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주영의 말에 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였다.“네.”곧바로 유남우의 사무실을 향해 걸음을 재촉하면서 노크하고 들어갔다.인기척을 듣고서 유남우는 고개를 들어 박민정을 바라보았다.“형수 왔다 갔다면서? 너 괜찮아? 난처하게 하지 않았어?”사인을 받아오라는 최현아의 지시를 박민정은 그대로 유남우에게 알려주었다.‘내가 그럴 줄 알았어.’최현아가 좋은 일로 왔을 리가 없다면서 이미 알고 있었던 유남우이다.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계약서 여기 두고 가. 다른 사람한테 맡기면 돼.”박민정은 문뜩 오늘 자기를 바라보면서 한참이나 수군거렸던 동료들을 떠올리면서 이를 악물었다.만약 유남우의 말대로 이번 일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게 된다면 앞으로 직장에서 정상적인 생활을 하기엔 힘들지도 모른다.“그럴 필요 없어요. 제가 꼭 사인받아 올 겁니다!”박민정에게 완성하기 힘든 임무를 맡긴 최현아의 본심을 그녀가 모를까 봐 유남우는 거듭 일깨워주었다.“천 대표 보통 사람 아니야. 사인은커녕 어쩜 도려 호되게 당하고 올지도 몰라.”“조금 전에 알아보기는 했는데,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천 대표님 사인 꼭 받아 오겠습니다.”기어이 직접 가겠다고 고집을 피우고 있는 박민정을 바라보면서 유남우는 더 이상 말릴 수가 없었다.박민정이 가고 나서 유남우는 마음이 놓이지 않아 홍주영에게 말했다.“주영아, 민정 뒤에 사람 좀 붙여. 절대 그 어떠한 사고가 나서도 안 돼.”“네.”홍주영은 바로 경호원 한 명을 박민정 뒤에 붙였다.준비를 마친 박민정은 회사에서 나왔고 그때 추경은이 그녀를 불러세웠다.“새... 박 비서님, 어디 가시는 거예요?”“일하러 가는 데 같이 갈래요?”박민정이 물었다.“아니요.”혼자서 여러 명의 수발을 들어야 하는 추경은은 이미 지친 대로 지쳤다.그뿐만 아니라 박민정에게 호되게 당하는 중이라 따라나섰다가 또다시 봉변을 당하게 될까 봐 두려웠다.박민정은 더 이상 추경은을 신경 쓰지 않고 회사 건물을 나서서 택시에 올랐다.천인
프런트 직원을 통해 답장을 듣게 된 박민정은 서서히 조급해지기 시작했다.만약 천수빈과 만날 수만 있다면 반드시 계약서를 체결할 자신이 있으나 지금은 만나는 것조차 힘든 상황이다.‘이래서 날 보낸 거였어?’이때 프런트 직원이 다가와서 박민정을 타일렀다.“그만 돌아가세요. 우리 대표님께서 어느 한 회사의 일반 직원을 따로 만난 적이 없습니다. 호산 그룹에서도 분명히 알고 있을 것인데, 왜 그쪽을 보내신 거죠?”“예외가 있다고 근거 없이 보내신 게 아닌가 싶어요.”프런트 직원은 돈을 받고 입을 싹 닫을 수 없어서 박민정에게 새로운 정보를 알려 주었다“지난번에 호산 그룹의 최현아 대표님께서도 오신 적이 있어요. 그때도 우리 대표님 뵙지 못하시고 그냥 돌아가셨거든요.”“하지만 우리 대표님과 일단 만나게 되면 대표님께서 최현아 대표님을 아주 입에 담기 어려울 정도로 괴롭히고 그러셨어요. 보고 들은 제가 다 수치스러울 정도라니까요.”그 말을 듣고서 박민정은 자기도 모르게 웃고 싶었다.‘너도 이런 대우 당했었구나...’“알려줘서 고마워요.”“그냥 그쪽 꽤 좋은 사람 같아 보여서 알려주는 것뿐이에요. 그만하고 얼른 돌아가요.”“그럴 수 없어요. 계약서에 사인도 못 받고 이대로 돌아가면 저 무조건 해고될 거예요.”박민정은 무척이나 불쌍한 척을 했다.프런트 직원은 그런 박민정이 순간 안쓰러워서 함께 머리를 맞대기 시작했다.“그럼, 어떡하죠? 고위직 중에 아는 사람이라도 있어요? 좀 도와달라고 하면 되잖아요.”그 말에 박민정은 머리가 빠르게 굴러갔다.고맙다고 인사를 하고서 바로 천수빈의 인맥에 대해서 알아보기 시작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눈에 익은 이름 석 자가 시야로 들어왔다.손연서.박예찬과 같은 유치원을 다녔던 성훈의 ‘큰엄마’가 바로 손연서이다.‘큰엄마’라고 하는 건 성훈은 손연서의 남편이 다른 여자랑 낳은 자식이기 때문이다.박민정은 그때 간접적으로 진주시에서 그 제삼자를 쫓아내 버렸었다.그 일로 박민정은 손연서와 친구가 되면서 서로
프런트 직원은 괜한 걱정을 했고 박민정은 전혀 따지지 않았다.꼭대기 층 대표이사실에서.천수빈은 박민정이 찾아온 목적을 알고서 두말하지 않고 바로 계약서에 사인을 했다.박민정에게 손연서와 어떻게 알게 되었냐면서 이것저것 한참이나 수다를 떨었다.일을 마치고 박민정은 떠나기 전에 선물로 가지고 온 마노 팔찌를 천수빈에게 건네주었다.“민정 씨, 이런 거 주지 않아도 돼요. 앞으로 제 도움이 필요하시며 언제든지 말만 해요. 연서 친구라고 하면 저한테도 친구예요.”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천수빈은 팔찌를 받았다.두 사람이 하도 오랫동안 수다를 떨어서 시간이 제법 지체되었었다.천인 그룹에서 나왔을 때 시간은 이미 6시를 훌쩍 넘어 있었다.호산 그룹의 직원들은 어느 정도 모두 퇴근했을 시간이다.같은 시각.호산 그룹에서.박민정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는 말을 추경은한테서 들은 최현아는 입꼬리가 잔뜩 올라갔다.“계약서에 사인받지 못했나 보죠. 돌아오기 민망해서 어디 처박혀 있는 게 아닐까요?”천수빈에게 호되게 당한 최현아는 박민정 역시 당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그럼요. 그깟 곡이나 좀 쓸 줄 알지 지가 얼마나 잘 났다고.”추경은도 덩달아서 폄하하기 시작했다.“올케언니, 혹시 올케언니 쪽에 있는 직원들 이쪽으로 좀 보내주시면 안 될까요? 저 혼자서 여기 비서들 수발들고 있어요.”최현아는 단번에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이 모든 것이 결국 유남우의 뜻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감히 그에게 미움을 살 수 없었기 때문이다.“힘들더라도 일단은 이곳에 남아있는 걸 우선으로 해요.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박민정을 감시할 수 있겠어요.”그 말을 듣고서 추경은 역시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알았어요... 그냥 심부름하는 게 좀 힘들고 짜증 나서 그러는 거예요.”최현아는 어깨를 토닥이면서 계속 희망을 안겨주었다.“남준 도련님과 함께 할 그날만 바라보면서 지내요. 그때가 되면 백배 천배로 갚아줄 수 있잖아요.”“네.”추경은은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박민정을 보자마자 추경은이 가장 먼저 다가와서 물었다.“새언니... 박 비서님, 계약서는 어떻게 됐어요?”퇴근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꽤 많은 직원이 남아 있었다.박민정은 단번에 그 사람들의 속셈을 읽어냈다.계약서 체결 상황이 아니라 호되게 당하고 올 자기의 몰골을 궁금해하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하지만 박민정은 모두의 기대에 어긋난 말을 내뱉고 말았다.“계약서 체결했습니다.”단 한마디에 모두가 입이 떡 벌어지고 말았다.도무지 믿어지지 않아 두 눈이 휘둥그레지기도 했다.천인 그룹 천수빈 대표님의 사인을 받아온 박민정이 마냥 신기하기만 했다.일개 직원 따위와 얘기도 섞고 싶지 않아 하는 천수빈이라는 것을 호산 그룹 모든 직원이 알고 있다.유남우와 천수빈이 만날 때마다 비서들은 마지못해 따라갔었고 갈 때마다 형언할 수없을 정도의 모욕을 당하고 했었다.“말도 안 돼요.”청아라고 하는 비서가 앞으로 다가가 박민정 손에 있는 계약서를 가져와서 확인했다.계약서 위에는 천인 그룹의 인장이 찍혀 있었고 천수빈의 친필 사인도 있었다.완벽한 계약서라는 말이다.다른 직원들도 정신을 차리고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하려고 왔다.추경은은 더더욱 달갑지 않았다.최현아의 말대로라면 천수빈은 성격이 괴벽하고 직원 따위와 말도 섞지 않는 사람이다.그런 사람이 박민정이 건넨 계약서에 사인을 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계획대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방향이 점점 흐려지자, 추경은은 또다시 다른 꿍꿍이를 하기 시작했다.직원들이 일일이 확인하고 난 뒤, 박민정은 계약서를 도로 거두었다.“최 대표님은 퇴근하셨나요? 계약서 드려야 하는데 말이죠.”그때 어느 한 비서가 대답했다.“아직 회사에 계십니다.”“알려줘서 고마워요.”박민정은 계약서를 챙겨서 최현아의 사무실 방향을 묻고서 곧장 걸어갔다.최현아는 여유로운 모습으로 사무실에서 음악을 즐기고 있었다.박민정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면서 한바탕 깔아뭉갤 생각이었다.흥얼거리면서 기다리고 있던 그때 노크 소리가
호산 그룹 전체가 지금 박민정이 체결해 온 계약서로 떠들썩거리고 있다.유남우 역시 박민정을 사무실로 불러와서 어떻게 해냈는지 물었다.직장 상사의 질문에 박민정은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대답했다.“마침 천 대표님 친구분을 제가 알고 있었거든요. 그 친구분을 통해서 천 대표님을 알게 된 거예요.”“그랬구나.”의문도 풀렸고 박민정도 무사히 돌아왔으니 유남우는 슬슬 퇴근 준비를 하려고 했다.어느새 어둠이 내려앉은 창밖을 내다보면서 유남우가 박민정에게 말했다.“이제 그만 퇴근하자. 집까지 바래다줄게.”“괜찮아요.”박민정은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거절해 버렸다.“너 오늘 혼자 출근한 거 아니었어? 운전기사도 없었잖아.”박민정에게 미행을 붙인 유남우는 당연히 그러한 줄 알았다.천인 그룹으로 갔을 때도 택시를 타고 갔으니 말이다.이때 박민정은 살짝 수줍어하면서 대답했다.“남준 씨가 앞으로 퇴근할 때마다 마중 온다고 했거든요.”순간 유남우는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하지만 그 또한 찰나였고 바로 애써 덤덤한 척을 하기 시작했다.“그래? 그럼, 일찍 퇴근해. 형 오래 기다리게 하지 말고.”“네.”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이고서 사무실에서 나왔다.그녀가 떠나고 나서 유남우 역시 퇴근하려고 일어났는데, 윤소현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남우 씨, 퇴근했어요? 저 지금 회사 앞이에요.”유남우는 멀어져 가는 박민정의 뒷모습을 유리창 넘어 지켜보면서 대답했다.“퇴근했어. 금방 갈게.”“네. 천천히 오세요.”얼굴에 행복이 가득 적혀 있는 윤소현은 입꼬리가 내려오지 않았다....회사 문 앞에 롤스로이스 한 대가 조용히 세워져 있었다.지금 롤스로이스 안에는 박민정을 기다리고 있는 유남준과 서다희가 있다.“오늘 왜 이렇게 늦는 거야?”유남준의 질문에 서다희가 바로 대답했다.“사모님께서 오늘 천인 그룹으로 직접 가셔서 계약서를 체결하셨다고 합니다. 그로 인해 퇴근 시간이 좀 미뤄진 것 같습니다.”물론 서다희도 경호원에게서 듣게 된 정보였다.납치 사
못 잡아먹어서 안달 났다고?윤소현의 말 한마디에 퇴근하고 있던 호산 그룹 직원들이 삼삼오오 ‘사건 현장’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롤스로이스 앞에서 젊은 여자가 흐느끼면서 하소연을 하고 있으니 구미가 당길 수밖에 없었다.윤소현까지 합세하자 박민정은 어처구니가 없었다.“윤소현 씨, 제대로 알고 말하시는 건 어때요?”“제 남편이 저를 데리러 왔는데, 기어이 타겠다고 이렇게 우기고 있는 거잖아요. 택시 타고 가라고 분명히 말했는데도 기어이 이 차에 타겠다고 고집부리고 있잖아요. 그래도 제가 못 잡아먹어서 안달난 것 같아요?”박민정은 덤덤한 목소리로 단번에 지금 이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하지만 윤소현은 주위에 구경꾼도 있고 추경은이 막무가내로 우기고 있는 틈을 타서 박민정을 바닥으로 깔아뭉갤 생각이었다.“그렇다고 어떻게 그럴 수 있어요? 저렇게 눈물까지 뚝뚝 떨구면서 서럽게 울고 있는데, 좀 태워준다고 해서 어디 덧나기라도 나는 거예요?”오늘 유난히 피곤했던 박민정이다.그뿐만 아니라 임신한 뒤로 호르몬 변화로 졸음도 자주 밀려오곤 한다.지금 박민정은 여러모로 불편한 상황을 견뎌내면서 이를 악물고 있다.“뭐라고 했어요?”“좀 태워준다고 해서 어디 덧나냐고요!”윤소현은 일부러 더 자극하려고 소리까지 높였다.“그래요? 그럼, 가시는 길에 좀 바래다 주지 그래요?”박민정은 속으로 ‘옳거니’ 하면서 바로 받은 대로 돌려주었다.순간 말 문이 탁 막힌 윤소현이다.“형님 댁으로 온 손님이잖아요. 그러니 형님 쪽에서 챙겨야 하는 거 아닌가요?”“그래요? 그럼, 우리가 알아서 우리 식대로 챙길 테니 신경 좀 꺼줄래요? 그렇게 신경 쓰이면 가는 길에 좀 바래다주던가요.”자기 할 말을 마친 박민정은 두 사람과 더는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이윽고 차 문을 막고 있던 추경은을 옆으로 밀쳐버리고 바로 차에 올랐다.“윤소현 씨께서 경은 씨를 많이 걱정하고 있는 것 같아요. 윤소현 씨한테 집까지 바래다 달라고 해보세요. 엄청 좋아할 것 같은데...”박민정은 웃
한수민을 본 순간 박민정은 얼이 빠져 한참 후에야 정신이 돌아왔다.“한 여사님, 누가 당신더러 여기에 오라 한 거죠?” 박민정의 소리에 고개를 들고 그녀를 바라보는 한수민의 몸이 움츠러들었다. “난...”그녀가 말을 다 하기도 전에 추경은이 입을 열었다. “새언니, 아주머니는 새언니의 친엄마 아닌가요? 왜 최 여사님이라고 불러요? 너무 버릇없는 것 아닌가요?”추경은은 박민정과 한수민 사이에 불쾌한 일들이 있었음을 알고 고의로 물었다. 한수민은 그 말을 듣고는 이내 추경은한테 말했다. “그런 말 말아요. 쟤가 부르고 싶은 대로 부르게 내버려두어요.”그녀는 애당초 박민정의 친엄마가 아니다. 박민정은 주먹을 다잡고 추경은의 말을 무시한 채 한수민 앞으로 다가갔다. “무슨 일 있거든 우리 나가서 말해요.” “그래.”한수민은 일어나서 박민정과 함께 밖으로 향했다. 추경은은 그 모습을 보고 그 둘의 뒤를 조용히 뒤따라갔다. 밖으로 나온 뒤 가로등의 어둑한 불빛 아래서 박민정이 차가운 어투로 물었다. “돈을 원해요? 아니면 다른 거?”지금 한수민의 친딸과 아들 심지어 남편마저 그녀를 외면하고 있으니 또 뭔 일을 꾸미려 온 것이 분명하였다. 한수민은 목구멍이 막혀오는 듯하였다. “돈 때문이 아니야. 그저 너와 너의 아이를 보러 온 것뿐이야.”이 말에 박민정은 헛웃음이 나왔다. “지금 또 감성팔이 하시려고요? 잊지 마세요. 우리 둘은 피 한 방울 안 섞인 남남이란 걸.”한수민은 지금 자신이 무슨 말을 하든 이미 다 늦었음을 알았다. 오늘 그녀는 두원별장의 부근에 왔다. 원래는 그저 멀리서 박민정의 모습 한번 보고 가려 했는데 마침 추경은과 마주쳤다. 추경은은 그녀를 방 안으로 끌어들였다. “나도 알아. 난 아무것도 원하지 않아. 진짜야, 진짜.”한수민은 중얼거렸다. “나 지금 갈게.”구부정한 허리와 함께 그녀는 터벅터벅 걸어 떠나갔다. 박민정은 왜소한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그녀가 아무런 목적이 없다는 것이 여전히 믿기지 않았다
“남준아, 나 이제 확신할 수 있어. 그 유리 파편이 원인이야.” 김인우가 앉으면서 말했다. “이제 수술 시간을 정해야 하는데, 이 수술은 큰 위험이 생길 수도 있어.” 유남준이 듣고는 물었다. “어떤 위험?” “그 유리 파편의 위치가 좀 특수해. 주변에 많은 뇌신경이 있어서 수술이 잘못되면 지적 장애자가 될 수도 있어.” 김인우는 걱정 가득한 얼굴이었다.이것이 그가 유남준의 상처를 봉합하기 전에 이물질이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섣불리 제거하지 못했던 이유다. 뇌 수술은 매우 조심스러워야 한다. 조금의 실수에도 환자가 평생 고통받을 수 있기 때문에. 유남준은 이 말을 듣고 오랫동안 침묵했다. “성공할 확률이 얼마나 되지?” “50%도 안 돼.” 김인우는 한숨을 쉬었다. 김인우의 기술이 부족한 것이 아니다. 그는 국내의 외과 의사들도 수술의 성공을 확신하지 못할 거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유남준은 즉시 결정을 내리지 않았다. 지적 장애자는 간단히 말하면 바보이다. 지금은 보지 못하지만 자아의식이 있어서 돈을 벌고 박민정과 아이가 부족한 것 없게 할 수 있다. 하지만 만약 바보가 된다면 그 후의 상황은 상상하기조차 끔찍하다. “좀 더 생각해 볼게.” 유남준이 대답했다. “빨리 결정해야 해. 유리 파편이 머릿속에 남아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수술 성공 확률이 낮아져.” 김인우가 말을 덧붙였습니다. “알았어.” 유남준은 잠시 멈추고 다시 말했다. “이 일은 누구에게도 말하지 마.”“응.” 김인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유남준은 그제야 진료실에서 나왔다. 서다희가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유남준이 나온 것을 보고는 그에게 길을 안내했다. “대표님, 상처는 이제 괜찮으신가요?” 유남준은 그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다. “응, 완전히 다 나았어.” “다행입니다.” 서다희가 안도하며 말했다. “이제 회사로 돌아갈까요?” “응.” 병원을 나서면서 서다희는 유남준과 몇 마디를 나눴다. 유남준이 차에 타면서부터 회사에 도착하기까지
“지금, 이 나이니까 더 이혼하자는 거예요. 굳이 남은 인생을 당신한테 낭비하고 싶지 않거든요!”고영란은 말을 마치자마자 안방에 들어갔다.그러나 유지욱은 지금 이 상황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아 한참 동안 그 자리에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그러다가 문득 여태껏 이혼에 대해 거론조차 하지 않던 사람이 갑자기 심술부리는 원인이 분명 아버지 재산 때문인 것 같았고 며칠이 지나면 괜찮아질 것이라 생각했다.이튿날.유명훈의 장례식은 계속 진행되었고 박민정의 친구들도 모두 오게 되었다.“고인의 명복을 빕니다.”손연서의 말에 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렇게 다른 손님들도 하나둘씩 계속해서 들어오고 있었는데 장례식의 침울한 분위기와는 정반대로 최현아는 눈웃음을 살살 지으며 한쪽에서 사람들과 유명훈의 유언장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그러나 유지욱과 고영란 두 사람 사이는 여전히 찬 바람이 쌩쌩 불었다.그렇게 유명훈의 장례는 총 3일 동안 진행 후 끝났다.고영란은 담담한 얼굴로 박민정과 유남준, 그리고 유남우에게 말했다.“나랑 네 아버지는 이만 갈라서려고 해.” 순간 모든 사람이 의아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옆에 서 있던 유지욱의 안색도 좋지 못했다.그는 원래 유명훈의 장례가 끝나면 계속해서 여행이나 다니려고 했었는데 뜬금없이 고영란한테서 이혼 통보를 받게 되었다.어제까지만 해도 분명 일시적으로 심술부리는 거라 생각하고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지금 보니 진심인 것 같았다.“지금 애들 앞에서 솔직하게 말해, 진짜 이혼하려고?”“네.”고영란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이미 오랫동안 고민했던 일이고 지금처럼 사는 게 저는 너무 괴로워요. 지금 당장 법원에 갑시다.”고영란은 지금 그들의 의견을 구하려는 게 아니다.유지욱도 자존심이 꽤 센 사람이라 단번에 그러자고 하더니 두 사람은 법원으로 출발했고 두 아들은 굳이 말리지 않았다.자식들도 이미 다 컸고 자기 혼인에 대해 결정할 권리가 충분히 있다고 생각했다.박민정은 유남준과 같이 돌아가는 차 안
고영란도 유석진의 고함에 깜짝 놀라 순간 할 말을 잃었다.그리고 여태껏 모든 집안일을 아내한테 떠넘긴 채, 홀로 밖에서 자유롭게 살고 있는 유지욱이 원망스럽기만 했다.한 사람에 대한 단념은 하루아침에 되는 게 아니라 이런 실망감이 천천히 쌓이면서 식어가는 것이다.보아하니 오늘 저녁에도 잠들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유지욱이 도착해보니 유씨 가문의 모든 친척이 다 모여있었다.그리고 이미 상복으로 갈아입은 고영란을 보자마자 그녀에게 다가와 물었다.“왜 진작에 나한테 말해주지 않았어?”그의 물음에 고영란은 실망 가득한 얼굴로 답했다.“제가 말해주지 않았다고요? 한 달 전에 전 분명히 아버님 건강 상태가 점점 안 좋아지고 있으니까 와서 회사 일 좀 도와드리라고 귀띔해 줬어요.”“난 네가 우리 아버지 재산 때문에 나더러 오라는 줄 알았지.”유지욱의 말에 고영란은 큰 충격을 받고 잠깐 멍해졌다가 다시 두 주먹을 꼭 쥐고 말했다.“유지욱 씨, 정말 어이없네요. 맞아요, 제가 빨리 돌아오라고 했던 원인이 아버님의 재산이 조금이라도 공평하게 지욱 씨한테도 나눠줬으면 했어요. 그런데 그 재산이 전부 아주버님한테 넘어갔네요?” 그러나 유지욱은 여전히 시큰둥한 얼굴이었다.“그깟 돈 몇 푼 가지고 왜 그래? 우리가 모두 한 식구인데 주면 줬지.”유지욱은 말을 마치자마자 손님들을 맞이하러 떠났다.그리고 유석진과도 반갑게 인사하는 모습에 고영란은 제대로 마음이 상했다.박민정도 손자며느리로서 유남준과 같이 손님들을 맞이하다가 우연히 시부모님이 서로 말다툼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그녀는 사실 유씨 가문에 시집온 이후로 시아버지인 유지욱을 거의 본 적이 없었다.그리고 유지욱은 젊었을 때부터 고집불통에 집안 사업에도 관심이 없었고 그저 매일 여행이나 다니면서 자유롭게 사는 걸 즐기는 사람이라고 했다.하여 유지욱과 고영란은 1년 중에도 만날 수 있는 날이 별로 없었다.박민정은 유남준에게 살짝 다가가 그에게 말했다.“남준 씨, 가서 어머님 좀 위로해 주세요.”여자
유남준의 아버지, 유지욱은 계속 외국에서 살다보니 이 자리에 없었다.그러자 고영란이 눈살을 찌푸리며 답했다.“지욱 씨는 지금 당장 오는 게 불가능한 사람이잖아요. 그리고 방금 비행기 탔다고 했으니 적어도 두 시간은 걸릴 거예요.”그러자 유석진이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그러면 지욱이가 도착하고 나서 다시 말할 테니까 외부인은 참견하지 말아요.”순간 고영란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이를 악물고 말했다.“이 집에 들어와서 아이를 둘씩이나 낳아줬는데도 제가 아직 외부인인가요? 저는 오늘 아버님께서는 왜 그리도 자식들을 편애하시지 꼭 물어봐야겠어요!”“제 아들들이 능력이 뛰어나면 이런 불공평한 대우도 다 받아들여야 하나요?”여태껏 유명훈은 많은 주식을 갖고 있었다.비록 유남준이 현재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긴 하지만 유명훈의 지분이 그대로 유석진네로 넘어가게 되면 유남준의 자리가 위태로워진다.더구나 유남우도 그의 재산이 필요한데 말이다!게다가 유명훈은 오랜 세월 동안 주식 말고도 분명 많은 재산을 모았을 텐데 그 돈마저 전부 저 사람들에게 넘어가는 모습을 고영란은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다.유석진은 유명훈의 앞을 가로막으며 다시 큰 소리로 외쳤다.“여태껏 지욱이를 잘 붙잡아 두지 못한 제수 씨를 탓해야죠! 지욱이가 오기 전까지는 아무리 소란을 피워도 소용없어요!” 고영란이 뭐라고 대꾸하려는데 유남준이 그녀를 말렸다.“엄마, 그만해요.”여태껏 유명훈이 유석진네만 편애하는 모습을 보고 자랐던 그이기에 지금 아무리 그와 말싸움해도 아무 의미가 없을 것 같았다.유남우도 불쾌했지만 애써 덤덤한 척 그녀에게 말했다.“엄마, 형 말이 맞아요. 할아버지께서 결정하신 대로 받아들이면 되니까 싸울 필요 없어요.”이 시각, 침대에 누워있던 유명훈은 호흡이 점점 더 가빠져 헐떡거리기 시작했다.그런데도 눈앞에서 자식들이 자기 재산 때문에 싸우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씁쓸하기만 했다.“지욱이...”그는 힘겹게 유지욱을 불렀다.유지욱은 평소에도 그의 말을
최현아는 손까지 흔들며 반갑게 인사했지만 박민정은 그저 냉담한 얼굴로 물었다.“여긴 어쩐 일이세요?”그러자 그녀는 뻘쭘해진 손을 다시 주머니에 넣으며 애써 미소를 지었다.“일은 무슨, 윤소현이 드디어 판결받았다고 해서 축하해주려고 왔지.”박민정은 분명 다른 속셈이 있다고 생각했다.지금 최현아와 그의 시아버지는 쥐 죽은 듯이 조용히 지내고 있었는데 왠지 그럴수록 더 수상했다.“감사합니다. 다른 일 없으면 저는 이만 일 하러 갈게요.”말을 마치자마자 박민정이 뒤돌아서니 역시나 최현아가 빠르게 그녀의 팔을 부여잡았다.“민정아, 아무리 그래도 우리는 한 식구나 마찬가지인데 이렇게까지 딱딱하게 굴 필요는 없잖아?”박민정은 이제 와서 한 식구라는 그녀의 말이 그저 가소로웠다.“도대체 할 말이 뭔가요?”그리고 슬슬 짜증 나기 시작했다.“최근에 할아버지 건강이 점점 악화하면서 동서랑 남준 씨가 그립기도 하고 우리가 서로 화목하게 지내는 모습도 보고 싶은가 봐. 혹시 오늘 밤 할아버지 뵈러 같이 가지 않을래?”최현아는 최대한 상냥하게 물었다.사실 박민정도 할아버지의 건강이 여태껏 좋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고 오늘 두 사람을 부른 이유도 아마 자신이 얼마 버티지 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네, 알겠어요.” 최현아는 그제야 박민정의 팔을 놓아줬지만 그녀가 떠나가자마자 눈빛이 순식간에 돌변했다.그리고 차에 올라타자마자 한껏 불쾌한 얼굴로 중얼거렸다.“재수 없는 것, 운발로 지금 자리에 올라앉은 주제에.” 차에는 낯선 남자 한 명이 더 있었다.“박민정한테 화낼 필요 없어. 지금 네가 해야 할 일은 무조건 할아버지가 살아있을 때 할아버지의 주식이랑 모든 돈을 너한테 넘길 수 있도록 잘 구슬리는 거야.”그러자 최현아가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나도 알아, 저번에 이미 할아버지랑 말해봤다니까? 유남준 씨랑 민정이는 괜히 고고한 척하면서 아무것도 받지 않겠다고 말한 상황이라 우리 쪽에 전부 몰리게 되어있긴 한데, 난 지금 성혁 씨 얼굴만 봐도 짜
조하랑은 그제야 화가 사그라지는 것 같았다.“그러면 왜 저 여자한테 찾아갔어요?”“당연히 지금은 어떤 상태인지 확인하러 갔죠. 그리고 이지원에 대해 정신감정도 의뢰했거든요. 만약 진짜로 정신에 이상이 있는 거면 어쩔 수 없겠지만 이 모든 게 다 쇼하는 거면 절대로 가만두지 않으려고 했어요.”김인우는 진지한 얼굴로 말하다가 조하랑을 보고 다시 말을 이었다.“예전에 제가 지원이한테 어떻게 가스라이팅 당했는지 하랑 씨도 잘 알잖아요. 만약 저를 구해줬던 사람이 형수님이었단 사실을 진작에 알았다면 절대 그 애를 도와주지도 않았을 겁니다.”“지금은 그저 마땅히 받아야 할 벌만 받았으면 좋겠고요.”조하랑은 묵묵히 듣고 있다가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제가 오해했네요. 정말 미안해요. 저는 인우 씨가 또 그새를 못 참고 다른 여자한테 찝쩍거린다고만 생각했어요.”그녀의 말에 김인우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못 참고 되물었다.“하랑 씨, 혹시 지금 질투하는 거예요?”순간 조하랑의 얼굴이 새빨개졌다.“누, 누가 질투한다는 거예요? 그저 저를 배신한 인우 씨한테 화나고 그런 사람을 좋아했던 나한테 실망했을 뿐이라고요!”“알겠어요, 제가 잘못했어요. 그리고 의사도 임산부가 흥분하면 아이한테 안 좋다고 말했잖아요.”말을 마치자마자 김인우는 다정하게 조하랑을 품에 안았는데 순간 그녀는 얼굴이 더욱 빨개진 채 온몸이 굳어버렸다.당연히 김인우도 눈치채고는 빠르게 물었다.“왜요, 부끄러워요?”“그, 그럴 리가요...”조하랑은 말까지 더듬으며 애써 덤덤한 척했다.“저도 안을 줄 알거든요?”그리고 똑같이 김인우를 꼭 안아줬는데 이번에는 김인우가 속으로 움찔했다.추운 밤, 그렇게 두 사람은 아무 말도 없이 서로를 꼭 껴안아 줬는데 거리를 지나가던 몇몇 사람들의 시선이 계속 그들에게 멈춰졌다 가곤 했다.조하랑도 어느새 그걸 느꼈는지 재빨리 김인우를 밀쳐냈다.“됐어요. 이제 병실로 돌아가 봐야 하니까 인우 씨도 그만 돌아가요.”“저랑 같이 안 가고요?”김인우의
김인우는 유남준의 마지막 한마디까지 다 듣고 나서야 마음이 놓였다.“그러면 지금 하랑 씨가 형수님이랑 같이 있다는 거지?”“응.”김인우가 왠지 자신이 방금 했던 말을 귀담아듣지 않은 것 같아 유남준은 다시 한번 주의를 줬다.“결혼 전에는 아무 여자나 끼고 놀아도 상관없겠지만 지금은 결혼도 했고 아이까지 있는 마당에 좀 조심해야 하지 않겠어?”김인우는 차에 올라타자마자 황당하다는 듯이 그에게 답했다.“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 버릇 고친지가 언젠데, 예전의 내가 아니야.”“응, 그러면 다행이고.”“그러면 지금 하랑 씨는 병원에 있는 거야?”“응.”유남준은 대답하자마자 전화를 끊었는데 보아하니 오늘에도 독수공방해야 할 것 같았다.김인우는 그길로 빠르게 조하랑 보러 병원으로 달려갔다.그리고 가는 길에 방금 유남준이 했던 말을 곱씹어 보았다.‘설마 하랑 씨가 오해한 건가?’그러다가 눈이 번쩍 뜨이더니 무언가가 생각난 듯 자기 머리를 퍽퍽 내리쳤다.“이 멍청한 놈, 그때 통화하는 걸 분명 옆에서 다 들었던 거야!”그는 곧바로 비서에게 전화를 걸어 이지원의 영상을 자기한테 보내라고 했다.드디어 병원에 도착했다.조하랑이 막 잠들려고 하는데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누구세요?”박민정도 어리둥절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간호사인가? 내가 가볼게.”“응.”박민정이 슬리퍼를 신고 문어구에 다가가 문을 열어보니 눈앞에 김인우가 서 있었다.“형수님, 하랑 씨 여기에 있나요?”김인우는 다급하게 물었다.박민정은 그가 이렇게 빨리 찾아올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해 살짝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네.”“제가 들어가도 될까요?”그러나 박민정이 대답하기도 전에 조하랑은 김인우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빠르게 다가와 차갑게 말했다.“아니요. 민정아, 너는 일단 먼저 자. 내가 나가서 말할게.”말을 마치자마자 김인우를 한번 쏘아보더니 그대로 밖으로 나갔고 김인우도 서둘러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하랑 씨, 진짜 오해예요.”그러나 조랑
김인우는 집 안을 샅샅이 뒤졌지만 조하랑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는 식은땀이 맺힌 채로 급히 박예찬과 김훈에게 달려가 물었다.하지만 김훈은 일부러 모른 척하며 그가 이번 기회에 정신 좀 차리길 바랐다.“나도 몰라. 하랑이가 방에 없다고? 화장실 간 거 아니야? 화장실은 찾아봤어?” 김훈이 일부러 태연하게 말하자 김인우는 인상을 찌푸렸다.“거기도 없어요.”“그거 참 이상하네.”김훈은 걱정스러운 척하며 말했다.“그럼 멀뚱멀뚱 서서 뭐 하는 거냐? 어서 찾아봐야지. 지금 임신 중이잖아.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가만두지 않겠다.”박예찬도 거들었다.“오늘 아줌마가 좀 안 좋아 보이긴 했어요. 혹시 가출하신 거 아니에요?”그 말에 김인우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그는 곧장 조하랑을 찾아 나섰다.한편, 조하랑은 이미 병원에 도착해 있었다. 박민정이 곁을 지키고 있었고 둘은 정수미와 잠깐 이야기를 나눈 뒤 병실로 들어가 조용히 대화를 이어갔다.“하랑아, 너 그냥 이렇게 온 거야? 가족한테는 말 안 했어?”조하랑은 고개를 저었다.“응. 그냥 조용히 나왔어. 지금은 누구 얼굴도 보기 싫어.”“그래도 집에 한 통은 전화해. 안 그러면 걱정하실 텐데.”박민정이 말했다.“괜찮아. 다들 내가 자는 줄 알 거야. 내일 아침에 슬쩍 들어가면 돼.”조하랑은 개의치 않는 듯 말했다.임신 후로 김인우와는 방도 따로 쓰고 있었기에 자신이 방에 없다는 걸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을 거라는 생각이었다.“알겠어.”박민정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고 잠시 후 조심스레 물었다.“그런데, 하랑아. 너 아까 말한 그 여자, 혹시 누군지 짐작은 가?”조하랑은 다시 고개를 저었다.“난 김인우 주변 사람들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어.”박민정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그럼 내가 남준 씨한테 한 번 물어볼게. 혹시 오해일 수도 있으니까.”“응, 좋아.”조하랑도 더 큰 싸움으로 번지는 건 원치 않았다.박민정은 조하랑 앞에서 유남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마침 유남준도 막
조하랑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걱정 마, 민정아. 나 그냥 좀 화가 났을 뿐이야. 아직은 냉정해.”그리고는 씁쓸하게 웃으며 덧붙였다.“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도 아니야. 그냥... 기분이 나빠서 그래. 내가 지금 그 사람 아이까지 품고 있는데 저렇게 행동하면 기분이 어떻게 안 상하겠어.”박민정은 뭐라고 위로를 해야 할지 몰라 조용히 그녀의 말을 들어주었다.잠시 후, 조하랑이 조심스럽게 말했다.“민정아, 나 네가 있는 곳으로 가도 될까?”“당연하지. 내가 데리러 갈게.”박민정은 임신한 친구의 감정이 요동칠 수 있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기에 걱정된 마음에 바로 나섰다.하지만 조하랑은 코끝이 붉어진 채 대답했다.“아냐, 이미 차 탔어. 지금 가는 중이야.”그녀는 더 이상 그 집에 있고 싶지 않았다. 김인우가 눈앞에서 거짓말을 하는 걸 아무렇지도 않게 둘 수가 없었다.박민정은 그녀가 이렇게 단호하게 움직일 줄은 몰랐던 지라 속으로 적지 않게 놀랐다.“알겠어. 그럼 내가 문 앞에서 기다릴게.”“응, 고마워.”...한편, 김인우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우연히 길가에 있는 꽃집을 발견했다.그는 운전기사에게 차를 세우게 하고는 직접 차에서 내려갔다. 잠시 후, 그는 품에 형형색색의 커다란 꽃다발을 들고 돌아왔다.차에 다시 올라타자 그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가자. 좀 빨리 가 줘.”예전에도 김인우는 여자를 위해 꽃을 보낸 적이 있었지만 그건 대부분 비서가 대충 주문한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꽃다발은 그가 직접 고르고 색을 맞춰 정성껏 고른 것이었다.운전기사도 그의 얼굴에서 어쩔 수 없이 번지는 미소를 보고는 감탄하듯 말했다.“사모님은 참 복도 많으시네요. 이사님께서 뭐든 다 챙기시니.”김인우는 입꼬리를 높이 올리며 웃었다.“당연하지. 내 아이를 임신하고 있는 사람이잖아. 그 정도는 해야지. 사실 하랑 씨가 임신하지 않았더라도 난 여전히...”하지만 마지막 말은 끝내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그는 조하랑을 보기 위해 한 걸
조하랑은 요즘 집에서 태교에만 전념하고 있었다.그녀는 요 며칠 김인우가 어쩐 일인지 늦게야 귀가하는 게 수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그가 어디를 다녀오는 건지 궁금해져 하녀에게 슬쩍 물었지만 하녀는 말끝을 흐릴 뿐 속 시원한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그걸 본 김훈은 손자를 거론하며 말했다.“하랑아, 인우는 네 남편이다. 어디 가는지도 모르고 그냥 넘어갈 거냐? 궁금하면 직접 전화해서 확인해. 딱 잡아봐야 정신 차리지.”그리고는 단단히 이죽였다.“만약 귀찮다느니, 피하려 든다느니 하면 내게 말해. 그놈 등짝 몇 대는 내가 책임진다.”조하랑은 원래 그런 성격이 아니었다. 남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거나 집착하듯 물어보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임신한 이후로는 자꾸만 불안해졌다.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진 않을까, 그가 밖에서 사고를 당하진 않을까, 예상치 못한 위험에 휘말리진 않을까 하고.아무래도 몸 안에 김인우의 피가 흐르기 시작하면서 그에 대한 걱정도 따라온 모양이었다.“...알겠어요.”조하랑은 김훈이 자신 편을 들어준다는 사실에 조금 안심한 듯 더는 망설이지 않고 김인우에게 전화를 걸었다.그 시각, 김인우는 아직 클럽을 떠나지도 않은 상태였다.“하랑 씨, 무슨 일이에요?”전화가 오자 그는 목소리를 누그러뜨리며 다정하게 받았다.“지금 어디예요?”조하랑이 조심스럽게 물었다.김인우는 주변을 둘러보며 그녀가 괜한 오해를 할까 싶어 거짓말을 꺼냈다.“아, 지금? 돌아가는 길이죠.”돌아가는 길이라고?그런데 조하랑의 귀에는 전화기 너머로 분명 남녀가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건 누가 들어도 외부 소음이 아니라 바로 옆에서 나는 소리였다.그녀의 미간이 좁아졌다.“정말이에요?”“당연하죠. 내가 왜 하랑 씨한테 거짓말을 하겠어요?”김인우는 그녀가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하필 그때, 뒤편에서 이지원이 들뜬 목소리로 외쳤다.“오빠, 우리 지금 어디 가는 거예요?”오빠?그 말을 듣자마자 김인우는 재빨리 경호원에게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