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log in그 순간, 계연수는 진심으로 마음이 흔들렸다.사옥현과 화리하기로 결심한 그날 이후, 그녀는 다시는 사랑이라는 감정에 기대지 않겠다고 마음 먹었다. 조금 더 현명하게 살아가겠다고, 오직 자신이 편안하고 평온하게 살아가는 것만을 바라보겠다고 다짐해 왔다.더는 누군가를 위해 자신을 바꾸지 않을 것이었다. 누군가에게 맞추느라 스스로를 억누르거나 희생하지도 않을 것이며, 한 사람의 유일한 존재가 될 수 있으리라는 헛된 기대 역시 품지 않기로 했다.무엇보다 그녀는 자신이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세상에는 수없이 많은 여인이 있고, 자신은 그저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일 뿐이었다. 누군가가 평생 한결같이 사랑할 만큼 특별한 재주도, 남다른 매력도 없었다.어린 시절 품었던 순진한 기대와 분수에 넘치는 꿈은 오래전에 닳아 없어졌다. 이제는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그런데도 심서준의 말 한마디는 오래도록 잠잠했던 그녀의 마음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켰다.마치 오래전, 눈 덮인 들판에서 사옥현이 온화한 목소리로 자신을 부인으로 맞이하겠다고 말해 주던 그 순간과 너무도 닮아 있는 설렘이었다.메마른 대지에 조용히 새싹이 움트기 시작하는 것만 같았다.계연수는 눈시울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자신도 어쩌면 누군가에게는 특별하고, 단 하나뿐인 존재일 수 있다는 생각. 평생 누군가에게 소중히 아낌받으며 살아갈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 그리고 다시는 배신당하거나 버림받지 않아도 될 것만 같은 믿음.그런 생각들이 걷잡을 수 없이 가슴속으로 밀려들자 순식간에 시야가 흐려졌다.계연수는 심서준의 옷깃을 꼭 움켜쥔 채 그의 품속 깊이 얼굴을 묻었다.지금 이 표정만큼은, 끝내 그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정말이지 조금도.심서준은 품속에 파묻힌 작은 머리만 내려다보았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가 평소와 다르다는 것은 충분히 알 수 있었다.그는 나직이 물었다.“무슨 일이냐?”한참이 지나서야 품 안에서 가늘게 쉰 목소리가 들려왔다.
계연수는 가련한 표정으로 심서준을 올려다보았다.“부군께서는 제가 요즘 살이 빠진 것도 모르셨나요?”그 애처로운 얼굴을 바라보던 심서준은 저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그는 그녀가 입을 열기 전까지는 혹시라도 역모에 가까운 부탁을 하거나, 공사를 어기게 만드는 일을 청할지도 모른다고까지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정작 그녀가 바라는 것은 고작 이런 일이었다.심서준은 어이없다는 듯, 그러나 다정한 기색이 서린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손을 뻗어 그녀의 허리를 가볍게 쥐어 보더니, 다시 매끈한 얼굴을 찬찬히 훑었다.아무리 봐도 살이 빠진 것 같지는 않았다.방 어멈은 날마다 틈을 내어 계연수가 혜풍원에서 어떻게 지내는지 그에게 전해 주곤 했다. 듣자 하니 요즘은 생선을 유난히 좋아해 점심에도 생선 반 마리를 먹었다는데, 그게 어디 입맛이 없어서 먹지 못한 사람의 식사량이란 말인가.그런 그녀를 보고 있자니 심서준은 절로 웃음이 났다.애교를 부리는 솜씨만큼은 제법 능숙했다. 이런 모습은 분명 친정에 있을 때도 여러 번 써먹었을 것이다.그러니 예전 계정윤이 계연수를 바라볼 때마다 어쩔 줄 몰라 하면서도 끝내 웃어 넘기고 마는 얼굴을 했던 것도 이해가 갔다.그리고 지금의 그는, 비로소 꾸밈없는 계연수의 모습을 조금씩 마주하고 있는 듯했다.무엇보다 그런 모습마저도 싫지 않았다.심서준은 그녀의 뜻에 맞춰 장단을 맞춰 주었다.“그러고 보니 정말 조금 야윈 것 같구나. 내일 내가 어머니께 말씀드리마. 다시는 그 약을 먹이지 않으시도록 말이다.”그러자 계연수는 급히 고개를 저었다.“어머님께서도 저를 생각해 주셔서 약을 챙겨 주시는 거잖아요. 부군께서 직접 말씀드리시면 괜히 어머님 마음만 상하실 거예요.”심서준은 낮게 웃으며 되물었다.“그럼 네 생각은?”계연수는 기다렸다는 듯 조심스레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았다.심서준이 직접 나서면 약을 끊는 일 자체는 어렵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심씨 노부인은 분명 모든 책임을 그녀에게 돌릴 터였다. 심서준 앞에서
계연수는 심서준의 입에서 ‘마음에 든다’는 말이 나오자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서둘러 완성한 향낭이었지만, 사실은 그 안에 다른 마음도 담겨 있었다. 심서준에게 한 가지 부탁을 하고 싶었기에 밤낮없이 손을 놀렸던 것이다.그녀가 조심스레 그의 눈을 바라보자, 심서준의 눈가에 번진 옅은 미소가 그 향낭을 진심으로 마음에 들어 한다는 것을 대변해 주었다. 잠시 망설이던 계연수는 용기를 내어 몸을 조금 더 가까이 옮겨 그의 품에 기대 앉았다.그의 품으로 먼저 파고드는 것이 처음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심장은 여전히 작게 떨렸다.심서준은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눈썹을 가볍게 치켜올렸다. 이내 손을 뻗어 그녀의 등을 감싸 안고는 제 무릎 위에 편안히 앉을 수 있도록 살며시 받쳐 주었다.그는 고개를 숙인 채 느긋한 눈빛으로 계연수를 바라보았다.이 늦은 밤까지 굳이 자신을 기다렸다가 향낭을 건넨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터였다. 아무래도 무언가 부탁할 일이 있는 모양이었다.곧 가녀린 두 팔이 그의 목을 감싸 안았다. 향기로운 체온이 조심스레 그의 품으로 스며들고, 계연수의 나직하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부군께서는 앞으로도 매일 이 향낭을 몸에 지니실 건가요?”심서준은 입가를 살짝 끌어올렸다. 한껏 여유를 즐기듯 그녀의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낮게 물었다.“너는 내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계연수는 속으로 작게 한숨을 삼켰다.심서준은 늘 그랬다. 무언가를 물으면 속내를 쉽게 드러내지 않은 채 되레 질문을 되돌려 주곤 했다.그래서 그녀는 언제나 그의 진심이 어디에 있는지 좀처럼 헤아릴 수 없었다.계연수는 그의 어깨에 닿은 옷자락을 꼭 움켜쥐었다. 조용히 숨을 한 번 고른 뒤,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저는 부군께서 매일 지니고 다니셨으면 좋겠어요.”말을 마친 그녀는 하얗고 여린 손을 그의 앞으로 내밀었다.“향낭을 만들다가 손가락도 이렇게 여러 번 찔렸답니다.”목소리 끝에는 은근한 서운함이 배어 있었다.심서준은 시
사실 계연수는 아침에 심서준이 향낭 이야기를 꺼냈을 때, 당장 허리에 찰 향낭이 하나 필요한 줄로만 알았다.그래서 우선 사람을 시켜 밖에서 하나 사다 쓰고, 자신이 만든 것이 완성되면 그때 바꿔 차면 되지 않겠느냐고 조심스레 말해 보았다.그런데 심서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대로 돌아서 버렸다.계연수는 그의 기분이 상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럴수록 괜스레 속이 상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있으면 말로 해 주면 될 것을, 그는 언제나 입을 다문 채 그녀가 이유를 짐작하기만 기다렸다.요 며칠은 워낙 일이 많았다. 어제는 장원까지 다녀온 탓에 자수도 아직 마무리하지 못했다. 원래대로라면 앞으로 이틀은 더 걸릴 일이었지만, 계연수는 오늘 안에 어떻게든 끝내 보기로 마음먹었다.원래 손재주가 좋은 그녀였지만, 이날만큼은 더욱 바늘을 놓지 않았다. 점심도 제대로 넘기지 못했고, 평소라면 반드시 들던 낮잠도 거른 채 손을 쉬지 않았다. 그렇게 해가 지기 직전이 되어서야 비로소 마지막 한 땀까지 모두 끝낼 수 있었다.다행히 그날 밤 심서준도 평소보다 늦게 돌아왔다. 해시가 훌쩍 지나서야 모습을 드러냈으니, 이미 밤이 깊은 뒤였다.심서준은 돌아오면 계연수가 이미 잠들어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원래 먹고 자는 데만큼은 걱정이 없던 사람이니, 진작 꿈나라에 들어갔을 가능성이 충분했다.그런데 문턱을 넘는 순간, 안쪽에서 한 사람이 조용히 걸어 나왔다.“오늘은 어쩌다 이렇게 늦으신 겁니까?”부드럽게 건네는 목소리를 듣는 순간, 심서준의 차갑던 눈매가 눈에 띄게 풀어졌다.그 짧은 순간 수많은 감정이 한꺼번에 밀려왔다.깊은 밤까지 자신을 기다리며 밝혀 둔 등불 하나, 그리고 그 불빛 아래 서 있는 계연수의 모습.그 두 가지가 그의 가슴을 말없이 따뜻하게 데웠다.적어도 아주 무심한 사람만은 아니었구나.그래도 마음 한구석에는 자신을 담아 두고 있었던 것이다.심서준은 계연수의 손을 자연스럽게 잡아 함께 방 안으로 들어갔다.계연수는 미리 준비해 둔 보양탕
최씨는 아무 까닭도 없이 그런 꾸지람을 듣고 나니, 가슴 가득 억울함이 밀려왔다.방금 시어머니가 자신을 바라보던 그 혐오 어린 눈빛은, 마치 그녀가 그 앞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견딜 수 없이 거슬린다는 듯했다.하지만 그녀도 시집오기 전에는 집안에서 사랑받던 적녀였다. 처음 이 집안에 시집올 때만 해도 심정민이 자신을 아껴 주는 부군이 되어 줄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심정민은 온 마음을 공무에만 쏟았고, 집안일에는 무엇 하나 관여하지 않았다. 하물며 심서준처럼 심씨 노부인 앞에서 제 부인을 위해 한마디 해 주는 일은 더더욱 없었다.그가 할 줄 아는 말이라고는 고작 이것뿐이었다.‘내가 어머니 말씀을 따르니, 너도 어머니 말씀을 따라야 한다.’그에게 괴로움을 털어놓고 원망을 토로해도, 그는 귀찮다는 듯 소실의 처소로 가 버리거나 그녀를 붙잡고 한바탕 훈계만 할 뿐이었다.심지어 심정민은 심서준이 계연수에게 잘해 주는 것조차, 계연수가 부인으로서 심서준을 만족시켰기 때문이라고 여겼다. 심서준이 그저 제 부인을 아끼고 사랑해서 그러는 것이라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못했다.심정민의 성정은 심서준보다도 더 고루하고 재미없었으며, 한층 더 냉담했다. 그런데 시어머니마저 저토록 강압적이니, 최씨는 이 집안에서 자신이 정말 버텨 낼 수 있을지조차 막막해졌다.곁에 있던 시녀는 최씨의 눈가가 붉어지고 얼굴이 창백해진 것을 보고는 조심스레 낮은 목소리로 달랬다.“부인, 우선은 조금만 참으세요. 견디다 보면 언젠가는 괜찮아질 겁니다.”최씨가 멍하니 고개를 돌려 시녀를 바라보았다.“얼마나 더 참아야 하는 것이냐? 어머님께서 돌아가신다 해도 나에게는 아직 이런 부군이 남아 있다. 내 평생은 결국 이렇게 끝나게 되는 것 아니냐?”시녀는 서둘러 주변 사람들을 물리고는 더욱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부인, 앞으로는 절대 밖에서 이런 말씀 하시면 안 됩니다. 아직 살아가실 날이 길지 않습니까. 복아 도련님께서 장성하시면 그때는 부인께서도 고생 끝에 숨통이 트이실 겁니다.”최씨
심씨 노부인 곁을 지키던 어멈이 다시 약을 들고 와 계연수 앞에 내려놓았다.백씨는 그 약그릇을 힐끗 바라보다 말없이 시선을 내리깔고 손에 쥔 수건을 더욱 세게 움켜쥐었다.심씨 노부인이 저토록 계연수의 아이를 서두르는 이유를 그녀가 모를 리 없었다.계연수가 하루빨리 심씨 가문의 적통 손자를 낳기만을 바라는 것, 그리고 그 아이가 생기면 심씨 가문의 살림까지 모두 계연수에게 넘길 생각이라는 것.결국 노부인의 마음은 처음부터 끝까지 계연수에게 기울어 있었다.계연수에게도 이 약은 마시는 것 자체가 고역이었다.하지만 심씨 노부인의 분부를 거스를 수는 없었기에 어렵사리 약을 다 비웠다. 그러자 입안에는 쓴맛만 가득 남아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반면 심씨 노부인은 계연수가 군말 없이 약을 마시는 모습을 무척 흡족하게 바라보았다.기혈이 충만해 붉게 생기가 도는 그 얼굴을 보고 있자니, 훗날 태어날 손자가 얼마나 곱게 자랄지 절로 기대가 되었다.요즘 들어 심씨 노부인은 마음을 완전히 내려놓은 상태였다.며칠 동안 계연수가 살림을 처리하는 솜씨를 지켜보며 감탄했고, 애초에 그녀를 며느리로 삼고 싶어 했던 지난날도 다시 떠올랐다.비록 한 차례 화리했던 일은 아직도 마음 한구석에 걸리는 응어리였지만, 굳이 붙잡고 있지 않으면 그 또한 지나갈 일이라 여겨졌다.*계연수는 백씨와 함께 밖으로 나왔다.백씨는 웃음을 띤 채 먼저 입을 열었다.“이번에는 동서가 직접 내 처소까지 올 필요는 없다. 각 장원의 수입 장부는 사람을 시켜 모두 동서에게 보내주마.”계연수도 예를 갖춰 답했다.“그렇게 해 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형수님.”백씨는 부드럽게 웃었다.“무슨 감사까지. 오히려 어깨가 한결 가벼워진 기분이다. 그동안은 장원이며 점포며 모두 내가 도맡아 돌보느라 제대로 쉬지도 못했다. 이제는 정우도 제 앞가림을 하게 되었으니 나도 좀 한가롭게 손주나 돌보며, 정우 혼사도 천천히 준비해 보려 한다.”물론 계연수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정말 미련이 없었다면 뒤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