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ICIAR SESIÓN16화
레오노라는 오늘 연회에 참석한 듯 드레스 차림 그대로였다. 지빌라 역시 오늘 연회 때 입은 차림 그대로이긴 했지만.
여유가 없기는, 두 사람 다 매한가지였다. 그녀는 자세를 바로 하고 앉아 그녀를 맞았다.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군요. 레오노라.”
“네…… 생각보다 정리가 빨리 되었습니다.”
“그렇군요. 서 있지 말고 이리 와 앉아요.”
“아닙니다. 이제부터 제가 모실― 황녀 전하… 아니 대공비 전하가 되실 텐데요. 전하께서도 저를… 시녀로서 편히 대해주시길 바라요.”
레오노라는 서 있던 자리에서 한쪽 다리를 굽혀 고개를 숙였다.
“고마워요. 내 부탁을 들어주어서… 앞으로 잘 부탁해. 레오노라.”
“네… 황녀 전하.”
지빌라는 레오노라를 유심히 살피며 짧아진 말로 그녀를 시험했다.
“내게 궁금한 점이 많을 텐데… 묻고 싶은 게 있다면 이 자리에서 물어. 허락할 테니.”
고개를 든 레오노라의 눈동자가, 여지없이 흔들렸다. 그녀가 바란 것은, 프레데리크 가까이에 머무는 것 단 하나뿐이었다.
축복연회에 참석한 후 황녀와 대공의 약혼식을 담담히 지켜보았다. 잘 어울리는 한 쌍으로만 보였다는 것이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그녀는 제국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핏줄은 말할 것도 없이 고귀했다.
그런 여인이 대공비가 된다고 하니 제가 감히 그런 자리를 넘볼 수조차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뜬소문과 달리 황녀가 투기로 자신을 시녀로 들인 게 아니라는 건 직감했다. 그래서 더 궁금했다. 그렇다면 황녀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자신을 북부까지 데려가려는 것인지.
“제가 황녀 전하께 도움이 될까요?”
“프레데리크에 대해 레오노라보다 더 잘 아는 여인이 있을까?”
“제가 싫지 않으세요?”
지빌라는 잠시 시선을 내리고, 다시 마주 보며 말했다.
“레오노라 입장에서는 내가 미울 거야. 그런데 시녀가 되어 달라 했으니, 당혹스러웠을 테고.”
“……솔직히 그랬어요.”
지빌라는 안쓰럽고 미안한 얼굴을 해 보였다.
“말 그대로 정략혼이야. 애초에 사랑 같은 건 기대하지 않았어. 하지만 프레데리크와 함께하는 동안은… 그를 거스르고 싶지 않아. 그가 짊어진 것들을, 나도 조금은 함께 져야 할 테니까.”
가볍게 숨을 내쉰 지빌라는 한편으론 걱정에 휩싸였다. 베라트 가문의 저주를 벗어날 수 있을지, 아니면 정해진 운명대로 흘러갈지, 아직은 모든 것이 모호했기 때문이었다.
레오노라를 세상의 오해 속에 홀로 두지 않으려 북부행을 권한 것이, 옳은 선택이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카이사르의 불씨는 잠재웠을 뿐, 언제 다시 타오를지 몰랐다.
북부도, 프레데리크도, 레오노라도… 아직은 모든 게 불안정했다. 그러니까 지금은, 단단해질 시간이 필요했다.
황녀를 바라보지 못한 채 레오노라는 다시 고개를 숙였고, 가늘게 말을 이었다.
“처음에는 멀리서 그리워하는 것보다… 그분의 곁에 머무를 수 있다면… 황녀 전하의 시녀가 되든 어떤 형태이든 괜찮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이런 제 마음조차 그분께서는 바라지 않으실 겁니다.”
“……바라는 것 없이 내 시녀가 되겠다는 뜻이라면 굳이 명을 따르지 않아도 돼.”
“아니요. 황녀 전하의 시녀가 되어서 할 수 있는 일이 많으리란 생각이 들었어요. 최선을 다해 보필하고 싶습니다. 어쩌면 스스로 수도원에 틀어박혔을 삶에서, 황녀 전하께서 저를 건져주신 거예요.”
레오노라는 프레데리크를 잘 알았다. 그와는 절대 남녀 관계였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책임감이 강한 그는 자신이 결혼하지 않는 것에 대해 부채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무슨 마음으로 황녀와 정략혼을 했을지 알 것도 같았다.
“그분은 책임감이 강하신 분이세요. 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제가 혼인하지 않고 버티는 것에 부담을 가지고 계셨어요. 그렇다고 받아들일 수는 없으셨죠.”
지빌라는 두 사람의 관계가 그런 것이었나 하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당신을 끝까지 책임지겠어. 나와 함께해, 레오노라.”
레오노라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 말, 잊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고맙습니다. 황녀 전하.”
레오노라가 물러난 후, 지빌라는 조용히 창가에 섰다. 밤은 깊었고, 생각은 점점 더 가라앉았다. 어쩌면 이 밤처럼, 다가올 시간들도 길고 어두울지 몰랐다.
하지만… 함께할 사람이 생겨났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 한편이 따뜻해졌다.
***
레오노라가 지빌라 곁에서 시녀로 머문 지 일주일이 지났다. 그녀는 어느새 ‘황녀의 사람’으로 불릴 만큼 익숙해져 있었다. 이미 황궁 너머로 소문이 무성하게 퍼져나갔다.
황녀 시녀 중 에르나를 제외한 대부분의 시녀는 황후나 일황자가 의도적으로 붙여둔 이들이었다. 시녀들은 새로운 시녀로 온 레오노라를 일제히 주시했다.
지빌라는 레오노라에게 말했다.
“밖에서는 나와 사적으로 친한 척하지 마. 괜히 네가 구설에 오르지 않게 하려는 거야.”
레오노라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 그 말엔 다정함과 동시에 날 선 현실이 담겨 있었다.
“봐서 알겠지만, 황궁에서의 내 입지는 그다지 좋지 못해. 결혼식 후 북부로 함께 갈 시녀로는 에르나와 레오노라 두 사람뿐일 거야.”
소문의 화두는 ‘황녀 전하께서 기어코… 클레브 영애를 곁에 두고 대공과의 사이를 지켜보기로 했다’거나 ‘클레브 영애를 직접 괴롭히고 있다’는 거짓이었다.
정작 지빌라와 레오노라는 그런 반응에 시큰둥할 뿐 제 할 일에 여념이 없었다.
시녀들을 다 내보낸 뒤 지빌라는 에르나와 레오노라를 곁에 두고는 말했다.
“샤를로트가 나를 위해서 재미난 귀족부인들을 초대했다고 하네… 그럼 내가 안 가볼 수가 없지. 준비해줘.”
102화프레데리크의 손이 먼저 조심스럽게 그녀의 목선에 닿았다. 부드러움 속에 느껴지는 힘, 놓칠 생각이 없는 사람의 손이었다.정수리부터 발끝까지, 낯익은 감각이 훑고 지나갔다. 몸이 먼저 그를 기억하고 있었다. 지빌라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둘 사이는 이미 좁힐 수 없을 만큼 가까웠다.그는 그녀의 대답을 재촉하지 않았다.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 그녀의 마음이 지금, 자신과 같은 곳에 있다는 걸. 그저 그녀가 스스로 그것을 인정할 틈을, 잠시 내어주고 있을 뿐이었다.지빌라는 대답 대신 스스로 그의 어깨에 얼굴을 살짝 기댔다. 프레데리크는 숨을 깊게 들이켰다. 그대로 걸려 멈춘 사람처럼.그의 손이 지빌라의 허리로 천천히 미끄러져 그녀를 감싸 안았다. 손가락 하나하나가 천을 쓸어내리듯 조용했지만 확실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맞닿은 가슴 사이로, 그의 숨이 거칠어지는 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지빌라는 그것을 밀어내지 않았다. 숨기려 해도, 이미 숨길 수 없는 것들이 있었다.프레데리크는 잠시 눈을 감았다. 여기까지 오는 데 망설임은 없었다 — 이 순간을 만든 건 다름 아닌 그 자신이었으니까. 다만 그녀 역시 순순히 이 흐름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이, 그를 더 확신하게 만들었다.“지빌라…….”이번에는 이름을 완전히 품은 목소리였다. 그러나 그 목소리 끝에는, 그마저도 다 내려놓지 못한 작은 망설임이 남아 있었다.지빌라는 그 틈을 알아챘다. 먼저, 그의 목덜미를 살며시 끌어당겼다. 가볍지만 확실하게.
101화지빌라는 잠시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들을 위해 놓아둔 술 한 병이 눈에 들어왔다. 잔에 나누어 따르자 따뜻한 기운이 목을 타고 스며들었다.두세 잔을 연달아 비운 지빌라는 금세 볼이 붉게 물들었다.“하르트라라고 얕보면 안 돼.”“달콤해서 그만…….”프레데리크는 조용히 웃었다.사슴 젖으로 빚은 하르트라는 북부 사람들에게 익숙한 토속술이지만 지빌라에게는 생소했다. 그래서인지 은근한 단맛에 취기가 더 빠르게 올랐다.평소엔 보기 어려운, 유난히 부드러운 미소가 그의 입가에 스쳤다.“오늘 정도는 괜찮겠지.”그 말이 술보다 더 뜨겁게 그녀의 귓가를 스쳤다.그는 술잔을 기울이기보다 지빌라 곁에 조용히 앉았다. 평소라면 흐트러짐 하나 없던 그녀였는데, 지금은 볼이 발갛게 물든 채 눈매가 살짝 풀려 있었다. 낯선 얼굴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낯섦이 싫지 않았다.풍경도, 축제도, 불꽃도―지금의 그는 단 하나만 바라보고 있었다.“피곤하면 말해.”“아니에요. 괜찮아요.”두 사람은 나란히 앉아 하늘에 터지는 불꽃을 바라보았다. 북부의 불꽃은 더 까만 하늘을 아름답게 수놓고, 손끝으로 전해지는 온도는 그보다도 더 솔직했다.
100화연날리기가 끝나고 마지막 춤까지 지나자, 축제는 서서히 밤의 정점으로 향하고 있었다. 하늘에는 잔불처럼 흩어진 연의 불빛이 남아 있었고, 광장은 춤이 끝났다는 여운으로 들뜬 열기를 토해내고 있었다.오늘 축제의 진짜 마지막은 불꽃축제였다. 랑베르를 주축으로 일행은 하튼 백작성에 미리 도착해 있었다. 성은 대공 부부의 방문 소식으로 분주했다.사람들은 성의 가장 높은 곳, 불꽃을 가장 잘 내려다볼 수 있는 자리를 꾸미느라 분주히 오르내렸고, 곳곳에서 바람에 실린 흙냄새와 횃불의 열기가 섞여 흘렀다.랑베르는 성문 앞에서 인파를 정리하며 마지막 준비를 챙기고 있었다. 그의 어깨 위로 밤이 내려앉았다. 곧 시작될 절정을 앞두고, 성 전체가 긴장을 모으는 듯했다.그때, 레오노라는 누군가를 발견하자마자 숨을 삼켰다.‘왜 하필… 지금?’어둠 속에서 끌려 들어간 그녀는 기척도 없이 모습을 드러낸 사내를 마주했다.하인 복장이었지만, 어둠에서도 드러나는 표식은 단 하나, 허리끈 안쪽에 숨긴 아주 작은 금빛 인장.황가의 비밀을 뜻하는 일황자의 인장.사내는 주변을 한 번 훑어보고 조용히, 시선조차 마주치지 않은 채 레오노라에게 접근했다.“레오노라 양.”목소리는 낮고 절제돼 있었다.“일황자 전하께서 보내셨습니다.”그는 허리를 숙여 작은 검은 상자를 그녀의 손
99화프레데리크는 지금 자신의 상태를 알고 있었다. 이상했다. 아니, 낯설었다. 축제는 짧고, 대공성은 바로 코앞인데… 왜인지 오늘만큼은 조금 더 머물고 싶었다.그는 말없이 랑베르와 시선을 주고받더니 가볍게 턱짓했다.“짐은 하튼 백작성에 풀도록.”랑베르는 눈을 크게 뜨고 되물었다.“지금… 말씀이십니까? 대공성까지는—”“오늘은 여기서 밤을 보낸다.”결정이 내려지자, 곁에 있던 피엘은 잠시 굳은 듯하더니 조심스럽게 미소를 지었다. 그는 부임 이후 누구보다 빠르게 대공의 성품을 파악하려 애써온 사람이었다.‘대공께서 이렇게까지 표정이 밝았던 적이 있었던가…?’랑베르 또한 거의 감동에 가까운 마음이 들었다. 자신의 성에서 대공이 쉬겠다니 영광이었지만, 그보다 더 명확한 사실이 있었다.프레데리크의 시선이 자꾸, 너무 자주, 대공비를 따라갔다. 풍경을 바라보듯 부드럽고, 오랫동안 씌워졌던 어둠이 벗겨진 사람처럼 가벼워 보였다.랑베르는 그 모습을 오래 보지도 못하고 곧 고개를 숙여 예를 갖추었다.“준비해두겠습니다, 각하.”프레데리크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행렬은 여전히 움직였고, 축제의 열기와 노을빛이 뒤섞여 퍼지고 있었다. 그 모든 소리 속에서도 그는 지빌라의 숨결만 또렷하
98화레오노라는 가만히 시선을 돌렸다. 프레데리크는 지금, 너무도 자연스럽게 웃고 있었다. 그 미소가 누구를 향한 것인지도 너무 명확했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떨구었다.피엘이 낮게 말했다.“전하께서… 저렇게 누군가에게 맞춰 움직이시는 걸 처음 봅니다.”레오노라는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답했다.“그러게요. 아주… 철저하게 맞추셨네요.”살짝 눌린 목소리 속에는 놀람과 인정, 그리고 어쩌지 못하는 작은 서운함이 섞여 있었다.광장에 다시 아이들 웃음이 크게 터졌다. 하지만 레오노라의 귓가에는 단 하나의 생각만 맴돌았다.‘정말로… 지빌라 전하를 위해 온 걸까? 아니면… 이제는 그럴 수밖에 없어진 걸까.’그 깨달음이 겨울 바람보다 더 서늘하게 스쳤다.축제는 무르익어갔다. 인파 속을 가로지르는 동안 누군가 뒤에서 밀치는 바람에 지빌라가 휘청였다.프레데리크는 반사적으로 그녀의 손목을 잡아 끌어 안정시켰다. 손가락이 감기는 순간 둘 사이의 거리도 자연스레 좁혀졌다.“사람이 많군.”그의 짧은 말이 의외로 진정 효과를 냈다.“…고마워요.”지빌라는 잡힌 손에 신경이 쓰여 시선을 피했다.
97화의식이 끝나자 아이들 무리가 광장을 뛰어다니며 작은 부적을 나눠주기 시작했다.흰 실과 파란 실을 엮어 만든 ‘생명의 매듭’.한 아이가 지빌라 앞에 다가와 매듭을 내밀었다. 작고 단단한 매듭은 손 위에 놓이자마자 따뜻한 숨결을 품은 듯했다.“요람에 걸어두면 복이 온대요!”아이의 밝은 목소리가 퍼졌다.지빌라가 대꾸하기도 전에 프레데리크가 손을 내밀어 대신 받아들였다. 짧은 순간, 그의 손가락이 지빌라의 손등을 스쳤다. 의도치 않은 접촉이었는데, 왜인지 지빌라는 숨을 들이켰다.프레데리크는 부적을 바라보다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대대로 태어날 아이들을 위한 거지.”말이 끝나자, 그의 표정에 옅게 금이 갔다. 지빌라는 그 금이 어떤 감정에서 비롯된 것인지 읽을 수 없었다. 그러나 문득 떠올랐다.북부를 지배해온 오래된 저주, 베라트 가문의 가주는 스물다섯이 되면 죽는다는 전승.프레데리크의 아버지는 스물다섯이 되던 해, 마치 사슬이 끊어지듯 급작스럽게 숨을 거두었다. 대공비의 운명은 더 잔혹했다. 프레데리크가 다섯 살이던 해, 한 잔의 독이 모든 것을 끝냈다. 범인은 밝혀지지 않았다.결국 어린 프레데리크는 고아나 다름없는 신세가 되었고, 그를 지켜낸 건 혈육이 아닌 북부 그 자체였다. 레오노라의 아버지, 동부의 클레브 백작이 손을 내밀지 않았다면 그는 황실의 견제에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