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민정은 한참을 지나고서야 겨우 말 한마디 내뱉었다.“남준 씨가 먼저 잘못한 거 맞잖아요. 지석이를 다치게 했으면서.”유남준은 울화가 치밀었다.개도 주인 말이라면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고 무조건적으로 믿는데 박민정은 그의 아내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의 편을 들고 있었다.유남준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서다희는 조금 초조해졌다.연지석의 사람들은 언제든지 들어올 수 있었다. 그때가 되면 상황이 통제 불능이 될 것이다.전화기 너머로는 쥐 죽은 듯한 정적이 이어졌다.박민정은 그가 화가 나서 전화를 끊은 줄 알았는데 다시 보니 여전히 통화 중이었다.“남준 씨, 듣고 있어요?”“아직 안 죽었어.”“...”“하민재 씨 먼저 풀어주면 안 돼요?”박민정이 초조한 목소리로 물었다.유남준은 화를 내지 않고 오히려 그녀에게 되물었다.“왜? 방금 그 사람이 한 말 못 들었어? 그가 살아 있는 한 언젠간 날 죽여버리겠다고 했잖아. 그렇게 내가 죽길 바라는 거야? 나 죽으면 다른 남자 찾으려고?”박민정은 그의 말도 안 되는 소리에 응대하지 않고 설명했다.“하민재 씨는 지금 남준 씨에게 잡혀서 살아남을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상황이니까 당연히 할 말 다 하고 죽으려는 거죠. 아니면 얼마나 억울하겠어요?”박민정은 말하면서 하민재의 배경에 대해 검색해 보았다. 그리고 하민재는 하씨 가문에서 가장 중시하는 후계자임을 알게 되었다.“그리고 적을 너무 많이 둬도 안 좋은 거 아니에요? 남준 씨 새 회사 시작했잖아요. 하씨 가문은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가문인데 그 가문의 후계자를 죽인 남준 씨에게 복수하면 어떡해요?”사실 이 말은 서다희도 유남준에게 했었다.지금은 사람을 죽이는 좋은 타이밍이 아니라고 말이다.하지만 유남준은 그의 말을 전혀 듣지 않았다.오히려 서다희에게 연지석을 유인해서 함께 제거하라고 했었다.하지만 지금 박민정의 말을 들으니 평소 냉혹하고 오만한 유남준도 마음이 동했다.“그게 다야?”박민정은 유남준이 대부분의 경우 부드러운 말에는 약
연지석의 부하가 하민재를 부축하며 들어왔다.하민재는 배를 감싸면서 말을 겨우 뱉어냈다.“그 녀석 의외로 싸움 잘하네. 우리 쪽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있었는데도 눈이 보이지 않는 그 녀석을 막지 못했다니.”상처투성이인 와중에도 말을 계속 하는 그를 보며 연지석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그만 말해.”박민정 덕분에 유남준이 하민재를 살려주지 않았다면 하민재는 오늘 이 세상에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하민재가 계속 말하려 하던 그때, 소파에 앉은 박민정이 맑은 두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돌아오는 길에 그는 이미 연지석에게서 박민정이 유남준에게 자신을 풀어달라고 부탁한 소식을 들었다.하민재의 얼굴색은 바뀌지 않았지만 박민정을 바라보는 그의 차가운 눈이 조금은 부드러워졌다. 다만 조금일 뿐이었다.연지석도 박민정을 발견하고는 물었다.“왜 안 잤어?”“잠이 안 와서.”박민정이 일어섰다.부하들은 하민재를 소파에 앉혔다.온몸이 피투성이인 그는 극심한 고통에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곧이어 가정의가 도착해 하민재의 상처를 치료했다.그는 병원에 갈 수 없는 상태였다.연지석은 박민정을 위층 방으로 데려간 후 이불을 펴주며 말했다.“아직 이르니까 얼른 자.”박민정은 그를 바라보다가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너랑 남준 씨...”연지석이 그녀의 말을 끊었다.“네가 말한 대로 나도 복수했으니 이제 끝났어.”박민정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럼 다행이네.”그녀는 또 연지석을 자세히 살펴보았다.“남준 씨 널 괴롭히진 않았지? 어디 다치진 않았어?”박민정이 이렇게 묻자 연지석의 마음은 더 복잡해졌다.그는 고개를 숙이더니 깊은 눈망울로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내가 유남준을 어떻게 했는지 궁금하지도 않아?”박민정은 멈칫했다.연지석은 그녀의 얼굴을 꼼꼼히 살피며 계속 물었다.“너와 유남준은 어쨌든 부부이고 아이도 있잖아. 내가 유남준에게 복수를 했다는데 나한테 화나지도 않아?”그의 말을 들은 박민정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박민정은 한숨 푹 자고 일어나니 날은 이미 밝았다.휴대폰을 들어 확인했는데 벌써 점심 12시였다.일어나려던 그때, 유남준에게서 문자가 온 것을 확인했다.[언제 돌아올 거야?]박민정은 아직 확실하지 않아서 그에게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침실을 나서자 가정부가 그녀에게 빠르게 다가왔다.“민정 씨, 세면도구를 준비해 두었습니다. 이쪽으로 오세요.”박민정의 신분을 확실히 알지 못했기에 가정부는 그녀의 이름을 부를 수밖에 없었다.박민정은 그녀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고마워요.”세면을 마치고 가정부는 또 그녀를 식탁으로 안내했다.연지석은 식탁 한쪽에 앉아 있었고 맞은편에는 하민재가 있었다.그는 새벽에 비해 상태가 많이 나아져 보였다.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얼굴에 핏기도 돌았는데 아무 일도 겪지 않은 일반인처럼 식사를 하고 있었다.연지석은 식사하지 않고 가죽 의자에 앉아 손에 서류 하나를 들고 있었다.박민정의 발소리를 듣고 그는 서류를 접고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봤다.“얼른 와서 밥 먹어.”“알겠어.”박민정은 그에게 다가가며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내가 널 돌봐주기로 했는데 이제 네가 나를 챙기고 있네.”연지석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우리 둘 중 누가 누굴 돌봐주든 상관없잖아.”맞은편에서 국을 마시고 있던 하민재는 이 말을 듣고 사레들려 크게 기침을 했다.“나 배부르니까 쉬러 갈게.”연지석은 하민재가 말렸는데도 불구하고 기어코 유부녀인 박민정을 건드리려 했다.그는 정상적인 사람으로서 두 사람의 교류를 전혀 보고도 듣고도 싶지 않았다.연지석은 멀어져 가는 하민재의 뒷모습을 보며 박민정에게 설명했다.“너무 신경 쓰지 마. 원래 저런 사람이니까.”“응, 괜찮아.”박민정은 하민재의 태도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그녀는 연지석과 친구이지, 하민재와는 친구가 아니었으니 말이다.그리고 지금 임신 중이라 박민정은 되도록 다른 사람 때문에 자신이 영향을 받지 않으려 노력했다.가정부가 건넨 식사를 받아 들고는 열심히 먹기 시
박민정의 뜻을 이해한 연지석은 목이 메었다.박민정은 약간 미안해하며 말했다.“윤우와 예찬이는 아직 국내에 있어서 여기 오래 있을 수 없을 것 같아.”연지석의 얼굴색은 바뀌지 않았지만 그의 얼굴은 전보다 다소 지쳐 보였다.“언제 떠나려고?”“모레.”연지석은 사실 박민정의 보살핌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녀가 여기에 온 것도 친구로서 병문안하러 온 것이었다.박민정이 모레 떠난다는 말을 듣고 연지석은 아무 말도 없이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배불렀어?”“응.”“그럼 나가서 좀 걸을까?”“좋아.”두 사람은 함께 산책하러 나갔다.옛날에 연지석은 종종 박민정을 찾아와 함께 산책하고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지금은 마치 예전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연지석과 함께 에스토니아 거리를 걸으며 두 사람은 지난 일을 얘기하면서 박민정은 유남준에게 답장을 보내는 것을 깜박 잊었다.같은 시각, 그랜드 호텔 안.유남준은 계속 휴대폰을 들고 박민정의 답장을 기다렸다.서다희가 문을 두드리며 들어왔다.“대표님.”“무슨 일이야?”“사모님께서 연지석과 함께 외출하셨어요. 지금 시내에 계십니다.”서다희도 방금 부하에게서 전해 받은 소식이었다.그의 말을 들은 유남준은 박민정이 일찍 깼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요즘 사람들 중 휴대폰을 보지 않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는가?유남준은 휴대폰을 한쪽에 던졌다.서다희는 그와 몇 미터 떨어졌는데도 그의 주변에서 방출된 냉기를 느낄 수 있어 등골이 오싹해졌다.“제 약혼녀에게도 남사친 한두 명쯤은 있습니다. 저는 보통 눈감아 주죠.”서다희가 그 말을 뱉은 후 방 안의 공기는 한층 더 무거워졌다.전에 박민정에게는 남사친이 거의 없었다. 그런데 연지석에 유남준의 동생 유남우, 그리고 또 혼혈 스타까지, 신경 쓰이는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니었다.유남준은 일어나려다 상처가 다시 찢어졌다. 전해져 온 고통에 그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구겼다.서다희는 즉시 다가왔다.“대표님, 괜찮으세요? 의사 부를까요?”“괜찮아.”유남준은 바로 거
박민정의 회사는 이미 상당한 규모로 성장했으며 직원 수는 500명이 넘었다.다만 진서연을 제외한 대부분의 직원들은 박민정이 회사의 실질적인 보스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그래서 박민정과 연지석이 회사 로비에 나타났을 때 프런트 직원도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다.“진 대표님을 찾으신다고요?”“네.”박민정은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일반적으로 프런트에서는 쉽게 대표 비서실에 연락해 주지 않았다. 하지만 눈앞의 아름답고 기품 있는 여자와 그녀 옆에 있는 위엄이 넘치고 매혹적이라고 할 정도로 잘생긴 남자를 보자 그녀는 곧바로 대표 비서실에 전화를 걸었다.비서가 전화를 받고는 진서연에게 보고했다.“진 대표님, 누군가 찾으십니다.”진서연은 하던 일을 멈췄다.“나 바쁘다고 해.”말을 마치자마자 진서연은 박민정의 문자를 받았다.[서연 씨, 나 지금 회사 밑에 있어.]진서연은 문자를 확인하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비서를 다급하게 말렸다.“잠시만. 바로 내려가 볼게.”비서는 좀 의아했다.‘진 대표님 갑자기 왜 이러시지? 조금 전까지만 해도 무심한 태도를 보였는데 왜 갑자기 태도가 바뀐 걸까?’진서연은 거의 뛰다시피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갔다.박민정을 보자마자 그녀는 하이힐을 신었는데도 불구하고 빠르게 달려가 그녀를 꽉 껴안았다.“엉엉, 보스님, 드디어 돌아오셨군요. 이제 보스님이 일궈낸 이 왕국을 직접 운영하실 건가요?”진서연이 말할 때 그녀의 머리카락은 박민정의 뺨을 스치면서 간지럽혔다.박민정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이 왕국은 서연 씨가 운영하면 충분해. 나는 그냥 한가로운 황제가 되고 싶을 뿐이야.”박민정과 진서연이 함께 일한 지도 벌써 6년이 다 되어갔다.처음에는 둘이 작은 작업실을 운영하다가 서서히 이렇게 큰 PMJ로 성장하게 되었다.장난은 잠시 그만두고 진서연은 곧바로 박민정의 얼굴에 난 흉터를 발견했다.“보스님, 얼굴은 어쩌다가 이렇게 됐어요?”회사가 커지고 일도 점점 많아지다 보니 진서연은 국내 소식을 확인
두 사람은 오후 내내 일 얘기를 했고 저녁에는 진서연이 박민정과 연지석을 남아 함께 저녁을 먹도록 한참 설득했다.저녁을 먹고 화장실에 갔을 때 그녀는 박민정에게 사적으로 물었다.“보스님, 이제 결심을 하신 건가요?”박민정은 어안이 벙벙했다.“무슨 결심?”“연지석 씨에게로 돌아오는 거요.”진서연은 큰 눈을 반짝이며 그녀를 바라봤다.“이번에 연지석 씨 때문에 돌아오신 거 아니에요?”박민정은 말문이 막혔다.그렇다고 말하기도, 아니라고 말하기도 어려웠다.“나랑 지석이는 친구일 뿐이야. 다른 생각은 하지 마.”진서연은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보스님과 연지석 씨가 함께라면 매일 눈 호강할 수 있는데요.”박민정은 웃으면서 그녀의 어깨를 툭 쳤다.진서연은 여전히 호기심을 멈추지 않고 물었다.“연지석 씨가 아니라면 혹시 유남준 씨인가요?”진서연은 유남준도 만난 적 있었는데 역시 군침을 흐르게 할 정도로 잘생긴 사람이었다.박민정은 기가 막혔다.“가자. 시간도 늦었는데 씻고 자야지.”두 사람이 나란히 밖으로 나와 룸으로 돌아가려 하는데 박민정은 갑자기 멈칫했다.멀리서 훤칠한 키의 두 남자가 보였기 때문이다.연지석과 서다희는 룸 앞에 서 있었다.서다희는 금테 안경을 쓰고 있었는데 키도 크고 잘생겼다. 물론 연지석만큼은 아니었지만 말이다.진서연은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보스님 옆에 잘생긴 남자가 왜 이렇게 많아요?”박민정은 그녀의 말을 듣고 어이없어하며 말했다.“알았어. 이제 그만하고 먼저 가서 쉬어.”“네.”진서연은 아쉬워하면서 레스토랑을 나섰다.그때, 룸 앞에 서 있던 서다희와 연지석은 겉으로는 친절하고 호의적으로 보였지만 사실 분위기는 주변의 사람들이 멀리 피할 정도로 얼음장처럼 싸늘했다.박민정이 다가갔다.“서 비서님.”서다희는 돌아서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사모님 모시러 왔습니다.”“죄송한데 이미 남준 씨에 얘기했어요. 모레 돌아간다고요. 먼저 돌아가세요.”박민정이 말했다.이미 연지석과 약속한 일이니 이
박민정은 끊긴 전화를 보며 멍해졌다.유남준이 화가 났다고 생각해 다시 전화를 걸었는데 이번엔 자동 응답 알림음 들려왔다.“연결이 되지 않아 삐 소리 후 소리샘 퀵...”연결되지도 않았는데 알림음이 들리는 걸 보니 박민정은 자신이 차단당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박민정은 기가 막혔다.그리고 더 이상 걱정하지 않고 편히 쉬기로 했다.다른 한편, 그랜드 호텔 안.유남준은 휴대폰을 한쪽에 던지며 두통 때문에 이마를 주물렀다. 그리고 실눈을 뜬 채 서다희를 바라보며 말했다.“내가 여기 왜 왔다고 했지?”서다희는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이 바로 서고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유남준을 바라봤다.“사모님 때문이죠. 대표님, 정말 기억 안 나세요?”유남준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사모님이라니. 사모님이 어디 있다고.”“박민정 씨예요.”자기가 박민정을 위해 이렇게 외진 곳에 왔다고 들었을 때 유남준의 눈에는 놀라움이 가득했다.‘농담인가? 내가 그 여자 때문에 여기까지 올 정도로 한가하다고?’“박민정이 지금 어디에 있는데?”유남준도 자신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서다희는 그에게 지금이 2023년이라고 말했지만 그의 기억은 6, 7년 전에 멈춰 있었다.서다희는 유남준의 휴대폰을 가리키며 말했다.“조금 전에 사모님... 박민정 씨에게서 전화가 온 것 같아요.”서다희도 지금 무척 당황했다.낮에 박민정을 찾아가기 전 유남준은 갑자기 심한 두통을 호소하며 서다희에게 누구냐고 물었었다.그가 레스토랑에서 돌아온 후에는 다시 서다희를 알아보고 기억도 돌아온 것처럼 보였지만 최근 몇 년의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듯했다.‘대표님 지병이 재발한 것 같은데? 완전히 나은 게 아니었네?’유남준은 다시 휴대폰을 잡으려 했지만 눈앞이 깜깜해져 손을 한참 뻗었는데도 휴대폰을 찾을 수 없었다.그래서 그는 눈앞의 테이블을 확 밀어 넘어뜨렸다.“쾅!”굉음이 울려 퍼졌다.유남준은 얼음장처럼 싸늘한 눈빛을 보이며 물었다.“내 눈은 도대체 왜 이렇게 된 거야?
전화가 끊기고 유남준은 그저 휴대폰을 움켜쥐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얼굴은 한없이 차가웠다.서다희가 유남준에게 설명했다.“대표님, 박민정 씨는 지금 임신 중이어서 휴식이 필요한 게 맞습니다.”“임신?”유남준이 의문스러운 얼굴로 물었다.그가 오해할까 봐 서다희가 또 말했다.“네, 대표님 아이예요.”유남준은 자신과 박민정에게 아이가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지금의 그는 당연히 박민정이 내일 올 때까지 기다리지 않는다.그는 통증을 참으며 일어섰다.“진주로 돌아가자.”그는 진주로 돌아가면 더 큰 서프라이즈가 그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서다희는 지금 유남준의 몸 상태가 불안정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빨리 돌아가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만약 평소 유남준에게 원한이 있던 사람들이 그가 이상하다는 것을 발견하면 큰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그래서 서다희와 유남준은 새벽에 개인 비행기를 타고 국내로 돌아왔다.서다희의 예상이 적중했다.유남준이 떠나기 전, 그에게 무릎 꿇고 사죄하던 권씨 가문의 둘째 도련님인 권해신이 정보를 얻었다.에스토니아에서 유남준을 신속히 제거하려 했으나 그때 유남준이 떠났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권해신은 그 소식을 듣자마자 음험한 눈빛을 보였다.“운이 좋군.”바로 옆 소파에 앉아 있던 동생 권진하는 약혼녀인 하예솔, 즉 이지원의 친구와 문자를 주고받고 있었다.하예솔은 지금 권진하의 품에 안긴 사람이 바로 이지원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형, 유남준은 눈이 보이지도 않잖아. 그렇게 두려워할 것 없다고. 유남준이 돌아오면 다시 기회를 잡으면 되지.”권진하가 말했다.모든 걸 하찮게 여기는 동생의 이런 성격을 권해신은 가장 싫어했다.얼마 전에도 클럽에서 만난 이지원을 집에 데려왔다.이지원이란 여자는 유남준과 김인우를 동시에 농락했던 여자라 절대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넌 결혼을 앞두고 있는 사람이야. 좀 자제해.”권해신도 그저 간단히 경고만 했다.권진하는 무심하게 대답했다.
“지금, 이 나이니까 더 이혼하자는 거예요. 굳이 남은 인생을 당신한테 낭비하고 싶지 않거든요!”고영란은 말을 마치자마자 안방에 들어갔다.그러나 유지욱은 지금 이 상황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아 한참 동안 그 자리에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그러다가 문득 여태껏 이혼에 대해 거론조차 하지 않던 사람이 갑자기 심술부리는 원인이 분명 아버지 재산 때문인 것 같았고 며칠이 지나면 괜찮아질 것이라 생각했다.이튿날.유명훈의 장례식은 계속 진행되었고 박민정의 친구들도 모두 오게 되었다.“고인의 명복을 빕니다.”손연서의 말에 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렇게 다른 손님들도 하나둘씩 계속해서 들어오고 있었는데 장례식의 침울한 분위기와는 정반대로 최현아는 눈웃음을 살살 지으며 한쪽에서 사람들과 유명훈의 유언장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그러나 유지욱과 고영란 두 사람 사이는 여전히 찬 바람이 쌩쌩 불었다.그렇게 유명훈의 장례는 총 3일 동안 진행 후 끝났다.고영란은 담담한 얼굴로 박민정과 유남준, 그리고 유남우에게 말했다.“나랑 네 아버지는 이만 갈라서려고 해.” 순간 모든 사람이 의아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옆에 서 있던 유지욱의 안색도 좋지 못했다.그는 원래 유명훈의 장례가 끝나면 계속해서 여행이나 다니려고 했었는데 뜬금없이 고영란한테서 이혼 통보를 받게 되었다.어제까지만 해도 분명 일시적으로 심술부리는 거라 생각하고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지금 보니 진심인 것 같았다.“지금 애들 앞에서 솔직하게 말해, 진짜 이혼하려고?”“네.”고영란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이미 오랫동안 고민했던 일이고 지금처럼 사는 게 저는 너무 괴로워요. 지금 당장 법원에 갑시다.”고영란은 지금 그들의 의견을 구하려는 게 아니다.유지욱도 자존심이 꽤 센 사람이라 단번에 그러자고 하더니 두 사람은 법원으로 출발했고 두 아들은 굳이 말리지 않았다.자식들도 이미 다 컸고 자기 혼인에 대해 결정할 권리가 충분히 있다고 생각했다.박민정은 유남준과 같이 돌아가는 차 안
고영란도 유석진의 고함에 깜짝 놀라 순간 할 말을 잃었다.그리고 여태껏 모든 집안일을 아내한테 떠넘긴 채, 홀로 밖에서 자유롭게 살고 있는 유지욱이 원망스럽기만 했다.한 사람에 대한 단념은 하루아침에 되는 게 아니라 이런 실망감이 천천히 쌓이면서 식어가는 것이다.보아하니 오늘 저녁에도 잠들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유지욱이 도착해보니 유씨 가문의 모든 친척이 다 모여있었다.그리고 이미 상복으로 갈아입은 고영란을 보자마자 그녀에게 다가와 물었다.“왜 진작에 나한테 말해주지 않았어?”그의 물음에 고영란은 실망 가득한 얼굴로 답했다.“제가 말해주지 않았다고요? 한 달 전에 전 분명히 아버님 건강 상태가 점점 안 좋아지고 있으니까 와서 회사 일 좀 도와드리라고 귀띔해 줬어요.”“난 네가 우리 아버지 재산 때문에 나더러 오라는 줄 알았지.”유지욱의 말에 고영란은 큰 충격을 받고 잠깐 멍해졌다가 다시 두 주먹을 꼭 쥐고 말했다.“유지욱 씨, 정말 어이없네요. 맞아요, 제가 빨리 돌아오라고 했던 원인이 아버님의 재산이 조금이라도 공평하게 지욱 씨한테도 나눠줬으면 했어요. 그런데 그 재산이 전부 아주버님한테 넘어갔네요?” 그러나 유지욱은 여전히 시큰둥한 얼굴이었다.“그깟 돈 몇 푼 가지고 왜 그래? 우리가 모두 한 식구인데 주면 줬지.”유지욱은 말을 마치자마자 손님들을 맞이하러 떠났다.그리고 유석진과도 반갑게 인사하는 모습에 고영란은 제대로 마음이 상했다.박민정도 손자며느리로서 유남준과 같이 손님들을 맞이하다가 우연히 시부모님이 서로 말다툼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그녀는 사실 유씨 가문에 시집온 이후로 시아버지인 유지욱을 거의 본 적이 없었다.그리고 유지욱은 젊었을 때부터 고집불통에 집안 사업에도 관심이 없었고 그저 매일 여행이나 다니면서 자유롭게 사는 걸 즐기는 사람이라고 했다.하여 유지욱과 고영란은 1년 중에도 만날 수 있는 날이 별로 없었다.박민정은 유남준에게 살짝 다가가 그에게 말했다.“남준 씨, 가서 어머님 좀 위로해 주세요.”여자
유남준의 아버지, 유지욱은 계속 외국에서 살다보니 이 자리에 없었다.그러자 고영란이 눈살을 찌푸리며 답했다.“지욱 씨는 지금 당장 오는 게 불가능한 사람이잖아요. 그리고 방금 비행기 탔다고 했으니 적어도 두 시간은 걸릴 거예요.”그러자 유석진이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그러면 지욱이가 도착하고 나서 다시 말할 테니까 외부인은 참견하지 말아요.”순간 고영란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이를 악물고 말했다.“이 집에 들어와서 아이를 둘씩이나 낳아줬는데도 제가 아직 외부인인가요? 저는 오늘 아버님께서는 왜 그리도 자식들을 편애하시지 꼭 물어봐야겠어요!”“제 아들들이 능력이 뛰어나면 이런 불공평한 대우도 다 받아들여야 하나요?”여태껏 유명훈은 많은 주식을 갖고 있었다.비록 유남준이 현재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긴 하지만 유명훈의 지분이 그대로 유석진네로 넘어가게 되면 유남준의 자리가 위태로워진다.더구나 유남우도 그의 재산이 필요한데 말이다!게다가 유명훈은 오랜 세월 동안 주식 말고도 분명 많은 재산을 모았을 텐데 그 돈마저 전부 저 사람들에게 넘어가는 모습을 고영란은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다.유석진은 유명훈의 앞을 가로막으며 다시 큰 소리로 외쳤다.“여태껏 지욱이를 잘 붙잡아 두지 못한 제수 씨를 탓해야죠! 지욱이가 오기 전까지는 아무리 소란을 피워도 소용없어요!” 고영란이 뭐라고 대꾸하려는데 유남준이 그녀를 말렸다.“엄마, 그만해요.”여태껏 유명훈이 유석진네만 편애하는 모습을 보고 자랐던 그이기에 지금 아무리 그와 말싸움해도 아무 의미가 없을 것 같았다.유남우도 불쾌했지만 애써 덤덤한 척 그녀에게 말했다.“엄마, 형 말이 맞아요. 할아버지께서 결정하신 대로 받아들이면 되니까 싸울 필요 없어요.”이 시각, 침대에 누워있던 유명훈은 호흡이 점점 더 가빠져 헐떡거리기 시작했다.그런데도 눈앞에서 자식들이 자기 재산 때문에 싸우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씁쓸하기만 했다.“지욱이...”그는 힘겹게 유지욱을 불렀다.유지욱은 평소에도 그의 말을
최현아는 손까지 흔들며 반갑게 인사했지만 박민정은 그저 냉담한 얼굴로 물었다.“여긴 어쩐 일이세요?”그러자 그녀는 뻘쭘해진 손을 다시 주머니에 넣으며 애써 미소를 지었다.“일은 무슨, 윤소현이 드디어 판결받았다고 해서 축하해주려고 왔지.”박민정은 분명 다른 속셈이 있다고 생각했다.지금 최현아와 그의 시아버지는 쥐 죽은 듯이 조용히 지내고 있었는데 왠지 그럴수록 더 수상했다.“감사합니다. 다른 일 없으면 저는 이만 일 하러 갈게요.”말을 마치자마자 박민정이 뒤돌아서니 역시나 최현아가 빠르게 그녀의 팔을 부여잡았다.“민정아, 아무리 그래도 우리는 한 식구나 마찬가지인데 이렇게까지 딱딱하게 굴 필요는 없잖아?”박민정은 이제 와서 한 식구라는 그녀의 말이 그저 가소로웠다.“도대체 할 말이 뭔가요?”그리고 슬슬 짜증 나기 시작했다.“최근에 할아버지 건강이 점점 악화하면서 동서랑 남준 씨가 그립기도 하고 우리가 서로 화목하게 지내는 모습도 보고 싶은가 봐. 혹시 오늘 밤 할아버지 뵈러 같이 가지 않을래?”최현아는 최대한 상냥하게 물었다.사실 박민정도 할아버지의 건강이 여태껏 좋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고 오늘 두 사람을 부른 이유도 아마 자신이 얼마 버티지 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네, 알겠어요.” 최현아는 그제야 박민정의 팔을 놓아줬지만 그녀가 떠나가자마자 눈빛이 순식간에 돌변했다.그리고 차에 올라타자마자 한껏 불쾌한 얼굴로 중얼거렸다.“재수 없는 것, 운발로 지금 자리에 올라앉은 주제에.” 차에는 낯선 남자 한 명이 더 있었다.“박민정한테 화낼 필요 없어. 지금 네가 해야 할 일은 무조건 할아버지가 살아있을 때 할아버지의 주식이랑 모든 돈을 너한테 넘길 수 있도록 잘 구슬리는 거야.”그러자 최현아가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나도 알아, 저번에 이미 할아버지랑 말해봤다니까? 유남준 씨랑 민정이는 괜히 고고한 척하면서 아무것도 받지 않겠다고 말한 상황이라 우리 쪽에 전부 몰리게 되어있긴 한데, 난 지금 성혁 씨 얼굴만 봐도 짜
조하랑은 그제야 화가 사그라지는 것 같았다.“그러면 왜 저 여자한테 찾아갔어요?”“당연히 지금은 어떤 상태인지 확인하러 갔죠. 그리고 이지원에 대해 정신감정도 의뢰했거든요. 만약 진짜로 정신에 이상이 있는 거면 어쩔 수 없겠지만 이 모든 게 다 쇼하는 거면 절대로 가만두지 않으려고 했어요.”김인우는 진지한 얼굴로 말하다가 조하랑을 보고 다시 말을 이었다.“예전에 제가 지원이한테 어떻게 가스라이팅 당했는지 하랑 씨도 잘 알잖아요. 만약 저를 구해줬던 사람이 형수님이었단 사실을 진작에 알았다면 절대 그 애를 도와주지도 않았을 겁니다.”“지금은 그저 마땅히 받아야 할 벌만 받았으면 좋겠고요.”조하랑은 묵묵히 듣고 있다가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제가 오해했네요. 정말 미안해요. 저는 인우 씨가 또 그새를 못 참고 다른 여자한테 찝쩍거린다고만 생각했어요.”그녀의 말에 김인우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못 참고 되물었다.“하랑 씨, 혹시 지금 질투하는 거예요?”순간 조하랑의 얼굴이 새빨개졌다.“누, 누가 질투한다는 거예요? 그저 저를 배신한 인우 씨한테 화나고 그런 사람을 좋아했던 나한테 실망했을 뿐이라고요!”“알겠어요, 제가 잘못했어요. 그리고 의사도 임산부가 흥분하면 아이한테 안 좋다고 말했잖아요.”말을 마치자마자 김인우는 다정하게 조하랑을 품에 안았는데 순간 그녀는 얼굴이 더욱 빨개진 채 온몸이 굳어버렸다.당연히 김인우도 눈치채고는 빠르게 물었다.“왜요, 부끄러워요?”“그, 그럴 리가요...”조하랑은 말까지 더듬으며 애써 덤덤한 척했다.“저도 안을 줄 알거든요?”그리고 똑같이 김인우를 꼭 안아줬는데 이번에는 김인우가 속으로 움찔했다.추운 밤, 그렇게 두 사람은 아무 말도 없이 서로를 꼭 껴안아 줬는데 거리를 지나가던 몇몇 사람들의 시선이 계속 그들에게 멈춰졌다 가곤 했다.조하랑도 어느새 그걸 느꼈는지 재빨리 김인우를 밀쳐냈다.“됐어요. 이제 병실로 돌아가 봐야 하니까 인우 씨도 그만 돌아가요.”“저랑 같이 안 가고요?”김인우의
김인우는 유남준의 마지막 한마디까지 다 듣고 나서야 마음이 놓였다.“그러면 지금 하랑 씨가 형수님이랑 같이 있다는 거지?”“응.”김인우가 왠지 자신이 방금 했던 말을 귀담아듣지 않은 것 같아 유남준은 다시 한번 주의를 줬다.“결혼 전에는 아무 여자나 끼고 놀아도 상관없겠지만 지금은 결혼도 했고 아이까지 있는 마당에 좀 조심해야 하지 않겠어?”김인우는 차에 올라타자마자 황당하다는 듯이 그에게 답했다.“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 버릇 고친지가 언젠데, 예전의 내가 아니야.”“응, 그러면 다행이고.”“그러면 지금 하랑 씨는 병원에 있는 거야?”“응.”유남준은 대답하자마자 전화를 끊었는데 보아하니 오늘에도 독수공방해야 할 것 같았다.김인우는 그길로 빠르게 조하랑 보러 병원으로 달려갔다.그리고 가는 길에 방금 유남준이 했던 말을 곱씹어 보았다.‘설마 하랑 씨가 오해한 건가?’그러다가 눈이 번쩍 뜨이더니 무언가가 생각난 듯 자기 머리를 퍽퍽 내리쳤다.“이 멍청한 놈, 그때 통화하는 걸 분명 옆에서 다 들었던 거야!”그는 곧바로 비서에게 전화를 걸어 이지원의 영상을 자기한테 보내라고 했다.드디어 병원에 도착했다.조하랑이 막 잠들려고 하는데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누구세요?”박민정도 어리둥절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간호사인가? 내가 가볼게.”“응.”박민정이 슬리퍼를 신고 문어구에 다가가 문을 열어보니 눈앞에 김인우가 서 있었다.“형수님, 하랑 씨 여기에 있나요?”김인우는 다급하게 물었다.박민정은 그가 이렇게 빨리 찾아올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해 살짝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네.”“제가 들어가도 될까요?”그러나 박민정이 대답하기도 전에 조하랑은 김인우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빠르게 다가와 차갑게 말했다.“아니요. 민정아, 너는 일단 먼저 자. 내가 나가서 말할게.”말을 마치자마자 김인우를 한번 쏘아보더니 그대로 밖으로 나갔고 김인우도 서둘러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하랑 씨, 진짜 오해예요.”그러나 조랑
김인우는 집 안을 샅샅이 뒤졌지만 조하랑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는 식은땀이 맺힌 채로 급히 박예찬과 김훈에게 달려가 물었다.하지만 김훈은 일부러 모른 척하며 그가 이번 기회에 정신 좀 차리길 바랐다.“나도 몰라. 하랑이가 방에 없다고? 화장실 간 거 아니야? 화장실은 찾아봤어?” 김훈이 일부러 태연하게 말하자 김인우는 인상을 찌푸렸다.“거기도 없어요.”“그거 참 이상하네.”김훈은 걱정스러운 척하며 말했다.“그럼 멀뚱멀뚱 서서 뭐 하는 거냐? 어서 찾아봐야지. 지금 임신 중이잖아.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가만두지 않겠다.”박예찬도 거들었다.“오늘 아줌마가 좀 안 좋아 보이긴 했어요. 혹시 가출하신 거 아니에요?”그 말에 김인우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그는 곧장 조하랑을 찾아 나섰다.한편, 조하랑은 이미 병원에 도착해 있었다. 박민정이 곁을 지키고 있었고 둘은 정수미와 잠깐 이야기를 나눈 뒤 병실로 들어가 조용히 대화를 이어갔다.“하랑아, 너 그냥 이렇게 온 거야? 가족한테는 말 안 했어?”조하랑은 고개를 저었다.“응. 그냥 조용히 나왔어. 지금은 누구 얼굴도 보기 싫어.”“그래도 집에 한 통은 전화해. 안 그러면 걱정하실 텐데.”박민정이 말했다.“괜찮아. 다들 내가 자는 줄 알 거야. 내일 아침에 슬쩍 들어가면 돼.”조하랑은 개의치 않는 듯 말했다.임신 후로 김인우와는 방도 따로 쓰고 있었기에 자신이 방에 없다는 걸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을 거라는 생각이었다.“알겠어.”박민정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고 잠시 후 조심스레 물었다.“그런데, 하랑아. 너 아까 말한 그 여자, 혹시 누군지 짐작은 가?”조하랑은 다시 고개를 저었다.“난 김인우 주변 사람들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어.”박민정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그럼 내가 남준 씨한테 한 번 물어볼게. 혹시 오해일 수도 있으니까.”“응, 좋아.”조하랑도 더 큰 싸움으로 번지는 건 원치 않았다.박민정은 조하랑 앞에서 유남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마침 유남준도 막
조하랑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걱정 마, 민정아. 나 그냥 좀 화가 났을 뿐이야. 아직은 냉정해.”그리고는 씁쓸하게 웃으며 덧붙였다.“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도 아니야. 그냥... 기분이 나빠서 그래. 내가 지금 그 사람 아이까지 품고 있는데 저렇게 행동하면 기분이 어떻게 안 상하겠어.”박민정은 뭐라고 위로를 해야 할지 몰라 조용히 그녀의 말을 들어주었다.잠시 후, 조하랑이 조심스럽게 말했다.“민정아, 나 네가 있는 곳으로 가도 될까?”“당연하지. 내가 데리러 갈게.”박민정은 임신한 친구의 감정이 요동칠 수 있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기에 걱정된 마음에 바로 나섰다.하지만 조하랑은 코끝이 붉어진 채 대답했다.“아냐, 이미 차 탔어. 지금 가는 중이야.”그녀는 더 이상 그 집에 있고 싶지 않았다. 김인우가 눈앞에서 거짓말을 하는 걸 아무렇지도 않게 둘 수가 없었다.박민정은 그녀가 이렇게 단호하게 움직일 줄은 몰랐던 지라 속으로 적지 않게 놀랐다.“알겠어. 그럼 내가 문 앞에서 기다릴게.”“응, 고마워.”...한편, 김인우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우연히 길가에 있는 꽃집을 발견했다.그는 운전기사에게 차를 세우게 하고는 직접 차에서 내려갔다. 잠시 후, 그는 품에 형형색색의 커다란 꽃다발을 들고 돌아왔다.차에 다시 올라타자 그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가자. 좀 빨리 가 줘.”예전에도 김인우는 여자를 위해 꽃을 보낸 적이 있었지만 그건 대부분 비서가 대충 주문한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꽃다발은 그가 직접 고르고 색을 맞춰 정성껏 고른 것이었다.운전기사도 그의 얼굴에서 어쩔 수 없이 번지는 미소를 보고는 감탄하듯 말했다.“사모님은 참 복도 많으시네요. 이사님께서 뭐든 다 챙기시니.”김인우는 입꼬리를 높이 올리며 웃었다.“당연하지. 내 아이를 임신하고 있는 사람이잖아. 그 정도는 해야지. 사실 하랑 씨가 임신하지 않았더라도 난 여전히...”하지만 마지막 말은 끝내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그는 조하랑을 보기 위해 한 걸
조하랑은 요즘 집에서 태교에만 전념하고 있었다.그녀는 요 며칠 김인우가 어쩐 일인지 늦게야 귀가하는 게 수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그가 어디를 다녀오는 건지 궁금해져 하녀에게 슬쩍 물었지만 하녀는 말끝을 흐릴 뿐 속 시원한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그걸 본 김훈은 손자를 거론하며 말했다.“하랑아, 인우는 네 남편이다. 어디 가는지도 모르고 그냥 넘어갈 거냐? 궁금하면 직접 전화해서 확인해. 딱 잡아봐야 정신 차리지.”그리고는 단단히 이죽였다.“만약 귀찮다느니, 피하려 든다느니 하면 내게 말해. 그놈 등짝 몇 대는 내가 책임진다.”조하랑은 원래 그런 성격이 아니었다. 남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거나 집착하듯 물어보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임신한 이후로는 자꾸만 불안해졌다.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진 않을까, 그가 밖에서 사고를 당하진 않을까, 예상치 못한 위험에 휘말리진 않을까 하고.아무래도 몸 안에 김인우의 피가 흐르기 시작하면서 그에 대한 걱정도 따라온 모양이었다.“...알겠어요.”조하랑은 김훈이 자신 편을 들어준다는 사실에 조금 안심한 듯 더는 망설이지 않고 김인우에게 전화를 걸었다.그 시각, 김인우는 아직 클럽을 떠나지도 않은 상태였다.“하랑 씨, 무슨 일이에요?”전화가 오자 그는 목소리를 누그러뜨리며 다정하게 받았다.“지금 어디예요?”조하랑이 조심스럽게 물었다.김인우는 주변을 둘러보며 그녀가 괜한 오해를 할까 싶어 거짓말을 꺼냈다.“아, 지금? 돌아가는 길이죠.”돌아가는 길이라고?그런데 조하랑의 귀에는 전화기 너머로 분명 남녀가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건 누가 들어도 외부 소음이 아니라 바로 옆에서 나는 소리였다.그녀의 미간이 좁아졌다.“정말이에요?”“당연하죠. 내가 왜 하랑 씨한테 거짓말을 하겠어요?”김인우는 그녀가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하필 그때, 뒤편에서 이지원이 들뜬 목소리로 외쳤다.“오빠, 우리 지금 어디 가는 거예요?”오빠?그 말을 듣자마자 김인우는 재빨리 경호원에게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