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제6화

Author: 경옥
이명유의 안색이 음침하게 굳었다. 그녀는 계연수가 뒤돌아서 자리를 뜰 때까지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계연수를 따라왔던 용춘은 조금 전 그녀의 말을 듣고 통쾌한 기분이 들었지만 걱정도 되었다.

그녀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만약 또 나으리께 가서 고자질을 하면….”

이런 일은 처음 있는 게 아니었다. 이명유는 겉보기에 온순하고 선한 인상을 주지만 뒤에서 간사한 술수를 부린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필 사옥현은 그녀를 편애하며 한 번도 부인인 계연수의 말을 믿은 적이 없었다.

계연수는 요 며칠 안에 사옥현과 화리에 관한 일을 상의할 생각이었으니, 이명유가 고자질을 하든 말든 중요치 않았다.

그녀와 사옥현은 처음부터 함께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옷깃을 여미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걱정 말고 먼저 돌아가자꾸나.”

긴 치맛자락이 축축이 젖은 돌바닥을 스치고 지나갔다.

죽림을 지날 때, 앞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늘 아침에 입도 벙긋 못하는 거 봤나요? 아무리 분해도 지가 참는 것 외에 더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겠어요?”

“애초에 그런 초라한 혼수를 들고 시집을 온 게 뻔뻔한 거지. 옥현이 아니면 누가 그런 거렁뱅이를 거두어 주겠어?”

말을 마친 그녀는 또 한숨을 쉬었다.

“그년만 끼어들지 않았으면 옥현이도 명유도 잘 어울리는 한쌍이 되었을 텐데.”

계연수는 그 자리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앳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말은 그렇게 해도 사실 좀 불쌍하지 않나요?”

“계씨 집안이 건재할 때 얼마나 위풍당당했나요? 저희 가문은 쳐다도 볼 수 없는 자리에 있었죠. 하루아침에 그렇게 될 줄 누가 알았겠어요.”

또 다른 목소리가 비웃음을 터뜨렸다.

“동정할 필요 없어. 이게 팔자인 것이지.”

“형님이 왜 그년에게 살림을 안 맡기는지 아니? 그년이 집안의 돈을 빼돌려서 병든 자기 어미의 탕약을 사는데 보탤까 봐 그러는 것이지. 외조부 가문도 몰락했으니 그런 년에게 살림을 맡기면 집안살림이 다 거덜 날 것이야.”

“형님은 줄곧 그년을 경계하고 있었다고.”

대화소리는 점점 멀어져 갔고 싸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용춘은 멍하니 계연수를 바라보았다.

조금 전 목소리는 둘째 부인과 그 며느리의 목소리였다.

계연수는 고개를 들고 힘없이 아래로 추락하는 마른 나뭇잎과 흩날리는 눈을 보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날 밤, 그녀는 처소 뒤편에 있는 작은방에서 서신을 쓰기 시작했다.

이 방은 평소 계연수가 서재로 쓰고 있었다. 사옥현 자신은 매일 서재에 머물면서도 그녀에게는 집안의 서재에 접근도 하지 못하게 했다. 내원의 서재도 마찬가지였다.

계연수는 그가 복잡한 공무를 처리하다 보니 타인이 서재에 쉽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도 타당하다고 생각하여 맨 뒤편의 허름한 방에 서재를 만들었다.

이곳은 창고와 맞닿아 있어서 평소에 인적이 드물었다. 계연수 본인도 조용한 것을 좋아하고 집안 살림을 돌볼 필요도 없으니 한가할 때면 이곳에서 시간을 보냈다.

어슴푸레한 등불은 방안을 밝게 비추진 못했지만 책상 하나를 비추기엔 충분했다.

계연수는 허리를 곧게 펴고 앉아 붓대를 들고 서신을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이제 계씨 가문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외가에도 오래 머무를 수 없으니 화리한 후를 미리 대비해 두어야 했다.

서신을 마무리한 그녀는 살며시 품에 안긴 고양이를 쓰다듬었다.

그녀가 주워온 길고양이지만 사옥현이 싫어해서 이곳에서만 길러왔다.

용춘이 다가와 서신을 접고 봉투를 봉했다. 계연수는 진지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가능한 한 서둘러야겠어.”

용춘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계연수는 반쯤 완성된 그림을 펼치고 다시 붓대를 들었다.

사옥현이 처소로 돌아왔을 때는 온몸에 이른 겨울의 한기가 돌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갔지만 안채는 텅 비어 있었다.

그는 매번 돌아올 때면 다가와서 망토를 들어주고 따뜻한 탕을 손에 쥐여주던 계연수를 떠올렸다.

그가 언제 돌아오든 그녀는 늘 이곳에서 그녀를 기다렸다.

사옥현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어멈이 다가와 작은 소리로 말했다.

“작은 마님은 뒤편의 작은 방에 계십니다. 소인이 불러드릴까요?”

사옥현은 말없이 옷을 갈아입었다. 그의 뜻을 알아차린 어멈은 조용히 물러갔다.

안채에서 나온 그는 망토를 아무렇게나 던지고 서재로 향했다. 문앞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탕약이 끓고 있었다. 쓴 탕약의 향기가 안뜰을 은은하게 채웠다.

탕약을 다리던 시녀는 그의 시선을 느끼고 다급히 일어섰다.

“소인은 작은 마님을 위한 풍한 약을 달이고 있었습니다.”

소인은 그날 계연수가 기침을 몇번 했던 것을 떠올렸다. 하지만 이미 이삼 일이 지난 후였다.

부관이 저택으로 의원을 부른 일도 알고 있었다.

그가 기억하는 계연수는 한 번도 병을 앓은 적이 없었다. 늘 잔병에 시달리는 사람은 이명유였다.

그는 입술을 깨물고는 말없이 앞을 향해 걸었다.

계연수는 밤이 되어서야 안채로 돌아왔다. 그림을 너무 집중해서 그리다 보니 사옥현이 돌아왔는지 신경 쓸 여유가 없어서 늦었던 것이다.

안채로 돌아오니 방 안은 여전히 텅 비어 있었다. 어두컴컴한 등불을 보니 그는 오늘도 안 돌아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문 앞을 지키던 시녀가 다가와 작은 소리로 아뢰었다.

“나으리께서는 왔다가 가셨습니다.”

계연수는 걸음을 멈추었다.

시녀가 다급히 말했다.

“나으리께서는 서재에 계십니다.”

계연수는 옆에 있는 누각을 바라보았다. 주변은 어두컴컴하고 누각 위층의 창문에서만 밝은 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창가에 두 사람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그녀는 한눈에 그 그림자를 알아보았다.

계연수는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그녀는 한 번도 발을 들인 적 없는 서재이지만 이명유는 자유롭게 출입이 가능했다.

계연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안채로 향했다.

사옥현은 이곳에 돌아와 밤을 묵는 일이 거의 드물었다. 서재로 간 것을 보니 이명유를 위해 간 것 같았다.

최근 그녀는 여전히 기침을 앓고 있었다. 그가 돌아왔다고 해도 얼마 못가 또 나가버릴 것이다.

잠기가 예민한 그는 작은 소리에도 예민하게 반응했다.

그녀는 사옥현을 기다려 하루라도 빨리 화리 사안을 논의하고 싶었다.

시녀가 다가와서 작은 소리로 아뢰었다.

“방금 전에 나으리께 보신탕을 보내드렸는데 다시 돌려보내셨어요. 아직 따뜻한데, 한모금 드시겠어요?”

안채로 들어간 계연수는 흔들의자에 앉았다.

그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난로에 손을 뻗었다.

그러고 보니 시녀에게 다시는 사옥현에게 보신탕을 보낼 필요 없다고 이야기한 적이 없었다. 전에는 싫다고 했지만 그가 바쁜 공무에 지쳐가는 것이 안타까워서 매일 보내줬던 것이다.

매번 되돌아온 보신탕은 아까워서 그녀가 마셨다.

계연수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으며 시녀에게 말했다.

“너희가 마시거라. 그리고, 앞으로는 달일 필요 없어.”

시녀는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고 멍하니 계연수를 바라보다가 물었다.

“정말… 입니까?”

계연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시녀를 물리고 뻐근한 어깨를 주물렀다.

용춘이 탕약을 가져오며 말했다.

“풍한은 대체 언제 나으려나 모르겠네요.”

“가벼운 풍한인 줄 알았는데 이리 오래 갈 줄은 몰랐지.”

계연수는 말없이 탕약을 들었다. 탕약의 쓴맛에 그녀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갑자기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이때, 부드러운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형수.”

고개를 들어 보니 사옥현과 이명유가 함께 안으로 들어왔다.

사옥현은 마치 그녀를 지키려는 듯이 그녀보다 한발 앞에서 걸었다.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Latest chapter

  • 주문춘귀   제355화

    떠날 즈음엔 이미 한낮이 훌쩍 지나 있었다.고씨 노부인은 계연수와 고씨가 절에 들러 기도를 올린다 하자 더 붙잡지 않았다.오후가 되자 잠시 하늘이 개었다. 모녀는 먼저 집에 들렀다가 그 뒤 법화시로 향했다.마차 안에서 계연수가 용춘에게 물었다.“그림은 전해 두었느냐?”용춘이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걱정 마세요. 옆집 문간에 맡겨 두었습니다. 심 대인께서 돌아오시면 바로 전해 드리겠다고 했습니다.”계연수는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고 더는 묻지 않았다.오늘 법화시는 한산한 편이었다.이들이 기도를 드리러 온 까닭은 단 하나, 앞길이 순탄하길, 이후의 삶이 무사하길 바라는 마음 때문이었다.계연수의 아버지는 평소 신불을 믿지 않았고 그녀 또한 크게 의지하는 편은 아니었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달랐다.불상 앞에 무릎을 꿇고 세 번 머리를 조아렸다. 내일 길이 막힘없이 이어지기를, 지난번처럼 뜻밖의 변고가 없기를, 도적이나 유랑 무리 없이 무사히 휘안현에 닿기를, 그곳에 가서도 지나치게 험난하지 않기를.기도를 마친 뒤에는 어머니와 함께 법사를 찾아가 관음부와 오뢰부를 하나씩 받아 몸에 지녔다. 고씨는 더 정성을 들이고 싶다며 절에서 저녁 공양까지 하고 가자고 했다.계연수는 어머니가 이런 것에 마음을 두는 걸 알았기에 순순히 따랐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식사를 할 때까지만 해도 가느다란 비였는데 공양을 마치고 나오자 하늘이 갑자기 어두워지며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한 것이다.이런 날씨로는 더는 길을 나설 수 없었다.결국 절에 하룻밤 묵고 이튿날 새벽 날이 밝으면 떠나기로 했다.*그 무렵, 심서준은 형부에서 막 나오는 길이었다.형부 대청 앞에 서자, 형부상서와 대리시경이 나란히 따라섰다.군호(軍戶)들의 횡령 사건이었다. 주부 동지와 결탁해 뇌물을 주고받았고 위진무사까지 얽혔다. 심지어 위지휘사도 연루되어 서로 책임을 미루며 물고 늘어졌다.금의군이 관련된 자들을 모두 압송해 경성으로 들여왔고 심문은 거의 끝나 있었다. 마지막 형량을

  • 주문춘귀   제354화

    상 위에는 향로와 불수 한 개가 놓여 있었고, 고준안이 가져왔으나 거의 손대지 않은 감말이 과자 한 접시도 그대로였다.향로에서 흰 연기가 가늘게 피어올랐다. 단정한 방 안에서 계연수는 옆에 놓인 난초 무늬 비단 장침에 손끝을 얹은 채 어머니와 내일 떠날 일정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외할머니께는 굳이 미리 알리지 않고 휘안현에 도착한 뒤에야 전하자고 마음을 정했다.사금희를 마주친 일을 떠올리면 더 머물 이유도 없었다. 이곳의 인연과 얽힘을 하루라도 빨리 끊어내는 편이 나았다.말을 마친 뒤, 계연수는 어머니의 얼굴을 조심스레 올려다보았다. 아무 말 없이 떠나려는 까닭은 또 하나 있었다. 고준안에게 자신이 함께 휘안현으로 가길 바라지 않는다는 뜻을 분명히 전하고 싶어서였다.고씨는 딸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그 눈빛은 화리서를 건네며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하던 그날과 같았다. 이미 스스로의 길을 정해 놓았다는 듯, 고요하고도 단단한 기색.고씨는 알고 있었다. 계연수가 진심으로 고준안을 끌어들이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을, 짐이 되고 싶지 않은 마음이라는 것을.이제 딸은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할 만큼 자라있었다. 어머니로서 자신이 할 일은 더는 딸의 발목을 붙잡지 않는 것이었다.다만 마음 한구석이 저릿했다. 아직 나이도 많지 않은 아이라 원래라면 평탄한 귀부인의 삶을 살았어야 마땅하거늘, 병약한 어머니를 데리고 낯선 땅으로 떠나야 한다니.고씨는 더이상 고준안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이미 딸은 선택을 끝냈으니 그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래.”모녀는 이튿날 떠나기로 의논했다. 사씨 집안 사람들이 언제 다시 들이닥칠지 모르는 이상 서둘러야 했다.계연수는 이제 사씨와 어떤 식으로도 얽히고 싶지 않았다. 고씨 역시 동의했다. 화리한 이상 더는 왕래도, 인연도 필요 없었다.다만 고씨는 떠나기 전, 고씨 노부인을 한 번 더 뵙고 싶어 했다. 떠난다는 말은 하지 않더라도 말이다.계연수는 어머니의 마음을 헤아려 출발을 하루 미루기로 했다.*밤이

  • 주문춘귀   제353화

    바깥채는 어둑했고 대문 아래 걸린 등롱 불빛은 안쪽까지 닿지 못했다.심서준은 온몸이 어둠 속에 잠긴 채 서 있었다. 계연수는 그의 얼굴을 또렷이 볼 수 없었지만 묘하게도 그가 기분이 좋지 않다는 기색은 느낄 수 있었다.그의 시선은 지금 자신을 향하고 있으리라.계연수는 잠시 멈칫하다가 다시 우산을 펴고 유리 등롱을 들고 그 앞으로 다가갔다.비는 실처럼 가늘게 흩어졌고 등롱의 불빛은 빗줄기에 잘게 부서졌다. 젖은 청석 바닥 위로 차가운 빛이 잔물결처럼 번졌지만 그의 표정은 여전히 선명히 보이지 않았다.두 걸음쯤 거리를 둔 채 그녀가 물었다.“심 대인, 이제 돌아가시려는 겁니까?”심서준은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잠시 뒤, 검은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으며 물었다.“그 자는 당신 사촌입니까?”“네. 둘째 오라버니예요.”심서준이 한 걸음 더 다가서자 등롱의 부드러운 빛이 그녀의 얼굴 위로 내려앉았다. 주변에는 젖은 공기와 빗소리가 감돌았다.비에 젖은 은은한 향이 스쳤다. 우산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 속에서 그의 시선이 천천히 내려왔다. 눈빛은 어둡고도 알 수 없는 기색을 띠고 있었다.“너무 가까이 서 있던데.”그 한마디에 계연수가 미묘하게 굳자 심서준이 덧붙였다.“앞으로 밤에는 남자를 집에 들이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그제야 그녀는 그의 뜻을 짐작했다. 밤에 고준안과 함께 식사를 한 것이 경솔해 보였던 걸까, 아니면 소문이 돌까 염려한 것일까.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의 말이 아주 틀린 것도 아니었다. 화리한 사실은 이미 알 사람은 다 알 것이다. 고씨 집을 떠나 따로 살고 있는 지금, 밤에 사촌이라 해도 남자가 드나든다면 누군가의 입에 오르내릴 수도 있었다.계연수는 고개를 끄덕였다.“앞으로는 조심하겠습니다.”그녀의 눈빛은 진지했다.조금 전까지 고준안과 단둘이 서 있던 모습을 보고 긴장했던 심서준의 마음이 그녀의 한마디에 서서히 풀어졌다. 늘 차갑던 그의 눈매도 조금씩 부드러워졌다.가느다란 비바람에 그녀의 단정한 머리칼이 살짝 젖어 붉게

  • 주문춘귀   제352화

    심서준이 돌아서려는 순간, 계연수는 문득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밤늦게까지 와서 어머니의 약을 걱정해 주었는데 정작 자신은 그가 머물기 불편하다고 느끼게 만든 것만 같았다. 그 생각이 스치자 죄스러움이 밀려왔다.그녀는 무의식중에 손을 뻗어 그의 소매를 붙잡았다.“심 대인…”심서준의 걸음이 멈췄다.그의 시선이 조용히, 그녀가 붙든 소매 끝으로 내려갔다가 다시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아무 말 없이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계연수의 목소리는 밤빛 속에서 더욱 가늘게 흩어졌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얼른 손을 놓았다.“심 대인께서 괜찮으시다면요.”심서준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나지막하고 부드러운 음성이 가슴을 조여왔다. 방금 전, 그녀가 소매를 잡아당기던 그 짧은 순간, 심장이 또 한 번 급하게 뛰어오른 것을 그는 분명히 느꼈다.*식탁의 공기는 유난히 어색했다.작은 네모난 상에 네 사람이 한 자리씩 마주 앉았다. 올려진 반찬은 고작 세 가지. 숨조차 크게 쉴 수 없을 듯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오직 심서준의 얼굴만이 태연했다. 곁에 서 있던 문하조차 발끝이 오그라드는 듯한 표정이었다.계연수는 젓가락을 쥔 채, 흘끗 심서준을 바라보았다. 그가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이 자리가 어딘가 어울리지 않는 듯했다.어려서부터 귀한 집안에서 자라난 탓일까. 그의 몸에는 자연스레 배어 있는 품위가 있었다. 소박한 반찬 몇 가지와는 확연히 다른 세계의 사람처럼 보였다.고씨 또한 심서준을 자주 본 적은 없었다. 두세 번 마주친 것이 전부였고 그것도 이미 오래전 일이었다. 세월이 흐르니 이제 사람도, 세상도 달라져 있었다.그녀는 어딘가 긴장한 얼굴로, 음식이 입에 맞는지 몇 번이나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부족할까 싶어 부엌에 다시 음식을 내오라 할 기세였다.손님이긴 하나 심서준은 마치 이 집의 주인처럼 태연하게 앉아 있었다.“맛이 좋습니다.”그 한마디에 상에 둘러앉은 이들은 모두 저도 모르게 숨을 돌렸다.고준안은 간간이 심서준을 힐끗 바라보았다. 이런

  • 주문춘귀   제351화

    상 위에 막 차려진 음식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고 있었지만 계연수는 아직 한 젓가락도 들지 못했다.그때 용춘이 들어와 낮은 목소리로 심서준이 왔다고 전했다.계연수는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이 시간에 심서준이 올 줄은 전혀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심 대인께서 무슨 일로?”용춘은 고개를 저으며 의미심장하게 눈을 찡긋했다.“아직 문밖에서 기다리고 계세요.”문밖에서… 기다린다고?계연수는 잠시 그 모습을 상상해 보려 했으나 잘 그려지지 않았다. 그가 자신을 찾으러 온 것이 분명하다 여겨 어머니와 고준안에게 먼저 식사하시라 말하고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대문 앞에 이르자 처마 아래 서 있는 심서준이 눈에 들어왔다.검은 옷을 입은 채 길게 뻗은 몸매로 조용히 서 있었다. 차분하면서도 서늘한 기품이 감돌았고 단정한 얼굴에는 깊은 정적이 내려앉아 있었다. 늘 사람을 압도하던 눈빛이 지금은 곧장 그녀를 향해 있었다.그는 빗줄기와 어우러져 한 폭의 냉담한 그림 같았다. 현색 옷자락이 밤빛과 겹치자 오히려 더 고귀해 보였다.계연수는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빗소리에 묻혀 목소리가 한층 가늘어졌다.“심 대인께서… 저를 찾으신 건가요?”심서준은 그녀의 뒤편 멀찍이 서 있는 고준안을 한 번 흘끗 보았다. 그는 다가오지 않은 채,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었다.심서준은 다시 계연수의 얼굴로 시선을 옮겼다.언제부턴가 그녀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사라졌고 늘 그 앞에서 보이던 조심스러움이 다시 스며 있었다.그는 두 손을 등 뒤로 모은 채, 그녀의 어깨에 맺힌 가는 물기를 바라보았다. 손에는 우산이 들려 있었지만 빗물이 스며들었는지 옷깃과 머리칼 끝에 습기가 서려 있었다. 계연수가 물기 어린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심서준은 최대한 부드러운 어조로 낮게 물었다.“아침에 보낸 과자는 드셨습니까?”계연수는 잠시 놀랐다.이걸 묻기 위해 온 것일까?“네, 다 먹었습니다.”심서준은 다시 물었다.“어제 드린 약은 예전 것과 비교해 보면 어떻습니까? 효과가 있다면 더 보내드

  • 주문춘귀   제350화

    계연수는 그 일을 떠올렸다. 어릴 적 그녀는 유난히 먹을 것을 밝히는 아이였다. 많이 먹으면 항상 배를 잡고 앓아누웠기에 어머니는 밤에 더 먹지 못하게 하셨다. 그래서 배가 고프면 몰래 밖으로 나갔다.그날도 밤에 먹었던 얼음피 녹두떡이 생각나 부엌을 뒤지러 갔다가 하필이면 고준안에게 들키고 말았다.그 기억에 계연수는 저도 모르게 웃었다.“다 먹고 나니 온 집안이 우리를 찾느라 난리였죠. 오라버니께서는 큰 외숙부께 맞기까지 하셨잖아요.”고준안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아버지도 얼마나 놀라셨는지. 손바닥 스무 대를 맞았지. 손이 퉁퉁 부었었다. 그래도 덕분에 다음 날 새벽 글씨 연습은 면했지.”그가 그 일로 슬쩍 게으름을 피웠다는 사실에 계연수는 뜻밖이라는 듯 눈을 크게 뜨고 이내 입을 가리며 웃었다.웃음 끝이 한결 가벼워졌고 마음의 무게도 조금은 옅어졌다.고준안은 그녀의 웃는 얼굴을 바라보았다. 여섯, 일곱 살 무렵의 계연수는 아직 여물지 않은 눈 덩이처럼 동그랗고 통통한 아이였다.지금의 그녀는 달랐다. 어느새 많은 이들의 시선을 받는 여인이 되었다.사가에서 마음을 바꾼 것인지 오늘 오전에 찾아왔다. 그리고 심가의 그 인물까지.앞으로 또 누가 있을까?고준안은 입술을 가만히 다물었다. 차라리 하루라도 빨리 계연수와 이곳을 떠나고 싶었다.그가 바라던 공명 또한 결국 그녀를 위한 것이었다. 그녀가 없다면 공명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담 하나를 사이에 둔 맞은편 누각 위에서 심서준은 어두운 눈빛으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계연수가 고준안과 웃으며 이야기하는 모습. 두 사람이 나란히 서서 옷자락이 거의 스칠 듯 가까이 선 모습.고준안은 이곳을 드나드는 데 아무 거리낌이 없고 계연수 또한 그의 방문을 전혀 낯설어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자연스럽고 편안했으며 가벼웠다.반면 그는 언제나 다른 사람들의 눈을 통해서만 계연수를 볼 수 있었다.그 두 사람의 그림자가 점점 시야에서 멀어졌다. 먹빛 비가 무겁게 내리며 세상을 젖게 만들었고 빗물은

  • 주문춘귀   제32화

    계연수는 가슴끝이 조여 오는 듯, 점점 숨이 막혀왔고, 표정에는 감출 수 없는 상심이 번졌다. 그녀는 유씨를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숙모, 부디 저를 믿어 주세요… 이 일에 대해서는... 내일 아침이 되면 반드시 답을 드리겠습니다.”그러나 유씨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고, 얼굴엔 초조함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이게 벌써 며칠째인데 아직도 시간을 끌겠다는 것이냐? 네 사촌 오라버니가 그런 혹독한 형벌을 견딜 수 있을 것 같으냐? 네가 말이 통하지 않으면 나를 데리고 옥현이를 만나게 해주거라. 내가 직접 그 앞에 무릎을 꿇

  • 주문춘귀   제16화

    고씨 노부인은 애틋한 눈빛으로 계연수를 바라보더니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칼을 쓸어넘겼다.주름진 손가락이 매끈한 얼굴을 스치더니 곧이어 눈가가 붉어졌다.“연수야, 네가 힘든 건 할미도 알고 있다. 의지할 친정도 없이, 사씨 가문으로 시집을 갔으니 그들이 너에게 잘해줄 리 없겠지.”“두 숙모들도 속으로 원망이 많단다. 네 아비 사건으로 네 외숙들까지 연루되었다며 네게 원한을 품고 있어.”“하지만 너무 마음 쓰진 말거라. 이번 일은 네 힘 닿는 데까지만 도와주고 절대 옥현이와 정분을 상하지 않게 하렴. 안 그러면 가문에서 더 힘들

  • 주문춘귀   제19화

    계연수는 면사포로 얼굴을 가리고 손에는 그림을 든 채, 안내를 따라 3층으로 올라갔다.3층 입고에는 비단옷을 입은 수려한 소년이 서 있었는데, 그녀를 보고는 급히 앞으로 나와 길을 인도했다. 병풍 두 개를 지나니, 서재에 이르렀다.눈앞에 펼쳐진 것은 자단목 나무로 만든 커다란 책상이었다. 책상 뒤에는 나이 마흔쯤 되어 보이는 사내가 책상 위에 가득 펼쳐진 그림들을 꼼꼼히 살펴보고 있었다.선택된 그림들은 오늘 오후 사람들에게 경매로 제공될 그림들이었다.사내는 계연수를 보자 급하게 일어나 그녀에게 자리를 권했다.탁자 위에는 따

  • 주문춘귀   제23화

    “이런 네가 어찌 장차 사씨 가문 안주인이 될 수 있겠느냐. 계속 무리한 떼를 쓴다면 사당에 무릎 꿇리고 반성하게 할 수도 있다.”계연수는 온몸에 서늘한 기운이 퍼지는 것을 느꼈다.비록 사옥현의 무정함은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단지 그때 이명유가 일부러 엎질러 버린 찻잔 때문에 3년간 그녀가 한 모든 것을 부정하고 그녀가 아무리 잘해도 그의 눈에는 너그럽지 못하고 편협하며 심술이나 부리는 사람으로 비춰졌던 것이다.그녀는 사옥현에게서 느껴지는 반감과 무력함에 그에게 시선조차 주고 싶지 않았다.계연수

More Chapters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