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은수에게 연락이 온 것은 화요일 아침이었다. 다음 주 공개를 앞둔 47화에 수정할 부분이 있다고 했다.
[서윤 씨, 47화 표정 수정 때문에 잠깐 통화 가능할까요?]
서윤은 컵을 책상 안쪽으로 밀고 전화를 걸었다. 완성 파일을 보내고도 손을 뗄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자신의 이름으로 온 요청을 보면 마음이 조금 달라졌다.
“마지막에 여자가 고개를 드는 컷 있죠.”
은수는 인사 뒤 바로 원고 이야기로 들어갔다.
“네.”
“눈물을 조금 덜어도 될까요? 남자 돌아온 것만으로 마음이 풀린 것처럼 보여서요.”
서윤은 파일을 열었다. 처음 콘티를 잡을 때 도현에게 설명했던 부분이었다. 한 번에 풀리면 안 된다고 했는데, 그 뒤 수정하면서 여자의 눈가를 너무 밝게 그려 놓았다.
“빛을 좀 빼면 될 것 같아요. 우는 건 아니었거든요.”
“저도 그렇게 읽었는데 모바일에서 보니 눈물처럼 보여요.”
“원본에서 고쳐 볼게요.”
은수는 잠깐 망설이다 말을 이었다.
“오늘 나오실 수 있으면 같이 보면 좋겠어요. 단행본 행사에 쓸 이미지도 확인해야 해서.”
“도현 씨도 와요?”
“오전에는 다른 일정이 있다고요. 서윤 씨가 대신 자료 가져다주실 수 있다고 들었어요.”
서윤은 달력을 보았다. 비워 둔 오전이었다. 개인 원고를 읽을 시간을 정하려고 어젯밤에 선을 하나 그어 놓았는데, 그 칸 위로 제작사 주소가 들어왔다.
“몇 시까지 가면 돼요?”
제작사 접수대에서 방문 목적을 말하자 직원이 명단을 확인했다. 서윤의 이름을 한 번 더 물은 뒤 통화하러 안쪽으로 들어갔다.
유리문 옆에는 『물의 가장자리』 포스터가 걸려 있었다. 그림 아래로 도현의 얼굴과 짧은 약력이 붙어 있었다. 서윤은 약력보다 포스터 가장자리를 보았다. 인쇄가 진하게 나와 원본에서는 보이던 창틀의 그림자가 조금 뭉쳐 있었다.
“강도현 작가님 사모님 맞으시죠?”
직원이 돌아와 방문증을 내밀자 서윤은 네, 하고 받아 들었다. 접수할 때 한서윤이라고 이름을 밝혔는데도, 방문증의 소속 칸에는 강도현 작가 가족이라고 쓰여 있었다.
은수가 회의실 문을 열어 주었다. 벽 쪽 모니터에는 서윤이 보낸 원고가 떠 있었고, 탁자에는 인쇄한 그림들이 순서대로 놓여 있었다.
“오시느라 고생하셨어요.”
“수정해서 가져왔어요. 여기서 한 번 봐 주세요.”
서윤이 노트북을 연결했다. 여자의 눈 밑에서 흰색을 조금 줄이고 고개 각도를 바꾼 사본이 화면에 떴다. 눈물처럼 보이던 부분이 사라지자 같은 얼굴이 한결 조용해졌다.
은수는 휴대폰에서도 그림을 열었다.
“이쪽이 좋네요. 그런데 남자 손은 조금 덜 나와도 되겠어요.”
“여기요?”
“네. 먼저 잡으려는 것처럼 보여요.”
“받을지 말지 망설이는 거였는데.”
서윤은 화면을 확대했다. 손가락 끝이 우산 손잡이에 너무 가까웠다. 큰 화면에서 따로 놓인 동작이 휴대폰에서는 겹쳐 보였다.
“손을 뒤로 빼면 남자 얼굴을 조금 더 넣어야 할 것 같아요.”
“아예 안 넣으면요?”
은수의 말에 서윤이 그림을 내려 보았다. 남자의 얼굴을 감춰도 앞 장면의 시선이 남아 있었다. 서윤은 손을 조금 뒤로 옮기고 마지막 칸의 여백을 줄였다.
서윤은 바뀐 원고를 휴대폰으로 다시 열어 읽었다. 다음 컷에서 손가락이 멈췄다.
“이렇게요?”
“좋아요. 이게 더 기다리게 하네요.”
서윤은 앞 장면까지 거슬러 올려 보았다. 오랜만에 장면을 설명하는 말이 중간에 끊기지 않았다. 더 예쁘게, 덜 답답하게 해 달라는 요구가 아니라 누가 먼저 손을 내미는지를 함께 보고 있었다.
“전에는 너무 다 말하려고 했던 것 같아요.”
서윤이 말했다.
“그림으로 보이는데 대사로도 붙이고.”
“요즘은 많이 덜어 내셨죠.”
은수는 이전 회차를 넘겨 비교해 주었다. 말풍선을 없앤 자리와 남겨 놓은 동작이 눈에 들어왔다. 서윤은 몇 달 전 자기 그림을 보면서도 누군가의 설명을 통해 새로 발견하는 기분이 들었다.
회의실 바깥에서 다른 직원이 문을 두드렸다.
“PD님, 작가님 행사 진행안 확인 부탁드려요.”
“두고 가세요.”
직원은 인쇄물을 탁자에 올려놓으며 서윤에게도 웃어 보였다.
“남편분 행사라 신경 많이 쓰이시겠어요. 현장도 오시죠?”
“네.”
“도현 작가님이 사모님 음식 솜씨를 얼마나 자랑하시던지요.”
서윤은 손에 든 펜을 노트북 옆에 내려놓았다. 뭐라고 답해야 자연스러운지 잠깐 생각한 사이, 직원은 주방에서 찍은 도현의 사진을 이야기했다. 지난 인터뷰에서 반응이 좋았다고 했다.
은수는 그 말이 끝날 때까지 서류를 정리했다. 직원이 나간 뒤 문이 닫히자 다시 원고 화면으로 돌아왔다.
“수정은 이 정도면 될 것 같고요.”
아까의 대화가 너무 쉽게 끊겼다. 서윤은 대답 대신 노트북을 조금 당겼다.
“PD님.”
“네.”
“다음에 원고 이야기할 때도 제가 와도 될까요?”
은수가 그녀를 보았다.
“도현 씨 일정 대신이 아니라, 제가요.”
회의실의 냉난방기에서 바람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은수는 손에 들었던 진행안을 내려놓았다.
“저는 서윤 씨랑 얘기하는 게 빨라요. 지금처럼요.”
“그런데 밖에서는 제가 뭘 하는지 아무도 모르는 것 같아서.”
“실무는 제가 알고 있죠.”
서윤은 그 말 뒤를 기다렸다. 은수는 더 말하지 않고 진행안의 다음 장을 넘겼다. 조금 전 직원이 자신을 사모님이라고 불렀을 때도, 원고를 누가 고쳤는지 아는 사람은 이 방에 있었다.
“오늘 수정한 것도 제 메일로 보내 둘게요.”
서윤이 먼저 말했다.
“확인 답변 거기로 주실 수 있어요?”
“작업 연락은 그렇게 할게요. 최종 확정은 작가님 계정에도 보내야 하고요.”
은수는 작가님이라고 말한 뒤 물을 한 모금 마셨다. 누구를 가리키는지 되물을 필요는 없었다.
행사 진행안에는 무대 뒤 화면에 띄울 그림과 질문 목록이 들어 있었다. 서윤은 익숙한 장면에 표시를 했다. 『물의 가장자리』에서 여자가 문 앞에 장화를 벗어 놓는 컷이었다.
“이건 화면을 조금 위까지 보여 주면 좋겠어요. 위에 걸린 수건이 있어야 앞에서 한 말이 연결돼서.”
“원본 이미지 보내 주실 수 있죠?”
“찾아서 같이 보낼게요.”
“늘 꼼꼼하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서윤은 그 말에 고개를 들었다. 은수는 진심으로 말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더 무엇을 요구해야 하는지 알기 어려웠다. 감사하다는 말을 받은 자리에서 이름까지 말해 달라고 하면, 이미 받은 것을 모르는 사람처럼 보일까 봐 망설여졌다.
노트북을 닫기 전 서윤은 수정 사본을 한 번 더 저장했다. 파일명 끝에 그날 날짜를 붙였다. 평소처럼 날짜만 적고 저장했는데도, 오늘은 방금 부탁한 답장이 기다려졌다.
집에 돌아오자 도현이 먼저 와 있었다. 거실 큰 작업실 문이 열려 있었고, 책상 위에는 촬영용 조명이 하나 놓여 있었다.
“어땠어?”
“수정 확인했어.”
“많이 고쳤어?”
“마지막 2컷. 그리고 행사에 쓸 이미지도 얘기했고.”
“잘됐네. 나는 원고 설명하는 게 제일 힘들더라. 말로 풀려니 잘 안 돼.”
서윤은 가방을 내려놓고 외투를 벗었다. 은수와 주고받았던 이야기를 해 주고 싶었다. 남자의 얼굴을 빼는 편이 왜 더 좋은지, 화면을 줄이면 손이 어떻게 달라 보이는지.
“여자 눈에 넣었던 빛을 줄였더니…….”
“아, 그거 은수 PD가 정리해서 보내 준대.”
도현은 조명 전원을 켰다. 벽을 향한 빛이 작업실을 환하게 만들었다.
“이거 그림자 너무 세지 않아? 행사 전에 짧은 영상 하나 찍어야 해서.”
서윤은 그가 가리키는 곳을 보았다. 얼굴 한쪽이 하얗게 날아가 있었다.
“조금 옆으로 돌려. 벽에 한 번 닿게.”
도현이 조명을 돌리자 그림자가 부드러워졌다. 그는 휴대폰으로 시험 촬영을 한 뒤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너 없으면 이런 건 못 하겠다.”
도현은 시험 영상을 다시 보느라 조명 쪽을 보고 있었다. 서윤은 가방 손잡이를 고쳐 잡았다. 눈가의 빛을 줄였다는 이야기는 끝내 하지 못한 채 복도 끝으로 들어갔다.
작업실로 들어와 수정 파일과 행사 이미지를 정리했다. 예전 원본을 찾다가 옛 메일 보관함도 열었다. 제목이 비슷한 메일들이 길게 이어져 있었다.
그중 오래된 회신 하나에는 자신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이번 원고도 잘 받았습니다, 서윤 씨.
보내 주신 두 번째 안으로 진행하겠습니다.
서윤은 날짜와 첨부 파일을 확인했다. 은수가 더 자주 직접 연락하던 시기의 메일이었다. 도현의 계정만 보관해 두면 된다고 생각해 개인 수신함은 오래 열지 않았다.
그때도 같은 일을 했다. 지금보다 서툴렀고 설명도 길었지만, 적어도 받은 사람이 누구에게 답하는지는 알고 있었다.
서윤은 메일을 지우지 않고 원본 그대로 저장했다. 첨부 파일을 고친 사본과 섞지 않도록 폴더를 나누었다. 오래된 저장장치가 가끔 연결을 놓쳐서, 파일을 모두 옮긴 뒤 다시 열어 보았다.
오늘 수정본도 자기 메일에서 보냈다. 받는 사람은 차은수, 제목은 47화 수정본이었다. 도현에게는 전달 파일을 따로 보냈다.
잠시 후 휴대폰이 울렸다.
[이번 달 필요한 거 있으면 사. 조금 더 넣었어.]
도현이 보낸 메시지 아래로 입금 알림이 겹쳐 떴다. 서윤은 답장 창을 열었다가 책상에 놓인 새 펜심을 보았다. 그것은 이미 자기 손으로 주문해 오늘 도착한 것이었다.
[응. 확인했어.]
그렇게만 보냈다.
컴퓨터에서는 수정본 전송 완료 표시가 사라졌다. 서윤은 메일 보관 폴더를 닫고 자신의 그림이 있는 폴더를 열었다. 오늘 어딘가에서 들었던 말을 메모했다.
먼저 잡으려는 것처럼 보여요.
인물이 어떤 마음으로 손을 뻗었는지, 읽는 사람에게 다르게 보일 수도 있었다. 서윤은 자신의 짧은 만화에서도 손 하나를 뒤로 옮겼다. 당장 공개할 생각이 없어도 고치고 싶은 부분은 있었다.
***
은수는 퇴근 전에 마지막 메일을 쓰고 있었다.
서윤의 계정에서 받은 수정본을 다시 열어 보았다. 화면을 줄이고 올려 읽어도 인물의 마음이 잘 이어졌다. 조금 전 원고를 보는 동안만큼은 누구의 아내가 회의실에 왔는지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은수는 답장 칸에 썼다.
서윤 씨, 수정 원고 확인했습니다.
오늘 말씀하신 방향으로 반영하겠습니다.
참조란에 도현의 계정을 넣다가 손을 멈췄다. 최종 승인 연락은 자신에게 달라고 했던 그의 말이 떠올랐다. 서윤과 따로 작업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알면서도, 완성됐다는 답변에는 자기 이름을 원했다.
은수는 서윤에게 짧게 수신 확인을 보냈다. 잘 받았고 확인 중이라는, 어디에도 거짓은 없는 문장이었다.
그리고 최종 확정 메일을 새로 열었다.
방금 쓴 문장을 옮겨 넣은 뒤 맨 앞의 이름을 지웠다.
강도현 작가님.
은수는 고친 호칭을 한 번 읽고 전송 버튼을 눌렀다.
5월 7일 오후, 서윤은 입원 가방을 옆에 세워 놓고 다시 진료를 기다렸다. 아침에 예정했던 절차는 바뀌어 있었다. 몸 상태를 확인받고 필요한 처치를 받은 뒤 다음 진료를 잡을 때까지, 가방은 의자 옆에 그대로 있었다.직원이 일정을 확인하며 물었다.“다음에는 이 시간에 오실 수 있으세요?”“네. 올 수 있어요.”서윤은 수첩에 날짜를 적고 새 예약을 확인했다. 다음 날 다시 병원에 왔고, 이어진 조정을 거쳐 5월 12일 입원했다.짐을 풀자 가방 속에서 구겨진 안내지가 나왔다. 지난주에 쓰려던 종이였다. 그녀는 그것을 버리지 않고 다른 서류 밑에 넣었다.입원 중의 하루는 검사와 진료 시간에 맞춰 흘렀다. 그사이에는 병상에 누워 쉬었다.도현이 파일 위치를 물으면 폴더 이름만 답했다. 집에 언제 오느냐는 질문에는 퇴원 날짜를 아직 모른다고 했다. 병원에서 컴퓨터를 쓸 수 있는지 묻는 말은 답하지 않은 채 남겨 두었다.의사는 병이 위 바깥까지 퍼져 있다고 설명했다. 수술로 모두 제거하기 어려운 상태였고, 약물치료를 포함해 가능한 방법을 따져야 했다. 서윤은 설명을 들으며 수첩을 펼쳤다가 펜을 내려놓았다. 이번에는 다 적으려고 하지 않고 먼저 들었다.“그럼 수술은 안 하는 거예요?”“지금 확인한 범위에서는 수술로 없애는 치료를 우선하기 어렵습니다. 병의 진행을 억제하는 치료를 검토하면서, 식사와 통증 문제도 같이 조절해야 해요.”“아무것도 못 하는 건 아니죠?”의사는 현재 할 수 있는 일과 몸 상태에 따라 조정해야 하는 일을 나누어 말했다. 서윤은 치료를 받고 싶다고 답했다. 가능하다면 언제 시작할 수 있는지도 물었다.입원 중에는 먹을 수 있는 양과 불편한 증상을 알리는 일도 치료의 일부였다. 덜 아프다고 대답하면 빨리 집에 갈 수 있을 것 같던 습관이 남아 있어, 간호사가 물을 때마다 서윤은 잠깐 생각해야 했다. 어느 때 더 아팠는지, 먹은 뒤 무엇이 불편했는지 말하고 나면 시간이 좀 걸렸다. 그래도 그 말을 적는 사람이 있었다.퇴원 수납을
5월 7일 아침, 여행 가방은 현관에 나와 있었다. 서윤은 병원에서 가져오라고 한 서류를 확인하고 휴대전화에 택시 호출 화면을 띄웠다. 아직 호출 버튼은 누르지 않았다. 도현이 뒤에서 종이 한 장을 내밀었기 때문이었다.“이거 한 줄만 봐.”서윤은 시간을 확인했다. 8시 55분이었다.“지금 나가야 해.”“병원 10시잖아. 읽는 데 1분도 안 걸려.”그가 가져온 것은 축하 영상의 대본이었다. 지난주에 자료를 보낸 뒤 추가 촬영용으로 다시 고쳐 달라는 요청이 왔다고 했다. 서윤이 쓰지 않은 문장이 중간에 들어가 있었다. 오래된 원고에서 인물의 대사를 떼어 작가 자신의 경험처럼 붙인 부분이었다.“이건 인물이 한 말이잖아.”“그래서 좀 이상하다고. 내가 한 말처럼 바꿔 줄 수 없어?”“빼면 돼.”“그걸 빼면 앞에 영상이랑 안 맞는다니까.”도현은 종이를 돌려 그녀 쪽으로 더 밀었다. 서윤은 휴대전화를 식탁에 놓고 잘라낼 문장에 표시했다. 출발 시각을 늦추지 않고 할 수 있는 마지막 일이라고 생각했다. 선을 긋자 도현은 그 뒤에 이어질 말을 물었다.“그건 당신이 해. 생각해 둔 게 있잖아.”“지금 이 상태로 넘기라는 거야?”서윤은 펜을 내려놓았다. 도현은 촬영 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어 30분 안에 보내겠다고 말했다. 그녀에게 가능한지 묻지 않은 약속이었다. 통화가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서윤이 가방을 들자 그가 작은 방을 가리켰다.“원고도 같이 열어 봐야 해. 장면 순서가 달라져서.”“오늘 못 한다고 했어.”“입원해도 바로 뭘 하는 건 아니잖아. 접수만 조금 늦으면 되는 거 아니야?”“당신이 정할 일이 아니야.”목소리가 커지자 도현은 거실 창문 쪽을 보았다. 밖에서 들을 사람을 의식하는 그 동작 때문에, 서윤은 자신도 모르게 낮추려던 목소리를 그대로 두었다.“내가 병원에 가야 한다고 몇 번 말했어. 날짜도 2번 바꿨어.”“그러니까 오늘 끝내고 가라고.”도현은 같은 설명을 반복하며 촬영 담당자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통화가 끝나면 나갈 수
서윤은 돌려받은 봉투를 책상 서랍 안쪽에 넣었다. 은수가 보관할 원고 목록에는 그 봉투가 없었다. 목록을 접어 파일철에 끼운 뒤에도 책상 위에 남은 종이가 많아, 당장 필요한 병원 안내부터 가방에 챙겼다.4월 16일 진료에는 예약한 시각보다 조금 일찍 도착했다. 앞선 검사 자료가 제대로 전달되었는지 확인하고 앉아 있으니, 간호사가 최근 식사량을 물었다. 서윤은 잘 먹고 있다고 답하려다가 전날 먹은 것을 차례로 말했다. 말하고 보니 스스로 생각했던 것보다 적었다.진료실에서는 검사 결과와 몸 상태를 함께 보았다. 의사는 병의 범위를 더 확인하고 치료 계획을 정하기 위해 입원 평가를 권했다. 먹는 양이 줄어든 문제도 같이 살펴야 했다.“며칠 정도 생각하면 될까요?”“검사와 상태에 따라 달라질 수 있어요. 우선 입원해서 필요한 평가를 진행하고 계획을 설명드리겠습니다.”서윤은 달력을 열었다. 의사가 기다려 주는 동안 남편의 일정이 화면에 나타나, 자기 예약을 적은 작은 수첩을 따로 꺼냈다. 4월 23일 옆에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그날로 해 주세요.”그녀는 날짜를 받아 적었다. 병원에서는 그 사이에도 증상이 심해지면 예정일까지 기다리지 말고 연락하라고 했다.진료실을 나오자 다음 주 원고가 먼저 떠올랐다. 서윤은 메신저를 열려던 손을 멈추고 입원 준비물 안내부터 읽었다. 빠진 물건을 적어 둔 뒤 약국에 들렀다가 집으로 돌아왔다.도현에게 날짜를 말한 것은 그날 저녁이었다. 그는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얼마나 걸리느냐고 물었다.“아직 몰라. 검사도 더 해야 하고, 치료 계획을 잡아야 한대.”“그럼 검사하는 데 시간을 얼마나 쓰는지도 모르는 거야?”“해 봐야 정할 수 있대.”서윤이 가방에서 안내를 꺼내 식탁에 놓았다. 도현은 종이를 읽는 대신 메신저에 올라온 수정 요청을 확인했다. 다음 주까지 넘겨야 하는 원고에 문제가 생겼다고 했다. 인물이 싸우는 이유를 이해하기 어렵다는 의견이었다.“내가 그 부분은 건드려 봤거든. 그런데 앞뒤가 또
원고를 가방에 넣으려니 가장 오래된 스케치북이 들어가지 않았다. 서윤은 모서리를 억지로 눌러 보다가 가방을 바꾸었다. 남편의 행사 자료를 넣던 큰 보조 가방이었다. 안쪽 주머니에서 지난 행사장의 안내 종이가 나와, 그것만 빼서 책상에 놓았다.4월 13일 오전, 바닥에 펼친 스케치북들은 크기부터 제각각이었다. 문구점에서 산 얇은 연습장 옆에는 표지가 떨어져 고무줄로 묶어 둔 것도 있었다. 종이마다 적힌 날짜는 몇 년씩 떨어져 있었고, 뒤쪽이 통째로 빈 공책도 눈에 띄었다. 남편의 원고가 급해질 때면 그리던 장을 덮어 두곤 했다.서윤은 완성한 그림에 붙여 둔 파란 표시를 확인했다. 말풍선과 동작만 잡아 둔 콘티에는 회색 표시를 붙였다. 선을 정리하지 못한 인물들은 얼굴이 동그라미뿐인 경우도 있었다. 어느 해의 것은 연필이 너무 흐려서, 나중에 촬영할 때 빛을 따로 비추어야 할 것 같았다.한 장을 넘기다가 여자가 혼자 빵을 먹는 그림에서 멈췄다. 봉투를 열기 전에는 맞은편에 의자가 하나 더 있었다. 먹기 시작한 뒤의 칸에는 여자가 벗어 놓은 외투 때문에 그 의자가 반쯤 가려졌다.서윤은 옷깃을 고쳐 그리려다 펜을 내려놓았다. 오늘은 고치는 날보다 무엇을 남길지 정하는 날에 가까웠다.몸이 허락하는 만큼만 하자고 생각하며 원고를 다시 묶었다. 다음 진료일이 적힌 종이는 가방 바깥 주머니에 넣었다. 계약을 한 다음에도, 원고를 고르는 아침에도 그 날짜는 필요했다.은수는 전날과 같은 상담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번에는 노트북 옆에 빈 파일철과 촬영용 받침대를 준비해 놓았다. 서윤이 가방을 내려놓자 은수가 손을 뻗다가 먼저 물었다.“꺼내도 될까요?”서윤은 스케치북부터 꺼내 달라고 했다. 원고의 크기가 달라 책상 위에 한꺼번에 펴 놓을 수는 없었다. 은수는 몇 권만 펼치고 나머지는 의자 위에 세워 놓았다. 두 사람이 앉은 책상 사이로 연필 자국과 지운 흔적들이 이어졌다.“이쪽은 완성본이고요. 여기부터는 콘티예요.”서윤은 표시 색을 설명했다. 은수는 회색 표
월요일 오전, 서윤은 진료 대기실에서 예약 문자를 다시 확인했다. 산부인과의 후속 진료를 마치면 같은 건물의 다른 층으로 가야 했다. 지난주에 잡아 둔 소화기 진료였다.의사는 유산 이후의 상태를 확인하고 이후에 살펴야 할 증상을 설명했다. 서윤은 안내를 듣고 나온 뒤 다음 진료과에 최근의 일을 알렸다. 임신 사실과 유산한 날짜를 말하는 동안, 접수 직원은 필요한 항목을 조용히 입력했다. 그 말을 끝까지 들은 사람에게는 별도의 변명이 필요하지 않았다.소화기 진료실에서 서윤은 몇 달 전부터 속이 답답했다고 말했다. 처음에는 끼니가 늦어져서라고 생각했고, 다음에는 임신 때문인 줄 알았다고 했다. 의사는 어느 쪽으로도 바로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 식사량과 통증, 최근의 변화에 관해 차례로 물었다.“유산 전에도 먹는 양이 많이 줄었어요?”“네. 배가 고픈데 먹기 시작하면 금방 못 먹겠어요.”최근 검사 결과를 확인한 의사는 위내시경 검사를 권했다. 서윤은 검사 방법과 준비 사항을 듣고 가능한 날짜를 골랐다. 다음 날 아침이었다. 그 시간을 선택하면서도 남편의 작업 일정을 먼저 열어 보지는 않았다.4월 8일의 검사가 끝난 뒤, 그녀는 옷을 갈아입고 설명을 기다렸다. 의사는 병변이 있어 조직을 채취했다고 말했다. 검사 결과를 확인해야 한다는 말과 함께 추가 촬영 일정을 잡았다. 서윤은 그가 화면의 어느 곳을 가리키는지 보았지만 색과 형태만으로는 알아볼 수 없었다.“안 좋은 건가요?”“확인이 필요한 소견입니다. 조직검사와 영상검사 결과를 같이 보고 설명드릴게요.”집에 돌아와 내시경 사진을 펼쳤다가 다시 덮었다. 인터넷에서 비슷한 이미지를 찾아 나란히 놓아도 무엇이 같은지 알 수 없었다. 한 사람은 별일 아니었다고 했고, 다른 사람은 전혀 다른 결과를 적었다. 서윤은 검색 창을 닫고 병원에서 받은 다음 예약을 확인했다.도현은 그녀가 책상 앞에 오래 있지 않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날 저녁에도 컴퓨터가 꺼져 있는 작은 방을 들여다보았다.“검사 아직도 안 끝났
도현은 현관 거울 앞에서 셔츠 소매를 접고 있었다. 서윤이 부엌에서 물을 마시는 동안 그는 재킷을 걸쳤다가 벗었다. 문채령의 행사 사진에 어떻게 나올지 휴대전화로 확인하느라, 신발을 신고도 한참 나가지 않았다.“오늘 저녁은 늦어. 뒤풀이까지 가야 할 것 같아.”서윤은 벽 달력을 보았다. 4월 5일의 날짜 위에 남편이 행사 이름을 크게 적어 놓았다. 그 아래에 자기 약속을 덧쓰려던 흔적은 없었다. 병원 일정은 이제 작은 방에 둔 종이에만 적었다.“나 오늘은 쉬어야겠어.”“알아. 어제 보낸 부분은 봤어.”“원고 말고, 몸이 안 좋아.”도현은 손에 든 휴대전화에서 시선을 떼었다. 그녀의 앞에 놓인 물컵을 보더니 냉장고 쪽을 한번 돌아보았다.“먹을 게 없으면 시켜 먹어. 굳이 나 기다리지 말고.”현관문이 닫힌 뒤 서윤은 물을 조금 더 마셨다. 아랫배의 통증은 아침부터 있었다. 며칠 전 진료 이후 출혈이 줄어드는 듯해 안심했던 것이 전날 밤이었다. 지금은 화장실에 다녀올 때마다 상태를 확인해야 했다.병원에서 받은 안내지를 식탁에 펴 놓고 전화부터 했다. 토요일 진료 시간 안이었다. 증상을 설명하는 도중 통증이 심해져, 서윤은 잠시 말을 멈췄다. 수화기 너머의 간호사가 이름을 다시 불렀다.“듣고 있어요. 그런데 아까보다…….”그녀는 몸을 일으키다가 식탁에 다시 기대었다. 출혈이 갑자기 늘었고 어지러웠다. 간호사는 혼자 움직이지 말고 즉시 응급 도움을 받으라고 했다. 서윤은 통화를 마치자마자 119를 눌렀다.주소를 말하는 동안 휴대전화가 미끄러지지 않게 식탁에 올려놓았다. 현관문을 열어 두라는 안내를 듣고 천천히 걸어가 잠금을 풀었다. 가방은 가까운 의자에 있었다. 그녀는 병원 봉투와 신분증을 챙겨 넣은 뒤, 더 움직이지 말라는 말에 따라 현관 근처에 앉았다.도현에게 먼저 전화를 걸지 않았다. 누군가의 허락을 받거나 도착을 기다릴 시간이 아니었다. 현관문 밖에서 사람의 목소리가 들리자 서윤은 안쪽에 있다고 답했다.병원에서는 비슷한 질문에 몇 번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