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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낯선 온기

last update Veröffentlichungsdatum: 01.08.2026 07:10:37

한강에서 속마음을 다 쏟아낸 그날 이후, 봄이 무르익어 가는 동안에도 지호의 시간은 이상하리만큼 느리게 흘렀다.

그날 이후로, 휘웅과는 제대로 얼굴을 보지 못했다.

연락이 끊긴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휘웅은 틈날 때마다 짧게 메시지를 남겼다.

[밥 먹었어?]

[오늘 날씨 좋더라.]

[집 갈 때 조심하고.]

늘 다정한 말들이었지만, 어딘가 모르게 평소보다 한 발짝 물러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지호는 애써 그 이유를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분명 무슨 사정이 있는 거라고, 괜한 상상을 하지 말자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하지만 밤이 깊어질수록 불안은 점점 커져 갔다.

그리고 어느날.

밤 열한 시가 조금 넘어갈 무렵이었다.

침대에 누워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던 지호의 휴대전화가 짧게 진동했다.

화면에 떠오른 이름을 확인한 순간, 지호는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휘웅오빠]

“오빠!”

급하게 전화를 받자, 잠시 뒤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호야.”

휘웅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지호는 그 미묘한 차이를 단번에 알아차렸다.

“연락이 늦어서 미안.”

“괜찮아요. 근데 무슨 일 있어요?”

전화기 너머로 짧은 침묵이 흘렀다.

휘웅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한참 동안 무언가를 망설이던 그는 낮게 숨을 내쉰 뒤 입을 열었다.

“...형이 많이 아파.”

지호는 순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형이요?”

“응.”

“오빠 형 있었어요?”

휘웅은 씁쓸하게 웃었다.

“어릴 때 유학 갔어. 거의 미국에서 자랐고.”

“한 번도 얘기한 적 없었잖아요.”

“왕래가 없었거든.”

담담한 목소리였지만, 그 안에 깃든 피로가 고스란히 전해졌다.

잠시 후, 휘웅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얼마 전에 사고를 크게 당했어.”

“...사고요?”

“미국에서.”

지호의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상태가 많이 안 좋은가 봐요.”

“의식이 없어.”

짧은 대답이었다.

하지만 그 짧은 한마디가 가진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지호는 무심코 입술을 깨물었다.

연락이 뜸했던 날들. 갑자기 걸려 온 다급한 전화. 모든 것의 이유가 그곳에 있었다.

“...많이 힘들었겠다.”

지호가 조심스럽게 말하자, 수화기 너머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글쎄.”

“언제부터 그랬어요?”

“한 달쯤 됐어.”

한 달.

지호는 순간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 긴 시간을 휘웅은 혼자 견디고 있었던 것이다.

“미안.”

뜻밖의 사과에 지호가 되물었다.

“왜 미안해요?”

“너한테 진작 말했어야 했는데.”

지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그리고 아주 잠시 침묵이 흘렀다.

“당분간은 좀 바쁠 것 같아.”

휘웅의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다.

“병원도 자주 가야 하고, 처리할 일도 많고.”

지호는 괜히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저는 괜찮아요.”

“...”

“그러니까 저 신경 쓰지 말고, 오빠 형한테 집중해요.”

수화기 너머에서 한동안 아무 말이 들리지 않았다.

한참 뒤, 휘웅이 작게 말했다.

“고마워, 지호야.”

전화가 끊긴 뒤에도 지호는 한동안 휴대전화를 내려놓지 못했다.

불 꺼진 방 안은 유난히 조용했다.

이상했다.

조금 전까지 휘웅을 걱정하고 있었는데, 막상 전화를 끊고 나니 설명할 수 없는 불안이 가슴 한편에 남아 있었다.

하지만 지호는 애써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었다.

휘웅은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고, 자신은 그저 곁에서 기다려 주면 되는 거라고 믿었다.

그렇게 믿고 싶었다.

며칠 뒤였다.

늦은 오후, 강의실에서 나오던 지호의 휴대전화가 요란하게 울렸다.

유진이었다.

“야, 윤지호! 너 지금 어디야?”

다급한 목소리에 지호가 걸음을 멈췄다.

“학교. 왜?”

잠시 뜸을 들이던 유진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동학 오빠한테 연락 왔는데...”

순간,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휘웅 오빠 형.”

“...응?”

“돌아가셨대.”

지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귀에서 웅웅거리는 소리만 들렸다.

“장례식장 간다는데... 우리도 갈 거지?”

“...어.”

한참 만에 겨우 목소리가 나왔다.

“갈게.”

장례식장은 무거운 공기로 가득했다.

검은 정장을 입은 사람들이 조용히 오가고 있었고, 복도 끝에서는 희미하게 향 냄새가 풍겨 왔다.

지호는 유진, 동학과 함께 빈소 앞에 섰다.

“휘웅 오빠 괜찮을까.”

유진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동학도 평소와 달리 표정이 어두웠다.

“갑자기 형 얘기를 들었는데...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겠냐.”

세 사람은 천천히 빈소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 순간.

지호의 발걸음이 멈췄다.

상주 자리에는 휘웅이 서 있었다.

며칠 사이 눈에 띄게 수척해진 얼굴이었다.

검은 정장 차림의 그는 평소보다 훨씬 차분했고, 어딘가 지쳐 보였다.

지호의 가슴이 먹먹해졌다.

“...오빠.”

그의 이름을 부르려던 순간이었다.

휘웅의 옆에 서 있던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창백한 얼굴. 심하게 부어오른 눈.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위태로운 표정.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는 휘웅의 팔을 꼭 붙든 채 떨어지지 못하고 있었다.

지호는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췄다.

“저 사람 누구야?”

유진이 작게 속삭였다.

하지만 지호는 대답하지 못했다.

휘웅은 멀리서 지호를 발견했다.

잠시 시선이 마주쳤다.

그는 아주 짧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며 지호 쪽으로 걸음을 옮기려던 순간이었다.

옆에 서 있던 여자의 몸이 갑자기 휘청였다.

“미선 씨!”

휘웅이 다급하게 그녀를 붙잡으며 낮게 외쳤다.

지호는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미선.

처음 들어 보는 이름이었다.

휘웅은 쓰러지듯 기대 오는 여자를 부축하느라 더 이상 지호 쪽을 보지 못했다.

지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분명 지금은 그런 걸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사랑하는 사람의 형이 세상을 떠난 날이었다.

---

미선은 갓난아기 때 보육원 앞에 버려졌고, 세 살 무렵 미국으로 입양됐다.

낯선 나라에서 자랐지만 어디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했고, 양부모와의 관계는 나쁘지 않았어도 가족이라는 단어가 주는 따뜻함만은 느껴 본 적이 없었다.

열여덟 살이 되던 해 그녀는 집을 나와, 낮에는 카페에서 일하고 밤에는 식당에서 접시를 닦으며 혼자 살아남았다.

휘준을 만난 건 스무 살 무렵이었다.

그녀가 일하던 레스토랑에 종종 찾아오던 손님.

같은 한국인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둘은 금세 가까워졌고, 휘준은 다정했다.

미선의 서툰 한국어를 웃으며 들어줬고, 그녀가 외로움을 숨길 때마다 아무렇지 않은 척 곁을 지켜 주었다.

“넌 내 가족이야.”

어느 겨울날, 휘준이 그렇게 말했을 때 미선은 처음으로 울었다.

평생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말이었다. 그녀에게 휘준은 연인이었고, 가족이었고, 세상과 이어진 유일한 끈이었다.

그런 휘준이 사고를 당한 건 불과 한 달 전이었다.

의식을 잃은 그를 두고 미선은 아무것도 결정할 수 없었고, 결국 연락이 닿은 사람은 휘웅이었다.

형을 한국으로 데려오는 일, 병원을 알아보는 일, 장례를 준비하는 일까지 모든 걸 휘웅이 맡았다.

세 살 이후 처음 밟은 한국은 미선에게 너무 낯설었다.

말도, 사람도, 거리도. 그 낯선 나라에서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사람은 휘웅뿐이었다.

그래서였다.

빈소 한쪽에서 미선이 휘웅의 팔을 놓지 못하는 이유는. 그녀에게 그는, 이제 세상에 남은 마지막 온기였으니까.

그리고 그 모습을 바라보던 지호의 마음속에는, 설명할 수 없는 낯선 감정 하나가 천천히 스며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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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첫사랑은 끝나지 않았다   21.해야 할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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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첫사랑은 끝나지 않았다   17.크리스마스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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