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빛 아래, 박민정은 자신이 오랫동안 사랑해 온 남자의 얼굴을 보면서 목소리가 잠긴 채 물었다. “유 대표님, 저랑 약속하셨잖아요.”박민정의 얼굴을 만지던 유남준의 손이 허공에서 멈추었다. 금방이라도 울 듯한 그녀의 눈과 마주친 그는 마음이 아려왔다. 유남준은 침대에서 내려와 병실을 나왔다. 밖에 나온 유남준은 낯선 사람을 보는듯한 박민정의 눈길을 잊을 수가 없었다.“유 대표라고?”차에 탄 그는 바로 비서에게 전화 걸었다. “오늘이 무슨 날이지?”새벽 두 시, 밑도 끝도 없는 전화에 서다희는 찾아보겠다는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뭐지? 프로젝트 기간도 아니고. 행사 날짜도 아닌데.”허둥대던 서다희는 그제야 컴퓨터를 보고 오늘이 박민정의 생일임을 알아챘다. 그는 바로 유남준에게 전화했다.“대표님, 오늘 민정 씨 생일입니다.”다행히 둘이 결혼할 때 서다희는 박민정의 정보를 조금 외우고 있었다. 유남준은 그녀의 생일을 잊고 있었다. ‘그래서 어제 그렇게 물었나?’‘어쩐지 연지석이 어젯밤에 돌아오더라니.’유남준이 말이 없자 서다희가 물었다.“대표님, 선물 준비할까요?”담배 재가 유남준의 손에 떨어지자 그제야 그는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그럴 필요 없어.”전화를 끊은 뒤 유남준은 그렇게 차에서 밤을 지새웠다. 다음 날 아침, 유남준은 병실에 들어섰다. 박민정은 아무 때나 퇴원할 수 있었다. “가자. 같이 갈 데가 있어.”“어디요?”박민정은 놀란 듯 그를 바라보았다.“당신 계속 그 아이 만나고 싶다고 했잖아.”순간 박민정의 눈이 반짝거렸다.“고마워요.”“그래.”차 안의 분위기가 어제와는 확연히 달라졌다. 정림원.병세가 안정된 박윤우는 매일 잘 먹고 잘 놀면서 지내고 있었다. 그저 언제쯤 쓰레기 아빠가 자기를 보러오는지 궁금했다. ‘오늘 엄마 생일인데. 쓰레기 아빠가 잘 챙겨주는지 모르겠네.’“이모, 아저씨 언제 또 나 보러 와요?”박윤우는 커다란 눈망울로 가정부를 쳐다봤다. 가정부도 사실 몰랐다. 지난번 그
가정부는 믿기지 않는 듯 되물었다.“진짜야?”박윤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짐짓 진짜 인척 꾸며댔다.“네. 그렇지 않으면 왜 부인도 없고, 아이도 없겠어요?”유남준은 올해 거의 서른이 되었다. 일반적인 남자들도 그 나이에 가정을 꾸리기 시작하는데 부잣집 남자면 말할 것도 없었다. 가정부는 박윤우를 치켜세우며 칭찬했다.“윤우 진짜 대단한데. 아는 게 어쩜 그렇게 많아?”두 사람이 웃고 떠드는 사이 유남준과 박민정이 도착했다.박민정은 오는 동안 길을 머릿속에 잘 기억해 두었다. 그런 그녀를 유남준은 지켜보기만 할 뿐 내색하지 않았다. 그녀가 이곳을 안다고 해도 아이를 데려갈 수 없다. 차에서 내린 박민정은 바로 집안으로 향했다. 유남준이 예쁜 여자를 데리고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은 가정부는 이내 박윤우에게 알려줬다. 박윤우는 가장 처음 떠오른 사람이 이지원이었다. ‘티비에서만 봤는데 오늘은 실물을 볼 수 있겠군.'만반의 준비하고 이지원을 기다리던 박윤우는 박민정이 들어오는 것을 보자 그만 눈이 빨개진 채 울먹였다. 여기에 온 후로 한번 도 울어본 적이 없는 박윤우였다. “엄마...”창백한 얼굴에 작은 몸을 달려 자신한테 달려오는 아들을 보면서 박민정은 박윤우를 와락 품에 안았다. “윤우야.”“엄마. 보고 싶었어.”“엄마도 윤우가 많이 보고 싶었어.”유남준은 문에 기댄 채 모자의 상봉을 지켜봤다. 그러고는 가정부에게 손짓해서 내보낸 후 둘만 방에 남겨두고 나왔다. 박민정은 조심스레 박윤우의 몸을 살펴보면 물었다.“요즘 아픈 곳은 없어?”“아니. 없어. 나 여기서 아주 잘 지내.”박윤우는 머리를 세차게 흔들며 대답했다. 그러고는 이내 목소리를 낮춰 박민정에게 속삭였다.“엄마, 여기 아저씨 진짜 바보야. 내가 달라는 걸 다 가져다줘.”“그리고 지난번에 내가 실수로 아저씨한테 오줌도 쌌어.”박민정은 그만 눈이 휘둥그레졌다.“뭐? 윤우야 엄마한테 천천히 말해줘.”박윤우는 왜 유남준에게 오줌을 싸게 되었는지 자세히 얘기해줬다.“다
박민정의 우울한 마음을 눈치챈 박윤우는 이내 애교를 부렸다.“엄마, 뭐 잊은 거 없어?”“뭐?”“뽀뽀.”박윤우는 자신의 볼을 가리켰다. 박민정은 피식 웃으며 아들의 볼에 입맞췄다.“됐지?”“응!”아이들과 같이 있으면 박민정은 항상 따스한 마음이 들었다. 요 며칠의 서러웠던 마음이 눈 녹듯 사라졌다. 시간은 유난히 빨리 지나갔고 어느덧 오후가 되었다. 떠나기 전 박민정은 박윤우에게 여러 가지 당부를 잊지 않았다.해외에 있을 때와 달리, 오늘 박윤우는 떼도 쓰지 않고 얌전히 박민정과 작별 인사를 했다.예전에 진주시에 돌아가려고 할 때마다 박윤우는 울고불고 떼를 쓰면서 그녀와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매번 박민정은 한참 아들을 달래주곤 했었다. 박민정은 그동안 박윤우가 그저 지능이 또래 애들보다 조금 높을 뿐 보통 아이들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다.돌아가는 차 안에서 박민정은 별장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계속 돌아보았다.옆에 앉은 유남준은 생일 얘기를 하려 했지만 결국에 꺼내지 못했다. “이따 먹고 싶은 거 있어?”“아무거나 괜찮아요.”박민정은 입맛이 없었다. 유남준은 그가 항상 가던 가계로 향했다. 박민정은 저녁 내내 음식을 별로 입에 대지 않았다. 어떻게 생일을 보내야 할지 몰라 유남준은 돌아가는 길에 집으로 케익을 주문했다. 두원 별장에 돌아온 박민정은 테이블 위의 케익을 보고 의아했다. 유남준은 아무 말 없이 서재로 향했다. 박민정은 그제야 전화기를 꺼내 확인했다. 연지석과 조하랑이 부재중 전화가 여러 개 와있었다. 무음 모드로 해놔서 전화 온 줄도 몰랐었다. 두 사람이 걱정할까봐 박민정은 우선 조하랑에게 전화를 걸었다. “민정아, 왜 이제야 전화 받아? 어제는 왜 그냥 갔어?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지?”“어제는 급한 일이 생겨서 그랬어. 전화가 무음으로 되어서 받지 못했어.”조하랑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별일 없으면 됐어.”통화가 끝나고 박민정은 바로 연지석에게도 전화해서 오늘 정림원에 갔
유남준은 느릿느릿 입을 열었다.박민정의 눈동자가 떨렸다. 그녀는 연지석이 해외 신분이 간단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자세히 어떤 일을 하는지 몰랐었다. 그저 가끔 그가 심각한 부상을 입는다는 것만 알았다. “손해를 보면서까지 남한테 피해 주는 게 당신 스타일은 아니잖아요?”박민정은 애써 담담하게 말했다. 유남준의 넓은 어깨가 박민정의 앞을 가로막았다. “나를 아주 잘 아는 것처럼 들리네. 나한테 손해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지?”박민정은 그를 똑바로 올려다보며 말했다.“그렇게 큰 비용을 들여서 밑지는 장사를 하는데. 손해가 아닌가요?”유남준은 차갑게 비웃었다.“틀렸어. 난 한 번도 밑지는 장사를 해본 적이 없어.”“이 자리까지 오니깐, 돈이 다가 아닌 게 있더라고.”그가 몇 년 동안 국내에 있는 연지석의 회사들을 압박하여 힘들어지게 한 게 다 무엇 때문인데. 다 원한을 풀기 위해서 아닌가?"‘연지석이 아니면, 당신이 나한테 감히 이럴 수가 있을까?’유남준은 갑자기 울화가 치밀었다. 박민정은 점점 눈앞의 남자를 알 수 없었다. 분명히 두 사람은 10년 넘게 알고 지냈지만 결혼 후에도, 지금도 그녀는 유남준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이도 그렇겠지...’두 사람이 헤어진 건 잘된 일이었다.“그러면 왜 이렇게까지 해요?:박민정이 물었다.“그 사람과 당신이 힘들어하는 걸 보고 싶어서.”유남준은 당당한 듯 말했다. 박민정은 주먹을 꽉 쥐었다. 뺨을 한 대 때리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나요? 가짜 결혼 말고 없잖아요!”유남준은 박민정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귀에 속삭였다.“당신, 도망가지 말았어야 했어. 나를 속이면 안 됐다고.”그녀가 가짜 사망을 꾸민 이 몇 년 동안, 유남준은 살아도 산 게 아니었다. 박민정은 눈을 내리깐 채 물었다.“그래서 이렇게 나를 괴롭히고 반항도 못 하게 하는 건가요?”박민정의 어깨 올린 손이 움찔했다.“내가 언제 괴롭혔어?”결혼한 후 유남준은 그래도 그녀에게
자신의 몇 년간 순정이 한순간에 싸구려 취급을 받다니. 박민정도 정말 이 사랑이 부질없다고 느꼈다. “그러네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유남준의 이마에 있는 핏줄이 튀어나올 듯했다. 그는 눈이 빨개진 채 그녀의 머리를 가슴팍에 눌렀다. 숨이 막혀왔지만 그는 놓아주지 않았다. 유남준은 사과의 말을 듣고 싶었지만 박민정도 숨이 막힐지언정 사과를 하지 않았다. 박민정은 한번 먹은 마음이 쉽게 변하지 않았다. 그를 좋아할 때도 그랬고 떠날 때도 그랬다. 숨이 점점 가빠지는 박민정을 보면서 유남준은 황급히 손을 놓았다. 그러다 그녀가 정신이 돌아오기도 전에 그가 입맞췄다. 박민정은 머릿속이 하얘졌다. 눈을 떴을 때 그녀의 옷은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차가운 벽에 기대며 박민정은 애원했다.“며칠만 더 기다려주면 안 돼요?”“왜 기다려야 해?”얼마 전 유남준은 그녀가 원한다는 걸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또 거부를 하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박민정은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아직 생리 중이에요”유남준은 그제야 그녀의 몸에서 떨어졌다. 그는 박민정을 안은 채 침대에 누웠다. 긴장해서 굳어있던 그녀의 몸은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다. 유남준은 그녀를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하루 동안 피곤했던 박민정은 그렇게 그의 품에서 잠이 들었다. 유남준은 박민정의 쌕쌕거리는 숨소리를 듣고서 보청기를 빼주었다. 유남준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어떻게 마음이 변할 수가 있어?”그는 잠든 박민정을 보면서 속삭였다. 이튿날. 박민정이 깨어났을 때 유남준은 곁에 없었다. 씻으려고 거울 앞에선 박민정은 자기 목에 빨간 자국을 발견했다. 어제 유남준이 남긴 흔적이었다. 파운데이션으로 가려봤지만 가려지지 않았다. 박민정은 할 수 없이 목폴라 니트로 갈아입고 머리를 풀어 내렸다. 씻고 거실로 나가니 유남준이 거실에 앉아 서류를 보고 있었다.“오늘은 회사에 나가.”그가 입을 열었다.“오늘은 쉬고 싶어요.”박민정은 오늘 병원에 가서 언제 임신하면 좋을지 알아
연지석도 유남준 뒤에 서있는 박민정을 발견하고는 안심하라는 눈빛을 보냈다. 그는 손을 내밀에 유남준에게 악수를 청했다.“유 대표님, 안녕하세요.”생각보다 분위기는 살벌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오히려 이상할 정도로 정중한 태도를 보였다. 유남준은 그의 악수에 응하면서 박민정을 소개했다.“여기는 제 아내 박민정입니다.”유남준은 보란 듯이 박민정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녀가 손을 떼어내려 하자 유남준은 더욱 세게 힘을 줬다. 박민정이 할퀴어 손등에서 피가 났지만 유남준은 여전히 태연했다. 이 모든 걸 지켜보면서 연지석이 입을 열었다.“소개할 필요가 없을 것 같은데요. 둘이 어릴 적 죽마고우였거든요. 제가 유 대표님보다 어쩌면 민정을 더 잘 알고 있을지도요.”‘죽마고우라... 진짜 애틋하네. 나보다 더 잘 안다고?’ 박민정에게 빤히 고정된 유남준의 눈은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여보. 왜 이런 죽마고우 친구가 있다는 얘기를 안 했지?”그는 손에 힘주어 그녀를 끌어당겼다. 박민정은 허리가 부러질 것 같았다. 그러다 이내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그는 이럴 때만 자신을 아내라고 불렀다. 하긴 다른 남자한테 지고 싶어 하는 남자는 없으니까.“아마 잊었나 보죠.”박민정은 나직이 읊조렸다.예전의 유남준은 그녀가 무슨 얘기를 하는지, 친구가 누구인지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당연히 연지석도 몰랐다. “그러면 이따 일 얘기가 끝나면 두 사람같이 얘기를 나누세요.”유남준이 말했다.“그럴 필요 없어요.”그가 진심이 아니라는 걸 아는 박민정은 단칼에 거절했다.유남준은 미소를 지으며 박민정에게 귓속말로 속삭였다. “왜? 나중에 나 몰래 만나려고 그러는 거야?”박민정은 입술을 깨문 채 그를 노려봤다. 그녀의 차가운 눈동자와 마주친 유남준은 자기도 모르게 가슴이 움찔거려 재빨리 눈길을 돌렸다.두 사람을 지켜보는 연지석의 가슴에는 분노가 타올랐다. 인정하기 싫었지만 박민정은 아직 유남준의 아내이고 자신은 그저 이름대로 어렸을 적 친구일 뿐이었다.
서다희는 작은 도발 정도는 괜찮다고 생각했다. 다만 유남준의 인내심은 한계가 있어 계속 그러다간 두 사람은 결국 파국을 맞을까 걱정되었다. 박민정은 서다희의 말에 담긴 뜻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비서님은 결혼하셨나요? 아니면 여자 친구가 있으세요?”금색 테 안경에 가려진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약혼녀가 있습니다.”약혼녀의 생각만 하면 그는 한숨이 나왔다. 선보고 만나서 연애까지 성공하였지만 여자 친구는 유치할 뿐만 아니라 성격도 만만치 않았다. 서다희가 일 때문에 그녀와의 약속에 나가지 못했을 뿐인데 여자는 이러면 결혼할 수 없다며 드러누웠다. ‘결혼이 애들 장난인가.’“그러면 그 여자분도 비서님을 아주 사랑하겠네요.” 박민정이 보기에 서다희도 제 상사처럼 남을 배려하지 않은 냉혈한으로 보였다. 약혼녀가 정말 서다희를 사랑하니까 결혼까지 할 수 있는거라고 생각했다. “사랑까지는 아니고. 그냥 적당한 사람끼리 결혼하는 거죠.”“앞으로 살아가면서 그 생각에 변함이 없길 바라요.”말을 마친 박민정은 고개 숙여 자기 업무를 시작했다.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서다희도 더 이상 말을 이어가지 않았다. 사무실에서 나온 서다희는 여자 친구가 보낸 메시지를 확인하였다. [또 야근이야? 맨날 야근, 야근. 그냥 회사랑 결혼하지 그랬어. 우리 헤어져.] 서다희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또 시작이네. 계속 해 봐.]결혼 안 하면 말지.“내가 결혼 할 여자가 없는 것도 아니고.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연애도 하지 말걸. 시간이 아깝게.”...유남준과 연지석은 정오가 되어서야 회의실에서 나왔다. 두 사람이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 아무도 몰랐다. 박민정은 연지석이 걱정되었다. 국내에선 유남준이 안 닿은 곳이 없어 연지석의 대부분 프로젝트가 진행에 문제가 생겼다. 연지석은 회의실에서 나온 후 바로 박민정을 찾아갔다. “가자. 밥 먹으러.”어제 그녀같이 생일을 함께 하지 못해 그는 못내 아쉬웠다. 박민정은 연지석의 뒷모습을 보면서
이레아 레스토랑 룸.연지석은 박민정이 제일 좋아하는 음식들로 주문했다.“요즘 너 살이 너무 많이 빠진 것 같아. 그러니까 오늘은 많이 먹어.”“그래.”하지만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차려진 음식을 앞에 두고도 박민정은 입맛이 돌지 않았다.“아까... 그 사람하고는 무슨 얘기했어?”연지석은 그녀에게 스테이크를 썰어주며 답했다.“그냥 일 얘기 좀 했어.”“혹시 그 사람이 너 괴롭히거나 곤란하게 만들지는 않았고?”박민정이 입술을 깨물며 물었다.그러자 연지석이 젓가락을 내려놓더니 예쁜 반달 눈을 하고 그녀를 바라봤다.“유남준 그 사람이 뭐 사춘기 남자애라도 돼? 괴롭히긴 뭘 괴롭혀.”그의 얼굴에는 장난기가 가득했다.박민정은 밖에서는 항상 진지한 얼굴이던 연지석이 자기 앞에만 서면 장난을 치지 못해 안달 난 어린아이처럼 느껴졌다.“나 지금 진지하게 묻고 있는 거니까 제대로 대답해.”“그럼 더 안 되겠네. 남자가 돼서 여자한테 쪼르르 이르면 안 되지.”연지석이 연신 웃으며 빨리 먹으라고 하는 바람에 박민정은 어쩔 수 없이 고기를 한 점 입에 넣었다.그렇게 한창 식사를 이어가고 있을 때쯤, 연지석은 문득 박민정의 옷에 시선이 갔다. 무척이나 더운 날, 그녀가 목과 팔을 전부 다 가리는 옷을 입었기 때문이다.“혹시 요즘 또 몸이 안 좋아?”박민정이 추위를 탄다는 사실을 떠올린 연지석이 물었다.그러자 그녀는 조금 부자연스럽게 자신의 목 주위를 매만지며 머리를 저었다.“아니, 회사 에어컨 바람이 너무 강해서 입은 것뿐이야.”“그런 거면 차라리 카디건을 입어. 목 답답할 거 아니야.”“응, 알겠어.”박민정은 자신의 목에 새겨진 키스 마크를 보여주지 않으려는 듯 고개를 푹 숙였다.두 사람은 이 모든 상황을 누군가가 감시카메라로 전부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은 꿈에도 하지 못했다.유남준은 다른 방에서 두 남녀가 식사하는 장면을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이내 웨이트리스를 불러와 뭐라고 지시를 내렸다.그러자 몇 분 뒤, 해당 웨이트리스는 손에 와인을
“엄마, 아빠랑 이혼 잘하셨어요.”유남우는 말을 마치자마자 유남준 앞을 지나치면서 다시 말을 이었다.“내가 능력이 없어서 이번에도 졌네.”유남준은 그저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째려봤다.유남우는 사실 그가 어떻게 반격할지 걱정되기보다 이번에도 졌다는 게 더 분통했다.밖으로 나온 뒤 그는 핸드폰을 꺼내 어딘가로 전화라도 걸고 싶었지만 딱히 연락할 사람이 없었다.연락처를 훑어보다가 홍주영에서 멈칫하더니 결국에는 통화버튼을 누르지도 못한 채 핸드폰을 다시 꺼야 했다.실내 안.거실은 유난히 조용했고 유지욱은 그저 한숨만 내쉬었다.“남우가 왜 저렇게 변했는지 모르겠어. 예전에는 말도 잘 듣고 착한 아이였는데.”고영란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그리고 그가 말하는 ‘예전’이 정확하게 언제인지도 감이 오지 않았다.고영란이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는 모습에 유지욱이 그녀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왜 그래?”“아니에요.”그리고 자리에서 일어서며 다시 말을 이었다.“이번 달은 될수록 어디 가지 말고 집에 있어요. 그리고 이혼 숙려기간이 끝나는 대로 다시 가서 마무리 지으면 될 것 같아요.”고영란은 생각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이혼하고 싶은데 지금 이혼하려면 한 달씩이나 기다려야 했다.그리고 위층으로 올라가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그리고 이 한 달 동안에 아버지로서 해야 할 일이 뭔지 좀 생각해 보고요.”말을 마친 뒤 유지욱의 대답은 듣지도 않고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한편.박씨 가문의 옛 저택.박민정은 유남준이 너무 걱정되어 한걸음에 집으로 돌아왔다.비록 서다희가 괜찮다고는 했지만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이때, 밖에서 들리는 차 소리에 박민정이 다급히 차창 밖을 내다보니 유남준의 차도 마침 도착해 있었다.박민정은 빠르게 차에서 내린 뒤 유남준에게 달려가 그의 품에 와락 안겼다.“괜찮아요?”그러자 유남준은 싱긋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줬다.“당연하지, 다희가 나 괜찮을 거라고 알려줬잖아.”박민정은 그저 가볍게 고개를 끄
유석진의 입에서 갑자기 자기 둘째 아들의 이름이 거론되자 고영란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또한 왜 두 아들 사이에 지금 저런 모순이 생긴 건지 알 수 없었다.유남준도 괜히 고영란이 중간에서 난처하게 된 것 같아 일부러 유남우를 빤히 바라보며 유석진에게 말했다.“이번 일은 사과한다고 해결되는 일이 아니에요. 큰아빠가 아무리 남우랑 같이 벌인 일이라고 해도 이번만큼은 가만있지 않겠습니다.”별로 무겁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이상하게 위협감이 느껴졌다.순간 유석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이때, 그의 며느리인 최현아가 앞으로 한 발짝 나서며 끼어들었다.“남준 씨, 그래도 한 가족인데 한 번만 봐주시면 안 될까요?”그러자 유성혁도 한마디 거들었다.“남준아, 우리도 잘못했단 걸 알고 있어. 아버지가 이제 연세도 많아서 상황판단이 안 될 때가 많아.”유석진도 사실 지금 자존심을 부려서 될 일이 아니란 걸 잘 알고 있었다.“그래서 지금 네가 원하는 게 뭔데? 말해주면 내가 다 들어줄게.”사실 유남준은 이 말만을 기다렸다.“금방 인수한 시내 중심에 있는 그 건물을 저한테 넘겨주세요.”그 땅은 유명훈의 땅이고 죽기 전 유석진에게 물려준 유산인데 지금 아무리 돈이 많아도 살 수 없을 정도로 값이 올랐다.유석진이 이 땅의 주인이 됨으로써 그곳의 상권을 손에 쥔 거나 다름없었는데 나중에 아무 건축물을 세워 올려도 가치가 있을 것이다. “그건 안되지!”역시나 유석진이 단번에 거절했다.그가 오랫동안 눈독 들였던 땅이었는데 유명훈이 죽어도 물려주지 않으려 해서 여태껏 애를 먹고 있었다가 이제 겨우 손에 들어온 땅이고 또 자기만의 계획이 따로 있었다.“그러면 조만간 IM 그룹의 변호사를 만나셔야겠네요.”유남준은 더 이상 그와 얘기하고 싶지 않았고 유석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집안 도우미에게 외쳤다.“모셔다드려!”그렇게 도우미들은 그들을 전부 밖으로 내보냈고 거실에는 유남준 가족들만이 남게 되었다.유지욱과 고영란은 눈앞의 두 아들에게 뭐라고 말했으면 좋을지
유남준이 잡혀갔다는 소식에 유석진 가족들은 조용히 자축하고 있었다.최현아도 너무 기뻐했지만 유독 유성혁만 우울한 얼굴로 그들에게 물었다.“아빠, 그래도 한 가족이나 마찬가지인데 꼭 이래야 할까요? 남준이가 잡혀가도 우리한테 아무런 이득도 없잖아요. 그리고 만약 다시 풀려나서 우리가 한 짓이라는 걸 알게 된다면 분명 가만히 있지 않을 거라고요.”그러자 유석진이 미간을 찌푸리고 답했다.“왜 쓸데없는 일을 벌써 걱정하고 그래? 간이 그리도 콩알만 해서 큰일 하겠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놈!”유성혁은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다만 그의 옆에 앉아 있던 유지훈은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저는 할아버지가 한 행동이 맞다고 봐요. 사람은 자기 이익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그러자 유석진이 만족스럽다는 듯이 껄껄거리며 웃었다.“하하, 역시 우리 손자가 똑똑하다니까. 네 말이 맞아. 사람은 무조건 자기가 일 순위여야 해. 절대 네 바보 같은 아빠를 닮아서는 안 된다.”그러자 유지훈이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할아버지, 저도 알고 있어요.”그리고 유석진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그러나 그들은 너무 일찍 기뻐했던 게 오후가 되자마자 유남준은 바로 풀려났다.그길로 옛 저택으로 오게 되었고 동시에 유석진네 식구들과 유남우를 전부 집으로 불러 모았다.이 시각, 유지욱도 마침 그곳에 있다가 눈앞의 상황에 어리둥절해서 물었다.“남준아,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아빠, 제가 지금부터 저 사람들의 실체에 대해 다 밝히려고요.”그리고 서다희가 한 무더기의 자료와 증명서를 건네주자마자 그는 유석진네 식구들에게 뿌려줬다.종이들이 공중에서 흩날리다가 전부 바닥으로 떨어졌는데 유석진은 그중 한 장을 주워 읽어보고는 너무 황당한 나머지 코웃음을 치며 그에게 말했다.“남준아, 다 오해야. 우리가 왜 그런 짓을 하겠니?”그러자 유남준이 눈살을 찌푸리고 그에게 되물었다.“우리 회사에 심어둔 사람들을 제가 다 데려올까
유남준은 사실 진작에 유남우와 유석진 쪽에 사람들을 붙여서 그들의 동향을 주시하고 있었고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파악하고 있었지만 도대체 무얼 하려는지 궁금해서 일단 내버려두고 있었다.이튿날, IM 그룹으로 세무국 사람들이 들이닥쳤다. 그러자 서다희가 눈살을 찌푸리고 중얼거렸다.“대표님을 감옥에 보내려고 아주 별짓을 다 하네요. 이런다고 그 사람들한테 득이 되는 게 뭔지 정말 모르겠어요.”특히 유남우는 왜 자기 친형을 왜 이렇게까지 괴롭히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조사해 보니 역시나 회사 장부에 문제가 있었고 회사 자금을 불법으로 돌렸다는 증거들이 발견되기 시작했다.그러나 이 모든 게 다 그들이 일부러 만들어낸 가짜 장부들이었다.그렇다고 해도 유남준은 회사 법인으로서 조사를 받아야 하기에 어쩔 수 없이 연행되었다.가면서도 서다희에게 당부했다.“민정이한테 걱정하지 말라고 전해줘.”서다희는 한껏 걱정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굳이 말하지 않아도 뉴스에서 하루 종일 보도될 예정이라 아마 얼마 안 돼서 알게 될 것이다.역시나 박민정은 출근길에 그에 관한 뉴스 기사를 보게 되었다.“어떻게 이럴 수가?”이때, 고영란도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왔다.“민정아, 남준이한테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그러나 박민정도 아직 무슨 상황인지 모르고 있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답했다.“저도 방금 기사를 봐서 잘 모르겠어요. 제가 지금 당장 다희 씨한테 전화해 볼 테니까 어머님은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그래.”고영란은 착잡한 마음으로 전화를 끊었다.유지욱과 이혼하겠다고 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아들한테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서다희는 빠르게 박민정에게 전화해서 유남준이 시킨 대로 알려줬고 모든 일은 다 대비되어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박민정은 그제야 마음이 조금 놓였다.이때 서다희가 한마디 더 했다.“그런데 이 일은 절대 고영란 사모님한테 말하지 말아 주세요.”“알겠어요.”어쩌면 유남우 귀에도 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이 나이니까 더 이혼하자는 거예요. 굳이 남은 인생을 당신한테 낭비하고 싶지 않거든요!”고영란은 말을 마치자마자 안방에 들어갔다.그러나 유지욱은 지금 이 상황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아 한참 동안 그 자리에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그러다가 문득 여태껏 이혼에 대해 거론조차 하지 않던 사람이 갑자기 심술부리는 원인이 분명 아버지 재산 때문인 것 같았고 며칠이 지나면 괜찮아질 것이라 생각했다.이튿날.유명훈의 장례식은 계속 진행되었고 박민정의 친구들도 모두 오게 되었다.“고인의 명복을 빕니다.”손연서의 말에 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렇게 다른 손님들도 하나둘씩 계속해서 들어오고 있었는데 장례식의 침울한 분위기와는 정반대로 최현아는 눈웃음을 살살 지으며 한쪽에서 사람들과 유명훈의 유언장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그러나 유지욱과 고영란 두 사람 사이는 여전히 찬 바람이 쌩쌩 불었다.그렇게 유명훈의 장례는 총 3일 동안 진행 후 끝났다.고영란은 담담한 얼굴로 박민정과 유남준, 그리고 유남우에게 말했다.“나랑 네 아버지는 이만 갈라서려고 해.” 순간 모든 사람이 의아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옆에 서 있던 유지욱의 안색도 좋지 못했다.그는 원래 유명훈의 장례가 끝나면 계속해서 여행이나 다니려고 했었는데 뜬금없이 고영란한테서 이혼 통보를 받게 되었다.어제까지만 해도 분명 일시적으로 심술부리는 거라 생각하고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지금 보니 진심인 것 같았다.“지금 애들 앞에서 솔직하게 말해, 진짜 이혼하려고?”“네.”고영란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이미 오랫동안 고민했던 일이고 지금처럼 사는 게 저는 너무 괴로워요. 지금 당장 법원에 갑시다.”고영란은 지금 그들의 의견을 구하려는 게 아니다.유지욱도 자존심이 꽤 센 사람이라 단번에 그러자고 하더니 두 사람은 법원으로 출발했고 두 아들은 굳이 말리지 않았다.자식들도 이미 다 컸고 자기 혼인에 대해 결정할 권리가 충분히 있다고 생각했다.박민정은 유남준과 같이 돌아가는 차 안
고영란도 유석진의 고함에 깜짝 놀라 순간 할 말을 잃었다.그리고 여태껏 모든 집안일을 아내한테 떠넘긴 채, 홀로 밖에서 자유롭게 살고 있는 유지욱이 원망스럽기만 했다.한 사람에 대한 단념은 하루아침에 되는 게 아니라 이런 실망감이 천천히 쌓이면서 식어가는 것이다.보아하니 오늘 저녁에도 잠들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유지욱이 도착해보니 유씨 가문의 모든 친척이 다 모여있었다.그리고 이미 상복으로 갈아입은 고영란을 보자마자 그녀에게 다가와 물었다.“왜 진작에 나한테 말해주지 않았어?”그의 물음에 고영란은 실망 가득한 얼굴로 답했다.“제가 말해주지 않았다고요? 한 달 전에 전 분명히 아버님 건강 상태가 점점 안 좋아지고 있으니까 와서 회사 일 좀 도와드리라고 귀띔해 줬어요.”“난 네가 우리 아버지 재산 때문에 나더러 오라는 줄 알았지.”유지욱의 말에 고영란은 큰 충격을 받고 잠깐 멍해졌다가 다시 두 주먹을 꼭 쥐고 말했다.“유지욱 씨, 정말 어이없네요. 맞아요, 제가 빨리 돌아오라고 했던 원인이 아버님의 재산이 조금이라도 공평하게 지욱 씨한테도 나눠줬으면 했어요. 그런데 그 재산이 전부 아주버님한테 넘어갔네요?” 그러나 유지욱은 여전히 시큰둥한 얼굴이었다.“그깟 돈 몇 푼 가지고 왜 그래? 우리가 모두 한 식구인데 주면 줬지.”유지욱은 말을 마치자마자 손님들을 맞이하러 떠났다.그리고 유석진과도 반갑게 인사하는 모습에 고영란은 제대로 마음이 상했다.박민정도 손자며느리로서 유남준과 같이 손님들을 맞이하다가 우연히 시부모님이 서로 말다툼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그녀는 사실 유씨 가문에 시집온 이후로 시아버지인 유지욱을 거의 본 적이 없었다.그리고 유지욱은 젊었을 때부터 고집불통에 집안 사업에도 관심이 없었고 그저 매일 여행이나 다니면서 자유롭게 사는 걸 즐기는 사람이라고 했다.하여 유지욱과 고영란은 1년 중에도 만날 수 있는 날이 별로 없었다.박민정은 유남준에게 살짝 다가가 그에게 말했다.“남준 씨, 가서 어머님 좀 위로해 주세요.”여자
유남준의 아버지, 유지욱은 계속 외국에서 살다보니 이 자리에 없었다.그러자 고영란이 눈살을 찌푸리며 답했다.“지욱 씨는 지금 당장 오는 게 불가능한 사람이잖아요. 그리고 방금 비행기 탔다고 했으니 적어도 두 시간은 걸릴 거예요.”그러자 유석진이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그러면 지욱이가 도착하고 나서 다시 말할 테니까 외부인은 참견하지 말아요.”순간 고영란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이를 악물고 말했다.“이 집에 들어와서 아이를 둘씩이나 낳아줬는데도 제가 아직 외부인인가요? 저는 오늘 아버님께서는 왜 그리도 자식들을 편애하시지 꼭 물어봐야겠어요!”“제 아들들이 능력이 뛰어나면 이런 불공평한 대우도 다 받아들여야 하나요?”여태껏 유명훈은 많은 주식을 갖고 있었다.비록 유남준이 현재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긴 하지만 유명훈의 지분이 그대로 유석진네로 넘어가게 되면 유남준의 자리가 위태로워진다.더구나 유남우도 그의 재산이 필요한데 말이다!게다가 유명훈은 오랜 세월 동안 주식 말고도 분명 많은 재산을 모았을 텐데 그 돈마저 전부 저 사람들에게 넘어가는 모습을 고영란은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다.유석진은 유명훈의 앞을 가로막으며 다시 큰 소리로 외쳤다.“여태껏 지욱이를 잘 붙잡아 두지 못한 제수 씨를 탓해야죠! 지욱이가 오기 전까지는 아무리 소란을 피워도 소용없어요!” 고영란이 뭐라고 대꾸하려는데 유남준이 그녀를 말렸다.“엄마, 그만해요.”여태껏 유명훈이 유석진네만 편애하는 모습을 보고 자랐던 그이기에 지금 아무리 그와 말싸움해도 아무 의미가 없을 것 같았다.유남우도 불쾌했지만 애써 덤덤한 척 그녀에게 말했다.“엄마, 형 말이 맞아요. 할아버지께서 결정하신 대로 받아들이면 되니까 싸울 필요 없어요.”이 시각, 침대에 누워있던 유명훈은 호흡이 점점 더 가빠져 헐떡거리기 시작했다.그런데도 눈앞에서 자식들이 자기 재산 때문에 싸우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씁쓸하기만 했다.“지욱이...”그는 힘겹게 유지욱을 불렀다.유지욱은 평소에도 그의 말을
최현아는 손까지 흔들며 반갑게 인사했지만 박민정은 그저 냉담한 얼굴로 물었다.“여긴 어쩐 일이세요?”그러자 그녀는 뻘쭘해진 손을 다시 주머니에 넣으며 애써 미소를 지었다.“일은 무슨, 윤소현이 드디어 판결받았다고 해서 축하해주려고 왔지.”박민정은 분명 다른 속셈이 있다고 생각했다.지금 최현아와 그의 시아버지는 쥐 죽은 듯이 조용히 지내고 있었는데 왠지 그럴수록 더 수상했다.“감사합니다. 다른 일 없으면 저는 이만 일 하러 갈게요.”말을 마치자마자 박민정이 뒤돌아서니 역시나 최현아가 빠르게 그녀의 팔을 부여잡았다.“민정아, 아무리 그래도 우리는 한 식구나 마찬가지인데 이렇게까지 딱딱하게 굴 필요는 없잖아?”박민정은 이제 와서 한 식구라는 그녀의 말이 그저 가소로웠다.“도대체 할 말이 뭔가요?”그리고 슬슬 짜증 나기 시작했다.“최근에 할아버지 건강이 점점 악화하면서 동서랑 남준 씨가 그립기도 하고 우리가 서로 화목하게 지내는 모습도 보고 싶은가 봐. 혹시 오늘 밤 할아버지 뵈러 같이 가지 않을래?”최현아는 최대한 상냥하게 물었다.사실 박민정도 할아버지의 건강이 여태껏 좋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고 오늘 두 사람을 부른 이유도 아마 자신이 얼마 버티지 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네, 알겠어요.” 최현아는 그제야 박민정의 팔을 놓아줬지만 그녀가 떠나가자마자 눈빛이 순식간에 돌변했다.그리고 차에 올라타자마자 한껏 불쾌한 얼굴로 중얼거렸다.“재수 없는 것, 운발로 지금 자리에 올라앉은 주제에.” 차에는 낯선 남자 한 명이 더 있었다.“박민정한테 화낼 필요 없어. 지금 네가 해야 할 일은 무조건 할아버지가 살아있을 때 할아버지의 주식이랑 모든 돈을 너한테 넘길 수 있도록 잘 구슬리는 거야.”그러자 최현아가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나도 알아, 저번에 이미 할아버지랑 말해봤다니까? 유남준 씨랑 민정이는 괜히 고고한 척하면서 아무것도 받지 않겠다고 말한 상황이라 우리 쪽에 전부 몰리게 되어있긴 한데, 난 지금 성혁 씨 얼굴만 봐도 짜
조하랑은 그제야 화가 사그라지는 것 같았다.“그러면 왜 저 여자한테 찾아갔어요?”“당연히 지금은 어떤 상태인지 확인하러 갔죠. 그리고 이지원에 대해 정신감정도 의뢰했거든요. 만약 진짜로 정신에 이상이 있는 거면 어쩔 수 없겠지만 이 모든 게 다 쇼하는 거면 절대로 가만두지 않으려고 했어요.”김인우는 진지한 얼굴로 말하다가 조하랑을 보고 다시 말을 이었다.“예전에 제가 지원이한테 어떻게 가스라이팅 당했는지 하랑 씨도 잘 알잖아요. 만약 저를 구해줬던 사람이 형수님이었단 사실을 진작에 알았다면 절대 그 애를 도와주지도 않았을 겁니다.”“지금은 그저 마땅히 받아야 할 벌만 받았으면 좋겠고요.”조하랑은 묵묵히 듣고 있다가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제가 오해했네요. 정말 미안해요. 저는 인우 씨가 또 그새를 못 참고 다른 여자한테 찝쩍거린다고만 생각했어요.”그녀의 말에 김인우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못 참고 되물었다.“하랑 씨, 혹시 지금 질투하는 거예요?”순간 조하랑의 얼굴이 새빨개졌다.“누, 누가 질투한다는 거예요? 그저 저를 배신한 인우 씨한테 화나고 그런 사람을 좋아했던 나한테 실망했을 뿐이라고요!”“알겠어요, 제가 잘못했어요. 그리고 의사도 임산부가 흥분하면 아이한테 안 좋다고 말했잖아요.”말을 마치자마자 김인우는 다정하게 조하랑을 품에 안았는데 순간 그녀는 얼굴이 더욱 빨개진 채 온몸이 굳어버렸다.당연히 김인우도 눈치채고는 빠르게 물었다.“왜요, 부끄러워요?”“그, 그럴 리가요...”조하랑은 말까지 더듬으며 애써 덤덤한 척했다.“저도 안을 줄 알거든요?”그리고 똑같이 김인우를 꼭 안아줬는데 이번에는 김인우가 속으로 움찔했다.추운 밤, 그렇게 두 사람은 아무 말도 없이 서로를 꼭 껴안아 줬는데 거리를 지나가던 몇몇 사람들의 시선이 계속 그들에게 멈춰졌다 가곤 했다.조하랑도 어느새 그걸 느꼈는지 재빨리 김인우를 밀쳐냈다.“됐어요. 이제 병실로 돌아가 봐야 하니까 인우 씨도 그만 돌아가요.”“저랑 같이 안 가고요?”김인우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