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이거 하고 가면 될까?”
어머니 집 현관 거울 앞에서 미숙이 목걸이를 들어 보였다. 서윤은 신발을 신다가 고개를 들었다. 어머니가 꺼내 온 것은 작은 진주가 달린 목걸이였다.
“응. 잘 어울려.”
“너는 왜 그렇게 수수하게 입었니. 사진도 찍을 텐데.”
“내가 무대에 올라가는 건 아니잖아.”
서윤은 코트 소매를 조금 내려 손목 보호대를 가렸다. 아침에 행사장에서 연락이 와서 이미지 하나를 다시 보냈다. 원래 잘라 놓았던 그림의 윗부분이 화면에서 또 빠져 있었다. 수건이 보여야 한다고 설명하는 동안 손목이 시큰해 보호대를 감아 둔 참이었다.
미숙은 도현이 몇 시에 오는지 물었다. 도현은 먼저 행사장에 갔다. 대기실에서 준비할 것이 있다고 했고, 서윤에게는 어머니를 모셔 오라는 메시지를 남겼다.
“우리도 좀 일찍 가자. 괜히 늦어서 신경 쓰이게 하지 말고.”
행사는 오후 2시였다.
서점 안쪽 행사장에는 『물의 가장자리』 단행본 개정판이 쌓여 있었다. 진열대 옆으로 도현의 이름이 인쇄된 긴 배너가 서 있었다. 미숙은 입구에 도착하자마자 그 앞에 섰다.
“사진 하나 찍어 줘.”
서윤은 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어머니가 배너의 글자를 가리지 않으려고 옆으로 비켜섰다. 화면에는 미숙의 얼굴과 도현의 이름이 함께 들어왔다.
“한 장 더. 방금 눈 감은 것 같아.”
서윤은 2장을 더 찍고 보여 주었다. 미숙은 만족스러운 사진을 고르느라 안내 직원의 인사를 듣지 못했다. 서윤이 대신 이름을 말하자 직원이 좌석표를 확인했다.
“6열 통로 쪽 2자리 준비해 두었습니다.”
의자마다 작은 종이가 붙어 있었다. 서윤의 자리에는 이름 대신 가족석이라고 적혀 있었다. 미숙은 자리에 앉자마자 무대가 잘 보인다며 좋아했다.
서윤도 무대 뒤 화면을 보았다. 조금 전 다시 보낸 이미지가 제대로 들어가 있었다. 문 옆에 걸린 젖은 수건, 그 아래 놓인 여자의 장화까지 다 보였다. 도현이 인터뷰 때 좋아하는 장면으로 자주 꼽던 그림이었다.
“이거 유명한 거지?”
미숙이 물었다.
“응.”
“우리 사위는 이런 걸 어떻게 생각할까.”
서윤은 코트 단추를 풀었다. 어머니에게 그림을 그리던 때의 이야기를 할 수도 있었다. 장화가 너무 새것처럼 보여서 밑창에 묻은 진흙을 다시 그렸고, 수건은 집에서 쓰던 걸 찍어 참고했다고.
그러나 무대 앞에서 마이크를 확인하는 소리가 나서, 서윤은 하려던 말을 미뤘다.
대기실 문이 열리고 도현이 나왔다. 사람들의 시선이 한꺼번에 그쪽으로 움직였다. 그가 객석을 둘러보다 미숙과 서윤을 발견하고 웃으며 손을 들었다.
미숙은 재빨리 손을 흔들었다.
“저렇게 바쁜데도 다 보네.”
서윤은 도현이 다가올 줄 알고 가방을 무릎에서 내렸다. 그는 무대 옆 직원과 짧게 말을 나누더니 곧바로 단상에 올랐다. 가방을 내려 둔 서윤의 발치로 객석 안내 종이가 밀려왔다.
사회자가 작가를 소개하자 박수가 시작됐다.
도현은 의자에 앉기 전 허리를 숙였다. 조명이 닿자 그의 셔츠 소매가 밝게 빛났다. 서윤이 세탁소에서 찾아와 옷장 앞에 걸어 둔 셔츠였다.
처음에는 작품을 준비한 과정에 대한 질문이었다. 도현은 자료를 많이 보고 사람들을 관찰한다고 대답했다. 이어서 무대 뒤에 띄운 장면을 가리켰다.
“저는 대사를 먼저 쓰기보다 행동을 생각하는 편이에요. 이 장면에서도 여자가 무슨 말을 할까보다 신발을 어떻게 벗을까를 먼저 봤죠.”
서윤은 무릎에 올린 손을 폈다. 도현이 그녀에게서 들은 설명이었다. 그날 밤에도 그는 대사를 더 넣는 게 어떻겠느냐고 했고, 서윤은 신발만 보면 안다고 말했다.
장화를 나란히 벗는 사람과, 대충 벗어 던지고 들어가는 사람은 같은 말을 해도 다른 기분으로 읽힌다고.
도현은 손동작까지 곁들이며 그 이야기를 이어 갔다. 서윤은 저도 모르게 끝까지 듣고 있었다. 자신의 설명이었는데, 저렇게 말하니 훨씬 매끄러웠다.
“그럼 저 수건도 의도가 있는 건가요?”
사회자가 물었다.
“그렇죠. 앞에서 비에 젖었다고 했으니까요. 들어오자마자 저렇게 걸어 놓은 걸 보면, 혼자 사는 공간에 익숙한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어요.”
서윤은 수건을 보았다. 그 수건은 혼자 사는 사람이 편해서 걸어 둔 것이 아니었다. 누군가 돌아와 쓰도록 마른 면을 앞으로 접어 둔 물건이었다. 앞 회차의 대사까지 읽으면 알 수 있었다.
사회자가 고개를 끄덕였고 객석에서도 작은 감탄이 나왔다. 서윤은 손을 들지 않았다. 설명 하나를 바로잡으려고 자리에서 일어날 수는 없었다.
라이브 드로잉 순서가 되자 도현의 표정이 편해졌다. 그는 태블릿에 대표작 남자 주인공의 얼굴을 그렸다. 선을 여러 번 겹치지 않고 눈매와 턱선을 한 번에 잡았다. 서윤도 그가 이런 얼굴을 그릴 때는 빠르다는 것을 인정했다.
옆자리의 미숙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눈 한번 그리는데 사람이 되네.”
서윤은 이번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건 도현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가 직접 만든 데뷔 단편에서도 눈매를 좋아했었다. 그때 마음에 들어 했던 선이 잠깐 보였다가, 서윤이 오래 그려 온 인물의 얼굴 속으로 들어갔다.
한 독자가 손을 들었다.
“저는 방금 보여 주신 장화 장면이 제일 좋았어요. 울거나 화내는 표정은 없는데 이상하게 속상하더라고요.”
마이크를 쥔 독자가 말을 고르다가 웃었다.
“저도 누가 나가고 나면 신발부터 정리하거든요. 기다리는 티는 안 내고 싶어서요.”
서윤은 그쪽을 보았다. 몇 줄 앞의 여자였다. 책에는 얇은 표시 종이가 여러 개 붙어 있었다.
기다리는 티.
서윤은 자기도 모르게 펜을 찾듯 손가락을 움직였다. 자기가 그릴 때 생각했던 것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 다른 말로 알아봐 주었다.
도현은 좋은 감상이라고 답했다. 그림은 독자가 완성해 주는 것 같다는 말을 덧붙이자 사회자가 웃으며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 서윤은 앞줄의 여자가 책을 덮을 때까지 그쪽을 보았다.
이어진 질문은 일과 생활을 어떻게 나누느냐는 것이었다.
“오늘 사모님도 오셨다고 들었습니다. 가족분들이 작가님의 첫 독자이기도 한가요?”
사회자가 객석을 둘러보았다. 서윤은 반사적으로 코트 소매를 더 내렸다. 미숙이 딸의 등을 가볍게 밀며 웃었다.
“저기요. 여기.”
몇 사람이 돌아보았다.
도현은 마이크를 든 채 서윤 쪽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집에서 이런저런 의견은 많이 줍니다.”
서윤은 그 말을 듣고 도현을 보았다. 집에서는 잘하지 않던 표현이었다. 의견을 준다는 말이어도 괜찮았다. 다음 문장이 조금 더 이어질 것 같았다.
“같은 분야에서 작업하시는 건가요?”
“아뇨. 우리 아내는 그림은 못 그려요.”
가벼운 웃음이 일었다.
도현도 웃으며 마이크를 조금 내렸다. 말을 보태는 목소리까지 가벼워서, 객석에서는 농담이 이어지는 줄 알 만했다.
“대신 내조를 잘하죠. 제가 밖에선 멀쩡해 보여도 집에선 손이 많이 가거든요. 아내 덕분에 그림만 그릴 수 있습니다.”
사회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박수를 청했다. 작가를 뒤에서 받쳐 주는 가족에게도 감사하다는 말이 객석으로 내려왔다.
서윤은 도현을 보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자기 그림을 알아본 독자가 앉아 있던 방향에서도 박수 소리가 들렸다. 미숙은 흐뭇하게 웃으며 딸의 팔을 두드렸다.
“너한테 고맙다잖아.”
서윤은 손을 들어 박수를 쳤다. 모두가 이쪽을 보고 있었다. 지금 웃지 않으면 고맙다는 말을 듣고도 기분 나빠하는 아내가 될 것 같았다.
손바닥이 몇 번 맞닿자 보호대가 소매 밖으로 밀려 나왔다. 서윤은 팔을 내려 다시 가렸다.
행사는 예정된 시간을 조금 넘겨 끝났다. 도현은 사인 테이블로 옮겨 갔고 사람들은 책을 들고 줄을 섰다. 미숙도 친구에게 줄 책 2권을 챙기며 서윤에게 순서를 물었다.
“지금 가면 되나?”
“다른 분들 먼저 받고.”
“우린 잠깐이면 되는데.”
서윤은 책을 받아 가방에 넣었다. 도현이 가까이 오면 같이 부탁하겠다고 하고, 어머니를 잠시 카페 쪽으로 보냈다. 사람들 사이에 서 있기가 어려웠다. 그렇다고 아무 말 없이 집에 가고 싶지는 않았다.
사인이 잠깐 끊겼을 때 도현이 물을 마시러 일어났다. 서윤은 테이블 옆으로 다가갔다.
“아까 왜 그렇게 말했어?”
그가 생수병 뚜껑을 열며 물었다.
“뭘?”
“내가 그림 못 그린다고.”
“아, 그거? 그냥 웃자고 한 얘기지.”
“난 안 웃겼어.”
도현은 주변을 한번 보았다. 직원이 책을 정리하고 있었고 가까운 곳에 독자 몇 명이 남아 있었다. 그가 서윤 쪽으로 몸을 조금 기울였다.
“여기서 꼭 이래야 해?”
“그러면 언제 얘기해.”
“내가 당신한테 고맙다고 했잖아. 다들 좋게 들었는데 굳이 그 말 하나만 잡으면 나도 무슨 말을 해.”
서윤은 가방에서 책을 꺼내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비닐 모서리가 손가락에 걸렸다.
“그림 못 그린다는 말은 안 해도 됐잖아.”
도현은 병뚜껑을 닫았다. 대답하려는 듯했다가 직원이 다음 독자를 안내하자 다시 자리에 앉았다.
“집에 가서 얘기하자. 오늘은 좀 도와줘.”
미숙에게 받은 책에는 나중에 사인해 주겠다고 했다. 서윤은 책을 도로 가방에 넣고 카페로 갔다. 어머니는 이미 행사 사진을 여러 사람에게 보내고 있었다.
“우리 사위 말 잘하더라. 원래 저렇게 재치가 있었니?”
서윤은 앉지 않고 어머니의 코트를 들었다.
“엄마, 이제 가자.”
집에 돌아와서도 손목 보호대를 풀지 못했다. 서윤은 부엌 불만 켜고 식탁에 가방을 놓았다. 책 2권이 기울어져 나와 그대로 세워 놓았다.
전화를 건 것은 미숙이었다.
“책 두고 온 건 아니지?”
“내가 갖고 있어. 도현 씨 오면 얘기할게.”
“너 오늘 무슨 일 있니? 끝나고 나서 얼굴이 영 안 좋더라.”
서윤은 식탁 모서리를 만지다가 손을 멈췄다. 어머니가 알아봤다는 사실에 목소리가 조금 풀렸다.
“엄마. 아까 도현 씨가 나 그림 못 그린다고 했잖아.”
“그게 왜?”
“그림 얘기를 하다가 그렇게 말하니까 좀…….”
“그냥 웃자고 한 소리겠지. 그걸 마음에 담아 두니.”
서윤은 책의 비닐을 벗기지 않았다. 어머니가 말을 이었다.
“사람들 앞에서 네 덕분이라고도 했잖아. 남자들이 그런 얘기 잘하는 줄 알아?”
“고맙다는 말 말고, 나는…….”
“서윤아, 네가 지금 얼마나 편하게 사는지 생각을 해. 잘나가는 남편 만나서 집 걱정, 먹고살 걱정 안 하잖니. 사람 하나하나 말하는 거 다 따지면 누가 같이 살겠어.”
서윤은 코트 소매를 걷었다. 보호대 아래로 눌린 자국이 길게 남아 있었다. 손목을 조금 움직이자 아침에 고쳤던 그림이 떠올랐다. 수건을 보이게 해 달라고 다시 보낸 파일이었다.
미숙은 잠시 딸의 대답을 기다렸다.
서윤이 말을 찾지 못하자 어머니가 먼저 통화를 마무리했다.
“좋은 사위 만났으니 고마운 줄 알고, 네가 좀 참고 살아.”
파란 표시가 붙은 원고를 세다가 서윤은 17번째에서 손을 멈췄다. 앞에서 센 묶음을 다시 세고 있었다. 종이를 전부 바닥에 펼치면 한눈에 보이겠지만, 몸을 숙였다 일어나는 일을 몇 번이나 할 수 있을지 몰랐다.그녀는 책상 위에 5편씩만 올려놓기로 했다. 순서를 정한 묶음은 왼쪽에, 아직 확인하지 않은 것은 오른쪽에 두었다. 원고를 정리하는 방식까지 예전과 같을 필요는 없었다.6월 29일이었다. 창밖에서는 에어컨 실외기 소리가 계속 들렸다. 서윤은 바람이 바로 닿지 않도록 의자 방향을 바꾸고, 은수에게서 받은 촬영본을 켰다. 종이에 남은 장면과 화면에 뜬 장면을 나란히 확인할 수 있었다.6월에도 진료는 이어졌다. 치료를 받은 뒤 몸 상태가 나빠져 다음 투약을 조정한 때가 있었고, 먹기 어렵거나 통증이 심해져 예정된 외래보다 먼저 연락한 날도 있었다. 서윤은 괜찮은 날에 할 수 있는 일을 몰아서 끝내려고 했다가, 다음 날 침대에서 거의 일어나지 못한 뒤부터 시간을 짧게 나누었다.오늘은 오전에 원고의 앞부분만 볼 생각이었다. 은수와 만나기로 한 오후까지 모두 끝내야 한다는 말은 누구에게도 하지 않았다. 일어나서 쉬는 동안 작업 목록에 아무 표시도 늘지 않아도 괜찮았다.첫 번째 묶음을 펼치자 비가 그친 정류장이 나왔다. 여자가 젖은 벤치의 한 자리를 닦는 첫 칸이었다. 서윤은 그 그림을 앞에 두고 한동안 다른 페이지를 넘기지 않았다. 익숙한 장면의 시작과 자기 이름이 같은 목록에 적혀 있었다.그 뒤에 들어갈 원고들은 한 번에 정하지 않았다. 컵을 씻다가 창문 쪽을 보는 여자의 이야기는 조금 앞에, 내릴 곳을 지나쳐 꽃집에 들어가는 이야기는 그보다 뒤에 두었다. 혼자 빵을 먹는 여자와 옷을 고르는 여자가 연달아 나오자, 2편 사이에
5월 7일 오후, 서윤은 입원 가방을 옆에 세워 놓고 다시 진료를 기다렸다. 아침에 예정했던 절차는 바뀌어 있었다. 몸 상태를 확인받고 필요한 처치를 받은 뒤 다음 진료를 잡을 때까지, 가방은 의자 옆에 그대로 있었다.직원이 일정을 확인하며 물었다.“다음에는 이 시간에 오실 수 있으세요?”“네. 올 수 있어요.”서윤은 수첩에 날짜를 적고 새 예약을 확인했다. 다음 날 다시 병원에 왔고, 이어진 조정을 거쳐 5월 12일 입원했다.짐을 풀자 가방 속에서 구겨진 안내지가 나왔다. 지난주에 쓰려던 종이였다. 그녀는 그것을 버리지 않고 다른 서류 밑에 넣었다.입원 중의 하루는 검사와 진료 시간에 맞춰 흘렀다. 그사이에는 병상에 누워 쉬었다.도현이 파일 위치를 물으면 폴더 이름만 답했다. 집에 언제 오느냐는 질문에는 퇴원 날짜를 아직 모른다고 했다. 병원에서 컴퓨터를 쓸 수 있는지 묻는 말은 답하지 않은 채 남겨 두었다.의사는 병이 위 바깥까지 퍼져 있다고 설명했다. 수술로 모두 제거하기 어려운 상태였고, 약물치료를 포함해 가능한 방법을 따져야 했다. 서윤은 설명을 들으며 수첩을 펼쳤다가 펜을 내려놓았다. 이번에는 다 적으려고 하지 않고 먼저 들었다.“그럼 수술은 안 하는 거예요?”“지금 확인한 범위에서는 수술로 없애는 치료를 우선하기 어렵습니다. 병의 진행을 억제하는 치료를 검토하면서, 식사와 통증 문제도 같이 조절해야 해요.”“아무것도 못 하는 건 아니죠?”의사는 현재 할 수 있는 일과 몸 상태에 따라 조정해야 하는 일을 나누어 말했다. 서윤은 치료를 받고 싶다고 답했다. 가능하다면 언제 시작할 수 있는지도 물었다.입원 중에는 먹을 수 있는 양과 불편한 증상을 알리는 일도 치료의 일부였다. 덜 아프다고 대답하면 빨리 집에 갈 수 있을 것 같던 습관이 남아 있어, 간호사가 물을 때마다 서윤은 잠깐 생각해야 했다. 어느 때 더 아팠는지, 먹은 뒤 무엇이 불편했는지 말하고 나면 시간이 좀 걸렸다. 그래도 그 말을 적는 사람이 있었다.퇴원 수납을
5월 7일 아침, 여행 가방은 현관에 나와 있었다. 서윤은 병원에서 가져오라고 한 서류를 확인하고 휴대전화에 택시 호출 화면을 띄웠다. 아직 호출 버튼은 누르지 않았다. 도현이 뒤에서 종이 한 장을 내밀었기 때문이었다.“이거 한 줄만 봐.”서윤은 시간을 확인했다. 8시 55분이었다.“지금 나가야 해.”“병원 10시잖아. 읽는 데 1분도 안 걸려.”그가 가져온 것은 축하 영상의 대본이었다. 지난주에 자료를 보낸 뒤 추가 촬영용으로 다시 고쳐 달라는 요청이 왔다고 했다. 서윤이 쓰지 않은 문장이 중간에 들어가 있었다. 오래된 원고에서 인물의 대사를 떼어 작가 자신의 경험처럼 붙인 부분이었다.“이건 인물이 한 말이잖아.”“그래서 좀 이상하다고. 내가 한 말처럼 바꿔 줄 수 없어?”“빼면 돼.”“그걸 빼면 앞에 영상이랑 안 맞는다니까.”도현은 종이를 돌려 그녀 쪽으로 더 밀었다. 서윤은 휴대전화를 식탁에 놓고 잘라낼 문장에 표시했다. 출발 시각을 늦추지 않고 할 수 있는 마지막 일이라고 생각했다. 선을 긋자 도현은 그 뒤에 이어질 말을 물었다.“그건 당신이 해. 생각해 둔 게 있잖아.”“지금 이 상태로 넘기라는 거야?”서윤은 펜을 내려놓았다. 도현은 촬영 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어 30분 안에 보내겠다고 말했다. 그녀에게 가능한지 묻지 않은 약속이었다. 통화가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서윤이 가방을 들자 그가 작은 방을 가리켰다.“원고도 같이 열어 봐야 해. 장면 순서가 달라져서.”“오늘 못 한다고 했어.”“입원해도 바로 뭘 하는 건 아니잖아. 접수만 조금 늦으면 되는 거 아니야?”“당신이 정할 일이 아니야.”목소리가 커지자 도현은 거실 창문 쪽을 보았다. 밖에서 들을 사람을 의식하는 그 동작 때문에, 서윤은 자신도 모르게 낮추려던 목소리를 그대로 두었다.“내가 병원에 가야 한다고 몇 번 말했어. 날짜도 2번 바꿨어.”“그러니까 오늘 끝내고 가라고.”도현은 같은 설명을 반복하며 촬영 담당자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통화가 끝나면 나갈 수
서윤은 돌려받은 봉투를 책상 서랍 안쪽에 넣었다. 은수가 보관할 원고 목록에는 그 봉투가 없었다. 목록을 접어 파일철에 끼운 뒤에도 책상 위에 남은 종이가 많아, 당장 필요한 병원 안내부터 가방에 챙겼다.4월 16일 진료에는 예약한 시각보다 조금 일찍 도착했다. 앞선 검사 자료가 제대로 전달되었는지 확인하고 앉아 있으니, 간호사가 최근 식사량을 물었다. 서윤은 잘 먹고 있다고 답하려다가 전날 먹은 것을 차례로 말했다. 말하고 보니 스스로 생각했던 것보다 적었다.진료실에서는 검사 결과와 몸 상태를 함께 보았다. 의사는 병의 범위를 더 확인하고 치료 계획을 정하기 위해 입원 평가를 권했다. 먹는 양이 줄어든 문제도 같이 살펴야 했다.“며칠 정도 생각하면 될까요?”“검사와 상태에 따라 달라질 수 있어요. 우선 입원해서 필요한 평가를 진행하고 계획을 설명드리겠습니다.”서윤은 달력을 열었다. 의사가 기다려 주는 동안 남편의 일정이 화면에 나타나, 자기 예약을 적은 작은 수첩을 따로 꺼냈다. 4월 23일 옆에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그날로 해 주세요.”그녀는 날짜를 받아 적었다. 병원에서는 그 사이에도 증상이 심해지면 예정일까지 기다리지 말고 연락하라고 했다.진료실을 나오자 다음 주 원고가 먼저 떠올랐다. 서윤은 메신저를 열려던 손을 멈추고 입원 준비물 안내부터 읽었다. 빠진 물건을 적어 둔 뒤 약국에 들렀다가 집으로 돌아왔다.도현에게 날짜를 말한 것은 그날 저녁이었다. 그는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얼마나 걸리느냐고 물었다.“아직 몰라. 검사도 더 해야 하고, 치료 계획을 잡아야 한대.”“그럼 검사하는 데 시간을 얼마나 쓰는지도 모르는 거야?”“해 봐야 정할 수 있대.”서윤이 가방에서 안내를 꺼내 식탁에 놓았다. 도현은 종이를 읽는 대신 메신저에 올라온 수정 요청을 확인했다. 다음 주까지 넘겨야 하는 원고에 문제가 생겼다고 했다. 인물이 싸우는 이유를 이해하기 어렵다는 의견이었다.“내가 그 부분은 건드려 봤거든. 그런데 앞뒤가 또
원고를 가방에 넣으려니 가장 오래된 스케치북이 들어가지 않았다. 서윤은 모서리를 억지로 눌러 보다가 가방을 바꾸었다. 남편의 행사 자료를 넣던 큰 보조 가방이었다. 안쪽 주머니에서 지난 행사장의 안내 종이가 나와, 그것만 빼서 책상에 놓았다.4월 13일 오전, 바닥에 펼친 스케치북들은 크기부터 제각각이었다. 문구점에서 산 얇은 연습장 옆에는 표지가 떨어져 고무줄로 묶어 둔 것도 있었다. 종이마다 적힌 날짜는 몇 년씩 떨어져 있었고, 뒤쪽이 통째로 빈 공책도 눈에 띄었다. 남편의 원고가 급해질 때면 그리던 장을 덮어 두곤 했다.서윤은 완성한 그림에 붙여 둔 파란 표시를 확인했다. 말풍선과 동작만 잡아 둔 콘티에는 회색 표시를 붙였다. 선을 정리하지 못한 인물들은 얼굴이 동그라미뿐인 경우도 있었다. 어느 해의 것은 연필이 너무 흐려서, 나중에 촬영할 때 빛을 따로 비추어야 할 것 같았다.한 장을 넘기다가 여자가 혼자 빵을 먹는 그림에서 멈췄다. 봉투를 열기 전에는 맞은편에 의자가 하나 더 있었다. 먹기 시작한 뒤의 칸에는 여자가 벗어 놓은 외투 때문에 그 의자가 반쯤 가려졌다.서윤은 옷깃을 고쳐 그리려다 펜을 내려놓았다. 오늘은 고치는 날보다 무엇을 남길지 정하는 날에 가까웠다.몸이 허락하는 만큼만 하자고 생각하며 원고를 다시 묶었다. 다음 진료일이 적힌 종이는 가방 바깥 주머니에 넣었다. 계약을 한 다음에도, 원고를 고르는 아침에도 그 날짜는 필요했다.은수는 전날과 같은 상담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번에는 노트북 옆에 빈 파일철과 촬영용 받침대를 준비해 놓았다. 서윤이 가방을 내려놓자 은수가 손을 뻗다가 먼저 물었다.“꺼내도 될까요?”서윤은 스케치북부터 꺼내 달라고 했다. 원고의 크기가 달라 책상 위에 한꺼번에 펴 놓을 수는 없었다. 은수는 몇 권만 펼치고 나머지는 의자 위에 세워 놓았다. 두 사람이 앉은 책상 사이로 연필 자국과 지운 흔적들이 이어졌다.“이쪽은 완성본이고요. 여기부터는 콘티예요.”서윤은 표시 색을 설명했다. 은수는 회색 표
월요일 오전, 서윤은 진료 대기실에서 예약 문자를 다시 확인했다. 산부인과의 후속 진료를 마치면 같은 건물의 다른 층으로 가야 했다. 지난주에 잡아 둔 소화기 진료였다.의사는 유산 이후의 상태를 확인하고 이후에 살펴야 할 증상을 설명했다. 서윤은 안내를 듣고 나온 뒤 다음 진료과에 최근의 일을 알렸다. 임신 사실과 유산한 날짜를 말하는 동안, 접수 직원은 필요한 항목을 조용히 입력했다. 그 말을 끝까지 들은 사람에게는 별도의 변명이 필요하지 않았다.소화기 진료실에서 서윤은 몇 달 전부터 속이 답답했다고 말했다. 처음에는 끼니가 늦어져서라고 생각했고, 다음에는 임신 때문인 줄 알았다고 했다. 의사는 어느 쪽으로도 바로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 식사량과 통증, 최근의 변화에 관해 차례로 물었다.“유산 전에도 먹는 양이 많이 줄었어요?”“네. 배가 고픈데 먹기 시작하면 금방 못 먹겠어요.”최근 검사 결과를 확인한 의사는 위내시경 검사를 권했다. 서윤은 검사 방법과 준비 사항을 듣고 가능한 날짜를 골랐다. 다음 날 아침이었다. 그 시간을 선택하면서도 남편의 작업 일정을 먼저 열어 보지는 않았다.4월 8일의 검사가 끝난 뒤, 그녀는 옷을 갈아입고 설명을 기다렸다. 의사는 병변이 있어 조직을 채취했다고 말했다. 검사 결과를 확인해야 한다는 말과 함께 추가 촬영 일정을 잡았다. 서윤은 그가 화면의 어느 곳을 가리키는지 보았지만 색과 형태만으로는 알아볼 수 없었다.“안 좋은 건가요?”“확인이 필요한 소견입니다. 조직검사와 영상검사 결과를 같이 보고 설명드릴게요.”집에 돌아와 내시경 사진을 펼쳤다가 다시 덮었다. 인터넷에서 비슷한 이미지를 찾아 나란히 놓아도 무엇이 같은지 알 수 없었다. 한 사람은 별일 아니었다고 했고, 다른 사람은 전혀 다른 결과를 적었다. 서윤은 검색 창을 닫고 병원에서 받은 다음 예약을 확인했다.도현은 그녀가 책상 앞에 오래 있지 않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날 저녁에도 컴퓨터가 꺼져 있는 작은 방을 들여다보았다.“검사 아직도 안 끝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