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든 놀라지 말고."

"……무슨 말씀을 하시기에 그러십니까?"

내관은 대답 대신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나도 모르겠네. 어제부터 전하께서 통 딴사람 같으시니."

내관의 긴 숨은 회랑을 두어 번 꺾어 도는 내내 이어졌고, 그 끝에서 편전 문이 열렸다.

물을 끼얹은 듯 고요한 안에서, 상소 더미 너머의 이현은 서의가 엎드린 지 한참이 지나도록 붓만 놀릴 뿐 고개 한 번 들지 않았다.

어느새 왕의 곁에 가 선 늙은 내관이 헛기침을 했다.

"전하, 검시 의녀가 들었사옵니다."

"그래."

붓이 멈추고 들린 그 눈을, 서의는 똑바로 마주했다.

어젯밤 상자를 보낸 사람이 이 남자라면, 지금 무언가 드러날 것이다.

"다시 보아도, 짐이 아는 얼굴은 아니로구나."

굳어 있던 어깨에서 스르르 힘이 빠졌다.

'……아니구나.'

"검안서는?"

"여기 있사옵니다."

이현은 검안서를 받아 읽어 내려갔는데, 한 장을 넘기는 손이 유난히 더뎠다.

"부자는 약재고 장부와 맞춰 보았느냐."

"박 의관 나리께서 맞춰 보신다 하였사오나, 아직 기별이 없사옵니다."

"그럴 테지."

이현이 검안서를 서안 한쪽에 내려놓고, 고개도 들지 않은 채 다시 붓을 집었다.

"해령 고을이라 했지."

"……예, 전하."

"해령에 불이 난 것이 언제였느냐."

바닥을 짚은 서의의 손가락 끝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2년 전 겨울이옵니다."

"검시는 어디서 배웠느냐."

"고을 의원 어르신께 어깨너머로 배웠사옵니다."

"어깨너머로 배운 의녀가, 30년을 내의원에서 늙은 의관의 판정을 수챗구멍 하나로 뒤집었다."

"……시체가 가르쳐 준 것이옵니다. 소인은 받아 적었을 뿐이옵니다."

이현의 붓끝이 허공에서 멎었다.

'죽은 이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것이 제 입버릇이었고 이 남자가 곁에서 수없이 들은 말이라는 것을, 서의는 그 순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이현이 붓을 내려놓더니, 제 앞의 찻잔을 그녀 쪽으로 밀었다.

"마셔 보라."

"……예?"

"짐의 차다. 독이 들었는지 네가 확인해 보라."

늙은 내관이 기겁해 반쯤 몸을 일으켰다.

"전, 전하! 기미상궁이 있사온데 어찌 말단 의녀에게-"

- "복내관."

"……예, 전하."

"조용히."

복내관이 입술을 안으로 말아 넣었다.

서의는 무릎걸음으로 다가가 찻잔을 받아 들고, 색을 보고 향을 맡은 뒤 혀끝에 한 방울을 굴렸다.

"독은 없사옵니다. 다만,"

"다만?"

"찻잎을 너무 오래 우렸사옵니다. 쓴맛이 강하옵니다. 전하께서는 원래 쓴 걸 싫어하시-"

뚝 끊긴 말 대신 손등으로 입이라도 틀어막고 싶은 것을, 서의는 간신히 참았다.

'미쳤어.'

원래라니.

말단 의녀가 왕의 입맛을 무슨 수로 안단 말인가.

이현은 아무 말도 없이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찻잔을 도로 가져갔다.

"물러가라. 부르면 또 오라."

"……예, 전하."

도망치듯 편전을 빠져나와 회랑 기둥 뒤에 숨어서야, 겨우 숨을 몰아쉴 수 있었다.

가쁜 숨이 오르내릴 때마다 소매 속 은비녀가 살갗에 차갑게 닿았다.

'그 사람일 리 없어.'

그 밤 그녀를 등진 사람이, 2년 동안 이 비녀를 닦았을 리 없었다.

그때 회랑 저편에서, 잿빛 얼굴의 박 의관이 장부를 끌어안고 허겁지겁 달려왔다.

서의를 발견하고 멈칫한 그가, 주위를 살피더니 목소리를 낮췄다.

"자네 말이 맞았어. 약재고에서 부자 반 근이 비었네."

"출납 서명은 어찌 되었습니까?"

"……지워져 있었네. 누가 칼로 긁어 냈어."

박 의관이 그 말만 남기고 편전 안으로 사라지자, 서의는 기둥에 등을 기댄 채 숨을 골랐다.

서명을 긁어 낼 수 있는 사람은, 약재고 열쇠를 쥔 사람뿐이었다.

***

박 의관이 장부를 바치고 쫓기듯 물러가자, 편전에는 다시 둘만 남았다.

복내관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전하, 저 의녀 어딘가 수상쩍지 않사옵니까. 전하께서 쓴 걸 싫어하시는 걸 어찌 알고……."

대답 대신 이현이 찻잔을 들어, 그녀가 입술을 댔던 자리를 한동안 내려다보았다.

일부러 오래 우린 차였다.

그녀라면 반드시 그 말을 할 것 같아서.

이윽고 열린 서안 서랍 안에는, 비단에 싸인 은비녀 한 짝이 놓여 있었다.

끝에 작은 매화가 새겨진, 짝 잃은 비녀.

어젯밤 오동나무 상자에 담아 보낸 것의, 나머지 한 짝이었다.

어제 우물가에서 목소리를 들은 순간, 그는 알았다.

뺨에서 목덜미까지 불길이 핥고 지나갔어도, 목소리를 일부러 긁어 내도, 시체 앞에 무릎 꿇은 저 등을 모를 수가 없었다.

"은비녀는 비상만 압니다."

2년 전 그 밤에도 그녀는 같은 것을 외쳤다.

이 독은 비상이 아니라고.

그때 그는 듣고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번에는, 그녀가 하는 말을 한마디도 흘려듣지 않기로 했다.

복내관이 허리춤을 짚으며 울상을 지었다.

"전하, 그 상자를 놓고 오느라 소인이 의녀 처소 담장을 넘다 허리를 삐끗한 건 아시옵니까."

"알고 있다. 문고리에 끼워 둔 머리카락을 떨어뜨리고 온 것도."

"……예?"

"세자빈 시절부터, 그 사람은 문을 나설 때 문고리에 머리카락을 끼워 두었다. 다음부터는 도로 끼워 두고 나와라."

입이 떡 벌어진 복내관을 두고, 이현은 대꾸 없이 제 몫의 비녀를 손바닥에 꽉 쥐었다.

"……살아 있었구나."

복내관이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다가섰다.

"전, 전하. 설마……."

"오늘 들은 것은 무덤까지 가져가라, 복내관."

이현이 눈을 감았다.

"그 사람이 짐을 모른 척하는 동안은, 짐도 모른 척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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