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ZER LOGIN“카시안.”라엘이 그의 입술을 손으로 막았다. 아쉬움이 역력한 푸른 눈이 내려다보았지만, 그녀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한 달 뒤에 결혼하려면 그때까지 살아 있어야지.”“키스 몇 번으로 죽을 만큼 약하지는 않아.”“키스만 할 얼굴이 아닌데?”카시안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라엘의 허리를 감싼 손이 천천히 등을 쓸어 올라왔다. 얇은 옷감을 사이에 둔 손길인데도 피부가 뜨거워지는 듯했다. 인간의 몸은 천족의 몸보다 훨씬 솔직했다. 입술이 닿으면 숨이 가빠졌고, 손끝 하나에도 심장이 제멋대로 뛰었다. 라엘이 아직 익숙해지지 못한 반응이었다.“그건 네가 너무 잘 알아서 문제군.”그가 낮게 속삭이며 다시 고개를 숙였다. 라엘은 피하지 않았다. 다만 입술이 맞닿기 직전 그의 가슴을 손바닥으로 눌렀다.카시안의 미간이 순간적으로 좁혀졌다.아주 짧은 변화였다. 다른 사람이라면 알아보지 못했겠지만 라엘은 놓치지 않았다. 그녀가 곧장 그의 옷깃을 벌리자 붕대 가장자리에 붉은 피가 번져 있었다.“이래도 안 약해?”“조금 터진 것뿐이야.”“네 몸에 난 상처는 왜 항상 ‘조금’이고, 내가 손가락이라도 베이면 당장 제국 최고의 치유사를 부르려는 건데?”“너는 이제 인간이니까.”“너도 인간이야.”라엘이 차갑게 쏘아붙이자 카시안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녀는 그를 의자에 앉히고 탁자 위의 작은 종을 울렸다. 문밖에서 기다리던 시종이 들어오려다 잠금쇠에 걸려 문을 덜컹거렸다.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문으로 향했다.라엘이 천천히 카시안을 돌아보았다.“정말 잠그라고 했어?”“명령을 잘 따르는 자야.”“칭찬할 일이 아니거든.”그녀가 직접 문을 열어 시종과 의원을 불러들였다. 의원이 카시안의 붕대를 교체하는 동안 라엘은 팔짱을 낀 채 곁에 서 있었다. 황제의 위엄을 세우려는 듯 무표정하던 카시안도 그녀의 시선을 견디다 못해 먼저 입을 열었다.“한 달이면 낫는다.”“그때까지 침실에서는 내 말 들어.”붕대를 감던 의원의 손이 잠시 멈췄다. 시종은 못 들은 척 필사
“그러니 이번에는 절대 놓치지 않아.”카시안의 목소리가 라엘의 입술 위로 낮게 내려앉았다.도망가면 황제가 직접 잡으러 오겠다는 말이 장난만은 아니라는 것을, 허리를 감싼 단단한 팔이 알려 주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벌어진 상처를 치료받던 사람답지 않은 힘이었다.“제국을 두고 쫓아오겠다는 황제는 처음 봐.”“도망가겠다는 약혼녀도 처음 봤어.”“가정이었거든.”“나는 어떤 가능성도 남겨 두고 싶지 않아.”카시안의 엄지가 라엘의 아랫입술을 천천히 쓸었다. 금빛 눈이 그 손길을 따라 흔들리는 순간, 그의 시선이 더욱 짙어졌다.“말로 약속하는 것만으로 부족해?”“부족해.”“욕심이 많네.”“오늘부터 황제니까.”“황제는 욕심을 줄여야 하는 자리 아니야?”“제국에 대해서는.”카시안이 라엘의 허리를 끌어당겼다.“너에 대해서는 줄일 생각 없어.”입술이 겹쳤다.이번에는 어느 쪽도 서두르지 않았다. 반란도, 죽은 성녀도, 지하에서 밀려오던 어둠도 사라진 밤이었다. 방문은 잠겨 있었고, 시종과 관료들에게도 긴급한 일이 아니면 접근하지 말라는 명령이 내려졌다.처음으로 아무것에도 쫓기지 않은 채 서로에게 집중할 수 있었다.카시안의 입술은 느리고 집요했다. 짧게 닿았다 떨어지기를 반복하며 라엘의 반응을 살피다가, 그녀가 셔츠 자락을 움켜쥐자 기다렸다는 듯 깊게 파고들었다. 얽힌 숨 사이로 뜨거운 체온이 번졌다.라엘은 그의 가슴에 감긴 붕대를 누르지 않도록 조심하며 목 뒤로 팔을 둘렀다. 카시안은 그 작은 허락만으로도 인내가 무너진 사람처럼 그녀의 등을 쓸어 내렸다. 손바닥이 등선을 따라 허리까지 내려올 때 얇은 드레스가 함께 당겨졌다.몸이 빈틈없이 맞붙었다.“카시안.”라엘의 입술 사이로 이름이 흘러나왔다.그가 잠시 입맞춤을 멈췄다.“왜?”“그냥 불렀어.”카시안은 그녀의 얼굴을 바라봤다. 눈앞의 사람이 정말 살아 있는지 다시 확인하듯 뺨과 턱선을 천천히 쓸었다.“한 번 더.”“카시안.”“또.”“몇 번이나 불러야 믿을 건데?”“네가 지
“라엘이 참석하지 않는 즉위식은 없다.”카시안의 선언은 밤이 지나기도 전에 의회 전체에 퍼졌다.“내일 새벽, 제국은 두 가지 중 하나를 보게 될 것이다. 라엘과 함께 왕관을 쓰는 황제, 아니면 아무도 앉지 않은 왕좌를.”황위가 비어 있는 지금, 카시안이 즉위를 거부하면 제국은 다시 혼란에 빠진다. 반란에 가담한 북부와 서부의 영주들은 명확한 황명이 없다는 이유로 항복을 미루고 있었고, 수도 수비대도 누구의 지휘를 따라야 하는지 확신하지 못했다.의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그러나 순순히 물러날 생각도 없었다.새벽을 두 시간 앞두고 황궁의 소회의실에 귀족과 대신들이 모였다. 카시안은 치료사의 만류를 무시하고 황태자의 정복을 입었다. 검은 예복 안으로 두꺼운 붕대가 감겨 있었지만 겉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전날보다 얼굴은 창백했으나 자세는 흐트러짐이 없었다.그의 오른편에는 라엘이 앉아 있었다.황실에서 준비한 드레스도, 보석도 걸치지 않았다. 성휘전과 대성전에서 입었던 옷만 깨끗한 것으로 갈아입었을 뿐이었다. 은백색 머리카락을 낮게 묶고, 카시안이 준 푸른 보석 반지만 손가락에 끼고 있었다.그 모습이 오히려 대신들을 불편하게 했다.화려한 옷을 입고 황후의 자리를 탐냈다면 욕망 많은 여자라고 비난할 수 있었을 것이다. 가짜 가문과 작위를 요구했다면 거래라도 시도했을 것이다. 하지만 라엘은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다.그저 자신의 이름으로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전하의 뜻은 이해합니다.”가장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의장인 레미엘 공작이었다.“라엘 님께서 제국을 구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는 사실도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공과 신분은 별개의 문제입니다.”“별개라면 공을 인정하고 참석을 허락하면 되겠군.”카시안의 대답에 레미엘 공작이 입을 다물었다.“전하, 즉위식은 사적인 축하연이 아닙니다.”재무대신이 조심스럽게 나섰다.“제국의 질서와 계승을 대내외에 공표하는 자리입니다. 황제의 곁에 서는 여인은 자연히 차기 황후로 받아들여질 것입니다. 그런
“이번에는 살아 있는 성녀의 몸이구나.”세레나의 입에서 흘러나온 목소리는 그녀의 것이 아니었다.대성전 안에서 기도하던 사제들이 일제히 얼어붙었다. 조금 전까지 맑은 연보랏빛이던 세레나의 눈동자는 먹물을 풀어 놓은 것처럼 검게 물들었고, 창백한 목을 따라 가느다란 핏줄이 뻗어 나왔다. 부러진 성녀의 지팡이 주변으로 검은 안개가 피어오르자 사제 몇 명이 비명을 삼키며 뒷걸음질 쳤다.“성녀님?”가장 가까이 있던 어린 신관이 조심스럽게 불렀다.세레나의 고개가 기이한 각도로 기울어졌다. 검게 물든 눈이 신관을 향했지만, 그 안에는 사람을 바라보는 온기가 없었다.“성녀.”그녀의 입술이 천천히 움직였다.“좋은 이름이지. 몸도, 힘도, 삶도 버리고 타인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는 뜻이니까.”검은 안개가 바닥을 타고 퍼졌다. 안개에 발이 닿은 신관들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지고, 몸 안의 성력이 실처럼 뽑혀 나왔다.“모두 물러나세요!”대성전 뒤편에 있던 에린이 소리쳤다.북부 수도원에서 구조된 뒤 신전의 보호를 받고 있던 그녀는 세레나와 가장 가까운 곳에서 새로운 생활을 배우고 있었다. 더는 열세 번째 그릇도, 성녀가 될 후보도 아닌 그저 에린이라는 이름으로.에린은 쓰러지는 어린 신관의 팔을 잡아 안개 밖으로 끌어냈다.“문을 열어야 해요. 다들 밖으로—”쾅!대성전의 거대한 문이 저절로 닫혔다.창문마다 검은 장미 문양이 떠오르고, 출입문을 봉인하는 쇠사슬이 바닥에서 솟구쳤다. 사제들이 힘을 모아 문을 밀었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세레나가 천천히 제단 위로 올라갔다.아니, 세레나의 몸을 차지한 무언가가.“도망칠 필요 없다.”그것이 부드럽게 웃었다.“너희의 믿음은 모두 나에게 돌아올 테니.”대성전 중앙에 세워진 성녀상에서 균열이 시작됐다. 석상의 눈과 입에서 검은 액체가 흘러내리고, 천장에 그려진 역대 성녀들의 초상이 하나씩 세레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무릎 꿇어라.”명령이 떨어진 순간 사제들의 무릎이 일제히 바닥에 닿았다. 몸이 의지를 거스
라엘의 심장이 멎었다.“라엘?”카시안의 팔 안에서 그녀의 몸이 힘없이 늘어졌다. 금빛 눈동자는 초점을 잃었고, 벌어진 입술 사이로 마지막 숨이 가늘게 빠져나왔다.“라엘.”카시안이 다시 이름을 불렀다. 대답은 없었다.목덜미에 손가락을 댔지만 맥박이 느껴지지 않았다. 귀를 가슴에 가져다 대도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의 품 안에서 분명히 뛰고 있던 심장이 침묵하고 있었다.깨진 수정관 앞에 선 여인이 푸른빛을 손에 감으며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돌아왔구나.”푸른빛은 라엘의 가슴에서 뽑혀 나온 뒤 여인의 손목을 타고 텅 빈 심장 자리로 흘러들었다. 그곳에 박혀 있던 검붉은 결정이 천천히 푸른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오랜 세월 기다렸단다.”여인은 하늘에서 만났던 리아나의 얼굴로 웃었다.“본래 내 것이었던 영혼이 돌아오기를.”카시안은 그녀를 보지 않았다. 라엘을 바닥에 조심스럽게 눕힌 뒤, 찢어진 옷깃을 벌려 심장 위에 손을 얹었다.차가웠다.인간이 되기 전의 라엘은 언제나 빛처럼 따뜻했다. 인간의 몸을 얻은 뒤에는 계절에 따라 손끝이 식기도 했고, 밤이면 그의 품에서 체온을 나누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의 차가움은 달랐다. 생명이 빠져나간 자리에서만 느낄 수 있는 끔찍한 냉기였다.“다미안.”카시안이 손을 내밀었다.“치유사를 불러.”“전하, 이곳에서는 통신 성물이—”“불러!”그가 처음으로 이성을 잃고 소리쳤다.다미안이 곧바로 지상에 남은 성기사들에게 신호를 보내려 했지만, 벽을 덮은 검은 실들이 성력을 집어삼켰다. 통신 성물은 빛을 내기도 전에 산산이 깨졌다.“소용없다.”오르텐이 웃으며 말했다.“저 여자는 이미 죽었어. 심장을 잃은 인간이 어떻게 살아 돌아오겠나?”카시안의 시선이 천천히 그에게 향했다.살기만으로도 숨이 막힐 만큼 차가운 눈빛이었다.오르텐이 본능적으로 한 걸음 물러난 순간, 카시안의 검이 그의 목을 향해 날아갔다. 검은 실이 솟아올라 칼날을 막았지만 완전히 튕겨 내지는 못했다. 오르텐
―나의 두 황자야.검은 계단 아래에서 들려온 여자의 목소리에 루시안의 몸이 굳었다.“저 목소리입니다.”그의 입술이 희게 질렸다.“마차에 불이 붙었던 날, 저를 데려간 여자.”십오 년 전, 여덟 살의 루시안은 신전으로 향하던 중 사라졌다. 불탄 마차에서는 신원을 알아볼 수 없는 아이의 시신이 발견됐고, 신전은 제2황자의 죽음을 신탁으로 확정했다. 그러나 실제 루시안은 백색 관의 지하에 갇혀 황실을 증오하도록 길러졌다.그 모든 일의 시작에 저 목소리가 있었다.“초대 성녀라고 했습니까?”다미안이 검을 고쳐 쥐며 물었다.“그렇게 불렀습니다. 백색 관의 사제들은 얼굴을 들지 못했고, 브레노르 공작조차 그 여자의 음성이 들리면 무릎을 꿇었습니다.”루시안은 기억을 더듬듯 천천히 말을 이었다.“직접 모습을 본 적은 없습니다. 언제나 벽 너머나 거울 속에서 목소리만 들렸습니다. 처음에는 자신을 구원자라고 했고, 제가 열두 살이 된 뒤부터는 어머니라고 부르라고 했습니다.”카시안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네 어머니는 단 한 분뿐이야.”“압니다.”루시안은 씁쓸하게 웃었다.“하지만 그때의 저는 어렸고, 혼자였으니까요. 누군가 저를 필요로 한다는 말을 믿고 싶었습니다.”검은 계단 아래에서 부드러운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여전히 다정하구나, 루시안. 저들은 너를 버렸지만 나는 단 한 번도 너를 버린 적이 없는데.“입 다물어.”루시안이 낮게 내뱉었다.―내가 너를 불 속에서 꺼냈고, 먹이고, 가르쳤다. 네가 황자가 아니라 해도 사랑해 주었지.“사랑?”루시안의 손이 떨렸다. 그러나 이번에는 두려움 때문이 아니었다.“나를 지하에 가두고 형제를 죽이는 법을 가르친 것이 사랑입니까?”―너를 왕으로 만들기 위한 과정이었다.“내가 원한 적도 없는 왕으로?”대답 대신 계단 아래에서 차가운 바람이 불어왔다. 바닥에 새겨진 문양이 한층 짙어지며 카시안과 루시안의 발목을 향해 뻗었다.다미안이 검을 내리쳐 문양을 끊었다. 검은 빛이 파편처럼 튀었지만 금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