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MELDEN그렇게 계속해서 넘기던 와중, 강지안의 손끝이 뚝 멈췄다.사진 속에는 조금 더 어린 시절의 강지안과 조금 더 젊은 장성훈이 함께 있었다.배경은 노을이 내려앉은 강가, 두 사람은 나란히 서 있었고 그곳은 어젯밤 그녀가 앉아 있던 장소와 놀라울 만큼 닮아 있었다.그때의 장성훈은 여전히 무뚝뚝했다. 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살짝 치켜든 채 아무런 경계 없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그 눈빛에는 그를 향한 믿음과 의지가 온전히 담겨 있었다.그리고 그런 눈으로 바라보는 일은 이제 더 이상 강지안에게 불가능한 일이 되어버렸다.한 장 또 한 장, 계속해서 사진을 넘겼다.병원 앞에서 함께 찍은 사진, 차 안에서 나란히 앉아 있는 사진, 그녀의 집 앞에서 찍은 사진, 명절 불꽃놀이 아래 함께 웃고 있는 사진, 눈 내리는 날, 서로의 곁에 서 있는 사진...강지안의 인생에서 중요했던 모든 순간, 그리고 사소하지만 따뜻했던 모든 순간마다 장성훈은 함께 있었다.그러자 그제야 강지안은 두 사람이 정말 오랜 시간을 함께 걸어왔다는 걸 알게 되었다.그는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의 삶에 들어온 게 아닌 아주 오래전부터, 아주 자연스럽게 그녀의 곁을 지켜온 사람이었다.그녀가 그저 ‘우연’이라고 생각했던 일들, ‘부탁받아서 하는 일’이라고 여겼던 것들, ‘책임감 때문’이라고 단정했던 모든 것들...그 아래에는 감춰지지 않을 만큼 깊고 무거운 세월이 자리하고 있었다.사진을 바라보는 강지안의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장성훈이 자신의 모든 취향을 알고 있었던 것, 어쩐지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이 낯설지 않았던 것, 기억을 잃은 뒤에도 그에게 마음이 약해지고, 그를 걱정하고, 꿈속에서조차 그에게 의지했던 그 모든 건 우연도 혼자만의 착각도 아니었다.두 사람은 정말 함께 긴 시간을 보내왔던 것이다.그녀가 잊어버린 세월은 텅 빈 공백이 아닌 장성훈이 해마다, 또 해마다 조심스럽게 지켜온 시간이었다.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으며 씁쓸함과 죄책감이 한꺼번에 밀려들었다.그동안 그에게 했던 말들,
“제가 집까지 데려다드릴까요?”의사가 물었다.“괜찮아요. 혼자 갈 수 있어요.”강지안이 살짝 미소 지었다.“오늘 정말 감사했습니다. 큰 도움을 받았어요.”“저한테 무슨 그런 말을 해요.”의사는 손사래를 쳤다.“마음이 흔들릴 때는 일에 몰두해야 한다는 거 기억해요. 그러다 보면 생각보다 많은 일이 그렇게 무서운 것만은 아니라는 걸 알게 될 겁니다.”강지안은 고개를 끄덕이고 의사와 헤어진 뒤, 혼자 지하철역으로 향했다.밤바람이 살며시 머리칼을 흩날렸다.천천히 걸음을 옮기는 동안 다리의 상처는 이제 거의 아프지 않았고 마음도 한결 가벼워져 있었다.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어쩌면 인생이란 꼭 잃어버린 모든 기억을 당장 되찾아야 하는 것도 아니고, 장성훈과 자신의 모든 관계를 지금 당장 밝혀내야 하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천천히 한 걸음씩 나아가고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괜찮을 것 같았다.그렇게 강지안은 조용히 집으로 돌아왔다.그런데 아파트 단지 안으로 들어선 순간, 그녀의 시선이 무심코 한 곳에 멈췄다.가로등 아래, 아주 익숙한 검은색 차량 한 대가 조용히 주차되어 있었다.차종, 번호판, 심지어 세워진 각도, 그 모든 것이 그녀의 심장을 순간 세차게 뛰게 만들었다.다름 아닌 장성훈의 차였다.‘날... 찾아온 건가?’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춘 강지안은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순간, 세미나에서 되찾았던 평온한 마음이 흔들리며 잠시 눌러 두었던 복잡한 감정들이 다시 하나둘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가서 인사를 해야 하나? 왜 여기 있냐고 물어봐야 하나? 아니면 못 본 척하고 그냥 올라가야 하나?’수많은 생각이 순식간에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어젯밤 진짜인지 거짓인지 알 수 없었던 그의 보살핌, 강가에서 말없이 자신을 따라오던 모습, 부모님이 나타났을 때 고개를 숙이고 사과하던 모습, 자신이 떠나라고 했을 때 상처받은 듯했던 그 눈빛까지...수많은 장면들이 빠르게 눈앞을 지나가 강지안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
강지안은 의사와 약속한 대로 시간에 늦지 않게 세미나장에 도착했다.세미나가 열리는 곳은 도심 한복판에 자리한 차분한 분위기의 학술 교류 센터로, 온화한 불빛이 회장 안을 부드럽게 비추고 있었다.오가는 이들은 하나같이 깔끔한 정장 차림의 이지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동종 업계 사람들이었다.이는 기억을 잃은 뒤 그녀가 진짜 자신의 무대로 돌아온 실질적인 첫걸음이었다.곁에서 동행한 의사는 나직한 목소리로 지인들을 소개해 주며 그녀의 불편한 다리 상태를 수시로 살폈다. “천천히 걸어요. 다리가 아직 완치되지 않았으니 무리해선 안 됩니다.”강지안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며 차분한 시선으로 회장 전체를 둘러보았다.낯이 익은 얼굴들은 제법 있었지만 이름이 생각나지 않았다. 기억이 불투명 유리 뒤에 갇힌 것처럼 아주 가까이에 있는 듯하면서도 선명한 형체가 잡히지 않았다.하지만 상대방이 말을 건네는 순간 느껴지는 친근하고도 존경 어린 어조는 그녀로 하여금 똑똑히 깨닫게 해주었다. 과거의 강지안은 이 학계에서 진정으로 실력을 인정받고 무수한 존경을 받던 대단한 인물이었다는 사실을 말이다.접수처 인근에 도달했을 때, 나이 지긋한 노교수 한 분이 먼저 다정하게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향해 걸어왔다.“지안 씨, 오랜만이야. 일전에 건강이 조금 안 좋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오늘 보니 안색이 좋아 보여 다행이야.”강지안은 가슴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끼며 공손하게 답했다.“염려해 주신 덕분에 아주 좋아졌습니다. 감사합니다.”이어 몇몇 젊은 의사들과 연구원들이 잇달아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일전에 공동으로 진행했던 연구 과제에 관해 묻는 이도 있었고 그녀가 이전에 발표했던 논문을 언급하는 이도 있었으며 꼭 가르침을 구하고 싶었다며 싹싹하게 웃는 이도 있었다.그들이 그녀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한결같이 진정 어린 존경심이 담겨 있었고, 거기에는 비열한 계산도, 음흉한 기만도, 그녀의 영혼을 피폐하게 만들었던 지긋지긋한 집착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강지안은 이들의 부름에 정성껏
“기분은 좀 어때요? 열은 내렸습니까?”“네, 완전히 내렸고 많이 좋아졌어요. 다만 사지가 좀 나른할 뿐이에요.”강지안이 나직하게 대답했다.“네, 워낙 기본 체질이 좋아서 회복이 빠르네요.”의사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내 목소리 톤을 한층 더 낮추었다.“하지만 꼭 명심하세요. 지금 중요한 건 몸 상태가 아니라 정신 상태입니다.”강지안은 순간 흠칫했다.“지안 씨의 기억 상실은 정신적 충격과 스트레스에 직접적인 타격을 입은 결과거든요.”의사는 진중한 어조로 한 자 한 자 소중히 경고했다.“절대 감정 기복이 심해지면 안 됩니다. 과도하게 흥분하거나 감정이 치솟아서는 안 되며, 우울함이나 고통, 자책감 속에 너무 오래 갇혀 계셔도 안 됩니다. 감정이 요동치고 신경이 날카로워지면 기억 회복은커녕, 지금 겨우 유지하는 밸런스마저 깨질 수 있으니까요.”강지안은 침묵했다.그녀라고 밸런스를 유지하고 싶지 않은 게 아니었다. 그녀도 제발 평온해지고 싶었다.머리 아픈 인간관계나 사건들 따위는 다 잊은 채 조용히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싶었다.하지만 최근 그녀에게 들이닥친 풍파들은 매번 감당하기 힘들 만큼 거대한 파괴력으로 그녀의 가슴을 짓밟고 지나갔다.문제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머리 위로 떨어지니, 숨 쉴 틈조차 없었다.멘탈을 붙잡고 싶어도 현실이 도무지 도와주지 않았다.“알겠습니다.”강지안은 지친 기색이 가득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노력해 볼게요.”그녀의 멍하고 지친 얼굴을 보던 의사는 안타까운 한숨을 내쉬며 목소리 톤을 바꿨다.“요즘 엄청 고달프다는 거 압니다. 아니면 이건 어때요? 오늘 저녁에 의학 세미나가 하나 있는데, 전부 업계 최고들이 모이는 자리예요. 주제도 지안 씨가 전공하던 분야고요. 같이 갑시다.”강지안이 고개를 들었다.“세미나요?”“네.”의사가 온화한 얼굴로 설득했다.“일상생활이 너무 고통스럽고 감정이 통제되지 않는다면, 차라리 일에 미쳐서 관심을 돌리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지안 씨는 의사이고 또 연구원이니 제일
이번만큼은 강지안도 깊고 편안한 단잠에 빠져들 수 있었다.늘 꿈속에서나 자신에게 다정하게 굴던 그 남자가, 이번에는 정말로 제 곁에 존재하고 있음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반면 장성훈은 소파 곁에 조용히 걸터앉아 그녀를 지키며 눈 한 번 붙이지 못한 채 그렇게 밤을 꼬박 새웠다....이튿날, 강지안은 전신을 감싸 안는 안락한 잠기운 속에서 서서히 정신을 차렸다.어젯밤 온몸을 덜덜 떨게 만들던 오한과 머리가 깨질 듯한 고열의 증상은 눈에 띄게 완화되어 있었고 열은 흔적도 없이 내린 채 그저 가벼운 몸의 피로와 탈력감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목구멍 역시 살짝 건조할 뿐 더 이상 유리 조각을 삼킨 듯한 날카로운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다.그녀는 소파에 누운 채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며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겼다.어젯밤의 기억 조각들이 머릿속에서 파편처럼 떠올랐다.살을 들이치던 차가운 강바람, 저 멀리서 소리 없이 서 있던 실루엣, 몽롱한 의식 속에서 열리던 현관문과 익숙한 체취, 그리고... 자신을 품에 안고서 나직이 속삭이며 약을 먹여주던 한 남자.장성훈, 그가 온 거였다.그는 밤새도록 그녀의 곁을 지켰고 그녀는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그의 품에 안겨 목젖에 입을 맞추기까지 했다.그의 손가락 끝이 입안으로 들어왔을 때 단단하게 굳으며 떨리던 그의 촉감은 지금도 생생했다.강지안의 뺨이 발그레하게 붉어졌고 심장이 작게 요동쳤다.그것은 한낱 꿈이 아니었다.최소한 그녀의 느낌은 그랬다.그녀는 힘이 들어가지 않는 팔을 짚고 겨우 몸을 일으켜 본능적으로 거실을 쭉 둘러보았다.하지만 이내 그녀의 몸이 일순간 굳어버렸다. 거실 안은 텅 비어 있었다.소파 곁에 놓인 의자는 싸늘하게 식어 침묵만을 지키고 있었고 러그 위에는 그 어떤 발자국도 남아 있지 않았다. 테이블 위 역시 물컵도 알약 포장지도 없이 정갈하기만 해, 누군가 머물렀던 흔적은 단 한 조각도 찾아볼 수 없었다.마치 어젯밤의 그 다정했던 보살핌이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일인 양 사방이
그녀는 성치 않은 몸을 일으켜 조금씩 다가가더니 뜨겁게 달아오른 작은 손을 뻗어 그의 뺨을 감싸 쥐고 긴장으로 굳은 턱선을 조용히 매만졌다.장성훈은 숨조차 쉬지 못하고 얼어붙었다.그는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소파에 웅크려 뺨을 붉힌 채 가쁘게 숨 쉬는 그녀를 보고 독감에 걸린 걸 직감한 참이었다.그런데 미처 말을 건네기도 전에 그녀가 대뜸 그의 품으로 파고들었던 것이다.강지안은 온기를 찾아 헤매던 아기 고양이처럼 그의 품으로 머리를 파묻고 차갑고 단단한 가슴팍에 볼을 부벼대며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를 느꼈다.이내 그녀가 고개를 살짝 들어 그의 목덜미를 조심스레 간질이더니, 이내 볼록하게 솟아오른 그의 목젖 위로 부드럽게 입을 맞추었다.부드럽고 뜨거운, 아픈 사람 특유의 연약함이 묻어나는 스킨십이었다.“음...”장성훈의 목구멍에서 극도로 참아낸 신음이 터져 나왔다. 목젖이 세차게 일렁였고 목에 푸른 힘줄이 돋았으며 온몸의 근육이 비명을 지르듯 단단해졌다.그를 지탱하던 이성이 마침내 산산조각 나기 직전이었다.그는 어금니를 악물며 마음속에서 미쳐 날뛰는 욕망을 억누르며 두 손을 허공에 둔 채 안지도 밀어내지도 못하고 굳어 있었다.그녀는 지금 열이 펄펄 끓어 혼미한 상태였고 현실과 환상을 구분하지 못하고 있었으니 결코 기회를 틈타 못된 짓을 저지를 수는 없었다.장성훈은 눈을 감고 잡념을 강제로 억눌렀다. 이내 가슴속에는 미어지는 안타까움과 자책감만이 가득 차올랐다.그는 조심스레 그녀를 밀어내어 소파에 다시 눕히고 담요를 덮어준 뒤, 주방으로 가 빠르게 불을 켰다.이내 주전자가 소리를 내며 끓기 시작하더니 금세 따뜻한 물이 준비되었다.장성훈은 미리 챙겨온 감기약을 꺼내 들고 미온수를 컵에 담아 온도를 확인한 뒤에야 소파 옆으로 돌아왔다.그는 무릎을 굽혀 앉아 독한 고열로 발그레하게 상기된 그녀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세상에서 가장 나긋나긋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속삭였다.“아가씨, 약 드세요. 그래야 안 아프죠.”하지만 강지안은 비몽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