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송경숙은 원래 그날 촬영이 없었다.며칠 전 뺨을 맞는 장면을 찍은 뒤로, 붓기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메이크업으로도 가려지지 않을 정도라 후속 장면 몇 개가 통째로 미뤄졌고, 오늘에서야 붓기가 겨우 자연스러워 보일 만큼 빠졌다. 매니저에게서 "오늘 오후에 추가 촬영 있으시대요"라는 연락을 받았을 때도, 송경숙은 별다른 생각 없이 알겠다고 답했다. 촬영장에서는 흔한 일이었다.도착한 촬영장은 평소보다 조용했다. 오늘은 단독 씬 두어 개만 찍는 날이라 스태프도 많지 않았다. 송경숙은 대기 의자에 앉아 조연출이 건넨 사이드를 받아 들었다.“오늘은 이 씬부터 갈게요. 짧은데 감정은 좀 세게 가야 돼서요.”조연출이 가볍게 설명을 덧붙이고는 다른 배우 쪽으로 걸어갔다.송경숙은 대본을 펼쳤다.몇 줄 읽지 않아, 손끝이 조금씩 굳어 갔다.장면은 짧았다. 극 중 남편이 아직 이혼 서류의 잉크도 마르지 않은 상태에서, 언론에 재혼 소식을 흘리는 장면. 결혼 날짜까지 서둘러 잡아 버리는 장면. 아내 역의 배우는 그 소식을 뉴스로 접하고 무너져 내리는 얼굴을 연기해야 했다.'…이거.'송경숙은 대본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이혼 서류. 잉크도 마르기 전. 재혼 발표. 서둘러 잡힌 결혼 날짜.토씨 하나 다르지 않았다.정확히, 자신이 겪었던 일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자신이 저질렀던 일이었다. 윤용석과의 결혼을 서두르며, 이혼 절차가 채 끝나기도 전에 기사부터 터뜨렸던 그날의 선택. 그 세세한 순서까지도, 대본은 마치 그날의 일지를 그대로 옮겨 적은 것처럼 정확했다.우연이라기엔 지나쳤다.세상에 비슷한 사연을 가진 사람이야 얼마든지 있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구체적으로, 순서까지 똑같이 맞아떨어지는 건 다른 문제였다. 누군가 실제로 그 일을 알고 있지 않고서는 나올 수 없는 디테일이었다.송경숙의 머릿속에서 지난 몇 주간의 조각들이 순식간에 다시 맞춰지기 시작했다.처음 이 배역을 제안받았을 때부터 이상했다. 한물간 배우 취급을 받던 자신에게, 젊은 대표
“진섭 씨, 인사하세요. 저희 대표님이세요!”유경훈의 목소리가 룸 안에 쩌렁쩌렁 울렸다.진섭은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방금 밖에서, 아무 이유 없이 시비를 걸던 그 남자가 대표라니. 그것도 이 작품을 만들고 있는 제작사의, 다름 아닌 대표.주변을 둘러보니 다들 아무렇지 않은 얼굴이었다. 다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자신만 몰랐다는 듯이. 진섭은 애써 표정을 관리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아…… 안녕하십니까.”목소리에서 티가 나지 않기를 바랐지만, 스스로도 어색한 게 느껴졌다. 손끝이 미세하게 굳는 것도 그대로 느껴졌다.“강휘웅입니다.”휘웅이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내밀었다. 조금 전 골목에서 던지던 말투와는 완전히 다른, 정중하고 여유 있는 목소리였다. 표정도, 자세도, 방금 전 그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매끄러웠다.“말씀 많이 들었어요. 이번 작품, 진섭 씨 연기 덕분에 훨씬 살아난다고들 하던데.”너무나 자연스러운 인사였다. 방금 전까지 “작가 꼬봉이냐”며 비아냥거리던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진섭은 그 손을 맞잡으며 속으로 헛웃음이 났다.'이 사람, 진짜 뭐지.'겉으로는 웃으며 손을 흔들었지만, 속으로는 어이가 없었다. 몇 분 전만 해도 처음 보는 사람에게 다짜고짜 시비를 걸던 사람이, 지금은 방송용 미소를 짓고 있었다.“감사합니다. 저도 대표님 얘기 많이 들었습니다. 좀처럼 얼굴 뵙기 힘드시다고.”에둘러 던진 말이었다. 조금 전 골목에서의 일을 은근히 짚고 넘어가고 싶었다. 하지만 휘웅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요즘 좀 바빴어요. 이제라도 이렇게 인사드리네요.”태연한 얼굴이었다. 오히려 그 태연함이 더 얄미웠다. 진섭은 순간 이 남자가 정말 아무 기억도 나지 않는 척하는 건지, 아니면 정말로 아무렇지 않은 건지 헷갈릴 지경이었다.주변 스태프들은 두 사람의 인사를 흐뭇하게 지켜보며 술잔을 권했다.“자자, 두 분 첫 만남인데 한잔하셔야죠!”누군가의 외침에 사람들이 술잔을 들었다. 진섭과 휘웅도 마주 앉아 잔을
가면의 집〉 촬영이 반환점을 돈 걸 기념해, 제작진 회식이 잡혔다.휘웅은 처음부터 참석할 생각이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참석할 수가 없었다. 대표라는 직함으로 그 자리에 나타나는 순간, 사람들은 당연하다는 듯 그를 작가에게 소개하려 들 게 뻔했다. 아직 얼굴 한 번 정식으로 마주하지 못한, 아니 마주할 준비가 되지 않은 상대였다.그래서 그는 사무실에 남았다. 서류를 뒤적이며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었지만, 정작 눈에 들어오는 글자는 하나도 없었다.휴대폰이 울린 건 저녁 여덟 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유경훈이었다.“대표님, 지금 뭐 하세요?”“일 좀 보고 있는데.”“아니, 요즘 너무 무관심하신 거 아니에요? 촬영장에도 안 나오시고, 회의에도 안 들어오시고. 저희끼리 이상하다는 얘기까지 나온다니까요.”휘웅은 대답 대신 짧게 웃었다.“오늘 회식도 안 오세요? 작가님 인사시켜 드리려고 자리까지 마련했는데.”“…나중에 하지.”“나중에 언제요. 자꾸 미루시니까.”유경훈은 못마땅한 투로 말을 이었다.“근데 이 작가님도 먼저 가신다고 하시네요. 원래 이런 자리 오래 못 계시는 분이라. 좀 더 일찍 오시지 그러셨어요.”그 말에 휘웅의 손이 잠시 멈췄다.'먼저 간다고.'그렇다면, 지금 가도 마주칠 일은 없을 거였다.“…금방 갈게.”휘웅은 짧게 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재킷을 챙겨 입으며, 스스로도 이 조급함이 어디서 오는 건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회식 장소에 도착했을 때, 마침 지호가 나오고 있었다.휘웅은 반사적으로 걸음을 늦추고 건물 모퉁이에 몸을 붙였다. 눈에 띄고 싶지 않았다.지호 옆에는 진섭이 있었다. 그는 도로변까지 따라 나와, 잡아 둔 택시 문을 손수 열어 주고 있었다.“그냥 저랑 같이 가요.”진섭이 아쉬운 얼굴로 말했다.“됐어요. 더 먹고 가요.”지호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주조연급 배우가 회식 자리에서 이렇게 일찍 빠지면 어떡해요. 사람들이 뭐라고 생각하겠어요.”“그런 거 신경 안 써요.”“저는 신경 쓰여요.”지호
촬영장 분위기가 유난히 어수선한 아침이었다.극 중 아버지의 정부 역할을 맡은 젊은 배우, 하윤이 촬영장으로 오던 길에 봉변을 당했다는 소식이 스태프들 사이에 빠르게 퍼졌다. 매번 다니는 촬영장 진입로 근처에 누군가 미리 자리를 잡고 기다리고 있다가, 하윤의 차가 지나가는 순간을 노려 계란을 던졌다는 얘기였다. 다행히 창문이 닫혀 있어 다친 곳은 없었지만, 놀란 마음에 화장까지 다시 받고 와야 했다.쉬는 시간, 스태프들이 모닝커피를 손에 든 채 그 이야기로 웃음 섞인 잡담을 나눴다.“그러니까 그럴 만도 하지.”한 스태프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가정 있는 남자를 꼬셔 낸 여우 같은 년 역할을 너무 잘 소화하셔서 그래요. 방송 보면 저도 얄미워 죽겠던데.”“맞아요, 맞아. 나도 어제 편집본 보다가 진짜 한 대 때리고 싶었다니까.”다른 스태프가 맞장구를 쳤다.“근데 드라마니까 망정이지, 진짜 그런 사람이 옆에 있었으면 가만두지 않았을 것 같아요. 사람 심리가 그렇잖아요.”“하긴, 그건 그래.”웃음 섞인 대화였다. 누구를 겨냥한 말도 아니었다. 그저 잘 만든 캐릭터에 대한 감상 정도였다.그런데 그 자리에서 조금 떨어진 곳, 대본을 손에 든 채 서 있던 송경숙의 표정이 미세하게 굳었다.아무도 그녀를 보고 하는 말이 아니었다. 다들 하윤을, 정확히는 하윤이 연기하는 캐릭터를 두고 하는 이야기였다. 그런데도 송경숙의 귀에는 그 문장 하나하나가 다른 방향에서 날아와 박혔다.'가정 있는 남자를 꼬셔 낸 여우 같은 년.''진짜 그런 사람이 옆에 있었으면.'송경숙은 대본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지만, 표정만큼은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몇십 년을 카메라 앞에서 살아온 사람다운 반사적인 자기 통제였다.“경숙 씨, 커피 하나 드릴까요?”지나가던 스태프가 아무 생각 없이 물었다.“아, 아니에요. 괜찮아요.”송경숙은 옅게 웃으며 손을 저었다. 목소리는 평소와 다름없이 들렸지만, 스스로도 그 대답이 조금 늦게 나왔다는 걸 알았
첫 촬영일 아침, 스태프들 사이에서 잠깐 술렁임이 일었다.“이 씬, 언제 추가된 거예요?”조연출이 수정된 페이지를 넘기며 고개를 갸웃했다. 원래 대본에는 없던 장면이었다.남편이 이혼을 종용하다 아내의 뺨을 때리고, 그 바람에 테이블 위 물건들이 쓸려 나가며 액자가 깨지는 장면. 새벽 다섯 시에 전달된 수정본이었다.“작가님이 어젯밤에 새로 보내셨대요.”누군가의 대답에 조연출은 별다른 토를 달지 않고 다시 스태프들을 불러 모았다.촬영장에서는 흔한 일이었다. 대본이 촬영 직전까지 수정되는 것도, 그 이유를 굳이 캐묻지 않는 것도.다만 남편 역을 맡은 배우만은 조금 곤란한 얼굴로 새 대본을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이거 실제로 손이 닿아야 되는 거예요, 아니면 액션만 크게 잡을까요?”그가 조심스럽게 묻자, 감독이 잠시 고민하다 답했다.“살짝만 닿게. 위험하지 않게, 하지만 진짜처럼 보이게.”지호는 모니터 뒤편, 스태프들 사이에 조용히 자리를 잡았다.오늘은 유난히 일찍 나왔다. 자신이 써넣은 그 장면이 실제로 어떻게 찍히는지,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고 싶었다.세트장은 지호의 옛집 거실과 놀랄 만큼 비슷하게 꾸며져 있었다.물론 미술팀이 대본을 보고 만든 공간일 뿐, 실제로 그 집을 알 리는 없었다.그런데도 소파의 위치,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의 각도까지 어딘가 낯익어서, 지호는 세트장에 들어설 때마다 잠깐씩 숨이 막혔다.벽지 색깔도, 테이블 다리 모양도 전혀 다른데, 왜 이렇게 익숙하게 느껴지는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그 모습을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지켜보는 사람이 있었다.휘웅이었다. 제작사 대표라는 직함이 있으니 첫 촬영일에 얼굴을 비추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스태프들 사이에 자연스럽게 섞여, 그는 카메라 각도를 확인하는 척하며 계속 지호 쪽을 살폈다.지호는 그런 시선을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아니, 정확히는 애초에 알아챌 여지가 없었다.지호는 사람들 사이에 있을 때면 습관처럼 시선을 낮추거나 한곳에만 고정했다.여러 사람의
내일이면 첫 촬영이었다.지호는 노트북을 덮으며 스스로에게 몇 번이고 되뇌었다.'내일부터 촬영이야. 정신 똑바로 차리자.'몇 달을 준비해 온 일이었다. 대본은 이미 완성됐고, 캐스팅도 끝났고, 이제 남은 건 실제로 그 장면들이 화면 위에 펼쳐지는 걸 지켜보는 일뿐이었다.그런데도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지호는 침대에 누워 몇 번이나 뒤척였다.눈을 감으면 내일 스케줄이 떠올랐고, 스케줄을 떠올리면 다시 잠이 달아났다. 결국 몸을 일으켜 물 한 잔을 마시고, 다시 눕고, 또 뒤척이기를 반복했다.암막 커튼 사이로 새어 들어온 가로등 불빛이 벽에 희미한 줄무늬를 그리고 있었다.냉장고 돌아가는 소리만 낮게 이어지는 방 안에서, 지호는 그 희미한 빛줄기를 바라보며 애써 마음을 가라앉히려 했다.내일이면 몇 달간 준비해 온 모든 것이 실제 화면으로 태어난다. 그 사실이 설레면서도 동시에 무섭게 느껴졌다.뒤척이던 지호는 결국 자정을 훌쩍 넘기고서야 얕은 잠에 빠져들었다.그리고 꿈을 꿨다.익숙한 거실이었다. 깨진 액자 유리 조각이 바닥에 흩어져 있었고, 그 한가운데 엄마가 쓰러져 있었다.테이블 위에는 낯익은 서류 뭉치가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었다. 종이 위에 굵게 박힌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이혼 합의서.십 년도 더 지난 그날이었다. 지호는 꿈속에서도 그 냄새를, 그 공기를, 그 적막을 그대로 느꼈다.엄마에게 달려가 어깨를 흔들던 자신의 손끝까지 생생했다.그날의 거실 온도, 커튼 사이로 들어오던 오후의 빛깔, 발밑에서 바스러지던 유리 조각의 감촉까지도 하나하나 되살아났다.그런데 문득, 낯선 생각이 스쳤다.'엄마가…… 맞았던가?'기억이 흐릿했다. 분명 쓰러져 있었다. 분명 울고 있었다.그런데 그 이유가 정확히 무엇이었는지, 지호는 자신할 수 없었다.맞아서 쓰러진 건지, 그냥 주저앉은 건지. 스무 살, 정확히 그날이었다.휘웅과 사귀기로 한 바로 그날.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날이었는데도, 정작 그 안에서 벌어진 일들 중 몇몇은 너무 여러 번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