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말이 통하지 않는 남자

Author: 유월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8-27 22:50:58

눈보라 속에서.

윤서화는 움직이지 못했다.

『문을 여는 아이야.』

분명 들었다.

그것도 아주 또렷하게.

서화는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누구십니까?”

대답은 없었다.

바람이 나뭇가지를 흔들었다.

후우우웅―

눈발만 거세게 흩날렸다.

“방금 말씀하신 분.”

서화가 다시 물었다.

“어디 계십니까?”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조금 전 눈앞의 남자가 했던 말은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알아들었다.

마치 처음부터 조선말로 말한 것처럼.

『찾았다.』

『문을 여는 아이야.』

문.

서화의 시선이 허리춤으로 내려갔다.

백옥 노리개.

조금 전까지 희미한 빛을 내던 옥은 언제 그랬냐는 듯 잠잠해져 있었다.

서화가 떨리는 손으로 노리개를 감싸 쥐었다.

“어머니…….”

그 순간.

턱.

손목이 붙잡혔다.

“……!”

서화가 놀라 고개를 돌렸다.

쓰러져 있던 남자였다.

카시안의 회색 눈동자가 서화를 향하고 있었다.

초점이 흐렸다.

하지만 경계심만큼은 선명했다.

“……누구냐.”

낮고 갈라진 목소리.

역시 알아들을 수 없었다.

서화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자신의 손목을 내려다봤다.

남자의 손에는 힘이 거의 없었다.

그런데도 놓지 않았다.

“놓으십시오.”

서화가 말했다.

남자의 눈썹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당연히 알아듣지 못했다.

서화는 자신의 손목을 가리킨 다음 남자의 손을 가리켰다.

그리고 다시 말했다.

“놓으십시오.”

카시안은 가만히 그녀를 바라봤다.

서화도 그를 바라봤다.

잠시 후.

손에 들어간 힘이 조금 풀렸다.

서화가 손목을 빼냈다.

“말은 안 통해도 눈치는 있으시군요.”

알아들을 리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다시 그의 상태를 살폈다.

상처가 많았다.

옆구리에 긴 자상이 하나.

왼쪽 어깨에도 깊은 상처가 있었다.

하지만 이상했다.

출혈만으로 이렇게까지 상태가 나빠질 정도는 아니었다.

서화는 다시 맥을 짚었다.

“…….”

이상하다.

역시 이상했다.

맥이 뒤엉켜 있었다.

강하게 뛰었다가 갑자기 끊어질 듯 약해졌다.

그리고 그 사이로.

무언가 다른 흐름이 느껴졌다.

사람의 것이 아닌 것 같은.

서화의 미간이 좁아졌다.

“무엇을 품고 계신 겁니까.”

카시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수 있을 리도 없었다.

서화가 그의 목덜미를 살폈다.

그 순간.

그녀의 손이 멈췄다.

검은 선.

남자의 목 아래에서 쇄골까지 검은 핏줄 같은 것이 뻗어 있었다.

처음에는 멍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꿈틀.

분명 움직였다.

서화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이게.”

귀신.

도깨비.

사기.

어린 시절부터 들어온 이야기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실제로 본 적은 없었다.

당연했다.

그런 것은 이야기 속에나 있는 것이었으니까.

그런데 눈앞에 있는 것은.

아무리 봐도 평범한 병증이 아니었다.

서화는 무의식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카시안의 눈이 움직였다.

그는 서화의 표정을 보고 있었다.

두려움.

그 감정을 알아본 듯했다.

카시안의 입가에 아주 희미한 조소가 스쳤다.

역시.

그런 얼굴이었다.

처음 보는 사람들도 저 흔적을 발견하면 모두 비슷한 표정을 지었다.

두려워하거나.

혐오하거나.

신의 벌을 받은 인간이라며 물러서거나.

그러나.

이상한 동방의 여자는 달랐다.

분명 겁을 먹었다.

그런데 도망치지 않았다.

오히려 다시 다가왔다.

“무섭기는 합니다만.”

서화가 중얼거렸다.

“그렇다고 사람을 죽게 둘 수는 없지 않습니까.”

당연히 카시안에게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었다.

서화는 침통을 열었다.

아까 꽂았던 침 하나가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것을 중심으로 검은 선의 움직임이 조금 느려져 있었다.

우연일까.

확인해야 했다.

서화가 두 번째 침을 집었다.

카시안의 눈빛이 바뀌었다.

“…….”

그가 손을 움직였다.

허리춤.

검.

서화도 그것을 보았다.

“그러시면 안 됩니다.”

카시안의 손이 검 손잡이에 닿았다.

서화가 얼른 그 손등을 내리쳤다.

탁!

카시안의 움직임이 멈췄다.

“…….”

“지금 칼을 뽑으실 힘이 어디 있다고 그러십니까.”

“…….”

“저를 죽이시면 치료해드릴 사람도 없어집니다.”

서화가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제 말을 하나도 못 알아들으시겠지만요.”

카시안은 자신의 손등을 내려다봤다.

맞았다.

지금.

자신이.

손등을 맞은 것 같은데.

회색 눈이 천천히 서화를 향했다.

서화는 이미 그의 팔을 붙잡고 있었다.

“움직이지 마십시오.”

두 번째 침.

세 번째 침.

조심스럽게 혈을 찾았다.

손끝이 떨렸다.

추위 때문만은 아니었다.

서화 역시 두려웠다.

처음 보는 병.

처음 보는 남자.

처음 보는 장소.

무엇 하나 아는 것이 없었다.

그래도.

배운 것은 몸에 남아 있었다.

서화는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침착하자.’

어릴 적 의원에게 처음 침을 배웠을 때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침을 잡은 사람이 떨면 환자가 먼저 안다.

그러니 손부터 진정시키라고.

서화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리고 침을 놓았다.

하나.

둘.

셋.

맥을 다시 확인했다.

조금 느려졌다.

검은 선도.

조금씩 움직임을 멈추고 있었다.

서화의 눈이 커졌다.

“……정말 듣는군.”

카시안 역시 느끼고 있었다.

통증이.

사라지고 있었다.

7년.

처음이었다.

신관들이 신성력을 쏟아부어도.

마법사들이 온갖 마법을 사용해도.

제국 최고의 의원들이 약을 퍼부어도.

잠시 무뎌질 뿐이었다.

완전히 사라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지금.

고작 작은 바늘 몇 개가 몸에 꽂혀 있을 뿐인데.

고요했다.

카시안의 눈빛이 달라졌다.

그가 서화를 바라봤다.

이상한 옷.

검은 머리.

낯선 언어.

본 적 없는 치료법.

그리고.

목에 걸린 옥.

카시안의 시선이 백옥에 머물렀다.

서화가 그 시선을 알아차렸다.

곧바로 노리개를 손으로 감쌌다.

“안 됩니다.”

카시안의 눈썹이 움직였다.

“이건 제 것입니다.”

서화는 백옥을 가슴 쪽으로 끌어당겼다.

어머니의 물건.

무엇이 있어도 빼앗길 수 없었다.

카시안은 그녀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지만 의미 정도는 알아차린 듯했다.

시선을 거두었다.

그 순간.

카시안의 몸에서 힘이 빠졌다.

“……!”

서화가 얼른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정신 차리십시오.”

반응이 없었다.

“여보십시오.”

맥을 짚었다.

살아 있었다.

아까보다 오히려 안정적이었다.

긴장이 풀리며 정신을 잃은 모양이었다.

“하…….”

서화가 그대로 눈밭에 주저앉았다.

그제야 자신의 상태가 느껴졌다.

손바닥은 찢어져 있었고.

옷은 젖어 있었다.

발끝은 감각이 없었다.

무엇보다.

추웠다.

너무 추웠다.

서화는 두 팔로 자신의 몸을 감쌌다.

그리고 다시 주변을 바라봤다.

낯선 숲.

낯선 눈.

낯선 남자.

“…여기가 어디지.”

처음으로.

질문이 입 밖으로 나왔다.

조선의 어느 산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다.

하지만.

서화는 고개를 들었다.

하늘에 떠 있는 달.

그 옆으로.

희미하게 또 하나의 작은 빛이 보였다.

달이라고 하기에는 작고.

별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컸다.

서화는 그것을 한참 바라봤다.

“….”

가슴 깊은 곳에서.

불길한 생각이 올라왔다.

아니다.

그럴 리 없다.

세상은 하나다.

조선이 있고.

청이 있고.

바다 건너 다른 나라들도 있다고 들었다.

아버지가 가진 지도에서 본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달이 둘인 곳은 없었다.

“아니야.”

서화가 작게 말했다.

“아닐 거야.”

백옥 노리개를 움켜쥐었다.

어머니.

아버지.

오라버니.

절벽.

마지막으로 붙잡았던 도겸의 손.

“오라버니.”

목소리가 떨렸다.

서화는 애써 숨을 삼켰다.

울지 말자.

지금 울어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

살아야 한다.

살아서.

찾아야 한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그런데 그 전에.

눈앞의 문제부터 해결해야 했다.

서화가 쓰러진 남자를 바라봤다.

“하필이면.”

한숨이 나왔다.

“이렇게 크실 것은 또 무엇입니까.”

자신보다 머리 하나는 훌쩍 큰 남자였다.

끌고 갈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렇다고 여기 두면 얼어 죽는다.

서화는 주변을 살폈다.

숲 안쪽.

희미하게 바위가 보였다.

그 아래 공간이 있을지도 모른다.

“……해봅시다.”

서화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깨달았다.

“안 됩니다.”

정말 안 됐다.

남자가 너무 무거웠다.

“대체 무엇을 드시고 이렇게 크신 겁니까.”

당연히 대답은 없었다.

“조금만 협조하십시오.”

기절한 사람에게 할 말은 아니었다.

그래도 서화는 포기하지 않았다.

팔을 끌고.

잠시 쉬고.

다시 끌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허억…….”

결국 바위 아래까지 데려왔다.

다행히 작은 공간이 있었다.

바람을 피하기에는 충분했다.

서화는 카시안을 눕혔다.

그리고 주변에서 마른 나뭇가지를 찾았다.

문제는.

불이었다.

부싯돌이 없었다.

서화는 자신의 젖은 옷을 바라봤다.

남자의 옷도 마찬가지였다.

“이러다 둘 다 얼어 죽겠군.”

처음으로 막막했다.

그때.

카시안의 손가락이 움직였다.

서화가 바로 돌아봤다.

“정신이 드십니까?”

회색 눈이 천천히 열렸다.

카시안은 잠시 천장을 바라보다가 몸을 움직였다.

“움직이지 마십시오.”

서화가 그의 어깨를 눌렀다.

카시안의 시선이 그녀에게 향했다.

서화가 손으로 몸을 가리킨 뒤 고개를 저었다.

“안 됩니다.”

카시안은 잠시 그녀를 바라봤다.

그러다 주변을 살폈다.

바위 아래.

쌓여 있는 나뭇가지.

그리고 떨고 있는 서화.

그는 상황을 이해했다.

카시안이 손을 들었다.

“?”

서화가 경계했다.

그의 손끝이 나뭇가지를 향했다.

그리고.

화륵.

불이 붙었다.

“…….”

서화의 눈이 커졌다.

불.

아무것도 없던 곳에서.

불이 생겼다.

서화는 카시안의 손과 불을 번갈아 바라봤다.

카시안이 무표정하게 그녀를 바라봤다.

서화가 아주 조심스럽게 물었다.

“……도사십니까?”

“…….”

“도술을 쓰시는 겁니까?”

당연히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카시안은 그녀의 표정을 보고도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처음으로.

그의 입가가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

웃은 것인지.

서화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불이 피어오르자 조금씩 온기가 돌았다.

서화는 불 가까이 손을 내밀었다.

얼어붙었던 손끝이 아프게 녹았다.

그리고.

배에서 소리가 났다.

꼬르륵.

“…….”

서화가 굳었다.

카시안이 그녀를 봤다.

“…….”

서화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불만 바라봤다.

잠시 후.

꼬르륵.

더 크게.

카시안의 시선이 다시 내려왔다.

서화의 귀가 빨개졌다.

“보지 마십시오.”

카시안은 못 알아들었다.

“사람이 하루쯤 굶으면 배에서 소리가 날 수도 있지 않습니까.”

“…….”

“뭘 그렇게 보십니까.”

카시안이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그리고 허리춤의 작은 주머니를 꺼냈다.

안에서 단단한 무언가를 꺼내 서화에게 내밀었다.

서화가 경계했다.

카시안은 그것을 자신의 입 근처로 가져갔다.

먹는 시늉.

“음식?”

서화가 물었다.

카시안이 그것을 다시 내밀었다.

서화는 잠시 망설이다가 받았다.

냄새를 맡았다.

빵 같은 것이었다.

조금 뜯어 입에 넣었다.

딱딱했다.

그리고.

맛이 없었다.

“….”

서화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카시안이 그것을 보고 있었다.

서화가 애써 씹었다.

“먹을 만합니다.”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살려면 먹어야 했다.

한입.

두입.

먹다 보니.

갑자기 생각났다.

어제 저녁.

어머니가 차려준 밥상.

고기 한 점을 두고 오라버니와 다퉜던 일.

아버지의 웃음.

서화의 움직임이 멈췄다.

“….”

빵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눈앞이 흐려졌다.

안 된다.

울지 말자.

서화는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눈물 한 방울이 손등 위로 떨어졌다.

카시안이 그것을 보았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을 해도 통하지 않을 테니까.

대신.

자신의 외투를 벗었다.

그리고 서화 쪽으로 던졌다.

툭.

서화가 놀라 고개를 들었다.

검은 외투가 무릎 위에 떨어져 있었다.

“…….”

카시안은 이미 시선을 돌리고 있었다.

서화가 외투를 바라봤다.

그리고 남자를 바라봤다.

말은 통하지 않았다.

이름도 몰랐다.

누구인지도 몰랐다.

그런데.

조금 전보다.

아주 조금.

덜 무서웠다.

서화는 외투를 몸에 둘렀다.

“……감사합니다.”

카시안은 알아듣지 못했다.

그래도 서화는 말했다.

“고맙습니다.”

긴 밤이 시작됐다.

서화는 불 옆에 앉아 백옥 노리개를 손에 쥐었다.

반드시 돌아갈 것이다.

어디인지 알아내고.

길을 찾고.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아버지에게.

어머니에게.

오라버니에게.

반드시.

그때.

멀리서.

아우우우―!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서화가 고개를 들었다.

카시안 역시 눈을 떴다.

한 번.

두 번.

이번에는 여러 방향에서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숲 사이.

붉은 눈동자들이 하나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서화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건.”

늑대라고 하기에는.

너무 컸다.

카시안의 손이 검으로 향했다.

서화가 그의 팔을 붙잡았다.

“안 됩니다.”

카시안이 그녀를 바라봤다.

서화는 그의 목덜미를 가리켰다.

검은 선이 다시 조금씩 움직이고 있었다.

싸우면 안 된다.

그런데.

붉은 눈들이 점점 가까워졌다.

카시안은 천천히 일어났다.

비틀거렸지만.

검을 뽑았다.

스릉―

서화가 숨을 삼켰다.

그리고 처음으로.

카시안의 검을 따라 검은 기운이 피어오르는 것을 보았다.

그 순간.

서화의 백옥도 다시 빛났다.

검은 기운.

백옥의 빛.

두 힘이 서로를 알아본 것처럼 동시에 떨렸다.

카시안의 눈이 서화의 노리개로 향했다.

서화 역시 그의 검을 바라봤다.

그리고 두 사람은 아직 몰랐다.

설원에서 우연히 만났다고 생각한 이 순간이.

사실은 사백 년 전부터 이어져온 두 세계의 문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순간이었다는 것을.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Latest chapter

  • 조선에서 온 아씨는 돌아가고 싶다   이곳에서도 기다리는 사람이 생깁니다

    아침이 밝았을 때, 서화는 어젯밤 자신이 했던 생각을 모른 척하기로 했다. 이곳에서도 좋은 것이 생기고 있다. 그 말은 이상할 정도로 오래 마음에 남았다. 마리엘이 가져다준 쌀죽도, 에드윈과 밤늦게까지 기록을 뒤진 일도, 레오넬이 이제는 자신을 볼 때 검부터 잡지 않는 것도. 그리고 무엇보다 카시안이 아주 자연스럽게 자신의 귀환 방법을 함께 찾고 있다는 사실도. 좋은 일이었다. 분명 좋은 일인데. 서화는 자꾸만 그것을 경계하게 되었다. 좋아하게 되면 떠나기 어려워질 것 같아서. 익숙해지면 그만큼 이별이 아파질 것 같아서. 그래서 아침 식사가 끝나자마자 곧장 에드윈을 찾아갔다. 생각할 틈을 만들지 않으면 됐다. 언어를 배우고, 기록을 읽고, 돌아가는 길을 찾으면 된다. “에드윈.” 연구실 문을 열자 안쪽에서 무언가 요란하게 무너졌다. 쾅! “…….” 서화가 멈췄다. 잠시 뒤 책더미 사이에서 에드윈의 머리가 불쑥 올라왔다. “괜찮아!” 서화가 천천히 눈썹을 올렸다. “안 물었습니다.” 조선말이었다. 에드윈은 당연히 알아듣지 못했다. “왜 그런 표정이야?” 서화는 연구실 바닥을 둘러봤다. 책, 종이, 작은 수정구, 마법 도구와 잉크병이 뒤섞여 있었다. 며칠 전보다 더 엉망이었다. 그녀가 손가락으로 바닥을 가리켰다. “위험.” 에드윈이 아래를 내려다봤다. “아.” 그제야 자신도 책 한 권을 밟고 있다는 걸 발견했다. 서화의 표정이 더 싸늘해졌다. 에드윈이 재빨리 발을 뗐다. “책은 안 망가졌어.” 서화는 못 알아들었다. 대신 책을 집어 먼지를 털고 책상 위에 올려놨다. “책.” 그리고 에드윈을 가리켰다. “소중.” “…….” “소중.” 그녀가 다시 강조했다. 며칠 전 배운 단어였다. 에드윈은 어쩐지 혼나는 기분이 들었다. “알았어.” 그가 손을 들었다. “정리하겠습니다.” 서화는 ‘정리’라는 단어를 몰랐지만 에드윈이 책을 치우기 시작하는 것을 보고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 조선에서 온 아씨는 돌아가고 싶다   남쪽의 문을 찾아서

    남쪽 해안에서 사흘 동안 나타났다가 사라진 문.그 기록 하나 때문에 서화는 밤이 늦도록 지도를 떠나지 못했다. 북부에서 남쪽 끝까지 이어진 길 위를 손가락으로 천천히 따라가며 몇 번이고 거리를 가늠했다. 이 세계의 지리를 완전히 익힌 것은 아니었지만, 북부와 남쪽 사이에 얼마나 많은 도시와 산맥, 강이 놓여 있는지는 이제 알 수 있었다. 하루 이틀에 다녀올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그런데도 마음은 이상할 만큼 조급하지 않았다.이전까지의 길은 늘 막혀 있었다. 검은 문을 열라는 목소리, 알 수 없는 대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존재.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줄 때마다 그 끝에는 반드시 찜찜한 무언가가 붙어 있었다.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윤연화가 남긴 길이었다.자신과 같은 조선 사람. 가족을 그리워하면서도 다른 사람을 희생시키지 않으려 했고, 결국 검은 문을 닫은 여자. 그런 사람이 마지막에 남긴 말이었다.문은 하나가 아니란다.서화는 그 말을 믿어보고 싶었다.아니, 믿기만 해서는 안 됐다.확인해야 했다.“남쪽.”서화가 지도 끝을 가리켰다.맞은편에 앉아 있던 에드윈이 피곤한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는 밤새 기록을 뒤진 탓에 머리가 평소보다 더 엉망이었다.“남쪽.”서화가 다시 말했다.그리고 자신의 가슴을 가리켰다.“나.”손가락을 남쪽으로 움직였다.“가다.”에드윈의 얼굴이 즉시 굳었다.“안 돼.”서화가 눈을 가늘게 떴다.그 단어는 너무 잘 안다.“왜?”“멀어.”에드윈이 지도를 길게 쓸었다.“아주 멀어.”서화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고개를 끄덕였다.“알다.”“그리고 위험해.”그가 산맥과 숲을 가리켰다. 이어 마수를 뜻하는 그림까지 급히 그렸다. 그제야 서화는 그의 걱정을 이해했다.“마수.”“그래.”“기사.”서화가 손으로 검을 쥔 시늉을 했다.“같이.”에드윈이 눈을 크게 떴다.“지금 호위까지 데려가겠다고?”문장이 길어지자 서화는 알아듣지 못했다. 하지만 에드윈의 표정만으로 충분했다. 그는 자신의

  • 조선에서 온 아씨는 돌아가고 싶다   문 너머의 것은 돌아가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서화는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어둠은 사라졌다.가족의 모습도.도겸의 손도.전부.백옥 노리개는 다시 평범한 빛을 되찾았다.그런데.심장은 아직 빠르게 뛰고 있었다.“…….”서화가 천천히 손을 펼쳤다.손바닥이 축축했다.조금 전까지.그 너머에 오라버니의 손이 있었다.닿지는 않았지만.분명히 봤다.아버지.어머니.오라버니.모두 살아 있었다.자신을 찾고 있었다.그리고.자신의 목소리를 들었다.그 사실만으로도 다리가 풀릴 것 같았다.기뻐서.당장 울고 싶었다.그런데.그보다 먼저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문만 열면 모든 것이 끝날 텐데.』그 존재는.자신을 집으로 돌려보내려는 것이 아니었다.계속해서 문을 열라고 했다.대가가 무엇인지 묻자 대답하지 않았다.조선이 위험한지.이 세계가 위험한지.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그리고 자신이 물었다.당신, 문 너머에서 나오고 싶은 겁니까?대답은 없었다.하지만.그 침묵이 이상하리만큼 분명했다.서화가 백옥 노리개를 움켜쥐었다.“저를 이용하려는 거군요.”처음 설원에서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드디어.』『찾았다.』『문을 여는 아이야.』그때는 뜻을 몰랐다.하지만 이제는 알 것 같았다.문을 여는 아이.자신을 그렇게 불렀다.처음부터.기다리고 있었다.서화가 자리에서 일어났다.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늦은 밤.대공성의 복도는 조용했다.경비 기사들이 서화를 발견하고 놀랐다.“서화 아가씨?”마리엘이 그렇게 부르기 시작한 뒤.성 안의 몇몇 사람들도 어색하게 그 호칭을 따라 하고 있었다.서화는 기사에게 물었다.“카시안.”그리고 손가락으로 주변을 가리켰다.“어디?”기사가 잠깐 망설였다.이 시간이라면 대공은 집무실에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그가 방향을 알려줬다.서화는 곧장 걸었다.집무실 앞.레오넬이 있었다.“서화?”그는 서화의 얼굴을 보는 순간 웃음기를 거뒀다.“무슨 일이지?”서화는 긴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대신.“카시안.”문을 가리켰다.“지금.

  • 조선에서 온 아씨는 돌아가고 싶다   첫 번째 여인의 이름

    윤연화.서화는 날이 밝을 때까지 그 이름을 바라보았다.백옥 위에 나타났던 글자는 이미 사라진 뒤였다.다시 아무리 들여다봐도.평범한 흰 옥일 뿐이었다.그런데도 서화는 눈을 떼지 못했다.“윤연화…….”어젯밤.분명히 보았다.윤.연.화.그리고.너의 피가 처음 문을 닫았다.“피.”서화가 천천히 자신의 손목을 내려다봤다.핏줄 위로 손가락을 가져갔다.사백 년 전 조선에서 이 세계로 건너왔던 여인.자신과 같은 백옥 노리개를 가지고 있던 여자.그리고.자신의 피와 연결되어 있다는 존재의 말.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많은 것이 겹쳤다.“우리 집안 사람이라는 뜻인가.”하지만 이상했다.서화는 자신의 집안에 그런 이야기가 있다는 말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윤씨 집안은 오래된 양반가였다.족보도 있었다.선대에 관한 기록도 적지 않았다.어릴 때 아버지에게 가계에 관해 배운 적도 있었다.그런데.이세계에 다녀온 여인이라니.그런 이야기를 들었다면 잊을 리 없다.더구나 백옥 노리개는.“어머니께서 주셨는데.”서화의 손이 멈췄다.이상하다.백옥 노리개는 아버지의 윤씨 가문에서 내려온 것이 아니다.어머니 한연화가.외가에서 물려받은 것이다.그런데 이름은.윤연화.“…….”서화의 눈빛이 달라졌다.같은 ‘연화’.그것까지 우연일까?“아니야.”무언가 있다.자신이 모르는 이야기가.서화는 침상에서 내려왔다.생각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확인해야 해.”누구에게?이 세계에서 사백 년 전의 기록을 읽을 수 있는 사람.한 명이 바로 떠올랐다.“에드윈.”쾅!연구실 문이 열렸다.책상에 엎드려 잠들어 있던 에드윈이 펄쩍 뛰었다.“뭐야!”서화가 들어왔다.“에드윈.”“서화?”그는 눈을 비볐다.창밖은 아직 완전히 밝아지지도 않았다.“지금 몇 시인지 알아?”서화는 절반도 못 알아들었다.그러나.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종이를 꺼냈다.그리고 붓을 들었다.에드윈이 멍하니 바라봤다.서화가 한자를 적었다.尹蓮

  • 조선에서 온 아씨는 돌아가고 싶다   돌아가는 길에는 대가가 필요합니다

    희망이 생긴 날 밤. 서화는 오히려 잠들지 못했다. 사백 년 전. 조선에서 이곳으로 온 여인이 있었다. 그리고. 돌아갔다. 그 사실 하나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돌아갔다…….” 서화는 침상 위에 앉아 몇 번이나 같은 말을 되뇌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막연했다. 돌아가야 한다. 반드시 돌아갈 것이다. 그렇게 마음먹었지만 정작 방법은 하나도 몰랐다. 그러나 이제는 달랐다. 길이 있었다. 누군가 이미 그 길을 지나갔다. 그렇다면. 자신도 찾을 수 있다. 서화는 품에서 백옥 노리개를 꺼냈다. 달빛 아래. 옥은 다시 평범한 흰빛으로 돌아와 있었다. “당신이 그분을 돌려보낸 것입니까?” 물론 대답은 없었다. “그렇다면 저도…….” 말을 멈췄다. 어젯밤 들었던 목소리가 떠올랐다. 『서화야.』 도겸의 목소리. 꿈이었을까. 아니. 서화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너무 선명했다. 오라버니 특유의 말투까지. 어릴 적부터 수없이 들어온 목소리를 잘못 알아들을 리 없었다. “오라버니도 찾고 계시는군요.” 입가에 작은 웃음이 번졌다. 그러다 금세 사라졌다. ‘손.’ 꿈에서 본 도겸의 손은 피투성이였다. 서화가 눈을 감았다. 절벽. 자신의 손을 붙잡고 있던 오라버니. 마지막 순간. 자신을 놓친 사람. “……또 자기 탓을 하고 계시겠지.” 그 사람이라면 그럴 것이다. 어릴 때부터 그랬다. 서화가 나무에서 떨어져 무릎을 다쳤을 때도. 자신이 조금만 빨리 왔으면 막았을 거라고 했다. 서화가 감기에 걸렸을 때조차 전날 함께 밖에 나간 자기 탓이라 우겼다. 그런 오라버니가. 자신의 손을 놓쳤다. “바보.” 서화의 목소리가 떨렸다. “오라버니 탓이 아닌데.” 노리개를 꼭 쥐었다. “그러니까 제가 직접 가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살아 있다고. 괜찮다고. 오라버니가 놓은 것이 아니라고. 그리고. “그동안 얼마나 고생했는지도 전부 따질 겁니다.” 눈물이 맺혔지만. 서화는 웃었다. 그날

  • 조선에서 온 아씨는 돌아가고 싶다   오라버니는 저를 찾고 있을 겁니다

    문.門.한연화는 한참 동안 함 안쪽을 바라보았다.잘못 본 것이 아니었다.희미한 붉은빛이.분명 글자의 형태를 이루고 있었다.“……여보.”연화의 목소리가 떨렸다.방 한쪽에서 젖은 도포를 갈아입던 윤정헌이 고개를 돌렸다.“왜 그러오?”“이것 좀…… 보세요.”정헌이 다가왔다.그 뒤로 도겸도 따라왔다.도겸의 손은 엉망이었다.절벽 아래의 돌과 흙을 맨손으로 헤집은 탓에 손톱이 깨지고 손가락 곳곳에서 피가 배어 있었다.연화가 그 손을 발견했다.“도겸아.”그러나 도겸은 자신의 손을 감췄다.“괜찮습니다.”“그게 어찌 괜찮은 손이니.”“어머니.”도겸이 함을 가리켰다.“먼저 이것부터 보십시오.”연화의 입술이 굳게 다물렸다.정헌이 함을 들어 올렸다.딸에게 백옥 노리개를 건넬 때까지만 해도 아무것도 없었다.평범한 나무함이었다.연화의 어머니에게서.그리고 그 어머니에게서.몇 대를 거쳐 내려왔던 것.“문.”정헌이 글자를 읽었다.“門이구려.”도겸의 얼굴이 굳었다.“문이라고요?”“그래.”“아버지.”도겸이 급하게 정헌을 바라봤다.“제가 봤던 것도…….”말이 끊겼다.그날의 기억이 떠올랐다.서화의 손.자신의 손가락 사이에서 미끄러지던 손.그리고 절벽 아래.분명히 열렸던 검은 무언가.처음에는 자신도 믿을 수 없었다.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으니까.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서화는 떨어지지 않았다.사라졌다.도겸이 함을 움켜쥐었다.“문이었습니다.”정헌이 아들을 바라봤다.“무엇이?”“서화 아래에 생긴 것 말입니다.”도겸의 숨이 거칠어졌다.“검은 구멍처럼 보였지만…… 지금 생각하면 문이었습니다.”연화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도겸아.”“서화는 그 안으로 들어갔습니다.”“…….”“아니.”도겸이 이를 악물었다.“끌려갔습니다.”정적이 내려앉았다.빗물이 처마 끝에서 떨어졌다.뚝.뚝.뚝.정헌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평생 학문을 익힌 사람이었다.괴력난신을 함부로 입에 올리는 것을

More Chapters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