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전 세상이 돌계단으로 이루어져 있으면 좋겠습니다. 가야 할 곳은 계단참에 있고요. 몇 칸을 오르고 내리면 되는지만 외우면 되니까요.” 무시무시한 말을 해맑게 어린 아이처럼 한다. 현덕은 문득 궁금해진 것을 물어본다. “그러면 넓고 뻥 뚫린 공간은 어떠하지? 훨씬 안전하지 않은가?” “아니요. 익숙해지기가 너무 힘듭니다. 테두리만 빙빙 돌아보겠지요. 몇 번을 안쪽으로 파고들어도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가늠하기 힘듭니다. 방향을 잡을 수도 없지요. 계단은 방향이 정해져있어 편리합니다.” 얘기를 듣기 전부터 어느 정도 감은 잡혔다. 연무장 같은 공간에서는 오히려 달리지 못하겠다. 허허벌판에서 눈감고 달린다고 생각하니 제 풀에 놀라 넘어지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막막한 미지의 영역. 그나마 소리라도 있으면 방향은 잡히겠지. “그래도 자네를 너른 무대 위에 올려두고 연주를 시켜보고 싶긴 하네.” “그때는 직접 이끌어주십시오.” “안하겠다는 소리는 안하는군.” 시답잖은 농담을 하며 지율을 따라 암자 안으로 들어갔다. 작은 공간에 가구들이 최대한 벽을 향해 자리잡고 있고, 실수로 잘못 짚어도 쓰러지지 않게 잘 고정되어 있다. 그리고 탁자 위는 깨끗하고, 선반 칸에는 물건을 하나씩만 올려두고 있다. 머리보다 높은 위치에는 물건이 없다. 그리고 탁자 앞 하나뿐인 의자에는 한 남자가 비스듬히 문쪽을 향해 앉아있었다. 현덕을 보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 포권을 하며 인사를 한다. “화산의 제자 백현白賢이라고 합니다. 현덕 마마님을 뵙습니다. 율아, 약을 좀 가져왔다.” 쉰은 넘어 보이는 그 남자는 품에서 작은 비단주머니를 꺼내 다가오는 지율의 손에 쥐어주었다. “장로님 이건.”
지율이 차를 호로록 마시고는 내려놓는다. 숟가락 조금 앞에. 현덕은 그 위치를 기억해둔다. 입에 있는 만두를 꿀꺽 삼키고 천장을 보며 말을 꺼냈다. “나는 어머니의 연주를 들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어. 사실 궁에서의 음악이란 제례악이 제일 자주 연주되고, 그 다음이 연회지. 아, 그러고보니 어머니뿐만이 아니라 개인의 연주는 들어 본 기억이 없군.” 고개를 내리니 반측면을 보이며 턱을 살짝 든 지율이 보인다. 귀를 이쪽으로 향해 있는 것이다. “어머니의 연주는 자네와 비슷한가?” “아니요.” 답이 빠르게 나와 놀랐다. 여전히 옆모습을 보여주며 고개를 살짝 비스듬히 기울인다. “다릅니다. 아주.” 그리고는 정면 얼굴을 보여준다. 젖었던 흰 천이 말라 가장자리가 회색인 둥근 얼룩을 만들어냈다. 꼭 눈물자국처럼 보인다. “아직 스승님의 발끝에도 이르지 못하였습니다.” 단호한 목소리에서 어머니에 대한 지극한 존경심이 묻어난다. “미안하네.” “네?” “내가 자네에게서 어머니를 빼앗았어.” 시끄러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말을 꺼낸 당사자부터 머릿속에 수많은 말이 맴돈다. 왜 대뜸 저 말을 꺼냈을까. 지율이 천천히 입을 뗐다. “이미 많이 쇠약하셨습니다.” “내가 쐐기를 박았지.” 지율의 입술이 우물거렸으나 차마 떼어지지는 않는다. 그걸 보던 현덕이 먼저 말을 꺼냈다. “나는 죽음을 몰고 다니기 위해 궁을 떠났어. 처음은 어머니였지. 흐으. 어머니께 또 다른 아들이 있는지 알았다면, 그리 쏟아내시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을 거야. 난 어머니의 죽음을 방조했다.” 지율은 반듯하게 앉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둥근 눈썹이
현덕은 목욕통에 앉아 겉을 깨끗이 하는 동안 몸 속은 온통 소리로 가득차 있다는 걸 느꼈다. 물소리와 공명하는 거문고 소리가 머리에서 발끝까지 흐르고 또 흐른다. 끝나지 않고 계속 맴돈다. 어머니께서는 제자의 연주에 흡족해하며 떠나셨을까? 난 어머니의 연주를 들어본 적이 없다. 생각 사이사이에 계속 단단한 음들이 끼어 든다. 어쩌면 지율의 연주는 죽은 자가 아닌 산 자를 위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네 마음을 위한 진혼곡이었겠지. 그리고 나를 위로한다. 장례는 사람이 죽어 시작되는 것이지만 산 자들을 위한 의식이다. 죽은 자의 귀에 이승의 아름다운 음악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몸을 닦고 옷을 갖춰 입고 돌아왔을 때 지율은 침상에 걸터 앉아 있었다. 눈이 없다는 것은 상당히 많은 표정을 감출 수 있는 거였다. 시선조차 없다. “좀 더 쉬지.” 현덕은 탁자 위에서 김을 모락모락 피워올리고 있는 만두와 계란탕을 바라보았다. 기탁이 두 그릇씩 준비해두었다. “이 녀석은 자기 몫은 챙겨 먹고 있는건가.” 궁에서의 버릇을 못버리고 혼잣말을 궁시렁대며 지율에게 다가갔다. 현덕의 주위로는 항상 궁인들이 있었고, 말을 삼킬 이유가 없었다. 그들이 알아서 주워섬겼다. 답이 필요 없는 말도 예사로이 내뱉곤 했다. 그렇게 웅얼거리며 이연에게 사서삼경을 읊어준 것도 있었다. “정말 태리님을 많이 닮으셨습니다.” 지율은 현덕이 팔을 내어주자 그것을 붙잡고 이끄는대로 걸으며 말을 걸었다. “어떤 부분이?” 다른 건 몰라도 얼굴은 아닐 것이다. 이 자는 보지 못한다. “혼잣말 하시는거요. 스승님도 홀로 오래 지내시다보니 제가 있어도 혼잣말을 많이 하셨습니다. 처음엔 하나하나 모두 답을 해드리다, 그럴 필요 없다는 것을 깨닫는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오늘로 칠 일째다. 유배라고는 하나 도량에 몸담았기에 어머니는 화산에 묻혔다. 수많은 도사들이 어머니 가시는 길을 깨끗이 제령해주었다. 아름드리 향나무 아래 화산에서 저문 다른 도사들과 함께 묻혔다. 현덕은 울지 않았다. 이미 어머니를 품에 안고 보내드렸기에 울 이유가 없었다. 기탁이 옆에서 대신 곡을 해주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거문고 소리가 거의 끊이지 않고 이어지고 있다. 지고지순하게 아름다워 오히려 거부감이 드는 소리이다. 생을 다한 어머니를 안고 있을 때 들었던 그 음악이다. 감정은 단 한 톨도 끼어드는 것을 용납하지 않겠다는듯 연주하지만 메마르진 않다. 한 음 한 음 치밀하게 계산된 소리이건만 딱딱하지 않고 완벽에 가까운 울림을 준다. 영롱하면서도 따스하고, 하늘을 뚫을듯 날카롭게 솟아오르다가도 깊은 물 속에서 끓어오르듯 격정적이다. 현덕은 향나무 등치에 기대고 앉아 단 한 음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눈을 감고 그렇게 듣고 있었다. 새벽 이슬에 빗방울이 더해지기 전까지는 그리하였다. 기탁이 조용히 다가와 우산을 건네주어 한참을 바라보다 받아들었다. 이제껏 끼니도 다과도 다 물렸건만 이것만은 왜 물리지 못하였을까. 접힌 우산의 몸통을 부여잡고 일어섰다. 바보같이 휘청거렸다. 나무기둥에 빈 손을 대고 잠시 서서 몸의 운행을 다스렸다. 피가 수월히 돌고 몸이 고루 따스해졌을 때 발걸음을 뗐다. 망설이지도 돌아가지도 않는다. 줄지어 늘어선 묘비 중 어머니의 묘비 앞에 앉은 그에게로 다가갔다. 영롱한 빗물이 어두운 소리가 튕겨지는 것을 막아내고 제 몸을 잘게 부서뜨리며 날아올랐다. 비산하는 물방울 중에는 그새 색이 변해 분홍빛으로 물든 것들이 있었다. 현덕은 검붉은 손끝에 시선을 두고 우산을 펼쳤다. 그만하라는 말이 혀끝까지 밀려 올라오지만 꾹 삼킨다. 어디 감히 내가 뭐라고, 어머
턱 끝까지 다가온 사룰의 얼굴을 제인은 매섭게 노려보았다. 생각보다 손아귀 힘이 세다. 좁은 공간에 둘 뿐인 상태에서 살인자에게 무기를 빼앗기는 것만큼 위험한 일은 없다. 제인은 이를 뿌득 갈며 창대를 빠르게 돌려 사룰의 손을 떨쳐냈다. 은령은 손을 놓으며 입술을 슥 핥았다. 이 자의 동료라면 금발의 의뭉스러운 남자다. 항상 구부정한 자세로 만사가 귀찮다는듯 돌아다니지만, 이 자에게 도법을 가르칠 때 신출귀몰에 가까운 움직임을 보여주는 것을 봤었다. 어떻게 알게 된걸까. 과연 물어본다고 순순히 답을 할까? 뭐라 물어봐야할까. 이런 게 은령은 너무 어렵다. 은령이 고민하는 동안 제인이 먼저 질문을 던졌다. ”한가지만 묻지. 네가 하는 일은 전하께서도 인정한 일인가?” “…그래.” 은령은 바로 답하지 못했다. 갑작스러운 반말 때문은 아니다. 아주 짧은 머뭇거림이지만 부정으로 해석한 제인은 문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말보다 여백이 더 솔직한 법이다. 창대를 팔꿈치 안쪽에 걸어 옆에 세우고 문에 등을 기대며 사룰을 올려다보았다. “이제 여기서 대기 하겠습니다. 맘 편히 지내시지요.” ”나가.” “저는 여인들 뿐인 섬에서 함께 헐벗다시피하며 자랐으니 내외하실 필요 없습니다.” ”그게 문제가 아닐텐데.” “어차피 태자비는 민하 아가씨입니다. 제가 불미스러운 일을 벌일 필요도 없지요.” 얼토당토 않은 말로 한마디도 지지 않는 이 남자에게 은령은 짜증이 치밀었다. 게다가 첫 시도부터 이렇게 사사건건 막힌다는 사실에 등줄기가 선득해졌다. 그 쭈뼛한 느낌을 가리려 제인의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숲과는 사뭇 다른 시원한 초록빛의 눈동자가 물결치듯 일렁인다. “바다.” ”뭐?”
이럴까봐 성 밖으로 내보낸 것이었다. 지난 이 년간 현덕의 옆에 두고 궁 밖에서도 적응할 수 있게 기탁을 붙여 바깥 세상에 대해 알려주라 하였다. 궁인들에게는 은령이 현덕의 병이 옮아 생사를 오간다고 퍼뜨려 서서히 은령을 잊도록 했다. 은령의 빈자리가 느껴지지 않게 해두었다. 그걸 은령은 궁인들이 자신의 최근 얼굴을 모르게 하기 위한 방법으로 삼았다. 살을 빼고 눈썹을 다듬고 연의 화장법을 익히고 말투와 행동거지를 바꿨다. 그렇게 이국의 공주가 되어 궁으로 돌아왔다. 다들 알아보지 못했다. 자신감을 가지고 궁녀의 모습으로 궁 안을 활보했다. 그러나 숙수가 바로 알아보았다. 원래부터 자주 마주친 이가 아닌지라 알아볼 거라고는 생각치 못했다. 그래서 그 눈부터 그어버렸다. “나중에 얘기하자. 지금은 작약궁으로 돌아가는 게 우선이야.” 이연은 은령을 품안에 들고 문을 나섰다. 문 너머는 바로 사룰 공주의 침실이다. 은령을 침상에 내려놓자마자 뒤돌아보지도 않고 방문 너머로 떠났다. 자신이 있어서는 안 될 곳이다. 국사와 함께 궁의 진법은 모조리 손보았고 이연은 궁 안 어디든 갈 수 있지만, 사룰이 된 은령과 같이 있는 모습을 보여서 좋을 게 없다. 은령은 문을 닫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여유는 여기까지다 들고 있던 곡도를 침상 밑에 밀어넣고, 향로에 불을 붙였다. 아직 진득히 남아있을 피냄새를 지워야한다. 사룰 공주가 되기 위해 머리를 굵게 땋아내렸다. 이연이 씻겨 주어 손빗으로도 수월히 빗겼다. 그 때 문밖에서 소리가 들렸다. “공주님 안에 계십니까?” 바로 답할 필요는 없다. 나른하게 목소리를 죽이고 천천히 답한다. “무슨 일이지?” 그러나 손은 다급히 호갑투를 꺼내 꼈다. 최소한의 방비다. ”불이 켜져 있기에 괜찮으신가 하여 찾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