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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78화

Author: 경옥
계연수는 이미 단정하게 몸을 정돈하고 있었다. 머리에는 단 하나의 단색 옥비녀만 꽂았고, 폭포처럼 흘러내리는 긴 머리는 자연스럽게 묶였다가 반쯤 흘러내렸다. 덕분에 작은 얼굴이 한층 깨끗하게 돋보였고, 연약하면서도 부드러운 아름다움이 배어 있었다.

그녀가 고개를 숙이고 글을 쓰는 모습은 매우 진지했다. 곁에 놓인 향로에서 천천히 피어오르는 향기가 그녀를 감싸고 있어, 심서준은 한동안 움직이지 않고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의 책상 위에는 지난 2년간 쌓인 공문들이 산처럼 높았다. 어떤 사건은 처리하는 데 1~2년이 걸릴 정도였고, 많은 문서가 밀려 있어, 책상 위는 한가한 공간이 거의 없었다.

그런데 지금 계연수가 그곳에 앉아 있으니, 차갑고 고요하던 서재가 갑자기 부드러워진 느낌이었다.

가장 먼저 그를 발견한 것은 용춘이었다. 그녀는 계연수를 위해 먹을 갈고 있었는데, 너무 조용한 탓에 졸음이 몰려와 하품을 하다가 병풍 옆에 서 있는 심서준을 보고는 급히 “후작님!” 하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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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문춘귀   제1230화

    “제가 아이를 낳던 밤은 그토록 위태로웠어요. 아주버님도 돌아와 계셨으면서 형수님이 집안일을 마음대로 처리하고, 사촌 형님들께 소식조차 전해지지 않게 막는 걸 그대로 두셨잖아요. 나중에 문지기에게 들으니 그날 둘째 사촌 형님도 오셨다더군요. 헌데 넷째 형수님께서 돌려보냈다고요. 이상하다는 생각은 안 드셨어요?”“집 안에 태의가 계셨는데도 형수님은 양아를 밖으로 내보내 의원을 불러오게 했어요. 왜 그러는지 한마디도 묻지 않으셨고요. 그날 밤 아주버님이 조금만 더 마음을 쓰셨어도,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거예요.”계연수의 말이 이어졌다.“결국 아주버님도 아무 잘못이 없다고는 할 수 없어요. 안채 일은 형수님이 알아서 처리하는 데 익숙해져서, 신경 쓰지 않고 편히 지내고 싶으셨던 거잖아요. 미심쩍은 구석이 있었더라도 더 알아보려 하지는 않으셨겠지요. 그렇게 오랜 세월을 함께 사셨는데, 부인이 어떤 사람인지 정말 모르셨어요?”“어머님께서 쓰러지신 뒤 그토록 오래 정신을 차리지 못하셨어요. 늘 스스로 효성스럽다 여기셨잖아요. 헌데 왜 이상한 점이 없는지 더 살피지 않으셨어요? 형수님은 어머님 곁의 시녀를 매수해 약에 정신을 가라앉히고 깊이 잠들게 하는 약까지 섞었어요. 조금만 더 살피셨다면 이상한 낌새를 알아채셨을 거예요. 넷째 형수님이 무슨 짓을 하는지도요.”“그뿐인가요. 제가 평소 믿고 의지하던 최씨는 다른 곳으로 보내고, 다른 여인들도 모두 제 처소에 머물게 했어요. 제가 아이를 낳느라 가장 절박했던 때에 아무도 찾아오지 못하게 하고, 건너편 사촌 형님들까지 막아 세웠어요. 대체 왜 그랬겠어요?”“아주버님은 무능하고 마음이 무른 데다, 번거로운 일에 나서기도 싫으셨던 거예요. 제 부군의 일도, 심씨 집안의 일도 그만큼 마음에 두지 않으셨던 거고요. 조금 전 하신 말씀은 전부 그 무능함을 덮으려는 변명일 뿐이에요. 그런데도 스스로 아무 잘못 없는 것처럼 이유를 붙여 가며, 모든 허물을 남에게 돌리고 계시잖아요.”“아주버님이 그렇게 내버려 두지 않으셨다면,

  • 주문춘귀   제1229화

    들어오라는 말을 전해 들은 심태숙은 속으로 안도했다. 그러나 눈앞에 드리워진 발을 보니, 막상 계연수를 마주할 순간이 다가왔다는 생각에 드물게도 몸 둘 바를 몰랐다.심태숙은 숨을 깊이 들이마신 뒤 안으로 들어섰다.안에서 기다리던 시녀가 심태숙을 의자로 안내하고는 몸을 숙여 차를 올렸다. 찻잔을 받아 들자 그윽한 향이 피어올랐다. 하지만 방 안에 짙게 밴 약 냄새와 뒤섞인 그 향은 심태숙의 마음을 까닭 모르게 무겁게 짓눌렀다.심태숙은 차를 마시지 않았다. 병풍 너머에서 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병풍에 희미하게 비친 그림자만으로는 안쪽 사정을 알 수 없었지만, 계연수의 몸이 좋지 않다는 것만은 분명했다.문득 그날 밤 백씨를 끌고 가던 계연수의 눈빛이 떠올랐다. 아무런 감정도 남지 않은 듯 차갑고 단호했던 눈이었다. 그 생각에 심태숙은 다시 가슴이 조여 왔다.목구멍에 무언가 걸린 듯했다. 한참이 지나서야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몸은 좀 나아졌소?”계연수는 막 한바탕 기침을 쏟아 낸 뒤였다. 가슴이 들썩이고 숨이 가빴으며, 온몸의 뼈마디가 은근히 쑤셨다. 감기와 기침에 시달리느라 밤에도 제대로 잠들지 못했다.계연수는 조금 잠긴 목소리로 담담하게 대답했다.“그럭저럭 지내요.”심태숙은 그 쉰 목소리를 듣고 무릎 위에 놓인 손가락을 어색하게 꼼지락거렸다. 그러고는 병풍을 바라보며 말했다.“이번 일은 우리 큰방이 제수씨에게 못 할 짓을 했소…….”계연수는 입술을 다물었다. 일이 다 벌어진 뒤에 하는 말을 들어 줄 마음은 없었다.미안하다고 한들 무엇이 달라지는가. 그 말로 아이가 제 곁에 돌아올 수 있단 말인가. 태후는 자신과 아이를 함께 죽이려 했다. 그 뜻대로 되었더라면, 뒤늦게 아무리 사죄한들 무슨 소용이 있었겠는가.계연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무 의미도 없는 말에 감정을 소모하고 싶지 않았다. 미간에는 벌써 참기 힘들다는 기색이 어렸다.한참이나 답이 없자 심태숙도 깨달았다. 계연수는 그들을 용서할 생각이 없었다.두려움이 더욱 커지면서, 준비

  • 주문춘귀   제1228화

    계연수의 손끝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용춘의 말대로 심태숙에게도 책임은 있었다.심서준은 분명 계연수가 아이를 낳은 뒤에야 백씨를 돌아오게 하라고 했다. 그런데도 백씨가 미리 돌아왔을 때 심태숙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백씨가 돌아올 수 있었던 것부터가 심태숙이 심서준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은 탓이었다.그가 직접 가담하지 않았더라도, 백씨가 무슨 짓을 꾸미는지 정말 몰랐더라도 마찬가지였다. 백씨가 이 지경까지 나아간 데에는 심태숙의 방임도 한몫했다.계연수가 해산하던 날에도 심태숙은 오후에 관청에서 돌아와 집에 있었다. 조금만 더 관심을 기울였더라면, 백씨를 조금만 더 경계했더라면 이런 참극까지 벌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주종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추운이 들어와 심태숙이 또 찾아왔다고 조용히 아뢰었다.계연수는 그를 조금도 만나고 싶지 않았다. 더 말할 것도 없다는 듯 만나지 않겠다고 했다.추운이 대답하고 나가자, 곧 밖에서 심태숙의 울먹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제수씨, 이번 한 번만 만나 주시오. 이렇게 부탁하오.”계연수는 미간을 찌푸렸다. 저토록 끈질기게 자신을 만나려는 까닭이 무엇이겠는가.계연수는 용춘을 내보내 말을 전하게 했다. 백씨를 위해 선처를 구하러 온 것이라면 그럴 필요 없으며, 자신에게 사정할 것이 아니라 형부에 가서 청하라고.계연수는 중생을 구제하는 보살이 아니었다. 제 처지도 이 지경이라 자신 하나 구하지 못하는데, 무슨 수로 남까지 구하겠는가. 더구나 백씨를 옥에 보낸 사람은 계연수 자신이었다. 이제 와서 그 여자를 용서하라니, 우습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밖에서 용춘의 말을 들은 심태숙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하얗게 질렸다.그 표정만 보아도 용춘은 계연수의 짐작이 맞았음을 알 수 있었다. 정말로 백씨를 위해 사정하러 온 것이다.용춘의 목소리에서도 평소의 공손함이 옅어졌다. 희미한 짜증마저 묻어났다.“큰 대감, 저희 부인께서는 몸이 많이 상하셨어요. 부디 헤아려 주시고 편히 쉬시게 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큰부인께서

  • 주문춘귀   제1227화

    방 어멈은 계연수가 사촌 형수들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나면, 며칠쯤은 조용히 몸조리에 전념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사정은 그렇지 못했다.위 집사는 매일 찾아왔고, 최씨도 노부인의 근황을 전하러 왔다. 그래도 두 사람은 늘 한낮에 왔으니 괜찮았다. 그 무렵이면 계연수도 대개 몸을 일으켜 잠시 책을 읽곤 했다.요 며칠 계연수는 입맛이 없어 음식을 많이 먹지 못했다. 침상에서 내려오지도 않은 채 담백한 국이나 채소 요리를 조금씩 먹는 정도였다. 임 원정은 깊이 상심하거나 감정이 크게 요동친 뒤에는 장부에도 영향이 가니, 억지로 많이 먹이지 말고 조금씩 먹게 하라고 당부했다. 그 말을 들은 방 어멈도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다행히 계연수의 고열도 서서히 가라앉고 있었다.문제는 도무지 계연수를 가만히 쉬게 두지 않는 사람들이었다.심소연은 요즘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날마다 찾아왔다. 계연수가 만나지 않겠다고 해도 염치없이 밖에서 기다렸다. 계연수는 성정이 너그러워 매번 정중히 돌려보냈지만, 심소연은 다음 날이면 어김없이 다시 나타났다. 얼굴을 보지 않는다 해도 번거롭기는 마찬가지였다.심태숙도 골칫거리였다.계연수는 요 며칠 몸이 지쳐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약을 먹고 나면 곧 잠들곤 했는데, 어젯밤에는 관청에서 돌아온 듯한 심태숙이 찾아왔다. 방 어멈이 나가 이미 주무신다고 전했으나 믿으려 하지도 않고 기어이 만나야겠다고 고집을 부렸다.그렇다고 계연수를 깨울 수는 없었다. 방 어멈은 더 응대하지 않았고, 결국 심정우가 와서 설득한 뒤에야 심태숙을 돌려보낼 수 있었다.그런데 관청에 나가지 않는 오늘은 최씨가 와서, 심태숙이 노부인 처소에 가 울고 있다고 전했다.노부인의 병세가 이제야 조금 나아지려는 참이었다. 그런 분의 침상 곁에 무릎을 꿇고 대성통곡하며, 계연수가 자신을 만나 주도록 해 달라고 애원한다는 것이었다.예전에는 이토록 분별없이 처신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이제는 계연수가 만나 주지 않는다고 노부인까지 몰아붙이고 있었다.게다가 고씨 집안

  • 주문춘귀   제1226화

    마지막으로 방씨가 무슨 말을 할 듯 망설이다 계연수를 바라보았다.“우리, 여상이도 한번 볼 수 있을까?”그러고는 얼른 덧붙였다.“잠깐 얼굴만 보마. 후작의 아이지 않느냐. 우리도 얼마나 기다렸다고.”계연수는 방 어멈에게 취낭을 시켜 아이를 데려오라고 일렀다.취낭이 아이를 안고 들어서자 세 사람은 모두 그 곁으로 모여들었다.심여상은 아직 잠들어 있었다. 포동포동한 뺨에는 배냇솜털이 채 가시지 않았고, 빛을 받은 작은 얼굴은 백옥처럼 희고 고왔다. 세 사람은 귀여워 어쩔 줄 모르고 아이를 들여다보았다. 촉촉한 입술이 오물오물 움직이자, 진씨는 끝내 참지 못하고 손을 뻗어 조그만 손을 살며시 쥐었다.태어난 지 며칠 되지도 않은 아이였건만, 가만히 보고 있으면 어쩐지 눈매며 이목구비가 심서준을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계연수와는 그다지 닮지 않은 듯했다.하지만 성정만큼은 아버지와 달리 순할 것 같았다. 이렇게 곤히 자는 모습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어린 심서준은 누구도 제 몸에 손을 대지 못하게 했으니까.한번 안아 보려고만 해도 싫다는 듯 몸을 뒤틀었다. 말도 못 하던 때부터 그랬으니, 심 노부인이 얼마나 진땀을 뺐던가.세 사람은 한참을 들여다보고도 좀처럼 눈을 떼지 못했다. 그러다 이따금씩 손길이 닿는 통에 결국 잠에서 깬 심여상이 눈을 뜨더니 이내 울음을 터뜨렸다.그런데도 세 사람의 얼굴에는 환한 웃음이 번졌다.집안에 큰 변고가 닥치고 슬픔이 겹쳤다 한들, 심여상은 모두가 아끼는 귀한 아이였다. 이 겨울, 집안에 찾아든 유일한 기쁨이기도 했다.취낭이 젖을 먹이러 심여상을 안고 나가자, 방씨도 어느덧 한낮이 가까워졌음을 알았다. 계연수의 병색이 짙은 것을 보고 거듭 몸조리를 당부한 뒤에야 다른 두 사람과 함께 물러났다.계연수의 처소를 나온 세 사람은 한동안 탄식을 금치 못했다.예전의 계연수는 얼마나 밝고 눈부셨던가. 살결은 희고 고왔으며, 어디서든 웃는 낯으로 스스럼없이 사람을 대했다. 보고만 있어도 마음이 가는 사람이었다. 그런

  • 주문춘귀   제1225화

    방씨의 말을 듣고 진씨도 입을 다물었다. 섣불리 단정할 일은 아니었다. 만에 하나 심태숙도 연루되어 있다면, 괜히 나서서 그를 두둔한 셈이 되지 않겠는가.진씨는 계연수를 돌아보며 다시 다독였다.“걱정하지 말거라. 우리는 당연히 동서 편이다. 집안에 등을 돌리고 남과 한통속이 된 자가 있다면, 우리도 절대 감싸거나 덮어 주지 않을 것이다.”몇 마디 이야기를 더 나눈 뒤, 계연수가 당부했다.“아이 일은 당분간 어머님께 말씀드리지 말아 주세요. 나중에 몸이 좀 나아지시면 그때 알려 드리려고요.”방씨가 고개를 끄덕였다.“걱정하지 말거라. 우리도 그 정도 분별은 있다.”그러고는 계연수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나는 동서의 그 아이가 복이 많은 아이라고 믿는다. 아직 찾지 못한 건 누군가 데려다 보살피고 있어서일 수도 있지 않느냐. 좋은 쪽으로 생각하자. 포기하지만 않으면 언젠가 그 아이가 동서 앞에 나타날지도 모르지.”계연수도 그 희망을 품고 있었기에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방씨에게 다시 당부했다.“넷째 형수님께서 형부로 잡혀가신 일도 결론이 나기 전까지는 알리지 말아주세요. 괜히 다들 제게도 불똥이 튈까 두려워하다가 불필요한 소란이 생길 수 있으니까요. 지금은 집안부터 안정시키는 게 우선이에요.”방씨도 옳은 말이라 여기고 선뜻 대답했다.“알겠다. 해서는 안 될 말은 우리도 하지 않을 테니 마음 놓거라.”“오늘 온 것도 동서가 걱정돼서다. 지난번 오문 앞에 가서 무릎을 꿇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얼마나 애가 탔는지 몰라. 막상 와서 보니 몸이 이 지경이라 더 마음이 쓰이는구나.”“다른 일은 너무 신경 쓰지 말거라. 무슨 일이 있으면 내게 사람을 보내. 어머님도 우리가 살필 테니. 집안에 이런 일이 생겼을 때일수록 서로 힘을 모아야지.”“집안일도 감당하기 벅차면 내게 맡기거라. 나도 여러 해 살림을 맡아 왔으니 그 정도는 해낼 수 있다.”계연수는 고마운 마음에 고개를 끄덕였다.“도움이 필요하면 형수님들께 부탁드릴게요.”방씨가 얼른 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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