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오늘 집에 올 수 있니?”
목요일 오전, 미숙에게 전화가 왔다. 서윤은 창가에 펼쳐 둔 스케치북을 덮었다. 어머니가 먼저 오라고 하는 일이 드물어서 무슨 일이 생긴 건지부터 물었다.
“별일은 없고. 반찬 좀 해 놨어. 너희 가져가라고.”
“도현 씨는 오늘 못 갈 텐데.”
“바쁜 사람을 오라겠니. 네가 가져가면 되지.”
서윤은 펼쳤던 장을 다시 보았다. 컵을 씻는 여자의 손과 마른 행주가 걸린 창틀을 그려 놓은 페이지였다. 밑그림을 정리해 보고 싶었지만 서두를 일은 아니었다. 어머니가 만들어 둔 음식은 오늘 가져가야 했다.
“점심때 갈게. 뭐 필요한 거 있어?”
“오는 길에 들기름 좀 사 와. 지난번에 네가 가져온 게 좋더라.”
서윤은 메모장을 열었다. 들기름, 어머니가 좋아하는 두부. 그 밑에 적어 두었던 ‘내 그림 정리’는 지우지 않고 한 줄 아래로 옮겼다.
외출 준비를 하던 중 입금 알림이 떴다. 생활비를 받는 계좌였다. 서윤은 도현에게 보낼 답장을 적다가, 은수가 보낸 원고 수신 메시지가 그 위에 있는 것을 보았다.
도현은 이번 달엔 지출이 많을 테니 조금 보냈다는 메시지도 남겼다. 서윤은 고맙다는 답을 보내고 미뤄 둔 관리비부터 이체했다. 잔액을 확인한 뒤 장바구니에 담아 뒀던 펜심도 주문했다. 끝이 닳아 작은 선을 그릴 때마다 미끄러지던 참이었다.
도현에게 새 펜을 사 달라고 하면 사 줄 것이다. 가격이 문제인 사람은 아니었다. 다만 어디에 쓰려고 하느냐는 질문이 따라왔고, 그럴 때마다 서윤은 자기 그림 이야기를 설명해야 했다.
펜심을 주문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배송지를 집으로 지정하고 화면을 닫았다.
버스를 타기 전 시장에 들렀다. 들기름을 사던 가게 옆에서 상인이 접힌 상자를 펴고 있었다. 상자 안에는 새로 들어온 찻잔들이 신문지에 싸여 있었다.
서윤은 포장을 푸는 손을 보다가 걸음을 늦췄다. 상인은 잔을 꺼내자마자 가장자리부터 확인했다. 흠이 있으면 손끝에 먼저 걸리는 모양이었다. 멀쩡한 잔과 금이 간 잔을 놓는 곳이 달랐다.
“찾는 거 있어요?”
“아니요. 이거, 작은 거 하나만 볼게요.”
안쪽에 파란 선이 둘러진 잔이었다. 서윤은 손잡이를 잡아 보았다. 보기보다 가벼워서 좋았다. 찬장에 컵이 없는 것도 아닌데, 새로 닦은 자기 책상에 놓으면 어울릴 것 같았다.
가격표를 보고도 한참 들고 있자 상인이 종이를 내밀었다.
“선물할 거면 싸 드리고.”
“제가 쓸 거예요.”
그 말을 하고 나서 서윤은 잔을 내려놓지 않았다. 들기름과 섞이지 않게 작은 종이봉투에 따로 넣어 달라고 했다.
미숙은 주방에서 생선을 굽고 있었다. 서윤이 들어서자 반가운 인사 대신 비닐봉투를 받아 냉장고에 두었다.
“잘 샀네. 이 집 두부가 단단해서 좋아.”
“엄마, 기름 튀어. 내가 할게.”
“놔 둬. 너 오기 전에 끝내려고 했는데 통화가 길어져서.”
식탁에는 이미 반찬통 여러 개가 놓여 있었다. 서윤이 손을 씻고 앉자 미숙이 생선의 두꺼운 쪽을 덜어 작은 접시에 담았다. 접시는 서윤 앞이 아니라 뚜껑 열린 반찬통 옆에 놓였다.
“도현이가 이런 거 잘 먹지?”
“응. 그런데 오늘은 나랑 먹으면 안 돼?”
미숙이 웃었다.
“그건 네 몫 따로 있지. 저 사람은 손이 가는 반찬을 해 줘야 잘 먹는다며.”
서윤은 더 말하지 않고 수저를 들었다. 어머니가 내준 접시에도 살은 넉넉했다. 서운하다고 하기에는 자신 앞에 놓인 것이 모자라지 않았다. 그래서 어디서부터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미숙은 밥을 뜨자마자 도현의 근황을 물었다. 새 작품이 잘되는지, 다음 달 행사에는 사람이 많이 오는지, 올해도 상을 받는지.
“상은 아직 몰라. 후보 이야기는 있나 봐.”
“그럼 될 수도 있다는 거네.”
“엄마, 아직 확정된 건 없어.”
“누가 확정됐대? 될 수도 있다고 한 거지.”
미숙이 휴대폰을 끌어당겼다. 서윤은 밥 한 숟가락을 더 먹고서야 어머니가 단체 대화방에 무언가 쓰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어디다 얘기하지 마.”
“너희 얘기가 아니라 내 친구들한테.”
서윤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그 친구들이 도현을 얼마나 아는지, 도현이 받는 상에 왜 이렇게 관심이 많은지 묻고 싶었다. 대신 휴대폰 화면이 꺼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준비해 온 말을 꺼냈다.
“나도 요즘 예전 그림 좀 보고 있어.”
“무슨 그림?”
“내가 따로 그렸던 거. 짧은 만화들.”
“아, 옛날에 인터넷에 올리던 거?”
서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에도 조금씩 그린 게 있어. 모아 놓으면 읽을 만할 것 같아서.”
미숙은 국그릇을 옮겨 주며 물었다.
“도현이는 뭐래?”
“아직 제대로 못 보여 줬어.”
“그럼 먼저 보여 줘야지. 전문가가 집에 있는데.”
서윤은 무릎 위에 놓인 가방의 지퍼를 만졌다. 안에는 버스에서 몇 번이나 열어 본 태블릿이 있었다. 덜 그린 부분이 걸렸지만, 어머니에게 1편만이라도 보여 주려고 가져온 것이었다.
“엄마한테 먼저 보여 주려고.”
“나야 이런 거 봐도 모르지.”
“몰라도 돼. 그냥 읽히는지만.”
미숙은 난처한 듯 웃었다. 안경이 어디 있는지 모르겠다고 하다가 식탁 끝에 놓인 안경을 발견하고도 쓰지 않았다. 생선이 식는다며 서윤의 접시 쪽으로 젓가락을 가져왔다.
“너는 어릴 때부터 그림 좋아했지. 그런데 좋아하는 거랑 일로 하는 건 다르더라.”
“일로 하겠다는 건…….”
“취미면 더 편하게 하면 되겠네. 도현이 옆에서 도와주면서.”
서윤은 열려 있던 가방 지퍼를 닫았다. 화면을 보여 주면 어머니가 지금이라도 말을 바꿀지 몰랐다. 하지만 그림을 꺼내는 순간, 잘 그렸는지 못 그렸는지를 판정받는 자리가 될 것 같았다.
물어보고 싶었던 것은 그런 게 아니었다.
마지막 장면의 여자가 왜 컵을 씻지 않고 두었는지, 그게 이상하지는 않은지 궁금했다.
미숙의 전화가 울렸다. 친구였다. 어머니는 식탁에서 바로 전화를 받았다.
“응, 우리 서윤이 와 있어. 반찬 좀 가져가라고 했지. 사위? 바쁘다니까. 이번에 단행본 행사도 하고…….”
서윤은 국을 조금 더 먹었다. 미숙이 통화하며 가리킨 접시를 반찬통 쪽으로 옮겼다. 생선에 가시가 남았는지 확인하다 손끝에 작은 것이 걸려 빼냈다.
통화가 끝나기를 기다리는 동안 종이봉투가 눈에 들어왔다. 시장에서 산 컵을 보여 주려고 꺼내 놓았는데 미숙은 그것을 들여다보지도 않았다. 서윤은 봉투 입구를 접었다.
미숙은 전화 상대에게 딸이 결혼을 잘해서 마음이 놓인다고 말했다. 서윤은 그 말이 끝난 뒤에야 자리에서 일어나 빈 그릇을 싱크대로 가져갔다.
설거지를 마칠 무렵 미숙이 주방으로 왔다.
“친구 손녀가 만화 좋아한대. 도현이 사인 하나 받아 줄 수 있니?”
“다음 달 행사에 오시면 안 돼?”
“줄을 얼마나 서겠니. 너한테 말하면 간단하잖아.”
“행사 쪽에 물어볼게. 내가 된다고 약속은 못 해.”
미숙이 의외라는 듯 서윤을 보았다. 서윤은 접시의 물기를 닦고 나서 덧붙였다.
“이름이랑 어떤 책인지 먼저 받아 줘. 나도 물어봐야 하니까.”
그 정도 말에도 얼굴이 달아올랐다. 못 해 주겠다고 한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미숙이 잠깐 입을 다무는 것을 보니 공연히 야박하게 군 것 같았다.
“알았다. 바쁘면 말고.”
서윤은 아니라고 바로 답하지 않았다. 행주를 걸고 손을 말리는 동안 잠깐의 정적을 그냥 두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에서 도현에게 메시지가 왔다.
[어머님 댁 갔어?]
[응. 이제 가.]
[수상 얘긴 아직 어디다 하지 마시라 그래. 확정된 거 아니라서.]
서윤은 이미 말했다고 답했다. 그 뒤에 어머니가 자신의 그림 이야기를 거의 듣지 않았다는 말을 쓰려다가, 도현이 답할 내용을 먼저 떠올리고 지웠다.
나한테 보여 주면 되잖아.
지금은 바쁘니까 나중에.
태블릿을 꺼냈다. 완성되지 않은 작은 이야기들이 날짜도 제각각인 폴더 안에 흩어져 있었다. 4년 전에 그린 것도 있었고 지난달에 몇 컷을 보탠 것도 있었다. 어떤 파일은 도현의 원고를 저장한 폴더에 잘못 들어가 있었다.
서윤은 혼자 읽을 때 좋은 순서와, 누군가 처음 읽을 때 필요한 순서가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지금까지는 자기 작업에 그 순서를 정해 준 적이 없었다. 늘 다른 원고가 먼저였다.
버스가 급하게 멈추자 종이봉투 안에서 컵이 가볍게 부딪쳤다. 서윤은 봉투를 무릎 사이에 세웠다. 조금 전 컵을 산 가게에서 상인이 물었던 말이 떠올랐다.
선물할 거면 싸 드리고.
그녀는 자신이 쓸 거라고 대답했다. 몇 시간 전에는 그 말을 어렵지 않게 했었다.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서윤은 가져온 반찬을 냉장고에 넣고, 어머니에게 잘 도착했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미숙은 생선부터 데워 주라는 답을 보냈다.
서윤은 답장을 보내지 않은 채 작업실로 갔다.
먼저 컵을 씻었다. 파란 선 아래에 물을 조금 따르니 바닥까지 밝게 보였다. 그것을 책상 모서리에 놓고, 쌓아 둔 인쇄물을 옆으로 밀었다.
컴퓨터를 켜자 어젯밤 작업하던 도현의 원고가 열렸다. 서윤은 새로 손댈 부분이 있는지 먼저 확인하려다가 창을 내렸다. 아직 수정 요청이 온 것은 아니었다.
흩어진 파일들을 한곳으로 복사했다. 원본은 그대로 두고, 읽을 순서를 잡아 볼 사본만 모았다. 서로 다른 해에 그린 인물들이 작은 미리보기 안에서 나란히 놓였다. 같은 컵을 그렸는데도 손잡이 방향이 달랐고, 어떤 날은 창밖의 나무를 끝까지 그리지 않았다.
서윤은 파일 하나를 열어 여자의 손을 조금 고쳤다. 누구에게서도 요청받지 않은 수정이었다.
물을 틀려던 손을 수도꼭지 바로 앞에서 멈추게 했다. 다음 칸에는 창틀에 앉은 작은 새를 넣었다. 여자는 컵을 내려놓고 새가 날아갈 때까지 기다렸다. 그렇게 잠깐 미뤄 둔 설거지가 마지막 장면이었다.
새를 보는 얼굴까지 그렸다가 지웠다. 물을 틀지 않은 손과 젖은 컵만으로도 충분했다. 화면을 줄여 읽어 보니 아침에 어머니에게 보여 주고 싶었던 장면이 조금 더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휴대폰에 도현의 메시지가 떴다.
[오늘 가져온 반찬 뭐 있어?]
서윤은 두부조림과 생선이라고 답했다. 잠깐 기다렸지만 이번에도 그림 이야기는 오지 않았다.
새 폴더의 이름 칸에 커서가 깜빡였다. 처음에는 ‘개인’이라고 적었다. 그 글자를 지우고 다시 썼다.
윤슬.
저장한 이름 아래로 그녀가 그린 그림들이 모였다. 서윤은 휴대폰을 뒤집어 놓고 첫 번째 파일을 열었다.
이 그림은 자기 이름으로 완성해 보여 주고 싶었다.
5월 7일 오후, 서윤은 입원 가방을 옆에 세워 놓고 다시 진료를 기다렸다. 아침에 예정했던 절차는 바뀌어 있었다. 몸 상태를 확인받고 필요한 처치를 받은 뒤 다음 진료를 잡을 때까지, 가방은 의자 옆에 그대로 있었다.직원이 일정을 확인하며 물었다.“다음에는 이 시간에 오실 수 있으세요?”“네. 올 수 있어요.”서윤은 수첩에 날짜를 적고 새 예약을 확인했다. 다음 날 다시 병원에 왔고, 이어진 조정을 거쳐 5월 12일 입원했다.짐을 풀자 가방 속에서 구겨진 안내지가 나왔다. 지난주에 쓰려던 종이였다. 그녀는 그것을 버리지 않고 다른 서류 밑에 넣었다.입원 중의 하루는 검사와 진료 시간에 맞춰 흘렀다. 그사이에는 병상에 누워 쉬었다.도현이 파일 위치를 물으면 폴더 이름만 답했다. 집에 언제 오느냐는 질문에는 퇴원 날짜를 아직 모른다고 했다. 병원에서 컴퓨터를 쓸 수 있는지 묻는 말은 답하지 않은 채 남겨 두었다.의사는 병이 위 바깥까지 퍼져 있다고 설명했다. 수술로 모두 제거하기 어려운 상태였고, 약물치료를 포함해 가능한 방법을 따져야 했다. 서윤은 설명을 들으며 수첩을 펼쳤다가 펜을 내려놓았다. 이번에는 다 적으려고 하지 않고 먼저 들었다.“그럼 수술은 안 하는 거예요?”“지금 확인한 범위에서는 수술로 없애는 치료를 우선하기 어렵습니다. 병의 진행을 억제하는 치료를 검토하면서, 식사와 통증 문제도 같이 조절해야 해요.”“아무것도 못 하는 건 아니죠?”의사는 현재 할 수 있는 일과 몸 상태에 따라 조정해야 하는 일을 나누어 말했다. 서윤은 치료를 받고 싶다고 답했다. 가능하다면 언제 시작할 수 있는지도 물었다.입원 중에는 먹을 수 있는 양과 불편한 증상을 알리는 일도 치료의 일부였다. 덜 아프다고 대답하면 빨리 집에 갈 수 있을 것 같던 습관이 남아 있어, 간호사가 물을 때마다 서윤은 잠깐 생각해야 했다. 어느 때 더 아팠는지, 먹은 뒤 무엇이 불편했는지 말하고 나면 시간이 좀 걸렸다. 그래도 그 말을 적는 사람이 있었다.퇴원 수납을
5월 7일 아침, 여행 가방은 현관에 나와 있었다. 서윤은 병원에서 가져오라고 한 서류를 확인하고 휴대전화에 택시 호출 화면을 띄웠다. 아직 호출 버튼은 누르지 않았다. 도현이 뒤에서 종이 한 장을 내밀었기 때문이었다.“이거 한 줄만 봐.”서윤은 시간을 확인했다. 8시 55분이었다.“지금 나가야 해.”“병원 10시잖아. 읽는 데 1분도 안 걸려.”그가 가져온 것은 축하 영상의 대본이었다. 지난주에 자료를 보낸 뒤 추가 촬영용으로 다시 고쳐 달라는 요청이 왔다고 했다. 서윤이 쓰지 않은 문장이 중간에 들어가 있었다. 오래된 원고에서 인물의 대사를 떼어 작가 자신의 경험처럼 붙인 부분이었다.“이건 인물이 한 말이잖아.”“그래서 좀 이상하다고. 내가 한 말처럼 바꿔 줄 수 없어?”“빼면 돼.”“그걸 빼면 앞에 영상이랑 안 맞는다니까.”도현은 종이를 돌려 그녀 쪽으로 더 밀었다. 서윤은 휴대전화를 식탁에 놓고 잘라낼 문장에 표시했다. 출발 시각을 늦추지 않고 할 수 있는 마지막 일이라고 생각했다. 선을 긋자 도현은 그 뒤에 이어질 말을 물었다.“그건 당신이 해. 생각해 둔 게 있잖아.”“지금 이 상태로 넘기라는 거야?”서윤은 펜을 내려놓았다. 도현은 촬영 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어 30분 안에 보내겠다고 말했다. 그녀에게 가능한지 묻지 않은 약속이었다. 통화가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서윤이 가방을 들자 그가 작은 방을 가리켰다.“원고도 같이 열어 봐야 해. 장면 순서가 달라져서.”“오늘 못 한다고 했어.”“입원해도 바로 뭘 하는 건 아니잖아. 접수만 조금 늦으면 되는 거 아니야?”“당신이 정할 일이 아니야.”목소리가 커지자 도현은 거실 창문 쪽을 보았다. 밖에서 들을 사람을 의식하는 그 동작 때문에, 서윤은 자신도 모르게 낮추려던 목소리를 그대로 두었다.“내가 병원에 가야 한다고 몇 번 말했어. 날짜도 2번 바꿨어.”“그러니까 오늘 끝내고 가라고.”도현은 같은 설명을 반복하며 촬영 담당자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통화가 끝나면 나갈 수
서윤은 돌려받은 봉투를 책상 서랍 안쪽에 넣었다. 은수가 보관할 원고 목록에는 그 봉투가 없었다. 목록을 접어 파일철에 끼운 뒤에도 책상 위에 남은 종이가 많아, 당장 필요한 병원 안내부터 가방에 챙겼다.4월 16일 진료에는 예약한 시각보다 조금 일찍 도착했다. 앞선 검사 자료가 제대로 전달되었는지 확인하고 앉아 있으니, 간호사가 최근 식사량을 물었다. 서윤은 잘 먹고 있다고 답하려다가 전날 먹은 것을 차례로 말했다. 말하고 보니 스스로 생각했던 것보다 적었다.진료실에서는 검사 결과와 몸 상태를 함께 보았다. 의사는 병의 범위를 더 확인하고 치료 계획을 정하기 위해 입원 평가를 권했다. 먹는 양이 줄어든 문제도 같이 살펴야 했다.“며칠 정도 생각하면 될까요?”“검사와 상태에 따라 달라질 수 있어요. 우선 입원해서 필요한 평가를 진행하고 계획을 설명드리겠습니다.”서윤은 달력을 열었다. 의사가 기다려 주는 동안 남편의 일정이 화면에 나타나, 자기 예약을 적은 작은 수첩을 따로 꺼냈다. 4월 23일 옆에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그날로 해 주세요.”그녀는 날짜를 받아 적었다. 병원에서는 그 사이에도 증상이 심해지면 예정일까지 기다리지 말고 연락하라고 했다.진료실을 나오자 다음 주 원고가 먼저 떠올랐다. 서윤은 메신저를 열려던 손을 멈추고 입원 준비물 안내부터 읽었다. 빠진 물건을 적어 둔 뒤 약국에 들렀다가 집으로 돌아왔다.도현에게 날짜를 말한 것은 그날 저녁이었다. 그는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얼마나 걸리느냐고 물었다.“아직 몰라. 검사도 더 해야 하고, 치료 계획을 잡아야 한대.”“그럼 검사하는 데 시간을 얼마나 쓰는지도 모르는 거야?”“해 봐야 정할 수 있대.”서윤이 가방에서 안내를 꺼내 식탁에 놓았다. 도현은 종이를 읽는 대신 메신저에 올라온 수정 요청을 확인했다. 다음 주까지 넘겨야 하는 원고에 문제가 생겼다고 했다. 인물이 싸우는 이유를 이해하기 어렵다는 의견이었다.“내가 그 부분은 건드려 봤거든. 그런데 앞뒤가 또
원고를 가방에 넣으려니 가장 오래된 스케치북이 들어가지 않았다. 서윤은 모서리를 억지로 눌러 보다가 가방을 바꾸었다. 남편의 행사 자료를 넣던 큰 보조 가방이었다. 안쪽 주머니에서 지난 행사장의 안내 종이가 나와, 그것만 빼서 책상에 놓았다.4월 13일 오전, 바닥에 펼친 스케치북들은 크기부터 제각각이었다. 문구점에서 산 얇은 연습장 옆에는 표지가 떨어져 고무줄로 묶어 둔 것도 있었다. 종이마다 적힌 날짜는 몇 년씩 떨어져 있었고, 뒤쪽이 통째로 빈 공책도 눈에 띄었다. 남편의 원고가 급해질 때면 그리던 장을 덮어 두곤 했다.서윤은 완성한 그림에 붙여 둔 파란 표시를 확인했다. 말풍선과 동작만 잡아 둔 콘티에는 회색 표시를 붙였다. 선을 정리하지 못한 인물들은 얼굴이 동그라미뿐인 경우도 있었다. 어느 해의 것은 연필이 너무 흐려서, 나중에 촬영할 때 빛을 따로 비추어야 할 것 같았다.한 장을 넘기다가 여자가 혼자 빵을 먹는 그림에서 멈췄다. 봉투를 열기 전에는 맞은편에 의자가 하나 더 있었다. 먹기 시작한 뒤의 칸에는 여자가 벗어 놓은 외투 때문에 그 의자가 반쯤 가려졌다.서윤은 옷깃을 고쳐 그리려다 펜을 내려놓았다. 오늘은 고치는 날보다 무엇을 남길지 정하는 날에 가까웠다.몸이 허락하는 만큼만 하자고 생각하며 원고를 다시 묶었다. 다음 진료일이 적힌 종이는 가방 바깥 주머니에 넣었다. 계약을 한 다음에도, 원고를 고르는 아침에도 그 날짜는 필요했다.은수는 전날과 같은 상담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번에는 노트북 옆에 빈 파일철과 촬영용 받침대를 준비해 놓았다. 서윤이 가방을 내려놓자 은수가 손을 뻗다가 먼저 물었다.“꺼내도 될까요?”서윤은 스케치북부터 꺼내 달라고 했다. 원고의 크기가 달라 책상 위에 한꺼번에 펴 놓을 수는 없었다. 은수는 몇 권만 펼치고 나머지는 의자 위에 세워 놓았다. 두 사람이 앉은 책상 사이로 연필 자국과 지운 흔적들이 이어졌다.“이쪽은 완성본이고요. 여기부터는 콘티예요.”서윤은 표시 색을 설명했다. 은수는 회색 표
월요일 오전, 서윤은 진료 대기실에서 예약 문자를 다시 확인했다. 산부인과의 후속 진료를 마치면 같은 건물의 다른 층으로 가야 했다. 지난주에 잡아 둔 소화기 진료였다.의사는 유산 이후의 상태를 확인하고 이후에 살펴야 할 증상을 설명했다. 서윤은 안내를 듣고 나온 뒤 다음 진료과에 최근의 일을 알렸다. 임신 사실과 유산한 날짜를 말하는 동안, 접수 직원은 필요한 항목을 조용히 입력했다. 그 말을 끝까지 들은 사람에게는 별도의 변명이 필요하지 않았다.소화기 진료실에서 서윤은 몇 달 전부터 속이 답답했다고 말했다. 처음에는 끼니가 늦어져서라고 생각했고, 다음에는 임신 때문인 줄 알았다고 했다. 의사는 어느 쪽으로도 바로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 식사량과 통증, 최근의 변화에 관해 차례로 물었다.“유산 전에도 먹는 양이 많이 줄었어요?”“네. 배가 고픈데 먹기 시작하면 금방 못 먹겠어요.”최근 검사 결과를 확인한 의사는 위내시경 검사를 권했다. 서윤은 검사 방법과 준비 사항을 듣고 가능한 날짜를 골랐다. 다음 날 아침이었다. 그 시간을 선택하면서도 남편의 작업 일정을 먼저 열어 보지는 않았다.4월 8일의 검사가 끝난 뒤, 그녀는 옷을 갈아입고 설명을 기다렸다. 의사는 병변이 있어 조직을 채취했다고 말했다. 검사 결과를 확인해야 한다는 말과 함께 추가 촬영 일정을 잡았다. 서윤은 그가 화면의 어느 곳을 가리키는지 보았지만 색과 형태만으로는 알아볼 수 없었다.“안 좋은 건가요?”“확인이 필요한 소견입니다. 조직검사와 영상검사 결과를 같이 보고 설명드릴게요.”집에 돌아와 내시경 사진을 펼쳤다가 다시 덮었다. 인터넷에서 비슷한 이미지를 찾아 나란히 놓아도 무엇이 같은지 알 수 없었다. 한 사람은 별일 아니었다고 했고, 다른 사람은 전혀 다른 결과를 적었다. 서윤은 검색 창을 닫고 병원에서 받은 다음 예약을 확인했다.도현은 그녀가 책상 앞에 오래 있지 않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날 저녁에도 컴퓨터가 꺼져 있는 작은 방을 들여다보았다.“검사 아직도 안 끝났
도현은 현관 거울 앞에서 셔츠 소매를 접고 있었다. 서윤이 부엌에서 물을 마시는 동안 그는 재킷을 걸쳤다가 벗었다. 문채령의 행사 사진에 어떻게 나올지 휴대전화로 확인하느라, 신발을 신고도 한참 나가지 않았다.“오늘 저녁은 늦어. 뒤풀이까지 가야 할 것 같아.”서윤은 벽 달력을 보았다. 4월 5일의 날짜 위에 남편이 행사 이름을 크게 적어 놓았다. 그 아래에 자기 약속을 덧쓰려던 흔적은 없었다. 병원 일정은 이제 작은 방에 둔 종이에만 적었다.“나 오늘은 쉬어야겠어.”“알아. 어제 보낸 부분은 봤어.”“원고 말고, 몸이 안 좋아.”도현은 손에 든 휴대전화에서 시선을 떼었다. 그녀의 앞에 놓인 물컵을 보더니 냉장고 쪽을 한번 돌아보았다.“먹을 게 없으면 시켜 먹어. 굳이 나 기다리지 말고.”현관문이 닫힌 뒤 서윤은 물을 조금 더 마셨다. 아랫배의 통증은 아침부터 있었다. 며칠 전 진료 이후 출혈이 줄어드는 듯해 안심했던 것이 전날 밤이었다. 지금은 화장실에 다녀올 때마다 상태를 확인해야 했다.병원에서 받은 안내지를 식탁에 펴 놓고 전화부터 했다. 토요일 진료 시간 안이었다. 증상을 설명하는 도중 통증이 심해져, 서윤은 잠시 말을 멈췄다. 수화기 너머의 간호사가 이름을 다시 불렀다.“듣고 있어요. 그런데 아까보다…….”그녀는 몸을 일으키다가 식탁에 다시 기대었다. 출혈이 갑자기 늘었고 어지러웠다. 간호사는 혼자 움직이지 말고 즉시 응급 도움을 받으라고 했다. 서윤은 통화를 마치자마자 119를 눌렀다.주소를 말하는 동안 휴대전화가 미끄러지지 않게 식탁에 올려놓았다. 현관문을 열어 두라는 안내를 듣고 천천히 걸어가 잠금을 풀었다. 가방은 가까운 의자에 있었다. 그녀는 병원 봉투와 신분증을 챙겨 넣은 뒤, 더 움직이지 말라는 말에 따라 현관 근처에 앉았다.도현에게 먼저 전화를 걸지 않았다. 누군가의 허락을 받거나 도착을 기다릴 시간이 아니었다. 현관문 밖에서 사람의 목소리가 들리자 서윤은 안쪽에 있다고 답했다.병원에서는 비슷한 질문에 몇 번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