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윤아는 빠르게 죽을 떠먹었고 이내 그릇이 바닥을 드러냈다.“봤죠? 아주 맛있어요. 괜히 시기하지 말고 그 시간에 직접 고모한테 더 잘해드리는 게 낫겠어요.”그녀는 빈 그릇을 내려놓으며 비꼬듯 말했다.박민정은 그런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확실히, 정윤아는 죽에 뭔가 섞여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는 듯했다.정윤아는 새 그릇에 다시 죽을 떠 정수미에게 가져가려 했다. 하지만 아직 담기도 전에 박민정이 그녀를 막아섰다.“그만 둬요.”“또 왜요?”정윤아는 완전히 화가 난 얼굴이었다.“당신이 고모의 친딸이라는 이유로 나한테 이래라저래라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요.”박민정은 그녀의 말을 신경 쓰지 않았다. 대신 죽이 담긴 냄비를 가리키며 단호하게 말했다.“여기에 누가 약을 탔어요.”순간, 정윤아의 동작이 멈췄다.“...약이요?”그녀는 이해하지 못한 듯 멍하니 박민정을 바라보았다.“무슨 약인데요?”박민정은 천천히, 그러나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사람을 서서히 중독시키는 약이에요.”정윤아의 눈동자가 급격히 수축되었는데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눈빛이 가득했다.“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예요? 설마 내가 고모를 해치려고 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그녀의 목소리는 격앙되어 있었다.“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절대 고모를 해치지 않아요.”어린 시절부터 두 노인과 함께 자란 그녀에게 가족이라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외조부모와 정수미뿐이었다.그런 그녀가 정수미를 해칠 리가 없었다.그러나 박민정은 그녀의 반응을 보고도 한숨을 쉬며 가방에서 서류 한 장을 꺼냈다.“이거 봐요. 어제 윤아 씨가 가져온 죽을 검사한 결과예요.”정윤아는 눈앞으로 내밀어진 서류를 짜증스럽게 받아들었다. 하지만 보고 난 후,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이건... 말도 안 돼.”손이 떨렸다.“이거 가짜죠? 조작된 거죠?”박민정은 무표정하게 그녀를 응시했다.“내가 굳이 가짜 보고서를 만들어낼 이유가 있을까요?”목소리는 차분했지만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단
박민정은 자리에 앉아 그녀를 올려다보며 말했다.“그러니 제대로 설명해 봐요. 만약 거짓말을 한다면 경찰 부를 거예요.”정윤아는 말을 정리한 뒤, 처음 윤소현을 만났을 때부터 두 사람이 나눈 모든 대화를 하나하나 빠짐없이 박민정에게 털어놓았다.박민정은 묵묵히 듣고 나서도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정윤아는 정말이지 너무 순진했다. 윤소현의 몇 마디에 이렇게 쉽게 속아넘어가다니.“윤소현이 몇 번이고 엄마를 해치려고 했어요. 그런데도 어떻게 그 여자가 만든 음식을 엄마한테 드릴 수 있었던 거예요?”정윤아의 눈가가 붉어지며 눈물이 맺혔다.“그건 다 소문일 뿐이라고 생각했어요. 나는... 나는 그저 고모가 친딸을 찾고 언니를 멀리하는 줄 알았어요. 그리고 민정 씨가 언니를 모함하는 거라고만 여겼어요.”“그럼 지금도 내가 윤소현을 모함했다고 생각해요?” 박민정의 물음에 정윤아는 훌쩍이며 고개를 저었다.“잘못했어요. 내가 사람을 잘못 봤어요. 정말, 정말로 고모를 해칠 생각은 없었어요.”그러면서 그녀는 다급히 박민정의 손을 붙잡았다.“민정 씨, 아니, 민정 언니. 고모를 병원에 모셔 가서 꼭 검사를 받아보게 해요.”박민정은 냉정하게 손을 뿌리쳤다.“솔직히 난 지금 당신이 하는 말 믿기지가 않아요. 당신이 속은 건지, 아니면 처음부터 윤소현과 짜고 엄마를 해칠 생각이었는지 전혀 확신이 안 서거든요.”정윤아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설령 경찰 조사가 이루어진다 해도 당신은 공범이에요.”“나, 나는...” 정윤아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잇지 못했다.“사람을 해치는 데 가담한 이상, 어떤 이유든 상관없이 감옥에 가게 될 거예요. 알아서 잘 해요.”박민정은 차갑게 말한 뒤, 그녀를 지나쳐 걸어갔다.정윤아는 힘이 빠진 듯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온몸이 축 늘어지고 머릿속은 하얗게 비어버렸다.‘언니, 대체 왜 나까지 궁지로 몰아넣은 거야? 나는 그렇게 언니를 믿었는데!’이제 보니 고모를 해치려 한 것도 모자라 자신까지 철저히 이용해먹은
정윤아는 순간 멍해졌고 임은숙은 이어서 말했다.“이 일은 너무 심각해서 네 말을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나도 모르겠구나. 네가 스스로 잘 생각해 보렴.”정윤아는 휘청거리며 일어섰다.“할머니, 저 지금 고모께 가서 사과드리고 용서를 빌게요.”그녀는 말을 마치고 정수미의 방으로 향했다.걸어가는 동안 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가장 많이 떠오른 것은 윤소현의 기만이었고 그다음은 박민정이었다.박민정은 자신을 감싸주었고 이 일을 가족들에게 알리지 않았다.만약 상황이 반대였다면 자신은 박민정을 온 가족 앞에서 몰락시키려고 했을지도 모른다.정윤아는 눈물을 훔치고 조용히 문을 두드렸다.얼마나 지났을까, 마침내 방문이 열렸고 잠시 후 정윤아와 정수미가 함께 방에서 나왔다.“고모, 병원에 가요.”정윤아가 낮은 목소리로 말하자 정수미는 고개를 저었다.“괜찮아. 네가 가져온 것들은 원래 잘 먹지 않는 거라 별로 손대지 않았어. 영향은 없을 거야.”‘잘 먹지 않는다...’그 말을 듣는 순간, 정윤아의 마음속에 죄책감이 더욱 깊어졌고 동시에 머릿속이 맑아지는 것 같았다.만약 윤소현이 정말로 정수미를 걱정했다면 그녀가 좋아하는 음식과 싫어하는 음식을 몰랐을 리가 없지 않은가?다행히도 고모는 그 음식을 좋아하지 않았다.“다행이에요. 정말 다행이에요...”정윤아는 계속해서 중얼거렸다.“자, 이제 그만 울어라.”정수미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너도 속은 피해자야. 고모는 너를 원망하지 않는다. 네가 이렇게 스스로 찾아와 말해 준 것만으로도 충분해.”그녀는 정윤아가 나쁜 아이가 아님을 알고 있었다. 다만 너무 순진했고 융통성이 부족했다.어릴 때부터 윤소현과 각별히 지냈으니 그녀가 곤경에 처했을 때 돕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하지만, 윤아야.”정수미는 조용히 덧붙였다.“너, 민정이에게도 사과해야 해.”며칠간의 상황을 지켜본 결과, 정윤아와 박민정이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을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박민정은 과거를
정윤아는 박민정을 향해 머리를 숙여 정중히 절했다.“저는 정말 어리석었어요. 진짜 가족은 언니였는데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사기꾼을 믿다니...”그녀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만약 언니가 아니었다면, 저는 사람을 죽인 공범이 될 뻔했어요. 평생 죄책감에 시달리며 살았겠죠. 정말 고마워요, 언니.”이제는 처음 만났을 때처럼 거만한 기색도 없었다.정윤아는 코끝을 훌쩍이며 말했다.“언니, 이제 졸업하면 언니 밑에서 일 할게요. 무슨 일이든 시키기만 하면 다 할게요. 앞으로 내 인생의 보스는 언니예요.”박민정은 그녀의 말에서 진심을 느꼈지만 한편으로는 지나치게 순진하다고도 생각했다. 그녀는 허리를 숙여 정윤아를 일으켜 세웠다.“그만해요, 이제 그럴 필요 없어요.”비틀거리며 일어난 정윤아는 커다란 눈으로 박민정을 올려다보았다.“언니, 날 용서해 줄 수 있어요?”그렇게 묻고는 곧바로 스스로 잘못됐다고 깨달았다. 마치 도덕적 압박을 가하는 것 같았다.“잘못 말했어요. 용서해 주지 않아도 돼요. 어차피 앞으로 평생 언니에게 빚진 채 살 거니까.”박민정은 그녀가 지나치게 보호받으며 자란 탓에 세상을 너무 단순하게 보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그렇게까지 생각할 필요 없어요. 나는 그냥 엄마가 다치지 않길 바랄 뿐이에요.”박민정은 담담하게 말했다.그러나 정윤아는 그녀의 냉랭한 태도에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그래도 이번 일은 언니 덕분이에요. 절대 잊지 않을 게요. 그리고 앞으로 말 편히 놔요.”그렇게 말한 뒤, 그녀는 덧붙였다.“벌써 늦었네요. 언니 휴식 방해하지 않고 지금 나갈게요.”그녀는 얼굴에 남아 있던 눈물을 훔치고 방을 나섰다.그녀가 떠난 뒤, 박민정은 곧바로 진서연을 불러 정윤아가 정말로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는지, 그리고 정수미와 임은숙에게 사실대로 이야기했는지 확인했다.진서연은 줄곧 정윤아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네, 거짓말하지 않았어요. 방금 전에 대표님과 어르신께 모든 걸 털어놓았어요.”“알겠어.
그러나 윤소현은 그런 정윤아를 바라보면서도 조금의 죄책감도 느끼지 않았다.“보고서는 조작할 수도 있는 거잖아!”그 말에 정윤아는 더욱 격분했다.“지금 내가 조작했다고 생각하는 거야?”윤소현의 입가가 미세하게 경련했다.“설마 네가 나를 이렇게까지 믿지 못할 줄이야. 내가 만든 음식을 들고 가서 검사까지 하다니.”이제 와서 오히려 자신이 피해자인 것처럼 행동하는 태도에 정윤아는 분노로 몸이 떨렸다.“어,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 양심도 없는 거야? 이제부터 다시는 당신을 믿지 않을 거야. 두고 봐. 이번 일로 당신은 여기에서 더 오래 머물게 될 거야!”그러자 윤소현도 더 이상 가식적인 태도를 유지하지 않았다.“정윤아, 내가 미리 경고하는데 음식은 내가 만들긴 했어. 하지만 네 손을 거쳐서 전달된 거잖아? 만약 책임을 따지게 된다면 너도 무사할 수 없을걸? 어쩌면 네가 전달하는 과정에서 뭔가를 넣었을 수도 있잖아?”그녀는 말을 끝내고도 의도적으로 덧붙였다.“그리고 너, 원래 박민정 엄청 싫어했잖아. 혹시 너도 엄마 재산을 탐낸 거야?”“너, 너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정윤아는 도저히 윤소현을 당해낼 수 없었다. 몇 마디만에 완전히 휘둘리고 말았다.윤소현은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그럼 경찰한테 가서 말해. 어차피 난 절대 인정하지 않을 거니까.”정윤아는 어떻게 이곳을 빠져나왔는지도 모를 정도로 혼란스러웠다. 밖으로 나오자마자 그녀는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심장이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고통에 휩싸였다.그녀는 마지막까지 희망을 품고 있었다. 혹시나 윤소현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지 않을까 싶어서.하지만 현실은 정반대였다. 사과는커녕 오히려 모든 죄를 자신에게 뒤집어씌우려 하고 있었다.만약 고모가 정말 죽었더라면 경찰이나 다른 사람들이 조사할 때 윤소현은 틀림없이 자신에게 책임을 떠넘겼을 것이다.“나 왜 이렇게 어리석었던 거지? 왜 그런 인간을 믿었을까?”스스로에게 화가 나서 정윤아는 자신의 뺨을 한 대 세게 때
정윤아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고마워요, 언니!”그녀가 연신 ‘언니’라고 부르는 모습에 두 어른은 다소 의아해했다.처음엔 분명 박민정을 달가워하지 않는 듯하더니 어쩌다 이렇게 사이가 좋아진 걸까?하지만 두 사람이 다정하게 지내는 모습을 보니 괜스레 흐뭇해졌다.“너희 자매는 꼭 사이좋게 지내야 한다. 절대 싸우면 안 돼.”임은숙의 다정한 당부에 정윤아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걱정 마세요! 언니 말 잘 들을 거예요. 절대 속 썩이지 않을 거라고 약속해요!”박민정도 미소 지으며 말했다.“네, 외할머니. 걱정 마세요.”임은숙은 흐뭇하게 웃었다.“그래, 잘 지내기만 하면 돼.”그날 밤, 박민정은 두 어른을 위해 진주시의 특산물을 정성껏 챙겼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공항까지 배웅한 후 손을 흔들며 작별을 고했다.하지만 정수미는 함께 돌아가지 않았다. 진주에 당분간 머물기로 결정한 것이다.그녀는 박민정과 한집에 살지 않기로 했는데 박민정이 자신의 병을 알아차리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다.그러나 정작 그녀는 몰랐다. 박민정은 이미 어머니가 병을 숨기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엄마, 그냥 저희랑 같이 지내요.”떠나려는 정수미를 붙잡고 박민정이 말했지만 정수미는 고개를 저었다.“아니야. 나는 이제 늙었어. 너희 젊은 사람들 생활에 방해가 되면 안 되지. 시간 날 때 가끔씩 보러 올게.”그러나 박민정은 어머니를 그냥 보내고 싶지 않아 그녀의 팔을 꼭 붙들었다.“그럼 제가 엄마랑 같이 가서 지낼게요.”그녀는 그저 어머니와 함께하는 시간을 더 갖고 싶었다. 나중에 후회하는 일이 없도록.그런 딸의 태도에 정수미는 이상함을 느끼고 되물었다.“왜 그래? 무슨 일 있어?”“아뇨, 그냥... 엄마랑 다시 만나고 나서 제대로 함께한 시간이 별로 없잖아요. 그래서 지금이라도 더 같이 있고 싶어서요.”그 말을 듣자, 정수미의 가슴이 먹먹해졌고 쉽게 말을 잇지 못했다.그녀는 딸의 등을 조용히 토닥이며 말했다.“그래. 그럼 앞으로 매일 너
박예찬은 묻지 않아도 김훈이 말하는 ‘좋은 소식’이 무엇인지 이미 알고 있었다.“증조할아버지, 혹시 저 동생이 생긴다는 말씀하시려는 거예요?”김훈은 순간 당황했다.“아이구, 우리 예찬이, 넌 그걸 어떻게 안 거냐?”그는 오늘에서야 조하랑과 김인우에게서 들었다. 두 사람이 일부러 자신에게 비밀로 하며 깜짝 놀라게 해주려고 했던 것이다.“그냥 찍어봤어요.”박예찬은 일부러 진실을 숨겼다. 괜히 자신이 미리 알고 있었다고 했다간 증조할아버지가 서운해하며 왜 숨겼냐고 잔소리를 할 게 뻔했기 때문이다.김훈은 대수롭지 않게 웃으며 말했다.“역시 젊은 머리는 다르구나! 예찬아, 넌 참 똑똑해. 그래, 네 하랑 아줌마가 임신했단다. 벌써 두 달이나 됐어.”“축하드려요, 증조할아버지. 이제 진짜 증손주를 품에 안으실 수 있겠네요.”박예찬이 진심으로 축하를 건네니 김훈은 껄껄 웃으며 말했다.“어허, 우리 예찬이도 내 친증손주나 마찬가지지. 너희 둘 다 내겐 똑같이 소중한 아이들이야.”“네.”박예찬은 고개를 끄덕였다.김훈이 단순히 핏줄을 따지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그는 잘 알고 있었다.“그런데 너 언제 올 거냐? 네가 보고 싶구나.”김훈은 정말 박예찬이 그리웠다. 집에 어린아이가 있으면 분위기가 한층 밝아지는 법이니까. 게다가 박예찬은 영특해서 때론 증손자 같기도, 때론 좋은 친구 같기도 했다.“그럼 내일 갈게요.”박예찬도 흔쾌히 답했다.사실, 그도 김훈이 그리웠다. 동생인 박윤우는 아직 너무 어리숙했고 증조할아버지와 함께 있으면 단순히 장기만 두는 게 아니라 사업에 대한 이야기도 나눌 수 있었다.그 덕분에 그는 여러 가지 상업적인 수완을 익혔고 나중에 분명 유용하게 쓸 수 있을 터였다.“그래, 그래! 내일 당장 데리러 가마.”“아니에요, 증조할아버지. 내일 유치원 끝나고 제가 직접 갈 테니 그냥 기사 아저씨만 보내 주세요.”“알겠다.”김훈은 흔쾌히 수긍했다.사실 그의 건강은 예전 같지 않아 자주 외출하는 것도 부담스러웠다. 오늘도 조하
그럼 그렇지.박예찬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요, 엄마. 걱정 마세요.”그 한마디에 박민정은 한결 안심이 되었다.밤이 되자 박민정은 씻고 나온 후 유남준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하지만 곧, 그의 아쉬움 가득한 시선을 뒤로한 채 정수미의 방으로 향했다.“엄마.”정수미는 이미 침대에 누워 있었지만 아직 잠들지는 않은 상태였다. 박민정을 본 그녀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민정아, 웬일이야? 무슨 일 있어?”박민정은 침대 곁으로 다가가 조용히 앉았다.“오늘 엄마랑 같이 자도 돼요?”정수미는 순간 멈칫했고 박민정의 얼굴을 바라보며 잠시 망설였다.“아이고, 다 큰 애가 무슨... 이제 남준이랑 함께 지내기 시작했는데 둘 사이의 정을 쌓아야지.”그러나 박민정은 그녀를 와락 껴안으며 말했다.“남준 씨랑은 꽤 오래 함께 보냈어요. 하루쯤은 괜찮아요. 그냥 오늘은 엄마랑 같이 있고 싶어요.”그녀는 장난스러운 투로 말을 덧붙였다.“다른 집 애들은 어릴 때 엄마랑 자는 게 당연한데 전 한 번도 엄마랑 같이 잔 적이 없잖아요.”그 말은 단순히 함께 있고 싶다는 의미였지만 정수미의 가슴에는 짙은 아픔이 스며들었다.그녀는 주름진 손을 들어 박민정의 머리를 조심스레 쓰다듬었다.“미안해, 내 사랑하는 딸.”그녀의 떨리는 목소리에 박민정은 자신이 괜한 말을 했다는 걸 깨달았다. 곧바로 이불 속으로 파고들어 정수미를 꼭 끌어안았다.“엄마, 나한테 미안하다고 하지 마요. 엄마가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잖아요. 앞으로 우리, 그냥 있는 그대로, 서로에게 미안해하지 말고 행복하게 지내요.”정수미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래...”그러나 그녀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씁쓸한 고통이 번졌다. 자신이 얼마나 더 박민정의 곁에 머물 수 있을까. 만약 가능하다면 영원히 딸아이와 함께 있고 싶었다.박민정도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그러다 문득, 정수미의 몸이 지나치게 마른 걸 깨달았다.손끝에 닿는 감촉은 온통 뼈뿐이었다.“엄마...”박민정의 목소리가
“엄마, 아빠랑 이혼 잘하셨어요.”유남우는 말을 마치자마자 유남준 앞을 지나치면서 다시 말을 이었다.“내가 능력이 없어서 이번에도 졌네.”유남준은 그저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째려봤다.유남우는 사실 그가 어떻게 반격할지 걱정되기보다 이번에도 졌다는 게 더 분통했다.밖으로 나온 뒤 그는 핸드폰을 꺼내 어딘가로 전화라도 걸고 싶었지만 딱히 연락할 사람이 없었다.연락처를 훑어보다가 홍주영에서 멈칫하더니 결국에는 통화버튼을 누르지도 못한 채 핸드폰을 다시 꺼야 했다.실내 안.거실은 유난히 조용했고 유지욱은 그저 한숨만 내쉬었다.“남우가 왜 저렇게 변했는지 모르겠어. 예전에는 말도 잘 듣고 착한 아이였는데.”고영란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그리고 그가 말하는 ‘예전’이 정확하게 언제인지도 감이 오지 않았다.고영란이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는 모습에 유지욱이 그녀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왜 그래?”“아니에요.”그리고 자리에서 일어서며 다시 말을 이었다.“이번 달은 될수록 어디 가지 말고 집에 있어요. 그리고 이혼 숙려기간이 끝나는 대로 다시 가서 마무리 지으면 될 것 같아요.”고영란은 생각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이혼하고 싶은데 지금 이혼하려면 한 달씩이나 기다려야 했다.그리고 위층으로 올라가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그리고 이 한 달 동안에 아버지로서 해야 할 일이 뭔지 좀 생각해 보고요.”말을 마친 뒤 유지욱의 대답은 듣지도 않고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한편.박씨 가문의 옛 저택.박민정은 유남준이 너무 걱정되어 한걸음에 집으로 돌아왔다.비록 서다희가 괜찮다고는 했지만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이때, 밖에서 들리는 차 소리에 박민정이 다급히 차창 밖을 내다보니 유남준의 차도 마침 도착해 있었다.박민정은 빠르게 차에서 내린 뒤 유남준에게 달려가 그의 품에 와락 안겼다.“괜찮아요?”그러자 유남준은 싱긋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줬다.“당연하지, 다희가 나 괜찮을 거라고 알려줬잖아.”박민정은 그저 가볍게 고개를 끄
유석진의 입에서 갑자기 자기 둘째 아들의 이름이 거론되자 고영란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또한 왜 두 아들 사이에 지금 저런 모순이 생긴 건지 알 수 없었다.유남준도 괜히 고영란이 중간에서 난처하게 된 것 같아 일부러 유남우를 빤히 바라보며 유석진에게 말했다.“이번 일은 사과한다고 해결되는 일이 아니에요. 큰아빠가 아무리 남우랑 같이 벌인 일이라고 해도 이번만큼은 가만있지 않겠습니다.”별로 무겁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이상하게 위협감이 느껴졌다.순간 유석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이때, 그의 며느리인 최현아가 앞으로 한 발짝 나서며 끼어들었다.“남준 씨, 그래도 한 가족인데 한 번만 봐주시면 안 될까요?”그러자 유성혁도 한마디 거들었다.“남준아, 우리도 잘못했단 걸 알고 있어. 아버지가 이제 연세도 많아서 상황판단이 안 될 때가 많아.”유석진도 사실 지금 자존심을 부려서 될 일이 아니란 걸 잘 알고 있었다.“그래서 지금 네가 원하는 게 뭔데? 말해주면 내가 다 들어줄게.”사실 유남준은 이 말만을 기다렸다.“금방 인수한 시내 중심에 있는 그 건물을 저한테 넘겨주세요.”그 땅은 유명훈의 땅이고 죽기 전 유석진에게 물려준 유산인데 지금 아무리 돈이 많아도 살 수 없을 정도로 값이 올랐다.유석진이 이 땅의 주인이 됨으로써 그곳의 상권을 손에 쥔 거나 다름없었는데 나중에 아무 건축물을 세워 올려도 가치가 있을 것이다. “그건 안되지!”역시나 유석진이 단번에 거절했다.그가 오랫동안 눈독 들였던 땅이었는데 유명훈이 죽어도 물려주지 않으려 해서 여태껏 애를 먹고 있었다가 이제 겨우 손에 들어온 땅이고 또 자기만의 계획이 따로 있었다.“그러면 조만간 IM 그룹의 변호사를 만나셔야겠네요.”유남준은 더 이상 그와 얘기하고 싶지 않았고 유석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집안 도우미에게 외쳤다.“모셔다드려!”그렇게 도우미들은 그들을 전부 밖으로 내보냈고 거실에는 유남준 가족들만이 남게 되었다.유지욱과 고영란은 눈앞의 두 아들에게 뭐라고 말했으면 좋을지
유남준이 잡혀갔다는 소식에 유석진 가족들은 조용히 자축하고 있었다.최현아도 너무 기뻐했지만 유독 유성혁만 우울한 얼굴로 그들에게 물었다.“아빠, 그래도 한 가족이나 마찬가지인데 꼭 이래야 할까요? 남준이가 잡혀가도 우리한테 아무런 이득도 없잖아요. 그리고 만약 다시 풀려나서 우리가 한 짓이라는 걸 알게 된다면 분명 가만히 있지 않을 거라고요.”그러자 유석진이 미간을 찌푸리고 답했다.“왜 쓸데없는 일을 벌써 걱정하고 그래? 간이 그리도 콩알만 해서 큰일 하겠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놈!”유성혁은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다만 그의 옆에 앉아 있던 유지훈은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저는 할아버지가 한 행동이 맞다고 봐요. 사람은 자기 이익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그러자 유석진이 만족스럽다는 듯이 껄껄거리며 웃었다.“하하, 역시 우리 손자가 똑똑하다니까. 네 말이 맞아. 사람은 무조건 자기가 일 순위여야 해. 절대 네 바보 같은 아빠를 닮아서는 안 된다.”그러자 유지훈이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할아버지, 저도 알고 있어요.”그리고 유석진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그러나 그들은 너무 일찍 기뻐했던 게 오후가 되자마자 유남준은 바로 풀려났다.그길로 옛 저택으로 오게 되었고 동시에 유석진네 식구들과 유남우를 전부 집으로 불러 모았다.이 시각, 유지욱도 마침 그곳에 있다가 눈앞의 상황에 어리둥절해서 물었다.“남준아,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아빠, 제가 지금부터 저 사람들의 실체에 대해 다 밝히려고요.”그리고 서다희가 한 무더기의 자료와 증명서를 건네주자마자 그는 유석진네 식구들에게 뿌려줬다.종이들이 공중에서 흩날리다가 전부 바닥으로 떨어졌는데 유석진은 그중 한 장을 주워 읽어보고는 너무 황당한 나머지 코웃음을 치며 그에게 말했다.“남준아, 다 오해야. 우리가 왜 그런 짓을 하겠니?”그러자 유남준이 눈살을 찌푸리고 그에게 되물었다.“우리 회사에 심어둔 사람들을 제가 다 데려올까
유남준은 사실 진작에 유남우와 유석진 쪽에 사람들을 붙여서 그들의 동향을 주시하고 있었고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파악하고 있었지만 도대체 무얼 하려는지 궁금해서 일단 내버려두고 있었다.이튿날, IM 그룹으로 세무국 사람들이 들이닥쳤다. 그러자 서다희가 눈살을 찌푸리고 중얼거렸다.“대표님을 감옥에 보내려고 아주 별짓을 다 하네요. 이런다고 그 사람들한테 득이 되는 게 뭔지 정말 모르겠어요.”특히 유남우는 왜 자기 친형을 왜 이렇게까지 괴롭히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조사해 보니 역시나 회사 장부에 문제가 있었고 회사 자금을 불법으로 돌렸다는 증거들이 발견되기 시작했다.그러나 이 모든 게 다 그들이 일부러 만들어낸 가짜 장부들이었다.그렇다고 해도 유남준은 회사 법인으로서 조사를 받아야 하기에 어쩔 수 없이 연행되었다.가면서도 서다희에게 당부했다.“민정이한테 걱정하지 말라고 전해줘.”서다희는 한껏 걱정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굳이 말하지 않아도 뉴스에서 하루 종일 보도될 예정이라 아마 얼마 안 돼서 알게 될 것이다.역시나 박민정은 출근길에 그에 관한 뉴스 기사를 보게 되었다.“어떻게 이럴 수가?”이때, 고영란도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왔다.“민정아, 남준이한테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그러나 박민정도 아직 무슨 상황인지 모르고 있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답했다.“저도 방금 기사를 봐서 잘 모르겠어요. 제가 지금 당장 다희 씨한테 전화해 볼 테니까 어머님은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그래.”고영란은 착잡한 마음으로 전화를 끊었다.유지욱과 이혼하겠다고 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아들한테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서다희는 빠르게 박민정에게 전화해서 유남준이 시킨 대로 알려줬고 모든 일은 다 대비되어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박민정은 그제야 마음이 조금 놓였다.이때 서다희가 한마디 더 했다.“그런데 이 일은 절대 고영란 사모님한테 말하지 말아 주세요.”“알겠어요.”어쩌면 유남우 귀에도 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이 나이니까 더 이혼하자는 거예요. 굳이 남은 인생을 당신한테 낭비하고 싶지 않거든요!”고영란은 말을 마치자마자 안방에 들어갔다.그러나 유지욱은 지금 이 상황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아 한참 동안 그 자리에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그러다가 문득 여태껏 이혼에 대해 거론조차 하지 않던 사람이 갑자기 심술부리는 원인이 분명 아버지 재산 때문인 것 같았고 며칠이 지나면 괜찮아질 것이라 생각했다.이튿날.유명훈의 장례식은 계속 진행되었고 박민정의 친구들도 모두 오게 되었다.“고인의 명복을 빕니다.”손연서의 말에 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렇게 다른 손님들도 하나둘씩 계속해서 들어오고 있었는데 장례식의 침울한 분위기와는 정반대로 최현아는 눈웃음을 살살 지으며 한쪽에서 사람들과 유명훈의 유언장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그러나 유지욱과 고영란 두 사람 사이는 여전히 찬 바람이 쌩쌩 불었다.그렇게 유명훈의 장례는 총 3일 동안 진행 후 끝났다.고영란은 담담한 얼굴로 박민정과 유남준, 그리고 유남우에게 말했다.“나랑 네 아버지는 이만 갈라서려고 해.” 순간 모든 사람이 의아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옆에 서 있던 유지욱의 안색도 좋지 못했다.그는 원래 유명훈의 장례가 끝나면 계속해서 여행이나 다니려고 했었는데 뜬금없이 고영란한테서 이혼 통보를 받게 되었다.어제까지만 해도 분명 일시적으로 심술부리는 거라 생각하고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지금 보니 진심인 것 같았다.“지금 애들 앞에서 솔직하게 말해, 진짜 이혼하려고?”“네.”고영란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이미 오랫동안 고민했던 일이고 지금처럼 사는 게 저는 너무 괴로워요. 지금 당장 법원에 갑시다.”고영란은 지금 그들의 의견을 구하려는 게 아니다.유지욱도 자존심이 꽤 센 사람이라 단번에 그러자고 하더니 두 사람은 법원으로 출발했고 두 아들은 굳이 말리지 않았다.자식들도 이미 다 컸고 자기 혼인에 대해 결정할 권리가 충분히 있다고 생각했다.박민정은 유남준과 같이 돌아가는 차 안
고영란도 유석진의 고함에 깜짝 놀라 순간 할 말을 잃었다.그리고 여태껏 모든 집안일을 아내한테 떠넘긴 채, 홀로 밖에서 자유롭게 살고 있는 유지욱이 원망스럽기만 했다.한 사람에 대한 단념은 하루아침에 되는 게 아니라 이런 실망감이 천천히 쌓이면서 식어가는 것이다.보아하니 오늘 저녁에도 잠들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유지욱이 도착해보니 유씨 가문의 모든 친척이 다 모여있었다.그리고 이미 상복으로 갈아입은 고영란을 보자마자 그녀에게 다가와 물었다.“왜 진작에 나한테 말해주지 않았어?”그의 물음에 고영란은 실망 가득한 얼굴로 답했다.“제가 말해주지 않았다고요? 한 달 전에 전 분명히 아버님 건강 상태가 점점 안 좋아지고 있으니까 와서 회사 일 좀 도와드리라고 귀띔해 줬어요.”“난 네가 우리 아버지 재산 때문에 나더러 오라는 줄 알았지.”유지욱의 말에 고영란은 큰 충격을 받고 잠깐 멍해졌다가 다시 두 주먹을 꼭 쥐고 말했다.“유지욱 씨, 정말 어이없네요. 맞아요, 제가 빨리 돌아오라고 했던 원인이 아버님의 재산이 조금이라도 공평하게 지욱 씨한테도 나눠줬으면 했어요. 그런데 그 재산이 전부 아주버님한테 넘어갔네요?” 그러나 유지욱은 여전히 시큰둥한 얼굴이었다.“그깟 돈 몇 푼 가지고 왜 그래? 우리가 모두 한 식구인데 주면 줬지.”유지욱은 말을 마치자마자 손님들을 맞이하러 떠났다.그리고 유석진과도 반갑게 인사하는 모습에 고영란은 제대로 마음이 상했다.박민정도 손자며느리로서 유남준과 같이 손님들을 맞이하다가 우연히 시부모님이 서로 말다툼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그녀는 사실 유씨 가문에 시집온 이후로 시아버지인 유지욱을 거의 본 적이 없었다.그리고 유지욱은 젊었을 때부터 고집불통에 집안 사업에도 관심이 없었고 그저 매일 여행이나 다니면서 자유롭게 사는 걸 즐기는 사람이라고 했다.하여 유지욱과 고영란은 1년 중에도 만날 수 있는 날이 별로 없었다.박민정은 유남준에게 살짝 다가가 그에게 말했다.“남준 씨, 가서 어머님 좀 위로해 주세요.”여자
유남준의 아버지, 유지욱은 계속 외국에서 살다보니 이 자리에 없었다.그러자 고영란이 눈살을 찌푸리며 답했다.“지욱 씨는 지금 당장 오는 게 불가능한 사람이잖아요. 그리고 방금 비행기 탔다고 했으니 적어도 두 시간은 걸릴 거예요.”그러자 유석진이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그러면 지욱이가 도착하고 나서 다시 말할 테니까 외부인은 참견하지 말아요.”순간 고영란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이를 악물고 말했다.“이 집에 들어와서 아이를 둘씩이나 낳아줬는데도 제가 아직 외부인인가요? 저는 오늘 아버님께서는 왜 그리도 자식들을 편애하시지 꼭 물어봐야겠어요!”“제 아들들이 능력이 뛰어나면 이런 불공평한 대우도 다 받아들여야 하나요?”여태껏 유명훈은 많은 주식을 갖고 있었다.비록 유남준이 현재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긴 하지만 유명훈의 지분이 그대로 유석진네로 넘어가게 되면 유남준의 자리가 위태로워진다.더구나 유남우도 그의 재산이 필요한데 말이다!게다가 유명훈은 오랜 세월 동안 주식 말고도 분명 많은 재산을 모았을 텐데 그 돈마저 전부 저 사람들에게 넘어가는 모습을 고영란은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다.유석진은 유명훈의 앞을 가로막으며 다시 큰 소리로 외쳤다.“여태껏 지욱이를 잘 붙잡아 두지 못한 제수 씨를 탓해야죠! 지욱이가 오기 전까지는 아무리 소란을 피워도 소용없어요!” 고영란이 뭐라고 대꾸하려는데 유남준이 그녀를 말렸다.“엄마, 그만해요.”여태껏 유명훈이 유석진네만 편애하는 모습을 보고 자랐던 그이기에 지금 아무리 그와 말싸움해도 아무 의미가 없을 것 같았다.유남우도 불쾌했지만 애써 덤덤한 척 그녀에게 말했다.“엄마, 형 말이 맞아요. 할아버지께서 결정하신 대로 받아들이면 되니까 싸울 필요 없어요.”이 시각, 침대에 누워있던 유명훈은 호흡이 점점 더 가빠져 헐떡거리기 시작했다.그런데도 눈앞에서 자식들이 자기 재산 때문에 싸우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씁쓸하기만 했다.“지욱이...”그는 힘겹게 유지욱을 불렀다.유지욱은 평소에도 그의 말을
최현아는 손까지 흔들며 반갑게 인사했지만 박민정은 그저 냉담한 얼굴로 물었다.“여긴 어쩐 일이세요?”그러자 그녀는 뻘쭘해진 손을 다시 주머니에 넣으며 애써 미소를 지었다.“일은 무슨, 윤소현이 드디어 판결받았다고 해서 축하해주려고 왔지.”박민정은 분명 다른 속셈이 있다고 생각했다.지금 최현아와 그의 시아버지는 쥐 죽은 듯이 조용히 지내고 있었는데 왠지 그럴수록 더 수상했다.“감사합니다. 다른 일 없으면 저는 이만 일 하러 갈게요.”말을 마치자마자 박민정이 뒤돌아서니 역시나 최현아가 빠르게 그녀의 팔을 부여잡았다.“민정아, 아무리 그래도 우리는 한 식구나 마찬가지인데 이렇게까지 딱딱하게 굴 필요는 없잖아?”박민정은 이제 와서 한 식구라는 그녀의 말이 그저 가소로웠다.“도대체 할 말이 뭔가요?”그리고 슬슬 짜증 나기 시작했다.“최근에 할아버지 건강이 점점 악화하면서 동서랑 남준 씨가 그립기도 하고 우리가 서로 화목하게 지내는 모습도 보고 싶은가 봐. 혹시 오늘 밤 할아버지 뵈러 같이 가지 않을래?”최현아는 최대한 상냥하게 물었다.사실 박민정도 할아버지의 건강이 여태껏 좋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고 오늘 두 사람을 부른 이유도 아마 자신이 얼마 버티지 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네, 알겠어요.” 최현아는 그제야 박민정의 팔을 놓아줬지만 그녀가 떠나가자마자 눈빛이 순식간에 돌변했다.그리고 차에 올라타자마자 한껏 불쾌한 얼굴로 중얼거렸다.“재수 없는 것, 운발로 지금 자리에 올라앉은 주제에.” 차에는 낯선 남자 한 명이 더 있었다.“박민정한테 화낼 필요 없어. 지금 네가 해야 할 일은 무조건 할아버지가 살아있을 때 할아버지의 주식이랑 모든 돈을 너한테 넘길 수 있도록 잘 구슬리는 거야.”그러자 최현아가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나도 알아, 저번에 이미 할아버지랑 말해봤다니까? 유남준 씨랑 민정이는 괜히 고고한 척하면서 아무것도 받지 않겠다고 말한 상황이라 우리 쪽에 전부 몰리게 되어있긴 한데, 난 지금 성혁 씨 얼굴만 봐도 짜
조하랑은 그제야 화가 사그라지는 것 같았다.“그러면 왜 저 여자한테 찾아갔어요?”“당연히 지금은 어떤 상태인지 확인하러 갔죠. 그리고 이지원에 대해 정신감정도 의뢰했거든요. 만약 진짜로 정신에 이상이 있는 거면 어쩔 수 없겠지만 이 모든 게 다 쇼하는 거면 절대로 가만두지 않으려고 했어요.”김인우는 진지한 얼굴로 말하다가 조하랑을 보고 다시 말을 이었다.“예전에 제가 지원이한테 어떻게 가스라이팅 당했는지 하랑 씨도 잘 알잖아요. 만약 저를 구해줬던 사람이 형수님이었단 사실을 진작에 알았다면 절대 그 애를 도와주지도 않았을 겁니다.”“지금은 그저 마땅히 받아야 할 벌만 받았으면 좋겠고요.”조하랑은 묵묵히 듣고 있다가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제가 오해했네요. 정말 미안해요. 저는 인우 씨가 또 그새를 못 참고 다른 여자한테 찝쩍거린다고만 생각했어요.”그녀의 말에 김인우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못 참고 되물었다.“하랑 씨, 혹시 지금 질투하는 거예요?”순간 조하랑의 얼굴이 새빨개졌다.“누, 누가 질투한다는 거예요? 그저 저를 배신한 인우 씨한테 화나고 그런 사람을 좋아했던 나한테 실망했을 뿐이라고요!”“알겠어요, 제가 잘못했어요. 그리고 의사도 임산부가 흥분하면 아이한테 안 좋다고 말했잖아요.”말을 마치자마자 김인우는 다정하게 조하랑을 품에 안았는데 순간 그녀는 얼굴이 더욱 빨개진 채 온몸이 굳어버렸다.당연히 김인우도 눈치채고는 빠르게 물었다.“왜요, 부끄러워요?”“그, 그럴 리가요...”조하랑은 말까지 더듬으며 애써 덤덤한 척했다.“저도 안을 줄 알거든요?”그리고 똑같이 김인우를 꼭 안아줬는데 이번에는 김인우가 속으로 움찔했다.추운 밤, 그렇게 두 사람은 아무 말도 없이 서로를 꼭 껴안아 줬는데 거리를 지나가던 몇몇 사람들의 시선이 계속 그들에게 멈춰졌다 가곤 했다.조하랑도 어느새 그걸 느꼈는지 재빨리 김인우를 밀쳐냈다.“됐어요. 이제 병실로 돌아가 봐야 하니까 인우 씨도 그만 돌아가요.”“저랑 같이 안 가고요?”김인우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