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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화

Author: 유리구슬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6-12 11:00:58

산산조각 난 크리스털 위스키 잔의 파편들이 어두운 카펫 위로 흩어져 있었다.

그 파편들 한가운데, 지안이 던진 황갈색 서류 봉투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차태경은 바지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넣은 채, 그 봉투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의 깊고 서늘한 눈동자에는 여전히 비릿한 조소가 걸려 있었다.

"완벽한 명분이라."

태경이 천천히 허리를 굽혀 봉투를 집어 들었다.

사락.

봉투 안에서 하얀 A4 용지 몇 장이 미끄러져 나왔다. 맨 앞장에 적힌 굵은 명조체의 글씨를 확인한 순간, 태경의 움직임이 뚝 멎었다.

[혼인 계약서]

그 다섯 글자를 눈에 담은 태경의 미간이 아주 미세하게 좁혀졌다. 그는 종이를 든 채 고개를 들어 지안을 쳐다보았다.

"……서지안 본부장."

"네."

"지금 나랑 장난해?"

태경의 목소리는 한없이 낮고 차가웠다. 방금 전까지 띠고 있던 여유로운 포식자의 기세는 온데간데없고, 당장이라도 눈앞의 여자를 찢어발길 듯한 험악한 살기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하지만 지안은 뒷걸음질 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살기를 온몸으로 받아내며 똑바로 맞섰다.

"장난으로 호랑이 굴에 제 발로 걸어 들어오는 미친놈도 있습니까?"

"이건 미친 걸 넘어서 제정신이 아닌데."

태경이 서류를 허공에 펄럭이며 싸늘하게 내뱉었다.

"대한민국 재계 1위 서그룹의 유일한 정통 후계자가, 강민우라는 번듯한 약혼자를 놔두고 나한테 청혼을 하러 왔다? 그것도 이딴 종이 쪼가리 하나 들고?"

"번듯한 약혼자가 아니라, 제 숨통을 끊어놓으려 발악하는 기생충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그 기생충을 짓밟아버릴 수 있는 가장 완벽한 포식자고."

"그래서, 내가 네 복수극의 칼잡이라도 되어주길 바라는 건가?"

"강민우를 무너뜨릴 패를 주겠습니다."

지안의 단호한 목소리가 허공을 갈랐다.

"당신은 내 칼잡이가 되는 게 아닙니다. 이건 철저한 비즈니스 거래예요. 당신이 강민우를 물어뜯는 대가로, 나는 당신에게 '서그룹'이라는 완벽한 갑옷을 입혀줄 테니까요."

태경은 대답 없이 지안을 응시했다.

그의 시선이 지안의 흔들림 없는 눈동자를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거짓말인지, 아니면 과대망상에 빠진 온실 속 화초의 객기인지 판단하려는 듯한 매서운 눈빛이었다.

침묵이 길어지자, 태경은 다시 시선을 내려 계약서를 천천히 훑어보기 시작했다.

"제1조. 본 계약의 유지 기간은 혼인 신고일로부터 정확히 2년으로 한다. 단, 상호 합의하에 연장할 수 있다."

태경이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조항을 소리 내어 읽었다.

"제2조. 철저한 쇼윈도 부부로서 서로의 사생활에 일절 간섭하지 않으며, 외부 언론 및 대외 활동 시에는 완벽한 부부의 역할을 수행한다. 제3조. 이혼 시, 서로의 재산 분할은 정확히 '0원'으로 한다."

피식.

태경의 입술 사이로 실소가 터져 나왔다.

"재산 분할 0원. 이건 좀 섭섭한데. 내가 서그룹 재산 좀 뜯어먹으려고 도장 찍을 수도 있잖아?"

"당신이 서그룹 재산 따위에 눈독 들일 시시한 인간이었다면, 애초에 이 서류를 들고 오지도 않았습니다."

지안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당신 목표는 하나잖아요. 태성그룹. 그것도 껍데기뿐인 계열사 몇 개가 아니라, 본사 회장직과 그룹 전체의 경영권."

지안의 입에서 '태성그룹'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태경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날카롭게 번뜩였다.

"말 조심해."

"틀린 말 했나요? 에이펙스라는 거대한 사모펀드를 굴리면서 막대한 자본을 쥐고 있지만, 결국 당신 발목을 잡는 건 '핏줄'입니다. 사생아라는 꼬리표. 보수적인 이사회와 늙은 주주들은 절대로 당신을 정통 후계자로 인정하지 않겠죠. 배다른 형제들을 전부 반신불수로 만들어 쫓아냈어도, 회장실 문턱을 넘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그 알량한 '명분' 때문 아닙니까."

정곡을 찔린 태경의 얼굴이 무섭도록 차갑게 식었다.

방 안의 공기가 얼어붙는 듯했다. 태경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지안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큰 키에서 뿜어져 나오는 압도적인 위압감이 지안의 숨통을 조여왔다.

"서지안."

태경이 지안의 턱을 거칠게 움켜쥐었다.

억센 악력에 턱뼈가 으스러질 것 같았지만, 지안은 고통을 내색하지 않고 그의 눈동자를 직시했다.

"네가 쥐고 있는 정보력이 제법이라는 건 칭찬해 주지. 하지만 넌 선을 넘었어. 내 콤플렉스를 건드려서 네가 얻을 게 뭐지?"

"콤플렉스를 건드린 게 아니라, 해결책을 제시하는 겁니다."

지안이 태경의 손목을 꽉 쥐며 또박또박 말했다.

"서그룹의 유일한 상속녀. 대한민국에서 나보다 완벽하고 흠결 없는 배경을 가진 여자가 있습니까? 나와 결혼하는 순간, 당신을 물어뜯던 태성의 주주들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습니다. 사생아라는 꼬리표? 서그룹 사위라는 타이틀이 그걸 완벽하게 덮고도 남을 테니까요."

태경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가 쥐고 있던 지안의 턱에서 서서히 힘을 뺐다. 지안의 말은 단 하나도 틀린 것이 없었다.

지금 차태경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돈도, 무력도 아니었다.

이미 자본력으로는 태성그룹 본사를 집어삼키고도 남을 수준이었고, 형제들의 세력은 전부 그의 발밑에 짓밟힌 지 오래였다. 유일한 걸림돌은 태성그룹의 근간을 이루는 보수적인 원로들의 지지.

그들은 더러운 피가 그룹의 꼭대기에 앉는 것을 결사반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서그룹이라는 거대한 배경이 뒤를 받쳐준다면 이야기는 180도 달라진다.

"……내게 명분을 쥐여주고, 너는 내 힘을 빌려 강민우를 치겠다."

태경이 지안에게서 한 걸음 물러서며 낮게 중얼거렸다.

"완벽한 딜이네요. 서로가 원하는 걸 가장 확실하게 얻을 수 있는 방법."

지안이 여유를 되찾고 흩어진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강민우가 얼마나 치밀하고 더러운 놈인지, 직접 상대해 보지 않으면 모릅니다. 서그룹 내부의 임원 절반 이상이 이미 그놈의 개가 되었어요. 제가 후계자로 온전히 서기 위해서는, 내부의 썩은 살을 도려낼 강력한 외부의 메스가 필요합니다. 당신 같은 통제 불능의 맹수가."

"통제 불능이라."

태경이 책상 모서리에 비스듬히 걸터앉았다. 그의 입가에 흥미로운 미소가 번졌다.

"그래서 강민우를 버리고 나를 선택했다. 나라는 칼을 쥐고 서그룹을 온전히 네 것으로 만들겠다. 아주 훌륭한 계산이야. 내가 알던 얌전하고 순진한 서그룹 공주님의 머리에서 나온 계획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태경의 시선이 지안의 붉은 입술, 그리고 서늘하게 빛나는 눈동자를 차례로 훑었다.

"그런데 서 본부장. 내가 그 칼자루를 네 손에 고분고분 쥐여줄 거라는 착각은 도대체 어디서 나온 거지?"

"착각이 아닙니다. 확신이죠. 당신은 이 제안을 절대 거절할 수 없을 테니까."

지안의 자신만만한 태도에 태경이 짧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좋아. 구미가 당기는 제안인 건 인정하지. 서그룹이라는 배경은 지금 내게 꼭 필요한 퍼즐 조각이 맞으니까."

태경이 책상 서랍을 열고 무언가를 꺼냈다. 검은색 가죽 폴더였다.

"하지만 서지안. 난 무능한 파트너와는 손잡지 않아. 그게 아무리 훌륭한 배경을 가진 서그룹 후계자라 할지라도 말이야. 내가 쥐여주는 고기나 받아먹고 꼬리나 흔드는 애완견이라면, 차라리 안 키우는 게 낫거든."

태경이 검은 폴더를 지안의 가슴팍을 향해 툭 던졌다.

지안이 반사적으로 폴더를 받아 들었다.

"열어봐."

지안이 폴더를 펼치자, 안에는 빼곡한 부동산 권리증서와 토지 대장, 그리고 한 노인의 사진이 첨부된 서류가 들어 있었다.

[TK 화학 최석훈 회장]

사진 속 인물과 이름을 확인한 순간, 지안의 눈빛이 미세하게 번뜩였다.

전생의 기억이 뇌리를 스쳤다.

TK 화학. 그리고 최석훈 회장.

재계에서는 지독한 짠돌이에 고집불통으로 유명한 인물이자, 동시에 과거 차태경이 에이펙스의 새로운 물류센터 건립을 위해 가장 골머리를 앓았던 상대였다.

"명동 재개발 4구역."

태경이 책상 위에 놓인 은장 담배 케이스에서 시가를 하나 꺼내 물며 말했다.

"내가 다음 달 착공 예정인 아시아 최대 규모의 스마트 물류센터 핵심 부지 한가운데에, 저 영감탱이 땅이 알박기 되어 있어. 그 땅을 매입하지 못하면 물류센터 설계 자체를 엎어야 해."

태경이 지포 라이터를 튕겨 불을 붙였다. 매캐하고 묵직한 시가 연기가 허공으로 흩어졌다.

"시세의 세 배. 아니, 다섯 배를 쳐준다고 해도 절대 안 팔겠다고 버티고 있지. 심지어 에이펙스 직원들은 얼씬도 못 하게 현장에 조폭들까지 깔아놨더군."

"돈이 문제가 아니군요."

지안이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고 물었다.

"그래. 돈이 문제가 아니지. 저 늙은이가 날 지독하게 혐오하거든. 핏줄이 더러운 사생아 새끼한테는 자기 땅 한 평도 내어줄 수 없다나 뭐라나."

태경의 목소리에는 서늘한 살의가 묻어 있었다.

"물론, 내 방식대로 밟아버리는 건 일도 아니야. 저 영감탱이 회사 주식을 박살 내고 숨통을 조여서 강제로 뺏어올 수도 있지. 하지만 그러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 나는 한 달 안에 저 땅의 소유권 이전이 필요해."

태경이 시가를 손가락 사이에 끼운 채, 지안을 향해 매서운 시선을 던졌다.

"네가 내 완벽한 파트너가 될 자격이 있는지 증명해 봐. 서지안."

"……."

"이번 주 금요일까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저 TK 화학 최 회장의 인감이 찍힌 부지 양도 계약서를 내 책상 위에 올려놔. 서그룹 후계자라는 간판을 써먹든, 협박을 하든 그건 네 자유야. 결과물만 가져와."

그것은 명백한 시험이었다.

그것도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미션.

최석훈 회장은 에이펙스는 물론이고 대기업의 횡포를 극도로 싫어하는 인간이었다. 서그룹의 이름을 팔고 들어간다고 해도, 자존심 강한 그가 순순히 땅을 내놓을 리 없었다. 오히려 서그룹까지 물고 늘어질 위험이 컸다.

"금요일까지 못 가져오면?"

지안의 물음에 태경이 비릿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럼 이 계약서는 파기야. 서그룹 후계자의 가치가 그 정도밖에 안 된다는 뜻이니까. 강민우 개새끼 처리는 네가 알아서 하시지."

방 안에는 다시 팽팽한 긴장감이 맴돌았다.

태경은 지안이 당황하거나 난색을 표할 것이라 예상했다. 아무리 똑똑한 여자라 한들, 수십 년간 닳고 닳은 탐욕스러운 노인네를 단 며칠 만에 구워삶는 것은 비즈니스 베테랑에게도 벅찬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폴더를 덮은 지안의 표정은 너무나 평온했다.

아니, 오히려 그녀의 입가에는 옅은 미소마저 번져 있었다.

전생의 기억.

지안은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약 1년 뒤, 꼿꼿하던 TK 화학 최석훈 회장이 하루아침에 검찰에 구속되며 회사가 공중분해 되었던 사건을.

그의 몰락을 가져온 치명적인 아킬레스건.

겉으로는 청렴결백한 척, 자존심 하나로 버티던 노인네가 뒤로는 어떤 추악한 짓을 저지르고 있었는지 지안은 완벽하게 알고 있었다.

'차태경, 당신이 다섯 배를 줘도 못 샀던 땅. 나는 단 한 푼도 안 들이고 뺏어올 수 있어.'

지안은 폴더를 겨드랑이에 끼고, 보란 듯이 턱을 치켜들었다.

"금요일은 너무 길군요."

"뭐?"

태경이 담배 연기를 내뿜으려다 말고 미간을 좁혔다.

"이번 주 수요일. 3일 뒤 정오까지."

지안의 단호한 선언에 태경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수요일 정오까지, 최 회장의 인감이 찍힌 양도 계약서를 이 책상 위에 올려두죠. 매입 대금은 시세와 동일하게. 단 1원도 얹어주지 않는 조건으로."

"하."

태경이 기가 차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서지안. 객기가 심하면 독이 돼. 서그룹 간판 하나 믿고 찾아갔다가 문전박대당하고 질질 짜지나 마."

"제가 헛소리하는 똥개인지, 아니면 당신 목줄을 쥘 만한 사냥꾼인지 지켜보시죠."

지안은 태경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쏘아보았다.

그 눈동자 속에 담긴 것은 단순한 오기나 허세가 아니었다. 모든 판세를 꿰뚫고 있는 자만의 절대적인 확신이었다.

"수요일 정오. 내가 계약서를 가져오면, 그땐 당신이 이 혼인 계약서에 도장을 찍는 겁니다. 핑계 대지 말고."

"좋아."

태경이 시가를 재떨이에 비벼 끄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져오기만 한다면, 당장 그날로 언론에 결혼 발표를 해주지. 네가 원하는 대로 가장 자극적이고 화려하게."

"약속 지켜요."

지안은 미련 없이 몸을 돌려 펜트룸의 마호가니 문을 향해 걸어갔다. 구두 굽 소리가 무거운 카펫에 먹혀들어 가며 일정한 리듬을 냈다.

철컥.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와 함께, 지안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졌다.

방 안에는 다시 짙은 정적과 함께, 지안이 남기고 간 옅은 향수 냄새만이 감돌았다.

태경은 지안이 서 있던 빈자리를 가만히 응시했다.

오랜 시간 어둠 속에서 짐승처럼 살아오며 수많은 인간 군상을 겪었지만, 저런 눈빛을 가진 여자는 처음이었다.

벼랑 끝에 몰린 쥐새끼의 절박함이 아니라, 이미 지옥의 불바닥을 뒹굴고 올라와 두려울 것이 없는 악귀의 눈빛.

강민우를 향한 증오와 살의를 숨기지 않고 드러내면서도, 비즈니스 협상에서는 완벽하게 이성을 유지하는 지독한 통제력.

"서지안이라……."

태경의 입가에 묘한 곡선이 그려졌다.

책상 위에 놓인 혼인 계약서를 다시 집어 든 그는, 종이 위를 손가락으로 가볍게 훑어 내렸다.

어쩌면,

정말 미친 사냥개를 만났을지도 모르겠다.

단순히 서그룹이라는 방패막이 필요해서 받아준 제안이었지만, 처음으로 진심 어린 흥미가 동하기 시작했다.

"수요일까지라. 기다려 보지."

태경이 계약서를 서랍 속에 던져 넣으며 짐승처럼 낮게 웃었다.

강민우.

그 시시한 잡종 새끼가 대체 무슨 짓을 저질렀길래, 온실 속의 우아한 백조가 스스로 깃털을 뽑고 지옥불로 뛰어들었는지.

곧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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