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log in
달그락.
글라스의 투명한 얼음 위에 보드카가 흘러내리며 작은 소리가 났다. 2온스. 양을 확인한 민서는 보드카 병을 내려놓고 깔루아를 집어 들었다. 보드카 양의 절반 정도 부어진 검은 커피 리큐어가 투명한 보드카와 잠시 층을 이루는가 싶더니 떨어지며 녹아내렸다. 보통 블랙러시안을 만들 때에는 한두 번 저어주는 법이지만, 이 손님은 늘 젓지 않은 블랙러시안을 주문했기에, 그녀는 그 상태 그대로 잔을 밀어 손님 앞으로 가져다 주었다.
“주문하신 블랙러시안입니다.”
보드카에 섞여가는 깔루아를 가만히 지켜보던 남자가 눈을 들어 그녀를 잠시 쳐다보았다. 그리고 이어지는 작은 고개짓. 아마 감사의 뜻이겠지. 민서는 눈을 반쯤 감으며 웃어보였다.
민서가 일하는 곳은 번화가에서 조금 벗어난 곳에 위치한 작은 칵테일 바였다. ‘팔자 좋은 건물주 아들’인 사장은 가게 운영보다 유흥에 관심이 더 많은 사람이었다. 가게 문을 열고 손님 두세 테이블 정도 받고 나면 친구들과 어울려 나가기 일쑤여서 민서는 눈치 볼 것 없이 편하게 일할 수 있는 이 곳이 좋았다.
찾아오는 손님의 절반 정도는 한량 같은 사장의 친구들이었고, 나머지 절반은 동네 주민들, 블로그나 입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젊은이들이었다. 대부분의 손님들의 낯을 익혀둔 후라 새로 찾아온 손님은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블랙러시안 한 잔을 앞에 두고 말없이 앉아있는 이 손님은 요 근래부터 찾아오기 시작한 사람이었다. 한 달에 서너 번, 손님이 뜸한 월요일이나 화요일 밤 늦게 찾아와 한두 시간 정도 혼자 앉아있다 가고는 했다. 일행이 있을 때도 몇 번인가 있었는데, 그때에도 말을 많이 하지 않았다고 기억하는 걸 보면 원래 조용한 성격인 것 같았다.
보통 혼자 오는 손님은 바텐더에게 이것저것 말을 걸기 마련이다. 날씨 이야기 같은 소소한 일상 얘기에서부터 신문에 오르내리는 이슈들까지, 낮은 볼륨으로 틀어놓은 음악소리가 채우지 못하는 적막을 목소리로 채우려는 사람들이 많았다. 특히 여자인 민서에게는 끈적하게 던지는 농담이나 추파까지 더해지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3년째 바텐더 일을 해온 그녀는 농담인 듯 웃어넘기거나 거절하는 것까지 업무의 한 부분으로 생각하고 있었기에, 말없이 술만 마시다 가는 이 손님을 매우 독특한 사람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오늘도 그 손님은 무언가 생각에 잠긴 듯 어딘가를 응시하며 잔에 담긴 칵테일을 홀짝이고 있었다. 홀에 있던 마지막 손님들이 나간 자리를 치우고 돌아온 민서는 시계를 흘깃 쳐다보았다. 자정이 조금 지난 시각. 테이블은 모두 비어있었고, 바에 앉아있는 손님은 셋. 원래 손님이 적은 평일임을 감안하더라도 너무 한가했다.
오늘은 일찍 마감하고 집에 갈 수 있으려나 생각하며 민서는 뻐근한 뒷목을 주물렀다. 이리저리 목을 움직이는데, 그 움직임이 너무 컸음일까. 혼자 앉은 그 손님과 눈이 마주쳤다. 어색하게나마 웃으며 시선을 피하는데 마침맞게 출입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반갑게 인사를 하려던 민서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녀의 표정을 살피던 남자도 고개를 돌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을 쳐다보았다.
20대 후반에서 많아봐야 30대 초반 정도 되어 보이는 남자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하고 서 있었다. 주변을 한 번 휘 돌아보더니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다가왔다. 아무렇지 않은 척 표정을 가다듬은 민서는 힐끗 시계를 보며 시간을 확인했다. 12시 35분, 영업종료까지 2시간 이상이 남아있었다. 애써 가다듬은 표정에 난처함이 서렸다.
“야, 너!”
민서의 시선이 이곳저곳을 배회하자, 자기를 모른척한다 생각했는지, 술에 취한 남자가 걸어오다 말고 냅다 소리를 질렀다. 민서와 그 앞의 손님은 물론, 바 깊숙한 곳에서 대화를 나누던 손님 두 명도 놀라 남자를 쳐다보았다.
“너 왜 내 전화 안 받아? 내가 몇 번을 전화한 줄 알아? 너, 지금 나 무시하는 거냐, 어?”
원목으로 된 바를 쾅 내리치듯 짚고 선 남자가 바락바락 고함을 질러댔다. 흠칫거리는 민서의 손끝이 잘게 떨렸다.
“근태 씨. 아직 가게 문 안 닫았고, 손님도 계셔. 나중에 얘기하고 지금은 나가줘.”
목소리 끝에 떨림이 묻어나오긴 했지만 민서는 침착하게 말을 끝냈다. 이 자리에서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애써 눌러 참는 중이었다.
“나가줘? 나가줘어? 이게 지금 장난하나. 나중에 언제? 씨발, 나 죽고 난 다음에?”
“자꾸 이러면 시, 신고할 거야.”
민서의 말에 근태가 눈에 불을 켰다.
“뭐? 이게 진짜!”
확 치켜 올라가는 근태의 손을 보며 민서는 질끈 눈을 감았다. 이어질 통증을 기다리는데, 아픔 대신 ‘넌 또 뭐야?’하는 소리가 들렸다. 저도 모르게 움츠러진 어깨를 펴고 눈을 떴더니 여전히 치켜 올라간 근태의 손과 그 손목을 잡고 있는 블랙러시안 손님이 보였다.
“술을 쳐 마셨으면 곱게 집에 자빠져 잠이나 쳐 잘 것이지, 왜 남의 영업장에서 지랄이야?”
“너 이 새끼…….”
근태는 잡힌 손을 빼내려 몇 번 용을 썼다. 하지만 신장도 체격도 손님 쪽이 훨씬 우월해 잡힌 손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제 손목을 잡고 있는 남자의 팔뚝이 자신의 팔뚝보다 훨씬 두꺼운 것을 보면서, 그는 이쯤에서 물러나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민서 앞에서 뭉개진 자존심과 머리를 어지럽게 하는 취기가 근태를 부추겼다.
“이것 놔아!”
있는 힘껏 팔을 내저었더니 손님은 순순히 손을 놓아주고는 한 걸음 물러섰다. 풀려난 손목을 잠깐 어루만지는가 싶던 근태는 냅다 남자를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갑작스럽게 날린 주먹이니만큼 먹히겠다 싶었지만 주먹은 애꿎은 허공을 갈랐고, 언제 휘둘렀나 모를 손님의 주먹이 근태의 턱을 후려쳤다.
‘빡’ 소리와 함께 근태가 휘청거리며 바 위에 놓여있던 술잔들을 바닥으로 쓸어냈다. 유리 깨지는 소리와 함께 근태는 턱을 감싸 쥐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남자친구입니까?”
남자의 질문이 모든 광경을 넋 놓고 보고 있던 민서의 정신을 일깨웠다. 당황스러움과 안도감, 미안함과 걱정스러움이 뒤얽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선뜻 떠오르지 않았다. 민서는 바닥에 주저앉아 욕지거리를 내뱉고 있는 근태와 자신을 바라보며 서 있는 손님을 번갈아가며 쳐다보았다. 그리고 손님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죄송합니다, 손님.”
숙였던 고개를 들 틈도 없이 그녀가 바 안에서 나와 주저앉은 남자를 부축해 일으켰다.
“걸레 같은 년이, 저 새끼 누구야? 저 새끼가 뭔데 껴드는 거야! 저 새끼한테도 대줬냐? 헤어지자고 한 게 저 새끼 때문인 거지?”
부축을 받아서야 겨우겨우 일어선 주제에, 근태는 민서의 손을 모질게 뿌리치고는 비틀거리며 독한 말을 쏟아냈다.
“나중에 얘기하자, 제발.”
민서는 울지 않으려 이를 악물며 남자를 달랬다.
“저 새끼랑도 잤냐고!”
“안 잤어!”
작은 가게 안을 쩌렁쩌렁 울리는 모욕적인 말에 그녀도 결국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작가입니다. 초반부터 개개끼가 나와 많이 당황스러우셨죠? 네. 압니다. 저도 저 개개끼 싫어요....ㅜㅜ
“자, 잠깐만요.”민서가 몸을 빼보려 했지만 될 리가 없었다. 그녀는 서둘러 손으로 입을 막았다. 그의 입술이 그녀의 손등에 가로막혔다. 손등에 비벼지는 입술 감촉에 어색해하는데, 그가 그녀의 손등을 핥았다. 스스로 틀어막은 입에서 놀란 비명소리가 눌려 나왔다.“보지 마라, 동혁아.”룸미러로 뒷좌석을 힐끔거리던 동혁이 근식의 낮은 경고에 헛기침을 하며 자세를 바로잡았다.“네, 형님.”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몸도 마음도 뜨거운 20대 초반의 남성에게는 다소 무리가 있는 주문이었다. 그가 존경해마지않는 큰형님의 애정행각이었다. 성진의 취한 모습도 처음 보지만 여자와 스킨십하는 것도 처음 보는 동혁이었다. 그는 몸이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솔직히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큰형님의 품에 쏙 들어가는 사이즈의 형수님이었다. 룸미러의 각도로 볼 수 있는 건 성진의 뒤통수와 민서의 머리 위쪽 정도였다. 하지만 거칠어진 성진의 숨소리와 민서가 놀라는 소리, 성진이 작게 속삭이며 민서에게 애원하는 목소리는 너무 자극적이어서 자꾸만 룸미러에 시선이 갔다.“키스하게 해줘.”맞닿은 성진의 몸이 뜨거웠다. 그는 계속해서 민서의 손등에 키스하며 속삭였다. 그의 얼굴이 너무 가까웠다. 민서의 머릿속이 어지러웠다.“민서야. 제발……”‘그쪽’도 아니고 ‘민서 씨’도 아닌 ‘민서야’였다. 간절하게 애원하는 속삭임에 그녀는 흔들렸다. 그의 손이 그녀의 손목을 부드럽게 잡아 끌어내렸다.“아프게 하지 않을게. 약속해.”입술을 막고 있던 민서의 손이 치워지고, 성진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에 닿았다. 커피향이 났다. 눈물이 날 것 같아서 민서는 눈을 감았다.나는 이 남자와의 키스를 그리워했던 것 같다. 아닌 척 했지만 이 남자에게 끌리고 있었나보다. 나를 뜨거운 시선으로 바라보면서도 존댓말을 쓰면서 거리를 두며 나를 배려해주는 이 남자를…… 좋아하게 되었나보다.눈물이 민서의 볼을 타고 흘렀다.그의 혀가 그녀의 입술을 핥았고, 그녀는 입술을 열었다. 혀를 내밀어 그의 혀를 살짝
11시가 다 되어가는 시각이었다. 성진은 차 뒷좌석에서 생각에 잠겨 있었다.“곧 도착입니다, 형님.”“그래.”근식은 룸미러로 성진의 모습을 확인하고 씩 웃었다.황 회장과의 만남이 길어지면서 조금 예민해진 성진이었다. 워낙 성진을 예뻐하는 황 회장이었기에 망정이지, 다른 고객들 중 하나였다면 진즉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오고간 이야기의 규모가 생각보다 커서 성진도 부담이 되는 모양이었다. 민서가 일하는 바로 가면서 저렇게 심각한 표정을 짓는 건 본 적이 없었다.“황 회장님의 제안은 거절하시면 안 됩니다.”“알아.”“아시면서 뭘 그렇게 고민하십니까, 형님?”“글쎄다. 영 내키지가 않네. 동혁이한테서 연락은?”“별 일 없다고 합니다. 좀 시끄러운 손님들이 와서 정신없이 바쁘다는 것 말고는 괜찮답니다.”성진의 미간에 골이 생겼다. 손님이 적은 한적한 가게라서 민서가 여유롭게 일한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는데, 정신없이 바쁘다고 하니 마음에 들지 않은 거였다.곧 차가 멈췄고 성진이 내렸다. 골목에 위치한 바 앞은 한적했다. 그는 거침없이 걸어가 바의 출입문을 열었다.“야, 애 죽겠다, 그만 먹여!”“먹고 죽어, 새끼야!”문이 열리자마자 왁자지껄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테이블 하나에 남자 넷 여자 하나. 바에 동혁과 남자 하나. 그는 빠르게 매장 내부의 인원을 파악하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민서가 그를 보더니 활짝 웃으며 인사를 건네왔다.“어서오세요. 오늘은 늦으셨네요, 손님.”“일이 있어서.”성진이 재킷을 벗어 의자에 걸쳐놓고는 민서 앞에 앉았다. 바에 상체를 기대고 서 있던 남자가 성진을 보았다. 30대 중후반 정도의 늘씬한 남자였다.“민서 씨, 이거 차별 같은데? 이 손님은 왜 이렇게 반갑게 맞이하는 거야?”“단골이시거든요.”“나도 자주 오잖아. 나도 단골 해주고 반갑게 말 걸어달라고.”“자주 오시는 건 맞는데 우리 사장님 만나러 오시는 거잖아요. 우리 단골손님이랑 비교가 되나요.”“이거 서운한데?”“음, 저한
***성진의 상처는 빠르게 아물었다. 원체 그의 체력이 좋은 것도 있었지만, 민서가 매일 서투르게나마 상처를 소독해주었고, 단백질 위주의 건강에 좋은 음식을 정성껏 만들어준 덕분이었다. 물론 제대로 된 수발은 근식의 몫이었다. 사무실과 병원, 성진의 아파트를 오가며 각종 약들과 보양식을 갖다 바쳤다.“빨리 나으십쇼, 형님. 혼자 하려니 죽겠습니다.”“엄살은. 내가 발 빼고 너 혼자 해도 되겠는데?”“말도 안 되는 소리인 거 아시죠? 황 회장이 형님을 얼마나 찾는지 말씀드렸잖습니까. 양 전무 같은 경우에는 형님 없이는 못 맡기겠다고, 형님 복귀하면 연락 달라고 합디다.”“츱, 까탈스런 영감탱이들.”근식이 입혀주는 수트 재킷 단추를 여미며 성진이 혀를 찼다.“황 회장님이 급하신 모양이더라고요, 형님.”“그 양반이 급하거나 말거나.”시계를 차고 지갑을 챙긴 성진이 방을 나와 현관으로 걸어가는 동안 근식이 소지품을 챙겨와 그 뒤를 따랐다.“그래도 그러시면 안 됩니다, 형님. 황 회장님이 그래도 제일 큰 고객인데 말입니다, 형님.”“시끄러워.”“그러지 마시고, 형수님한테 가기 전에 잠깐 아주 잠깐만 황 회장님 얼굴 보고 갑시다, 네?”계속해서 졸라대는 근식이었다. 평소와는 다른 그 태도에 성진은 걸음을 멈추고 근식의 얼굴을 한참 쳐다보았다.“뭐냐?”“뭐가요?”“그 영감이 뭐라 그래? 또 지랄맞게 굴어?”근식의 눈동자가 슬며시 옆으로 기울었다가 돌아왔다. 성진은 속으로 혀를 찼다.“그런 거 없었습니다. 워낙 그 양반 성격이 불같아서 그러지요. 일처리 느린 거 못 견뎌하시는 분이잖습니까.”“지금 간다고 연락해.”못마땅한 표정으로 한 마디 뱉은 채 걸음을 옮기는 성진의 뒤에서 근식이 쾌재를 불렀다. 성진이 직접 움직인다고 하니 일이 쉬워질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성진은 이상할 정도로 나이 많은 고객들에게 잘 먹혔다. 지금은 저렇게 기분 나쁜 기색을 숨기지 않고 틱틱거리지만, 막상 고객 앞에서는 정중하고 예의바르게 행동할 것이었다. 깍듯
성진이 자세한 설명을 피하는 이유를 대충이나마 짐작한 민서는 그가 자신을 보면서 웃자 흠칫 놀랐다.아니, 왜 웃고 그러세요. 그쪽이 깡패라는 것만으로도 불법적인 일 한다는 걸 다 설명하신 거잖아요. 다른 사람한테 말 옮기는 일 같은 거 안 하니까 그만 쳐다보세요.어색해진 민서가 바쁜 척 손을 놀렸다. 신경 쓰지 않는 척하면서 아직도 자신을 쳐다보고 있나 힐끔힐끔 성진을 확인했다.“큰일이다, 민서 씨. 저 사람, 민서 씨한테 관심있나봐.”카페 사장이 민서 쪽으로 상체를 바짝 기울인 채 속삭였다. 그런 거 아니라고 할 수가 없어서 그녀는 어색하게 웃었다.“그냥 깡패 아니라 되게 위험한 일 하는 것 같은 느낌이라고. 혼자 있을 때 저런 손님 들어오면 무섭잖아.”“위험한 손님 아니에요. 오히려 진상 손님을 두 번이나 쫓아내주셨어요.”민서도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카페 사장이 ‘그래?’ 하며 놀라더니 성진을 향해 배시시 웃었다. 성진은 두 사람을 지켜보다 미간을 좁혔다. 두 여자가 서로 속닥거리다가 자신을 보며 웃는 모양이 의심스러웠던 것이다. 빨리 마시고 나가줬으면 좋겠는데, 여자는 민서에게 또 뭐라 속삭이고는 까르르 웃었다.“그러지 마세요, 손님. 전 당분간 누굴 만나거나 할 생각이 없어요.”“어머, 왜?”“그냥…….”여자가 손을 뻗어 민서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또 속삭였다. 가만히 듣던 민서의 표정이 난처한 기색으로 바뀌었다.마음에 안 들어.그는 다시 블랙 러시안을 들이켰다. 독한 알콜이 목구멍을 태울 듯 덥히고 넘어갔다.“그럼 나 섹스 온 더 비치 말고 다른 거 추천해줘요.”여자가 빨대로 남은 칵테일을 쭉 들이켰다. 그리고 얼음만 남은 빈 잔을 내밀었다. 민서는 잔과 코스터를 수거하고는 메뉴판을 꺼냈다.“이거랑 이것처럼 이름이 섹스 온 더 비치같이 좀 선정적이다 하는 칵테일이 보통은 달콤해서 마시기 좋아요.”“그러다 훅 가고?”여자가 민서에게 윙크를 날렸고, 민서는 손가락 총을 쏘았다.“그렇죠.”“흐응, 궁금하네.”
구석자리에 숨어서 애정행각을 벌이던 커플이 나가고 민서가 테이블을 치우고 돌아오는데 문이 열리고 젊은 여자 한 명이 들어왔다. 손님이 없으니 일찍 문 닫고 집에 가자고 하려던 성진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불만을 표했다.“어서오세요.”여자는 민서의 인사에 환하게 웃으며 아는 척을 한 후 성진의 옆자리에 앉았다.“원래 이 시간에 오면 손님이 없었는데, 오늘은 손님이 두 분이나 계시네요?”“다른 손님이 없을 때 주로 오셔서 그래요. 오늘도 같은 걸로 드릴까요?”“네. 섹스 온 더 비치로 주세요.”자주 오는 손님인지, 여자와 민서는 살갑게 안부를 주고받았다.“가게 문 닫고 나서 그냥 집에 들어가기가 싫은 날이 있어요. 술 한 잔이 먹고 싶은데 같이 먹을 사람도 없고, 사람들 바글바글한데서 혼자 청승 떨기 싫은 그런 날이요. 그런 날엔 여기서 칵테일 한 잔 마시는 게 최고더라고요. 그리고 이왕 마시는 거 맛있는 걸로 마셔야죠.”“원래 혼술하러 오시는 분이 많아요. 조용히 한두 잔씩 드시고 가시고요.”허리케인 글라스에 얼음을 담으며 여자의 넋두리 같은 말에 민서가 웃었다. 쉐이커에도 얼음을 담는 민서의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성진 쪽으로 여자가 의자를 당겨 앉았다.“동네에선 못 보던 분이시네요. 안녕하세요,”“아, 네.”“근처에 사시나요? 이렇게 근사하게 생기신 분인데 제 기억엔 없어서요.”“아니요.”“댁이 어디신데요?”“……닥산동입니다.”“어머, 멀리도 오셨네요? 근처에 볼일이라도 있으셨나봐요.”“……직장이 근처라.”“어머어머, 무슨 일 하시는데요?”보드카에 이어 오렌지 주스를 쉐이커에 붓던 민서가 눈을 들어 두 사람을 힐끗 보고는 웃음을 꾹 눌러 참았다. 혼자서 칵테일 마시러 오는 손님들 중에 가장 빨리 친해진, 붙임성 좋은 카페 사장이었다. 말 수 적은 성진이 귀찮아하는 것이 민서에게는 너무나 잘 보이는데, 손님에게는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깡패입니다.”카페 사장이 눈을 동그랗게 떴고, 민서는 ‘쿡’ 짧은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민서가 성진과 심상치 않은 사이임을 넌지시 내비쳤음에도 불구하고 그 남자는 민서를 포기하지 못한 듯, 시덥잖은 농담을 계속해서 던졌다. 민서의 표정이 점점 굳어가는 걸 본 남자의 일행이 조심스럽게 남자에게 눈치를 주었으나, 남자는 멈추지 않았다.“내가 뭐 큰 걸 바라는 건 아니란 말이지. 아무리 맛있는 음식도 매일 먹으면 질리는 법이거든. 가끔 특식도 먹고 말이야. 맛없는 것도 가끔 먹어 줘야, 아! 원래 먹던 게 맛있는 거구나 하고 깨닫기도 한단 말이지.”“그런가요? 전 맛없는 건 굳이 찾아먹지 않는 편이라서요.”“맛이 있는지 없는지는 먹어봐야 아는 것 아니겠어요?”능글맞게 웃는 남자에게 차마 화를 낼 수 없어 한숨을 내쉬는데, 옆에서 부글부글 속을 끓이고 있던 성진이 참지 못하고 남자의 어깨를 툭툭 쳤다.“이봐.”“어린놈이 말이 짧네.”앉아있는 성진을 아래위로 훑은 남자가 빈정거리는 말투로 툭 내뱉은 말에 성진의 뒤에 서 있던 동혁이 발끈했다. 성진이 손을 들어 동혁을 말리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파리한 안색으로 앉아있는 성진은 위협적이지 않았다. 적어도 남자는 그렇게 생각했다. 차분하고 정적인 느낌을 주는 성진의 생김새도 남자의 생각에 힘을 보냈다.하지만 정면을 바라보며 자리에서 일어서는 성진의 모습은 그게 아니었다. 제일 먼저 보인 것은 오른쪽 눈썹 위에서 눈꼬리까지 이어지는 칼자국이었다. 조금이라도 옆으로 비껴 지났다면 실명했을지도 모를 위험한 흉터였다. 그리고 구부정하게 앉아있을 때는 몰랐던 성진의 넓은 어깨와 큰 키에 위압감을 느꼈다.“그쪽도 예절이 썩 훌륭하지 않더라고.”남자가 어금니를 악물었다. 낭패였다. 작고 여리여리한 민서가 사귀는 남자래야 대단할 게 없다 생각했다. 자신이 민서에게 추근덕거릴 때 옆에서 조용히 지켜만 보기에 배알도 없는 놈인 줄 알았다. 덩치 큰 놈이 형님이라 깍듯하게 칭할 때 알아봤어야 했는데, 옆얼굴이 곱상해 만만한 상대라는 오판을 하고 말았다.“아니…… 그게 아니라…….”성진이 남자에게 한 걸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