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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화야.”
어머니의 목소리가 안채에서 들려왔다. “예, 어머니.” “그 책도 가져갈 셈이냐?” 윤서화는 자신의 품에 안긴 책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잠시 고민했다. “…예.” “아까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느냐.” “그랬습니까?” “그랬지.” 한연화는 딸의 뒤에 놓인 짐을 바라보았다. 옷을 담은 함 하나. 장신구와 자잘한 물건을 담은 함 하나. 그리고. 책을 담은 궤짝이 셋. 연화의 눈썹이 가늘게 올라갔다. “서화야.” “예.” “우리가 이사를 가는 것이지 서책방을 옮기는 것이 아니란다.” “하지만 어머니.” 서화가 제법 심각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옷은 다시 지을 수 있지 않습니까.” “그래.” “장신구도 없어도 됩니다.” “그렇지.” “하지만 책은 다시 구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논리가 아주 정연했다. 연화가 말문을 잃은 사이. 뒤쪽에서 웃음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 서화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문가에 윤도겸이 기대어 서 있었다. “오라버니.” “그래. 책 귀신아.” “책 귀신이라니요.” “틀린 말이냐?” 도겸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궤짝 하나를 열었다. “어디 보자.” “잠깐만요.” 서화가 급히 막으려고 했지만 늦었다. 도겸의 손이 책 한 권을 집어 들었다. 그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윤서화.” 서화가 시선을 피했다. “예.” “이거 내 책인데?” “그렇습니까?” “그렇습니까?” 도겸이 기가 막힌다는 듯 웃었다. “내가 지난 사흘을 찾아다닌 책이다.” “그러셨습니까?” “그런데 왜 네 짐에 들어 있지?” “책에도 좋은 주인을 고를 권리가 있지 않겠습니까.” “이게 정말.” 도겸이 서화의 머리를 손바닥으로 눌렀다. “오라버니!” “도둑이 따로 없군.” “놓으십시오!” “싫다.” “어머니!” 연화는 말리지 않았다. 오히려 웃고 있었다. “둘 다 그만하거라. 내일이면 길을 떠나야 하는데 짐을 다시 풀 생각이냐?” 그 말에. 두 남매의 움직임이 동시에 멈췄다. 내일. 그 한마디가 방 안에 잠시 내려앉았다. 내일이면 이 집을 떠난다. 서화가 태어나고 자란 집이었다. 스물두 해. 한 번도 이곳이 자신의 집이 아닌 적이 없었다. 하지만 내일부터는 다른 사람의 집이 된다. 가세가 기울기 시작한 것은 몇 해 전부터였다. 아버지 윤정헌의 벼슬길이 막혔다. 그다음에는 녹봉이 줄었다. 토지를 조금씩 팔았고. 집에서 일하던 사람들도 하나둘 내보냈다. 그리고 결국 몇 달 전. 아버지가 파직되었다. 죄목은 관청의 재물을 사사로이 취했다는 것이었다. 서화는 믿지 않았다. 도겸도 믿지 않았다. 어머니 역시 믿지 않았다. 아버지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도 믿지 않을 일이었다. 윤정헌은 남의 붓 하나조차 함부로 가져오지 않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진실과 판결은 언제나 같은 방향으로 흐르는 것이 아니었다. 권세를 가진 자가 있었다. 그리고 아버지는 그 사람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뿐이었다. 관직을 잃고. 재산 일부를 빼앗겼다. 그래서 윤씨 가족은 한양을 떠나기로 했다. 그런데도. 이상할 정도로 집안은 평온했다. “그래도.” 도겸이 책을 서화에게 다시 던져주었다. “내 책은 내놔.” 서화가 책을 꼭 끌어안았다. “싫습니다.” “윤서화.” “먼저 읽고 돌려드리겠습니다.” “그 말을 석 달 전에 들었다.” “이번에는 정말입니다.” “네 정말은 믿지 않는다.” “오라버니.” “왜.” “쪼잔하십니다.” “뭐?” 연화가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그만하거라.” 그때였다. “무엇이 그리 재미있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세 사람이 동시에 문 쪽을 바라보았다. 윤정헌이 서 있었다. 평상복 차림이었다. 관복을 입지 않은 아버지의 모습에 아직도 서화는 가끔 낯선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정헌은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아버지.” 서화가 얼른 일어났다. 정헌이 방 안을 들여다봤다. 그리고 책 궤짝 셋을 발견했다. “…서화야.” “예.” “책이 많구나.” “필요한 것만 골랐습니다.” 도겸이 코웃음을 쳤다. “저게 필요한 것만 고른 거래요.” 서화가 오라버니를 노려보았다. 정헌이 수염을 쓰다듬었다. “배우고자 하는 마음이 좋은 것이지.” 서화의 표정이 금세 밝아졌다. “역시 아버지십니다.” “보십시오. 저래서 서화가 버릇이 나빠진 겁니다.” 도겸이 투덜거렸다. 정헌이 아들을 바라보았다. “그러는 너는 짐을 다 쌌느냐?” “….” “도겸아?” “…지금 가보겠습니다.” 도겸이 슬그머니 방을 빠져나갔다. 서화가 작게 웃었다. “오라버니도 아직 하나도 하지 않았군요.” “그런 모양이구나.” 연화가 한숨을 쉬었다. “부자가 똑같습니다.” “부자라니.” 정헌이 억울한 얼굴을 했다. “나는 가져갈 것이 많지 않소.” 연화가 남편을 빤히 바라보았다. “사랑채의 책은요?” “….” 이번에는 서화가 웃었다. “아버지.” “왜 그러느냐.” “어서 가보셔야겠습니다.” 정헌이 헛기침했다. “그래야겠구나.” 그렇게 돌아서는 아버지를 보며. 서화는 오래 웃었다. 그날 저녁. 가족은 마지막으로 마루에 둘러앉았다. 평소와 다를 것 없는 밥상이었다. 아니. 조금 달랐다. 서화가 좋아하는 고기반찬이 올라와 있었다. “어머니.” 서화가 바로 알아차렸다. “오늘 무슨 날입니까?” “왜?” “고기가 있습니다.” “고기가 있으면 안 되느냐?” “요즘은 아껴야 한다고 하셨잖아요.” 연화가 태연하게 밥을 떴다. “내일 길을 떠나는데 든든하게 먹어야지.” 서화는 더 말하지 않았다. 대신 고기를 한 점 집었다. 그 순간. 옆에서 젓가락 하나가 빠르게 움직였다. 탁. 서화의 고기가 사라졌다. “….” 서화가 천천히 옆을 보았다. 도겸이 아주 태연하게 고기를 씹고 있었다. “오라버니.” “왜.” “방금 무엇을 하셨습니까?” “밥을 먹었다.” “제 것이었습니다.” “반찬에 네 이름이 적혀 있었느냐?” “분명 제가 집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내 입에 있지.” 서화의 눈이 가늘어졌다. 도겸이 웃었다. “억울하면 빨리 먹든가.” 다음 순간. 마지막 남은 고기 한 점을 향해 두 사람의 젓가락이 동시에 움직였다. 탁! 탁! 그리고. 서화가 먼저 집었다. 그녀가 승리한 표정으로 고기를 입에 넣었다. 도겸의 얼굴이 굳었다. “너.” “왜 그러십니까?” 서화가 고기를 꼭꼭 씹었다. “억울하시면 빨리 드시지 그러셨습니까.” 정헌이 결국 크게 웃었다. 연화도 입을 가리고 웃었다. 도겸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짓다가 결국 따라 웃었다. 서화도 웃었다. 그날의 저녁은. 그렇게 평범했다. 너무 평범해서. 서화는 그 순간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알지 못했다. 밤이 깊었다. 모두 잠든 뒤에도 서화는 잠들지 못했다. 결국 저고리를 하나 더 걸치고 밖으로 나왔다. 마루 끝에 앉았다. 달빛이 마당을 비추고 있었다. 오래된 감나무. 어머니가 가꾸던 작은 화단. 어릴 적 넘어져 무릎을 깨뜨렸던 돌계단. 눈을 감아도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잠이 오지 않느냐?” 서화가 뒤를 돌아보았다. “아버지.” 정헌이 천천히 걸어왔다. 그리고 딸의 옆에 앉았다. 한동안 두 사람 모두 말이 없었다. “아쉽습니다.” 서화가 먼저 말했다. “무엇이?” “이 집을 떠나는 것이요.” 정헌은 대답하지 않았다. 서화가 마당을 바라보았다. “저 감나무에서 오라버니가 떨어졌던 것 기억하십니까?” “기억하지.” “울었습니다.” “네 오라비는 울지 않았다고 주장하더구나.” “제가 봤는데요.” 정헌이 웃었다. 서화도 웃었다. “어머니와 처음 꽃을 심었던 곳도 저기입니다.” “그래.” “아버지께 처음 글자를 배운 것도 이 집이고요.” “네가 먹을 갈아놓고 졸았지.” “그건 아주 어릴 때입니다.” “아비에게는 얼마 전 같구나.” 서화의 웃음이 조금씩 사라졌다. “아버지.” “그래.” “…괜찮으십니까?” 정헌은 무엇을 묻는지 알고 있었다. 관직. 명예. 집. 그동안 잃어버린 모든 것. “괜찮다.” 대답은 간단했다. “정말이십니까?” “서화야.” 정헌이 딸을 바라보았다. “아비가 벼슬을 잃었다고 해서 네 아비가 아닌 것이 되더냐?” 서화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이 집을 잃었다고 네 어머니가 네 어머니가 아닌 것이 되느냐?” “아닙니다.” “도겸이 네 오라비가 아닌 것이 되고?” 서화가 조금 웃었다. “그랬으면 좋을 때도 있습니다.” 정헌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건 도겸에게 말하지 말거라.” “이미 알고 있을 겁니다.” 잠시 후. 정헌이 다시 마당을 바라보았다. “집이 우리를 가족으로 만들어준 것은 아니란다.” 서화가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네 어머니가 있고.” 천천히. “네 오라비가 있고.” 그리고. “네가 있고, 내가 있다.” 정헌이 웃었다. “그러니 어디를 가든 다시 집이 되겠지.” 서화는 한참 말이 없었다. 그러다 조용히 아버지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예.” 그날 밤. 서화는 그것을 믿었다. 내일 이 집을 떠나더라도. 어디로 가더라도. 가족이 함께라면 다시 집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다음 날. 비가 내렸다. 가족이 한양을 떠난 지 반나절쯤 지났을 때였다. 산길로 접어들면서 빗줄기가 굵어졌다. 서화는 말 위에서 삿갓을 조금 더 눌러썼다. “서화야.” 앞서가던 도겸이 돌아보았다. “괜찮으냐?” “예.” “힘들면 말해.” “오라버니나 앞을 보십시오.” “걱정해줘도.” 그 순간이었다. 피잉―! 무언가 공기를 찢었다. 도겸의 표정이 변했다. “숙여!” 화살이 날아왔다. 서화가 몸을 숙였다. 비명. 말 울음. 사람들이 사방에서 나타났다. “아버지!” “서화를 데리고 가!” 정헌의 목소리가 들렸다. 도겸이 말을 돌렸다. “서화야, 따라와!” “하지만—” “지금!” 서화는 이를 악물고 고삐를 잡았다. 말이 달렸다. 빗속의 산길. 뒤에서 사람들의 고함이 들렸다. 칼이 부딪치는 소리. 서화가 자꾸 뒤를 돌아보았다. “보지 마!” 도겸이 소리쳤다. “앞만 봐!” 그러나 추격자들이 따라왔다. 한 명. 두 명. 세 명. 도겸이 말을 늦추며 칼을 뽑았다. “먼저 가!” “싫습니다!” “윤서화!” “함께 가겠다고 했잖습니까!” 도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 순간. 화살 하나가 날아왔다. 말이 크게 울었다. 서화의 몸이 기울었다. “서화야!” 세상이 뒤집혔다. 땅에 떨어진 충격으로 숨이 막혔다. 그래도 일어나야 했다. 서화는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런데. 발밑에 땅이 없었다. 절벽. 몸이 아래로 기울었다. “아!” 서화가 반사적으로 바위를 붙잡았다. 손바닥이 찢어졌다. “서화!” 도겸이 달려왔다. 그가 바닥에 엎드려 서화의 손목을 붙잡았다. “오라버니!” “잡았다.” 도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놓지 마.” 서화는 다른 손으로 그의 팔을 붙잡았다. “절대 놓지 마!” “예.” 올라가야 했다. 살아야 했다. 아버지에게 가야 했다. 어머니에게 돌아가야 했다. 그런데. 그때였다. 서화의 허리춤에서 빛이 났다. “…?” 백옥 노리개. 어머니가 물려준 그것이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서화야.” 도겸도 그것을 보았다. “그게 왜….” 빛이 강해졌다. 그리고. 절벽 아래의 어둠이 움직였다. 검은 것이 둥글게 벌어졌다. 마치. 문처럼. “오라버니.” 서화가 처음으로 두려움에 떨었다. “저게 무엇입니까?” “보지 마.” 도겸이 이를 악물었다. “내 손만 봐.” “오라버니.” “올라와.” 도겸의 손이 미끄러졌다. “안 돼.” 다시 붙잡았다. “서화야!” “오라버니!” 손끝이. 조금씩. 멀어졌다. 서화는 필사적으로 손을 뻗었다. 도겸도 그랬다. 하지만 이상한 힘이 아래에서 서화를 끌어당겼다. “윤서화!” 마지막으로 본 것은. 비를 맞으며 자신을 향해 손을 뻗고 있는 오라버니의 얼굴이었다. 그리고. 손이 떨어졌다. “오라버니―!” 세상이 검게 물들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차가웠다. 서화의 눈꺼풀이 떨렸다. 얼굴 위로 무언가 떨어졌다. 비인가. 아니었다. 차갑고. 가벼웠다. 서화가 천천히 눈을 떴다. “…눈?” 새하얀 세상. 분명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런데. 눈이 내리고 있었다. 서화가 몸을 일으켰다. 처음 보는 나무. 처음 보는 산. 그리고. 아무리 둘러보아도. 오라버니가 없었다. “오라버니?” 대답이 없었다. “오라버니!” 서화가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아버지!” 고요했다. “어머니!” 눈 내리는 숲이 그녀의 목소리를 삼켰다. 서화의 숨이 거칠어졌다. 그때. 붉은 것이 눈에 들어왔다. 피. 새하얀 눈 위로 긴 핏자국이 이어져 있었다. 서화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조금 떨어진 곳. 검은 옷을 입은 남자가 쓰러져 있었다. 처음 보는 옷. 처음 보는 얼굴. 큰 체격. 검은 머리. 피투성이였다. 서화는 망설였다. 도망쳐야 한다. 가족을 찾아야 한다. 그런데. 사람이 죽어가고 있었다. “…아버지라면.” 서화가 입술을 깨물었다. 결국 남자에게 다가갔다. 목에 손을 대었다. 맥이 있었다. 그러나 이상했다. 너무 느렸다. 그런데 동시에 무언가가 피부 아래에서 미친 듯이 움직이고 있었다. 서화의 표정이 굳었다. “이게 대체….” 그 순간. 남자의 눈이 번쩍 뜨였다. 옅은 회색. 서화가 처음 보는 색이었다. 남자의 손이 서화의 손목을 거칠게 붙잡았다. “……누구지.” 알아들을 수 없는 말. 서화의 눈이 흔들렸다. “무슨 말씀을….” 남자의 눈빛이 더 날카로워졌다. 서화 역시 알아들었다. 서로. 말이 통하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것이 아니었다. 남자의 입술이 이미 파랗게 질려 있었다. 서화가 침통을 꺼냈다. 남자의 표정이 변했다. “놓으십시오.” 당연히 알아듣지 못한다. “죽기 싫으시면 가만히 계십시오.” 서화는 그의 손을 밀어냈다. 그리고 침 하나를 꺼냈다. 첫 번째 침이 남자의 몸에 들어간 순간. 꿈틀. 검은 무언가가 목덜미 아래에서 움직였다. 서화가 숨을 멈췄다. “……?” 백옥 노리개가 다시 빛났다. 그리고. 분명 아무도 없는 설원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드디어.』 서화의 눈이 커졌다. 이번에는. 알아들을 수 있었다. 『찾았다.』 눈보라가 몰아쳤다. 『문을 여는 아이야.』 그날. 조선의 양반가 규수 윤서화는. 자신이 세상 하나를 건너왔다는 사실을 아직 알지 못했다.남쪽 해안에서 사흘 동안 나타났다가 사라진 문.그 기록 하나 때문에 서화는 밤이 늦도록 지도를 떠나지 못했다. 북부에서 남쪽 끝까지 이어진 길 위를 손가락으로 천천히 따라가며 몇 번이고 거리를 가늠했다. 이 세계의 지리를 완전히 익힌 것은 아니었지만, 북부와 남쪽 사이에 얼마나 많은 도시와 산맥, 강이 놓여 있는지는 이제 알 수 있었다. 하루 이틀에 다녀올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그런데도 마음은 이상할 만큼 조급하지 않았다.이전까지의 길은 늘 막혀 있었다. 검은 문을 열라는 목소리, 알 수 없는 대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존재.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줄 때마다 그 끝에는 반드시 찜찜한 무언가가 붙어 있었다.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윤연화가 남긴 길이었다.자신과 같은 조선 사람. 가족을 그리워하면서도 다른 사람을 희생시키지 않으려 했고, 결국 검은 문을 닫은 여자. 그런 사람이 마지막에 남긴 말이었다.문은 하나가 아니란다.서화는 그 말을 믿어보고 싶었다.아니, 믿기만 해서는 안 됐다.확인해야 했다.“남쪽.”서화가 지도 끝을 가리켰다.맞은편에 앉아 있던 에드윈이 피곤한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는 밤새 기록을 뒤진 탓에 머리가 평소보다 더 엉망이었다.“남쪽.”서화가 다시 말했다.그리고 자신의 가슴을 가리켰다.“나.”손가락을 남쪽으로 움직였다.“가다.”에드윈의 얼굴이 즉시 굳었다.“안 돼.”서화가 눈을 가늘게 떴다.그 단어는 너무 잘 안다.“왜?”“멀어.”에드윈이 지도를 길게 쓸었다.“아주 멀어.”서화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고개를 끄덕였다.“알다.”“그리고 위험해.”그가 산맥과 숲을 가리켰다. 이어 마수를 뜻하는 그림까지 급히 그렸다. 그제야 서화는 그의 걱정을 이해했다.“마수.”“그래.”“기사.”서화가 손으로 검을 쥔 시늉을 했다.“같이.”에드윈이 눈을 크게 떴다.“지금 호위까지 데려가겠다고?”문장이 길어지자 서화는 알아듣지 못했다. 하지만 에드윈의 표정만으로 충분했다. 그는 자신의
서화는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어둠은 사라졌다.가족의 모습도.도겸의 손도.전부.백옥 노리개는 다시 평범한 빛을 되찾았다.그런데.심장은 아직 빠르게 뛰고 있었다.“…….”서화가 천천히 손을 펼쳤다.손바닥이 축축했다.조금 전까지.그 너머에 오라버니의 손이 있었다.닿지는 않았지만.분명히 봤다.아버지.어머니.오라버니.모두 살아 있었다.자신을 찾고 있었다.그리고.자신의 목소리를 들었다.그 사실만으로도 다리가 풀릴 것 같았다.기뻐서.당장 울고 싶었다.그런데.그보다 먼저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문만 열면 모든 것이 끝날 텐데.』그 존재는.자신을 집으로 돌려보내려는 것이 아니었다.계속해서 문을 열라고 했다.대가가 무엇인지 묻자 대답하지 않았다.조선이 위험한지.이 세계가 위험한지.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그리고 자신이 물었다.당신, 문 너머에서 나오고 싶은 겁니까?대답은 없었다.하지만.그 침묵이 이상하리만큼 분명했다.서화가 백옥 노리개를 움켜쥐었다.“저를 이용하려는 거군요.”처음 설원에서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드디어.』『찾았다.』『문을 여는 아이야.』그때는 뜻을 몰랐다.하지만 이제는 알 것 같았다.문을 여는 아이.자신을 그렇게 불렀다.처음부터.기다리고 있었다.서화가 자리에서 일어났다.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늦은 밤.대공성의 복도는 조용했다.경비 기사들이 서화를 발견하고 놀랐다.“서화 아가씨?”마리엘이 그렇게 부르기 시작한 뒤.성 안의 몇몇 사람들도 어색하게 그 호칭을 따라 하고 있었다.서화는 기사에게 물었다.“카시안.”그리고 손가락으로 주변을 가리켰다.“어디?”기사가 잠깐 망설였다.이 시간이라면 대공은 집무실에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그가 방향을 알려줬다.서화는 곧장 걸었다.집무실 앞.레오넬이 있었다.“서화?”그는 서화의 얼굴을 보는 순간 웃음기를 거뒀다.“무슨 일이지?”서화는 긴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대신.“카시안.”문을 가리켰다.“지금.
윤연화.서화는 날이 밝을 때까지 그 이름을 바라보았다.백옥 위에 나타났던 글자는 이미 사라진 뒤였다.다시 아무리 들여다봐도.평범한 흰 옥일 뿐이었다.그런데도 서화는 눈을 떼지 못했다.“윤연화…….”어젯밤.분명히 보았다.윤.연.화.그리고.너의 피가 처음 문을 닫았다.“피.”서화가 천천히 자신의 손목을 내려다봤다.핏줄 위로 손가락을 가져갔다.사백 년 전 조선에서 이 세계로 건너왔던 여인.자신과 같은 백옥 노리개를 가지고 있던 여자.그리고.자신의 피와 연결되어 있다는 존재의 말.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많은 것이 겹쳤다.“우리 집안 사람이라는 뜻인가.”하지만 이상했다.서화는 자신의 집안에 그런 이야기가 있다는 말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윤씨 집안은 오래된 양반가였다.족보도 있었다.선대에 관한 기록도 적지 않았다.어릴 때 아버지에게 가계에 관해 배운 적도 있었다.그런데.이세계에 다녀온 여인이라니.그런 이야기를 들었다면 잊을 리 없다.더구나 백옥 노리개는.“어머니께서 주셨는데.”서화의 손이 멈췄다.이상하다.백옥 노리개는 아버지의 윤씨 가문에서 내려온 것이 아니다.어머니 한연화가.외가에서 물려받은 것이다.그런데 이름은.윤연화.“…….”서화의 눈빛이 달라졌다.같은 ‘연화’.그것까지 우연일까?“아니야.”무언가 있다.자신이 모르는 이야기가.서화는 침상에서 내려왔다.생각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확인해야 해.”누구에게?이 세계에서 사백 년 전의 기록을 읽을 수 있는 사람.한 명이 바로 떠올랐다.“에드윈.”쾅!연구실 문이 열렸다.책상에 엎드려 잠들어 있던 에드윈이 펄쩍 뛰었다.“뭐야!”서화가 들어왔다.“에드윈.”“서화?”그는 눈을 비볐다.창밖은 아직 완전히 밝아지지도 않았다.“지금 몇 시인지 알아?”서화는 절반도 못 알아들었다.그러나.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종이를 꺼냈다.그리고 붓을 들었다.에드윈이 멍하니 바라봤다.서화가 한자를 적었다.尹蓮
희망이 생긴 날 밤. 서화는 오히려 잠들지 못했다. 사백 년 전. 조선에서 이곳으로 온 여인이 있었다. 그리고. 돌아갔다. 그 사실 하나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돌아갔다…….” 서화는 침상 위에 앉아 몇 번이나 같은 말을 되뇌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막연했다. 돌아가야 한다. 반드시 돌아갈 것이다. 그렇게 마음먹었지만 정작 방법은 하나도 몰랐다. 그러나 이제는 달랐다. 길이 있었다. 누군가 이미 그 길을 지나갔다. 그렇다면. 자신도 찾을 수 있다. 서화는 품에서 백옥 노리개를 꺼냈다. 달빛 아래. 옥은 다시 평범한 흰빛으로 돌아와 있었다. “당신이 그분을 돌려보낸 것입니까?” 물론 대답은 없었다. “그렇다면 저도…….” 말을 멈췄다. 어젯밤 들었던 목소리가 떠올랐다. 『서화야.』 도겸의 목소리. 꿈이었을까. 아니. 서화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너무 선명했다. 오라버니 특유의 말투까지. 어릴 적부터 수없이 들어온 목소리를 잘못 알아들을 리 없었다. “오라버니도 찾고 계시는군요.” 입가에 작은 웃음이 번졌다. 그러다 금세 사라졌다. ‘손.’ 꿈에서 본 도겸의 손은 피투성이였다. 서화가 눈을 감았다. 절벽. 자신의 손을 붙잡고 있던 오라버니. 마지막 순간. 자신을 놓친 사람. “……또 자기 탓을 하고 계시겠지.” 그 사람이라면 그럴 것이다. 어릴 때부터 그랬다. 서화가 나무에서 떨어져 무릎을 다쳤을 때도. 자신이 조금만 빨리 왔으면 막았을 거라고 했다. 서화가 감기에 걸렸을 때조차 전날 함께 밖에 나간 자기 탓이라 우겼다. 그런 오라버니가. 자신의 손을 놓쳤다. “바보.” 서화의 목소리가 떨렸다. “오라버니 탓이 아닌데.” 노리개를 꼭 쥐었다. “그러니까 제가 직접 가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살아 있다고. 괜찮다고. 오라버니가 놓은 것이 아니라고. 그리고. “그동안 얼마나 고생했는지도 전부 따질 겁니다.” 눈물이 맺혔지만. 서화는 웃었다. 그날
문.門.한연화는 한참 동안 함 안쪽을 바라보았다.잘못 본 것이 아니었다.희미한 붉은빛이.분명 글자의 형태를 이루고 있었다.“……여보.”연화의 목소리가 떨렸다.방 한쪽에서 젖은 도포를 갈아입던 윤정헌이 고개를 돌렸다.“왜 그러오?”“이것 좀…… 보세요.”정헌이 다가왔다.그 뒤로 도겸도 따라왔다.도겸의 손은 엉망이었다.절벽 아래의 돌과 흙을 맨손으로 헤집은 탓에 손톱이 깨지고 손가락 곳곳에서 피가 배어 있었다.연화가 그 손을 발견했다.“도겸아.”그러나 도겸은 자신의 손을 감췄다.“괜찮습니다.”“그게 어찌 괜찮은 손이니.”“어머니.”도겸이 함을 가리켰다.“먼저 이것부터 보십시오.”연화의 입술이 굳게 다물렸다.정헌이 함을 들어 올렸다.딸에게 백옥 노리개를 건넬 때까지만 해도 아무것도 없었다.평범한 나무함이었다.연화의 어머니에게서.그리고 그 어머니에게서.몇 대를 거쳐 내려왔던 것.“문.”정헌이 글자를 읽었다.“門이구려.”도겸의 얼굴이 굳었다.“문이라고요?”“그래.”“아버지.”도겸이 급하게 정헌을 바라봤다.“제가 봤던 것도…….”말이 끊겼다.그날의 기억이 떠올랐다.서화의 손.자신의 손가락 사이에서 미끄러지던 손.그리고 절벽 아래.분명히 열렸던 검은 무언가.처음에는 자신도 믿을 수 없었다.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으니까.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서화는 떨어지지 않았다.사라졌다.도겸이 함을 움켜쥐었다.“문이었습니다.”정헌이 아들을 바라봤다.“무엇이?”“서화 아래에 생긴 것 말입니다.”도겸의 숨이 거칠어졌다.“검은 구멍처럼 보였지만…… 지금 생각하면 문이었습니다.”연화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도겸아.”“서화는 그 안으로 들어갔습니다.”“…….”“아니.”도겸이 이를 악물었다.“끌려갔습니다.”정적이 내려앉았다.빗물이 처마 끝에서 떨어졌다.뚝.뚝.뚝.정헌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평생 학문을 익힌 사람이었다.괴력난신을 함부로 입에 올리는 것을
아침이 밝았다.서화는 거의 잠들지 못했다.낯선 침상은 지나치게 푹신했고.이불은 따뜻했으며.방 안에는 밤새 불이 꺼지지 않았다.그런데도 눈을 감을 수가 없었다.눈을 감으면.절벽이 보였다.“서화야!”빗물에 젖은 오라버니의 얼굴.자신을 붙잡고 있던 손.조금씩 미끄러지던 손가락.그리고.마지막 순간.“오라버니!”서화가 눈을 떴다.“…….”낯선 천장.잠시.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그러다 모든 것이 한꺼번에 돌아왔다.설원.검은 옷을 입은 남자.알아들을 수 없는 말.거대한 성.두 개의 달.그리고.조선이 없는 지도.서화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밤새 손에 쥐고 있었던 백옥 노리개가 손바닥 안에 있었다.“……꿈이 아니었구나.”꿈이기를 바랐던 모양이다.아침에 눈을 뜨면 자신의 방이고.밖에서는 어머니가 부르고.사랑채에서는 아버지가 책장을 넘기는 소리가 들리고.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 도겸이.‘언제까지 잘 거냐.’하고 놀려주기를.서화는 한동안 노리개만 내려다봤다.그러다 손등으로 눈가를 문질렀다.“안 돼.”울 시간에 하나라도 더 알아봐야 한다.아버지가 그랬다.모르는 것이 있다면 두려워하기 전에 먼저 알아보라고.‘여기가 어디인지.’‘어떻게 왔는지.’‘그리고.’서화가 노리개를 꼭 쥐었다.‘어떻게 돌아갈 수 있는지.’아무것도 모른다면.하나씩 알아내면 된다.서화는 침상에서 내려왔다.그리고 곧 문제가 생겼다.“…….”어제 마리엘이 가져다준 옷.다시 봐도 익숙하지 않았다.긴 치마까지는 괜찮았다.문제는 위였다.“어찌 목을 이렇게…….”서화가 옷을 들고 심각하게 고민하던 순간.똑똑.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예.”문이 열렸다.마리엘이었다.그녀는 서화가 아직 속옷 차림인 것을 보고 상황을 금세 이해했다.그리고 침상 위의 옷을 가리켰다.서화는 고개를 저었다.“못 입겠습니다.”마리엘이 고개를 갸웃했다.서화는 옷의 목 부분을 가리켰다.그다음 자신의 목 아래를 가리고 다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