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남쪽 해안에서 사흘 동안 나타났다가 사라진 문.그 기록 하나 때문에 서화는 밤이 늦도록 지도를 떠나지 못했다. 북부에서 남쪽 끝까지 이어진 길 위를 손가락으로 천천히 따라가며 몇 번이고 거리를 가늠했다. 이 세계의 지리를 완전히 익힌 것은 아니었지만, 북부와 남쪽 사이에 얼마나 많은 도시와 산맥, 강이 놓여 있는지는 이제 알 수 있었다. 하루 이틀에 다녀올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그런데도 마음은 이상할 만큼 조급하지 않았다.이전까지의 길은 늘 막혀 있었다. 검은 문을 열라는 목소리, 알 수 없는 대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존재.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줄 때마다 그 끝에는 반드시 찜찜한 무언가가 붙어 있었다.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윤연화가 남긴 길이었다.자신과 같은 조선 사람. 가족을 그리워하면서도 다른 사람을 희생시키지 않으려 했고, 결국 검은 문을 닫은 여자. 그런 사람이 마지막에 남긴 말이었다.문은 하나가 아니란다.서화는 그 말을 믿어보고 싶었다.아니, 믿기만 해서는 안 됐다.확인해야 했다.“남쪽.”서화가 지도 끝을 가리켰다.맞은편에 앉아 있던 에드윈이 피곤한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는 밤새 기록을 뒤진 탓에 머리가 평소보다 더 엉망이었다.“남쪽.”서화가 다시 말했다.그리고 자신의 가슴을 가리켰다.“나.”손가락을 남쪽으로 움직였다.“가다.”에드윈의 얼굴이 즉시 굳었다.“안 돼.”서화가 눈을 가늘게 떴다.그 단어는 너무 잘 안다.“왜?”“멀어.”에드윈이 지도를 길게 쓸었다.“아주 멀어.”서화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고개를 끄덕였다.“알다.”“그리고 위험해.”그가 산맥과 숲을 가리켰다. 이어 마수를 뜻하는 그림까지 급히 그렸다. 그제야 서화는 그의 걱정을 이해했다.“마수.”“그래.”“기사.”서화가 손으로 검을 쥔 시늉을 했다.“같이.”에드윈이 눈을 크게 떴다.“지금 호위까지 데려가겠다고?”문장이 길어지자 서화는 알아듣지 못했다. 하지만 에드윈의 표정만으로 충분했다. 그는 자신의
서화는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어둠은 사라졌다.가족의 모습도.도겸의 손도.전부.백옥 노리개는 다시 평범한 빛을 되찾았다.그런데.심장은 아직 빠르게 뛰고 있었다.“…….”서화가 천천히 손을 펼쳤다.손바닥이 축축했다.조금 전까지.그 너머에 오라버니의 손이 있었다.닿지는 않았지만.분명히 봤다.아버지.어머니.오라버니.모두 살아 있었다.자신을 찾고 있었다.그리고.자신의 목소리를 들었다.그 사실만으로도 다리가 풀릴 것 같았다.기뻐서.당장 울고 싶었다.그런데.그보다 먼저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문만 열면 모든 것이 끝날 텐데.』그 존재는.자신을 집으로 돌려보내려는 것이 아니었다.계속해서 문을 열라고 했다.대가가 무엇인지 묻자 대답하지 않았다.조선이 위험한지.이 세계가 위험한지.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그리고 자신이 물었다.당신, 문 너머에서 나오고 싶은 겁니까?대답은 없었다.하지만.그 침묵이 이상하리만큼 분명했다.서화가 백옥 노리개를 움켜쥐었다.“저를 이용하려는 거군요.”처음 설원에서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드디어.』『찾았다.』『문을 여는 아이야.』그때는 뜻을 몰랐다.하지만 이제는 알 것 같았다.문을 여는 아이.자신을 그렇게 불렀다.처음부터.기다리고 있었다.서화가 자리에서 일어났다.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늦은 밤.대공성의 복도는 조용했다.경비 기사들이 서화를 발견하고 놀랐다.“서화 아가씨?”마리엘이 그렇게 부르기 시작한 뒤.성 안의 몇몇 사람들도 어색하게 그 호칭을 따라 하고 있었다.서화는 기사에게 물었다.“카시안.”그리고 손가락으로 주변을 가리켰다.“어디?”기사가 잠깐 망설였다.이 시간이라면 대공은 집무실에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그가 방향을 알려줬다.서화는 곧장 걸었다.집무실 앞.레오넬이 있었다.“서화?”그는 서화의 얼굴을 보는 순간 웃음기를 거뒀다.“무슨 일이지?”서화는 긴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대신.“카시안.”문을 가리켰다.“지금.
윤연화.서화는 날이 밝을 때까지 그 이름을 바라보았다.백옥 위에 나타났던 글자는 이미 사라진 뒤였다.다시 아무리 들여다봐도.평범한 흰 옥일 뿐이었다.그런데도 서화는 눈을 떼지 못했다.“윤연화…….”어젯밤.분명히 보았다.윤.연.화.그리고.너의 피가 처음 문을 닫았다.“피.”서화가 천천히 자신의 손목을 내려다봤다.핏줄 위로 손가락을 가져갔다.사백 년 전 조선에서 이 세계로 건너왔던 여인.자신과 같은 백옥 노리개를 가지고 있던 여자.그리고.자신의 피와 연결되어 있다는 존재의 말.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많은 것이 겹쳤다.“우리 집안 사람이라는 뜻인가.”하지만 이상했다.서화는 자신의 집안에 그런 이야기가 있다는 말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윤씨 집안은 오래된 양반가였다.족보도 있었다.선대에 관한 기록도 적지 않았다.어릴 때 아버지에게 가계에 관해 배운 적도 있었다.그런데.이세계에 다녀온 여인이라니.그런 이야기를 들었다면 잊을 리 없다.더구나 백옥 노리개는.“어머니께서 주셨는데.”서화의 손이 멈췄다.이상하다.백옥 노리개는 아버지의 윤씨 가문에서 내려온 것이 아니다.어머니 한연화가.외가에서 물려받은 것이다.그런데 이름은.윤연화.“…….”서화의 눈빛이 달라졌다.같은 ‘연화’.그것까지 우연일까?“아니야.”무언가 있다.자신이 모르는 이야기가.서화는 침상에서 내려왔다.생각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확인해야 해.”누구에게?이 세계에서 사백 년 전의 기록을 읽을 수 있는 사람.한 명이 바로 떠올랐다.“에드윈.”쾅!연구실 문이 열렸다.책상에 엎드려 잠들어 있던 에드윈이 펄쩍 뛰었다.“뭐야!”서화가 들어왔다.“에드윈.”“서화?”그는 눈을 비볐다.창밖은 아직 완전히 밝아지지도 않았다.“지금 몇 시인지 알아?”서화는 절반도 못 알아들었다.그러나.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종이를 꺼냈다.그리고 붓을 들었다.에드윈이 멍하니 바라봤다.서화가 한자를 적었다.尹蓮
희망이 생긴 날 밤. 서화는 오히려 잠들지 못했다. 사백 년 전. 조선에서 이곳으로 온 여인이 있었다. 그리고. 돌아갔다. 그 사실 하나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돌아갔다…….” 서화는 침상 위에 앉아 몇 번이나 같은 말을 되뇌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막연했다. 돌아가야 한다. 반드시 돌아갈 것이다. 그렇게 마음먹었지만 정작 방법은 하나도 몰랐다. 그러나 이제는 달랐다. 길이 있었다. 누군가 이미 그 길을 지나갔다. 그렇다면. 자신도 찾을 수 있다. 서화는 품에서 백옥 노리개를 꺼냈다. 달빛 아래. 옥은 다시 평범한 흰빛으로 돌아와 있었다. “당신이 그분을 돌려보낸 것입니까?” 물론 대답은 없었다. “그렇다면 저도…….” 말을 멈췄다. 어젯밤 들었던 목소리가 떠올랐다. 『서화야.』 도겸의 목소리. 꿈이었을까. 아니. 서화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너무 선명했다. 오라버니 특유의 말투까지. 어릴 적부터 수없이 들어온 목소리를 잘못 알아들을 리 없었다. “오라버니도 찾고 계시는군요.” 입가에 작은 웃음이 번졌다. 그러다 금세 사라졌다. ‘손.’ 꿈에서 본 도겸의 손은 피투성이였다. 서화가 눈을 감았다. 절벽. 자신의 손을 붙잡고 있던 오라버니. 마지막 순간. 자신을 놓친 사람. “……또 자기 탓을 하고 계시겠지.” 그 사람이라면 그럴 것이다. 어릴 때부터 그랬다. 서화가 나무에서 떨어져 무릎을 다쳤을 때도. 자신이 조금만 빨리 왔으면 막았을 거라고 했다. 서화가 감기에 걸렸을 때조차 전날 함께 밖에 나간 자기 탓이라 우겼다. 그런 오라버니가. 자신의 손을 놓쳤다. “바보.” 서화의 목소리가 떨렸다. “오라버니 탓이 아닌데.” 노리개를 꼭 쥐었다. “그러니까 제가 직접 가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살아 있다고. 괜찮다고. 오라버니가 놓은 것이 아니라고. 그리고. “그동안 얼마나 고생했는지도 전부 따질 겁니다.” 눈물이 맺혔지만. 서화는 웃었다. 그날
문.門.한연화는 한참 동안 함 안쪽을 바라보았다.잘못 본 것이 아니었다.희미한 붉은빛이.분명 글자의 형태를 이루고 있었다.“……여보.”연화의 목소리가 떨렸다.방 한쪽에서 젖은 도포를 갈아입던 윤정헌이 고개를 돌렸다.“왜 그러오?”“이것 좀…… 보세요.”정헌이 다가왔다.그 뒤로 도겸도 따라왔다.도겸의 손은 엉망이었다.절벽 아래의 돌과 흙을 맨손으로 헤집은 탓에 손톱이 깨지고 손가락 곳곳에서 피가 배어 있었다.연화가 그 손을 발견했다.“도겸아.”그러나 도겸은 자신의 손을 감췄다.“괜찮습니다.”“그게 어찌 괜찮은 손이니.”“어머니.”도겸이 함을 가리켰다.“먼저 이것부터 보십시오.”연화의 입술이 굳게 다물렸다.정헌이 함을 들어 올렸다.딸에게 백옥 노리개를 건넬 때까지만 해도 아무것도 없었다.평범한 나무함이었다.연화의 어머니에게서.그리고 그 어머니에게서.몇 대를 거쳐 내려왔던 것.“문.”정헌이 글자를 읽었다.“門이구려.”도겸의 얼굴이 굳었다.“문이라고요?”“그래.”“아버지.”도겸이 급하게 정헌을 바라봤다.“제가 봤던 것도…….”말이 끊겼다.그날의 기억이 떠올랐다.서화의 손.자신의 손가락 사이에서 미끄러지던 손.그리고 절벽 아래.분명히 열렸던 검은 무언가.처음에는 자신도 믿을 수 없었다.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으니까.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서화는 떨어지지 않았다.사라졌다.도겸이 함을 움켜쥐었다.“문이었습니다.”정헌이 아들을 바라봤다.“무엇이?”“서화 아래에 생긴 것 말입니다.”도겸의 숨이 거칠어졌다.“검은 구멍처럼 보였지만…… 지금 생각하면 문이었습니다.”연화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도겸아.”“서화는 그 안으로 들어갔습니다.”“…….”“아니.”도겸이 이를 악물었다.“끌려갔습니다.”정적이 내려앉았다.빗물이 처마 끝에서 떨어졌다.뚝.뚝.뚝.정헌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평생 학문을 익힌 사람이었다.괴력난신을 함부로 입에 올리는 것을
아침이 밝았다.서화는 거의 잠들지 못했다.낯선 침상은 지나치게 푹신했고.이불은 따뜻했으며.방 안에는 밤새 불이 꺼지지 않았다.그런데도 눈을 감을 수가 없었다.눈을 감으면.절벽이 보였다.“서화야!”빗물에 젖은 오라버니의 얼굴.자신을 붙잡고 있던 손.조금씩 미끄러지던 손가락.그리고.마지막 순간.“오라버니!”서화가 눈을 떴다.“…….”낯선 천장.잠시.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그러다 모든 것이 한꺼번에 돌아왔다.설원.검은 옷을 입은 남자.알아들을 수 없는 말.거대한 성.두 개의 달.그리고.조선이 없는 지도.서화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밤새 손에 쥐고 있었던 백옥 노리개가 손바닥 안에 있었다.“……꿈이 아니었구나.”꿈이기를 바랐던 모양이다.아침에 눈을 뜨면 자신의 방이고.밖에서는 어머니가 부르고.사랑채에서는 아버지가 책장을 넘기는 소리가 들리고.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 도겸이.‘언제까지 잘 거냐.’하고 놀려주기를.서화는 한동안 노리개만 내려다봤다.그러다 손등으로 눈가를 문질렀다.“안 돼.”울 시간에 하나라도 더 알아봐야 한다.아버지가 그랬다.모르는 것이 있다면 두려워하기 전에 먼저 알아보라고.‘여기가 어디인지.’‘어떻게 왔는지.’‘그리고.’서화가 노리개를 꼭 쥐었다.‘어떻게 돌아갈 수 있는지.’아무것도 모른다면.하나씩 알아내면 된다.서화는 침상에서 내려왔다.그리고 곧 문제가 생겼다.“…….”어제 마리엘이 가져다준 옷.다시 봐도 익숙하지 않았다.긴 치마까지는 괜찮았다.문제는 위였다.“어찌 목을 이렇게…….”서화가 옷을 들고 심각하게 고민하던 순간.똑똑.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예.”문이 열렸다.마리엘이었다.그녀는 서화가 아직 속옷 차림인 것을 보고 상황을 금세 이해했다.그리고 침상 위의 옷을 가리켰다.서화는 고개를 저었다.“못 입겠습니다.”마리엘이 고개를 갸웃했다.서화는 옷의 목 부분을 가리켰다.그다음 자신의 목 아래를 가리고 다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