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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62화

作者: 경옥
계연수가 아직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장원에서 올라온 것들을 대조하는 일은 모두 방 어멈에게 맡겼습니다. 저는 우선 어머님 생신을 준비하는 데만 신경 쓰고 있어요.”

심서준은 안쓰러운 마음에 계연수의 손을 꼭 쥐었다.

“전에는 네가 안채 살림에 익숙하지 않을까 걱정되어 일을 나누어 맡게 한 것이다. 헌데 이제 보니 무슨 일이든 훌륭히 처리하더구나. 힘에 부치면 넷째 형수님에게 다시 돌려주어도 된다.”

그가 차분히 덧붙였다.

“언젠가는 분가할 터인데, 네가 굳이 이토록 고생할 필요는 없어.”

뜻밖의 말에 계연수는 잠시 멍해졌다가 고개를 들어 심서준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곧 어머님의 생신인데 지금 주방 일을 돌려드리면, 어머님께서 어떻게 생각하시겠어요? 형수님이나 심씨 가문의 아랫사람들도 제가 고생을 견디지 못해 내놓았다고 뒤에서 수군거릴 겁니다.”

심서준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네가 말하기 어렵다면 내가 이야기하마.”

계연수가 황급히 만류했다.

“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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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문춘귀   제891화

    심정민은 본래 나쁜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적어도 사람됨은 올곧았다. 다만 조정의 일을 지나치게 중히 여긴 나머지 집안일에는 도통 관심을 두지 않았고, 여인 역시 그에게는 그리 중요한 존재는 아닌 듯했다.초닷새가 되자 계연수는 심서준과 함께 어머니를 찾아갔다.고씨는 이제 안색이 제법 좋아져 있었다. 딸을 보자 무척 반가워하며 손을 붙잡고 오래도록 이야기를 나누었다.“이 집은 다 좋은데, 혼자 지내다 보니 아무래도 적적하구나. 그래서 전에는 고씨 가문에 자주 들르곤 했는데, 요즘은 그마저도 잘 가지 않는다. 네 큰외숙모가 워낙 분수를 모르고 구니 말이다.”계연수는 어머니가 이제야 자신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헤아려 주는 듯해 안도했다. 예전처럼 걸핏하면 서신을 보내 ‘그래도 한 가족이지 않느냐’는 말을 되풀이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한결 놓였다.고씨는 계연수의 손을 더욱 꼭 쥐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이제야 알겠구나. 사람마다 저마다 타고난 인연이 따로 있는 것을. 이제 어미는 너만 생각하며 살련다.”그러고는 속에 쌓아 두었던 말을 풀어놓듯 계속해서 말했다.“네 큰외숙모는 하운이가 영국공부에서 호강하며 산다고 입버릇처럼 떠들지만, 정작 백씨 가문의 둘째 도련님이 언제 한 번 그 아이를 찾아오기라도 했느냐? 제 돈으로 산 물건을 시댁에서 보내 준 것처럼 떠벌리며 애써 허세를 부리지 않느냐. 네 둘째 외숙모가 그 거짓말을 알면서도 들추지 않은 건, 큰 명절을 앞두고 괜히 집안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 않아서였을 뿐이다. 그러니 보아라. 이쪽에서 매달려 성사시킨 혼사가 어디 그리 좋기만 하겠느냐?”계연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으나, 큰외숙모네 이야기를 더 보태지는 않았다. 대신 어머니에게 부족하거나 필요한 것은 없는지 물었다.고씨는 고개를 저었다.“내 걱정은 하지 말거라. 이곳에서는 부족한 것 없이 잘 지내고 있다.”그러다 문득 눈시울을 붉히며 계연수의 손을 다정히 쓸어내렸다.“무엇보다 네가 후작과 정답게 지내는 모습을 보니, 이제야 마음

  • 주문춘귀   제890화

    방 안에서는 한동안 이야기가 더 이어졌다. 계연수는 머리가 조금 어지러워 바람을 쐬려 밖으로 나왔다가, 회랑 아래에 홀로 서 있는 손보경을 발견했다.조금 전 분명 처소로 돌아가 쉬라고 했는데, 뜻밖에도 손보경은 줄곧 이곳에 머물러 있었던 모양이었다.계연수가 나오자 손보경이 희미한 미소를 띠며 불렀다.“오숙모.”계연수는 대답 대신 바깥으로 시선을 돌렸다. 검은 밤하늘 아래로 흰 눈송이가 소리 없이 흩날리고 있었다.“그래.”그 짤막한 대답 뒤로 두 사람 사이에는 다시 침묵이 내려앉았다.손보경은 어둠 속에서 하염없이 떨어지는 눈을 바라보았다. 지금 자신의 처지는 꼭 이 풍경과도 같았다.몸은 심씨 가문에 들어와 있었지만, 마음과 신뢰는 그들 밖으로 철저히 밀려나 있었다. 등 뒤의 따뜻한 방 안에서는 어쩌면 자신을 어떻게 경계하고 막아 낼지를 의논하고 있을지도 몰랐다.그렇다고 물러설 곳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앞에서는 태후가 한 걸음씩 다가오며 혈육의 정과 핏줄을 빌미로 그녀를 옥죄고 있었다.손보경은 태후의 수단만으로 백 년 동안 뿌리를 내린 심씨 가문을 단숨에 무너뜨릴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양쪽이 끝까지 맞서 싸운다면 어느 한쪽이 승리하기보다 함께 상처 입고 무너질 가능성이 컸다.그녀는 두 세력이 싸우기를 바라지 않았다.지금 태후의 뜻을 따르는 듯 보이는 행동도 그저 눈을 속이기 위한 거짓에 불과했다.그때 등 뒤에서 다시 발소리가 들려왔다.방에서 나온 사람은 심한율이었다.회랑 아래에 서 있는 손보경을 발견한 그의 얼굴에도 옅은 놀라움이 스쳤다. 마침 자신이 먼저 자리를 빠져나와 손보경을 찾아갈 생각이었기 때문이다.진심이 아니더라도 당분간은 다정한 척하며 그녀의 속내를 알아내야 했다. 손보경이 대체 무엇을 하려는지부터 확실히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잠시 멈춰 섰던 심한율은 이내 손보경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처음으로 팔을 들어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내가 데려다주마.”그는 계연수에게도 낮은 목소리로 먼저 물러가겠다

  • 주문춘귀   제889화

    침상 안의 움직임은 한밤중이 되어서야 겨우 잦아들었다.이튿날은 휴무일이었다. 심서준은 이튿날 조정에 나갈 일이 없으면 으레 절제하지 않았고, 오늘처럼 계연수가 먼저 적극적으로 다가왔을 때는 더욱 쉬이 놓아주지 않았다.결국 계연수는 온몸에 힘이 풀린 채 그의 품에 축 늘어졌다. 그러면서도 앞서 약속받으려던 일을 잊지 않고 힘겹게 물었다.“부군, 내일 진찰받으실 거지요?”충분히 만족한 사내는 무엇이든 들어줄 듯 너그러웠다. 심서준이 낮고 나른한 목소리로 응답하자 계연수는 그제야 흡족해하며 몸을 일으켜 씻으러 가려 했다.그러나 심서준이 그녀를 눌러 붙잡았다.“목욕은 아침에 하거라.”예전에는 늘 심서준이 직접 안아다 씻겨 주었다. 계연수는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어째서요?”심서준은 그녀를 품 안에 더욱 깊이 끌어안았다. 아직 거친 숨결이 가라앉지 않은 목소리가 낮고 쉰 음색으로 울렸다.“아이를 갖고 싶지 않느냐? 조금 더 이대로 있거라.”계연수는 한동안 멍하니 있다가 비로소 그 말의 뜻을 알아차렸다.그녀는 심서준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되물었다.“아이를 원하는 사람이 어찌 저뿐이겠습니까? 부군은 갖고 싶지 않으세요?”심서준도 아이를 원하기는 했다. 다만 서두를 생각은 없었다.혼인한 지 아직 일 년도 되지 않았다. 지금의 그에게 아이는 있어도 좋고, 조금 늦게 생겨도 상관없는 존재였다.더구나 요즘 들어 계연수와의 사이는 날이 갈수록 깊어지고 있었다. 심서준은 두 사람만이 누리는 지금의 나날이 몹시 좋았다. 자신도 아직 젊었으니, 벌써부터 아이 때문에 그녀를 가까이하지 못하는 때가 생기는 것은 달갑지 않았다. 훗날 두 사람 사이에 조그마한 아이가 끼어들어 계연수의 관심을 빼앗아 간다고 생각하면 마음 한구석이 못내 심술궂어지기도 했다. 그렇다고 아이가 없다는 이유로 그녀가 주위 사람들에게 시달리는 모습을 두고 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심서준은 끝내 대답하지 않고 그녀의 등을 가볍게 토닥이기만 했다.*이튿날, 황후가 보낸 이름난 의원이

  • 주문춘귀   제888화

    심서준은 말없이 눈을 내리깔았다.황제가 벌이는 일은 결코 단순한 적이 없었다. 더구나 계연수가 전한 이야기는 자신도 황제에게서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었다.황제가 그녀를 떠본 것은 분명했다. 그러나 누군가를 떠본다는 것은, 그에 앞서 그 사람의 속내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는 뜻이었다.계연수는 그저 깊은 안채에서 살아온 여인에 불과했다. 그런 그녀가 대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심서준 역시 여인 하나의 말에 휘둘릴 만큼 어리석지 않았다.황제가 계연수의 아버지와 얽힌 과거 때문에 그녀가 심씨 가문의 마음을 흔들까 염려하는 것이라면, 그의 의심 많은 성정을 생각할 때 아주 이해하지 못할 일은 아니었다.하지만 심씨 가문은 태자와 관련된 일만 아니라면 황제에게 두 마음을 품지 않았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도 바로 황제였다.생각을 마친 심서준은 계연수의 등을 가볍게 토닥였다.“걱정하지 말거라. 폐하께서는 그저 너와 한담을 나누신 것뿐이다. 그림이 완성되면 이번에는 내가 직접 폐하께 올리겠다.”그 말에 계연수는 심서준의 허리를 더욱 꼭 끌어안고 품 안에서 살며시 몸을 비볐다. 그의 목소리를 듣고 나니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 그녀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품속의 몸은 이불 속 온기를 머금어 말랑하고 따뜻했다. 계연수가 토끼처럼 두어 번 몸을 비비자 심서준의 몸이 순간 미세하게 굳었다.그는 두 손으로 계연수의 얼굴을 감싸고 고개를 숙여 입을 맞추었다. 입안에 남아 있던 곶감의 달콤한 향이 두 사람 사이로 번졌다.심서준이 낮게 웃었다.“이제는 살찔까 봐 두렵지 않은 모양이지?”두렵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겨울만 되면 부쩍 먹을 것이 당겼다. 특히 잠자리에 들 무렵이면 어김없이 허기가 찾아왔다.장원에서 보내온 곶감은 유난히 달고 부드러웠다. 계연수는 자칫 손이 가는 대로 먹을까 봐 하루에 하나만 먹기로 스스로 정해 두었다.그녀는 심서준의 손을 잡아 제 아랫배 위에 올려놓았다.“한번 만져 보세요. 살이

  • 주문춘귀   제887화

    조금 전 심정민의 태도를 보고 나니, 계연수는 새삼 심서준이 참으로 좋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심정민은 명문가의 자제로, 가문을 짊어져야 할 장남 특유의 엄숙함과 고지식함을 지니고 있었다.그는 타고난 본성까지 나쁜 것은 아닐 터였다. 다만 지나치게 융통성이 없고 자부심이 강했을 뿐. 자신을 하늘처럼 여기며, 천지 귀한 공자 특유의 오만함으로 집안의 자질구레한 일들을 하찮게 보았다. 안채의 일은 지극히 단순하여 여인들이나 하는 것이라 여기는 듯했다.그런 부군과 살아가는 일은 분명 고될 수밖에 없었다.부인이 안채에서 어떤 어려움을 겪는지 헤아리지 못할뿐더러, 이해하려는 마음조차 품지 않을 테니까.심서준 역시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었다. 계연수 앞에서도 곧잘 체면을 세우며 높은 곳에 선 사람처럼 냉담하게 굴었다.그러나 계연수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심서준은 자신의 마음을 헤아려 주었다. 그녀가 하기 싫은 일을 피하려고 애교를 부리거나 게으름을 피우면, 속셈을 뻔히 알면서도 모르는 척 받아 주곤 했다.사실 요즘 심씨 노부인도 계연수를 제법 살갑게 대했다. 그녀를 일부러 괴롭히거나 가혹하게 대한 적도 없었다.심서준은 휴무일이면 계연수가 노부인에게 아침 문안을 드리러 가는 것조차 만류했다. 몸도 약한데 푹 쉬라며 보내지 않았지만, 심씨 노부인 역시 그 일을 두고 한마디도 나무라지 않았다.그에 비해 백씨가 최씨를 대하는 모습을 떠올리면, 최씨의 삶은 분명 하루하루가 고달플 터였다.*처소로 돌아온 계연수는 다른 생각을 오래 이어 갈 틈도 없이 다시 그림을 그릴 준비를 했다. 책상 위에 종이를 펼쳐 놓고 새하얀 화선지를 바라보자, 좀처럼 느껴 본 적 없는 짜증이 마음속에서 울컥 치밀었다.그리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리지 않을 수도 없었다.계연수는 한참 동안 붓을 들고 종이 앞에 앉아 있었으나, 끝내 한 획도 내리지 못했다.*밤이 되어 목욕을 마친 계연수는 침상에 기대어 주방에서 올린 혼례 음식 목록을 살펴보고 있었다.추위를 많이 타는 그녀는

  • 주문춘귀   제886화

    그뿐만이 아니었다. 백씨는 최씨에게 재수 없는 계집이라는 모진 말까지 내뱉었다.최씨는 그동안 겪은 일을 계연수에게 모두 털어놓고 싶었다. 그러나 이 사실이 시어머니의 귀에 들어가 또다시 큰 소동이 벌어질까 두려웠다. 백씨는 본래부터 계연수를 못마땅하게 여겼으니, 자신이 그녀에게 하소연했다는 사실을 알면 당장이라도 산 채로 삼키려 들 터였다.최씨는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다 자신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계연수의 눈빛을 마주하자, 애써 참아 온 설움이 한꺼번에 북받쳤다. 결국 고개를 푹 숙인 채 계연수의 어깨에 기대어 울음을 터뜨렸다.계연수의 마음에도 황제와의 일로 무거운 근심이 매달려 있었다. 그러나 최씨가 품에 안겨 흐느끼자 자신의 걱정은 잠시 뒤로 밀어 두고, 가늘게 떨리는 등을 다독여 주었다.한 부저에서 함께 지냈으니 요 며칠 백씨가 최씨를 어떻게 대했는지 계연수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다만 큰방의 일에 자신이 섣불리 끼어들면 오히려 일이 커질 수 있었다. 가뜩이나 백씨가 자신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터라, 괜히 나섰다가 최씨의 처지만 더욱 곤란해질지 몰랐다.그 때문에 그저 몇 마디 위로만 건네려던 찰나였다.품에 기대어 울던 최씨가 갑자기 화들짝 놀라며 몸을 떼어 냈다. 곧이어 쉰 목소리가 두려움에 떨렸다.“어머님…”계연수가 고개를 들자, 옆길에서 백씨가 싸늘한 눈빛으로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백씨는 계연수를 차갑게 바라보다가 입가에 억지 미소를 걸었다.“동서는 이제 우리 큰방의 일까지 관여하려는 모양이구나?”계연수는 얼굴에 온화한 기색을 잃지 않은 채, 부드럽고 조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형수님께서 오해하셨습니다. 요 며칠 복아가 고뿔을 앓는다고 하여, 걱정스러운 마음에 제게 몇 마디 했을 뿐입니다.”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자연스럽게 덧붙였다.“며칠 전 장원에서 가죽을 여럿 보내왔는데, 그중에 잿빛 담비 가죽 한 장이 있었습니다. 두툼한 데다 털도 촘촘하여 복아에게 망토를 지어 주면 제격이겠더군요. 날씨도 몹시 추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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