تسجيل الدخول장례식이 끝난 뒤에도 지호와 휘웅의 사이는 겉으로 보기엔 예전과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다.
여전히 하루에도 몇 번씩 연락을 주고받았고, 시간이 맞으면 함께 밥을 먹었다.
지호는 학교에서 있었던 시시한 일들을 쉴 새 없이 떠들었고, 휘웅은 늘 그랬듯 말없이 듣다가 가끔 짧게 웃었다.
누가 봐도 평범한 연인의 모습이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단 하나, 휘웅의 휴대전화가 이전보다 훨씬 자주 울리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처음엔 지호도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형의 장례와 관련된 일들이 아직 끝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가족의 뒤처리를 하는 일이 얼마나 복잡할지, 굳이 묻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상한 점은 따로 있었다.
전화가 올 때마다 휘웅은 액정에 뜬 이름을 잠시 바라보다가, 지호가 곁에 있으면 늘 진동으로 바꿔 놓았다.
“잠깐 전화 좀 받고 올게.”
짧게 말하고 자리를 비우는 일도 점점 잦아졌다.
지호는 그럴 때마다 별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형 일 때문이겠지.'
그렇게 생각하면 충분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마음 한구석이 조금씩 무거워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늦은 밤이었다.
휘웅은 거실 소파에 깊숙이 몸을 묻은 채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며칠째 이어진 장례 절차와 병원 일 때문인지, 눈가에는 피곤한 기색이 짙게 내려앉아 있었다.
그때, 테이블 위에 놓인 휴대전화가 짧게 진동했다.
화면을 확인한 휘웅은 한숨을 삼킨 뒤 통화 버튼을 눌렀다.
“네.”
잠시 정적이 흐른 뒤,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휘웅아, 나 미선이야.”
서툰 한국어였다. 단어 하나를 꺼낼 때마다 조심스럽게 고르는 말투였다.
“내일... 병원 같이 가줄 수 있어?”
휘웅은 눈을 감았다.
“몇 시예요?”
“열 시.”
잠시 뜸을 들이던 미선이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너 바쁘면 안 와도 돼.”
“...”
“근데 나 혼자는 조금 무서워.”
작게 떨리는 목소리였다.
휘웅은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형이 떠난 뒤, 미선은 완전히 혼자가 되었다.
한국말도 서툴렀고 한국에 아는 사람도 없었다.
본가에서 마련해 준 호텔에 머물고 있었지만, 임산부가 장기간 지내기에는 턱없이 불편한 곳이었다.
무엇보다, 그녀는 이제 혼자 몸이 아니었다.
며칠 전, 미선은 떨리는 목소리로 휘웅에게 말했다.
“나... 아기가 있어.”
임신 오 개월. 그 말을 듣는 순간, 휘웅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생각해 보면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깡마른 몸에 비해 유독 도드라져 보이던 배가 계속 마음에 걸렸으니까.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혼자 미국으로 돌아가 아이를 낳고 키우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했고, 그렇다고 낯선 한국에서 홀로 버틸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휘웅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형은 떠났고, 미선과 뱃속의 아이만 남았다. 그리고 그 모든 책임이 어느새 자신의 몫이 되어 버린 것 같았다.
“...열 시까지 갈게요.”
한참 만에 휘웅이 입을 열었다.
수화기 너머에서 작은 안도의 숨소리가 들려왔다.
“정말?”
“네.”
전화를 끊고도 휘웅은 한동안 휴대전화를 내려놓지 못했다. 창밖으로 겨울밤의 불빛이 희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다음 날 오전, 산부인과 대기실은 평일인데도 사람들로 북적였다.
미선은 접수대 앞 의자에 앉아 손끝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 옆에 선 휘웅은 몇 번이고 시계를 확인했다.
“많이 기다렸어요?”
“아니.”
미선이 고개를 저었다.
잠시 후, 간호사가 차트를 들고 다가왔다.
“김미선 보호자분 맞으시죠?”
휘웅은 잠시 망설이다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간호사는 자연스럽게 설명을 이어 갔다.
“다음 검진은 2주 뒤입니다. 보호자분 휴대전화로 안내 문자 보내드릴게요.”
휘웅은 무언가 말하려다가 끝내 입을 다물었다. 옆에 앉은 미선 역시 아무 말 없이 바닥만 바라보고 있었다.
병원을 나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 두 사람 사이에는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한참 만에 미선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미안해.”
휘웅이 그녀를 바라봤다.
“뭐가요?”
“계속 너한테 의지하는 것 같아서.”
휘웅은 대답하지 못했다.
미선은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휘준이 있었으면... 나 안 무서웠을 텐데.”
그 말에 휘웅은 시선을 피했다. 그 역시 아직 형의 죽음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그날 저녁, 휘웅은 지호의 집 근처 카페에 먼저 와 있었다.
창가 쪽 소파에 앉아 있는 그의 앞에는 이미 식어 버린 커피가 놓여 있었지만, 그는 한 번도 잔을 들지 않았다.
머릿속은 온통 복잡했다. 형의 빈자리. 미선. 뱃속의 아이. 그리고 지호.
“오빠.”
익숙한 목소리에 휘웅이 고개를 들었다.
지호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그녀는 자연스럽게 휘웅 옆자리에 앉았다.
“아까부터 불렀는데 대답도 안 하고.”
휘웅은 뒤늦게 정신을 차린 듯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거짓말.”
지호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요즘 오빠 이상해.”
휘웅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지호는 그런 그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조용히 웃었다.
“나는 있잖아요.”
휘웅의 시선이 천천히 그녀에게 향했다.
“서로 사랑하면 비밀은 없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순간, 휘웅의 표정이 아주 미세하게 굳어졌다.
하지만 지호는 그 변화를 눈치채지 못한 채 말을 이었다.
“힘든 일 있으면 나한테 기대도 돼요.”
그러고는 장난스럽게 자기 어깨를 두드려 보였다.
“오빠는 맨날 내 편 들어주잖아요.”
“...”
“오늘은 내가 오빠 편 해줄게.”
별것 아닌 말이었다. 그런데 그 말이 휘웅의 가슴 한구석을 깊게 파고들었다.
주머니 속 휴대전화가 또 한 번 진동했다. 발신자가 누구인지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휘웅은 눈을 감았다.
모른 척할 수 없는 사람.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지호에게 모든 걸 털어놓을 자신도 없었다.
시간이 잠시 멈췄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때, 카페 안에 잔잔한 음악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지호가 귀를 기울이다가 환하게 웃었다.
“어? 이 노래.”
휘웅이 눈을 떴다.
“뭔데?”
“내 단편 드라마 주제곡.”
지호가 신난 목소리로 말했다.
“'너의 하루'라고, 힘들었던 하루를 위로하는 내용이거든.”
그녀는 몸을 조금 더 가까이 기울이며 덧붙였다.
“극 중에서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한테 불러주는 노래예요.”
휘웅은 말없이 그녀를 바라봤다.
지호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오빠가 외워서 나한테 불러줘야 해.”
“...왜?”
“오빠가 내 드라마 남자 주인공이잖아.”
까르르 웃는 지호의 얼굴은 여전히 밝았다.
휘웅은 시선을 내린 채 흘러나오는 멜로디를 조용히 따라 불렀다.
서툰 음정에 지호가 웃음을 터뜨렸다.
“뭐예요, 진짜 외울 거예요?”
휘웅도 따라 웃었다.
짧은 순간이었다. 복잡하게 얽혀 있던 현실도, 가슴을 짓누르던 책임감도, 잠시 동안은 멀어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주머니 속 휴대전화는 여전히 무겁게 느껴졌다.
휘웅은 문득 깨달았다.
자신의 마음속 폭풍은 잠시 잦아들었을 뿐, 아직 끝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오늘은 스케줄이 없다며, 진섭이 먼저 데려다주겠다고 나섰다."저 오늘 완전 한가해요. 데려다드릴게요.""저 혼자 갈 수 있는데.""저도 혼자 있을 수 있어요. 근데 안 그러고 싶어서 그래요."능청스러운 대답에 지호는 결국 거절할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지호의 오피스텔에서 약속 장소인 강남 사거리까지는 차로 삼십 분 남짓 걸리는 거리였다.하지만 진섭의 차를 타고 오는 동안에는 그 시간이 삼십 분이 아니라 삼 분처럼 느껴질 만큼 즐거웠다.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오래된 가요를 진섭이 따라 부르다가 음정을 심하게 놓쳐서 지호가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고, 신호 대기 중에는 지난주 드라마 오디션에서 있었던 웃긴 에피소드를 늘어놓기도 했다.지호는 그 시간이 편안했다."긴장돼요?""조금요.""괜찮아요. 저번보다는 나을 거예요. 그때는 스태프한테 쫓겨날 뻔했잖아요.""그 얘기 좀 그만해요."지호가 눈을 흘기자 진섭이 크게 웃었다.그렇게 도착한 미팅 장소는 회의실 하나를 통째로 빌린 듯 넓고 조용했다.이미 감독과 CP, 몇몇 스태프들이 먼저 와 자리를 잡고 있었다.지호가 들어서자 자연스럽게 시선이 모였지만, 다행히 예전만큼 낯설지는 않았다. 몇 번 마주친 얼굴들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자리에 앉자, 감독이 먼저 가볍게 말을 붙였다."작가님, 제작은 정말 순조롭게 흘러가고 있어요. 저는 솔직히 송경숙 배우는 캐스팅은 안 될 줄 알았거든요.""그러게요."옆에서 유경훈 CP도 거들었다."한물간 배우 취급받는 것도 싫어하실 텐데, 의외로 쉽게 오케이 하셨더라고요.대표님이 직접 만나서 설득하셨다고 하던데, 그 자리에서 뭐라고 하셨는지 저도 궁금하다니까요.""두 분이 무슨 얘기를 했길래 그렇게 빨리 마음을 돌리셨을까요."감독도 궁금한 듯 말을 보탰다. 다른 스태프 하나가 웃으며 끼어들었다."대표님이 워낙 진심이시니까요. 저희 회의 준비하는 것만 봐도 알잖아요, 이 작품에 얼마나 공을 들이시는지."지호는 그 이야기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얼
휘웅은 며칠 전부터 송경숙의 출연 이력을 다시 훑어보고 있었다. 오래 쉬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잊힌 배우는 아니었다. 무대 위에 오래 서 본 사람, 한 번쯤 전성기를 지나고도 쉽게 무너지지 않은 사람. 이번 작품의 부잣집 사모님 역할에는 그런 얼굴이 필요했다.겉으로 보기엔 화려하지만, 속은 끊임없이 무너지는 사람. 남편의 외도와 집안의 균열, 재산 싸움과 이혼 소송까지 견뎌야 하는 인물. 그저 안쓰러운 피해자로만 소비되면 안 됐다. 버티는 사람처럼 보여야 했다. 무너질 듯 무너지지 않는 얼굴. 휘웅은 그게 송경숙이라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그래서 직접 만나기로 했다. 캐스팅 제안서만 보내는 방식으로는 부족했다. 이 인물은, 말로만 설명해서는 안 되는 배우였다.약속 시간보다 조금 일찍 카페에 도착한 휘웅은 창가 자리에 앉아 있었다. 메뉴판을 펼쳐 보지도 않은 채, 손가락만 테이블 위에 가볍게 올려둔 채였다. 카페 안은 조용했다. 늦은 오후의 빛이 유리창을 타고 번졌고, 사람들은 각자 자기 대화에만 잠겨 있었다. 그 조용함이 오히려 오늘의 자리를 더 분명하게 만들고 있었다.잠시 뒤 문이 열렸다. 휘웅이 고개를 들자, 검은 선글라스를 머리 위로 올린 송경숙이 들어오고 있었다. 생각보다 더 단정했고, 생각보다 더 또렷한 인상이었다. 오랜만에 카메라 앞이 아니라도 여전히 시선을 끄는 사람이었다.“늦지 않았죠?”경숙이 먼저 말을 걸었다. 목소리는 가볍게 던진 것 같았지만, 그 안에는 익숙한 여유와 거리감이 함께 있었다. 쉽게 허락하지도, 쉽게 무너지지도 않을 사람의 태도였다.휘웅은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아닙니다. 와주셔서 감사합니다.”경숙은 그를 한 번 훑어보더니 맞은편에 앉았다.“대표님이 직접 나오셔서 밥까지 사주신다는데, 안 올 수가 없더라고요.”농담처럼 말했지만, 그 말은 꽤 정확했다. 직접 나온다는 건 단순한 예의가 아니라, 그만큼 설득할 의지가 있다는 뜻이었다. 경숙은 그런 계산을 모를
오늘은 스케줄이 없다며, 진섭이 먼저 데려다주겠다고 나섰다.지호의 오피스텔에서 약속 장소인 강남 사거리까지는 차로 삼십 분 남짓 걸리는 거리였다. 하지만 진섭의 차를 타고 오는 동안에는 그 시간이 삼십 분이 아니라 삼 분처럼 느껴질 만큼 즐거웠다. 시답잖은 이야기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에 대한 잡담, 중간중간 터지는 웃음까지. 지호는 그 시간이 편안했다.그렇게 도착한 미팅 장소는 회의실 하나를 통째로 빌린 듯 넓고 조용했다. 이미 감독과 CP, 몇몇 스태프들이 먼저 와 자리를 잡고 있었다. 지호가 들어서자 자연스럽게 시선이 모였지만, 다행히 예전만큼 낯설지는 않았다. 몇 번 마주친 얼굴들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지호가 자리에 앉기도 전에, 유경훈 CP가 조금 곤란한 얼굴로 먼저 다가왔다.“작가님, 죄송합니다. 오늘 대표님이 갑자기 불참하시게 됐어요. 개인적인 사정이 좀 생기셨다고 하시더라고요.”지호는 잠깐 눈을 깜빡였다. 약간 의아하긴 했지만, 그 이상으로 신경 쓰이지는 않았다. 애초에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사람이었으니까.그런데 옆에 있던 감독이 끼어들며 중얼거렸다.“강 대표님이 이런 자리를 빠지신다고요? 의외네요. 웬만해선 안 빠지시는 분인데.”그 한마디에, 지호의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반사적으로 튀어 올랐다.'강.''강휘웅.''하…… 이런 데서까지 그 사람을 떠올리는 내가 참, 혐오스럽다.'강씨가 세상에 한둘도 아닌데. 정말 답답한 노릇이었다. 지호는 속으로 고개를 젓고는, 별일 아니라는 듯 자리에 앉았다. 그저 우연히 겹친 성씨 하나에 마음이 흔들렸다는 사실이 새삼 한심하게 느껴졌다.오늘 미팅에 나간다는 사실은 진섭도 알고 있었다. 스케줄이 없었던 그가 자청해서 데려다주겠다고 했을 때, 지호는 딱히 거절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차 안에서 한참 대본 이야기, 배우들 이야기를 나누던 끝에, 지호는 오랜만에 먼저 다른 화제를 꺼냈다.“정말 고마워요.”진섭이 슬쩍 시선을 돌렸다.“오늘 저 데려다주는 거요. 그리
휘웅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10년이라는 말이 입안에서 쉽게 굴러가지 않았다. 지호가 그 시간 동안 집 안에서 거의 나오지 않고 살았다는 얘기를, 머리로는 알아들었지만 마음으로는 자꾸 미끄러졌다.'그게 말이 돼?'속으로 그렇게 되물었지만, 곧 스스로에게 물을 자격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자신 역시 그 10년을 가볍게 흘려보낸 적은 없었으니까.그 역시 같은 시간을 다른 방식으로 버텨냈다. 아픈 아이와, 살아갈 힘을 거의 잃어버린 여자와의 결혼. 사랑이 먼저였던 적은 없었다. 서로를 선택했다기보다는, 각자의 벼랑 끝에서 우연히 같은 밧줄을 붙잡은 사이에 더 가까웠다.그래도 미선은 나름의 방식으로 버티려 애썼다. 살아보려고, 무너지지 않으려고. 그 안간힘을 눈앞에서 지켜본 사람이 방관자로만 남을 수는 없었다.결혼을 하고 학교를 그만둔 뒤, 곧장 아버지 회사로 들어갔다. 이를 악물고, 넘어질 때마다 다시 일어서듯이. 지금 이 자리까지 오는 동안 쉬웠던 순간은 단 한 번도 없었다.그 시간 속에서, 지호를 일부러 떠올리며 살지는 않았다. 적어도 스스로는 그렇게 믿었다. 그럴 여유도, 그럴 자격도 없다고 생각했으니까.그런데도 완전히 지워지지는 않았다. 명동 거리를 지날 때, 캐럴이 흘러나오는 12월이 다가올 때, 사람들이 웃고 떠드는 소리 사이로 이유 없이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잘 지내고 있겠지.'거기까지만 생각하려 애썼다. 그 이상으로 나아가면 안 된다고, 스스로 선을 그었다. 그래도 몇 개의 장면만은 지워지지 않고 남았다. 환하게 웃던 얼굴. 그 웃음이 유난히 예뻤다는 것. 마지막으로 마주쳤던 날, 아무것도 모른 채 행복해 보이던 표정까지도.휘웅은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등지지 않았다.미선, 그리고 아이. 이안이. 아버지로서 해야 할 몫은 분명했다. 계절이 바뀌면 여행을 떠났고, 주말이면 박물관이나 수족관, 놀이공원을 찾았다. 세 사람은 겉으로 보기엔 흠잡을 데 없는 가족처럼 함께 움직였다.그 안에서 휘웅은 최선을 다했다
진섭은 리딩이 끝나갈 무렵, 매니저에게 짧은 메시지를 보냈다. 혹시라도 따라붙을 사람들이 있을 것 같아, 지호를 최대한 빠르게 빠져나가게 하고 싶었다.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회의실 문을 나서자마자, 제작사 쪽 사람이 지호를 향해 다가왔다. 지호의 어깨가 작게 움찔했고, 끝내 그 사람을 쳐다보지 못했다.처음 만났을 때도 그랬다. 지호는 좀처럼 사람의 눈을 마주하지 않았다. 늘 시선은 비켜가 있었고, 대화는 짧고 조심스러웠다.그런데 우유니에서는 달랐다. 햇빛 아래에서, 소금사막 위에서 지호는 몇 번이나 눈을 마주치며 웃었다. 그게 얼마나 드문 순간이었는지, 그래서 더 선명하게 기억에 남아 있었다.그런데 오늘의 지호는 다시, 어딘가로 숨어버릴 것 같은 사람이었다. 잔뜩 움츠러든 채, 작아진 채로.왜 이렇게 된 건지 진섭은 알 수 없었다. 다만 쉽지 않은 시간이 있었겠구나, 그 정도는 느껴졌다.차에 올라탄 뒤에도, 지호는 한 번도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계속 창밖만 바라봤다. 스쳐 지나가는 건물들, 점점 어두워지는 거리. 그걸 따라가듯 시선이 흘러갔다.매니저가 인사를 건넸지만, 지호는 짧게 고개만 끄덕였다. 낯선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분명했다. 낯가림이 심한 수준을 넘어서, 사람 자체를 어려워하는 느낌이었다.진섭은 잠깐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오늘 많이 힘드셨어요?”지호가 잠깐 멈칫했다.“…아, 뭐. 별로요.”말은 그렇게 했지만, 톤이 전혀 그렇지 않았다.“그럼 바람 좀 쐴까요?”“…어디요?”조금은 경계하는 눈치였다.진섭이 가볍게 웃었다.“저 믿어보셔도 됩니다.”짧은 침묵 끝에, 지호가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진섭은 곧바로 매니저에게 말했다.“형, 남산으로 좀 가주세요.”차는 방향을 틀었다.도착한 곳은 서울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이었다. 이미 해는 지고, 도시는 불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수많은 빛들이 겹쳐지며 만들어내는 풍경.지호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잠시 말을 잃었다.“…와.”작게 숨이 섞였
휘웅은 대본 리딩 내내 단 한 곳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지호였다.연보라색 대본을 들고 사람들 사이에 앉아 있는 그 모습은 분명 낯설었다. 예전에 알던 지호와 완전히 같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다른 사람도 아니었다. 집중할 때 살짝 찌푸려지는 미간, 말을 아낄 때의 조용한 표정. 그런 것들은 그대로였다.'왜 저렇게… 멀어 보이지.'손에 잡힐 듯 가까운 자리에 앉아 있는데도 닿지 않는 거리처럼 느껴졌다. 휘웅은 애써 시선을 거두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대사가 오가고, 사람들이 웃고, 분위기가 몇 번이나 바뀌는 동안에도 그의 시선은 계속 한 사람에게 붙들려 있었다. 지호. 그 이름 하나로 충분했다.리딩이 끝나갈 무렵, 휘웅은 이미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짧게라도 말을 해야 한다고. 인사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을까.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까지 아무 일 없다는 듯 지나칠 수는 없었다.하지만 그 생각은 너무 쉽게 무너졌다. 리딩이 끝나자마자 지호는 자리를 정리하고 곧장 밖으로 향했다. 누군가에게 이끌리듯 빠르게. 그 옆에는 진섭이 있었다. 들어올 때도 그랬고, 나갈 때도 마찬가지였다. 휘웅은 그 모습을 멀리서 지켜봤다. 망설인 시간만큼 거리는 벌어졌다.“…하.”짧게 숨을 내쉬고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그대로 따라 나갔다. 멈출 생각은 없었다.엘리베이터 앞, 문이 닫히기 직전이었다.“잠깐만요.”손을 뻗어 문을 잡자 센서가 반응하며 문이 다시 열렸고, 그는 안으로 들어서며 그제야 가까운 거리에서 지호를 마주했다. 정확히는, 마주했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작가님.”낮게 불렀다. 지호의 어깨가 아주 미세하게 움찔했다. 하지만 고개는 들리지 않았다.“…네.”짧은 대답. 그게 전부였다. 시선은 끝까지 바닥에 머물러 있었다. 휘웅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지호를 바라봤다. 단 한 번이라도 눈이 마주치기를 기다리듯이. 하지만 끝내 올라오지 않았다.엘리베이터가 내려가는 동안 지호는 한 번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저 손에 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