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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 그러니까―
스무 살. 한여름의 소나기처럼 그를 만났다.
그날도 여느 때처럼 아버지와 그 여자의 싸움을 견디지 못하고 집에서 뛰쳐나온 날이었다.
분명 좀 전까지 시퍼런 하늘에 쨍쨍하게 빛나던 해가 시커먼 구름 뒤로 자취를 감추었고, 잿빛 하늘의 대찬 빗줄기가 땅을 뚫을 기세로 쏟아지고 있었다.
서현은 입술을 잘근 씹어 물고는 그대로 폭포수 같은 빗속으로 뛰어들었다.
하지만 빗줄기가 얼마나 세차던지 대문을 나서는 그 짧은 순간에도 벌써 머리통이 얼얼했다. 게다가 신발도 신지 못한 발바닥은 이미 깨질 듯이 시려왔다.
얼마 못 가 내달리던 온몸은 깊은 물 속에 뛰어든 듯, 가득한 물기로 무거워졌다. 그럼에도 메마른 가슴은 조금도 젖지 않고 텁텁하기만 했다.
우렁찬 빗소리에도 집안에서 나던 굉음이 고막 가까이 진동하는 듯했다.
‘그냥 이대로 아무도 모르게 사라져 버렸으면.’
수없이 되뇌던 말인데 오늘은 좀 더 축축하고 퀴퀴하게 느껴졌다.
서현은 아득해진 시야를 닦고 또 닦으며 계속 달렸다.
하지만 제아무리 지독한 오기라도, 하늘에서 뿜어대는 세찬 빗줄기에는 비할 바가 아니었다. 서현의 몸은 달리면 달릴수록 심하게 떨려왔고, 발바닥은 얼어붙어 깨질 듯이 아팠다.
한여름의 비가 이렇게 서늘할 일인가. 불규칙하게 터지는 숨결마다 차가운 쇠 맛이 목젖을 파고들었다. 그것은 점점 비릿해지더니 숨구멍을 뜨겁게 달구었다.
그렇게 서서히 눈앞은 캄캄해져 갔고, 더 이상 팔다리에는 어떤 감각도 느껴지지 않을, 딱 그즈음이었다.
‘퍽-!’
시린 물기에 단단한 온기가 세게 맞닿았다.
“야!”
제 몸 안으로 와락 달려든 여린 몸을 한 품에 끌어안은 남자의 가슴팍이 놀란 듯 크게 오르락내리락 거렸다.
놀란 가슴께에서 여자의 엷은 숨결이 느껴졌다. 금방이라도 꺼질 것 같은 숨소리에 여자의 허리를 감싼 남자의 팔에는 본능적으로 힘이 바짝 들어갔다.
그 작은 힘에도 바스러질 듯 파르르 떨리는 몸….
혹시라도 이 작은 숨소리가 정말 꺼져버릴까, 이 작은 몸이 제힘에 바스러질까 봐 무서워진 남자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야 너, 너 미쳤어? 비는 죄다 맞고…이런 날 왜 앞도 안 보고 뛰어다녀?!”
그런 제 목소리에 여자애의 눈꺼풀이 사르륵 진동했다. 그러더니 이내 힘겹게 벌어지는 애처로운 입 모양.
“……말…이…야.”
무슨 말인지 제대로 들리지는 않았지만, 여자가 살아 숨 쉬는 것만으로도 남자의 놀란 가슴이 잠시 진정됐다.
“그래, 말해 봐. 말. 정신 좀 차려보라고!”
“…너 뭔데…반말이냐고…”
여자의 새파란 입술 새로 나온 말이 제법 까칠해서 남자가 당황해 입을 뻐끔거렸다. 그 찰나에 여자의 고개가 힘없이 축 늘어졌다.
“야!”
고함과 함께 남자는 서현을 번쩍 안아 들었다. 온몸이 빗물에 흠뻑 젖었는데도, 제 몸이 아닌 양 힘없이 축 늘어졌는데도, 남자에게 서현은 너무나도 가벼웠다.
* * *
“…으, 으.”
온몸이 뜨겁고 얼얼했다. 가늘게 뜬 서현의 눈이 두어 차례 슴벅였다.
이내 서현의 초점이 낯선 공간을 인식했는지 또렷해질 즈음, 불쑥 시야를 가득 메운 낯선 살색에 눈이 번쩍 뜨였다.
번쩍 뜬 눈으로 다시 본 그것은 분명 남자의 몸이었다.
“으아아아악!”
“악!”
제 비명에 살색의 주인도 덩달아 비명을 질렀다. 남자는 가려지지도 않는 커다란 몸을 가리며 소리를 질렀다. 이윽고 저보다 더 사색이 된 남자가 서현을 바라보았다.
눈썹께까지 구불구불 흘러내린 검은 머리칼, 쌍꺼풀 없이 길게 뻗은 눈매는 매서워 보였지만, 왼쪽 눈 아래 작은 점과 말간 눈동자 때문인지 이상하게 무섭지는 않았다.
아…여긴 어디고, 저 남자는 누굴까.
그래, 둘 중 하나겠지.
“납치범이세요? 아니면 생명의 은인?”
뻐근한 몸을 일으켜 앉은 서현은 질문을 하고 나니, 집안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작은 오피스텔이었다. 딱히 인테리어랄 것도 없는 심플하고 단순한 이 공간은 침대에서 부엌까지 한눈에 들어왔다.
“뭐? 납치범?!”
남자는 빨래 건조대에서 티셔츠 한 장을 휙 집어 입었다. 탄탄한 몸이 커다란 옷에 가려진 그에게서는 소년미가 물씬 풍겼다.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인 채 못마땅한 얼굴로 되묻는 남자에게 서현은 깔깔해진 목을 가다듬으며 대답했다.
“…어차피 뭐든 상관없어요.”
“어쭈? 상관이 없어?”
서현의 고개가 푹 떨어졌다. 그와 동시에 포근한 이불 위로 눈물이 떨어지며 툭, 툭 소리를 냈다.
“…야. 상관없다면서…왜 우냐?”
그러게. 나 왜 울지.
남자의 물음과 자신의 반문 이후 눈물은 더 거세게 쏟아져 내렸다. 어깨가 들썩이고 몸이 떨려왔다.
아까부터 느껴진 이 집의 온기 때문일까?
이 별거 없는 집에는 온기가 가득했다. 낯선 남자의 집인데도, 처음으로 안심이 됐다. 뛰쳐나온 그 집에서는 느껴본 적 없는 묘한 안도감에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야, 야…”
당황한 남자가 말을 더듬으며 가까이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납…치 그런 거 아니야. 나 그런 놈 아니야…아, 진짜 아닌데.”
서현이 고개를 들어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희뿌연 시야 속 그 남자는 우는 저 때문인지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커다란 키를 한창 구부리고 있었다.
끅끅거리는 숨을 간신히 삼킨 서현이 입을 열었다.
“…끅. 흐윽, 끅. 근데…끅. 근데 왜 자꾸…반말이…세요?”
“어…? 아, 미안…근데 나 진짜 나쁜 놈 아니야…요.”
남자는 서현을 안심시키려는 의도인지 자세를 더욱 낮추며 침대 가까이로 다가왔다. 서현은 그런 그가 여전히 무섭지 않았다. 오히려 가까이 다가온 그의 얼굴이 선명해질수록 안심되었다.
나 혹시 외모지상주의였나.
그때, 남자가 조심스럽게 침대에 등을 기대며 바닥에 살포시 앉았다. 그는 고개를 돌려 서현의 얼굴을 살피며 물었다.
“…다 울었냐?”
어느새 진정된 서현은 눈과 코를 벅벅 문지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는 고개를 돌려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서현은 그의 뒤통수를 보며 겨우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름, 나이…말해줘요.”
“강지음. 스물셋.”
강지음…오빠였네.
서현은 얕게 헛기침하곤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답했다.
“마서현. 난 스무 살…”
순간 지음의 뒤통수가 삐딱하게 기울었다. 곧 저를 슥 올려다보는 지음에게 서현은 입술을 삐쭉이면서 말했다.
“반말해…나도 할게.”
서현의 말에 지음은 금세 픽 웃더니 침대에 머리를 젖혀 기대었다. 그러자 지음의 옆태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날렵한 턱선 아래로 두껍게 움직이는 그의 목젖을 보며 서현은 저도 모르게 침을 크게 삼켰다. 때마침 지음의 시선이 서현을 향했다. 서현은 순간 달아오르는 얼굴을 얼른 감췄다.
곧 그의 다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밥 먹을래?”
“이연 작가, 아니…강지음…내 첫사랑이야.”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고 나서야 서현은 자신이 왜 이런 이야기를 했는지 조금 이상했다. 회사 생활에서 굳이 개인사를 운운하는 건 득보다 실이 많다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건하는 상사이기 전에 자신을 아껴주는 선배였고, 지금 그가 묻는 것도 업무 때문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계속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게 오히려 함께 일하기엔 더 불편할 것 같았다.“첫사랑?”생각보다 더 당황한 얼굴로 건하가 되물었다.하긴 ‘남자’ 얘기라곤 꺼내본 적 없는 제 입에서 대뜸 ‘첫사랑’이라니.“응, 뭐 그냥 어릴 때 동네에서 오다가다 알던 사람. 그런 거 있잖아.”“좋아했어? 네가?”건하의 물음에 서현의 턱이 얕게 떨렸다.아무렇지 않게 남의 일처럼 첫사랑이라는 말을 꺼내 놓고서, 정작 ‘좋아했냐’는 단순한 물음 앞에서 서현은 수많은 말을 삼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그랬겠지. 첫사랑인데. 선배도 해봐서 알 거 아냐. 별거 아니잖아?”“그래?”건하의 짧은 되물음에 서현이 ‘그럼’ 하는 얼굴로 스테이크에 포크와 칼을 천천히 밀어 넣었다.“난 못 잊었는데, 첫사
“선배, 이건 너무 거창한데.”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새하얀 린넨으로 깔끔하게 덮인 테이블 위에는 반짝이는 커트러리와 크리스털 잔이 정갈하게 놓여 있었다. 곧 검은 정장을 차려입은 서버가 조용히 다가와 물잔을 채워주웠다. 건하는 익숙한 듯 메뉴를 넘기며 몇 가지를 간결하게 주문했고, 서버는 정중하게 답한 뒤 자리를 떠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까눌레보다도 작은 아뮤즈 부쉬가 먼저 나왔다. 작은 구성임에도 그림처럼 예쁘게 놓인 음식은 선뜻 먹기 아까울 정도였다. “먹어 봐. 그만 바라보시고.” 자신에게는 한없이 낯설고 어색한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이건만, 선배에게는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공간처럼 보였다. 새삼스러웠다.이렇게 오래 알고 지낸 사람인데도, 문득 윤건하라는 사람이 낯설게 느껴졌다. “밥, 술, 해장, 디저트 다 한 번에 까려고 머리 쓴 거지?” “뭐, 머리 쓰면 봐주고?” “어림없지! 술이랑 해장은 내가 가자는 곳으로 가요. 나 이런 거 어려워. 맛도 모르고.” 이어지는 전채요리와 수프도 고급 재료의 풍미와 다채로운 색감이 오감을 자극했다. 수프의 적절한 온도가 어지러운 속을 조금씩 달래주었다. 따뜻한 수프가 속을 부드럽게 풀어줄 즈음, 건하가 냅킨으로 입가를 가볍게 닦으며 낮게 물었다. “서현아, 나 뭐 하나 물어봐도 될까?” “…선배 그날은,” “강지음 그 사람, 혹시 너한테 중요한 사람이야?”
“…너 울어?”어느새 기울어 있던 몸을 바로 세운 지음이 서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스크린에서 쏟아지는 커다란 빛이 그의 얼굴 위를 여러 색으로 스쳐 지나갔고, 뒤편에서는 고조된 영화의 OST가 장중하게 울려 퍼졌다.영화 때문이었을까.미안하다는 그 말 때문이었을까.그리고 왜…왜 나 때문에 못 자는데!진짜 싫어.진짜, 너무 싫어…!지음은 한참 동안, 제 커다란 재킷에 파묻힌 채 아이처럼 우는 서현을 말없이 바라봤다. 이내 자리에서 일어난 지음이 서현의 손목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가자.”지음은 그 이상 별다른 말 없이 울고 있는 서현을 이끌고 상영관을 빠져나왔다. 어두운 상영관 문을 지나 텅 빈 영화관 복도를 걸어, 로비, 그리고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닫힌 엘리베이터 안에는 서현의 엷은 흐느낌만이 희미하게 맺혔다.“…놔, 알아서가.”여전히 입을 꾹 다문 채 제 손목을 잡고 있는 지음의 뒤통수가 괜히 미웠다.아니, 더 싫은 건 바보처럼 그의 앞에서 울어버린 자신이었다.“영화가 그렇게 슬펐어?”서현이 손목을 빼내려 하자 지음이 오히려 손에 힘을 주며 물었다.“원래 슬픈 영화잖아.”한참을 뒤통수만 보여주던 지음이 천천히 돌아섰다. 밝은 조명 아래 드러난 그의 얼굴은 조금 상기되어 있었다.“…근데 왜 날 보고 울어.”
“안녕하세요, 윤건하 대표님.”“그쪽이 왜, 여기-.”그 순간, 기획안 하나가 건하의 뇌리를 스쳤다. 현재 휴가 중인 기획팀 권지혁 팀장이 주승에게 처음 단독으로 맡긴 건이라며 잘 좀 도와주라고 내밀었던 기획안이었다.한창 주가를 달리던 여 아나운서가 프리를 선언한 뒤, 본인 이름을 건 시사·교양 프로그램의 진행자 롤을 꿰찼고, 예능과 라디오는 물론이고 오프라인 특강과 강연까지 섭렵했다며 해당 아나운서의 에세이 출간을 기획했다고 했었다.그게 바로 홍연지 아나운서였다.“아…이게 이렇게 되네.”건하가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혼잣말을 내뱉자, 연지가 웃음기를 걷어내곤 소파에 앉으며 물었다.“오늘따라 나를 반기는 사람이 영 없네요? 나 그 정도는 아닌데. 아니에요?”“누가 안 반겨요? 난 반가워하는 중인데. 주승 씨랑 미팅은 잘했어요?”“와, 진짜 대표님 같네. 그날은 생 양아치 아닌가 했거든요.”건하가 연지의 맞은편에 앉으며 느긋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아무래도 그게 쉬울 뻔했는데, 일이 또 이렇게 재밌어지네요.”"세상은 좁고, 사람 인연은 질기구. 그쵸?"연지가 다리를 천천히 꼬았다. 치마 트임 사이로 연지의 새하얀 허벅지가 드러났다.“저도 다시는 볼 일 없을 줄 알았는데, 이렇게 만나서 얼마나 놀랐는지. 아무튼 잘 부탁드려요, 윤 대표님. ”단정한 차림과 달리 연지의 말과 몸짓에는
“어머, 서현아. 괜찮아? 발을 헛디뎠나 보다. 내가 너무 반가워서 놀랐나? 하하, 어떻게에—”지음의 한 팔에 안기듯 기대 있던 서현을 연지가 다시 잡아당겼다. 얼결에 지음의 품에서 떨어져 나온 서현이 정신을 차리고 연지의 손을 휙 뿌리쳤다.“반가운 건 몰라도 놀라긴 했네. 미팅하러 온 거면 저쪽 작은 회의실로 가면 돼.”“어머, 안녕하세요!”연지는 서현의 말에 대답은커녕 단칼에 눈길을 거두곤 지음을 바라봤다. 조금 전까지 서현에게 향해 있던 표정과는 전혀 다른, 놀란 기색이 스친 얼굴이었다.지음은 연지의 인사를 가벼운 목례로 받아주곤 서현을 향해 입을 열었다.“대리님, 가시죠.”“네? 가긴 어딜-.”역시나 지음은 서현의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발길을 옮겼다.하, 정말…!지음도 모자라 연지까지.짧은 시간 안에 극심한 피로가 몰려들었다. 서현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그래도 연지와 마주 서 있는 것보다는 지음을 따라가는 편이 나았다.그때였다.연지는 자신을 지나쳐 멀어지는 지음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작게 중얼거렸다.“분명 맞는데…”서현의 걸음이 아주 잠깐 느려졌다.연지가 지음을 알고 있는 건가?그 의문이 머릿속을 스칠 즈음, 주승이 잰걸음으로 다가왔다.“대리님, 괜찮으세요?”“응, 신경 쓰지 말고 얼른 회의실로 안내해. 미팅 잘하고.”주승은 여전히 걱정스러운 눈빛이었지만 더 묻지 않은 채 연지를 작은 회의실로 안내했다. 두 사람의 뒷모습을 잠시 확인한 서현은 이내 고개를 돌렸다. 이미 지음은 사무실 밖으로 나간 뒤였다.“하…….”그를 따라 사무실을 나선 서현은 입구를 벗어나자마자 지음을 잡아 세웠다.“가긴 어딜 가냐고.”지음이 천천히 돌아섰다. 지음은 왠지 화가 나 보였다.“저 여자 뭐야? 뭔데 너를-,”“나를 뭐?”“뭔데 너를 밀어. 분명히 밀었잖아.”서현은 뭐라 대답해야 할지 망설였다.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저렇게 화난 얼굴을 하고 있는 지음을 보고 있자니, 이상하게 마음 한구석이 저릿했다.
“마 대리, 인사는 이따 하는 걸로 하고 잠시 자리 좀.”건하가 서현에게 나긋한 투로 양해를 구했지만, 서현은 토요일 호텔 로비에서 느꼈던 팽팽한 긴장감이 겹쳐 내심 불안해졌다.하지만, 이 불편한 구도에서 벗어나는 것 외엔 달리 방법이 없었다.“네.”짧게 대답한 서현이 조용히 회의실을 빠져나왔다.서현이 회의실 문을 닫고 나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주승과 채연이 빠르게 달라붙었다.“대박! 대리님이 진짜 이연 작가 잡아 오신 거예요?!”주승이 가슴에 태블릿과 프린트를 한가득 끌어안은 채 호들갑을 떨었다.“잡긴 뭘 잡어.”서현이 애써 시큰둥하게 대꾸하며 회의실 쪽을 힐끗 바라봤다. 유리문 너머로 두 사람의 실루엣이 보였다. 괜히 가슴이 답답해졌다.평소 점잖던 채연도 살짝 흥분한 목소리로 끼어들었다.“역시 우리 마숲의 에이스! 근데 강 작가님이 말씀하신 게 진짜네요! 아우라가 완전…와.”“채연씨, 디자인 브리핑 작성 다 했어?”“아…거의 다 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주승님 기획 미팅 참관해도 된다고 하셔서 가려던 참이라…”서현이 채연의 말에 주승에게 시선을 슥 옮기자, 주승이 발을 동동 굴렀다.“떨려 죽겠어요! 사무실 곧 도착하신다는데…!”서현은 그런 주승을 바라보다 픽 웃었다.“준비한 만큼만 해요. 괜히 잘하려고 하지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