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준은 어두운 얼굴로 서늘한 기운을 내뿜었다. 그는 얼음장처럼 차가운 표정을 지은 채 라이트 클럽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백아영이 있다는 룸에 도착하자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발로 문을 뻥 차버렸다.이내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문짝이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룸 안에서 오재문은 속옷에 한쪽 다리를 끼고 있었고, 백아영은 반대편에서 가방을 챙기고 있었다.이는 누가 봐도 정사를 마친 후의 광경이었다.안 그래도 언짢은 이성준의 기분이 순식간에 바닥을 쳤다. 사실 클럽에 도착하기 전까지만 해도 단지 오해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제 백아영이 얼마나 더럽고 끔찍한 여자인지 두 눈으로 직접 목격하게 되었다.방탕한 성격은 아무리 타일러도 결국 고쳐지지 않았다!“성, 성준아?”백아영은 어안이 벙벙한 채 그를 바라보았다. 대체 여기에는 왜 갑자기 나타났단 말이지?게다가 지금 이 상황은...속옷을 반쯤 걸쳐 입은 오재문을 본 그녀는 머리털이 쭈뼛 서는 느낌이 들었다.“성준아, 절대 오해하지 마. 저 사람이 서지 않는다고 해서 나한테 치료해달라고 부탁했을 뿐이야. 봐봐, 치료할 때 쓰는 은침도 있잖아? 방금 치료를 끝냈거든...”백아영은 은침을 꺼내 이성준에게 보여주었지만 이성준은 ‘탁’ 쳐내면서 그녀의 손목을 덥석 붙잡고 밖으로 질질 끌어내 곧장 차에 태웠다.이성준은 차갑기 그지없는 말투로 명령했다.“출발해, 본가로 가.”그 말을 들은 백아영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이 타이밍에서 본가에 찾아가 이영철을 만난다면 이혼밖에 더 있지 않겠는가! 이성준의 와이프라는 신분을 박탈당하는 순간 이성준은 그녀를 죽이고도 남을 것이다.“성준아, 나 진짜 치료만 해줬다니까? 바람피우지도 않았고, 가문에 먹칠하는 짓도 안 했어! 다짜고짜 이러는 건 좀 아니잖아!”“다짜고짜?”이성준이 냉소를 지었다.“백아영, 지금 내 눈으로 똑똑히 봤는데 결백을 증명할 수 있겠어?”“당연하지! 요즘 발기부전을 치료하기 위해 오재문이 여기저기 수소문하러 다닌다는 거 조
이성준의 힘이 어찌나 센지, 백아영은 뒤로 밀려나 차 문에 쿵 하고 부딪혔다. 이내 등에서 통증이 밀려왔다.따끔거리는 느낌에 그녀는 정신이 번쩍 드는 반면, 이성준이 그녀에게 기회를 주기는커녕 조사도 하지 않을 것이라는 절망적인 사실을 깨닫게 해주었다. 이제 도망칠 구멍은 없었다.“차 세워요! 얼른!”백아영은 격앙된 목소리로 외쳤다. 가만히 앉아서 죽기를 기다릴 리가 있겠는가! 변명해도 소용이 없으면 삼십육계 줄행랑이다.다만 차는 여전히 쏜살같이 달리고 있었고, 그녀의 애원 따위 통하지 않았다.이내 그녀는 입술을 질끈 깨물더니 차 문을 벌컥 열었다.운전 중인 위정이 깜짝 놀라 서둘러 브레이크를 밟았다. 차가 멈추기도 전에 백아영은 이미 훌쩍 뛰어내렸다.땅바닥에 10여 바퀴나 데굴데굴 굴러서 드디어 멈춰선 그녀의 몸에 군데군데 다친 흔적이 역력하며 피가 흥건했다. 비록 통증 때문에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지만, 결국 이를 악문 채 바닥을 짚고 힘겹게 일어나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반대 방향으로 뛰어갔다.“뭐야? 영화 찍어? 형수님 장난 아닌데?”구민기는 어안이 벙벙했다. 이토록 무모한 여자라니, 정말 박수라도 쳐주고 싶었다.이성준은 착잡한 얼굴로 백아영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젓가락처럼 깡마르고 가녀린 여자는 옷이 흙과 피로 얼룩진 채 비틀거리며 도망갔다.비참하기 그지없는 모습에 이성준의 마음은 이루 형용하기 힘들 정도로 짠했다.그러나 몇 번이고 남자를 몰래 만나서 그런 짓거리를 한다는 생각만 떠올리면 역겹기 짝이 없었다. 이처럼 방탕하고 더러운 여자는 밖에 돌아다녀봤자 공기를 오염시키는 일밖에 더 있지 않겠는가!그는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본가에 연락해서 붙잡아 오라고 해.”“네.”위정은 즉시 전화를 걸면서 차를 몰았다.조수석에 앉은 구민기는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백아영이 떠난 방향을 바라보았다. 여태껏 두 번 만난 새로운 형수님은 항상 다른 남자와 함께했는데 겉보기에는 음탕하기 그지없었다.다만 그동안 무수히 많은 여자를 봐 온 사
저 멀리 떨어진 숲속에서 오재문과 백채영이 싸늘한 얼굴로 이 모든 걸 지켜보고 있었다.“채영아, 넌 정말 잔머리는 타고난 것 같아. 먼저 백아영이 음탕한 여자라는 이미지를 이성준에게 심어주고 나중에 강도를 만나 돈이 없다는 이유로 죽임까지 당하게 해? 물론 이성준이 그녀가 결백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더라도 너무 늦겠지. 백아영이 죽고 나면 이성준의 와이프가 될 사람은 너뿐일 테니까.”사실 백채영은 오재문과 백아영의 첫 만남부터 계획했다.그녀는 표독한 얼굴로 말했다.“이성준의 와이프는 나야. 백아영은 단 하루라도 이성준의 와이프가 될 자격이 없어.”백아영을 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하는 것이야말로 그녀의 목표였다....“사람을 죽이면 목숨으로 갚아야 한다는 것도 몰라? 당신들은 사형에 처할 거야!”백아영은 베인 상처에서 피가 흘러내리는 팔을 움켜쥐고 힘겹게 뒤로 물러섰다.남자는 극악무도하게 웃으며 말했다.“여기 CCTV도 없고 지나가는 차량도 없는데 우리가 죽였다는 건 어찌 알겠어?”“이년아, 넌 오늘 죽었어!”네 남자가 백아영을 빈틈없이 에워쌌다. 피하거나 도망칠 기회는 전혀 보이지 않았고, 그녀는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날카로운 나이프를 마냥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백아영은 깊은 절망감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이때, 눈 부신 헤드라이트가 번쩍였고, 너무 밝은 나머지 사람들은 눈조차 뜨기 힘들었다.곧이어 역광 속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나타났는데 몸놀림이 예사롭지 않았다. 순간 뼈가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비명이 울려 퍼지더니 네 남자는 바닥에 털썩 쓰러졌다.그제야 상대방을 식은 죽 먹기로 쓰러뜨린 카리스마남의 잘생긴 얼굴이 백아영의 눈에 들어왔다.싸늘한 눈빛과 무심한 표정, 그는 다름 아닌 이성준이었다!그가 다시 돌아오다니? 심지어 그녀를 구하기 위해??하지만 백아영은 마냥 기뻐할 수 없었다. 비록 지금은 구사일생이지만, 그녀를 구해준 이성준도 좋은 사람은 아니었다. 단지 당장은 살려줬을 뿐, 이혼하고 나면 죽이고도 남을 것이다.이성준은
백아영은 어리둥절했다. 이성준이 이런 일에 관심을 가질 줄이야!그와 동시에 수치스러움과 난감함이 몰려왔다. 그날 밤은 그녀의 인생에 잊을 수 없는 치욕을 안겨주었다.백아영은 이내 씁쓸한 얼굴로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성폭행당한 건 이미 알고 있잖아.”“처음이야?”백아영은 민망한 나머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고, 고개를 돌리더니 한참 만에 우물쭈물 대답했다.“응.”순간 이성준의 눈이 반짝거렸다. 점점 어두워지는 그녀의 눈빛을 보자 다시 물었다.“몇 번 방이었는데?”만약 룸넘버까지 일치한다면 백채영이 거짓말했다는 뜻이다.그녀를 뚫어지라 쳐다보는 이성준은 숨이 가빠올 지경이었다.“그게...”백아영이 대답하려는 순간 문이 벌컥 열리면서 의사가 서류를 한 아름 안고 급히 걸어들어왔는데, 잔뜩 흥분한 얼굴로 말을 이어갔다.“축하드립니다. 도련님! 사모님께서 임신하셨어요. 이미 6주에 접어들었고, 아이는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습니다.”이성준의 안색이 갑자기 어두워지더니 서늘한 기운을 내뿜었다. 그날 밤은 고작 4주 전에 불과했을 뿐, 아이가 벌써 6주가 되었다는 말은 백아영이 그전에 이미 다른 남자와 몸을 섞었고, 심지어 임신까지 했다는 것을 증명했다.그런 와중에 경포 호텔에서의 그날 밤이 첫 경험이라고? 정말 입만 열면 거짓말이었다.아까만 해도 그 사람이 진짜 그녀는 아닐까 하는 자기 생각이 무색하게 참 아이러니한 상황이었다.“백아영, 내가 널 너무 우습게 봤나 봐.”이성준은 백아영의 청순하고 순진무구한 표정을 보자 울컥하는 마음에 분노가 점점 차올랐다.“더러운 씨를 배고 시집와서 아이를 빌미로 나한테 책임을 물으려는 건가? 그리고 우리 집 안주인 노릇을 톡톡히 하겠다는 거지? 계획이 어찌나 주도면밀한지 감탄밖에 안 나오네.”백아영은 병상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얼굴은 새하얗게 질린 채 당황함을 감추지 못했는데, 그녀가 애써 숨기려 했던 사실이 결국에는 폭로되는 순간이었다.“난 그런 생각 해본 적이 없어.”그녀는 난처한 나머지 고개
한편, 백채영은 집에서 건달들이 백아영을 죽이지 못해 한창 아쉬워하고 있었다. 이때, 창밖으로 누군가 뛰어 들어왔는데 다름 아닌 오재문이었다.그는 상처가 군데군데 나 있었고,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이내 백채영을 발견하는 순간 곧장 달려들어 그녀의 손을 꼭 붙잡았다.“채영아, 살려줘! 제발!”백채영은 깜짝 놀란 나머지 급히 그를 밀쳐내며 노발대발했다.“오재문, 지금 뭐 하는 거야? 몰골이 이게 뭐야? 저리 가!”“백채영! 네가 백아영을 죽여줄 사람만 찾아달라고 하지 않았더라면 나도 이성준한테 쫓기는 신세는 면했겠지! 그 사람들의 손에 잡히면 난 죽는다고.”공포에 질린 오재문의 두 눈이 벌겋게 충혈되었다.“나 좀 살려줘! 아니면 범인이 너라고 확 불어버린다? 만약 이성준이 네가 백아영을 죽이기 위해 사람을 고용하고 악랄한 음모까지 마다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널 가차 없이 버리겠지?”“이...!”백채영은 화가 나서 당장이라도 그를 발로 걷어차 버리고 싶었다.이를 본 박라희가 서둘러 백채영을 말렸다. 오재문이 지금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다는 사실을 뻔히 알고 있는 박라희는 이 시점에서 그를 내쳤다가는 오히려 적반하장으로 달려들어 나중에 백채영마저 끌어들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재문아, 일단 진정해. 입단속만 잘하면 반드시 네 목숨을 살려줄게.”박라희는 침착하게 결정을 내리고 말했다.“일단 우리 집에서 지내고 있어. 나중에 기회를 봐서 다른 곳으로 보내줄게.”백채영은 즉시 발끈했다.“엄마, 어떻게 우리 집에서 지내게 놔둘 수 있어요? 성준이가 알게 된다면 스스로 자백하는 꼴은 물론 나까지 연루될지도 모른다고요!”“넌 성준 씨가 좋아하는 사람이잖아. 확실한 증거가 없는 이상 너를 쉽게 의심하지는 않을 거야. 따라서 함부로 우리 집까지 쳐들어올 일은 없을 테니까 지금 당장은 여기가 가장 안전한 곳이야.”박라희는 차분하게 위로를 건넸다.“채영아, 이 일은 엄마가 알아서 처리할게. 넌 성준 씨와 어떻게 하면 더 사이좋게 지내서
순간 헉하고 놀란 백아영은 당황한 나머지 서둘러 얼굴을 가리려고 했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이성준의 싸늘한 시선이 그녀의 가슴에 달린 명찰을 향했다.“백영미? 이제 가명으로 대회까지 참가해? 백아영, 이번에는 또 무슨 꿍꿍이를 꾸미는 거야?”백아영은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고 싶었다. 아무리 운이 없어도 그렇지, 곧바로 들통날 줄은 어찌 알았겠냐는 말이다.결국 그녀는 눈 딱 감고 대답했다.“무사히 등록하려고 가명 썼을 뿐이야.”“하긴, 네가 감옥에 있었던 흑역사를 알고 나면 예선을 통과시켜줄 사람이 아무도 없겠지.”이성준이 피식 비웃었다.“하지만 내 아내라는 신분으로 이런 짓을 하다가 나중에 들통이라도 난다면 우리 집안의 명성에 먹칠하는 게 아닌가? 당장 접수 취소해.”그가 명령했다.막무가내로 강요하는 남자의 태도에 백아영은 불만이 가득했다.“걱정하지 마. 대회가 끝날 때까지 얼굴 가리고 있을 테니까 신분이 드러나는 일은 없을 거야.”이내 세면대에 놓인 마스크를 쓰려고 했지만, 이성준이 기다란 손가락으로 꾹 누르는 바람에 옴짝달싹하지 못했다.이때, 화장실 밖에서 백채영의 목소리가 갑자기 울려 퍼졌다.“성준아, 왜 그래?”백아영은 흠칫하더니, 뜨악한 표정으로 백채영이 걸어오는 것을 바라보았다.그녀가 알게 된다면 대회에 참가하는 건 꿈도 꾸지 말아야 했다.순간 당황한 백아영은 재빨리 걸음을 옮겨 이성준에게 바짝 다가가 덩치가 산만한 그를 가림막으로 삼았다.아담한 여자의 몸이 갑자기 가까워지자 이성준의 눈빛이 어두워졌다.그들을 향해 다가오던 백채영은 이성준의 앞에 거의 붙어 있다시피 서 있는 여자처럼 보이는 사람을 발견하자 즉시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성준아, 이 여자는 누구야?”말을 마친 백채영은 백아영의 얼굴을 보기 위해 고개를 쭉 내밀었다.긴장감이 극도로 달한 백아영은 심장이 목구멍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결국,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돌렸는데 이성준의 가슴에 볼이 거의 닿을 지경이었다.그녀는 이를 악물고 낮은 목소리로
“어때요? 고민 좀 해봤나요? 벗을 거예요? 말 거예요? 다들 기다리고 있잖아요.”백채영이 짜증을 내며 재촉했다.모두의 시선이 백아영의 얼굴에 집중되었다.심지어 게스트석에 앉아 있던 이성준도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는데, 싸늘한 시선에서는 온기란 찾아보기 힘들었고 위협적인 느낌이 물씬 풍겼다.보이지 않는 압력이 백아영을 향해 물밀 듯이 몰려왔다.백아영은 힘겹게 결정을 내리고 잔뜩 긴장한 목소리로 대답했다.“벗을게요.”이성준의 눈이 살짝 가늘어지더니 날카롭게 번뜩였다. 고작 이따위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정녕 집안 망신을 시킬 작정인가? 백아영은 손을 들어 마스크를 천천히 벗었다.곧이어 화상 입고 나서 착용하는 압박 마스크가 눈앞에 나타났다.백채영은 할 말을 잃었다.비록 마스크 자체도 보기 흉했지만 실제 얼굴은 드러나지 않았다. 환자한테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모습이라 망신당할 정도는 아니었다.목적 달성에 실패한 그녀는 발끈했다.“백영미 씨, 지금 장난해요?”화장실에서 이성준을 마주친 아찔한 기억은 백아영에게 경종을 울렸다. 따라서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려고 일부러 압박 마스크를 찾아서 얼굴에 썼다.다만 정말 유용하게 사용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백아영은 억울하다는 듯 물었다.“이 마스크도 벗어야 하나요?”화상 수술 후 착용하는 압박 마스크는 2차 감염을 유발할 수 있으므로 함부로 벗어서는 안 된다.그런데도 백채영이 벗으라고 강요한다면 욕이란 욕을 다 먹을지도 모른다.그녀는 화가 나서 가슴이 답답할 지경이지만, 딱히 할 말은 없었다. 다만 씩씩거리며 백아영을 잡아먹을 기세로 째려보았다.백아영은 다시 마스크를 쓰고 예선 통과 카드를 받으러 다가가서 정중하게 말했다.“감사합니다.”그녀는 이내 말을 마치고 잽싸게 뒤돌아서 떠났다.이성준은 멀어져가는 백아영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꽤 영리한 여자군!백채영은 이성준의 시선이 닿는 곳을 보자 기분이 더욱 언짢아졌다. 이성준을 초대한 이유는 멋진 활약을 펼치는 그
이성준은 잠시 침묵하더니 쌀쌀맞게 말했다.“아니.”그녀는 연기라면 도가 텄다. 임신한 몸으로도 세상 청순가련한 척하는데, 지금이라고 뭐가 다르겠냐는 말이다. 그녀에게 다시 속아 넘어갈 일은 없을 것이다.사실 백아영은 진짜 걸어서 돌아갈 계획이다. 비록 멀지만 단돈 천 원인 버스 요금마저 현재는 최대한 아껴야만 하는 지출이다.그녀는 돈이 없었다. 주머니를 탈탈 털어봐도 고작 만 원 있을 뿐, HL한의학 학술대회가 마무리되려면 아직 보름이나 남았다.이성준의 집에서 공짜로 먹고 잔다고 해도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웠다.결국에는 생활비를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 구하는 방법을 모색해야 했다.다음 날 아침 일찍 백아영은 마스크를 쓰고 길거리에서 아르바이트를 찾아 나섰다.그런데 아르바이트를 구하기도 전에 이영철이 보낸 사람한테 붙잡혔다.“사모님, 회장님께서 부르십니다.”백아영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사실 이성준과 강제로 결혼하게 된 것도 이영철의 뜻이었다. 하지만 이영철을 직접 만난 적도 없는데 왜 그녀를 선택했는지 당최 납득이 안 갔다.대체 무슨 목적일까? 그녀가 아니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는 건가? 백아영도 머릿속으로 떠도는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이영철을 찾아가서 직접 물어보고 싶었다.본가에 도착하자 맞은편 가죽 소파에 어떤 어르신이 위풍당당하게 앉아 있었다. 백아영은 그를 마주하면서 두려운 기색이 전혀 없이 똑 부러지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할아버지, 대체 왜 저한테 성준과 결혼하라고 강요했어요?”이영철은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이 할아비는 네가 착한 아이라는 걸 알고 있단다. 우리 성준이랑 어울리는 여자는 너뿐이니까.”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백아영이 아니었다. 이처럼 터무니없는 거짓말이라니!그녀는 무려 감방에 다녀온 노양심 의사로 악명이 자자했다. 그녀를 만났다고 하면 사람들은 너도나도 침 뱉기 바빴고 적어도 30분 이상 욕설을 내뱉었다.“아영아, 내 말 안 믿어도 돼. 하지만 성준과 결혼해도 나쁜 점은 없잖아. 만약 3개월 동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