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14화
지빌라가 고개를 들었다. 존대만 하던 그가, 둘만의 거리가 되자 말을 낮추는 것이 당황스러웠다. 그의 눈빛은 변함없이 차가웠다.
“이제 와 대공이라니.”
짧은 숨을 토하듯, 덧붙였다.
“불편해.”
지빌라는 당황한 듯 눈을 깜빡였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마음에 두고 계셨다면―.”
프레데리크는 말없이 시선을 내렸다. 그녀의 손을 가볍게 쥐며, 단호하게.
“프레데리크라 불러.”
연회 중앙홀에서 춤추는 두 사람의 모습은, 살아 있는 한 폭의 명화 같았다. 제국의 모든 귀족들과 사신들이 술렁이며 이들에 대해 평가하기가 바빴다.
귀족들은 대공이 황실의 압박에 이토록 쉽게 넘어간 이면에 베라트 가문의 저주가 있음을 짐작하고, 안타깝게 여겼다.
연로해 보이는 고위 귀족들이 모여서 한마디씩 던졌다.
“어릴 때부터 약혼을 미루더니, 대공도 결국 황실의 압박을 견디지 못했군.”
“베라트 가문은 제국의 제1검입니다. 그 검을 잃을 수는 없죠. 후계자가 시급하니. 이번에 황후를 다시 보았습니다.”
“황후가 대리청정을 이어갈 발판으로 삼을 거요.”
“황녀가 후계자를 하루빨리 생산하여야 가능하리라 봅니다.”
또 다른 귀족부인들도 보는 눈이 심상치 않았다.
“…생각보다 잘 어울리는군요. 대공이 황녀를 저리 부드럽게 이끌다니 보고도 믿을 수가 없네요.”
“야생마처럼 날뛰는 황녀를 대공이 완전히 사로잡은 것만 같아요. 황녀 전하의 기품이 전과 달리 완벽해진 모습이에요.”
“대공도 사람 같아 보이네요….”
“그래도 둘 사이에 진심이 있을까 싶네요.”
다른 부인이 비웃듯 덧붙였다.
“함께하다보면 마음이 달라지지 않겠어요?”
“베라트 가문의 저주를 모르시나요?”
부인은 손부채로 입을 가린 채 속삭였다.
“여기엔 사랑도, 희망도 없어요. 황녀라도 피하실 수 없으시죠.”
낙담이 큰 귀족 부인들에 비해 젊은 영애들은 대공과 황녀의 모습에 흠뻑 빠져들기도 했다.
“황녀 전하가 이미 대공께 푹 빠지셨다는 것도 이해가 돼.”
“대공께서 평생 춤이라고는 처음이실 텐데… 황녀 전하의 손을 지그시 감싸는 걸 봤어?”
“아… 저 무심한 듯 다가오는 거… 너무 설레게 만들어!”
“나도 저렇게 약혼하고 싶다!”
연회장에 마련된 대형 분수대는 한여름의 더위를 날리는 시원한 물줄기 소리가 흘렀다. 화기애애한 웃음소리와 술잔을 부딪치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모두의 시선이 제각기였지만 때때로 황녀와 대공에게로 집중되었다. 여전히 연회의 중심에 그들이 가장 빛나고 있었다.
축복과 불신, 기대와 저주의 시선이 교차하는 가운데, 두 사람의 춤은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
연회가 시작되고 끝나기까지, 모든 것을 지켜본 이가 한둘이 아니었다. 그중에서도 일황자 레나토는 가장 진지하게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누이의 본 모습이 드디어 나온 건가?’
레나토는 카이사르를 의도적으로 공개석상에서 모욕했다. 제국에 반감을 품게 만들어, 훗날 전쟁의 도화선으로 삼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누이가, 지빌라가, 느닷없이 끼어들었다. 그녀는 대신 사과하고, 카이사르를 감싸며 험악한 분위기를 부드럽게 풀어냈다.
제가 초대한 손님이라니.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초대장을 보낸 것은 레나토 자신이었으니까. 그런데 누이는 그 거짓을,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만인 앞에서 진실로 만들어버렸다.
어릴 적부터 레나토에게 넘을 수 없는 벽은 언제나 누이, 황녀 지빌라였다. 황제의 모든 사랑이 그녀에게로 쏠린 데는 이유가 있으리라 여겼다. 그리고 그는, 그가 누구보다 누이를 잘 안다고 믿었다.
유년기를 지나 소양을 갖춘 황녀는, 제왕학을 시작하기도 전에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본격적으로 학문을 닦지도 않았는데, 황녀는 무엇 하나 레나토보다 못하는 게 없었다. 검술이든, 승마든, 모두.
하지만 이제는 체격도, 학문의 깊이도 일황자인 그와 이황자에 비하면 특별할 것도 없었다. 겉으로는 평범한 영애들과 다를 바 없어 보였다.
황녀는 그저 평범해졌을 뿐이라 말했지만, 그는 믿을 수 없었다. 레나토는 시시때때로 누이를 떠보고, 시험에 들게 했다.
그러나 황후의 대리청정이 길어지면서, 황녀가 황태녀가 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이제는 대공과의 약혼까지 했으니, 먼 북부로 떠날 그녀는 더 이상 레나토의 상대가 아니었다.
‘하지만 오늘 누이의 모습은…… 달랐지.’
레나토가 품어온 허상 중 하나는, 누이가 황태녀가 되어 언젠가 제국을 이끌 거라는 믿음이었다. 너무도 확실해 보였기에, 이제 와 허망했다.
대공과 함께 황실을 완전히 떠나는 누이의 모습은,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는 황위 계승의 길을 빼앗는 것을 목표로 삼았지만, 이제는 계획을 전면 수정해야 했다. 허상은 무너졌고, 남은 건 시작도 하기 전에 씁쓸한 패배감뿐이었다.
102화프레데리크의 손이 먼저 조심스럽게 그녀의 목선에 닿았다. 부드러움 속에 느껴지는 힘, 놓칠 생각이 없는 사람의 손이었다.정수리부터 발끝까지, 낯익은 감각이 훑고 지나갔다. 몸이 먼저 그를 기억하고 있었다. 지빌라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둘 사이는 이미 좁힐 수 없을 만큼 가까웠다.그는 그녀의 대답을 재촉하지 않았다.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 그녀의 마음이 지금, 자신과 같은 곳에 있다는 걸. 그저 그녀가 스스로 그것을 인정할 틈을, 잠시 내어주고 있을 뿐이었다.지빌라는 대답 대신 스스로 그의 어깨에 얼굴을 살짝 기댔다. 프레데리크는 숨을 깊게 들이켰다. 그대로 걸려 멈춘 사람처럼.그의 손이 지빌라의 허리로 천천히 미끄러져 그녀를 감싸 안았다. 손가락 하나하나가 천을 쓸어내리듯 조용했지만 확실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맞닿은 가슴 사이로, 그의 숨이 거칠어지는 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지빌라는 그것을 밀어내지 않았다. 숨기려 해도, 이미 숨길 수 없는 것들이 있었다.프레데리크는 잠시 눈을 감았다. 여기까지 오는 데 망설임은 없었다 — 이 순간을 만든 건 다름 아닌 그 자신이었으니까. 다만 그녀 역시 순순히 이 흐름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이, 그를 더 확신하게 만들었다.“지빌라…….”이번에는 이름을 완전히 품은 목소리였다. 그러나 그 목소리 끝에는, 그마저도 다 내려놓지 못한 작은 망설임이 남아 있었다.지빌라는 그 틈을 알아챘다. 먼저, 그의 목덜미를 살며시 끌어당겼다. 가볍지만 확실하게.
101화지빌라는 잠시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들을 위해 놓아둔 술 한 병이 눈에 들어왔다. 잔에 나누어 따르자 따뜻한 기운이 목을 타고 스며들었다.두세 잔을 연달아 비운 지빌라는 금세 볼이 붉게 물들었다.“하르트라라고 얕보면 안 돼.”“달콤해서 그만…….”프레데리크는 조용히 웃었다.사슴 젖으로 빚은 하르트라는 북부 사람들에게 익숙한 토속술이지만 지빌라에게는 생소했다. 그래서인지 은근한 단맛에 취기가 더 빠르게 올랐다.평소엔 보기 어려운, 유난히 부드러운 미소가 그의 입가에 스쳤다.“오늘 정도는 괜찮겠지.”그 말이 술보다 더 뜨겁게 그녀의 귓가를 스쳤다.그는 술잔을 기울이기보다 지빌라 곁에 조용히 앉았다. 평소라면 흐트러짐 하나 없던 그녀였는데, 지금은 볼이 발갛게 물든 채 눈매가 살짝 풀려 있었다. 낯선 얼굴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낯섦이 싫지 않았다.풍경도, 축제도, 불꽃도―지금의 그는 단 하나만 바라보고 있었다.“피곤하면 말해.”“아니에요. 괜찮아요.”두 사람은 나란히 앉아 하늘에 터지는 불꽃을 바라보았다. 북부의 불꽃은 더 까만 하늘을 아름답게 수놓고, 손끝으로 전해지는 온도는 그보다도 더 솔직했다.
100화연날리기가 끝나고 마지막 춤까지 지나자, 축제는 서서히 밤의 정점으로 향하고 있었다. 하늘에는 잔불처럼 흩어진 연의 불빛이 남아 있었고, 광장은 춤이 끝났다는 여운으로 들뜬 열기를 토해내고 있었다.오늘 축제의 진짜 마지막은 불꽃축제였다. 랑베르를 주축으로 일행은 하튼 백작성에 미리 도착해 있었다. 성은 대공 부부의 방문 소식으로 분주했다.사람들은 성의 가장 높은 곳, 불꽃을 가장 잘 내려다볼 수 있는 자리를 꾸미느라 분주히 오르내렸고, 곳곳에서 바람에 실린 흙냄새와 횃불의 열기가 섞여 흘렀다.랑베르는 성문 앞에서 인파를 정리하며 마지막 준비를 챙기고 있었다. 그의 어깨 위로 밤이 내려앉았다. 곧 시작될 절정을 앞두고, 성 전체가 긴장을 모으는 듯했다.그때, 레오노라는 누군가를 발견하자마자 숨을 삼켰다.‘왜 하필… 지금?’어둠 속에서 끌려 들어간 그녀는 기척도 없이 모습을 드러낸 사내를 마주했다.하인 복장이었지만, 어둠에서도 드러나는 표식은 단 하나, 허리끈 안쪽에 숨긴 아주 작은 금빛 인장.황가의 비밀을 뜻하는 일황자의 인장.사내는 주변을 한 번 훑어보고 조용히, 시선조차 마주치지 않은 채 레오노라에게 접근했다.“레오노라 양.”목소리는 낮고 절제돼 있었다.“일황자 전하께서 보내셨습니다.”그는 허리를 숙여 작은 검은 상자를 그녀의 손
99화프레데리크는 지금 자신의 상태를 알고 있었다. 이상했다. 아니, 낯설었다. 축제는 짧고, 대공성은 바로 코앞인데… 왜인지 오늘만큼은 조금 더 머물고 싶었다.그는 말없이 랑베르와 시선을 주고받더니 가볍게 턱짓했다.“짐은 하튼 백작성에 풀도록.”랑베르는 눈을 크게 뜨고 되물었다.“지금… 말씀이십니까? 대공성까지는—”“오늘은 여기서 밤을 보낸다.”결정이 내려지자, 곁에 있던 피엘은 잠시 굳은 듯하더니 조심스럽게 미소를 지었다. 그는 부임 이후 누구보다 빠르게 대공의 성품을 파악하려 애써온 사람이었다.‘대공께서 이렇게까지 표정이 밝았던 적이 있었던가…?’랑베르 또한 거의 감동에 가까운 마음이 들었다. 자신의 성에서 대공이 쉬겠다니 영광이었지만, 그보다 더 명확한 사실이 있었다.프레데리크의 시선이 자꾸, 너무 자주, 대공비를 따라갔다. 풍경을 바라보듯 부드럽고, 오랫동안 씌워졌던 어둠이 벗겨진 사람처럼 가벼워 보였다.랑베르는 그 모습을 오래 보지도 못하고 곧 고개를 숙여 예를 갖추었다.“준비해두겠습니다, 각하.”프레데리크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행렬은 여전히 움직였고, 축제의 열기와 노을빛이 뒤섞여 퍼지고 있었다. 그 모든 소리 속에서도 그는 지빌라의 숨결만 또렷하
98화레오노라는 가만히 시선을 돌렸다. 프레데리크는 지금, 너무도 자연스럽게 웃고 있었다. 그 미소가 누구를 향한 것인지도 너무 명확했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떨구었다.피엘이 낮게 말했다.“전하께서… 저렇게 누군가에게 맞춰 움직이시는 걸 처음 봅니다.”레오노라는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답했다.“그러게요. 아주… 철저하게 맞추셨네요.”살짝 눌린 목소리 속에는 놀람과 인정, 그리고 어쩌지 못하는 작은 서운함이 섞여 있었다.광장에 다시 아이들 웃음이 크게 터졌다. 하지만 레오노라의 귓가에는 단 하나의 생각만 맴돌았다.‘정말로… 지빌라 전하를 위해 온 걸까? 아니면… 이제는 그럴 수밖에 없어진 걸까.’그 깨달음이 겨울 바람보다 더 서늘하게 스쳤다.축제는 무르익어갔다. 인파 속을 가로지르는 동안 누군가 뒤에서 밀치는 바람에 지빌라가 휘청였다.프레데리크는 반사적으로 그녀의 손목을 잡아 끌어 안정시켰다. 손가락이 감기는 순간 둘 사이의 거리도 자연스레 좁혀졌다.“사람이 많군.”그의 짧은 말이 의외로 진정 효과를 냈다.“…고마워요.”지빌라는 잡힌 손에 신경이 쓰여 시선을 피했다.
97화의식이 끝나자 아이들 무리가 광장을 뛰어다니며 작은 부적을 나눠주기 시작했다.흰 실과 파란 실을 엮어 만든 ‘생명의 매듭’.한 아이가 지빌라 앞에 다가와 매듭을 내밀었다. 작고 단단한 매듭은 손 위에 놓이자마자 따뜻한 숨결을 품은 듯했다.“요람에 걸어두면 복이 온대요!”아이의 밝은 목소리가 퍼졌다.지빌라가 대꾸하기도 전에 프레데리크가 손을 내밀어 대신 받아들였다. 짧은 순간, 그의 손가락이 지빌라의 손등을 스쳤다. 의도치 않은 접촉이었는데, 왜인지 지빌라는 숨을 들이켰다.프레데리크는 부적을 바라보다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대대로 태어날 아이들을 위한 거지.”말이 끝나자, 그의 표정에 옅게 금이 갔다. 지빌라는 그 금이 어떤 감정에서 비롯된 것인지 읽을 수 없었다. 그러나 문득 떠올랐다.북부를 지배해온 오래된 저주, 베라트 가문의 가주는 스물다섯이 되면 죽는다는 전승.프레데리크의 아버지는 스물다섯이 되던 해, 마치 사슬이 끊어지듯 급작스럽게 숨을 거두었다. 대공비의 운명은 더 잔혹했다. 프레데리크가 다섯 살이던 해, 한 잔의 독이 모든 것을 끝냈다. 범인은 밝혀지지 않았다.결국 어린 프레데리크는 고아나 다름없는 신세가 되었고, 그를 지켜낸 건 혈육이 아닌 북부 그 자체였다. 레오노라의 아버지, 동부의 클레브 백작이 손을 내밀지 않았다면 그는 황실의 견제에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