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log in그저. 아버지를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것만큼은 확실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윤서아.” 태준이었다. 서아가 문을 열었다. “왜요?” “잠깐 이야기하지.” 태준은 방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복도에 선 채 서아를 바라봤다. “네 아버지.” 서아의 눈빛이 순간 굳었다. “잡았어.” “…….” “그리고 지금 밖으로 못 나오게 해놨어.” 서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태준은 그녀의 표정을 살피다가 낮게 말했다. “네가 만나고 싶지 않다고 했으니까.” 서아가 고개를 들었다. “알아서 처리한다고 했잖아요.” “그래.” 태준은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아주 담담하게 물었다. “혹시.” 서아의 눈이 마주쳤다. “내가 그 사람을 아예 처리하는 것도 원하지 않나?” 순간. 서아의 표정이 멈췄다.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를 만큼 어리지 않았다. 서아는 한동안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태준은 재촉하지 않았다. “대답 안 해도 돼.” “……아저씨.” “왜.” “그 사람…… 제 아버지예요.” “알아.” “쓰레기 같은 인간인 것도 알아요.” 서아의 목소리가 아주 조금 흔들렸다. “그래도…….” 말끝이 흐려졌다. 태준은 조용히 그녀를 바라봤다. 서아는 손가락을 꾹 움켜쥐었다. 평생 미워했다. 술에 취해 들어오는 날이면 숨을 죽였고. 돈을 요구할 때면 방으로 도망쳤고. 폭력이 시작되면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그런데도. 아버지는 아버지였다. 자신에게 남은 마지막 가족. 끔찍하게 망가져버린 가족이라도. 완전히 사라진다고 생각하니 이상하게 무서웠다.
“저도… 모르겠어요.” 서아가 낮게 말했다.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어요.” 태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진짜 그렇게 된다고 생각하니까….” 서아가 눈을 내리깔았다. “무서워요.” 태준의 눈빛이 아주 조금 누그러졌다. “그럼 안 한다.” 서아가 고개를 들었다. “…정말요?” “네가 원하지 않으면.” “아저씨는….” 서아가 망설이다 물었다. “제가 싫다고 하면 안 할 거예요?” 태준은 잠시 그녀를 바라봤다. “그래.” “왜요?” “네가 부탁해서 데려왔으니까.” 짧은 대답이었다. “적어도 네 인생에서 벌어지는 일 하나쯤은 네가 결정하게 해줄 생각이야.” 서아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태준은 돌아섰다. “오늘은 생각만 해.” “아저씨.” 그가 멈췄다. “네.” 서아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한참을 망설인 끝에 말했다. “…해 주세요.” 태준이 천천히 돌아봤다. 서아의 얼굴은 창백했지만 눈빛만큼은 피하지 않았다. “저 사람.” 잠시 숨을 삼켰다. “다시는 제 앞에 나타나지 못하게 해주세요.” 태준은 그녀를 바라봤다. “그게 네 대답이야?” 서아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후회할 수도 있어.” “알아요.” “그래도?” 서아가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래도…….” 이번에는 목소리가 조금 더 단단했다. “이제 제 가족이라고 생각하지 않을래요.” 태준의 시선이 깊어졌다. “알겠다.” 그는 더 묻지 않았다. “다시는 네 앞에 나타나지 못하게 할게.” 서아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태준이 돌아섰다. 문을 닫기 직전. 서아가 불렀다. “아저씨.” “왜.” “…고마워요.” 태준은 잠시 그녀를 바라봤다. 그리고 무심하게 대답했다. “고맙긴.” 문이 닫혔다. 복도에 혼자 남은 태준은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다 휴대전화를 꺼냈다. “나야.” 낮고 차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사람 다른 지역으로 보내.” 잠시 침묵. “다시는 윤서아 앞에 나타나지 못하게.” 전화를 끊은 태준은 천천히 창밖을 바라봤다. 그리고 아주 작게 중얼거렸다. “그게 네가 원하는 거니까, 꼬맹아.” 그날 밤. 서아는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버지가 없는 미래.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물론 언젠가는 도망칠 생각이었다. 돈을 모아서. 학교를 졸업해서. 아무도 자신을 모르는 곳으로 가서. 그 사람과 완전히 끊어낼 생각이었다.
그런데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 일이 너무 빨리 찾아왔다. 서아는 눈을 감았다. 이상하게도 눈물이 나지는 않았다. 대신 가슴 한구석이 텅 빈 것처럼 허전했다.
그때.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윤서아.” 태준이었다. “왜요?” “밥 먹어.” “안 먹어요.” “왜.” “배 안 고파요.” 잠시 침묵. “문 열어.” “싫어요.” “꼬맹아.” “…….” “밥 안 먹으면 내가 들어간다.” 서아가 결국 문을 열었다. 문 앞에는 태준이 서 있었다. 손에는 작은 쟁반이 들려 있었다. 서아가 눈을 깜빡였다. “이거 뭐예요?” “죽.” “제가 애예요?” “오늘은 애처럼 굴잖아.” “안 먹는다고 한 것뿐인데.” “그래서 먹으라고.” 태준은 쟁반을 그녀에게 건넸다. 서아는 받아 들었다. 따뜻한 냄새가 올라왔다. “아저씨가 만들었어요?” “내가 그렇게 한가해 보여?” “그럼요.” “…….” 서아가 아주 조금 웃었다. 태준이 눈썹을 올렸다. “비웃냐?” “아니요.” “비웃었는데.” “기분 탓이에요.” 태준은 어이없다는 듯 그녀를 바라봤다. “먹어.” “네.” 서아가 숟가락을 들었다. 한입 먹었다. 따뜻했다.그 순간. 서아는 문득 생각했다. 아버지가 사라진 자리에. 이 남자가 서 있었다.
자신을 납치한 사람. 무섭고 위험한 사람. 그런데 이상하게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 생각이 떠오른 순간. 서아는 스스로에게 놀랐다.
“왜?” 태준이 물었다. “계속 쳐다보는데.” “아니에요.” “뭔데.” 서아는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아저씨.” “왜.” “저 여기 있어도 돼요?” 태준의 표정이 아주 조금 굳었다. “갑자기 무슨 소리야.” “그냥.” 서아가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아버지도 없어졌고.” “…….” “집도 없고.” 잠시 침묵. “갈 데가 없어요.” 태준은 그녀를 바라봤다. 그리고 아주 담담하게 대답했다. “있어.” 서아가 고개를 들었다. “어디요?” 태준이 그녀의 방 안을 가볍게 둘러봤다. “여기.” 서아의 눈이 조금 커졌다. “여기가 네 방이잖아.” 태준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네가 나갈 때까지는 안 쫓아내.” “…….” “그러니까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마.” 서아는 한참 동안 그를 바라봤다. 그리고 작게 말했다. “알겠어요.” 태준이 돌아섰다. 문을 닫으려던 순간. “아저씨.” “또 왜.” 서아가 침대 위에서 그를 바라봤다. “저 내일 학교 가도 돼요?” 태준이 헛웃음을 흘렸다. “그 와중에 학교 생각이 나냐?” “가야죠.” “그래.” “진짜요?” “대신.” 태준이 그녀를 바라봤다. “꼬맹이.” 서아가 미간을 찌푸렸다. “또 꼬맹이래.” “말 좀 들어.” “뭔데요?” “혼자 돌아다니지 마.” 서아는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그리고.” 태준이 덧붙였다. “괜찮은 척하지 말고.” 서아의 표정이 멈췄다. “…….” “네가 괜찮은 척하는 거.” 태준이 낮게 말했다. “다 보여.” 서아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태준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문을 닫았다.찰칵. 혼자 남은 방. 서아는 한참 문을 바라봤다. 그리고 처음으로. 아주 작게 웃었다.
“……진짜 이상한 아저씨.” 그날 밤. 서아는 오랜만에 깊이 잠들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눈을 뜬 그녀가 가장 먼저 생각한 것은. 아버지도. 도박도. 빚도 아니었다.오늘 학교에 갔다가 돌아오면, 강태준이 있을까. 그 생각이었다.
아침 7시 56분.윤서아는 침대에 누운 채 휴대전화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화면에 떠 있는 한 사람의 이름을.강태준. 어젯밤 헤어진 뒤에도 메시지를 주고받았다. 별다른 이야기는 아니었다. 저녁은 맛있었는지, 집에는 잘 도착했는지, 내일 일정은 어떤지.그런 평범한 대화가 이상하게 좋았다. 다섯 해 동안 그리워했던 사람과 이제는 내일을 약속할 수 있다는 것.아침에 눈을 뜨면 연락할 수 있고, 퇴근하면 만날 수 있고, 보고 싶으면 보고 싶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 서아는 메시지 창을 열었다 닫기를 반복하다가 결국 먼저 문자를 보냈다.[잘 주무셨어요?]보내고 나니 괜히 민망했다.‘아직 출근도 안 했는데 너무 들이대는 거 아니야?’그런 생각으로 휴대전화를 내려놓으려던 순간.띠링.답장이 왔다.[응. 너는?][저도 잘 잤어요.][다행이네.]잠깐의 공백. 그리고 이어진 메시지.[벌써 보고 싶은데.]서아는 그대로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아, 진짜…!”이 남자, 회사에서는 그렇게 냉정하고 무뚝뚝하면서 왜 퇴근만 하면 사람이 달라지는 걸까. 아니, 퇴근하기도 전부터 이러면 어떡하라는 건지. 서아가 한참을 고민하다 답장을 보냈다.[아직 아침인데요.]곧바로 답장이 왔다.[그러게. 퇴근까지 너무 기네.]서아는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강태준이 이럴 때마다 자꾸만 실감이 났다. 자신만 그를 그리워했던 게 아니라는 사실이. 그도 같은 시간을 견뎠고, 같은 사람을 마음에 품고 있었으며, 이제는 그 마음을 숨기지 않으려 한다는 사실이.서아는 휴대전화를 가슴에 꼭 끌어안았다. 그리고 처음으로 생각했다. 오늘 하루도 꽤 괜찮을 것 같다고. 퇴근하면 강태준을 만날 수 있으니까.***오전 8시 45분.회사 로비에 들어선 서아는 곧장 발걸음을 멈췄다. 강태준이 있었다. 검은 정장에 한 손에는 커피 두 잔을 들고, 다른 손으로는 휴대전화를 확인하고 있었다. 멀리서 봐도 눈에 띄는 사람이었다.주변 직원들이 자연스럽게 인사를 건넸고, 태준은 짧
아침 8시 47분. 윤서아는 휴대전화 화면을 내려다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박지수 대리에게서 온 메시지.[윤서아 씨, 혹시 대표님이랑 저녁에도 따로 만나세요?]그 아래로 이어진 문장이 서아의 심장을 철렁 내려앉게 했다.[어제 퇴근할 때 대표님이 직접 내려와서 기다리시던데… 제가 모르는 특별한 관계가 있는 건가 해서요.]‘아, 진짜.’서아는 이마를 짚었다. 비밀 연애를 시작한 지 겨우 나흘째였다. 그것도 다섯 해 만에 다시 만난 남자와, 이제야 겨우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참이었다. 누군가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정확히는, 다른 사람의 입에서 두 사람의 관계가 오르내리는 상황이 싫었다.강태준은 대표였고, 서아는 그가 참여하는 프로젝트의 실무 담당자였다. 괜한 소문이 생기면 태준에게도, 자신에게도 좋을 게 없었다.서아는 한참을 고민하다 답장을 작성했다.[업무 관련해서 이야기할 게 있으셨던 것 같아요. 특별한 관계는 아닙니다.]보내기 버튼을 누른 순간이었다. 띠링.[아, 그래요? 다행이다. 사실 저 대표님께 관심이 있어서요. 윤서아 씨가 혹시 저보다 먼저 가까워진 건가 싶어서 조금 신경 쓰였어요.]서아의 손가락이 멈췄다.‘다행…?’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올 뻔했다. 자기는 다행히도 아무 사이가 아니라는 대답을 들은 사람이 되었고, 박지수는 다시 태준에게 다가갈 명분을 얻은 셈이었다.서아는 휴대전화를 뒤집어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질투하지 않기로 한 건 아니었다. 다만, 질투한다고 해서 자신이 강태준의 연인이라는 사실을 증명해야 하는 건 아니었다.그가 자신을 선택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마음 한구석이 불편한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때였다.“윤서아 씨.”고개를 들자 프로젝트 담당 직원이 서 있었다.“대표님께서 오전 열 시 회의 전에 기획팀 담당자들 잠깐 보자고 하시네요.”“아, 네. 알겠습니다.”서아는 노트북을 챙겼다. 그리고 회의실로 향하는 내내 한 가지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오늘은 제발 아무 일도 없었으면 좋겠다고.
“두 분, 혹시 제가 모르는 사이에 많이 친해지신 거예요?”박지수의 질문에 윤서아는 들고 있던 마우스를 놓칠 뻔했다. 하필이면 아침부터. 하필이면 강태준이 사무실에 들어온 순간에.“업무적으로 친해진 거죠.”서아는 최대한 태연하게 대답했다.“프로젝트를 같이 진행하고 있으니까요.”“아, 그렇죠.”박지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어딘가 의심스러운 표정을 지었다.“그런데 어제 회의실에서 두 분이 굉장히 가까이 계시던데요?”…망했다. 서아의 머릿속에서 경고음이 울렸다.“자료를 같이 보고 있었어요.”“아, 자료요?”“네.”“그런데 윤 대리님 얼굴이 엄청 빨개지셨던데.”“…….”“더우셨나 봐요?”박지수가 천진난만하게 웃었다. 서아는 그녀가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건지, 아니면 전부 알고 일부러 떠보는 건지 판단할 수 없었다. 그때였다.“박 대리님.”낮고 차분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두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강태준이었다.“아침부터 개인적인 질문이 많은 것 같은데요.”박지수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스쳤다.“아, 죄송합니다. 그냥 궁금해서….”“업무에 필요한 내용부터 확인해 주시면 좋겠습니다.”태준은 더 말하지 않고 자신의 사무실로 향했다. 그가 지나간 자리에는 은은한 향수 냄새만 남았다. 서아는 애써 표정을 관리했다. 속으로는 이미 난리가 났지만. 저렇게까지 선을 그을 필요가 있나? 아니, 선을 그어주는 건 좋았다. 좋은데. 어제 회의실에서 자신에게 키스하던 남자와 지금 저렇게 냉정하게 말하는 남자가 같은 사람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박지수는 멋쩍게 웃으며 자리로 돌아갔다. 서아도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몇 초 지나지 않아 메신저 알림이 떴다.[괜찮아?]서아는 화면을 노려보았다.[네.][화났어?][아니요.][거짓말.][대표님은 업무 보세요.]잠시 뒤 답장이 왔다.[응, 윤 대리님.]그리고 마지막으로.[점심에 봐요. 보고 싶어서.]서아는 휴대전화를 뒤집어 놓았다. 정말 사람을 들었다 놨다 하는 데는 도
오전 11시 58분. 윤서아는 모니터 오른쪽 아래에 표시된 시간을 세 번째 확인했다. 12시까지 2분. 평소라면 점심시간을 기다릴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점심 먹고 10분만 따로 보자.키스하고 싶어서.]미친 사람. 정말 미친 사람이었다. 그런 메시지를 보내 놓고 아침 회의에서는 평소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자료 검토를 지시했다. 심지어 서아가 보고서를 제출하자 다른 직원들과 똑같이 말했다.“확인했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수고는 무슨. 사람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고.“윤 대리님, 점심 안 드세요?”옆자리 직원의 말에 서아는 화들짝 놀랐다.“아, 먹으러 가려고요.”“오늘은 같이 가요. 구내식당에 신메뉴 나왔대요.”“아… 죄송해요. 오늘은 약속이 있어서요.”“약속이요?”“네.”서아는 애써 웃었다. 그 약속의 상대가 누구인지 말할 수 없다는 사실이 이렇게 답답할 줄 몰랐다. 직원이 자리를 뜨자마자 휴대전화가 울렸다.[회의실 3번.]서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대표님. 회사예요.][알아.][사람들 다니는 곳이잖아요.][그래서 문 닫고 기다리고 있어. 안 오면 내가 갈까?]서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저 먼저 다녀오겠습니다!”그녀는 가방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쥐고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회의실 3번은 복도 끝에 있었다. 서아는 문 앞에서 잠깐 숨을 골랐다. 아무렇지 않게 들어가면 된다.그냥 업무 이야기하러 온 사람처럼. 상대는 대표님이고, 자신은 대리님이다. 절대 다른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똑똑.“들어와.”문을 열자 태준이 창가에 서 있었다. 재킷은 벗어 의자에 걸쳐 놓았고, 셔츠 소매는 팔꿈치까지 걷혀 있었다. 한 손에는 서아가 좋아하는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들려 있었다. 서아는 문을 닫으며 그를 흘겨보았다.“대표님.”“응.”“여기서 뭐 하세요?”“너 기다리지.”“그건 아는데요.”“그럼 됐네.”태준이 커피를 내밀었다.“네 거.”서아는 컵을 받아 들었다.“…감사합니다.”“초코우유는 안 샀어
월요일 오전 8시 42분.윤서아는 사무실에 도착하자마자 휴대전화를 확인했다. 메시지가 한 통 와 있었다.[잘 잤어?]서아는 입술을 꾹 눌렀다. 아침부터 이러기야? 주말 내내 실컷 보고, 실컷 이야기하고, 헤어지기 직전까지 입을 맞춰 놓고는 월요일 아침부터 아무렇지도 않게 잘 잤냐고 물어보다니.더 얄미운 건 자신이었다. 그 메시지 하나에 입꼬리가 올라가고 있었으니까. 서아는 주변을 살핀 뒤 재빨리 답장을 보냈다.[네. 대표님은요?]답장은 거의 즉시 도착했다.[네 생각하느라 조금 늦게 잤어.]“……!”서아는 휴대전화를 떨어뜨릴 뻔했다.아니, 이 남자가 진짜! 무뚝뚝하게 굴던 사람이 갑자기 왜 이렇게 직진하는 건데? 그녀는 황급히 휴대전화를 뒤집어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귀 끝이 뜨거웠다. 그때였다.“윤 대리님, 아침부터 좋은 일 있으세요?”옆자리 직원이 말을 걸었다. 서아는 화들짝 고개를 들었다.“네? 아, 아니요. 왜요?”“계속 웃고 계셔서요.”“제가요?”서아는 황급히 입가를 만졌다.“아닌데요. 그냥… 오늘 날씨가 좋아서요.”직원은 창밖을 한번 바라봤다. 흐린 하늘이었다.“…아, 네.”서아는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출근 첫날부터 이게 무슨 꼴인가 싶었다. 그런데도 휴대전화가 다시 울리자, 손이 먼저 움직였다.[아침 먹었어?][먹었어요.][거짓말.][어떻게 알아요?][너 아침에 입맛 없다고 했잖아.]서아는 화면을 바라보다가 피식 웃었다. 정말 기억하고 있었다. 자신이 대학생이던 시절에 했던 말까지.[오늘은 먹었거든요.][뭐 먹었는데?]서아는 잠깐 고민하다가 솔직하게 답했다.[초코우유요.]잠시 뒤 답장이 왔다.[그건 밥이 아니야.][대표님.][응.][회사에서는 업무 이야기만 하세요.]답장을 보내자마자 서아는 후회했다. 괜히 보냈나? 그런데 태준의 답장은 더 빨랐다.[알겠어, 윤 대리님.]그리고 이어진 메시지.[점심은 같이 먹을까요?]서아는 휴대전화를 꽉 쥐었다. 이 남자… 사람을 설레게 하는
오전 아홉 시. 윤서아는 출근하자마자 휴대전화부터 뒤집어 놓았다. 어젯밤 강태준과 나눈 메시지가 자꾸만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네가 걱정해 주니까 꼭 먹을게.] 고작 그런 말 한마디에 새벽 두 시가 넘도록 잠들지 못했다. 심지어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메시지를 다시 확인하기까지 했다. 정말 한심했다. ‘정신 차려, 윤서아.’ 서아는 제 뺨을 가볍게 두드린 뒤 노트북을 열었다. 오늘은 T.J.이노베이션과의 세 번째 실무 미팅이 있는 날이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윤 대리님.” 고개를 들자 박지수가 환하게 웃으며 서 있었다. “오늘도 대표님 오시죠?” “네. 참석하신다고 전달받았습니다.” “아, 그래요? 저번에 대표님이랑 이야기해 보니까 생각보다 되게 다정하시더라고요.” 서아의 손끝이 멈췄다. “…그러세요?” “네. 일할 때는 엄청 냉철하신데, 웃으시면 분위기가 확 달라지잖아요. 저 그런 스타일 좋아하거든요.” 박지수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오늘은 꼭 개인적인 이야기도 좀 해보려고요.” 서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마우스를 움직여 화면을 넘겼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개인적인 이야기?’ 어제 태준이 분명히 말했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아주 오랫동안 좋아했다고. 그 사람이 누구인지 서아는 알고 있었다.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자신이라고 믿고 싶었다. 하지만 믿는 것과 확신하는 건 달랐다. 5년이라는 시간은 사람의 마음을 의심하기에 충분히 길었다. *** 오전 열한 시. 회의는 예정된 시간보다 조금 길어졌다. 태준은 오늘도 완벽했다. 깔끔하게 정리된 자료, 군더더기 없는 설명, 날카로운 질문과 정확한 판단. 5년 전, 서아가 알던 강태준과 달라진 점은 많았다. 더는 조직의 어두운 세계에 발을 담그고 있지 않았고, 지금은 자신의 이름을 걸고 사업을 이끄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변하지 않은 것도 있었다. 곤란한 질문을 받았을 때 아주 잠깐 가늘어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