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서화가 ‘평범한 하루’를 목록에 적은 뒤로 사흘이 흘렀다. 그동안 북부성에서는 정말 별다른 일이 없었다. 서화는 오전이면 에드윈과 아르데시아어를 공부했고, 점심을 먹은 뒤에는 헤르만에게 약초와 치료 기록을 배웠으며, 저녁에는 자신의 방이나 서재에서 책을 읽었다. 카시안과 마주치는 시간도 특별히 늘리지 않았다. 함께 식사할 수 있으면 식사를 했고, 서로 일이 남아 있으면 각자의 일을 했다. 다만 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서화가 더 이상 평범한 하루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날’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그날 아침에도 서화는 에드윈과 번역 기록을 정리하고 있었다. 최근에는 조선의 생활 단어보다 아르데시아에서 배운 단어를 조선어로 어떻게 설명할지를 고민하는 시간이 늘었다. 처음에는 조선을 이곳 사람들에게 설명하려고 시작한 일이었는데, 이제는 반대로 가족에게 아르데시아를 어떻게 설명할지도 생각하게 된 것이다. 북부 대공, 마법사, 신전, 마력 같은 단어는 조선어 한두 마디로 옮기기 어려웠고, 특히 ‘마법’을 단순히 도술이라고 설명하면 자신이 처음 이곳에 왔을 때 했던 오해를 가족들도 그대로 할 가능성이 컸다.“이건 아니다.”서화가 자신이 적은 문장을 지우자 에드윈이 옆에서 고개를 기울였다. “또 뭐가 마음에 안 들어?”“마법. 도술 비슷하다. 그런데 도술 아니다.”“도술이 뭔데?”서화는 잠시 고민했다. 처음 아르데시아에 떨어졌을 때 자신은 마법을 보자마자 도술이라고 생각했다. 이해할 수 없는 힘을 자신이 아는 가장 가까운 개념에 넣은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 차이를 알고 있었다. 아르데시아의 마법은 특정한 몇 사람이 신비한 재주를 부리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연구하는 사람이 있고, 교육하는 기관이 있으며, 치료나 건축처럼 실제 생활에도 쓰였다. 위험할 수도 있지만 그 자체가 기이한 술법으로만 취급되는 것은 아니었다.“조선 가면. 아버지한테 설명하다. 오라버니는…….”서화가 말을 멈췄다.에드윈이 기다렸다.“오라버니는 먼저 칼 잡다.”
서화가 전날 밤 적어 둔 목록 가운데 가장 어려운 항목은 뜻밖에도 마지막에서 두 번째였다. 카시안과 평범한 하루를 보낼 것. 아르데시아어 공부는 시간을 정하면 됐고, 헤르만에게 약초를 배우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마리엘에게 북부 음식을 하나 가르쳐 달라고 하자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 부엌 사용 시간을 잡았으며, 에드윈에게 빌린 책은 서재에서 찾아 돌려주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평범한 하루’라는 것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완성되는지 알 수 없었다. 일부러 계획하는 순간 이미 평범하지 않은 것 같았고,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평소처럼 카시안은 집무실에 틀어박혀 하루를 보내고 자신은 에드윈이나 헤르만과 공부하다 저녁 식사 때나 마주칠 가능성이 컸다. 결국 서화는 아침 식사를 하다가 맞은편에 앉은 카시안을 빤히 바라봤다. 카시안은 처음에는 모르는 척 식사를 계속했지만, 서화의 시선이 좀처럼 떨어지지 않자 포크를 내려놓았다. “할 말 있어?” 서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바쁘다?” 카시안이 잠시 생각했다. “오전에는 보고를 받아야 하고, 오후에는 훈련장에 한번 가봐야 해. 왜?” “저녁?” “특별한 일정은 없어.” 서화는 조금 고민하다 물었다. “그러면 저녁. 같이 있다.” 카시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서화가 눈을 가늘게 떴다. “싫다?” “아니.” “그런데 왜 대답 안 하다?” “너무 좋아서 네가 뭘 잘못 말한 건가 생각 중이었어.” 서화가 어이없다는 얼굴을 했다. “안 잘못 말하다.” “그럼 같이 있자.” 카시안은 웃으며 다시 포크를 들었다. 특별히 무엇을 하자는 질문도, 어디에 가고 싶은지 묻는 말도 없었다. 서화 역시 그것이 마음에 들어 더 설명하지 않았다. 오늘 저녁에는 특별한 것을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평소처럼 밥을 먹고, 책을 읽고, 이야기를 조금 나누면 됐다. 다만 식사가 끝나기 직전 카시안이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물었다. “저녁 식사는 뭐 먹고 싶어?” 서화가 바로 그를 쳐다봤다. “평범하게.” “평범한
서화가 열어 둔 작은 상자는 며칠이 지나도록 절반 이상 비어 있었다. 처음에는 돌아갈 때 가져갈 물건을 하나씩 넣으면 금세 가득 찰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막상 손에 잡히는 것마다 쉽게 결정할 수 없었다. 북부에 처음 왔을 때 받았던 두꺼운 망토는 조선에서는 지나치게 크고 무거울 것 같았고, 에드윈과 함께 사용한 아르데시아어 연습장은 몇 권이나 되어 전부 가져가기에는 부피가 컸다. 반대로 너무 사소해서 굳이 챙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던 작은 나무 빗은 마리엘이 서화의 머리를 처음 제대로 정리해주던 날 건넨 것이어서, 한참 손에 들고 있다가 결국 상자 안에 넣었다.그 모습을 지켜보던 마리엘은 처음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전처럼 무엇을 반드시 가져가야 한다며 권하지도 않았고, 자신이 준 물건을 넣었다고 기뻐하지도 않았다. 서화가 빗을 넣었다가 다시 꺼내고, 한참 뒤 또 넣는 것을 세 번째 보고서야 웃음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아가씨, 그 빗이 오늘 안으로 자리를 정할 수는 있는 겁니까?”서화가 상자 앞에 쪼그려 앉은 채 심각한 얼굴로 대답했다. “고민 중.”“아까는 가져가신다면서요.”“그런데 여기서 쓰다.”“다른 빗을 쓰시면 되지요.”“이게 편하다.”“그러면 돌아가실 때까지 쓰시다가 마지막 날 넣으시면 되잖아요.”서화의 움직임이 멈췄다.너무 간단한 답이었다.“아.”마리엘이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아직 떠나시는 것도 아닌데 벌써 일상용품까지 상자에 넣으시면 그날까지 뭘 쓰시려고 그러십니까.”서화는 머쓱한 얼굴로 빗을 다시 꺼냈다. 생각해 보니 며칠 전부터 비슷한 일이 반복되고 있었다. 가져갈 물건을 정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지금도 사용하는 물건까지 하나씩 상자에 넣었다가, 필요해지면 다시 꺼냈다. 돌아갈 날을 준비하는 일이 지금의 생활을 미리 접어버리는 일처럼 변하고 있었던 것이다.서화는 상자 안을 한동안 들여다보다가 그동안 넣어두었던 것 가운데 아르데시아어 연습장도 다시 꺼냈다.마리엘이 물었다. “그것도요?”“공부하다.”“아직
아침 식탁에 앉은 서화는 평소보다 오래 빵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르데시아에 온 뒤로 이미 익숙해진 음식이었고, 처음처럼 포크와 나이프를 어디에 놓아야 하는지 눈치를 볼 필요도 없었지만, 전날 밤 적어 둔 ‘집에 돌아가면 할 일’ 때문인지 오늘따라 하얀 쌀밥이 몹시 생각났다. 갓 지은 밥에서 올라오는 김과 숟가락 끝에 달라붙는 쌀알, 어머니가 간을 약하게 한 국, 아버지가 식사 중에도 옆에 둔 책을 흘끗거리다가 어머니에게 한마디 듣는 모습까지 하나를 떠올리자 다른 기억이 줄줄이 따라왔다.카시안은 맞은편에서 서류를 읽다가 서화가 빵을 들고도 먹지 않는 것을 발견했다. 예전 같았으면 몸이 불편한지부터 물었겠지만, 이제는 그녀가 생각에 잠길 때도 저런 얼굴을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읽던 서류를 내려놓고 잠시 기다린 뒤, 서화가 여전히 빵을 먹지 않자 그제야 입을 열었다.“오늘 빵이 맛없어?”서화가 뒤늦게 고개를 들었다. “아니다. 밥 생각하다.”“밥?”“쌀.”카시안은 잠시 기억을 더듬었다. 서화가 처음 북부에 왔을 때부터 쌀을 찾았던 것을 떠올린 모양이었다. “남부에서 들여온 게 조금 남아 있을 텐데. 가져오라고 할까?”서화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려다 멈췄다. 아르데시아의 쌀은 조선에서 먹던 것과 달랐다. 알이 길고 찰기가 적어 처음 먹었을 때는 같은 이름으로 불러도 되는지 의심했을 정도였다. 그래도 지금은 그것이 싫지 않았다. 조선의 밥을 대신할 수는 없지만, 이곳에서 먹는 쌀은 이곳의 음식으로 받아들이면 됐다.“오늘 저녁. 먹다.”“그렇게 할게.”카시안은 시종에게 당장 특별한 것을 준비하라고 부산을 떨지 않았다. 그저 저녁 식사에 쌀 요리를 넣어달라고 전한 뒤 다시 서류를 들었다. 서화도 빵을 한입 베어 물었다. 빵은 빵대로 맛있었다. 집의 밥이 그립다고 해서 지금 먹는 것을 미워할 이유는 없었다.그 단순한 사실이 오늘은 이상하게 마음에 남았다.⸻아침 식사가 끝난 뒤 에드윈이 들고 온 것은 오래된 비문도, 새로 발견된 기록도 아니었
서화가 적어 둔 세 장의 기록은 다음 날 아침에도 탁자 위에 그대로 놓여 있었다. 장독대와 마루, 사랑방과 뒤주 같은 단어 옆에는 에드윈이 적은 아르데시아어 설명이 빼곡했고, 여백에는 서화가 직접 그린 작은 그림들이 붙어 있었다. 전날 밤에는 그저 집이 그리워서 시작한 일이었는데, 아침 햇빛 아래 다시 펼쳐 보니 뜻밖에도 꽤 훌륭한 생활 기록이 되어 있었다. 에드윈은 그것을 한 장씩 넘겨 보다가 조선어와 아르데시아어를 나란히 적을 수 있도록 새 종이를 가져왔고, 서화는 이번에는 단어를 더 늘리기보다 어제 적은 설명부터 제대로 다듬기로 했다.“장독대. 여기.” 서화가 첫 장을 가리키며 아르데시아어 문장을 천천히 읽다가 한 부분에 선을 그었다. “밖. 아니다. 집 밖이지만…… 집 안.”에드윈이 난감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 “밖인데 안이라고?”“응.”“그럼 안뜰 같은 건가?”서화는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저었다. 장독대가 반드시 안뜰에만 있는 것은 아니었고, 집의 구조에 따라 위치도 달랐다. 중요한 것은 위치보다 그곳을 사용하는 방식이었다. 어머니가 아침마다 항아리 뚜껑을 열어 상태를 살피고, 볕이 좋은 날이면 장을 내놓고, 비가 올 것 같으면 누구보다 먼저 뒤뜰로 나가는 곳. 어린 서화에게는 숨바꼭질을 하다가 몸을 숨기던 장소였고, 조금 자란 뒤에는 약재를 다듬던 어머니 옆에서 콩을 고르던 곳이기도 했다.“그냥 항아리 두는 곳이라고 하면 틀리지는 않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거지?”에드윈의 질문에 서화가 반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물건 설명하면 맞다. 그런데 사는 것 설명하면 부족하다.”에드윈은 그 말을 듣고 자신이 적었던 번역을 지우지 않았다. 대신 그 옆에 작은 표시를 붙이고, 아래에 서화가 설명한 생활 모습을 덧붙였다. 완벽한 대응어가 없으면 억지로 한 단어로 바꾸지 않고, 무엇을 하는 장소인지와 서화의 기억을 함께 남기기로 한 것이다. 그러자 전날까지 단순한 낱말 목록처럼 보이던 종이가 조금씩 다른 모습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물건
윤도겸이 집에 돌아온 것은 해가 완전히 뜬 뒤였다. 대문을 넘는 순간까지만 해도 곧장 방으로 들어가 쓰러질 생각이었는데, 안채 쪽에서 풍기는 익숙한 국 냄새를 맡자 걸음이 저절로 느려졌다. 며칠 동안 왕궁 조사실에서 식은 밥과 데운 국으로 끼니를 때운 탓인지, 집에서 나는 냄새만으로도 긴장이 조금 풀리는 기분이었다. 뒤따라 들어온 윤정헌 역시 별말 없이 사랑채로 향하려 했지만, 도겸은 아버지의 소매를 붙잡았다.“어디 가십니까?”“옷을 갈아입으러 간다.”“그다음에는요?”“씻어야지.”“그다음.”윤정헌이 아들을 돌아보았다. 며칠 동안 제대로 자지 못한 사람답지 않게 도겸의 눈에는 쓸데없이 단호한 빛이 들어 있었다. “밥 먹으셔야 합니다. 어제도 절반밖에 안 드셨습니다. 이건 제가 직접 확인한 사실이고, 조사관 둘과 나인 하나의 독립된 증언도 확보할 수 있습니다.”윤정헌의 얼굴이 아주 천천히 굳었다. “너는 집에 와서도 그 말투를 써야 하느냐?”“아버지가 자꾸 증거를 남기시잖습니까.”“내가 밥을 덜 먹은 게 언제부터 조사 대상이 됐지?”“서화가 알게 되는 순간부터요.”결국 윤정헌은 사랑채로 가지 못했다. 부자가 나란히 안채 식탁에 앉자 집을 지키던 노비들이 오랜만에 안도한 얼굴로 따뜻한 밥과 국을 내왔다. 한연화가 돌아터에 머무는 동안 집 안은 이상할 만큼 조용했다. 원래도 떠들썩한 집은 아니었지만, 어머니가 없고 서화까지 사라진 뒤로는 같은 공간이 전보다 훨씬 넓어진 것 같았다. 도겸은 무심코 맞은편 빈자리를 바라보다가 숟가락을 들었다.서화는 집에 있을 때 저 자리에 앉곤 했다. 아침부터 약초 이야기를 꺼냈다가 아버지에게 밥부터 먹으라는 말을 듣고, 도겸이 반찬을 집어가면 젓가락으로 손등을 때리던 자리였다. 사라진 뒤에도 누구 하나 그 자리를 일부러 비워두자고 한 적은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다른 사람이 앉는 일이 드물었다.윤정헌 역시 잠시 그쪽을 바라봤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국을 한 숟갈 먹었다.도겸이 바로 말했다. “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