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아니. 속이는 사람이 잘못이지.”
로나의 대답이 빨랐다. 그녀는 내 팔을 살짝 쓸어주었다. “내가 연애하라는 건 네가 혼자라서 불행하다는 뜻이 아니야. 네가 좋아하는 걸 자꾸 포기하는 것 같아서 그래. 너 예전에는 사랑 이야기 좋아했잖아.” 나는 친구를 바라보다가 시선을 내렸다. 좋아했다. 소설 속에서 서로를 선택하는 사람들도, 길에서 손을 잡고 걷는 연인들도. 단지 내 이야기가 될 때마다 조금 우스워져서 모르는 척했을 뿐이었다. “지금도 좋아해.” “알아. 그러니까 마음에 드는 사람이 생기면 미리 겁먹지는 말라는 거야.” 로나가 다시 잔을 들었다. 나는 타르트를 한입 먹었다. 딸기는 달았고 크림은 부드러웠다. 기분도 조금 나아졌다. 잠시 뒤 신랑에게 붙잡혀 있던 아르타샤가 우리 쪽을 보고 손을 흔들었다. 로나는 그 손짓에 응답하면서 내게 마지막으로 한마디를 덧붙였다. “다음에 만날 때는 연애 이야기 하나쯤 들려줘.” “남의 이야기여도 돼?” “샤를.” “노력해볼게.” 나는 웃으며 잔을 내려놓았다. 적어도 오늘은 그 말을 진심으로 할 수 있었다. 마차에 오르자 마부가 집으로 갈 것인지 물었다. 나는 열린 창문 너머로 파란 하늘을 올려다봤다. 해가 아직 높았고 바람에는 봄이 끝나가는 냄새가 섞여 있었다. 곧장 집으로 가기에는 조금 아까웠다. 오전에는 보고서를 읽고, 오후에는 잔소리를 들었으니 이제는 내 마음대로 쓸 시간이 필요했다. “번화가로 가주세요. 과자점 앞에서 내려주시면 돼요.” 거리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나는 마차를 기다려달라고 부탁하고 과자점으로 향했다. 그런데 골목 입구에 펼쳐진 낡은 돗자리와 눈이 마주쳤다. 정확히는 그 위에 앉은 노인이 나를 보고 혀를 찼다. 작은 나무 상자와 빛바랜 부채뿐인 자리였다. 점을 본다는 간판은 없었지만 분위기가 충분히 설명해주었다. “쯧. 아까운 얼굴이네.” 나는 그대로 걸었다. 길에서 모르는 사람의 얼굴을 평가하는 분과 친분을 맺고 싶지는 않았다. 노인은 내가 지나가는 동안 고개를 느리게 저었다. “남자 복이 없어. 지독하게 없어.” 발걸음이 멈췄다. 오늘만 몇 번째인지 모르겠다. 신부, 친구, 이제는 처음 보는 점쟁이까지. 내 연애 문제가 수도의 공공사업이라도 된 건가. “저한테 하신 말씀이에요?” “여기 아가씨 말고 누가 있나?” “길에는 사람이 많은데요.” “가까이 온 남자마다 꼭 하나씩 숨겼지? 여자든, 빚이든, 욕심이든.” “그런 사람은 흔하잖아요.” “흔한 사람들을 아주 골고루 만났고.” “일은 잘하겠네. 그래서 더 못 놓는 사람이 있어.” “누가요?” “그것도 모르니 남자 복이 없지.” “일을 못 놓는 건 저를 고용한 분의 사정이고요.” 노인은 소리 내 웃었다. 나는 왜 내가 반박하는 말까지 즐거워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미 멈춰 선 이상 끝은 듣고 싶었다. 불리한 계약도 첫 장만 읽고 버리지는 않는 법이었다. “그래서 평생 이렇게 산다는 말씀이세요?” “아니. 이 년 뒤.” 부채질이 멎었다. 노인이 나를 똑바로 바라봤다. 장난기 어린 눈빛이 잠깐 가라앉아, 나는 무심코 자세를 바로 했다. “죽고 못 살 만큼 좋아하는 사람이 생길 거야.” 바람이 골목을 지나갔다. 나는 블라우스의 소매를 가볍게 잡았다가 놓았다. 그 말은 결혼한다는 예언보다 더 믿기 어려웠다. 결혼은 조건을 맞춰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누군가를 그렇게 좋아하는 일은 내 마음이 따라줘야 했다. 내 마음은 최근 몇 년간 꽤 신중해져 있었다. “얼굴은 잘생겼나요?” 노인이 눈을 깜박였다. 내가 물어놓고도 조금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이 년이나 기다려야 한다면 미리 알아둘 만한 사항이었다. “그게 제일 궁금해?” “성격은 제가 만나봐야 알죠. 빚이 있는지, 숨겨둔 가족이 있는지도 확인해야 하고요. 그건 예언보다 서류가 정확해요.” 노인이 웃다가 부채로 입을 가렸다. 한참 뒤에야 웃음을 그친 그녀가 나무 상자를 톡 두드렸다. “마음에 들 거야. 네가 외면하기 어려울 만큼.”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아주 잠깐, 설명할 수 없는 서늘함이 등 뒤를 스쳤다. 사랑에 관한 이야기인데 왜 위협처럼 들렸는지 모르겠다. 노인은 이미 다시 태연한 얼굴로 손을 내밀고 있었다. “오 실버.” “제가 점을 봐달라고 한 건 아닌데요.” “얼굴 잘생겼느냐고 물었잖아. 상담은 했지.” “이 년 뒤에도 없으면 돌려주실 거예요?” “그때 와서 따져.” “여기 계실 거죠?” “찾아보면 있겠지.” 책임감 없는 대답이었다. 노인은 동전을 받고 돗자리를 접기 시작했다. 나는 한 번 더 그녀를 바라보다가 몸을 돌렸다. 오늘은 결혼식도 보고, 사랑 이야기도 충분히 들었다. 이제는 초콜릿을 사서 집에 가고 싶었다. 작은 상자를 사면 아직 돈이 남겠지. 그래도 문득 궁금해졌다. 그 사람은 어떤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부를까. 내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줄까. 내가 먼저 손을 잡아도 피하지 않을까. 생각이 거기까지 닿자 얼굴이 조금 뜨거워졌다. 오 실버짜리 말 한마디가 제법 오래 남았다. 나는 작게 웃으며 문고리를 잡았다. 예언이 맞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언젠가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 생긴다면, 이번에는 남들이 좋다고 하는 이유부터 살피지는 않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함께 있고 싶은지, 그 사람도 내 곁에서 편안한지부터 확인할 것이다. 남자 복이 없다는 말은 오늘 충분히 들었다. 내 남자까지 남의 말로 고를 필요는 없었다. 과자점 문에 달린 종이 울렸다. 샤를레아가 안으로 들어간 뒤에도, 골목의 노인은 한동안 그쪽을 바라봤다. 다 접은 부채를 손바닥에 얹은 그녀의 눈에 느린 의아함이 번졌다. “이상하네. 인연이 없는 얼굴은 아닌데.” 노인은 부채를 다시 펼쳤다. 흐린 무늬 사이로 가느다란 선들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그녀는 그중 한 곳에 손가락을 멈추었다. 조금 전까지 웃고 있던 입가가 천천히 굳었다. “누가 손을 댔구나.” 과자점 안에서는 샤를레아가 초콜릿 상자를 고르고 있었다.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백작님과 연락하고 싶지 않습니다. 집으로 찾아오시는 것도 원하지 않고요.” “앞으로 서신이 오면 뜯지 않고 돌려보내겠습니다.” 백작은 알겠다고 중얼거리며 마차에 올랐다. 이번에는 아주 얌전한 속도로 떠났다. “감사합니다, 공작님.” “손목은?” “움직일 수 있습니다.” “아픈지 물었어.” 나는 대답 대신 손목을 내려다봤다. 잡혔던 자리가 붉어져 있었다. 크게 다친 것 같지는 않았지만, 펜을 오래 잡으면 조금 불편할 것 같았다. 공작이 손을 내밀었다. 잡으라는 뜻인지 보여달라는 뜻인지 몰라 잠깐 머뭇거리자 그가 덧붙였다. “봐도 되겠나?” “네.” 그가 내 손바닥 아래를 받쳤다. 장갑을 낀 손이었는데도 압력이 조심스러웠다. 바로 전까지 아플 만큼 잡혀 있었던 탓인지, 아무 힘도 주지 않고 받쳐주는 감각이 유난히 선명했다. 그는 손목을 돌리지 않고 붉어진 부분만 살폈다. “주치의에게 보이는 게 좋겠군.” “집에 가서 찜질하겠습니다.” “우리 주치의는 오늘 저택에 있어. 가깝기도 하고.” “치료만 받으면 됩니까?” “내가 치료 뒤에 광산 보고서를 먹일 사람처럼 보이나?” “읽히실 사람처럼 보입니다.” “마침 자네에게 확인하고 싶은 일이 하나 있기는 해.” “제 휴일은 공작님의 것이 아닙니다.” “알아.” “아침에도 일했습니다.” “그것도 알아.” “지금은 초콜릿을 먹고 집에 가는 일정입니다.” “치료를 받는 동안 설명할 수 있을 정도의 일이야. 부탁해도 되겠나?” “어떤 일입니까?” “광산의 추가 보고서에 수량이 맞지 않는 곳이 있어. 자네가 정리한 원본과 비교하고 싶어.” “제가 오전에 말씀드린 운송 손실과는 다른 겁니까?” “달라. 채굴량은 그대로인데 반출된 수량이 늘었어.” “삼십 분만 확인하겠습니다. 정식 검토는 내일 하고요.” “좋아.” “휴일 근무 수당은 따로 기록하겠습니다.” “기록하게.” “치료 시간은 삼십 분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초콜릿은 예언보다 믿을 만했다. 적어도 돈을 내면 그 자리에서 행복해질 수 있었다. 나는 작은 상자를 품에 안고 과자점을 나왔다. 조금 전까지 점쟁이가 앉아 있던 골목은 텅 비어 있었다. 나무 상자도, 낡은 돗자리도 보이지 않았다. 대체 언제 다 치우고 간 거지. 오 실버를 받고 나서의 움직임만큼은 제법 신속한 모양이었다. 마차가 서 있던 곳에는 짐수레 두 대가 들어와 있었다. 우리 마부는 과자점의 하인이 나를 향해 손을 들기도 전에 길 건너에서 신호를 보냈다. 뒤쪽 분수대 옆에 세워두겠다는 뜻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보행로를 따라 걸었다. 상자 속에서 달콤한 냄새가 올라왔다. 집에 도착하면 데인과 나눠 먹고, 남은 것은 책을 읽으면서 먹을 생각이었다. 그때 말의 울음소리가 날카롭게 터졌다. “비켜요!” 검은 마차 한 대가 모퉁이를 크게 돌아 들어왔다. 바퀴가 보행로의 낮은 경계석을 타고 넘어왔다가 튕겼다.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물렸다. 굽 낮은 구두가 돌바닥을 미끄러졌고, 분수대의 가장자리를 짚고서야 가까스로 균형을 잡았다. 손에 들고 있던 상자가 기울었다. 마차는 고삐를 당기는 소리와 함께 내 앞에서 멈췄다. “거기 서 있으면 어떡합니까!” 마부가 먼저 고함을 질렀다. 나는 아직 분수대를 짚고 있던 손을 떼고 그를 바라봤다. 그는 마부석에서 내려오자마자 말의 상태부터 살폈다. 그러고는 내가 다쳤는지 묻는 대신, 마차가 긁힌 자리를 손으로 문질렀다. “지금 저한테 하시는 말씀이세요?” “갑자기 튀어나오면 나더러 어쩌라고…….” “저는 보행로에 있었고, 마차가 올라왔는데요.” 내가 경계석을 가리키자 그의 시선이 잠깐 그쪽으로 향했다. 하지만 인정하는 대신 내 차림을 훑었다. 손목을 덮는 블라우스와 조끼, 먼지 묻은 바지. 드레스와 보석으로 신분을 알리는 영애와는 거리가 있었다. 그의 턱이 조금 올라갔다. “마차 안에 어떤 분이 계시는지는 압니까?” “운전 속도를 결정할 때는 그분의 성함보다 도로 표지판을
“아니. 속이는 사람이 잘못이지.” 로나의 대답이 빨랐다. 그녀는 내 팔을 살짝 쓸어주었다. “내가 연애하라는 건 네가 혼자라서 불행하다는 뜻이 아니야. 네가 좋아하는 걸 자꾸 포기하는 것 같아서 그래. 너 예전에는 사랑 이야기 좋아했잖아.” 나는 친구를 바라보다가 시선을 내렸다. 좋아했다. 소설 속에서 서로를 선택하는 사람들도, 길에서 손을 잡고 걷는 연인들도. 단지 내 이야기가 될 때마다 조금 우스워져서 모르는 척했을 뿐이었다. “지금도 좋아해.” “알아. 그러니까 마음에 드는 사람이 생기면 미리 겁먹지는 말라는 거야.” 로나가 다시 잔을 들었다. 나는 타르트를 한입 먹었다. 딸기는 달았고 크림은 부드러웠다. 기분도 조금 나아졌다. 잠시 뒤 신랑에게 붙잡혀 있던 아르타샤가 우리 쪽을 보고 손을 흔들었다. 로나는 그 손짓에 응답하면서 내게 마지막으로 한마디를 덧붙였다. “다음에 만날 때는 연애 이야기 하나쯤 들려줘.” “남의 이야기여도 돼?” “샤를.” “노력해볼게.” 나는 웃으며 잔을 내려놓았다. 적어도 오늘은 그 말을 진심으로 할 수 있었다. 마차에 오르자 마부가 집으로 갈 것인지 물었다. 나는 열린 창문 너머로 파란 하늘을 올려다봤다. 해가 아직 높았고 바람에는 봄이 끝나가는 냄새가 섞여 있었다. 곧장 집으로 가기에는 조금 아까웠다. 오전에는 보고서를 읽고, 오후에는 잔소리를 들었으니 이제는 내 마음대로 쓸 시간이 필요했다. “번화가로 가주세요. 과자점 앞에서 내려주시면 돼요.” 거리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나는 마차를 기다려달라고 부탁하고 과자점으로 향했다. 그런데 골목 입구에 펼쳐진 낡은 돗자리와 눈이 마주쳤다. 정확히는 그 위에 앉은 노인이 나를 보고 혀를 찼다. 작은 나무 상자와 빛바랜 부채뿐인 자리였다. 점을 본다는 간판은 없었지만 분위기가 충분히 설명해주었다. “쯧. 아까운 얼굴이네.” 나는 그대로 걸었다. 길에서 모르는 사람의 얼굴을 평가하는 분과 친분을 맺고 싶지는 않았다. 노인은 내가 지나가는 동안 고개를
모두가 축복하는 기쁜 날이었다. 적어도 신부가 내 연애사를 꺼내기 전까지는. 아르타샤는 거울 앞에 앉아 있었다. 어깨를 드러낸 새하얀 새틴 드레스가 허리 아래로 매끄럽게 흘러내렸고, 창문으로 들어온 햇살은 치맛자락 위에 얇은 금빛을 얹었다. 화려한 보석도, 겹겹이 부풀린 레이스도 없었다. 그런데도 나는 잠깐 말을 잊었다. 부케를 고쳐 쥐며 웃는 친구가 너무 아름다워서였다. “축하해, 아샤. 정말 예쁘다.” 나는 친구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끌어안았다. 꽃과 향유 냄새가 가까워졌다. 아르타샤는 내 등을 가볍게 두드리더니, 서로 떨어지자마자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물었다. “고마워. 그래서 너는 언제 결혼할 건데?” 감동이 사라지는 데에는 한 문장으로 충분했다. 나는 흐트러진 부케의 리본을 펴주던 손을 멈추고 친구를 바라봤다. 오늘만큼은 넘어갈 줄 알았는데. 신부의 자비를 기대한 내가 잘못이었다. “오늘은 네 결혼식이잖아.” “그러니까 물어보는 거야. 다음에는 네 결혼식에서 이 말을 하고 싶어서.” “내 주변에 남자가 없어.” “말은 바로 해야지. 남자는 많은데 네가 좋아하는 남자가 없는 거잖아.” “청혼서는 매달 오지, 연회 초대장도 쌓여 있지. 그런데 너는 일하느라 바쁘다고 전부 거절하잖아.” “청혼서에 내 이름을 틀리게 적은 사람도 있었어.” “그 사람은 제외하고.” “두 번째 장부터 지참금 이야기를 하는 사람도 있었고.” “그 사람도 제외하고.” “우리 아버지보다 연세가 많은 분도…….” “샤를.” 목소리가 낮아졌다. 나는 순순히 입을 다물었다. 손은 얌전히 과자 쪽으로 뻗었다가 들켰다. 아르타샤가 내 손등을 가볍게 때렸다. 오늘의 신부는 친구가 굶는 일보다 혼자 늙는 일을 더 걱정하는 듯했다. “결혼까지는 안 바랄게. 연애라도 해. 네가 마음에 드는 사람하고.” “그런 사람이 생기면 나도 할 거야.” “그럼 서류 밖에서도 좀 찾아봐.” 마침 문이 열리고 로나가 들어왔다. 다른 하객들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