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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라엘의 변론

Author: 유월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9-19 10:57:23

“제 이름은 천족 라엘이 아닙니다.”

라엘은 수천 개의 황금빛 눈동자를 올려다보며 자신의 가슴 위에 손을 얹었다.

“인간, 라엘입니다.”

그 순간 천칭 위에 놓인 푸른 실이 눈부시게 타올랐다. 가느다란 실을 따라 빛이 번져 나가자, 새하얀 재판정의 바닥에 인간계의 풍경이 아른거렸다.

무너진 신전과 피로 물든 제단, 눈을 감은 채 기도하던 세레나, 라엘을 향해 손을 내밀던 카시안. 짧지만 선명했던 기억들이 빛의 파문 위로 차례로 떠올랐다.

수천 개의 시선이 차갑게 흔들렸다.

―정숙하라.

여섯 쌍의 날개를 지닌 재판관이 지팡이를 내리쳤다.

쾅!

빛으로 이루어진 바닥에 금이 퍼지며 기억들이 산산이 흩어졌다. 천칭 위에서 타오르던 푸른 실도 다시 가늘어졌지만, 완전히 꺼지지는 않았다.

―스스로 인간이라 선언하는 것만으로 존재의 근원이 바뀌지는 않는다. 그대는 천계의 빛에서 태어났고, 천족의 이름을 받았으며, 셀 수 없는 세월 동안 하늘의 권능을 누렸다.

“그 권능은 모두 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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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니 이번에는 절대 놓치지 않아.”카시안의 목소리가 라엘의 입술 위로 낮게 내려앉았다.도망가면 황제가 직접 잡으러 오겠다는 말이 장난만은 아니라는 것을, 허리를 감싼 단단한 팔이 알려 주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벌어진 상처를 치료받던 사람답지 않은 힘이었다.“제국을 두고 쫓아오겠다는 황제는 처음 봐.”“도망가겠다는 약혼녀도 처음 봤어.”“가정이었거든.”“나는 어떤 가능성도 남겨 두고 싶지 않아.”카시안의 엄지가 라엘의 아랫입술을 천천히 쓸었다. 금빛 눈이 그 손길을 따라 흔들리는 순간, 그의 시선이 더욱 짙어졌다.“말로 약속하는 것만으로 부족해?”“부족해.”“욕심이 많네.”“오늘부터 황제니까.”“황제는 욕심을 줄여야 하는 자리 아니야?”“제국에 대해서는.”카시안이 라엘의 허리를 끌어당겼다.“너에 대해서는 줄일 생각 없어.”입술이 겹쳤다.이번에는 어느 쪽도 서두르지 않았다. 반란도, 죽은 성녀도, 지하에서 밀려오던 어둠도 사라진 밤이었다. 방문은 잠겨 있었고, 시종과 관료들에게도 긴급한 일이 아니면 접근하지 말라는 명령이 내려졌다.처음으로 아무것에도 쫓기지 않은 채 서로에게 집중할 수 있었다.카시안의 입술은 느리고 집요했다. 짧게 닿았다 떨어지기를 반복하며 라엘의 반응을 살피다가, 그녀가 셔츠 자락을 움켜쥐자 기다렸다는 듯 깊게 파고들었다. 얽힌 숨 사이로 뜨거운 체온이 번졌다.라엘은 그의 가슴에 감긴 붕대를 누르지 않도록 조심하며 목 뒤로 팔을 둘렀다. 카시안은 그 작은 허락만으로도 인내가 무너진 사람처럼 그녀의 등을 쓸어 내렸다. 손바닥이 등선을 따라 허리까지 내려올 때 얇은 드레스가 함께 당겨졌다.몸이 빈틈없이 맞붙었다.“카시안.”라엘의 입술 사이로 이름이 흘러나왔다.그가 잠시 입맞춤을 멈췄다.“왜?”“그냥 불렀어.”카시안은 그녀의 얼굴을 바라봤다. 눈앞의 사람이 정말 살아 있는지 다시 확인하듯 뺨과 턱선을 천천히 쓸었다.“한 번 더.”“카시안.”“또.”“몇 번이나 불러야 믿을 건데?”“네가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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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의 목을 가져오는 자에게 신성제국의 절반을 내리겠다.포고문의 마지막 문장을 읽은 카시안의 얼굴에서는 어떤 감정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종이를 쥔 손가락 아래로 잉크가 번질 만큼 강한 힘이 들어가 있었다.“제 서명이 아닙니다.”루시안이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알아.”카시안은 짧게 대답했다.“하지만 수도에 있는 사람들은 모르겠지.”라엘이 포고문을 받아 자세히 살폈다. 루시안의 서명은 물론이고 황자에게만 허락되는 푸른 사자 인장까지 완벽하게 찍혀 있었다. 이 정도라면 단순한 위조가 아니었다. 진짜 인장을 오래 보관했거나, 본을 떠서 새로 만들었거나, 루시안 본인에게 강제로 인장을 찍게 했을 가능성이 있었다.“이 인장을 본 적 있어요?”라엘의 질문에 루시안은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이 인장에 고정된 채 흔들렸다.“열두 살이 되던 해에 받았습니다.”“황실에서요?”“아니요. 백색 관에서.”루시안이 메마른 입술을 혀끝으로 적셨다.“그들은 제가 언젠가 황궁으로 돌아갈 거라고 했습니다. 그러려면 황자의 예법과 필체, 황실 문장의 사용법을 배워야 한다고 했죠. 매일 수십 장씩 같은 문장을 쓰게 했습니다. 내 자리를 되찾겠다. 거짓 황태자를 처단하겠다. 신성제국의 정당한 황제는 나다.”카시안의 턱이 단단하게 굳었다.“그때 사용한 인장은?”“훈련이 끝날 때마다 돌려줬습니다. 제 물건이라고 했지만 제가 보관할 수는 없었어요.”처음부터 이 순간을 위해 준비한 일이었다. 루시안의 필체와 인장을 충분히 확보하고, 그가 황실에 대한 원한을 품도록 길들인 뒤 필요할 때 그의 이름으로 반란을 일으킨다. 루시안이 의식을 받아들였다면 실제 꼭두각시 황제로 세웠을 것이고, 거부하거나 죽더라도 남겨 둔 서명과 인장으로 가짜 황제를 만들 생각이었던 것이다.브레노르와 백색 관에게 루시안은 처음부터 사람이 아니었다.황실을 무너뜨리는 데 필요한 이름이자 피였을 뿐이었다.“재상 오르텐은 언제부터 움직였지?”카시안의 질문에 전령이 떨리는 숨을 골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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