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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Author: 경옥
오늘의 눈보라는 그렇게 크지 않았지만, 계연수는 방에서 나가자 여전히 추위를 느꼈다.

그녀는 몸에 걸친 여우털 망토를 꽉 여미고 등 위에 쌓인 자욱한 눈을 바라보았는데 마치 앞길에 자욱한 안개가 낀 것 같았다.

시어머니 임 씨도 요 며칠 병이 나서, 후원의 사람들이 모두 병문안을 갔다. 계연수가 갔을 때는 이미 방안에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계연수는 방으로 들어간 후, 망토를 풀어 용춘의 손에 놓았다. 그러자 옆에 있던 마마가 그녀를 위해 휘장을 열자, 시끌벅적한 인사 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왔다. 휘장이 열리자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 집중되었고 다들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시집온 지 이삼 년 동안, 사 씨 가문의 사람들은 매번 이런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그녀를 사 씨 집안의 며느리로 여기지 않았고 가까워지려고도 하지 않았다.

계연수는 여전히 평소처럼 시어머니 임 씨에게 다가가 문안을 드렸다.

임 씨는 계연수에게 몇 마디 관심을 하더니 그녀의 병을 물어본 후에야 한쪽에 앉혔다.

또 한 차례의 인사가 오갔고, 아무도 그날 밤 그녀가 홀로 버려진 일을 언급하지 않았다. 그들은 약속이나 한 듯 그녀의 일을 외면했고, 오히려 모두 이명유의 혼사를 토론했다.

이때 둘째 부인이 입을 열었다.

“명유가 성인이 된 지도 벌써 1년이 되었고, 여러 가문을 소개해주었는데 옥현이가 만족하지 않는다고 하니… 명유에게 어떤 부군감을 골라줘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자 셋째 부인이 웃으며 말했다.

“명유는 옥현이가 보고 자랐으니 당연히 부군감을 잘 골라줘야지요.”

이때 어떤 형수가 이명유에게 물었다.

“경성에서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느냐? 네가 마음에 든다면 대부분의 가문엔 모두 시집갈 수 있단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이명유의 아버지는 선주의 지부였고, 한 지역의 부모관으로서 상당한 업적을 남겼다.

다만 어느 해 선주에서 역병이 발생했을 때, 이명유의 아버지가 직접 방역을 하다 그의 부인과 감염되어 모두 세상을 떠났고 어린 이명유와 그녀의 동생 이명청만 남게 되었다.

그해 이명유는 겨우 다섯 살이었고, 이명청은 세 살이었다. 가문의 재산이 족속에게 빼앗기는 것을 피하기 위해 임 씨는 여동생이 남긴 남매를 데려왔다.

이 씨 가문의 재산이 워낙 적지 않은 데다 조정에서도 위로금을 내렸다. 사 씨 가문에서는 위로금을 건드리지 않고 이명유와 이명청의 명의로 두었다.

그리고 이명유 아버지의 유서에 따라 재산을 남매에게 반반씩 나누어 주고, 서로 의지해야 하며 재산 때문에 싸워서는 안 된다고 알려주었다.

그래서 이명유는 고아이긴 하지만 손에 쥔 혼수가 많아 그녀가 평생 돈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게다가 그녀의 아버지는 백성을 위해 희생을 해서, 그녀와 혼인을 하면 혼수품을 풍부하게 얻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좋은 명성을 얻을 수 있었다.

계연수도 시집와서야 알았다. 만약 자신이 그 해에 혼서를 가져오지 않았다면, 사 씨 사람들은 사옥현과 이명유의 혼사를 더 기뻐했을 것이었다.

이명유는 형수의 말에 웃으며 말했다.

“오라버니께서 골라 주실 것입니다.”

그러자 둘째 부인 옆에 있던 사운이 호기심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오라버니는 사촌 언니를 제일 좋아하시지 않습니까? 왜 사촌 언니를 오라버니에게 시집보내지 않는 겁니까?”

사운은 겨우 네다섯 살일 뿐이었고, 둘째 부인이 마흔 살에 낳은 어린 딸이었다. 아이들은 거리낌 없이 말을 하니, 다른 사람들도 신경 쓰지 않고 웃음을 자아냈다.

웃음소리가 잠시 멈추자, 임 씨는 비로소 입을 열었다.

“명유의 혼사는 옥현이가 가장 신경을 쓸 것입니다. 가문과 품성, 그리고 외모는 물론이고 재능도 있어야겠지요. 그렇지 않으면 옥현이가 허락하지 않을 것입니다.”

임 씨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옥현이가 어릴 때부터 명유를 보호해 왔는데, 당연히 명유가 조금의 억울함을 겪는 것도 허락하지 않겠지.”

임 씨는 말을 하면서도 이명유의 손을 꼭 잡고 눈빛에는 아쉬움이 가득했다. 말을 하지 않았지만 방안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임 씨가 아쉬워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임 씨는 다시 한숨을 내쉬더니 이명유의 부드러운 손을 토닥이며 말했다.

“넌 착한 아이이니 네가 이해하거라.”

그 실망스러운 말투와 억울함이 무슨 뜻인지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사람들의 눈빛은 모두 계연수의 몸에 떨어졌다. 계연수는 담담하게 미소를 지었다.

‘사 씨 가문의 청렴한 명성도 단지 이 정도에 불과하구나.’

이명유의 달콤하면서도 허탈한 목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다.

“이모, 저는 조금도 억울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떠났고, 계연수는 임 씨에 의해 남겨졌다. 임 씨는 훌륭한 가문의 여인이라 일거수일투족이 온화하고 적절했으면 말투도 느리고 부드러웠다.

비록 지금 병이 났지만 여전히 온화한 자세로 침대에 기대어 저택의 몇 년 동안 묵은 장부를 정리했다.

계연수를 보는 그녀의 눈빛은 항상 그다지 좋진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한심한 눈빛으로 변해갔다.

예전에 그녀는 항상 그 혼서가 없었다면 사옥현이 그의 출세를 도울 수 있는 가문의 아가씨와 결혼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지만 애초에 이 혼사가 어떻게 정해진 것인지 잊은 것 같았다.

임 씨는 눈살을 찌푸리며 계연수를 바라보았다.

“네가 시집온 지 거의 3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회임 소식이 없는 것이냐? 옥현이가 널 좋아하지 않는다고 치자. 그렇다고 밤에 그를 붙잡을 줄도 모르는 것이냐?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의 마음을 얻으려고 노력을 해야지. 너 이러다가 내가 언제 손자를 볼 수 있겠니?”

임 씨의 말에는 피곤함과 엄격함이 배어 있었고, 대놓고 그녀가 무능하다고 하는 거와 다를 바가 없었다.

사람들은 모두 사옥현이 그녀를 얼마나 싫어하는지 알고 있었고, 사옥현이 좋아하는 사람은 이명유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이제 와서 그녀가 사옥현의 사랑을 받지 못한다며 그녀를 비난했다.

하지만 계연수는 변명을 하지 않았다.

임 씨는 계연수가 말을 하지 않자 골치 아파 이마를 주무르며 말했다.

“정말 옥현이의 마음을 사는 법을 모르겠다면 명유에게 물어보거라. 그녀가 옥현이와 어떻게 지내는지 배우라는 말이다.”

계연수가 임 씨의 방에서 물러날 때까지 이명유는 밖에서 기다렸다.

그녀는 계연수가 나오는 것을 보고 웃는 얼굴로 다가가 그녀의 손을 잡았지만 차가운 눈빛으로 말했다.

“오라버니께서 왜 날 시집보내지 않으려고 하는지 알아?”

계연수는 이명유의 부드러운 시선과 마주쳤다.

이명유는 웃으며 다가가서 두 사람만 들을 수 있는 소리로 말했다.

“오라버니가 날 아껴서 그런 거야. 혹시 그거 알아? 그날 밤, 오라버니께서 날 데려온 후에도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아 매일 나에게 보양품을 보냈다는 거. 방금 기침하는 것 같은데, 오라버니가 널 신경 쓴 적 있어? 사람을 시켜 약을 가져다줬어? 의원도 혼자 부른 거잖아, 불쌍하게.”

계연수는 걸음을 멈칫했다.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다. 사옥현이 모든 사람에게 냉담하고 배려를 모르는 것이 아니라는 걸.

그도 겨울밤이 얼마나 추운지 알고 있었다. 다만 그가 걱정하는 사람은 이명유일뿐이었다.

찬바람이 불어오자 계연수는 이명유를 바라보며 여전히 여유로운 자세로 차갑게 말했다.

“넌 자존심도 없어? 매일 다른 사람의 부군에게 매달리다니. 난 사 씨 가문으로 시집을 온 명분이라도 있지, 정말 서로를 흠모한다면 왜 일찍 계씨 가문에 와서 파혼을 상의하지 않고, 이제 와서 나를 못살게 구는 거야? 계씨 가문이 지금은 가세가 기울었지만, 당초에 사 씨 가문이 혼인을 취소한다면 아버지도 분명 두말없이 동의하셨을 텐데 말이야.”

“그가 혼인을 취소하지 않은 건 널 좋아하지 않아서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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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문춘귀   제355화

    떠날 즈음엔 이미 한낮이 훌쩍 지나 있었다.고씨 노부인은 계연수와 고씨가 절에 들러 기도를 올린다 하자 더 붙잡지 않았다.오후가 되자 잠시 하늘이 개었다. 모녀는 먼저 집에 들렀다가 그 뒤 법화시로 향했다.마차 안에서 계연수가 용춘에게 물었다.“그림은 전해 두었느냐?”용춘이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걱정 마세요. 옆집 문간에 맡겨 두었습니다. 심 대인께서 돌아오시면 바로 전해 드리겠다고 했습니다.”계연수는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고 더는 묻지 않았다.오늘 법화시는 한산한 편이었다.이들이 기도를 드리러 온 까닭은 단 하나, 앞길이 순탄하길, 이후의 삶이 무사하길 바라는 마음 때문이었다.계연수의 아버지는 평소 신불을 믿지 않았고 그녀 또한 크게 의지하는 편은 아니었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달랐다.불상 앞에 무릎을 꿇고 세 번 머리를 조아렸다. 내일 길이 막힘없이 이어지기를, 지난번처럼 뜻밖의 변고가 없기를, 도적이나 유랑 무리 없이 무사히 휘안현에 닿기를, 그곳에 가서도 지나치게 험난하지 않기를.기도를 마친 뒤에는 어머니와 함께 법사를 찾아가 관음부와 오뢰부를 하나씩 받아 몸에 지녔다. 고씨는 더 정성을 들이고 싶다며 절에서 저녁 공양까지 하고 가자고 했다.계연수는 어머니가 이런 것에 마음을 두는 걸 알았기에 순순히 따랐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식사를 할 때까지만 해도 가느다란 비였는데 공양을 마치고 나오자 하늘이 갑자기 어두워지며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한 것이다.이런 날씨로는 더는 길을 나설 수 없었다.결국 절에 하룻밤 묵고 이튿날 새벽 날이 밝으면 떠나기로 했다.*그 무렵, 심서준은 형부에서 막 나오는 길이었다.형부 대청 앞에 서자, 형부상서와 대리시경이 나란히 따라섰다.군호(軍戶)들의 횡령 사건이었다. 주부 동지와 결탁해 뇌물을 주고받았고 위진무사까지 얽혔다. 심지어 위지휘사도 연루되어 서로 책임을 미루며 물고 늘어졌다.금의군이 관련된 자들을 모두 압송해 경성으로 들여왔고 심문은 거의 끝나 있었다. 마지막 형량을

  • 주문춘귀   제354화

    상 위에는 향로와 불수 한 개가 놓여 있었고, 고준안이 가져왔으나 거의 손대지 않은 감말이 과자 한 접시도 그대로였다.향로에서 흰 연기가 가늘게 피어올랐다. 단정한 방 안에서 계연수는 옆에 놓인 난초 무늬 비단 장침에 손끝을 얹은 채 어머니와 내일 떠날 일정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외할머니께는 굳이 미리 알리지 않고 휘안현에 도착한 뒤에야 전하자고 마음을 정했다.사금희를 마주친 일을 떠올리면 더 머물 이유도 없었다. 이곳의 인연과 얽힘을 하루라도 빨리 끊어내는 편이 나았다.말을 마친 뒤, 계연수는 어머니의 얼굴을 조심스레 올려다보았다. 아무 말 없이 떠나려는 까닭은 또 하나 있었다. 고준안에게 자신이 함께 휘안현으로 가길 바라지 않는다는 뜻을 분명히 전하고 싶어서였다.고씨는 딸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그 눈빛은 화리서를 건네며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하던 그날과 같았다. 이미 스스로의 길을 정해 놓았다는 듯, 고요하고도 단단한 기색.고씨는 알고 있었다. 계연수가 진심으로 고준안을 끌어들이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을, 짐이 되고 싶지 않은 마음이라는 것을.이제 딸은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할 만큼 자라있었다. 어머니로서 자신이 할 일은 더는 딸의 발목을 붙잡지 않는 것이었다.다만 마음 한구석이 저릿했다. 아직 나이도 많지 않은 아이라 원래라면 평탄한 귀부인의 삶을 살았어야 마땅하거늘, 병약한 어머니를 데리고 낯선 땅으로 떠나야 한다니.고씨는 더이상 고준안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이미 딸은 선택을 끝냈으니 그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래.”모녀는 이튿날 떠나기로 의논했다. 사씨 집안 사람들이 언제 다시 들이닥칠지 모르는 이상 서둘러야 했다.계연수는 이제 사씨와 어떤 식으로도 얽히고 싶지 않았다. 고씨 역시 동의했다. 화리한 이상 더는 왕래도, 인연도 필요 없었다.다만 고씨는 떠나기 전, 고씨 노부인을 한 번 더 뵙고 싶어 했다. 떠난다는 말은 하지 않더라도 말이다.계연수는 어머니의 마음을 헤아려 출발을 하루 미루기로 했다.*밤이

  • 주문춘귀   제353화

    바깥채는 어둑했고 대문 아래 걸린 등롱 불빛은 안쪽까지 닿지 못했다.심서준은 온몸이 어둠 속에 잠긴 채 서 있었다. 계연수는 그의 얼굴을 또렷이 볼 수 없었지만 묘하게도 그가 기분이 좋지 않다는 기색은 느낄 수 있었다.그의 시선은 지금 자신을 향하고 있으리라.계연수는 잠시 멈칫하다가 다시 우산을 펴고 유리 등롱을 들고 그 앞으로 다가갔다.비는 실처럼 가늘게 흩어졌고 등롱의 불빛은 빗줄기에 잘게 부서졌다. 젖은 청석 바닥 위로 차가운 빛이 잔물결처럼 번졌지만 그의 표정은 여전히 선명히 보이지 않았다.두 걸음쯤 거리를 둔 채 그녀가 물었다.“심 대인, 이제 돌아가시려는 겁니까?”심서준은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잠시 뒤, 검은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으며 물었다.“그 자는 당신 사촌입니까?”“네. 둘째 오라버니예요.”심서준이 한 걸음 더 다가서자 등롱의 부드러운 빛이 그녀의 얼굴 위로 내려앉았다. 주변에는 젖은 공기와 빗소리가 감돌았다.비에 젖은 은은한 향이 스쳤다. 우산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 속에서 그의 시선이 천천히 내려왔다. 눈빛은 어둡고도 알 수 없는 기색을 띠고 있었다.“너무 가까이 서 있던데.”그 한마디에 계연수가 미묘하게 굳자 심서준이 덧붙였다.“앞으로 밤에는 남자를 집에 들이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그제야 그녀는 그의 뜻을 짐작했다. 밤에 고준안과 함께 식사를 한 것이 경솔해 보였던 걸까, 아니면 소문이 돌까 염려한 것일까.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의 말이 아주 틀린 것도 아니었다. 화리한 사실은 이미 알 사람은 다 알 것이다. 고씨 집을 떠나 따로 살고 있는 지금, 밤에 사촌이라 해도 남자가 드나든다면 누군가의 입에 오르내릴 수도 있었다.계연수는 고개를 끄덕였다.“앞으로는 조심하겠습니다.”그녀의 눈빛은 진지했다.조금 전까지 고준안과 단둘이 서 있던 모습을 보고 긴장했던 심서준의 마음이 그녀의 한마디에 서서히 풀어졌다. 늘 차갑던 그의 눈매도 조금씩 부드러워졌다.가느다란 비바람에 그녀의 단정한 머리칼이 살짝 젖어 붉게

  • 주문춘귀   제352화

    심서준이 돌아서려는 순간, 계연수는 문득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밤늦게까지 와서 어머니의 약을 걱정해 주었는데 정작 자신은 그가 머물기 불편하다고 느끼게 만든 것만 같았다. 그 생각이 스치자 죄스러움이 밀려왔다.그녀는 무의식중에 손을 뻗어 그의 소매를 붙잡았다.“심 대인…”심서준의 걸음이 멈췄다.그의 시선이 조용히, 그녀가 붙든 소매 끝으로 내려갔다가 다시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아무 말 없이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계연수의 목소리는 밤빛 속에서 더욱 가늘게 흩어졌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얼른 손을 놓았다.“심 대인께서 괜찮으시다면요.”심서준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나지막하고 부드러운 음성이 가슴을 조여왔다. 방금 전, 그녀가 소매를 잡아당기던 그 짧은 순간, 심장이 또 한 번 급하게 뛰어오른 것을 그는 분명히 느꼈다.*식탁의 공기는 유난히 어색했다.작은 네모난 상에 네 사람이 한 자리씩 마주 앉았다. 올려진 반찬은 고작 세 가지. 숨조차 크게 쉴 수 없을 듯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오직 심서준의 얼굴만이 태연했다. 곁에 서 있던 문하조차 발끝이 오그라드는 듯한 표정이었다.계연수는 젓가락을 쥔 채, 흘끗 심서준을 바라보았다. 그가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이 자리가 어딘가 어울리지 않는 듯했다.어려서부터 귀한 집안에서 자라난 탓일까. 그의 몸에는 자연스레 배어 있는 품위가 있었다. 소박한 반찬 몇 가지와는 확연히 다른 세계의 사람처럼 보였다.고씨 또한 심서준을 자주 본 적은 없었다. 두세 번 마주친 것이 전부였고 그것도 이미 오래전 일이었다. 세월이 흐르니 이제 사람도, 세상도 달라져 있었다.그녀는 어딘가 긴장한 얼굴로, 음식이 입에 맞는지 몇 번이나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부족할까 싶어 부엌에 다시 음식을 내오라 할 기세였다.손님이긴 하나 심서준은 마치 이 집의 주인처럼 태연하게 앉아 있었다.“맛이 좋습니다.”그 한마디에 상에 둘러앉은 이들은 모두 저도 모르게 숨을 돌렸다.고준안은 간간이 심서준을 힐끗 바라보았다. 이런

  • 주문춘귀   제351화

    상 위에 막 차려진 음식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고 있었지만 계연수는 아직 한 젓가락도 들지 못했다.그때 용춘이 들어와 낮은 목소리로 심서준이 왔다고 전했다.계연수는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이 시간에 심서준이 올 줄은 전혀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심 대인께서 무슨 일로?”용춘은 고개를 저으며 의미심장하게 눈을 찡긋했다.“아직 문밖에서 기다리고 계세요.”문밖에서… 기다린다고?계연수는 잠시 그 모습을 상상해 보려 했으나 잘 그려지지 않았다. 그가 자신을 찾으러 온 것이 분명하다 여겨 어머니와 고준안에게 먼저 식사하시라 말하고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대문 앞에 이르자 처마 아래 서 있는 심서준이 눈에 들어왔다.검은 옷을 입은 채 길게 뻗은 몸매로 조용히 서 있었다. 차분하면서도 서늘한 기품이 감돌았고 단정한 얼굴에는 깊은 정적이 내려앉아 있었다. 늘 사람을 압도하던 눈빛이 지금은 곧장 그녀를 향해 있었다.그는 빗줄기와 어우러져 한 폭의 냉담한 그림 같았다. 현색 옷자락이 밤빛과 겹치자 오히려 더 고귀해 보였다.계연수는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빗소리에 묻혀 목소리가 한층 가늘어졌다.“심 대인께서… 저를 찾으신 건가요?”심서준은 그녀의 뒤편 멀찍이 서 있는 고준안을 한 번 흘끗 보았다. 그는 다가오지 않은 채,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었다.심서준은 다시 계연수의 얼굴로 시선을 옮겼다.언제부턴가 그녀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사라졌고 늘 그 앞에서 보이던 조심스러움이 다시 스며 있었다.그는 두 손을 등 뒤로 모은 채, 그녀의 어깨에 맺힌 가는 물기를 바라보았다. 손에는 우산이 들려 있었지만 빗물이 스며들었는지 옷깃과 머리칼 끝에 습기가 서려 있었다. 계연수가 물기 어린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심서준은 최대한 부드러운 어조로 낮게 물었다.“아침에 보낸 과자는 드셨습니까?”계연수는 잠시 놀랐다.이걸 묻기 위해 온 것일까?“네, 다 먹었습니다.”심서준은 다시 물었다.“어제 드린 약은 예전 것과 비교해 보면 어떻습니까? 효과가 있다면 더 보내드

  • 주문춘귀   제350화

    계연수는 그 일을 떠올렸다. 어릴 적 그녀는 유난히 먹을 것을 밝히는 아이였다. 많이 먹으면 항상 배를 잡고 앓아누웠기에 어머니는 밤에 더 먹지 못하게 하셨다. 그래서 배가 고프면 몰래 밖으로 나갔다.그날도 밤에 먹었던 얼음피 녹두떡이 생각나 부엌을 뒤지러 갔다가 하필이면 고준안에게 들키고 말았다.그 기억에 계연수는 저도 모르게 웃었다.“다 먹고 나니 온 집안이 우리를 찾느라 난리였죠. 오라버니께서는 큰 외숙부께 맞기까지 하셨잖아요.”고준안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아버지도 얼마나 놀라셨는지. 손바닥 스무 대를 맞았지. 손이 퉁퉁 부었었다. 그래도 덕분에 다음 날 새벽 글씨 연습은 면했지.”그가 그 일로 슬쩍 게으름을 피웠다는 사실에 계연수는 뜻밖이라는 듯 눈을 크게 뜨고 이내 입을 가리며 웃었다.웃음 끝이 한결 가벼워졌고 마음의 무게도 조금은 옅어졌다.고준안은 그녀의 웃는 얼굴을 바라보았다. 여섯, 일곱 살 무렵의 계연수는 아직 여물지 않은 눈 덩이처럼 동그랗고 통통한 아이였다.지금의 그녀는 달랐다. 어느새 많은 이들의 시선을 받는 여인이 되었다.사가에서 마음을 바꾼 것인지 오늘 오전에 찾아왔다. 그리고 심가의 그 인물까지.앞으로 또 누가 있을까?고준안은 입술을 가만히 다물었다. 차라리 하루라도 빨리 계연수와 이곳을 떠나고 싶었다.그가 바라던 공명 또한 결국 그녀를 위한 것이었다. 그녀가 없다면 공명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담 하나를 사이에 둔 맞은편 누각 위에서 심서준은 어두운 눈빛으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계연수가 고준안과 웃으며 이야기하는 모습. 두 사람이 나란히 서서 옷자락이 거의 스칠 듯 가까이 선 모습.고준안은 이곳을 드나드는 데 아무 거리낌이 없고 계연수 또한 그의 방문을 전혀 낯설어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자연스럽고 편안했으며 가벼웠다.반면 그는 언제나 다른 사람들의 눈을 통해서만 계연수를 볼 수 있었다.그 두 사람의 그림자가 점점 시야에서 멀어졌다. 먹빛 비가 무겁게 내리며 세상을 젖게 만들었고 빗물은

  • 주문춘귀   제91화

    눈처럼 고운 소리가 가는 눈발 속에 스며들어 그녀 특유의 부드러운 음색을 머금었다. 심서준은 천천히 몸을 돌려 바로 뒤에 서 있던 계연수를 바라보았다. 이미 준비해 둔 옷으로 갈아입은 그녀는 반쯤 마른 머리를 단정히 틀어 올렸는데, 창백한 얼굴에 흘러내린 잔머리 몇 가닥이 찬바람에 가볍게 흔들리고 있었다.그녀는 맑은 눈동자로 그를 쳐다보며 천천히 다가오다가 멈춘 자리에서 규범을 어기지 않는 정중한 태도로 깊이 감사의 만복례를 올렸다.힘이 덜 실린, 그러나 진심이 담긴 목소리가 눈발 사이로 흘러왔다.“이번 일은 심 대인께 큰

  • 주문춘귀   제8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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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문춘귀   제9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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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연수는 이미 마차에 올라타 있었다. 마차 안은 널찍했고 이명유는 계연수의 뒤를 따라 올라탔다.그는 방금 계연수를 본 순간부터 줄곧 그녀를 훑어보고 있었다. 겉모습부터 속까지 샅샅이 살피듯, 머리칼 한 올 한 올까지도 놓치지 않았다.그러나 계연수는 여전히 이전과 다름없었다. 단정하고 침착한 자세로 앉아 있었고 머리 모양도 흐트러짐이 없었으며 비녀가 꽂힌 위치조차 변하지 않았다.그런데도 어딘가 이상했다. 이명유의 시선이 계연수의 치맛자락에 머물렀다. 곧이어 마지막으로 올라탄 사옥현을 힐끗 보고는 계연수에게 물었다.“형님, 옷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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