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15화
레나토는 제 궁, 서쪽 정원의 폐쇄된 작은 별궁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서부 변경백 조프루아와 말라르메 후작이 기다리고 있었다.
말라르메 후작은 신진 귀족 세력을 등에 업은 야심가였다. 대륙의 불안한 정세를 기회로 삼으려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황자 전하. 전쟁은 명분을 만들고, 명분은 왕좌를 만들어냅니다. 황후 폐하의 입지를 흔들어야 할 때입니다.”
레나토는 얼굴을 굳혔다.
“봐서 알겠지만, 오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후작은 가볍게 웃었다.
“아직 낙담하기는 이릅니다.”
그는 연회장의 광경을 떠올리며 말을 이었다.
“……용병왕이 황녀께 흥미를 숨기지 못했습니다. 이용할 수 있습니다. 그의 병력을 끌어들이기 위해, 황녀를 미끼로 삼는 것도 방법입니다.”
레나토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연회장에서 황녀를 바라보던 카이사르의 눈빛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그러나 확신할 수는 없었다. 신생국의 수장인 그는 쉽게 제국의 함정에 빠질 인물도 아니었다.
“관심이 어느 정도인지 알아야 하지. 병력을 끌어들일 만한… 그런 감정인지.”
후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인할 방안이 있습니다. 축복연회 후 열릴 사냥 대회. 거기에 초대장을 익명으로 보냈습니다. …황녀 전하께 약간의 불미스러운 일이 생긴다면, 용병왕이 움직일지 모릅니다.”
레나토는 가늘게 웃었다.
“카이사르가 나선다면, 황녀에게 마음이 있다는 증거가 되겠지.”
후작은 조심스레 덧붙였다.
“아니더라도 상관없습니다. 남자의 탐욕은 끝이 없으니. 특히 대륙을 뒤흔든 영웅이라면, 그 정복욕은 더 클 것입니다.”
레나토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시험해 볼 만했다. 아쉬울 것도 없었다.
“좋다. 추진해라.”
그는 천천히 덧붙였다.
“전쟁은 언제나 느닷없이 시작되지. 황후는 대공을 앞세워 막으려 들겠지만 그때 대공이 죽는다면—.”
레나토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누이를 북부로 보내는 시일을 늦춰야겠다. 멀리 보낼 이유가 없으니.”
곁에 선 조프루아는, 두 사람의 대화를 듣는 내내 말이 없었다. 그저, 아무 표정도 없이 침묵할 뿐이었다.
***
지빌라는 오랜만에 춘 춤을 곱씹고 있었다. 아직도 그의 묵직한 저음이 귓가에 맴돌았다.
‘약혼 전에는… 이름을 부르더니. 이제 와 대공이라니. 불편해. 프레데리크라 불러.’
그의 입에서 낯설기만 한 말이 연이어 나왔다. 자신이 꼭 그의 사람이 된 것처럼.
회귀 전, 그와 나눈 대화는 언제나 짧고 간결했다. 황태녀였던 그녀에게 그는 무한한 충성을 맹세했으나, 말수는 적었고, 태도는 결연했다.
전장에 나서는 그는 압도적인 존재 그 자체였다. 마치 죽음마저 비켜갈 것처럼 무적일 것만 같았다.
‘허망하게 죽을 사람이 아닌데―.’
그의 죽음은 모두가 베라트 가문의 저주라 입을 모았지만, 그녀는 믿지 않았다. 믿을 수 없었다.
오늘의 그는, 제 기억 속 모습과는 너무나 달랐다. 부드럽게 이끄는 손길, 흠잡을 데 없이 능숙한 발놀림.
누군가 그를 ‘여인과 춤조차 춰본 적 없는 자’라 했다지만, 아무도 믿지 않을 정도였다.
지빌라는 생각했다.
고위 귀족 중의 귀족, 권위 그 자체로 살아온 자라서, 이토록 원숙할 수 있는 것일까. 그녀는 생애 단 한 번도, 누군가를 선망해 본 적이 없었다.
제국을 발아래 둘 운명을 가진 제왕의 자식으로 태어난 이후로, 사랑도 흠모도 사치에 불과했다.
그러나 회귀한 후, 지빌라는 알게 됐다. 모든 것을 내려놓은 삶 속에서도, 잔잔한 기쁨이 있다는 것을.
제왕학을 멈추고, 또래의 영애들과 웃으며 지내는 동안, 문득문득 다가오는 작은 행복을.
‘평범한 삶… 나쁘지 않잖아…….’
누구에게도 해악을 끼치지 않는다면, 남은 생을 그렇게 살아도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한 여인으로서, 충만한 삶을 누릴 수 있다면 더욱 좋겠다고.
프레데리크 베라트.
대공이 그 대상이 될 리는 없지만.
지빌라는 알 수 없는 아쉬움을 느끼며 조용히 마음을 접었다. 욕심을 부릴 대상이 아니었다. 욕심을 품을 자격조차, 스스로에게 허락하지 않았다.
그녀는 시녀 에르나를 물리고, 탁자에 다리를 뻗은 채 기대 앉아 있었다. 누구도 방해하지 않는 이 시간이, 영원히 이어지길 바랄 정도였다.
똑똑똑
“황녀 전하, 레오노라 클레브 백작 영애가 뵙기를 청합니다.”
지빌라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예상보다 조금 빠른 방문이었다.
“……들여보내줘.”
102화프레데리크의 손이 먼저 조심스럽게 그녀의 목선에 닿았다. 부드러움 속에 느껴지는 힘, 놓칠 생각이 없는 사람의 손이었다.정수리부터 발끝까지, 낯익은 감각이 훑고 지나갔다. 몸이 먼저 그를 기억하고 있었다. 지빌라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둘 사이는 이미 좁힐 수 없을 만큼 가까웠다.그는 그녀의 대답을 재촉하지 않았다.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 그녀의 마음이 지금, 자신과 같은 곳에 있다는 걸. 그저 그녀가 스스로 그것을 인정할 틈을, 잠시 내어주고 있을 뿐이었다.지빌라는 대답 대신 스스로 그의 어깨에 얼굴을 살짝 기댔다. 프레데리크는 숨을 깊게 들이켰다. 그대로 걸려 멈춘 사람처럼.그의 손이 지빌라의 허리로 천천히 미끄러져 그녀를 감싸 안았다. 손가락 하나하나가 천을 쓸어내리듯 조용했지만 확실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맞닿은 가슴 사이로, 그의 숨이 거칠어지는 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지빌라는 그것을 밀어내지 않았다. 숨기려 해도, 이미 숨길 수 없는 것들이 있었다.프레데리크는 잠시 눈을 감았다. 여기까지 오는 데 망설임은 없었다 — 이 순간을 만든 건 다름 아닌 그 자신이었으니까. 다만 그녀 역시 순순히 이 흐름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이, 그를 더 확신하게 만들었다.“지빌라…….”이번에는 이름을 완전히 품은 목소리였다. 그러나 그 목소리 끝에는, 그마저도 다 내려놓지 못한 작은 망설임이 남아 있었다.지빌라는 그 틈을 알아챘다. 먼저, 그의 목덜미를 살며시 끌어당겼다. 가볍지만 확실하게.
101화지빌라는 잠시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들을 위해 놓아둔 술 한 병이 눈에 들어왔다. 잔에 나누어 따르자 따뜻한 기운이 목을 타고 스며들었다.두세 잔을 연달아 비운 지빌라는 금세 볼이 붉게 물들었다.“하르트라라고 얕보면 안 돼.”“달콤해서 그만…….”프레데리크는 조용히 웃었다.사슴 젖으로 빚은 하르트라는 북부 사람들에게 익숙한 토속술이지만 지빌라에게는 생소했다. 그래서인지 은근한 단맛에 취기가 더 빠르게 올랐다.평소엔 보기 어려운, 유난히 부드러운 미소가 그의 입가에 스쳤다.“오늘 정도는 괜찮겠지.”그 말이 술보다 더 뜨겁게 그녀의 귓가를 스쳤다.그는 술잔을 기울이기보다 지빌라 곁에 조용히 앉았다. 평소라면 흐트러짐 하나 없던 그녀였는데, 지금은 볼이 발갛게 물든 채 눈매가 살짝 풀려 있었다. 낯선 얼굴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낯섦이 싫지 않았다.풍경도, 축제도, 불꽃도―지금의 그는 단 하나만 바라보고 있었다.“피곤하면 말해.”“아니에요. 괜찮아요.”두 사람은 나란히 앉아 하늘에 터지는 불꽃을 바라보았다. 북부의 불꽃은 더 까만 하늘을 아름답게 수놓고, 손끝으로 전해지는 온도는 그보다도 더 솔직했다.
100화연날리기가 끝나고 마지막 춤까지 지나자, 축제는 서서히 밤의 정점으로 향하고 있었다. 하늘에는 잔불처럼 흩어진 연의 불빛이 남아 있었고, 광장은 춤이 끝났다는 여운으로 들뜬 열기를 토해내고 있었다.오늘 축제의 진짜 마지막은 불꽃축제였다. 랑베르를 주축으로 일행은 하튼 백작성에 미리 도착해 있었다. 성은 대공 부부의 방문 소식으로 분주했다.사람들은 성의 가장 높은 곳, 불꽃을 가장 잘 내려다볼 수 있는 자리를 꾸미느라 분주히 오르내렸고, 곳곳에서 바람에 실린 흙냄새와 횃불의 열기가 섞여 흘렀다.랑베르는 성문 앞에서 인파를 정리하며 마지막 준비를 챙기고 있었다. 그의 어깨 위로 밤이 내려앉았다. 곧 시작될 절정을 앞두고, 성 전체가 긴장을 모으는 듯했다.그때, 레오노라는 누군가를 발견하자마자 숨을 삼켰다.‘왜 하필… 지금?’어둠 속에서 끌려 들어간 그녀는 기척도 없이 모습을 드러낸 사내를 마주했다.하인 복장이었지만, 어둠에서도 드러나는 표식은 단 하나, 허리끈 안쪽에 숨긴 아주 작은 금빛 인장.황가의 비밀을 뜻하는 일황자의 인장.사내는 주변을 한 번 훑어보고 조용히, 시선조차 마주치지 않은 채 레오노라에게 접근했다.“레오노라 양.”목소리는 낮고 절제돼 있었다.“일황자 전하께서 보내셨습니다.”그는 허리를 숙여 작은 검은 상자를 그녀의 손
99화프레데리크는 지금 자신의 상태를 알고 있었다. 이상했다. 아니, 낯설었다. 축제는 짧고, 대공성은 바로 코앞인데… 왜인지 오늘만큼은 조금 더 머물고 싶었다.그는 말없이 랑베르와 시선을 주고받더니 가볍게 턱짓했다.“짐은 하튼 백작성에 풀도록.”랑베르는 눈을 크게 뜨고 되물었다.“지금… 말씀이십니까? 대공성까지는—”“오늘은 여기서 밤을 보낸다.”결정이 내려지자, 곁에 있던 피엘은 잠시 굳은 듯하더니 조심스럽게 미소를 지었다. 그는 부임 이후 누구보다 빠르게 대공의 성품을 파악하려 애써온 사람이었다.‘대공께서 이렇게까지 표정이 밝았던 적이 있었던가…?’랑베르 또한 거의 감동에 가까운 마음이 들었다. 자신의 성에서 대공이 쉬겠다니 영광이었지만, 그보다 더 명확한 사실이 있었다.프레데리크의 시선이 자꾸, 너무 자주, 대공비를 따라갔다. 풍경을 바라보듯 부드럽고, 오랫동안 씌워졌던 어둠이 벗겨진 사람처럼 가벼워 보였다.랑베르는 그 모습을 오래 보지도 못하고 곧 고개를 숙여 예를 갖추었다.“준비해두겠습니다, 각하.”프레데리크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행렬은 여전히 움직였고, 축제의 열기와 노을빛이 뒤섞여 퍼지고 있었다. 그 모든 소리 속에서도 그는 지빌라의 숨결만 또렷하
98화레오노라는 가만히 시선을 돌렸다. 프레데리크는 지금, 너무도 자연스럽게 웃고 있었다. 그 미소가 누구를 향한 것인지도 너무 명확했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떨구었다.피엘이 낮게 말했다.“전하께서… 저렇게 누군가에게 맞춰 움직이시는 걸 처음 봅니다.”레오노라는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답했다.“그러게요. 아주… 철저하게 맞추셨네요.”살짝 눌린 목소리 속에는 놀람과 인정, 그리고 어쩌지 못하는 작은 서운함이 섞여 있었다.광장에 다시 아이들 웃음이 크게 터졌다. 하지만 레오노라의 귓가에는 단 하나의 생각만 맴돌았다.‘정말로… 지빌라 전하를 위해 온 걸까? 아니면… 이제는 그럴 수밖에 없어진 걸까.’그 깨달음이 겨울 바람보다 더 서늘하게 스쳤다.축제는 무르익어갔다. 인파 속을 가로지르는 동안 누군가 뒤에서 밀치는 바람에 지빌라가 휘청였다.프레데리크는 반사적으로 그녀의 손목을 잡아 끌어 안정시켰다. 손가락이 감기는 순간 둘 사이의 거리도 자연스레 좁혀졌다.“사람이 많군.”그의 짧은 말이 의외로 진정 효과를 냈다.“…고마워요.”지빌라는 잡힌 손에 신경이 쓰여 시선을 피했다.
97화의식이 끝나자 아이들 무리가 광장을 뛰어다니며 작은 부적을 나눠주기 시작했다.흰 실과 파란 실을 엮어 만든 ‘생명의 매듭’.한 아이가 지빌라 앞에 다가와 매듭을 내밀었다. 작고 단단한 매듭은 손 위에 놓이자마자 따뜻한 숨결을 품은 듯했다.“요람에 걸어두면 복이 온대요!”아이의 밝은 목소리가 퍼졌다.지빌라가 대꾸하기도 전에 프레데리크가 손을 내밀어 대신 받아들였다. 짧은 순간, 그의 손가락이 지빌라의 손등을 스쳤다. 의도치 않은 접촉이었는데, 왜인지 지빌라는 숨을 들이켰다.프레데리크는 부적을 바라보다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대대로 태어날 아이들을 위한 거지.”말이 끝나자, 그의 표정에 옅게 금이 갔다. 지빌라는 그 금이 어떤 감정에서 비롯된 것인지 읽을 수 없었다. 그러나 문득 떠올랐다.북부를 지배해온 오래된 저주, 베라트 가문의 가주는 스물다섯이 되면 죽는다는 전승.프레데리크의 아버지는 스물다섯이 되던 해, 마치 사슬이 끊어지듯 급작스럽게 숨을 거두었다. 대공비의 운명은 더 잔혹했다. 프레데리크가 다섯 살이던 해, 한 잔의 독이 모든 것을 끝냈다. 범인은 밝혀지지 않았다.결국 어린 프레데리크는 고아나 다름없는 신세가 되었고, 그를 지켜낸 건 혈육이 아닌 북부 그 자체였다. 레오노라의 아버지, 동부의 클레브 백작이 손을 내밀지 않았다면 그는 황실의 견제에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