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이 필요하면 내가 얼마든지 줄 수 있어. 생활하는 데 부족한 것도 없잖아. 그런데도 굳이 나가서 일하겠다고 하는 걸 보니 도망가고 싶은 거잖아.”박진성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그는 의자에서 일어나 민여진에게 다가가 어깨를 꽉 잡았다.“민여진, 며칠 내버려 뒀더니 정말 날개 달고 날아가 버리고 싶은 모양이지?”민여진은 문에 밀쳐진 채 박진성의 화난 목소리를 들으며 무력감을 느꼈다.“진성 씨, 나도 살아있는 사람이야. 그런데 나가서 일할 자유도 없어?”“네가 나가서 일하려면 스스로를 돌볼 수 있어야지. 내가 없으면 넌 겨울도 못 넘길 거야. 어디 길바닥에서 얼어 죽어도 아무도 모를걸!”박진성은 단지 밖에서 시각장애인이 살아가기 힘들다는 것을 알려 주고 싶었을 뿐인데 말이 너무 심하게 나가 버렸다.민여진은 입술을 깨물었다. 피가 배어 나왔지만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박진성은 눈살을 찌푸리며 민여진의 얼굴을 쓰다듬었다.“돈이 필요하면 내가 줄게. 네가 외출하는 것도 막지 않았잖아. 너한테 충분한 자유를 줄 테니까 제발 나가서 일하겠다는 소리는 하지 마. 너 밖에서 잘못되면 아무도 책임 못 져.”민여진은 박진성의 손을 뿌리치고는 차가운 손끝과 표정 없는 눈으로 말했다.“알았어.”박진성은 민여진의 턱을 들어 올리고 그녀의 표정을 살폈다. 하지만 갑자기 다시 공허해진 눈빛에 그는 짜증이 났다.“민여진, 다 너 잘되라고 하는 말이야.”“알아. 나 이만 나갈게.”민여진은 문을 열고 나갔다. 마음이 무감각했다. 예상했던 결과였지만 막상 현실이 되니 마음이 아팠다.그녀의 욕심이 과했던 것 같았다. 민영미가 무사히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한데 박진성의 인내심을 시험한 건 그녀의 잘못이었다.방으로 돌아온 민여진의 표정은 어두웠다. 정수향은 결과를 예상했지만 그래도 물었다.“왜 그래? 진성이가 허락 안 했어?”민여진은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진성 씨는... 내가 밖에서 힘든 일을 겪을까 봐 걱정하더라고요. 눈이 안 보이니까.
“저는 이렇게 생기 있는 민여진 씨를 처음 봤어요. 박 대표님도 보시면 분명 감동하실 거예요. 박 대표님이 원하는 건 민여진 씨가 살아갈 이유를 찾는 거잖아요. 제가 보기에 민여진 씨는 피아노를 정말 사랑하는 것 같아요. 딱 한 번만 기회를 주시면, 그게 민여진 씨에게 살아갈 힘이 될지도 몰라요.”박진성은 정수향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복잡한 감정이 그의 잘생긴 얼굴에 스쳐 지나갔다.“나더러 허락하라는 말인가요?”정수향은 미소를 지었다.“저는 박 대표님이 시키는 일만 하는 사람입니다. 제 할 일을 열심히 하는 것 외에 다른 뜻은 없습니다. 단지 제가 본 것을 박 대표님께 말씀드리는 것뿐이죠.”정수향은 어깨에 걸친 숄을 매만지며 말했다.“오늘 밤은 여기서 주무세요. 저는 다른 방에서 쉴게요.”정수향은 나가다가 다시 멈춰 서서 말했다.“그리고... 침대 옆 서랍 안에 든 물건도 한번 확인해 보세요.”문이 닫히자 박진성은 문 앞에 서서 민여진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다가갔다.민여진은 고르게 숨을 쉬고 있었지만 불안한 듯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악몽을 꾸는 것 같았다.잠든 민여진의 얼굴을 바라보는 박진성의 눈빛은 고요했다.그는 민여진의 조용하고 무기력한 모습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런데 그녀에게도 그렇게 생기 넘치는 모습이 있었다니.민여진에게도 꿈이 있었고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있었던 것이다.“네가 피아노를 좋아하는 줄은 몰랐어.”박진성은 씁쓸하게 웃었다. 민여진에 대해 아는 것이 너무 없었다.처음 민여진을 만났을 때부터 민여진의 마음을 알고 있었다. 민여진은 그 마음 때문에 별장에서 2년을 갇혀 지냈다.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외출도 하지 않았고 나를 귀찮게 하지도 사고를 치지도 않았다.“네가 그저 나에게서,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줄 알았어. 하지만 민여진, 내가 없으면 넌 어떻게 살아가려고? 혼자서 무사히 살아갈 수 있겠어?”박진성은 스스로에게 되뇌었다.“네가 원하는 일이 정말 네가 찾던 일인지 어떻게 확신
민여진은 적어도 선물을 사기는 했다.가슴이 뜨거워진 박진성은 담배를 피우며 마음을 가라앉히려 했지만 손이 떨렸다. 그는 커프스단추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가 잠시 후 방을 나섰다.박진성은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오아시스 레스토랑에 대해 조사해 봐. 문제가 없는지.”...민여진이 눈을 떴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옆자리는 반듯한 채로 비어있었다. 민여진은 이불을 걷고 밖으로 나가다가 정수향과 마주쳤다.“일어났어? 무슨 일이야? 왜 이렇게 허둥지둥해?”“아니에요.”민여진은 안심했다. 어젯밤에 박진성의 기분을 상하게 해서 그가 민영미를 내보낸 줄 알았던 것이다.“어젯밤에 엄마는 방에서 안 주무셨어요?”“어.”정수향은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감기 기운이 있어서 너한테 옮길까 봐 나가서 잤어.”정수향은 화제를 돌렸다.“맞다, 서원 씨가 아래층에서 너 기다리고 있어. 꽤 오래 기다렸는데.”“서원 씨가?”민여진은 어리둥절했다.‘서원이가 왜 나를 기다리지?’민여진은 벽을 짚으며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서원 씨?”서원은 정말 그곳에 있었다. 서원은 민여진에게 다가가 말했다.“민여진 씨, 일어나셨어요?”민여진은 고개를 끄덕였다.“엄마가 그러는데 나를 찾았다면서요? 무슨 일이에요?”서원은 오히려 놀란 표정이었다.“민여진 씨, 모르셨어요?”“뭘요?”“대표님께서 그 레스토랑에 출근하시라고 저보고 모셔다드리라고 하셨습니다.”민여진은 머릿속이 하얘졌고 너무 놀라 말이 나오지 않았다.“서원 씨, 지금 농담하는 거예요?”서원은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대표님 허락 없이 제가 어떻게 그런 농담을 하겠어요?”그러니 정말이었다.민여진은 기뻐서 어쩔 줄 몰랐다.이때 서원이 말했다.“민여진 씨, 옷 좀 갈아입으시죠.”“맞아! 옷 갈아입어야겠다!”민여진은 몇 걸음 걷다가 멈춰 서서 물었다.“서원 씨, 진성 씨가 왜 내가 일하는 걸 허락했는지 알아요?”“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대표님이 밤새 그 레스토랑을 조사해서 문제없는 걸
결국, 고민하던 민여진이 대답했다.“사촌 동생이에요.”이제야 말이 되는 것 같았다. 웨이터는 민여진에게 다가가 그녀와 함께 팔짱을 끼며 물었다.“그 사촌 동생 말이에요, 여자친구 있어요? 나 소개 좀 해주면 안 돼요?”“여자친구 있어요.”괜히 귀찮은 일을 만들기 싫었던 민여진은 애써 웃으며 대답했다.김빠지는 대답에 웨이터는 빠르게 흥미를 잃고 말했다.“피아노는 이쪽에 있어요. 연주 시간 되면 누가 와서 알려줄 거예요. 더 물어볼 거 없으면 먼저 가 볼게요.”민여진은 갑자기 바뀐 상대의 말투에도 별 감흥이 없었다. 그저 피아노에만 정신이 팔려 당장이라도 연주하고 싶었다. 예전 카페에서 연주하던 피아노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만큼 퀄리티가 높아 보였다. 시험 삼아 한 번 연주해보니 하루 만에 사람들의 칭찬이 끊임없이 쏟아졌다.덕분에 민여진의 얼굴에도 웃음이 늘었다. 다시 활기를 찾은 그녀의 표정은 더욱 생동해 보였다. 한참이나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던 서원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민여진과 함께 저택으로 돌아왔다.위층으로 올라가기 전, 민여진이 물었다.“서원 씨, 진성 씨 서재 불 켜져 있어요?”“네, 켜져 있어요.”민여진은 주먹을 힘껏 쥐었다. 박진성이 왜 갑자기 마음을 바꿨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그녀는 박진성에게 진심으로 고마웠다. 그러니 감사 인사는 반드시 전하고 싶었다.박진성의 서재 앞에 도착한 민여진은 노크를 하기 위해 손을 올렸다. 하지만 문을 두드리기도 전에 서재 문이 활짝 열렸다. 굳이 허락을 받고 들어갈 필요도 없다는 듯 애초에 잠겨 있지 않았다. 민여진을 위해 일부러 열어둔 것 같았다.민여진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며 조용히 물었다.“진성 씨, 안에 있어?”박진성은 문 앞에 앉아 있었다. 서원과 함께 차를 타고 마당에 들어설 때부터 그는 민여진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박진성은 민여진의 말을 분명히 들었지만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아무 대답 없는 서재에서 남자의 호흡을 느낀 민여진이 고개를 숙여 잔잔한
“그건, 얼마 하지도 않는데.”민여진은 뭐라고 말하면 좋을지 몰라 망설였다. 목구멍이 꽉 막혀 버린 것처럼 답답했다.“진성 씨가 그걸 차고 가면, 괜히 체면만 깎일 거야.”“그래서 나한테 안 줬던 거야?”민여진은 아랫입술을 힘껏 깨물었다. 박진성은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뻗어 민여진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주며 낮게 속삭였다.“여진아, 나 정도 위치까지 올라오면 그런 허영이나 허례허식 따위엔 관심이 없어져. 내가 하고 다니는 물건들이 얼마짜리든, 그까짓 게 내 입지를 흔들 수는 없거든. 길거리에서 이런 걸 팔고 있었다고 해도 난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거야, 그건 솔직히 인정할게. 하지만 이건 네가 준 거잖아. 그것만으로도 나한테는 특별한 의미가 있는 물건이야.”말을 마친 박진성은 민여진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두 사람의 가슴 속에서 뜨거운 감정이 피어올라 시끄럽게 요동쳤다. 민여진은 두 주먹을 힘껏 쥐었다. 마음속에서 피어오르는 따뜻한 감정에 긴장됐던 몸에서도 서서히 힘이 풀려갔다....그 후 며칠 동안 민여진은 레스토랑 일에 점점 적응해서 이제는 함께 일하는 동료들과 간단한 대화까지 나눌 정도가 되었다. 그러던 오늘, 화장실에서 나오던 민여진의 손을 청소 아주머니가 덥석 잡았다.“여진아, 너 나이도 있는데 결혼 생각은 없어? 나중에 더 나이 들면 의지할 사람도 없을 텐데?”민여진은 당혹스러운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이미 결혼했다고 말할 수도 없어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저는 괜찮아요.”“뭐가 괜찮아? 솔직히 너 같은 애는 서둘러야 해. 젊을 때 얼른 좋은 사람 만나서 결혼해야지. 나이 들고 찾을 거야?”아주머니는 더 돌려 말하지 않고 곧장 본론부터 얘기했다.“우리 옆집에 아들이 하나 있거든. 서른 넘었는데 너보다 일곱 살이었나, 여덟 살이었나 조금 더 많을 거야. 그래도 사람은 착해. 자동차 공장에서 정비공으로 일하고 있는데 애가 참 성실하고 좋아. 외모는 조금 별로긴 한데, 넌 어차피 앞도 안 보이잖아. 어떻게, 오늘 저녁에
이제는 레스토랑에 오는 손님들도 다 민여진을 보러 오는 것 같았다.“아, 그분이요? 지금 소개팅 중이세요.”메뉴판을 계속 넘기던 박진성의 손이 멈췄다. 그의 눈이 가늘게 좁혀지더니 눈동자가 까맣게 가라앉았다.“소개팅이요?”“네.”웨이터가 몰래 웃으며 말했다.“피아노는 잘 쳐도, 못생긴 데다가 장님이잖아요. 솔직히 남자들이 좋아할 만한 스타일은 아니죠. 그래서 저희 청소 아주머니가 좋은 마음으로 소개팅 주선해 주셨어요. 남자가 7~8살 정도 더 많다고는 하지만, 상대 가려 만날 처지는 아니잖아요.”박진성의 서늘한 시선에 웨이터는 순간적으로 온몸의 털이 쭈뼛 서버리는 것 같은 오싹함을 느꼈다.“왜 그러세요, 손님?”“그 여자 지금 어디 있어요?”잠시 망설이던 웨이터는 급히 손가락으로 레스토랑 한쪽 구석을 가리켰다.“저쪽이요.”민여진과 남자는 시야에서 벗어난 사각지대에 앉아 있었다. 마음먹고 안 찾으면 잘 보이지도 않는 곳이었다. 박진성의 시선은 곧장 남자에게로 옮겨졌다.정말이지 볼품없다는 말이 완벽하게 들어맞는 사람이었다.아무리 민여진이 시각장애인이라고 해도 사람 고를 줄은 알 터였다. 굳이 눈길을 줄 가치조차 없는 남자에 박진성이 안심했다.그러던 그때, 남자와 얘기를 주고받던 민여진이 환하게 웃었다. 남자의 어떠한 말에 몸까지 떨며 해맑은 미소를 지었다. 앞이 보이지 않아 눈동자의 초점이 없었지만 그녀의 미소 만큼은 한 치의 거짓도 없이 진심으로 행복해 보였다.박진성의 미간이 힘껏 찌푸려졌다. 지금의 그 역시도 민여진을 저렇게 웃게 해줄 수 없었다....“아주머니께서 이런 성격이셨군요. 확실히 화끈하시긴 해요.”민여진은 물을 한 모금 마신 후 말을 이어나갔다.“아직 결혼 생각 없다고 여러 번 말씀드렸는데, 이렇게 집요하게 나오실 줄은 저도 몰랐어요. 아예 오늘 바로 불러내실 줄은 더더욱 몰랐고요.”“저도 마찬가지예요.”남자가 어깨를 으쓱였다.“휴대폰 확인해 보니까 전화가 10통이나 와 있더라고요. 그래도 뭐, 어느 정도
“바쁘시면 저는 먼저 가 볼게요. 실례가 안 된다면 여진 씨 연락처라도 알 수 있을까요? 나중에 혹시라도 제가 필요할 수도 있으니까... 도울 일 있으면 제가...”주먹을 꽉 쥔 박진성의 손등에 핏줄이 울퉁불퉁 불거졌다. 보아하니 남자는 아직도 포기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계속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가까스로 억눌러내며 차갑게 민여진을 노려보았다.민여진은 숨을 깊게 한 번 들이마셨다. 점점 커지는 압박감에 호흡을 가다듬고는 애써 웃으며 대답했다.“죄송하지만, 저는 그럴 생각이 없어서요. 이만 실례하겠습니다.”진호영은 눈에 띄게 실망한 기색을 내비쳤지만 크게 개의치는 않는 것 같았다.“제가 나이가 좀 많죠? 여진 씨가 저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것도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럼 저도 가 볼게요.”진호연은 빠른 걸음으로 성큼성큼 걸어 레스토랑을 나섰다. 아마도 자존심에 타격을 입은 모양이었다.민여진의 표정이 점점 복잡미묘해졌다. 박진성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이렇게까지 직설적으로 얘기해야 한다는 게 씁쓸했다.“왜? 미련 남았어?”박진성은 어딘가 착잡해 보이는 민여진의 표정을 보는 순간 다시 화가 치밀어 올랐다.“민여진, 네가 아무리 눈이 멀었다고 해도 정도가 있지. 저런 인간 같지도 않은 놈을 상대로 흔들려? 넌 대체 어디까지 내려가려는 거야?”민여진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박진성 씨, 제발 다른 사람 외모 갖고 비하 좀 하지 마!”“외모 비하라고?”박진성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리고는 억센 손길로 민여진의 어깨를 꽉 움켜잡았다.“만난 지 몇 시간이나 됐다고 벌써 저 인간부터 감싸고 돌아? 네가 일하러 온 거지, 남자 꼬시러 온 거야?”민여진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박진성의 막말은 언제나 민여진에게만 거침없이 쏟아졌다.익숙해질 때가 됐지만 저절로 붉어지는 눈시울은 어쩔 수 없었다. 그때, 상황을 지켜보던 누군가가 나타나 애써 분위기를 풀어보려 애썼다.박진성이 손아귀에 힘을 주며 무어라 더
저택 마당에 도착하자 서원은 민여진을 문 앞까지 데려다주고는 다시 차를 끌고 떠났다.민여진은 소파가 있는 쪽으로 손을 뻗었다. 그 순간, 2층에서 불이 켜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2층을 쳐다보았다.그 위에 있는 인물이 누군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곧이어, 엄청난 압박감이 밀려와 민여진의 온몸을 짓누르듯 감쌌다.“올라와.”박진성의 목소리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그는 이미 방문을 열어둔 채 민여진을 기다리고 있었다. 민여진의 몸이 위기를 감지한 듯 순간적으로 뻣뻣하게 굳었다. 하지만 피할 수는 없었다.방에 도착하자마자 민여진은 박진성에 의해 속절없이 침대 위로 내던져졌다. 곧이어 남자가 그녀의 몸 위 올라왔다. 싸늘한 눈빛에는 서슬 퍼런 분노가 서려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보였다.“민여진, 내가 그동안 너한테 너무 잘해줬나 봐. 이제는 대놓고 기어오르네?”박진성이 차갑게 쏘아붙였다. 민여진의 웃는 얼굴이 계속 떠올라 화가 가라앉지 않았다.“난 이미 너한테 충분한 자유를 줬고, 네가 뭘 하든 최대한 참아준 것 같은데. 그 보답이 고작 이거야? 만난 지 30분 동안 된 남자나 감싸고 돌아? 넌 도대체 어디까지 바닥을 칠 생각이야? 방현수는 그렇다 쳐도, 저 남자는 도대체 뭔데?”박진성의 말이 점점 심해졌다.“네 얼굴 그렇게 되니까, 어떻게든 매력발산 해보고 싶었어? 그래서 기를 쓰고 남자들 꼬시려고 드는 거야?”그 순간, 민여진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박진성의 조롱으로 생긴 수치심과 불신이 뒤엉켜 가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너 미쳤어?”그녀는 박진성을 힘껏 밀쳐냈다. 너무 화가 나 폐까지 아팠다.“난 얼굴을 망친 거지, 적어도 일하는 곳에서 남자 꼬시는 미친년은 아니야! 네가 더럽다고 나까지 더럽게 생각하지 마. 모든 사람들이 다 너처럼 추악한 건 아니야!”“내가 더러워?”박진성이 비웃음을 터뜨렸다. 기어오르는 걸 그냥 오랫동안 모른 척해줬더니 이제는 이빨까지 세우고 있었다.“좋아. 진짜 더러운 게 뭔지 제대로 보여
어떻게 대답할지 몰라 망설이던 민여진은 고개를 숙인 채 잠시 침묵하더니 입을 열었다.“현준 오빠, 임재윤은 좋은 사람이에요. 저는 그를 한번 믿어보고 싶어요. 임재윤이 저를 해치지만 않는다면, 진짜 신분이 뭐든 상관없어요.”조현준은 할 말을 잃은 듯 한참 후에야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여진아, 이 결정을 후회하지 않길 바란다.”‘이 결정을 왜 후회할 거로 생각하는 거지?’민여진은 이유 모를 불안감에 사로잡혔지만, 조현준은 이미 전화를 끊은 후였다.그녀는 이 복잡한 감정이 조현준의 배려를 거절한 데서 오는 미안함 때문이라고 생각했다.침대에 앉아 멍하니 있던 그 순간, 문밖에서 갑작스러운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민여진은 긴장한 목소리로 물었다.“누구세요?”“민여진 씨, 저예요!”‘진시우?’흥분한 그의 목소리에 민여진은 당황하며 문을 열었다.“무슨 일이에요?”“임재윤한테 문제가 생겼대요. 지금 수술실로 들어갔다니까 우리 빨리 병원으로 가요.”민여진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앞을 볼 수 있는 상황이었어도 눈앞이 아득해질 것만 같았다. 그녀는 허둥지둥 탁자 위에 걸쳐둔 코트를 더듬어 입으며 물었다.“우리가 병원에서 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괜찮았잖아요. 갑자기 어떻게 된 거예요?”평소 유머러스하던 진시우의 목소리에도 긴장감에 섞여 있었다.“저도 자세한 건 모르겠어요. 하지만 임재윤의 병은 원래 갑작스러운 상황이 올 수도 있는 병이었어요. 병원에서는 지금 수술 중이라고만 알려줘서 일단 빨리 가봐야 할 것 같아요.”걸어서 갈 여유가 없던 두 사람은 즉시 택시를 타고 병원으로 향했다. 응급실 복도에 도착하자, 임재윤은 아직 수술 중이었다.진시우는 민여진을 자리에 앉히고 의사를 찾아갔다. 막막함과 불안함에 민여진은 도저히 앉아 있을 수가 없어 수술실 앞에 꼼짝하지 않고 서 있었다.민여진은 아까까지만 해도 아무 이상 없어 보이던 사람이 왜 갑자기 위중한 상태로 수술실까지 들어간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순간 손끝에서 차가움이 느껴지더니
민여진도 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저도 같이 가도 될까요? 배가 조금 고파서 호텔 레스토랑에서 뭐라도 먹어야겠어요.”진시우는 거절하지 않았다. 하지만 민여진이 문 앞까지 걸어갔을 때, 뒤에서 휴대전화 소리가 전해졌다.“여진아, 얘기 좀 할까?”민여진은 깜짝 놀란 듯 눈을 깜빡였다.“무슨 얘기?”임재윤은 눈썹을 찌푸리며 휴대전화를 두드렸다.“네가 알고 싶은 것들에 대해서.”“알고 싶은 게 없는데?”민여진은 자기 말이 너무 차갑게 들릴 것 같아 이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재윤아, 뭐 좀 먹으러 가는 거야. 곧 돌아올게. 그때 다시 얘기하자. 알았지?”임재윤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민여진은 진시우와 함께 병실을 나섰다.진시우는 무슨 재미있는 장면이라도 본 듯 미묘한 미소를 지었다.“내가 없는 사이에 분명히 무슨 일이 있었네요.”“별일 아니었어요. 그냥 대화를 조금 나눈 것뿐이에요.”민여진은 대수롭지 않게 넘기며 말했다.“어서 가죠.”호텔 방으로 돌아오자, 서비스로 음식이 직접 배달되어 민여진은 레스토랑까지 내려갈 필요도 없었다. 진시우가 미리 말해둔 모양이었다.그녀는 조금씩 음식을 먹으며 생각에 잠겼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전화벨이 여러 번 울린 후였다. 급히 받아 들자, 조현준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바빠? 왜 이렇게 전화를 늦게 받아?”“아니요. 휴대전화를 멀리 두고 다른 테이블에서 밥을 먹고 있었어요.”“그랬구나.”조현준은 잠시 침묵하더니 갑자기 화제를 돌렸다.“여진아, 그 일은 확인했어?”“무슨 일이요?”잠시 멈칫하던 민여진은 이내 무슨 일인지 알아차리고 말을 이었다. 임재윤의 신분에 관한 이야기였다.“네. 확인했어요. 임재윤은 원래 진씨 가문 운전기사의 아들이었대요. 선천성 심장병에 말도 못 하니까 자주 외출하지 못했던 거고, 나중에 치료를 위해 아버지와 함께 독엔에 갔대요. 아마 그래서 현준 오빠가 못 찾았나 봐요.”조현준은 긴 침묵 끝에 다시 물었다.“너는 그 말을 얼마나 믿어?”모든 걸
임재윤이 직접 말하지 않아도 민여진은 느낄 수 있었다. 평소 감정 기복이 거의 없던 임재윤이 여자 친구라는 말이 나오기 바쁘게 마치 다른 사람처럼 분위가 달라졌다.그 여자는 임재윤의 기분을 좌우할 수 있을 정도로 그의 마음속에 중요한 존재인 것 같았다.민여진이 화제를 바꾸려는데 임재윤이 다시 물었다.“정말 궁금해?”“아니.”민여진은 얼른 부인했다. 처음엔 그냥 할 말이 없어서 꺼냈던 말이었고 더불어 임재윤이 왜 자신에게 그런 감정을 품게 되었는지 알고 싶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의 반응에 민여진은 자신이 선을 넘었음을 알아차렸다.임재윤은 민여진한테 다가가려다 멈춰서더니 고개를 숙이고 타자를 했다.“미안해. 많이 놀랐어? 나는 그냥 과거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아서...”“괜찮아.”민여진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남이 자신의 소중한 사람을 함부로 꺼내는 걸 싫어하는 건 당연한 거야. 오히려 선은 내가 넘었으니까 사과해도 내가 해야지.”임재윤은 눈살을 찌푸렸다. 글을 쓰고 지우기를 반복하더니, 오랜 침묵 끝에 타자했다.“넌 남이 아니야.”민여진은 미소를 지었다.“그래. 알았어. 너무 신경 쓰지 마. 누구나 털어놓기 싫은 비밀과 건드리면 안 되는 선이 있는 법이니까.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돼. 네 선을 알았으니까 두 번 다시 넘지 않을게.”그녀는 급히 소파에서 일어났다.“배 안고파? 간호사에게 음식을 언제 가져오는지 물어볼게. 금방 돌아올 테니까 잠깐만 있어.”병실 문을 나서는 민여진의 표정은 왠지 어두워 보였다. 정확한 이유가 뭔지도 모르게 마음이 불편했고 복잡했다.어쩌면 처음 느껴보는 임재윤의 냉담함 때문일 수도 있고, 그 여자가 임재윤의 아픔이었다는 진시우의 말 때문일 수도 있었다.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 여자는 임재윤의 마음속에 중요한 사람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그럼... 나는 뭐지?’난데없이 튀어나온 생각에 민여진은 스스로에게 깜짝 놀라더니 마음을 다잡으며 중얼
임재윤은 민여진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잠시 침묵하다가 다시 물었다.“그냥 내가 아프기 때문이야? 만약 너 때문에 아픈 게 아니었다면, 아예 나를 보러 오지도 않았을 거야?”민여진이 대답하기도 전에 그는 다시 조용히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 얼굴은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다.“여진아, 인제 그만 돌아가. 진시우더러 돌아갈 차를 준비해달라고 할게. 지금쯤이면 안진 마을까지 가는 길도 뚫렸을 거야. 이모 집에서 편하게 지내. 병원에는 그만 오고.”“싫어.”민여진은 생각할 여유도 없이 말이 먼저 튀어 나갔다. 임재윤이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자, 민여진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말을 이었다.“혼자 병실에 있으면 심심할 거 아니야. 게다가 수술 후 회복 기간도 긴데, 내가 옆에서 말동무가 되어주면 좋잖아.”민여진의 말에 임재윤은 천천히 타자했다.“괜찮아. 나는 늘 혼자였어. 이젠 익숙해.”늘 혼자였다는 임재윤의 말에 민여진은 문득 자신의 과거가 떠올랐다.감옥에서, 박진성의 별장에서, 도망치던 차 안에서조차 그녀는 언제나 혼자였다.고독을 즐기려고 노력했지만 항상 두려웠고, 언제라도 사라질지 모를 관심에 더욱 불안해했다.‘임재윤도 같은 마음이었을까? 고백할 때 우리가 같은 종류의 사람이라고 했던 이유가 이것 때문이었을까?’“수술 끝날 때까지 기다릴게. 지금 돌아가도 신경 쓰여서 편하게 못 있어. 어쨌든 네가 아픈 건 나와 연관되어 있잖아. 무엇보다 지금은 네 곁을 지켜줄 사람이 필요하기도 하고.”민여진을 빤히 응시하던 임재윤은 그녀의 걱정과 고집에 표정이 차츰 누그러졌다.“여진아, 너 이렇게 착하면 누군가한테 이용만 당할 거야.”민여진이 웃으며 되물었다.“그럼 넌 나를 이용할 거야?”임재윤은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답했다.“그럴 수도 있지.”예상치 못한 대답에 멈칫하던 민여진은 마음 한구석이 아려왔다. 그때 휴대전화의 기계음이 다시 울려 퍼졌다.“나는 지금도 널 이용하고 있잖아. 내가 아픈 건 순전히 내 문제인데도 네 착한 마음을
‘마음속에 아직도 박진성이 있냐고?’민여진은 단지 자신이 시각장애인이라는 사실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박진성을 산 채로 가죽을 벗기고 뼈를 발라내고 싶었다.진시우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침묵이 흐르고 분위기가 편안해지자 비로소 웃으며 말을 꺼냈다.“다행이네요. 난 임재윤이 마음에 다른 남자가 있는 여자와 함께하는 걸 원하지 않아요. 여진 씨가 박진성과 아무 관계도 없다면, 임재윤과 잘 시작해 봐요.”다시 임재윤의 이름이 나오자, 민여진은 표정이 달라졌다.“저와 임재윤은 아무런 사이도 아니에요.”“어떤 사이인지 여진 씨가 저보다 더 잘 알겠죠.”진시우는 잠시 멈추었다가 말을 이었다.“여진 씨가 임재윤의 신분에 대해 우려하고 있는 것도 알아요. 이해해요. 박진성 일 이후로 경계심을 갖는 건 당연하죠. 하지만 임재윤과 박진성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는 걸 여진 씨도 잘 알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임재윤은 절대 여진 씨를 다치게 하지 않아요. 임재윤이 이렇게까지 하는데 민여진 씨가 아직도 경계를 못 풀겠다면 대체 어떻게 증명해야 할까요? 그렇다고 마음을 꺼내 보여줄 수도 없는 일인데.”그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한 뒤, 민여진을 위해 마스크와 모자를 사러 갔다.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던 민여진은 진시우의 말이 계속 맴돌아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임재윤과 박진성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는 걸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박진성은 차갑고 독단적이며, 항상 자신을 중심으로 생각하며 타인을 해치는 데 거리낌이 없는 사람이었다. 반면 임재윤은 부드럽고 세심한 사람이었다. 그는 모든 방면에서 민여진을 먼저 배려해 줬고, 아픈 몸으로도 민여진이 추울까 옷까지 벗어주는 사람이었다.성향이 이렇게나 상반된 두 사람인데, 왜 민여진은 자꾸만 임재윤이 박진성이라는 착각을 하고 의심하는 건지 본인조차 이해되지 않았다.‘나 왜 이러지? 박진성이 같은 병원에 있다는 말만 듣고 이렇게 의심하다니.’민여진은 머리가 아파 눈을 질끈 감았다. 이때 물건을 사
진시우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다.“민여진 씨를 위해 싫어하는 걸 참고 먹다니, 정말 진심으로 좋아하는 모양이네요.”예전이었다면 진시우의 말을 그저 농담으로 넘길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당황스럽기만 했다. 민여진은 한참 지나서야 정신을 차리고 화제를 돌렸다.“진시우 씨, 임재윤하고 어릴 적부터 함께 지냈죠?”“네? 그렇다고도 할 수 없어요.”진시우는 과거를 회상하며 말했다.“재윤이가 한동안 독엔에 가 있어서 떨어져 지내다가 나중에야 다시 연락이 닿은 거예요. 왜요?”“궁금해서요. 임재윤 주변에는 여자가 별로 없었나요? 아니면...”아니면 어떻게 나 같은 사람에게 마음을 줄 수 있겠냐는 뜻이었다.진시우는 웃으며 말했다.“오해하고 있네요. 임재윤 주변에는 여자가 많았을 뿐만 아니라 임재윤을 좋아하는 여자도 적지 않았어요. 요즘 여자들은 차가운 이미지를 가진 남자를 좋아하잖아요. 임재윤은 말이 없으니까 딱 그런 이미지였고 성격도 세심하기까지 해서 더 인기가 많았죠. 예전에 사귀었던 여자 친구는...”진시우는 이 주제가 적절하지 않음을 깨달은 듯 급하게 화제를 바꾸었다.“어쨌든 외로워서 민여진 씨에게 관심을 가진 건 아니에요. 임재윤은 진심으로 민여진 씨를 좋아하는 거예요.”하지만 민여진은 다른 말이 더 궁금했다.“임재윤에게 여자 친구가 있었어요?”“네. 아주 오래전 일이지만요.”“그 여자는 어떤 사람이었어요?”진시우는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여진 씨, 제가 이 질문에 꼭 대답해야 하나요? 궁금하면 임재윤에게 직접 물어보는 게 어때요? 친구의 아픈 기억을 꺼내고 싶지 않아서요.”‘아픈 기억? 임재윤의 전 여자 친구는 그에게 아픔으로 남은 건가?’한동안 생각에 잠겨있던 민여진은 그 안에 수많은 이야기가 숨겨져 있음을 깨달았다.식사를 마치고 민여진은 진시우와 함께 병원으로 향했다.길을 가던 중, 민여진은 어제 박진성을 우연히 마주친 일이 떠올라 걸음을 멈췄다.“진시우 씨, 돈을 좀 빌려주실래요? 모자랑 마스크를 사려고요.
민여진의 얼굴을 본 문채연은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여기 왜 나타난 거지? 누구 때문에 이 병원까지 온 거야?’답은 너무 뻔했다. 이제 겨우 박진성과의 관계가 돈독해지고 있는 시점에 민여진이 나타나자, 화가 치밀어 오른 문채연은 이를 악물었다.‘쓰레기 같은 년! 죽은 척 도망쳐놓고 이제 와서 후회라도 하는 거야? 다시 박진성 앞에 나타나서 그 사람 마음을 흔들어 놓을 생각이라면 꿈 깨! 일 초도 못 나타나게 할 거니까.’문채연의 눈에는 독기가 서렸다....민여진은 침대에 누웠지만 머릿속을 맴도는 의문에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임재윤이 어떻게 나를 좋아할 수 있지? 내가 뭐라고? 말을 못 하는 그와 같이 나도 앞을 못 보는 장애인이라서? 그런 거라면 너무 경솔한 결정 아닌가? 그리고 시각장애인도 많이 봤을 텐데 왜 하필...’어찌 되었든 민여진은 갑작스러운 그의 마음이 선뜻 받아들여 지지가 않았다. 무엇보다 조현준도 그렇고 이제 민여진은 누구한테 마음을 줄 용기가 없었다.박진성이라는 사람 때문에 받았던 그 수많은 상처는 이미 그녀의 마음을 무너지게 했다.민여진은 억지로 눈을 감고 겨우 잠에 들었지만, 악몽을 꾸었다.병원에서 박진성을 마주치는 꿈이었다. 박진성은 그녀의 저항을 무시하고 사람들을 시켜 그녀를 묶은 채 양성으로 끌고 갔다.잠에서 깬 민여진은 온몸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박진성의 강압적인 태도와 차가운 얼굴이 오랫동안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정신을 차리자, 초인종 소리가 들려왔다.민여진이 문을 열자, 이번에는 직원이 아니라 진시우였다. 그는 웃으며 물었다.“민여진 씨, 혹시 제가 휴식을 방해한 건 아니죠?”“아니요. 방금 막 일어났는데, 마침 잘 왔어요.”“다행이네요. 같이 식사하러 갈래요? 병원도 가야 하고. 그런데 임재윤은 오늘 이상하게 문자를 여러 번 보내네요. 민여진 씨 상태를 계속 물어보던데, 혹시 싸우셨어요?”싸운 건 아니지만, 그것보다 더 어색한 상황이었다. 민여진은 설명하기 어려워 웃으며
임재윤의 말에 민여진은 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듯 입을 벌린 채 멍하니 서 있었다.“뭐라고?”잘못 들은 줄 알고 되물었지만, 임재윤은 단호하게 대답했다.“너를 좋아해. 첫눈에 반했어.”임재윤은 애정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손가락을 움직였다.“사실 병이 발작하지 않았다면 엊그제쯤에 이미 말했을 거야. 그때 너랑 만나자고 약속했던 이유가 널 좋아한다고 고백할 생각이었거든.”“나를 왜?”민여진은 머리가 멍해졌다.‘임재윤이 나를 좋아한다고? 어떻게? 이게 말이 돼?’“왜라니?”임재윤은 담담한 표정으로 반문했다.“너를 처음 본 순간부터 너여야만 한다는 느낌이 들었어. 이건 지난 20여 년 동안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감정이야. 아마 이런 걸 첫눈에 반했다고 하겠지?”민여진은 주체할 수 없이 빨리 뛰는 심장에 호흡이 거칠어졌다.‘임재윤이 나한테 첫눈에 반했다고? 너무 터무니없는 말이잖아.’“이런 내 모습에 반했다고? 너 같은 조건이면 더 좋은 여자를 만날 수도 있잖아.”“외모만으로 첫눈에 반했다면, 그건 첫눈에 반했다는 말을 모욕하는 거야.”임재윤은 진지한 표정으로 타자를 이었다.“널 처음 본 순간 그런 느낌이 들었어. 어쩌면 우린 같은 종류의 사람이겠구나. 교회에서 마주쳤을 때부터 줄곧 너를 지켜봤거든. 주변 시선 따위 신경 쓰지 않는 네 모습이 좋았고 그럼에도 반짝반짝 빛나는 네가 예뻐 보였어. 그러다 보니 어느새 내 시선은 온통 너한테 가 있더라. 여진아, 만약 네가 앞이 안 보이고 내가 말을 못하는 게 하늘이 정해준 거라면, 하늘은 아마도 나를 네 눈이 되게 하고 너를 내 목소리가 되게 하려고 그랬던 게 아닐까? 우린 아마 천생연분일지도 몰라.”차가운 기계음이 내뱉은 그 말은 왠지 모르게 뜨겁게 전해져 민여진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그녀는 한참을 멍하니 있다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임재윤, 농담하지 마.”임재윤은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민여진이 반응하기도 전에 그녀 앞에 다가갔다. 뜨거운 그의 입술이 그녀의 얼굴
“넌 안 피곤해?”“아까 푹 쉬어서 괜찮아.”임재윤은 무언가 말하려다 멈추고는 간단히 알겠다고 답한 뒤 침대에 누웠다.이어서 민여진은 불을 껐고 깊은 밤이 되자, 병실은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민여진은 임재윤의 호흡이 평온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가 깊이 잠든 걸 확인하고 소파에서 일어나 침대 쪽으로 다가갔다.방 안은 캄캄했지만, 그녀에게는 평소와 다를 바 없었던지라 호흡소리만으로도 임재윤의 위치를 정확히 알 수 있었다.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정신을 가다듬은 민여진은 임재윤한테 다가가 조용히 손을 뻗어 손끝으로 천천히 그의 눈썹과 눈을 쓰다듬었다.그녀는 조금씩 조금씩 조심스럽게 그의 얼굴을 만져봤다. 넓은 이마, 높고 곧은 코.민여진이 눈을 뜬 채 손가락을 입술 근처까지 가져가려던 찰나 임재윤이 갑자기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어둠 속에서 민여진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임재윤의 시선이 느껴졌다.손에 힘을 주던 임재윤은 민여진임을 알아차리고는 이내 힘을 풀더니 손가락으로 그녀의 손바닥에 글자를 썼다.[뭐 하는 거야?]민여진은 호흡을 가다듬었지만 결국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임재윤, 너 도대체 누구야?”그녀는 물어보고 싶은 게 너무 많았다.임재윤은 잠시 멈칫하다가 이내 휴대전화를 꺼내 물었다.“여진아, 그게 지금 무슨 말이야?”민여진은 더 이상 속아 넘어가지 않으려는 듯 마음을 다잡으며 차분하게 말했다.“현준 오빠가 지금 동진에 있어. 오빠한테 너에 대해서 조사를 좀 해달라고 부탁했었거든. 그런데 동진에는 임재윤이라는 사람이 없대. 그러니까 너 대체 누구냐고.”임재윤은 한참 침묵하다 다시 타자를 했다.“조현준의 말은 믿으면서 나는 안 믿는구나.”“너를 어떻게 믿어?”민여진은 혼란스러웠다.“임재윤, 난 너에 대해 아는 게 아무것도 없어. 신분이 뭔지, 집은 어디인지, 가족은 몇 명인지 심지어 어떻게 생겼는지조차 몰라. 무엇보다 제일 중요한 건, 나 같은 여자한테 왜 이렇게 잘해주는 건지 이해할 수 없다는 거야. 다른